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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
내가 태어나던 날, 아버지는 어머니를 버렸다. 아버지가 남겨놓은 편지를 어머니는 고이 간직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읽어보면 대략적으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식었다는 내용이었다. 아버지는 짧은 머리를 하고 군에 들어갔다. 어머니는 강원도 어디라고 하는 곳으로 아버지를 찾아 면회를 갔었는데 아버지는 식은 김밥을 먹으며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하였다.
어머니는 가판에서 생선을 팔며 밤이면 집에 들어와 술을 마시며 숙제를 하고 있는 나에게 아버지 이야기를 하였다. 잠든 어머니의 생선비린내 나는 몸에 이불을 덮은 후 나는 술병에 남아있는 독한 소주를 어머니의 잔에 따라 마셔보곤 하였다. 나의 일기장에는 아버지나 어머니의 이야기는 없었다. 거의 대부분이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거짓말 천지였다.
나는 중학교시절 학교 뒷산에서 패싸움을 하다 깨어진 맥주병 주둥이를 들고 한 녀석의 얼굴을 그었다. 그 일로 나는 퇴학생이 되었고 어머니의 생선 파는 일을 도와주며 지냈다. 하루는 한 늙은 할아버지가 생태를 이리저리 뒤적이며 고르다 생트집을 잡자 나도 모르게 울화가 치밀어 올라 할아버지를 질퍽거리는 시장 길바닥에 밀어버렸다. 성난 할아버지는 주위 사람들을 의식한 듯 나를 가리키며 못된 놈, 애비 없는 녀석이라고 소리쳤다. 국수 가게에서 늦은 점심을 먹던 어머니가 나타나 할아버지에게 굽실거리며 죄송하다고 말하며 나에게 얼른 사과드리라고 호통을 쳤다. 나는 그럴 수 없다며 우기다 그 자리를 피해 뛰어 달아났는데 그 뒤로 집에 들어가는 날이 점점 줄어들었다. 늦은 밤 방문을 열고 방에 들어가면 취한 어머니가 밝은 형광등 불빛에 누워 있었다. 어머니는 잠결에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나쁜 놈이라고 중얼거렸다. 어느 날 나는 굳은 결심을 하였고 잠들어 있는 어머니의 허리에 묶여있는 돈 보따리에서 푸른 지폐만을 끄집어내 도망쳐 나왔다. 그날 밤 거리는 몹시 차가웠고 가끔씩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10년이라는 세월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흘러갔다. 나에게 남은 것은 혼다 아니 ‘혼자서도 잘 달린다’는 나만의 별명을 붙여준 125cc급 오토바이와 짜장면 냄새가 물신 풍기는 자그마한 방이 전부였다. 짜장면에 구역질이 날 때도 되었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물리지 않았다. 생선에 질린 것이지 면에 질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새벽 도로를 가끔씩 질주하면서 나의 청춘의 속도를 즐겼다. 질주하면서 나는 나를 잊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내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어머니의 얼굴도 질주하는 바람 속으로 던져버릴 수 있었다. 텅 빈 듯한 새벽 도로는 나의 천국이었다.
어느 날 밤늦도록 동료들과 함께 화투를 치다 거금을 손아귀에 쥘 수 있었던 날이 있었다. 한 달 봉급을 내걸고 치던 판이라 수백이 왔다 갔다 하였다. 나는 개평으로 몇 십 만원을 전갈이나 코브라 문신으로 얼룩진 손아귀들에 던져주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 돈으로 무엇을 할까를 궁리하다 무작정 대형마트에 나갔고 매장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손에 잡히는 것들을 쓸어 담았다. MP3플레이어, PSP게임기, 디지털카메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손에 쥔 것은 제법 비싼 천체망원경이었다. 천체망원경을 산 것은 아주 단순무식한 발상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어머니가 살고 있는 그곳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하나의 생각이 구입을 부추겼다. 천체망원경을 오토바이 뒷좌석에 달고 나타나자 뚱뚱한 동료는 배달을 나가면서 그거 아파트에 사는 아가씨들 훔쳐보려고 산 것이냐며 빈정거렸다. 나는 그날 밤 옥상으로 올라가 천체망원경을 밤하늘이 아닌 남쪽을 향해 망원경을 설치했다. 그날 밤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뿌연 검은 입자들이었다.
동료들의 호기심은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일을 마치고 옥상으로 올라와 담배를 피우며 천체망원경의 배꼽으로 무엇인가를 보아야 한다는 욕구들이 분출되고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남쪽으로 기울어져 있던 기구를 밤하늘을 향해 설치하게 되었고, 이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천체망원경이 담을 수 있는 별들에 관한 잡지를 사보게 되었다. 그러나 아파트, 그 성냥갑 같은 곳에 살고 있는 아가씨들을 볼 수 없다는 것이 들어나자 옥상은 하나둘 자취를 감추고 나만이 남아있게 되었다. 어느 날인가 나는 드디어 달을 정복하게 되었고, 은하수를 바라보며 너무 놀랍고 아름다워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던 날도 있었다. 천체망원경에 디지털카메라를 설치하는 방법을 알게 된 이후로부터는 사진촬영도 병행하게 되었다.
나는 ‘우주의 신비’라는 과학 잡지를 읽으며 신비로움으로 가득 차 있는 우주의 껍질을 한 겹 한 겹 벗겨내며 조금씩 아주 조금씩 우주의 미지 속으로 들어갔다. 오토바이로 질주하며 느낄 수 있었던 천국보다는 더 광대해진 천국이 그곳에 있었다. 나는 아주 희미한 별 하나가 그토록 아름답고 소중하게 여겨지게 되었고 내 오토바이에 로켓을 달아 그곳까지 날아가고 싶어졌다.
나는 그토록 아름다운 것들을 나의 어머니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것들을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 없다는 사실로 안타까워하던 날은 술집에 앉아 소주를 마셨다. 독한 것이 내 속으로 쏟아져 들어가야 나는 비로소 그 지독하게 가라앉지 않던 마음을 지워버릴 수 있었다. 그러다 종종 옆자리에 앉은 술객과 싸움을 하기도 하였고 파출소 의자에 누워있던 나는 동료들의 도움으로 풀려나기도 하였다.
천체망원경으로 바라보는 세계는 나와 어울리지 않았다. 왜 그런 것들을 좋아하게 되고 왜 그런 것들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동료 중 하나는 천체망원경을 없애 버리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좋은 여자를 소개해 줄 테니 준비하고 있으라고 말했다. 나는 며칠 동안 동료의 말대로 천체망원경을 비닐로 덮어 놓은 채 손길 하나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나의 꿈에서 천체망원경으로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오토바이에 올라타고 시동을 걸자 굉음을 내며 오토바이는 나를 싣고 밤하늘로 날아가고 있었다. 나는 너무도 빠른 속도로 지구를 벗어나 달을 지나 수많은 별들 사이를 지나가고 어느 알 수 없는 지점에서 오토바이는 속도를 멈추고 말았다. 오토바이에 앉아있던 나는 오토바이와 분리되고 나는 두둥실 어디론가 흘러가고 나는 우주 미아가 되어 우주유영을 하고 있었다. 나는 어둠 혹은 반짝거리는 별들 사이를 두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나는 무엇인가를 붙잡으려고 손을 이리저리 젓다 눈을 떴다.
천체망원경을 덮어놓은 비닐을 벗겨내고 나는 다시금 밤하늘의 한 별을 바라보기 위해 기구를 조작했다. 북두칠성 그곳 가까이에서 한 별을 발견하고 나는 멈추었다. 나는 그 별이 내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반짝거리다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그 별이 마치 나를 닮은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광활한 우주와 그동안 미루어왔던 대화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너를 닮을 수 없다는 것과 너는 나를 길들일 수 없다는 것과 나와 너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그리고 대화라고 말할 수 없는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몹시 슬퍼졌지만 눈동자에 고인 눈물은 눈 밖으로 흘러내리지 않았다. 딱딱한 배꼽을 통해 바라보고 있던 그 별이 영영 사라져버리지는 않나 하고 나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 별이 나에게 선물한 것처럼 나는 며칠이 지나 아주 어여쁜 여자를 만나게 되었다. 동료가 소개해준 사람으로 그녀는 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나의 오토바이에 태우고 남쪽을 향해 한없이 질주했다. 그러나 어느 지점에선가 경찰차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질주의 방향을 돌려야 했다. 그녀는 몹시 만족스러운 듯 나의 허리를 더욱더 단단히 끌어안았다.
우리는 동거에 들어갔다. 우리라고 말하기엔 이상하지만 나와 그녀는 한 방에서 살게 되었다. 그동안 모아두었던 돈으로 4층 옥탑방 하나를 구할 수 있었다. 천체망원경도 그곳에 설치되었고 밤마다 그녀의 눈에 내 마음에 들어와 있는 세계들을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더욱더 반짝거렸다. 천국이 하나 더 생기게 되었다. 그녀는 만화책 보는 것을 좋아했고 낮에는 아르바이트를 한답시고 집을 비웠다. 그녀는 내가 장만한 잡동사니에 별 관심이 없었다. MP3플레이어나 PSP게임기에 빨갛게 물든 손을 대지 않았다. 밤마다 하늘에 펼쳐진 별들의 생명력 있는 반짝거림에도 점점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날마다 내가 일하고 있는 중국집 가게 옆에 있는 꽃가게에서 붉은 장미 한 송이를 사 그녀에게 선물했다. 그녀는 장미를 벽에 다닥다닥 붙여놓았다. 꽃봉오리가 아래로 향하게 하고는 서서히 말라가게 하였다. 여자는 머리에서 시작하여 바라보는 것보다 발끝에서 바라보는 것이 더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나체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6개월 정도가 흘렀을까. 그녀가 집에 들어오는 날이 점점 뜸해졌다. 그녀가 들어올 것이라고 믿고 밤늦은 시간까지 천체망원경으로 별을 관찰한 적도 있었다. 별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내가 잠든 사이에 그녀가 들어와 나의 몸에 기댄 채 잠들어 있던 적도 있었다. 나는 밥상 앞에서 그녀에게 넌지시 물었다. 나 싫어.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밥알을 씹다, 나 힘들어, 하고 내뱉었다. 그녀는 그 뒤로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천체망원경을 비닐로 덮었다. 그녀의 별이 나의 가슴속에서 금방이라도 꺼져버릴 듯 깜박거렸다.
나는 다시금 오토바이를 타고 새벽 도로를 질주했다. 남쪽을 향해 한없이 질주하다 어디에선가 갑자기 급정거하고는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나는 배달에 몰두했다. 동료가 해야 할 배달까지 나는 자청해 나섰다. 그녀를 소개해 준 동료가 그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 비디오 가게 청년과 동거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지나쳐 버렸다. 그러나 가슴속에 박혀있던 별이 다시금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그녀에 대한 욕정이 불일 듯 일어났다. 나는 그녀가 동거하고 있다는 집을 찾아 나섰다. 그녀는 산동네에 살고 있었다. 계단을 오르고 올라 골목과 골목 사이를 지나 비좁은 공간을 지나 그녀가 살고 있는 집이 나타났다. 나는 처음 그녀를 부르지 않았다. 그 집 앞에서 몇 십분 정도를 기다리고 있었다. 담배도 피워 물었다. 그러다 페인트가 벗겨진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바로 그녀가 외출복 차림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주춤거리다 다시금 철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 그녀는 다 끝났어, 하고 말하면서 걸어 나갔다. 나는 말없이 걷다 어느 계단을 내려오면서 왜, 하고 물어보았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넌 엄마가 없잖아, 하고 말했다. 나는 더 이상 그녀를 따라갈 수 없었다. 그녀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나는 계단에 앉아 담배를 물었다. 산동네에 어둠이 서서히 쌓이고 있었다.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중국집 배달직을 그만둔 것은 10월 어느 날이었다. 오토바이와 MP3플레이어, PSP게임기, 디지털카메라, 천체망원경을 싼 가격에 팔아넘겼다. 푸른 지폐를 노란 봉투에 담아 한쪽 가슴에 집어넣었다. 어머니의 땅은 남쪽임으로 나는 기차에 올라탔고 어머니가 좋아하실 호두과자 한 상자를 기차 안에서 샀다. 기차는 덜커덩거리며 나의 지나온 과거와 현재를 흔들어놓았다. 삶은 계란과 사이다를 먹고 마시며 나는 어머니에게 무엇부터 끄집어내어야 할지를 생각하고 생각했다. 바깥 풍경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풍경이라기보다 내 지나온 기억들이 어수선하게 지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눈을 감고 잠도 청해보았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고 눈을 감은 채 덜컹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무겁게 가라앉은 생각을 붙들고 있었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햇빛은 서서히 그 자체를 잃어가고 있었다. 붉게 물든 황혼 빛이 창에 닿아 물들어가고 있을 때 나는 기차에서 내렸다. 세월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멀리 다가와 있었다. 매표소 앞에서 역원이 나의 기차표를 받으며 작은 구멍 속으로 집어넣었다. 나는 걸어가면서 그 작은 구멍 속으로 사라진 기차표를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었다. 나의 무엇이 그 작은 구멍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 같았다. 역에는 여러 사람들이 있었지만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오후 6시가 지나가고 있었다. 집으로 향하는 길은 아스팔트길로 변해 있었다. 길가에는 가로수들도 서 있었다. 드문드문 가로등도 서 있었다. 나의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나는 역 앞 식당으로 들어갔다. 손님은 별로 없었다. 나이든 아주머니 한분이 내가 앉은 식탁으로 다가왔다. 나는 김치찌개를 주문했다. 한쪽 구석에 놓여있는 신문을 집었다. 신문에는 한국 최초 우주인 탄생을 보도하는 기사와 사진이 실려 있었다. 나는 천체망원경으로 보았던 달의 분화구를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여러 가지 별들을 생각했다. 그러다 넌 엄마가 없잖아, 하는 목소리가 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저녁 7시가 다 되어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당 옆 슈퍼에서 나는 바구니에 담겨있는 과일을 샀다. 한쪽 손에는 호두과자 상자를 한쪽 손에는 과일바구니를 들고서 가로등이 환하게 밝혀있는 길로 들어섰다. 나는 나도 모르게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별이 보고 싶었다. 그러나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집으로 향하는 길인지 아니면 다른 길로 왔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길이라는 그곳에서 그저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나의 발걸음은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가로등이 사라지고 아스팔트길도 사라지고 가로수도 사라지자 이제부터는 시멘트길이 나왔다. 나는 길가에 다닥다닥 달라붙은 집들을 바라보며 옛 기억들을 끄집어내 보았다. 집을 떠나던 그날 밤의 집들과는 다른 집들이었다. 어머니가 장사하시던 시장 길도 여전히 들어났지만 예전처럼 가판은 사라진 것 같았다. 저녁이라서 그런지 상점들은 불만 켜놓은 채 거의 보이지 않는 손님을 무작정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각각의 상점에서 쏟아져 나오는 불빛을 밟으며 집으로 향했다. 제법 써늘한 바람이 간간이 불어왔다.
저만치 집이 보였다. 그리 높지 않은 담벼락 너머로 창문에 불빛이 머물러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담벼락으로 가까이 다가가 안을 훑어보았다. 몇 개 안되는 장독들이 보였고 세숫대야가 놓여있는 곳에는 수도꼭지에서 물방울이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며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었다. 나는 마당으로 들어가 가만히 서 있었다. 어둠속에서 바람들이 서로 어설프게 부딪혔다 이리저리 갈라지고 있었다. 나는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무엇인가를 입 밖으로 끄집어내고 있었다. 어머니. 소리가 작았다. 나는 다시 한 번 불렀다. 어머니. 이번에는 조금 큰 소리였다. 다시 한 번 더 어머니를 불러보려고 하는 사이에 방문이 열렸다. 방문이 열리면서 방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이 어두운 마당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누구세요. 나를 바라보며 말을 건네는 사람은 어머니가 아니었다.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정도인 여자였다. 누구 찾으세요. 여자는 방문 앞 마루로 나와 나를 바라보았다. 눈매가 아름답고 곱상한 여자는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서 있었다. 나는 여자에게 말했다. 김화순 씨를 찾는데. 여자는 주춤거리더니 저의 어머니신데요, 하고 말했다. 여자는 말했다. 지금 어머니는 일 나가셔서 안 들어오셨다고.
불 켜진 방안에 들어가 나는 선물 꾸러미를 한쪽 구석에 놓았다. 그런대로 방안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두 명의 여자가 살림을 꾸려놓은 탓인지 이곳저곳이 여자들 용품으로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어머니 사진이 화장대 거울 구석 모서리에 꽂혀 있었는데 어머니는 빨간 립스틱을 바른 채 웃고 있었다. 여자는 텔레비전을 바라보며 그대로 앉아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연예인들이 가상결혼생활을 보여주고 있었다. 여자는 간간이 웃음소리를 흘러냈다. 나는 벽에 걸린 둥근 시계를 바라보았다. 저녁 8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여자에게 어머니가 어디에서 일하시는지를 물었다. 여자는 역 앞 한 모텔에서 청소부로 일한다고 했다. 오후 1시에 나가셔서 오후 8시까지 일하고 온다고 여자는 덧붙였다. 나는 여자에게 밥 먹었냐고 물었다. 여자는 엄마 오면 먹을 거라면서 곧 오실 거라고 말했다. 나는 호두과자 상자를 집어 종이봉투에서 끄집어냈다. 나는 여자에게 먹어보라고 말하며 호두과자 상자를 열었다. 흰 종이에 곱게 쌓여있는 호두과자 하나를 집어 여자에게 내밀었다. 여자는 제가 먹을게요, 하며 상자 안에 들어있는 호두과자 하나를 집어 들었다. 여자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호두과자를 먹었다. 나는 여자에게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여자는 호두과자를 씹으며 윤소연인데요, 라고 말했다. 윤소연. 나의 아버지가 윤 씨였다. 나는 다시 물었다. 몇 살이냐고. 여자는 열다섯이라고 말했다. 내가 집을 나간 것도 열다섯이었다. 나는 소연이에게 다시 물었다. 너 학교 다니니. 소연이는 그만 두었다고 말했다. 잠시 시간이 흘러갔다. 소연이와 나 사이에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와 보이지 않게 흐르는 시간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그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이상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소연이는 방문을 열며 엄마, 손님 오셨어, 하고 말했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어머니가 방안으로 들어오셨다. 어머니는 나를 보더니 금세 나를 알아보았다. 화기야. 어머니는 나를 껴안으며 어디서 나오는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인생에 있어서 눈물은 과거를 잊게 하고 현재에 더 나은 것들을 품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품안에서 눈물을 흘리며 나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어머니는 나의 과거를 다 잊은 것 같았다.
새벽 그 길고도 짧은 시간동안 어머니는 잠들지 못한 채 눈감은 나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흐느꼈다 침묵했다 하였다. 나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소연이는 어머니 옆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부부간의 사랑은 물 베듯이 갈라놓을 수 없다고 하지만 가족 간의 사랑은 언젠가는 꼭 만나야 하는 운명인 것 같았다. 나는 어머니의 손길을 느끼며 천체망원경으로 보았던 별들을 쓰다듬는 듯한 느낌에 빠져 들어갔다. 어느 순간 나는 그 느낌을 잃었고 어느 새벽에 잠이 들었다.
잠에서 나를 깨운 것은 소연이었다. 소연이는 아저씨라는 호칭을 사용하며 아침 드세요, 라고 말했다. 밥상에 둘러 앉아 있을 때, 어머니는 소연이에게 이제부터 오빠라고 불러야 해, 하며 말했다. 소연이는 쉽게 오빠라는 말을 끄집어내지 못했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소연이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소연이는 어머니가 아닌 다른 여자의 딸이었다.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내려와서는 소연이를 어머니에게 맡겼다고 하였다. 또한 소연이는 임신 중이라는 사실도 알려주었다. 나는 힐끗 소연이의 배를 보았는데 조금 배부른 모습이었다. 어머니는 아이를 지울 것을 소연이에게 말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소연이는 고집을 부리며 아이를 낳겠다고 한다며 어머니는 한 숨을 쉬며 말했다. 소연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낯선 남자에게 말하는 것을 옆에서 들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텔레비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연이는 어제 먹다만 호두과자를 하나씩 하나씩 벗겨서 먹고 있었다. 어머니는 과일바구니에서 사과를 몇 개 깎았다. 파인애플도 여러 조각을 내어 쟁반에 담았다. 어머니와 내가 말하고 있는 사이 소연이는 깎아놓은 과일을 거의 대부분을 씹어 먹었다. 어머니는 사과조각에 포크를 꽂으며 너도 먹어보렴, 하며 나의 입에 들이댔다. 그날 점심을 먹은 뒤 어머니는 일하러 나가섰고, 나와 소연이만 집에 남았다. 나는 잠시 밖에 나가 시장을 다니며 싱싱하고 빨간 사과를 한 보따리 샀다. 추석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시장은 어느새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사과 보따리를 들고 집에 도착해보니 소연이는 마루에 앉아 가을 햇살에 취해 있었다. 귀에는 이어폰을 끼고 어떤 음악을 듣고 있었다. 나는 손에든 사과 보따리를 마루에 내려놓으며 사과 하나를 끄집어냈다. 소연이는 사과를 보자 이어폰을 귀에서 뽑아내며 고마워요, 라고 말했다. 소연이는 방에 들어가 과도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 빨간 사과를 들더니 껍질을 깎아내기 시작했다. 나는 소연이 옆에 앉았다. 햇살은 담벽 구석진 자리까지 파고 들어가 작은 식물과 속삭이고 있었다.
“너 어떻게 할 거야?”
나는 햇살이 어디까지 비추고 있는지 바라보며 말했다. 소연이는 사과 한 조각을 내밀었다. 나는 속살이 들어난 사과를 씹으며 소연이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소연이는 사과 먹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다시금 사과를 깎으려고 소연이가 사과를 들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넌 너무 어려. 내 말 듣는 거니?”
햇살이 장독들 사이 구석진 자리에까지 들어가 있었다.
“이제 그만 고집부리고 이 오빠랑 병원가자. 병원 가서 수술 받으면 다 끝나는 일이야.”
나는 장독들 사이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 사이에 깨어진 유리조각들이 힐끔 보였다.
“오빠가 병원비는 다 치를 거야. 너는 걱정 말고 그냥 따라오면 돼.”
소연이는 여전히 깎은 사과 조각들을 우적우적 씹어 먹고 있었다. 아이를 가지면 식충이 된다는 것이 사실이었다. 나는 소연이의 배를 바라보았다.
나는 소연이를 데리고 시장으로 나갔다. 소연이에게 옷도 사주고 어머니 옷도 장만해 볼 겸 나간 것이었다. 시장은 사람들로 추석을 앞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소연이는 레이스가 달린 원피스와 청바지를 샀다. 청바지는 이제 입을 수 없을 것 같은데 소연이는 그것을 골랐다. 원피스를 입은 소연이의 모습은 다분히 아름다웠다. 열다섯 중학생보다는 나이 들어 보였지만 소녀티는 벗어낼 수 없었다. 어머니 옷으로는 고운빛깔의 가을 옷으로 위아래 한 벌을 샀다. 소연이에게 더 사고 싶은 것이 없는지 물어보자 소연이는 나를 문구점으로 끌고 갔다. 시장터를 나와 도로가에 상점들 사이에서 문구점을 찾아낸 소연이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몇 번 혼자서 왔던 것 같았다. 소연이는 화사한 편지지와 편지봉투를 골랐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려는 것 같았다. 나는 덤으로 여러 가지 색깔의 펜을 사 주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소연이는 기분이 좋은 듯 미소를 잃지 않았다.
소연이는 밥상을 펼치고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방안에 가득 차 있던 햇볕이 점점 희미해지고, 그늘이 그 위를 뒤덮을 때까지 소연이는 몇 통의 편지를 썼다. 소연이는 그 자리에 잠이 들었고, 나는 잠든 소연이를 이불에 눕힌 뒤 부엌에 들어가 저녁식사를 준비했다. 중국집에서 배운 솜씨를 발휘해 돼지고기볶음과 멸치로 조림을 만들었다. 오후 6시가 되자 어둠은 그늘의 껍질을 벗고 만연한 어둠 그 자체로 물들고 있었다. 나는 마당에 나가 굳어진 몸을 풀며 서늘해진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었다. 시장 길은 낮보다 더 눈부신 빛들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에 비해 집으로 들어오는 길목은 어둠만이 웅크리고 있었다. 나는 서늘해진 기운을 마당에 남겨놓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형광등 불빛이 켜지면서 소연이가 잠들어 있는 모습이 들어났다. 소연이의 배는 조금 볼록해져 있었다. 앉아있을 때나 걸어 다닐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너무도 쉽게 들어났다. 나는 방안이 조금 서늘해진 느낌이 들어 기름보일러를 가동시켰다. 나는 한쪽 구석자리에 기댄 채 리모콘으로 텔레비전을 틀었고 음량은 최대한 낮게 줄였다. 텔레비전에서는 동물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갓 나은 생명을 통째로 삼켜버리는 보아 뱀이 나오고 있었다. 나는 텔레비전을 바라보다 밥상에 놓여있는 편지지를 보았다. 편지지에는 글씨들이 써져 있었는데 편지봉투는 흰 공백 그대로였다. 나는 편지지를 집어 들었다. 제법 예쁜 글씨체였다.
‘사랑하는 병철에게
우리들의 사랑이 낳은 아이가 내 뱃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어. 너 알고 있니? 난 너무나 행복해. 넌 행복하니? 난 행복해. 넌 바보라고 할지 모르지만 난 행복해. 뜻하지 않은 오빠도 생기고 하루아침에 뒤바뀐 엄마도 좋아. 난 행복해. 무지무지무지 무진장 행복해. 난 우리의 사랑을 버릴 수 없어. 우리의 사랑을 죽일 수 없어. 넌 지금 나를 피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나를 이해해줄 거야. 내가 잘 키우고 있을게. 넌 우리의 사랑을 다시 찾으면 돼. 새 오빠는 우리의 아이를 지우라고 하지만 난 결코 지우지 않을 거야. 네가 말했잖아. 사랑은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고. 사랑은 어떠한 아픔도 참아낼 수 있다고.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듣고 있다면 말을 해봐. 나를 사랑한다고. 어서 말을 해줘. 어서 말을 해봐. 이 나쁜 놈아. 미안해. 널 사랑해. 널 사랑해. 아주 많이 아주 많이 사랑해. 네가 주었던 그 장미꽃 기억나니? 은빛 꽃가루가 묻어있던 그 빨간 장미꽃 말이야. 난 지금도 내 보물 1호로 간직하고 있어. 그리고 네가 주었던 가느다란 금반지, 알지? 그런데 사실 그것은 잃어버렸어. 어디에서 잃어버렸는지 모르겠어. 그것이 내 보물 1호가 되어야 했는데. 네가 준 장미꽃은 지금 말라비틀어졌어. 조금만 만져도 모래처럼 가루가 되어 버릴 거야. 이 나쁜 놈아. 빨리 와. 빨리 오란 말이야. 널 사랑한단 말이야. 널 사랑해. 널 사랑해.’
소연이가 뒤척거리는 것을 보며 나는 손에 들고 있던 편지지를 내려놓았다. 오후 7시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만삭이 된 소연이가 진통을 호소하는 바람에 병원에 입원하던 날, 어머니가 쓰러졌다. 소연이가 입원한 병원에 어머니도 입원하게 되었다. 소연이는 사내아이를 낳았다. 어머니는 위암 말기로 큰 병원에 가 재진단을 받아보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소연이를 산후조리원에 입원시킨 후, 어머니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다. 세브란스 병원에 찾아왔지만 입원은 그리 쉽지 않았다. 나는 암전문의를 찾아가 어머니의 진찰기록과 MRI사진 등을 보여주며 통사정했다. 드디어 어머니는 입원을 하게 되었고 수술날짜가 잡혔다. 창밖 정원에는 몹시도 화사한 봄꽃들이 5월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수술은 어머니의 배를 가르고 이리저리 뒤적이다 다시 배를 닫는 수준으로 끝났다. 담당의사는 살 수 있다는 말보다 최선의 다리 위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가급적 천천히 말해 주었다. 담당의사는 매우 현명한 자였다. 죽음의 문 앞에서 인간이 처신할 수 있는 방법들을 그는 알고 있었다.
나의 품에 감추어 두었던 돈은 모두 사라졌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드리고 싶었지만 그것은 모두가 허사가 되어 버렸다. 나는 역 앞 중국집에서 배달직을 하게 되었다. 서울보다는 낮은 봉급이었지만 어머니와 소연이가 가까이 있다는 것이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소연이의 아들을 나의 호적에 올려놓았고 아이의 이름을 윤병철이라고 했다.
나는 열심히 일했다. 소연이는 중학교에 다시 들어가 공부를 하였고 어머니는 가끔씩 시장에 나가 당신이 사고 싶은 것을 사들고 오곤 하였다. 나는 천체망원경을 다시 장만했다. 중고지만 제법 별들이 잘 보였다. 나는 망원경을 바라보다 너무도 밝은 별들을 발견하고는 방안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어머니와 소연이를 불렀다. 어머니와 소연이는 잠옷차림으로 마당에 나왔다.
“어머니, 이게 뭔지 아세요. 북두칠성이에요. 한번 보세요.”
나는 어머니의 눈을 렌즈 가까이 붙이며 어머니의 어깨에 손을 얹혔다.
“이게 뭔고, 그것 참 참말로 반짝거리네.”
한참을 렌즈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어머니는 소연이를 불렀다.
“소연아, 너도 한번 봐라. 참말로 보석처럼 반짝거린다.”
소연이는 어머니 곁으로 달라붙으며 렌즈에 눈을 갔다댔다.
“햐, 그것 참 참말로 반짝거리네. 오빠, 이게 북두칠성이라고?”
나는 먼 밤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머니, 이번 일요일에 우리 백사장으로 소풍 갑시다. 김밥이랑 사이다는 내가 준비 할게요.”
나는 들뜬 마음으로 말했다.
“그러자구나. 소연이도 좋나?”
멀리 북두칠성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 별들은 이미 우리들 가슴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토요일은 매우 바빴다. 밤이 다가오자 더욱더 배달이 많았다. 나는 배달을 하면서 김밥재료들을 하나하나 장만하고 있었다. 밤 8시가 되자 주문이 끝난 것처럼 전화는 조용했다. 그때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고 시장 한 가게에서 탕수육과 짬뽕 두 그릇을 주문했다. 나는 투덜거리며 음식을 만드는 주방장의 빈말들을 들으며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소연이가 잘 보던 연예인들의 가상결혼생활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곳에서 소풍을 준비하며 음식을 만드는 장면이 나왔다. 한 남자 연예인과 한 여자 연예인이 장난스러운 말투와 손놀림으로 김밥을 만들고 있었다. 금방 만든 김밥을 여자의 입에 넣어주는 장면을 보고 있을 때, 주문한 음식이 만들어졌다. 나는 곧 뜨거운 음식들을 오토바이에 싣고 달리기 시작했다. 밤길은 가로등이 드문드문 밝혀있었다. 나는 그 가로등 불빛들을 빠른 속도로 가위질하며 헤드라이트를 밝히고 달려 나갔다. 역 앞에서 큰 도로로 이어진 거리를 지나 시장과 연결된 도로를 향해 달려가는 순간 다른 쪽에서 대형 트럭이 달려오고 있었다. 모든 것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나는 대형 트럭 밑으로 빨려 들어갔고 요란한 굉음들이 소란스럽게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눈을 감은 듯하였다.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면서 나는 모든 것이 멈추어버린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어느 덧 하얀 모래밭 위를 걷고 있었다. 어머니와 소연이가 모래밭 위에 누워있는 병철이를 바라보며 달래듯 웃고 있었다. 어머니의 얼굴은 매우 밝았고 고아보였다. 병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나는 하얀 모래 위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는 온통 하얀 물결로 출렁이고 있었다. 어머니와 소연이의 웃음소리가 파도소리와 함께 뒤섞이며 들리고 있었다. 나는 너무도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