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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 진주, 그리고 개와 돼지
마태복음 6:33~7:6
설교 김종수 목사
먼저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
마태복음 7장 1절에서
“너희가 심판(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심판(비판)하지 말아라”고
예수님은 비판금지의 가르침을 주셨지만
이것이 단순히 비판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복음서 전체,
아니 성서 전체,
예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말씀이
비판 그 자체입니다.
우리 역시 그 비판 앞에 서 있고 그 비판 앞에서 자신을 살핍니다.
예수님의 비판과 하나님의 비판의 눈,
그 척도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고 6장 33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구하라’는 ‘기도하다’가 아니라
‘추구하다’를 뜻하는 헬라어 ‘제테오’(ζητέω)을 쓰고 있습니다.
단지 기도만이 아니라 삶에서
먼저 추구해야 할 것이
‘하나님의 의’라는 말입니다.
이 ‘하나님의 의’로 봐야 내‘들보’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먼저 그 들보를 빼내어야 내 눈이 꿰뚫어 볼 정도로 좋아져 남의 티를 제대로 볼 수 있고 그리고 그 티를 빼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잊지 마십시오.
‘먼저’‘하나님의 의’고,
‘먼저’ ‘내 들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산 넘어 산입니다.
자기 의가 아닌 먼저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며 내 들보를 제거한 다음 잘 보인 남의 티를 빼주기 위한 비판이 순조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비판받을 것을 각오해야 할 수 있는 비판이기 때문입니다.
비판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하였지만 비판을 각오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본문 6절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아라.
그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되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잘 보이는 눈으로 비판을 한다고 할지라도
돼지에게 밟히고
개에게 물릴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예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그래야 오래 길게 산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처럼
요절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나 ‘전도’는 안하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더라도 듣는 그 사람을 기분 좋게 적당히 말씀을 왜곡시켜 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듣기 좋은 이야기만 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왜곡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교회에 다니는
신자는 늘어났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제자는 오히려 줄었습니다.
아니 없을지도 모릅니다.
고린도후서 2장 17절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는, 저 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서 먹고 살아가는
장사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일꾼답게,
진실한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서”라는 말이 나오는데 제가 종종 말한 것입니다만
‘팔다’는 말은 헬라어로
‘카페루오’(καπηλεύω) 라고 하는데
그 본 뜻은 ‘포도주에 물을 타다’는 말입니다.
포도주에 물을 탔으니
질이 떨어지듯이
하나님의 말씀도
사람 입맞에 맞게 변질시켜 전한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은 이런 장사꾼,
저처럼 삯꾼 사도가 아니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장사꾼이 아닙니다.
그래서
엄청 고난을 많이 당했고 끝내 로마 감옥에서 병사했습니다.
다섯 가지 교리의 왜곡
오늘날 말씀의 왜곡은
거의 교리에까지 너무나 오랫동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최근의 신학자들은
5가지 교회의 왜곡된 교리를 말하기도 합니다.
육의 부활,
처녀탄생,
재림,
기적,
성서의 무오입니다.
지난 2,000년 동안 “믿으시기 바랍니다.”하며 믿어온 교리입니다.
죽은 시체가 벌떡 일어나고
처녀가 아이를 낳고,
재림,
휴거처럼 어느 구체적인 날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온다는 것이요,
문자 그대로 사실 그대로 이루어지 는 기적이요, 성서는 오류가 없다는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면 모두 의심의 여지 없이 “아멘!”합니다.
상식 없는 맹목적 믿음이 아직
한국 교회 대다수의 신앙입니다.
5개 교리 모두 문자주의에 걸려 있습니다.
얼마 전에 내년도 구역공과 집필 모임에서 나온 성서 구절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18절에서 21절까지만 읽겠습니다.
“하인으로 있는 여러분,
극히 두려운 마음으로 주인에게 복종하십시오.
선량하고 너그러운 주인에게만 아니라,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그리하십시오.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괴로움을 참으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죄를 짓고 매를 맞으면서 참으면,
그것이 무슨 자랑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면서 참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입니다.
바로 이것을 위하여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여러분이 자기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려고 여러분에게 본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하인’이라는 말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인같이 아니 하인보다 못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가요?
요새 일터에서 하루 3명이 죽어 나갑니다.
안전장치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고는 계속 반복됩니다.
항의하면 잘립니다.
그저 참고 일해야 합니다.
하인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참아야 합니까?
본문에 의하면 참는 것이 참 신앙입니다.
얼마 전에 한 경비원이 아파트 주민의 갑질로 괴롭힘을 당해 끝내 목숨을 버렸습니다.
끝까지 참아야 합니까?
참아야 그리스도인입니까?
가정 폭력에 마약에 폭음에 도박에 끌려다니는 배우자를 참아야 합니까?
주님께서 참았으니 그 본을 따라 참아야 합니까? 사실 노예제도가 있었던 시대에는 백번 양보해서 참는 것이 사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그것만이 사는 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오늘날에도 유효합니까?
만일 이런 아내나 남편이 목회자에게 상담하러 오면 주님이 참았듯이 참으라고 해야 되나요?
아닙니다.
대부분의 상담자들은 이혼이 약이라고 합니다. 하루빨리 헤어지십시오.
참는 것도 어느 정도지요.
너와 나 모두가 살기 위해서라도
참지 말고 저항해야 합니다.
성서의 오류입니다.
시대착오적인 구절입니다.
그러므로 시대에 맞게 재해석해야 합니다.
성서를 잘 적용해야 합니다.
상황에 맞는 구절로 바꾸거나 제대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성서 구절이 있습니다.
얼마 전 새벽기도에서 묵상한 구절입니다.
야고보서 4장 7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복종하고,
악마를 물리치십시오.
그리하면 악마는 달아날 것입니다.”
여기 ‘물리치다’는 말은 헬라어로
‘안씨스테미’(ἀνθίστημι)
이 말은 ‘반대’라는 뜻의‘안티’(ἀντί)와
‘서다’라는 뜻의 ‘스테미’(στημι)가
결합된 말로 ‘저항하다’는 말입니다.
참는 것이 아니라 저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 ‘악마’는
무슨 영적 실체가 아니라
그 헬라어는 ‘디아볼로스’(διάβολος)로
‘비방하다’입니다.
함부로 비방,
모욕,
학대하는 것에 대한 저항을 말합니다.
저항해야 악마가 달아납니다.
저항해야 악마 같은 인간이 도망간다는 것입니다.
결코 참아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이런 성서의 오류를 지적하며
이런 해석을 내리면
지난 2,000년 동안 교회는 이단으로 정죄했고
처형했습니다.
바로 예수님 자신이 이런 처형을 당한 것입니다. 본문 6절은 그런 비판과 고난을 각오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다시 6절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아라.
그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되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저도 지금 태어난 게 다행이지요. 그리고 그것을 보호해주는 좋은 교단에 있어 다행입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나라 교회의 현실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실제로는 우리 교단도 그렇습니다. 그래 주님의 소중한 말씀인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고 합니다. 복음이기도 하고 꼭 필요한 조언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반응은 그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되돌아서서 너희 제자들을 물어 뜯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진주같은 귀한 복음이기도 하고 조언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반응은 그게 아닙니다. 발로 밟아 버린다는 것입니다. 짓밟히고 물어 뜯기는 고난을 당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이 그 귀한 가르침을 전해주었으면서도 돼지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짓밟고 개처럼 예수님을 물은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바로 바리새파 사람들,
대제사장들,
율법학자들입니다.
신앙이 좋다는 사람들입니다.
당시에 의로운 사람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정말 괜찮은 사람들입니다. 주님도 그들을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주님은 마태복음 5장 2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분명히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의로웠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돼지처럼 짓밟았고 개처럼 예수님을 불었습니다. 마침내는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어쩌다가 그들 의로운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이런 못된 짓을 했을까요?
바로 ‘그들의 의’,‘자기 의’ 때문입니다.
자신의 들보는 못보고 남의 티는 보는 그들의 ‘자기 의’입니다. 그들은 율법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잘 지킨 의로운 사람들입니다. 대다수 한국 교회 교인들이 성서를 그렇게 보듯이 문자 그대로 보아 그것으로 사람들을 정죄하고 죽인 것입니다. 이 잘못된 자기 의가 결국 그들로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들만이 아닙니다. 지난 주일 말씀드렸습니다만
남도 못들어가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래서 목사의 죄가 보통 큰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들의 의가 죽고 사는 문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도 죽이고 남도 죽이는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자기 의’로 자신의 들보를 보지 못하고 남의 티만 보며 ‘자기 의’로 남을 정죄하며 불의로 몰아갔던 것입니다. 그래 그런 ‘자기 의’로는 남을 비판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라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나은 의를 요구했던 것입니다.
‘그들 보다 나은 의’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들의‘자기 의’는 율법을 글자 그대로 본 ‘의’이고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영으로 본 ‘의’입니다.
고린도 후서 3장 6절은 이 차이를 분명하게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글자,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문자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자기 의’이고,
영은 하나님의 영, 성령으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의 의’를 먼저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정말 복음인가?
그리고 다시 주의를 환기시킵니다.
‘자기 의’아닌 ‘그들보다 나은 의’인 ‘하나님의 의’로 전하는 ‘거룩한 것’, ‘진주’같이 귀한 비판의 말씀을 주려고 하면 짓밟고 물어 뜯긴다는 것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마태복음 5장 10절 이하의 말씀이 우리의 가슴을 두드립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여기 『‘박해’와 ‘비난’이 여기 7장 6절에서는 ‘짓밟히고 물어뜯기는’ 것으로 달리 말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 ‘박해자들’을 ‘개돼지’ 같은 사람들로 비하하여 말하는 것도 충분히 납득이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비판해 보았자 도리어 너희가 짓밟히고 물어뜯기만 할 터이니,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개들에게 거룩한 것을 준들 무슨 소용이겠으며, 귀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돼지들 앞에 너희가 귀히 여기는 진주들을 던진들 그들이 그걸 귀히 여기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비판할 가치조차 없는 개돼지 같은 사람들에게는, 그 비판 자체가 짓밟히고 물어뜯기는 박해의 빌미가 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산상설교, 강일상, p339)
박해와 비난은 끝내 예수님에게서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귀결됩니다.
그래 다시 스스로 묻게 됩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예수님은 박해와 비난,
죽음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 분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주체가 목사인 나 자신이 아닌가 싶어지기도 합니다.
교인 한 명이라도 더 늘리기 위해,
그의 입맛에 맞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느라 얼마나 포도주에 물을 타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 때 사도 바울은 죽비로 내리칩니다.
추상같은 말씀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8절 이하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나, 또는 하늘에서 온 천사일지라도,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한다면,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전에도 말하였지만, 이제 다시 말합니다. 여러분이 이미 받은 것과 다른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누구이든지, 저주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내가 지금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고 있습니까?
내가 아직도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고 있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복음으로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자신이 사람의 환심이나 사자고 다른 복음을 전하려고 한다면 자신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신천지와 보수 개신교
그럼에도 바울과는 너무나 멀리 가고 있는 우리네 교회와 신앙이 아닌가 싶습니다.
코로나만 전염병이 아닙니다.
적당히 물을 타서 세력이 커져가는 모습도 또 하나의 심각한 염병입니다.
그런데 그 시작이 개신교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신천지는 개신교의 사생아라는 말까지 들립니다. 개신교가 염병의 온상지입니다.
최근 '한국 기독교 형성사'를 펴낸
옥성득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교수는 어느 신문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중국 정부가 우한(武漢)에서 기독교를 탄압하는 바람에 코로나19가 유행했다는 일부 보수 개신교 측의 해석이나,
신천지 성장을 방해하기 위해 마귀가 코로나19로 시험하고 있다는 신천지 이만희 총회장의 주장”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는 것입니다.
옥 교수는 이어 “개신교든 신천지든
근본주의 집단은
적을 만들어 공격하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한다”며
“개신교는 중국이나 공산주의를,
신천지는 마귀를 코로나19와 연결시키는 게
다를 뿐,
배제와 혐오의 언어를 동원해
내부 결속력을 다지는 것에선 똑같다”고 지적했습니다.
일부 보수 대형기독교나 신천지의 의는 거의 비슷한 ‘자기 의’를 갖고 있습니다. 그 의는 불행히도 가장 결정적인 천박함을 이루게 되었는데
둘 다
‘땅끝까지’를 ‘세력화’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천지는 세력을 위해 가정까지 파탄시켰고 거짓을 진실로 위장했습니다.
그리고 보수 대형 기독교는
세력화를 위해 여전히 다른 것들을 혐오하는
기치를 승부수로 띄웠다는 것입니다.
아직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인데 이것은 사실 어떤 의미로는 세력화와는 모순입니다.
그들의 세력화는 단지 양적 세력화가 아니라
계층의 세력화에 가깝습니다.
강남, 여의도가 그 중심입니다.
더욱이 놀란 것은 그 세력화는 신앙과 관계 없습니다.
그렇기에 여전히 예수 안 믿는 박정희, 박근혜, 전두환에 밀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해 12월 12일 군사반란을 축하하는 자리에 교회 성장의 중심에 있던 원로 지도자 김모(극동방송 김장환목사) 목사가 있었습니다.
살인마로 법정 사형이 선고된 전두환을
각하라고 부르며,,,
이것은 당연히 역사적으로 친일 반공과 깊은 뿌리를 나누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가정 파괴범이든 권력지향형이든
세상과는 전혀 소통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 다 거짓입니다.
신천지를 거짓의 사회화라고 한다면
보수 개신교는 거짓의 권력화입니다.
그렇기에 둘 다 외양으로 드러난 말이 있습니다.
‘믿습니까’,
‘믿으시기 바랍니다.’
생각하지 않는 신앙,
질문이 없는 신앙이 공통점입니다.
세력화, 권력화에는 무조건적 신봉, 맹목성이 그들을 이끄는 힘입니다.
다행히도 둘은 정상적인 사회체제가 주축인 경우에 점차 그 자리를 내어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둘과 손을 잡는 권력은 국민에 의해 심판받을 것이기에 폭망하는데 시간과 경계가 필요하겠지만 곧 역사의 시야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저는 내다보고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문제는 오히려 우리입니다.
자본주의라는 맘몬과 신자유주의라는 바벨탑을 어떻게 진리의 영, 말씀의 영으로 이겨나갈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교회가 교회로 세워지기가 이렇게 힘이 듭니다.
교회는 집단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람 하나 하나입니다.
집단이 커졌다고 교회가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력화에 불과합니다.
세력화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성전은 여러분 하나 하나, 우리 하나하나입니다. 여러분 각자가 그리스도에 분량에 이르는 믿음에 이르는 내공이 쌓여야 합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 온지 햇수로 10년이 됩니다만 아직까지 이제 더 배울 것이 없으니 하산하겠습니다고 말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목사님께도 가보고 저 스님에게도 가보고 저 신부님에게도 가보셔야 하는데 아직 내공이 멀었습니다. 저 역시 그러합니다. 주님 앞에서 가르치는 자나 가르침을 받는 자나 갈 길이 멉니다. 그래서 다시 우리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왜 18년 전 교회를 세웠나요? 이 질문은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같습니다. 이 질문에 답하십시오. 솔직하십시오. 그래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기위해 오늘 본문은
우리를 향하고
나를 향해 있어야합니다.
내 자신이 돼지이고 내 자신이 개라는 거기서부터 스스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질문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내가 밟았고 내가 물어 뜯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내 눈의 들보를 깨닫고 나서입니다.
이 질문은 거룩한 영,
성령을 향한 자기 성찰에서 나옵니다.
그래야 거룩한 것을 내어 놓고,
진주 같은 복음을 내어놓고도 짓밟히고 물어 뜯기는 과정을 견딜 수 있는 자기 성찰 말입니다.
아직도 한국교회 교인들 절대 다수는 성령을 은사에 놓고 있습니다. 외적인 능력의 크고 작음으로 그 성령의 질과 양을 평가합니다. 방언, 예언, 치유 등입니다. 그것이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본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열광주의적 은사에 대해 자신의 서신에서 조심할 것을 역설합니다. 방언을 신의 언어라고까지 하며 방언의 은사를 받기를 바란다고 말하면서도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1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방언으로 만 마디 말을 하기보다도,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하여 나의
깨친 마음으로
교회에서 다섯 마디 말을 하기를 원합니다.”
만 마디의 방언보다는 다섯 마디의 깨우침의 이성적인 말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바울과 예수님이 말한 성령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됨,
보다 큰 은사라고 말해주었던 사랑,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인의 화해,
그리고 자연의 신음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중심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됨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우칠 때 비로소 우리는 사랑할 수 있고 화해할 수 있고 그리고 자신이 자연의 한 부분임을 깨달아 그 신음소리를 들을 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던 날,
씻김을 받던 날,
성령이 비둘기가이 내리며 마음 속 하늘의 울림을 듣습니다,
마가복음 1장 11절입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났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
분명 이것은 세례 요한을 만나기 전 그의 인생의 30년 동안 이어진 질문이었을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통한
자기 성찰이었을 것입니다.
이 하늘의 울림을 통해 비로소 그는 자기를 알았고 나아가 다른 이들을 하나 하나 알기 시직했습니다. “너도, 그도 역시 하나님의 자녀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공생애를 이끌었습니다. 바울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로마서 8장 14절 이하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또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바로 그 때에 그 성령이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십니다. ”
모든 사랑와 화해,
자연에 대한 공감 이입도
바로 자녀 됨에서 시작합니다.
이것은 막연히 ‘아멘!’함자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서 옵니다.
자기 성찰입니다. 그래 성찰하는 내가 돼지이기도 개이기도한 모습을 보며 짓밟히기도 물어뜯길지도 하는 존재임을 깨우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됨을 완성이 아니라 존재의 과정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룩과 진주는
돼지가 밟고 개가 물어뜯는 과정에서 드러납니다.
그래야 내 인생이 거룩해지고
진주같이 맑고 영롱해집니다.
그리고 살아가는 어느 날
내 자신이 개이고 돼지라는 것을 알고
펑펑 울 때
우리는 비로소 더불어의 존재임을 압니다.
그리고 그 개이고 돼지 역시 우리 형제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의를 먼저 추구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합니다. 보다 나은 의를 향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하고 화해하고 나아가 자연의 신음소리도 들어 함께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는 자연이신 하나님의 창조에 함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누구인가를 보기 위해 내 안의 들보를 깨닫고 그 들보를 빼내는 자기 성찰의 끊임없는 영성의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성령강림절 이 아침,
거룩,
진주로 다듬어지는
하나님의 자녀로
사랑하고 화해하고
자연과 함께 호흡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2020년 5월 목포 산돌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