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 베스파시아누스의 맏아들 티투스가 황제가 되었으며, 티투스가 1년 만에 죽은 후에는 그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동생 도미티아누스가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도미티아누스가 서기 96년 암살을 당하고, 그 뒤를 이을 자가 없자 네르바가 황제로 추대되면서 플라비우스 왕조는 단절되었다. 왕조의 존속기간은 30년 정도로 그리 긴 편은 아니었지만, 베스파시아누스나 티투스 모두 내란을 끝내고 로마 제국을 재건한 황제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도미티아누스도 고대에는 평판이 나빴지만 현대의 역사가들에게는 재평가[1]되고 있다. 바꿔 말해서 로마의 최전성기로 가는 기틀을 닦은 왕조였다.
기원전 2~1세기 무렵부터, 연이은 내전과 각종 정치적 음모 등으로 왕정, 공화정 초기부터 내려온 유서 깊은 파트리키 가문과 노빌레스 가문들은 그 대가 끊기거나 파산이나 정치적 노선으로 인한 숙청 등으로 가문의 위세가 평민 수준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이런 경향은 아우구스투스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가 되면서, 프린키파투스 체제에 위협될 인물들로 평가받는 이들이 반역법, 간통법 등으로 처벌받으며 계속 이어진다. 그래서 네로 집권 이후, 브리타니쿠스와 소 아그리피나가 연이어 네로 손에 살해될 당시에 이르게 되면 황실과 친인척 관계를 맺은 소수의 명망가까지 쇠락의 흐름을 피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런 경향은, 네로 시대의 피소 음모로 오랜 세월 원로원과 로마 사회의 주축을 담당해 온 여러 귀족, 고위 기사계급 가문들까지 휩쓸리면서 아우구스투스의 직계혈육들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의 혈통이 끊어지고 술라 가문, 실라누스 가문 같은 굵직굵직한 집안들까지 멸문되거나, 피소 가문 사례처럼 큰 타격을 입게 된다.
반면, 이런 상황에서 과거 공화정 시대의 평민 귀족처럼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는 새로운 부류의 이탈리아 연고의 귀족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대개 아우구스투스와 그 후계자 티베리우스, 가이우스(칼리굴라) 그리고 클라우디우스 시대때 황제 밑에서 행정, 군무, 회계 등을 통해 두각을 나타내면서, 원로원 의석을 얻은 이탈리아 태생의 평민 가문 내지 기사계급의 신흥 가문들이다. 이 가문들은 이전 공화정 시대와 상당히 대비된 이탈리아 귀족가문 내지 제정시대 이후의 신귀족, 평민귀족 개념에 가까웠고, 그들 대부분은 이탈리아에서 발흥하거나 속주 태생 중 이탈리아 혈통인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대표적인 가문으로는 네로 사후 등장한 오토를 배출한 살비우스 가, 비텔리우스로 유명한 비텔리우스 가문 등이 대표적인데, 그들은 시간 차이만 날 뿐 아우구스투스와 아그리파의 원로원 개편, 티베리우스와 칼리굴라의 추천, 클라우디우스 시대의 원로원 개편 등을 통해 지배층에 편입됐다[2].
플라비우스 가문 역시 이런 상황 속에서 등장한 제정 이후의 이탈리아 신귀족 가문이다. 그런데 플라비우스 가문은 롤리우스 가문, 살비우스 가문 등과 달리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어디서 굴러먹다가 등장했는지도 제대로 알 수 없을 정도(...)로 이름 없는 사비니 촌동네 집안[3]이었다. 이는 속된 말로 표현하지 않고 점잖게 표현하더라도 큰 차이 없는 표현이었는데, 해당 왕조 시대때 사람인 수에토니우스는 대놓고 이렇게 평하면서, 자신이 살던 시대에도 여전히 플라비우스 왕조가 무명이었다고 밝혔다.
"이 가문이 우리 로마인들을 통치한 것을 부끄러워하면 곤란하다."
플라비우스 가문이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베스파시아누스의 할아버지 티투스 플라비우스 페트로 때인데, 이마저도 손자 사비누스, 베스파시아누스 형제가 가이우스(칼리굴라) 황제 아래에서 주류 사회에 편입되면서부터였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조부 페트로는 카이사르의 내전 당시 폼페이우스 밑에서 백인대장으로 활동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먼저 그는 폼페이우스 밑에서 복무했어도, 폼페이우스 휘하 군단병이 아니었고, 이마저도 지낸 군보직이 지원보충병이었다. 아울러 페트로는 폼페이우스 밑에서 제대로 군공도 세우지 못했고, 지원보충병 중에서도 속된 말로 오합지졸의 전형이었다. 그는 파르살루스 전쟁 중 도망치다가 포로로 잡혔다. 다행히 내전 기간이더라도 적장 카이사르는 같은 로마인들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페트로는 저항하지 않고 전투지 이탈 후 순순히 체포됐다. 이런 비겁한 행동 덕에 그는 카이사르군 밑에서, 편한 포로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폼페이우스가 패하자, 페트로는 포로 신분이었다가 카이사르의 은덕으로 명예제대와 특별사면을 받은 다음, 카이사르군에게 퇴직금까지 받고 별탈없이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이때 경력을 과장해, 코사 일대의 부유한 집의 처녀 테르툴라와 결혼해 아들 사비누스를 얻었고, 로마인들이 부끄러워하고 멸시한 세금징수원과 경매대리인으로 살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페트로의 아들로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버지인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는 일찍이 세금 징수원, 세관 감독관, 세무사 등으로 활동하면서 꽤나 부를 축적가렴주구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자신이 모은 재산과 처가 베스파시우스 가문의 명성[4]을 통해 고향 일대에 훌륭한 저택과 과수원, 경작지 등을 가진 기사계급으로 신분을 격상시키는데 성공했다. 아울러 사비누스는 의외로 세금 징수원 중 꽤 양심적이고 고리대금업에도 종사했어도 근무한 아시아 속주와 라이티아, 알페스 일대에서 비난받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물론 이는 아들, 손자가 연이어 황제가 됐기 때문에 과장된 이야기다. 허나 사비누스는 돈만 벌 목적으로 온갖 편법 행동으로 속주민과 농부, 어부 등을 쥐어 짠 동료들과 달리 종종 기부도 하는 등 기사계급에 걸맞은 위상을 갖추려고 한 모습도 보여줬다.
어쨌든 이런 사비누스는 더러운 일로 많은 돈을 번다는 비난 속에서도, 행실이 아버지 페트로와 달리 돈만 보고 달려드는 위인이 아니었다. 그래서 누르시아의 지역유지이자 전형적인 관료 출신 기사계급 집안의 딸 베스파시아 폴라에게 청혼해, 처가의 허락을 받고 결혼했다. 이렇게 공화정 말과 아우구스투스 시대 후기까지 세금징수, 경매, 고리대금 등에 종사하며 단 2대만에 기사계급이 된 플라비우스 가문은 사비누스의 두 아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 대에 이르러 기어이 원로원 귀족 신분까지 오르게 된다. 이는 공화정 시대를 기준으로도 상당히 놀라운 성공이었는데, 베스파시아누스와 그의 형 사비누스는 당시 황제들인 티베리우스, 칼리굴라가 원로원과 서로 냉담하고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는 과정 속에서 자신들이 가진 능력과 인품만으로 황제의 권력 강화 중 기회를 얻었다.
이중 베스파시아누스는 원로원으로부터 미천한 일에 종사하는 기사계급 출신으로 평가받았음에도, 당시 황제였던 칼리굴라와 그 측근 및 황실의 추천으로, 조영관이 됐고, 로마 시내 거리 관리 업무 등을 맡아 까칠한 칼리굴라에게 큰 신임을 얻어, 황제의 적극적인 추천 덕에 서기 40년 법무관에 당선됐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지위 상승을 위해 칼리굴라에게 아부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재무관 시절, 조부와 부친의 경력 때문에 세리 집안에서 태어난 한계로 안찰관이 되고자 재수할 당시부터 황제와 황제의 매제 코르불로에게 오직 실력으로 인정받음을 평생 감사하게 여겼다. 그래서 그는 법무관 임기 내내 칼리굴라에게 충성했고, 일처리도 꼼꼼해, 황제에게 공개적으로 칭찬받았다. 또 그는 41년 칼리굴라 황제 암살 이후 혼란 정국 속에서, 몸을 사린 동료들과 달리, 황제에 대한 충성을 공개적으로 회의 중 발언할 정도로 칼리굴라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지지자였다. 따라서 베스파시아누스는 클라우디우스 황제 즉위 직후, 황실의 해방노예 나르키수스와 카이니스 등의 추천으로 게르마니아에 주둔 중인 제2군단장을 시작으로 신참자들의 귀족반열에 필수요소인 군공을 세울 기회를 얻게 된다.
그 후로도 플라비우스 가문의 승승장구는 계속되어서, 형 사비누스는 AD 47년 보결집정관 직을 지낸 후 프라이펙투스 우르비를 11년동안이나 지내는 등 정계의 거물로 성장했고, 동생 베스파시아누스는 브리타니아 원정을 통하여 군사적 명성을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마침내 서기 51년 집정관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이어 서기 66년 유대인들이 로마에 반란을 일으키자 네로 황제에 의하여 진압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중동으로 파견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약 80,000명의 병력으로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을 한창 진압하고 있던 서기 68년, 네로가 원로원으로부터 국가의 적으로 선포되고 자살하면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네로의 뒤를 이은 갈바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전령을 보냈지만 갈바 역시 집권 후 반 년이 겨우 지난 서기 69년 1월에 오토에게 암살당했고, 그와 동시에 게르마니아 총독 비텔리우스가 황제를 자칭하면서[5] 로마는 내전기로 치닫는다.
오토와 비텔리우스간의 내전에서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은 채 간을 보고 있던 베스파시아누스는 내전이 비텔리우스의 승리로 끝난 7월 1일, 측근들의 충고를 듣고 마침내 황제를 자칭하기 시작했다. 상황은 전반적으로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유리했다. 베스파시아누스 휘하에는 유대인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경험치가 거의 만렙에 달했던 정예 병력만 80,000명에 달했으며, 이 당시 로마의 식량 공급을 전부 책임지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했던 이집트 역시 베스파시아누스의 손 안에 있었다.[6] 여기에 도나우 강 일대의 국경을 담당하고 있던 로마군 역시 베스파시아누스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던 것은 덤.[7] 압도적인 전력을 바탕으로 베스파시아누스는 손쉽게 비텔리우스 세력을 제압했고[8], 69년 12월 21일, 로마 원로원이 베스파시아누스를 로마의 황제로 승인했다. 또다시 내란으로 무정부사태가 재발할 것을 우려한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에 즉위한 다음 해인 서기 70년, 플라비우스 가문의 제위 세습권을 승인해 줄 것을 원로원에게 요구했고, 원로원이 이를 승인함에 따라 마침내 플라비우스 왕조가 탄생하게 되었다.
정확히 10년을 통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남아있는 사료가 눈물나게 적다(...)[9] 그렇지만 몇 가지 업적을 적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네로 황제와 내전기를 거치면서 완전히 박살난 로마 제국의 재정을 되살려냈으며[10][11], 제위 계승과 관련된 법을 만들어 생전 두 아들의 후계 문제와 프린켑스 지위 문제의 단점을 해결했다. 또한 유대인의 반란을 효율적으로 진압한 데 이어서 내란기에 갈리아족과 게르만족이 제국 변경 곳곳에서 일으킨 반란 역시 즉위 이후 수월하게 진압해내면서 로마의 치안을 안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아울러 속주 출신들을 대거 원로원에 편입시키고, 그들에게 파트리키 지위를 부여해 신흥 귀족 가문들을 등장시켰고, 황제 자문위 같은 전문 행정 분야도 보강했다. 또한 로마의 랜드마크로 남아있는 콜로세움 역시 베스파시아누스 시기 빵과 서커스의 일환으로 세운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지었는지를 모르는 게 함정
능력도 있고, 개인적 매력도 상당한 데다[12] 의지도 있는 황제였지만 하늘이 도와주지 않았다. 즉위 직후 베수비오산이 폭발해 남이탈리아의 부유한 캄파니아 지방이 아수라가 되고 폼페이는 하루아침에 날아가버렸다. 이후, 겨우겨우 이게 해결되나 싶었더니 수도 로마에서 대화재가 발생했다(...) 따라서 즉위 내내 자신이 가진 역량을 보여주지도 못하고 재난 대책에만 몰두하다가 병에 걸려 갑자기 사망(...)
개요 항목에서 상술했듯이 고대 로마 시기에는 공포정치와 자기우상화 때문에 폭군의 아이콘으로 단죄돼 미친듯이 까였고[13], 죽은 뒤에는 기록말살형으로 단죄받았지만 현재는 폭넓게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오늘날의 스코틀랜드 근처까지 제국의 영역을 확장한 데 이어,루마니아 쪽에서 미친듯이 털리고 굴욕적인 강화조약 맺은 게 함정 형 티투스가 미처 끝내지 못한 로마의 화재 재건 사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해냈다. 또 로마의 고질적 문제인 가렴주구 문제와 고리대 문제 해결에도 적극 나서 이 부분에서 로마 민중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아울러 평가절상을 통하여 경제를 호황으로 이끈 것과 게르마니아 일대에 대규모 방벽을 세워놓은 것도 주요한 업적.
다만 도미티아누스는 '당시 시대 대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자기우상화를 했고, 제위를 차지하기 전의 혈통으로 따지면 플라비우스 왕조와는 비교도 안 되었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황제들보다도 더 귀족적인 데다 사치가 심한 단점이 있었다. 서기 93년 게르마니아 총독이 반란 음모를 꾸미다가 실패한 이후로 심심하면 원로원을 내란죄로 기소 후 온갖 고문법을 개발해 가혹하게 탄압[14]해서 원로원과 로마 상류층, 지식인들의 반감을 사고 말았다. 그리고 이런 공안 정국의 연속 와중에 자기 역시 암살당했다.(도미티아누스 암살 사건) 도미티아누스의 암살 이후 네르바의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가 창설되면서 플라비우스 왕조는 30년도 채 안 되는 짧은 치세를 뒤로 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과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황제들은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혈통적, 법적, 정치적 후계자를 내세우며, 원로원과 본국 이탈리아 평민 및 각지에 주둔 중인 로마군 모두에게 정통성과 인기를 얻었다. 이런 방식은 왕조의 창건자이자 내전을 종식시키고 무력으로 모든 이들을 제압한 아우구스투스가 양자 티베리우스를 공식 후계자로 선언하면서, 시작된 후광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방식은 네로가 제 손으로 아우구스투스의 직계손들인 처남과 어머니 등을 살해하면서, 네로조차 이런 방법으로 정통성과 인기를 얻는 것에 한계를 노출한 상태였다. 이는 신흥 가문 출신으로 공화정 시대의 권력자들과 어떤 인연도 없는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도 비슷했다.
또한 원로원의 공화주의자들은 '그동안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법률적, 혈연적 후계자들이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가 갖고 있던 직위들을 상속하는 개념으로 제위를 세습해 왔지만, 그들과 어떤 법률적, 혈연적 후계관계가 없는 플라비우스 가문이 무슨 명분으로 제위를 세습하는가?'라는 반대 여론도 있었다.
따라서 베스파시아누스는 즉위 이후 원로원에게 플라비우스 가문의 제위 세습을 합법화하는 제위계승을 위한 법을 통과시켜줄 것을 요청함과 동시에 다른 방법으로 자신과 플라비우스 가문의 정통성과 위상을 올리게 된다. 그 방법은 놀랍게도 과거 칼리굴라가 시도한 "제위 계승은 신의 대리인에게 신이 부여한 섭리에 따라 자연스레 넘어온 영광"이라는 식의 일종의 황제 우상화 방법과 황실이 개입한 사전검열 방법이었다.
플라비우스 왕조는 창건자 대부터 후계자가 프라이토리아니를 지휘하는 근위대장에 임명되어 원로원 내 반대파를 끊임없이 솎아내고, 과거 티베리우스와 칼리굴라를 괴롭힌 풍자시 등을 사전검열 방식으로 찾아내 이를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 또 베스파시아누스를 시작으로 플라비우스 왕조는 이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와 달리,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 뒷편에 적극적으로 황제의 군공과 업적 등을 내세우고 이를 적극 강조한다. 그러나 이런 사전검열과 황제, 황실 우상화는 한계가 명확했고, 칼리굴라 사례처럼 원로원을 자극할 수 있는 위험성이 상당했다. 따라서 플라비우스 왕조의 세 황제는 이런 단점을 상쇄시키면서도, 평민층의 인기를 단숨에 끌어올릴 방법을 적극 활용하는데 그것이 바로 대대적인 대형 공공건축물 축조와 상상 이상의 엔터테이먼트, 즉 '빵과 서커스'다.
공공건축물 축조와 '빵과 서커스'는 예전부터 공공 연회 성격으로 로마 권력자들이 활용한 방법이었고 로마인들에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플라비우스 가 황제들은 이를 이전 공화정,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황제들과 차이를 분명하게 뒀다. 그들은 이를 대형 축제 이상으로 규정해 선전했고, 시혜적 성격 안에 유흥거리를 주면서도 모든 상상을 현실로 바꾸는데 주력했다. 먼저 플라비우스 가문은 이를 선전할 때, 과거 네로가 그리스 문화에 심취해 내건 '빵과 서키스'와 다른 형태로 이를 무제한적으로 제공하고 그 규모를 로마인들의 상상을 뛰어넘게 바꾸는데 역점을 뒀다. 따라서 플라비우스 왕조 시대부터 황제가 제공한 각종 오락 경기 수준은 우리가 알고 있는 영화 속의 바로 그 모습으로 전개됐다. 규모는 화려해졌고 다채로움은 상상이상으로 된 시기가 바로 이때였다. 그 예로 검투사 경기의 경우에는 여성 검투사와 난쟁이 검투사들의 등장 외에도 온갖 오락 요소들이 도입되면서, 검투사 종목 외의 전차 경기 등에는 황제와 황실 주도 아래 평민들이 좋아하는 여러 방법들(돈내기, 즉석당첨 등)이 끊임없이 현실이 되었다. 또한 세 황제는 빵과 서커스를 제공하면서 민심을 듣고 이를 그 자리에서 현실로 바꿔주거나, 공개적으로 어울리며 인기를 모았다.
따라서 플라비우스 왕조는 그들의 통치술이 과거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스타일의 냉혹한 측면이 있었음에도, 그 효과는 대단했다. 세 황제는 평민들의 인기를 빠르게 얻을 수 있었고, 무명의 플라비우스 가문은 순식간에 명문가가 아님에도 그 정통성을 인정받았다[15]. 이런 방법들은 이후 황제들과 세습왕조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로부터 시작되는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황제들 또한 클로루스가 플라비우스의 이름을 칭한 이래 대대로 플라비우스라는 이름을 취해 이를 신 플라비우스 왕조(Neo-Flavian dynasty)로 부르기도 한다. 단, 이 시기쯤 오면 플라비우스를 전통적인 씨족명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전통적인 개인 이름(프라이노멘)에 가깝게 맨 앞에 사용하는 일이 훨씬 많았으며, 콘스탄티누스 왕조 이후의 왕조 개창자들인 발렌티니아누스 1세, 테오도시우스 1세는 물론 플라비우스 스틸리코나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같은 유력자들까지도 플라비우스를 칭했기에 왕조 구분으로서의 의미는 떨어진다. 황제의 칭호로서의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나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이후의 '안토니누스' 등과 같이 황제의 정통성을 나타내는 칭호로 보는 것이 사실에 더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