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날이 발전하는 암벽화
세계적으로 봤을 때는 우리나라의 암벽화 도입은 조금 늦은 편이었다. 1940년대부터는 인공등반의 전성기가 끝나고 프리클라이밍이라는 새로운 등반 사조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더 어려운 루트의 암벽 등반을 고무 창 암벽화가 개발되었다. 손과 발만으로 바위를 오르는 새로운 등반인 프리클라이밍을 가능하게 해준 장비 중 하나가 바로 평평하고 고무로 만들어 접지력을 강화시킨 고무 창 암벽화인 것이다. 영국의 조 브라운은 ‘플림솔(Plimsoll)’이라는 고무 창의 캔버스 등산화를 신었으며, 프랑스의 피에르 알랭의 파리 근교에 있는 퐁텐블로 숲 볼더 암장에서 경량 클레터 슈즈를 실험했다. 이후 가족이 신발 공장을 운영하는 에밀 보데나우가 피에르 알랭의 등반 팀에 합류하였으며, 1950년에 고무창 암벽화를 선보였다. ‘PA’라고 부른 이 암벽화는 농구화처럼 발목까지 올라오는 형태였다.
발목 부위에 PA 마크가 새겨져 있다. 이후 PA는 가리비에사를 통해 유통되었으며, 에밀 보데나우는 자신의 이름을 따서 ‘EB’라는 암벽화를 새로 출시했으며 PA보다 더 널리 알려졌다. 대표적인 제품이 ‘EB 슈퍼 그래톤’이다. 급증하는 수요를 맞추기 위해서 대량 생산을 시작 EB 암벽화는 품질이 저하되었다. 이와 더불어 EB는 다른 브랜드의 새 제품에 묻혔다. 1980년대에는 스페인의 보레알사에서 출시한 ‘피레(Fire)’가 새로운 암벽화로 각광받았다.
연질 고무창을 사용한 EB와 다르게 피레는 경질 고무를 사용했다. 슬랩과 같이 마찰력을 극대화해야 하는 등반에서는 부드러운 고무 창이 유리하지만, 세밀한 엣징이 필요한 직벽 또는 오버행 등반 등에서는 적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등반의 난이도가 더 올라갈수록 그에 맞는 암벽화가 필요했다.

이제는 암벽화도 전문・세분화되어 등반 성격에 따라 특화된 암벽화들이 출시되고 있다. 다양한 암벽화들은 발등의 고정 방법, 형태를 만드는 공법, 바닥창의 종류에 따라 구분할 수 있다. 암벽화의 겉모양이 달라지기도 하지만 그 기능이 다르고, 어떠한 등반 형태에 특화시키기 위한 것이므로 이것을 알아두면 나에게 맞는 암벽화를 고르는 데 유용할 것이다.
우선, 발등을 고정시키는 방법에 따라 암벽화를 슬리퍼(slipper)형, 레이스-업(lace-up)형, 벨크로(velcro)형 등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암벽화 외양이 크게 달라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슬리퍼형은 고무밴드 등으로 발등을 잡아준다. 끈이 없이 신고 벗기에는 편하지만 오래 신으면 밴드가 느슨해질 수 있다. 슬리퍼 형은 직벽, 오버행, 볼더링 등 고난이도 등반에 적합하다. 레이스-업형은 끈을 사용하여 발의 모든 부분을 섬세하게 조일 수 있다. 등반 능력을 가장 극대화시킬 수 있지만 신고 벗는 게 불편하고 등반 중 끈이 끊어질 수도 있다. 레이스-업형은 슬랩, 직벽, 오버행 등 어떤 등반에도 사용할 수 있지만 창이 굽은 아치형 바닥창과 결합한 레이스-업형 암벽화로는 슬랩 등반이 어렵다. 벨크로형은 슬리퍼형과 레이스-업형의 단점을 보완한 형태다. 쉽게 신고 벗을 수 있으면서 벨크로를 사용해 안정감 있게 발등을 고정시킬 수 있다. 하지만 발등 부분이 둔한 느낌이 있고, 등반 중 벨크로가 떨어질 수도 있다.
암벽화를 만드는 공법은 보드 라스팅(board lasting)과 슬립 라스팅(slip lasuting) 공법이 있다. 보드 라스팅은 발의 형태를 본떠 갑피를 만든다. 단단한 안창이 발을 지탱해 준다. 장시간 등반할 때 편안하게 신을 수 있다. 슬립 라스팅은 봉제법으로, 엄지발가락에 힘을 집중시켜 준다. 스포츠클라이밍 또는 볼더링 등의 고난이도 등반에 적합하다.
암벽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위에 직접 닿는 부분이 바닥창이다. 현재 출시되는 암벽화들의 창은 주로 부틸고무(Isobutylene-Isoprene Rubber)를 사용하여 만든다. 이소부틸에 이소프렌을 결합시켜 만든 부틸고무는 자동차 타이어, 전선피복, 컨베이어벨트 등 공업 분야의 전반에 두루 사용되는 소재이다. 등산 분야에서는 암벽화창에 필요한 몇 가지 특징을 가공과정에서 조율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사용하게 되었다. 암벽화창은 적당한 경도와 점성, 완충성 등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경도만 놓고 예를 들자면, 암벽화창에 체중을 실어 내딛어도 바위의 미세한 요철 사이로 고무가 파고 들어가지 않아 마찰을 일으킬 수 없을 것이고, 반대로 너무 연하다면 지우개 밀리듯이 바닥창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이 세 가지 특성의 균형을 어떻게 맞추냐에 따라서 같은 부틸고무창이라도 그 성능이 달라지는 것이다.

▲ 암벽화의 갑피를 만든 공법 중 하나인 보드 라스팅은 발의 형태를 본떠 갑피를 만든다. 단단한 안창이 발을 지탱해 주기 때문에 장시간 등반할 때 편안하게 신을 수 있다. 사진은 국내 출시를 앞두고 있는 국내 브랜드 부토라(Butora)의 제품 중 보드라스팅 공법으로 제작한 암벽화의 절단면.
암벽화창으로 유명한 스텔스(Stealth)창도 부틸고무 소재를 사용한 제품이며, 국산 브랜드 트랑고에서 개발한 샤펜(Schaffen)창 역시 부틸고무를 사용하여 만든 암벽화 창이다. 매드락(Mad Rock)의 매드 러버(Mad Rubber), 이벌브(Evolve)의 트랙스(TRAX) 등도 약간 특성이 다를 뿐, 부틸고무로 만든 바닥창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모든 브랜드가 부틸고무 소재의 암벽화창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화강암과 같은 강질 바위에서 마찰력이 좋은 부틸고무는 온도변화에 민감해 낮은 기온에서는 그 성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결점이 있다. 라스포르티바(La Sportiva)의 암벽화는 합성고무 TDR(Thermo Dynamic Rubber) 소재로 만든 연질의 비브람 창을 사용하여 온도변화에 상관없이 약 75%의 경도를 유지한다.
UIAA에서 규정하는 안전기준이 있는 다른 암벽 등반 장비와 달리 암벽화에 대해서는 안전기준이 없다. 장비의 결함이 생명과 직결되는 다른 장비에 비하면 암벽화에 결함이 있다고 해서 직접적으로 상해를 입지는 않는다. 그러나 암벽화는 새로운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도와주는 등반 파트너이며, 어떤 등반 장비보다도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공 들여야 하기 때문에 애착이 갈 수밖에 없는 장비다.
[글 안준영 사진 신희수] <Monthly Mountain>

▲ 부토라-아크로 BUTORA Ac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