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다독 정기 모임 / 2016년 6월 21일(화) 오후4시 / 동의빌딩 2층 / 주관 류인혜
『내 삶의 의미』 로맹 가리 지음, 백선희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5.
자신의 그늘에 묻힌 천재
류인혜
『내 삶의 의미』는 2014년에 프랑스에서 로맹 가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출간된 책이다. 1980년 초, 로맹 가리는 라디오 캐나다 방송에서 회고록「내 삶의 의미」를 구술하며, 이렇게 시작한다.
“내 삶에 대해 얘기를 좀 해보라고 하시는데, 난 내가 삶을 산거라는 확신이 그다지 서지 않는군요. 오히려 삶이 우리를 갖고 소유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살았다는 느낌이 들면 우리는 마치 스스로 삶을 선택이라도 한 것처럼 자기 삶인 양 기억하곤 하지요. 개인적으로 나는 살면서 선택권을 거의 갖지 못했습니다. 지극히 일반적이고 사적이며 일상적인 의미의 역사가 나를 이끌었고, 어떤 면에서는 나를 속여 넘겼지요.” p.11
그리고 마무리에서도 비슷한 표현이 나온다.
“나는 내 삶에 의해 살아졌다는 느낌이 듭니다. 내가 삶을 선택했다기보다는 삶의 대상이 되었다는 느낌입니다. 분명 우리는 삶에 조종당합니다. 지금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미디어를 통해, 여러분들의 카메라를 통해 대중 속에서 만들어지는 이미지라는 기이한 현상은 사실 인간의 실제와는 거의 관계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나에 관해 쓰는 모든 것에서 매일 나를 보지만 나는 내가 끌고 다니는 그 이미지 속에서 결코 나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어쨌든 작가의 창작물과 작가 자신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작가는 자기 자신의 최고의 것을, 자기 상상에서 끌어낸 최고의 것을 책 속에 담고 그 나머지, 앙드레 말로의 표현대로라면 “한 무더기의 보잘것없는 비밀”은 홀로 간직하지요.” pp.109~110
‘삶에 의하여 살아진 인생’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물이 흐르는 대로 살아왔다는 이야기다.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군대와 나라가 명령 하는 대로, 역사가 이끄는 대로 로맹 가리는 살았다. 중요한 것은 소설은 자신의 의지대로 썼다는 것이다. 글을 쓴다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모든 상황에 대담할 수 있었다. 군대에 있으면서, 외교관 생활을 하면서, 그렇게 살아지면서 그 살아짐을 소설로 써서 자신을 살게 한 삶에게 대항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마다 숙명적으로 주어진 삶의 조건을 자신의 일부로 여기며 순응한다.
로맹가리가 할리우드 영화판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 당시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는 미국의 형제 희극배우 막스 부라더스의 한 사람인 그루초 막스를 만난다. 로맹 가리는 그의 유머를 통해 작가로서 영감을 받을 수 있었기에 그루초 막스를 자기에게는 특별한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루초 막스의 유머는 내게 아주 중요합니다. 일반적인 모든 유머도 그렇지만 말입니다. 유머는 무기 없는 사람들의 순결한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유머는 우리에게 닥친 고통스런 현실을 누그러뜨릴 때 우리가 행하는 일종의 평화적이고 수동적인 혁명입니다. 이를테면 게토에서 탄생한 유대인들의 유머가 그렇습니다. 그들은 어떤 비극적 웃음 외에 다른 방어 무기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p.85
‘무기 없는 사람들의 순결한 무기’가 유머라는 이 대목을 읽으며 그 ‘순결’이라는 단어를 생각 속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그리고 ‘순결’이 쓰이는 여러 상황을 생각해 보았다. 외부의 어떤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는 아이처럼 순수한 영혼이 간직할 수 있는 것이 순결성이 아닐까. 갇혀 있던 유대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는 비극적 웃음을 웃어야 했다. 그들의 유머는 고통을 잊게 해 주었을 것이다. 로맹 가리의 인생을 구분해 본다면 희극이었을까, 비극이었을까.
지난 날,「서로서로」모임에서 로맹 가리의『유럽의 교육』을 읽을 때, 그가 바로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자기 앞의 생』을 쓴 같은 소설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자기 앞의 생』은 내가 20대 초반에 읽은 소설이다. 오래도록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을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은 소설이 준 충격이 컸기 때문이다. 바로 같은 사람이 쓴 소설이라는 사실을 알고 매우 놀라우면서도 흥미로웠다.
『내 삶의 의미』를 서로다독에서 함께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은 로맹 가리의 소설이 아닌 그의 회고록이라는 데 있다. 그가 왜, 어째서 에밀 아자르로 살게 되었을까, 몹시 궁금했다. 에밀 아자르로 발표한 소설과 로맹가리로 발표한 소설의 차이는 무엇일까도 궁금했다.
기대를 갖고 읽은『내 삶의 의미』본문에서는 전혀 에밀 아자르에 대한 고백(이야기)이 없다. 대신「옮긴이의 말_로맹 가리, 세상을 홀린 마법사」에서 친절하게 그 사건의 전말을 소개하고 있다. 그가 프랑스 비평가들에게 어떤 대접을 받았고 또 어떤 생각으로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소설을 발표하게 되었는가도 읽게 된다.
그런데 책의 내용 속에서 본인이 말하는 자신의 행적과 책 뒤에 정리된 ‘로맹 가리 연보’에서 많은 차이를 느낀다. 로맹 가리가 삶의 여정과 소설의 창작을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했기 때문일까, 책 뒤의 연도별로 적어놓은 그 연보를 읽으며 혼란이 생겼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종류의 다름이 그리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다만 그는 자신의 표현대로 삶에게 휘둘리다가 스스로에게 총을 겨누었다. 비극으로 끝난 로맹 가리의 삶은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 하고 있는가. 그런데 자신이 진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현상을 엄밀히 비극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무도 그의 진실을 모른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그늘에서 미완의 삶을 살다가 갔다고만 여겨진다. 나는 에밀 아자르의 필력이 아까운 것이다.
그는 본명 로맹 가리 외의 다른 이름으로도 소설을 발표했다. 1958년(44세)에 포스코 시니발디라는 가명으로 장편『비둘기를 안은 남자』출간하였다. 그가 60세가 되었던 1974년에는 샤탄 보카트로 장편『스테파니의 머리들』,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장편『그로칼랭』을 발간하였고, 이듬해에는 에밀 아자르의 두 번째 소설『자기 앞의 생』을 발표하였다. 이 작품이 공쿠르 상을 수상하게 된다.
로맹 가리 대신 에밀 아자르 역할을 맡은 사람은 조카 파볼르비치이다. 그를 통해 상을 거절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로맹 가리의 작품을 제대로 읽은 이들은 로맹 가리를 의심했고 작품 속에서 그가 에밀 아자르일 수밖에 없는 증거를 찾았다. 와중에 폴 파볼로비치는 진짜 아자르 행세를 하려 들었다. 로맹 가리는 위기의식을 느꼈을까, 자신을 향한 무자비한 혹평에 대한 분노였을까, 에밀 아자르의 세 번째 작품『가면의 생』(1976)을 토해내듯 보름 만에 써냈다고 한다.
로맹 가리가 완벽한 연기로 편견에 젖은 평론가와 세상의 차별을 조롱하는지도 모르고, 프랑스 문학계는 에밀 아자르라는 신인 작가에게 극찬을 보냈다. 로맹 가리는 바로 자기 자신이기도한 에밀 아자르와 비교되어 더욱더 낮은 평가 받았다. 이 아이러니가 에밀 아자르라는 가면 뒤에 숨어서 세상의 반응을 살피고자 했던 그의 의도가 실현된 것이라면 정말 마음이 시원했을까?
로맹 가리는 자신의 글 속에 담긴 ‘여성성의 구현’에 대해서 말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이며 그것이 삶의 의미라고 한다.
“살면서 내가 한 가장 가치 있는 일은 나의 모든 책 속에, 내가 쓴 모든 글 속에 이 여성성을 향한 열정을 끌어들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성을 육체적․감정적으로 구현하건, 약함에 대한 예찬과 옹호를 통해 철학적으로 구현하건 말입니다. 인권이란 바로 약할 권리를 옹호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까요.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이었냐고 묻는다면 언제나 나는-예술적인 목적이 아니고는 교회에 발을 들여 본 적이 없는 사람이 하는 말치고는 참으로 이상하게 들리겠지만-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이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 말이 여성성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이 내게는 여성성의 구현 그 자체라는 점에서 말입니다.” p.117
로맹 가리의 이 말로 새로운 숙제를 받은 기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나는 그 분의 여성성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첫댓글 류인혜 선생님~ 자료 감사드립니다.
로맹가리이자 에밀 아자르인 그가 말한 삶의 의미란 모성, 여성성의 구현 그 자체라는 글이 인상적이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코끼리로 비유된 인권에 대한 이야기가 마음에 남습니다.
함께 하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하늘의 뿌리]도 나중에 읽어 봅시다.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의 소설을 비교해 가며 읽는 것도 괜찮을 듯해요.
아쉬웠지만 맛있는 저녁과 커피와 홍차로 위로 받았습니다.^^
류인혜 선생님~
여러가지로 고맙습니다.
저도 고맙습니다.
감사하며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