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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절 통일신라 및 후삼국시대
1. 통일신라의 지방조직과 장성
삼국을 통일한 후 신라는 편입된 영역과 그 주민을 새로이 편제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고구려․백제의 유민을 신라로 편입시키며 나아가 확대된 영토를 신라의 판도로 확고히 장악함으로써, 통일왕조로서 전국을 통치하는 데 만전을 기하고자 함이었다. 그러한 조치의 일환으로 우선 문무왕 13년(673)에는, 백제 유민에게 옛 백제시절 소지했던 관등에 준하여 신라의 관계를 주었다. 백제의 제2관등인 달솔에게 신라의 제10관등인 대나마를 내린 것을 위시하여, 백제의 3~7관등인 은솔~장덕에게 각각 신라의 11~15관등인 나마~대오를 칭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 후 신문왕 6년(686)에는 고구려 유민에게도 마찬가지의 원칙에 준하여 신라의 관계를 주었는데, 백제 유민보다는 상위의 관등을 내리는 등 상대적으로 우대하였던 흔적이 엿보인다.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을 신라인으로 편입시키는 조치를 취하는 것과 함께, 신라에서는 고구려와 백제의 옛 땅을 아우르는 지방행정조직의 정비에 착수하였다. 5소경(小京)과 9주(州)의 제도가 그것이었다. 소경은 통일 이전부터 이미 설치되어 있었다. 일찍이 지증왕 15년(514)에 아시소경(阿尸小京 : 安康)이 설치되었으며, 진흥왕 18년(557)에는 국원소경(國原小京 : 忠州)이, 선덕여왕 8년(639)에는 북소경(北小京 : 江陵)이 설치되었다. 이같이 소경이 이미 설치되기는 하였으나, 아직 전국적으로 체계있게 정비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통일 뒤인 문무왕 18년(678)에 북원소경(北原小京 : 原州), 동 20년(680)에 금관소경(金官小京 : 金海)이 설치되고, 신문왕 5년(685)에 서원소경(西原小京 : 淸州)과 남원소경(南原小京 : 南原)이 설치되고, 앞서 설치된 국원소경(國原小京)이 중원소경(中原小京)이라 고쳐짐으로써 5소경이 완성되기에 이르렀다.
5소경이 신문왕 5년에 정비되었다는 것이 우선 의미가 있다. 그것은 이 해에 신라의 정치조직이 전반적으로 정비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같은 정치조직 정비의 일환으로 5소경도 일정한 계획 아래 정비되었던 셈이다. 5소경은 동․서․남․북․중의 방향에 맞추어 다섯으로 정리되었다. 왕경인 경주가 국토의 동쪽 끝에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결함을 보완하려는 뜻을 담고 있다.
또한 여기에는 왕경의 귀족들을 이주시켜 거주케 하기도 하였다. 지방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담당시키려는 목적에서였다. 이처럼 견제가 필요하였던 것은, 소경에 신라가 정복한 국가의 귀족들을 사민정책에 의해 강제로 이주시켜 살게 한 때문이기도 하였다. 소경의 설치는 이러한 사민정책과 깊은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는데, 가령 중원소경에는 대가야(大加耶 : 高靈)의 귀족들이, 남원소경에는 고구려의 귀족들이 옮겨 살았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중원소경의 강수(强首)․우륵(于勒)이나 김생(金生), 남원소경의 고구려인 악사(樂師)나 법경(法鏡)같은 승려의 존재가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이러한 피정복국민의 이주는 그들에 대한 감시의 필요성을 낳게 하였을 것이다. 소경의 관할구역은 작지만 그 장관인 사대등(仕大等 : 仕臣)의 지위가 주(州)의 장관과 비슷하게 높게 되어 있는 것은, 결국 위와 같은 이유에서 말미암은 소경의 중요성을 설명해 주는 것으로 보인다.
5소경과 더불어 통일신라에서 지방통치조직의 근간을 이룬 것이 9주와 그 아래의 군․현이었다. 주는 통일 전에도 영토의 확장에 따라 차례로 설치되어 온 것이지만, 백제와 고구려를 멸한 뒤에 새로이 편입된 지역을 포함하여 이를 9주로 정비하였다. 그 시기는 다른 정치조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신문왕 5년(685)이었다. 이 9주를 정비하는 데는 몇 가지 원칙이 있었다. 첫째는, 신라․백제․고구려 삼국을 기준으로 하여 각기 그 옛 땅에 3개의 주를 설치하도록 하였다는
<표 25> 신라의 5소경
소 경 명 | 현 지 명 | 건 치 연 대 |
중 원 소 경 | 충 주 | 진흥왕 18년(557) |
북 원 소 경 | 원 주 | 문무왕 18년(678) |
금 관 소 경 | 김 해 | 문무왕 20년(680) |
서 원 소 경 | 청 주 | 신문왕 5년(685) |
남 원 소 경 | 남 원 | 신문왕 5년(685) |
*이기백․이기동, 한국사강좌〔고대편〕, 일조각, 1982, 333쪽 표 전재
점이다. 물론 엄밀하게 따지자면 신라의 옛 땅이라는 데에는 가야의 옛 땅도 포함되기는 하지만, 대체로 이러한 원칙은 승인되어 좋을 것이다. 둘째로는, 중국의 옛날 우임금(禹王) 때의 9주(州)에서 모범을 취하였다는 점이다. 기록상으로는 밝혀져 있지가 않지만, 고려의 성종이 12목을 설치하면서 이것이 중국 순임금(舜王)의 12목을 본뜬 것이었다고 말한 사실에 비추어 틀림이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방 통치조직에서 주의 비중은 상당히 무거운 것이었다. 원래 군사적인 성격이 강했던 때문에 그 장관은 군주(軍主)라고 일컬었는데, 이것은 신라의 독자적인 칭호였다. 그러나 태종무열왕 때에는 이를 중국식으로 고쳐서 도독(都督)이라 불렀고, 신문왕 때에는 또 총관(摠管)이라 칭하게 되었다. 명칭만으로는 반드시 단정할 수가 없으나, 이러한 중국식 명칭의 사용은 또한 행정적인 성격이 커져가는 과정을 나타내기도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총관은 규정상으로는 급찬 이상 이찬까지의 관등을 가진 자가 임명되는 것으로 되어 있어서 6두품 출신도 이에 임명될 수가 있을 것도 같아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6두품 출신으로 총관에 임명된 사람은 기록
<표 26> 통일신라시기 9주와 관할 군현수
주 명 | 주 명 | 주 치 | 군 수 | 군 수 | 현 수 | 현 수 |
원 명 | 경덕왕시 개칭명 | (현지명) | 삼국사기 지리지 | 삼국사기 경덕왕 16년조 | 삼국사기 지리지 | 삼국사기 경덕왕 16년조 |
사벌주 | 상주 | 상주 | 10 | 10 | 31 | 30 |
삽량주 | 양주 | 양산 | 12 | 12 | 40 | 34 |
청주 | 강주 | 진주 | 11 | 11 | 30 | 27 |
한산주 | 한주 | 광주 | 28 | 27 | 49 | 46 |
수약주 | 삭주 | 춘천 | 12 | 11 | 26 | 27 |
하서주 | 명주 | 강릉 | 9 | 9 | 26 | 25 |
웅천주 | 웅주 | 공주 | 13 | 13 | 29 | 29 |
완산주 | 전주 | 전주 | 10 | 10 | 31 | 31 |
무진주 | 무주 | 광주 | 15 | 14 | 43 | 44 |
(계) | 120 | 117 | 305 | 293 |
*이기백․이기동, 한국사강좌〔고대편〕, 일조각, 1982, 335쪽 표 전재
<표 27> 통일신라시기의 외관
주 | 소경 | 군 | 현 |
도독(총관) 주조(주보) 장사(사마) 외사정 | 사신(사대등) 사대사(소윤) | 군태수 외사정 | 소수 현령 (제수) |
*이기백․이기동, 한국사강좌, 337쪽 표 전재
에 나타나지가 않으며, 따라서 진골의 독점직이었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결국 주의 정치적 중요성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가 있다.
주 밑에는 전국에 117 내지 120개의 군과 293 내지 305개의 현이 있었다. 군에는 그 장관으로 군태수(郡太守)가 임명되었으며, 현에는 그 격에 따라서 혹은 소수(少守)가 임명되기도 하고 혹은 현령(縣令)이 임명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군․현의 외관으로는 모두 왕경의 귀족을 파견하였는데, 흔히는 학식이 있는 자가 임명되곤 하였다. 군․현의 장관을 성주(城主)라 하여 그 군사적 성격이 중요시되던 삼국시기의 전통은 이제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러한 관계로 해서 학문에 특히 관심이 많던 6두품 출신이 보통 이들 군․현의 외관직에 임명되었을 가능성을 짐작해서 좋을 듯싶다.
주․군․현의 칭호는 종래 전통적인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던 것이 경덕왕 16년(757)에 이들의 이름을 모두 중국식으로 고쳐 버렸다. 가령 사벌주(沙伐州)를 상주(尙州), 수약주(首若州)를 삭주(朔州), 완산주(完山州)와 무진주(武珍州)를 전주(全州)와 무주(武州)로 각각 고친 것과 같은 것이 그러하였다. 군․현에 있어서도 수주군(水酒郡)을 예천군(醴泉郡)으로, 고시이현(古尸伊縣)을 갑성군(岬城郡)으로, 구사진혜현(丘斯珍兮縣)과 소비혜현(所非兮縣)을 진원현(珍原縣)과 삼계현(森溪縣)으로 고친 따위가 그러하였다. 요컨대 고유한 원래 지명의 소리(音)라든지 뜻이라든지에 의거해서 대담하게 아화(雅化)된 한자 이름으로 바꿔 버린 것이다. 이 한화정책은 2년 뒤에 중앙관직의 명칭을 역시 아화시킨 한자 이름으로 고친 것이나 마친가지 원칙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전제주의의 강화, 중앙집권의 강화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위와 같은 9주제하에서 장성지역은 무진주에 속하였다. 앞서 당나라에서는 백제를 멸망시킨 다음 그 옛 땅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비롯한 1부(府) 7주(州)를 설치하였는데, 당시 고시이현 즉 원래의 장성은 사반주(沙泮州)의 치소였다. 그리고 삼계는 이 사반주에 속해 있었으며, 진원은 분차주(分嵯州)에 소속되어 있었다. 백제가 멸망한 직후의 웅진도독부 시절, 한때 장성지역은 사반주와 분차주에 나뉘어 소속되어 있었던 셈이다. 그러다가 신라가 당을 몰아내고 9주제를 시행하면서, 모두 무진주 소속의 군현으로 되었던 것이다.
무진주 치하에서 장성지역에는 갑성군 즉 본래의 장성군과 진원현․삼계현이 있었는데, 갑성군이 진원현과 삼계현을 영현(領縣)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당시 장성지역민들은 경주에서 파견된 왕경 귀족 출신의, 아마도 6두품 출신의 군태수와 현령 혹은 소수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토착세력가들은 백제 사비시기와 유사하게 이들 지방관을 보좌하는 말단 행정업무를 맡고 있었을 것이다.
군․현의 아래에는 촌이라는 보다 작은 행정구역이 설정되어 있었다. 행정적으로 설정된 촌은 자연촌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몇 개의 자연촌이 합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 정창원(正倉院)에서 발견된 신라장적(新羅帳籍)에 의해 알 수가 있게 되었다. 위의 장적은 4개 촌의 것이 남아 있는데, 그 중에서 촌주에 할당된 촌주위답(村主位畓)은 1개 촌에만 기록되고 있다. 그러므로 촌주는 4개의 자연촌 중에서 1개 자연촌에만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따라서 촌주가 관할하는 행정촌은 몇 개의 자연촌으로 구성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행정촌에는 그 지방의 토착세력가를 촌주로 임명하여 중앙으로부터 지방관이 파견된 지방 행정기관의 통제를 받도록 하였다. 촌주는 통일 전부터 있어왔으나, 통일 후 중앙으로부터의 지방통제가 진전됨에 따라서 그 지위가 법제적으로 더욱 명확하게 규정된 것 같다. 가령 신분적으로는 그들을 진촌주(眞村主)와 차촌주(次村主)로 나누어 이를 중앙귀족의 5두품과 4두품에 해당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또 행정적으로는 군태수와 현령․소수의 통제 밑에서 행정촌의 일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관등에서는 지금까지 받아오던 외위(外位)를 버리고 중앙귀족과 마찬가지로 경위(京位)를 받게 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촌주의 독자적인 중요성은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촌주와 비슷한 위치에 있는 것에 주․군․현의 리(吏)가 있다. 이 주․군․현의 리는 촌주와 같이 토착세력 출신이지만, 주․군․현의 말단 행정보좌직으로서 중앙정부에 대한 의존도는 촌주보다도 더 컸다고 해야겠다.
그러나 이러한 토착세력 출신의 지방 말단행정 담당자는 여전히 중요한 사회적․정치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 중에는 상당한 학식을 지닌 자들이 있기도 하였다. 근래에 발견된 경덕왕대(742~764)의 화엄경 사경(寫經) 발문에 의하면, 무진주․남원경․고사부리군(高沙夫里郡 : 古阜) 지방의 토착인 출신 경필사(經筆師)가 11명이나 기록되어 있다. 한문에 대한 소양이 없이는 경필사가 될 수 없을 것임이 분명하므로, 그들은 상당한 학문적 교양을 지니고 있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이들은 아마도 지방에서 일정한 학업을 닦을 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성지역의 경우도 위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중앙에서 임명하여 파견한 지방관의 통치 아래, 리 혹은 촌주와 같은 지역 토착세력가들이 조세와 공부․역역을 징수하고, 치안을 유지하며, 각종 종교의식을 집행하는 등, 지역민들을 직접 지배하는 형태가 아니었을까 짐작되는 것이다. 한편 앞서 언급한 경덕왕대 화엄경 사경 발문에는 통일신라시기 장성지역의 토착세력에 관한 기록도 들어 있어 눈길을 끈다. 지작인(紙作人)으로 나오는 나마(奈麻) 황진지(黃珍知)가 구질진혜현(仇叱珍兮縣) 즉 진원현 출신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지작인이라면 아마도 공장(工匠)이었을 법한데, 나마의 관등을 소지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지역의 토착세력가가 아니었던가 이해되고 있다. 나마라면 5두품 이상의 신분만이 나아갈 수 있는 신라의 제11관등으로서, 지방의 촌주급에게 흔히 주어지곤 하던 관등이었기 때문이다.
통일신라시기 장성지역의 상황을 알려주는 구체적인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위에서 잠시 언급하였던 신라장적에 의하여 일반적인 추측이 가능할 따름인데, 서원경(西原京 : 淸州) 부근의 4개 자연촌락의 실태를 세세히 기록한 이 문서와 같은 것이 당시 장성지역에서도 작성되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3년마다 작성한 것으로 되어 있는 이 촌락문서에는, 각 촌의 호구와 우마수(牛馬數)․토지면적을 비롯하여 뽕나무․잣나무․호도나무의 숫자 따위가 기록되어 있다. 촌의 인구를 연령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누어 역역을 징발하는 기준으로 삼고 있었으며, 호는 9등급으로 나누어 조부(租賦)를 징수하였다. 지목별(地目別)로 토지의 면적을 기록하는 것은 물론이고, 우마와 잣나무․호도나무의 숫자까지 일일이 기재하여 과세의 대상으로 삼았다. 당시 농민들의 신라 중앙귀족에 대한 경제적 부담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겠는데, 당시 장성지역의 농민 또한 거기에서 예외가 아니었을 것임은 물론이다.
(장성군청 홈페이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