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창작에 대한 열정을 담아 최근 발간 되었다. 그 중 시 2편을 소개한다.
<노을의 뼛속으로 어둠과 달이>
산을 넘으려는 늙은 해를 바라본다
역광을 발산하며 서녘의 구멍을 뚫고 있는 열아홉 시
처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오고 대추는 하늘에서 익는다
노을의 눈꺼풀 속으로 제 숨 풀어놓는 초저녁
도무지 저 인기척 없는 형물
하늘 바가지로 꽃을 받아내고 있는 것이다
한 생각으로만 하루를 넘기는 은밀한 화음花陰
막막이라는 그 수렁에 모든 세간을 수납한다
누구나 살면서 피눈물 몇 동이쯤 쏟아내지 않았겠는가만, 세상의 창문이 나로부터 열릴 때 일상의 물음이 멍 자국을 증언할 것이다
밤의 영혼 속으로 풀벌레 소리는 뼛속까지 파고드는데
달은 밝기를 더하며 내 안을 통과하고 있다
<아버지의 못>
낡은 벽지를 뜯어내니 여기저기 못 자국이다
헐거워져 빠져나간 것들과 아직 그대로 박혀 있는 멈춤의 시간이
비장한 연대를 이루며 통점으로 남아 있다
벽에 귀를 대자, 쾅쾅 아버지의 망치 소리가 들린다
충격에 저항한 것은 몸이 뒤틀리고
힘의 방향으로 뚫고 들어간 것은 콘크리트 벽 속에서 팔딱거리고 있다
옆집에서 쾅쾅 못 박는 소리조차
은밀하고 신비한 내 슬픔을 관통하고
불모의 터 같은 벽에선 암각화 냄새가 났다
왠지 불안했던 휘어짐의 각도들이 장도리에 꿰어 나오고
예전에 피었던 꽃들은 빛바랜 흑백 사진처럼 누름꽃이 되었다
세월을 마중 나온 상형문자 같은 목숨
허름한 옷과 중절모가 수직의 힘에 의지한 채
어떤 소문도 발끝의 힘을 빼는 동안 아버지의 곧은 등뼈는 차츰 휘어
유통기한이라는 녹물에 꺾이곤 하였다
가끔 불꽃 같은 본능을 주체하지 못해 반대방향으로 균형을 잃고
어머니 가슴에 대못이 박힐 때면
벽지에 난무하는 꽃잎의 시름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는 그때마다 죽은 새를 날려 보냈다
못 서너 개 빼내고 그 위에 새로운 벽지를 바른다
모란꽃 발등 아래 구름의 얼굴 씻기는 소리가 들리면
아버지는 연장통에 들어있는 구부러진 못을 주춧돌에 반듯하게 펴
당신의 등고선에 어머니의 웃음을 걸어둘
추억을 못질하고 있다
#조선의 시인 #《반대편으로 창문 열기》
첫댓글 좋은 글 읽고 가져 갑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