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효근 신작시〕
진화의 척도 외 1편
폭설이 내려
울타리 밑에서 낟알을 찾는 참새 몇 마리
배고픈 길고양이 그걸 잡아보겠다고
웅크렸다가 튀어나가는데
보란 듯이 포르릉 참새는 날아가버린다
어느 쪽이 진화가 앞선 것일까
누가 더 불쌍한 것일까
먹고 살겠다고
날개 대신 날카로운 송곳니와 발톱을 가진 고양이와
송곳니도 발톱도 포기하고 날개를 택한 새가 있다
송곳니도 없어서 날 선 발톱도 없어서
그렇다고 날개도 없어서
어떻게 하면 동종 아닌 것과 동종까지를 둘러먹을까
잔머리만 잔뜩 발달한 종도 있다는데
더 먹고 더 가지기 위해서
날개 대신 미사일을 만들어 쏘고
단추만 누르면 지구가 여러 번 멸망할 핵무기를 만든 종도 있다는데
길고양이는 굶을지라도 활을 만들지 않는다
참새는 굶을지라도 남의 곳간을 헐지 않는다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것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진화가 그 긴 여정에서 자연 선택의 결과라고 한다면
새와 고양이와 호모 사피엔스 가운데
어느 쪽이 앞선 것일까
불쌍한 것은 어느 쪽일까
눈물을 반성하다
세상의 모든 배후가 슬픔이라는 것을
눈이 먼저 눈치채버렸을까
책을 읽다가도 복받쳐
그때마다 책 종이가 젖기도 하고
일면식도 없는 이가 우는 것만 보아도 눈물이 흘렀어
TV. 테마기행 중간에 아프리카 아이 돕기 광고만 보고도
눈물샘이 달아올라
내 눈물이 너무 저렴한 것 같아 늘 부끄러웠는데
심지어는 하품만 해도 눈물이 넘쳤는데
안구건조증이란다
우는 법이 잘못 되었을까
울 때가 적절치 않았던 것일까
내가 낭비한 눈물로 내 안구 하나 적시지 못했다니
울고 나와서 울면서 걸어왔으나
아직도 슬픔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인지
어금니 사려 물고 울지 않으리라 버티는 아이가 내 안 어디에 살고 있다는 것인지
그동안 흘린 눈물은 함량이 부족하거나
가짜였다는 듯
오늘 새로운 눈물을 처방받았다
〔복효근 기 발표작〕
그 사이 별이 뜨고 외 2편
오후가 되자 바람이 잦아들고
서녘 하늘엔 노을이 깔리기 시작했다
꽃핀 쑥부쟁이 몇 포기를 피해 예초기가 에둘러 지나간 자리
산책길엔 고라니 똥 한 무더기
우린 그렇게 길을 함께 나누어 쓰고 있었구나
고라니도 한참 하늘을 올려다보았겠다
매에 쫓기던 새들도
지금쯤 둥지에 들었을 것이다
길 복판으로 기어드는 지렁이를 풀밭에 던져주었다
세상은 늘 조간신문 정치면 같아도
누군가의 등을 토닥이고 싶은 저녁은 있다
눈물 찬讚
1.
눈물이 별이 된다는 것을 꼭 믿진 않지만
눈물이 굳어 돌이 되지 않는 걸 보면
눈물이 별이 되지 않는다고
굳이 믿지 않을 이유는 없지
2.
어떤 별은 다이아몬드로 이루어진 것도 있단다
다이아몬드 별에서는 꽃이 피지 않는다
내 몸이 흙으로 빚어진 것은 얼마나 행운인가
그러니 울어라
3.
울면서 태어나고 울면서 살다가 울면서 죽어도
이 별이 아니고서는 그럴 수도 없다
눈물 뒤에서 꽃은 피고 별은 태어난다
위한 연가
네가 아니기를
저 앞에 오는 사람이
네가 아니기를
부디 아니기를
내일 또 내일 어느 날에 딱 한 번만이라도
스쳐 가는 네가
네가 아니기를
서로를 알아보더라도
모르는 사이처럼 모르는 사이였으므로
그냥 스쳐 가기를
사랑하였노라 말하는 일은 없기를
사랑한 적 없었으므로 사랑한 적 없는 것처럼
무사히 건너가기를
30년 뒤에 저 앞에서 오는 사람이 부디
네가 아니기를
백 년 뒤에라도
딱 한 번만이라도
부디 네가 아니기를
어제 또 어제 그 어느 날에
내 곁을 스쳐 간 사람이
네가 아니었기를
없었던 것처럼 없었으므로 네가
부디
아니기를
〔복효근 자선시선〕
짧은 시를 위한 제언
-짧은 시 운동 동인 ‘채송화’의 지향점을 바탕으로
복효근
1. 작지만 작지 않은
저 하늘에도 풍랑이 거센가 보다
쪽배 한 척 위태롭게 기울었다
그쪽에서 보면 이쪽이 더 위태로워서
조난신호마저 보내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실눈 겨우 뜨고
이 난파선의 침몰을 지켜보고 있지는 않은지
졸시. 「하현下弦」. 채송화 27호
집이 너무 커서는 안 됩니다. 집이 사람을 압도하고 사람을 부리기 시작하면 사람은 집에 눌리어 집을 모시고 살아야 하는 꼴이 되고 말지요. 쓰지 않고 돌보지 않은 공간이 많으면 먼지가 주인이기 쉽습니다.
존재의 집이라고 하는 언어 또한 그렇지 않을까요? 언어예술의 정수라 할 시는 더욱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길어야 할 시가 없는 것은 아니나 한참 읽다보면 앞에 내용이 떠오르지 않는 시, 쓸 데 없는 군살이 많은 시, 너무 친절하게 이것저것 다 설명해주는 시를 보면 허술하게 지어진 집에 들어서는 것 같이 꺼림칙합니다. 유행처럼 과도하게 시가 산문화되어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채송화의 짧은 시는, 허우대는 껑충하지만 색깔도 향기도 갖추지 못하고 웃자란 화초 같은 작금의 시에 대한 반성에서부터 출발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제시되었던 모든 시론이 시의 정답이 아니듯 채송화가 시에 대한 어떤 정답을 갖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지양해야 할 것과 지향해야 할 것을 함께 논의하고 바람직한 전범을 찾아가는 길 위에 있을 뿐이지요. 그렇다고 답에 가까운 답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압축과 긴장이 그것이지요. 이는 절제된 언어형식 속에서 가능합니다. 물론 짧다고 능사가 아닌 것도 분명합니다. 짧되 그 안에 구조가 있고 논리가 있으며 사유의 체계가 있고 이야기가 있으며 가락이 있고 그림이 있어야겠지요.
말처럼 쉽지는 않을 줄 압니다. 크고 화려한 외양보다는 절제되고 정제된 언어 형식으로 독자의 마음속에 쏙 안길 수 있는, 그래서 언제든지 혀에 굴려보고 맛보고 음미할 수 있는 작은 시를 꿈꾸어봅니다. 시인과 시와 독자의 위의를 찾는 작지만 작지 않은 일이기도 합니다.
2. 짧은 시 한 편의 긴 울림
젊은 날 만난 한 편의 짧은 시가 전광석화처럼 가슴을 스치며 내 삶의 지침을 돌려놓았습니다. 이 한 편의 시는 오랫동안 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으며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흐르는 바람으로
가락을 빚는 그 사람
아 나는
얼마나를
그 창조의 가슴과 손으로
하늘에 사무치는
주문이고 싶으랴
봄날 아침
문을 여는 꽃
죄 없이 웃는 영혼이고 싶으랴
허영자 「피리」전문
음악(피리)을 두고 한 말이지만, 모든 예술에 두루 해당되는 말이겠지요. 예술이라 함은 “바람으로 가락을 빚어내는” 일처럼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이라는 것. 여기까지는 아는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이 시가 들려준 첫 번째 이야기는 시는 “하늘에 사무치”는 그 어떤 것이어야 하며, “죄 없이 웃는 영혼”을 꿈꾸는 작업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의 진정성과 자기구원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지금도 지침으로 삼고 있습니다.
한편, 등단 후 많은 시간이 지난 이 즈음, 이 짧은 시가 들려주는 또 하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시(예술)의 형식에 대한 것입니다. 위에 인용한 시는 길지 않습니다. 그러한 고로 늘 혀에 올려놓고 노래처럼 궁굴리곤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럴수록 더 보탤 것도 없고 더 뺄 것도 없는 탄탄한 언어구조에 놀라게 됩니다. 무한하게 확장되어가는 의미의 외연이 절제된 언어형식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닫습니다. 만약 이 시가 더 길었더라면 의미가 주는 충격과 쫀득한 형식미를 한꺼번에 통째로 감상하기는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군살을 뺀 근육질이 탄탄한 언어구조, 그 안에 역동적으로 출렁이는 의미의 세계, 우리가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돌아봅니다. 내가 쓰고 있는 시에도 다이어트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3. 시와 삶의 본질을 참구參究하는 절제된 언어형식
화가가 붓으로 수묵 매화를 칩니다. 화가는 거칠고 굽은 가지 하나를 구불텅 그려놓고 잔가지 몇 개를 배치하고는 그 끝에 활짝 핀 매화 몇 송이를 얹어놓습니다. 그리고 몇 개의 점을 가지 중간 중간에 찍어 덜 핀 매화몽우리를 그려놓습니다. 그게 전부였습니다. 화선지의 대부분은 여백으로 둔 채 붓을 놓고 두인과 낙관을 누릅니다.
화선지가 넓으니 매화 가지를 더 많이 치고 활짝 핀 꽃을 더 배치하면 더 화려할까요? 아름다울까요? 오히려 수묵의 고졸함을 해치고 말았을 듯합니다. 여백은 보는 자의 상상으로 채워보라는 것 같습니다. 텅 빈 가지에 핀 몇 개의 매화에 시선이 집중되고 그것이 뿜어내는 암향을 그려봅니다,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을 무렵 드문드문 피기 시작하는 매화 한 가지에서 화가가 담아내고자 하는 메시지를 읽어냅니다.
모든 그림이 이렇듯 간결할 수는 없습니다. 화면이 가득 차게 그려야 할 그림이 있습니다. 채송화가 추구하는 그림은 꽉 찬 그림이 아니라 간결하고 절제된 그림입니다. 생략과 압축이라는 시의 형식적 개념정의에 충실하고자 합니다. 여기엔 작금의 우리시가 점점 느슨한 형태로 길어지고 산문화되어가고 있다는 반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물론 길게 써야 할 시가 있음을 부정하진 않습니다. 채송화는 10행을 넘지 않은 정도의 짧은 시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통 이렇게 짧은 시를 써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10원도 불필요한 곳에 쓰면 과소비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에서 쓰는 단어 하나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습니다. 채송화는 꼭 필요하지 않은 언어를 최소화하여 간결하고 단단한 언어구조를 지향합니다. 우리에게 시조라는 짧은 시의 전통이 있지요. 매우 훌륭한 양식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수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이 형식을 지키기 위해 불필요해 보이는 조사를 넣거나 글자 수를 맞추느라 적절해보이지 않는 어휘를 사용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까운 이웃에 하이쿠라는 시 양식이 있지요. 물론 변형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 역시 글자 수가 정해져 있기는 시조와 마찬가지입니다. 채송화는 시조와 함께 하이쿠의 언어형식을 참조합니다. 그러나 간결하고 절제된 언어형식이라는 점 말고는 이들처럼 정해진 양식에 매이진 않습니다. 하이쿠보다 더 짧을 수도 있고 시조보다 더 길 수도 있습니다.
꽃이 작다고 해서 다 채송화는 아닙니다. 채송화는 짧은 형식 자체를 지향점으로 삼지는 않습니다. 채송화는 이 짧고 간결한 언어구조를 그릇으로 삼아 우리 시가 지향해야 할 점들을 찾아 담고자 합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며 찾아가야 할 지점이 어디인가는 꾸준히 모색할 것입니다. 시와 삶의 형식과 본질에 대하여 참구할 것입니다.
복효근
1991년 『시와 시학』으로 활동 시작
시집 『예를 들어 무당거미』, 『중심의 위치』 외 다수
시선집 『어느 대나무의 고백』,
디카시집 『허수아비는 허수아비다』 등
편운문학상, 시와시학상, 신석정문학상, 박재삼문학상,
시와편견문학상 등
첫댓글 눈물 讚 읽으며 눈물 흘렸습니다
감동적인 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