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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학목사 편 ∙∙∙∙∙∙∙∙∙
● 성결대학교 20회 졸업
● 성결교 신학대학원 졸업(87년)
● 서산지방회장 역임
● 일광교회 담임목사
서산시 성연면 일남리 2구 431
☎ 0456-662-7881, 669-4992
◈ 항상 있어야 할 세 가지 (고전 13:13)
◈ 속지말라! (고전 15:33-34)
항상 있어야 할 세 가지
고전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지금 생존경쟁이 치열한 현대인들이 각자 생존권을 지탱하며 살아가려면 누구나 꼭 필요한 세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영적 존재의 인간은 두 가지 측면에서 항상 있어야 할 세 가지의 필요성을 느낍니다.
먼저 육적인 측면에서는 의식주(衣食住) 이 세 가지가 항상 있어야 하고 다음 영적인 측면에서는 믿음, 소망, 사랑(信望愛) 이 세 가지가 항상 있어야 합니다. 양면성에 있어서 세 가지는 모두 생사와 직결되는 중대한 사항들로서 먼저 일반인들이 공감하고 있는 의식주 문제부터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평범한 의식주 문제가 얼마나 고귀하고 소중한 것인지 매일 매일 실감하고 사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경제성장의 혜택으로 물질의 풍요로움 때문에 지나친 과소비와 사치로 도덕성의 불감증이라는 중병에 걸려 사회적인 진통을 겪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의식주 이 세 가지가 왜 그렇게 중요한지 다양하게 생각해 보면,
첫째 : 衣=옷 입는 것이 있어야 한다.
인간이 최초로 범죄한 후 옷이 없었으면 못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우선 수치심 때문에 밖에 나다닐 수 없었을 것이고 또 겨울의 살인적인 한파속에서도 살아남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옷을 입으므로 인품이 돋보이고 생존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오늘의 의복문화는 언제 어디서 왜 시작되었는지 그 기원을 성경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창세기 3:21에 보면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무죄의 세계에서 유죄의 세계로 전락하여 두려움에 빠져 있을 때 인자하신 하나님은 가죽옷을 입혀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죽옷이 되려면 가죽의 재료 제공을 위해 짐승이 죽어야 하는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조물주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범죄한 피조물의 인간을 하나님은 멸하시기 전에 먼저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셨다는 사실입니다. 창조주께서 범죄한 인간을 사랑하신 구체적인 표현이 성경 두 곳에 나타나 있습니다. 구약 창세기 3장 21과 신약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입니다. 너무나 감동적이고 감격스러운 모습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최초로 범죄의 수치심과 불안 공포에 빠져 있는 아담과 하와를 위해 하나님은 짐승의 생명을 담보로 하여 인간의 수치를 덮어 주시고, 몸을 보호하시고, 인격을 사랑한다는 은총의 표현이 가죽옷을 입혀주시므로 의복에 대한 깊은 의미가 있음을 알게 해주신 것입니다.
추측컨대 에덴동산을 좇겨난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진 옷은 두루마기 같이 긴 가죽 오바였을 것입니다. 험한 가시밭 세상에 몸을 보호하려는 깊은 배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잠시 우리들의 의상에 대해 생각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요즘 현대 여성들의 옷 모양이 어떠합니까? 왜 심한 노출이 유행인가?를 보면 두 가지 심리를 발견할 수 있는데,
1) 자신의 독특한 아름다운 미를 마음껏 표출해 보려는 단순한 심리
2) 여러 사람들의 관심을 의식하고 자기에게 시선을 끌어 보겠다는 심리적 의지의 표현입니다. 전자는 자신의 자유로운 의사에 맡길 수밖에 없지만 후자는 심각한 문제점과 위험성이 내포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여성의 독자들은 뭔가 깨닫고 자기를 안전하게 지켜 가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단순히 자신의 매력을 과시하려다가 상대방에게 혐오감을 주거나 범죄(성폭력)의 충동을 일으키게 하여 유혹의 원인 제공자로서 자기함정에 빠져 인생을 망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청소년 탈선이나 가정파괴 등 사회병폐의 원인 분석 보고서를 보면 88%가 문제입니다. 그 중에 일시적 충동이나 호기심이 64%, 계획적인 것이 24%나 됩니다.
엄격히 말한다면 성범죄의 원인제공은 선악과 따먹은 하와 후손의 여성쪽에 비중이 크다는 결론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인간에게 의복의 은총을 주셨는지 그 의미를 깊이 헤아려 보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 食 - 먹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풍요로운 식생활 문화는 한마디로 향락주의에 빠져 너무 낭비가 많다는 지적을 하고 싶은 안타까운 심정입니다.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할 지구촌에서 한쪽(북한) 구석은 너무 없어 굶어 죽어 가는 것을 보면서도 한쪽에서는 과소비와 쾌락에 눈이 멀어있으니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식물이 어디서 왔으며 왜 필요한가? 그 근원은 성경이 명확하게 입증하고 있습니다.
창 1장 11-12절에 기록된 것을 보면 인간이 창조되기 전에 조물주 하나님은 인간에게 필요한 식물을 다양한 종류대로 만드시고 모든 인간은 그 식물을 섭취함으로 건강한 삶을 지탱케 하셨습니다.
먹는 일에 지나친 과욕은 오히려 건강을 헤친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넉넉한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며 사는 사랑 실천과 뜻있고 행복한 삶의 비결을 가르쳐 주시기도 했습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개미 같은 인생도 있고 불로소득만 노리는 기회주의자 거미같은 인생도 있지만 여러 사람을 유익케 하는 꿀벌 같은 인생이 요구되는 세상입니다.
셋째 : 住 - 주택이 있어야 합니다.
주거생활은 고달픈 인생이 안식할 수 있는 유일한 보금자리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위해 에덴이란 주거의 보금자리를 주셨습니다. 집이 좋고 나쁜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 집에 누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가정 천국이 될 수 있고 가정 지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집 욕심부리다가 공직에서 쫓겨나는 것을 보고 있듯이 주거는 부동산 축재의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온 가족이 먹고 자고 쉴 수 있는 삶의 터전이란 의미를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제는 영적 생활에 꼭 필요한 것 세 가지를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잠시 살다가 없어질 육신 생활에도 의식주가 있어야 생존할 수 있듯이 영원히 존재할 나의 속 사람을 위해 항상 있어야 할 세 가지가 무엇인지 깊이 이해하고 하나도 빠짐없이 갖추어 두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주신 성경 말씀을 보면 그 세 가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 믿음이 필요합니다(합 2:4).
이 믿음은 종교적 신앙의 차원을 떠나서도 꼭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남편과 아내 사이의 믿음이 무너지면 이혼으로 끝나고 말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인간이 올바로 사는데 든든한 반석과 같은 것입니다. 서로 믿지 못하고 산다면 얼마나 불안하고 고통스러울까요? 오늘 성경이 말하고 있는 믿음은(잠 3:5-6)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아버지란 사실을 믿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과 나에게 영생을 보장키 위해 부활하신 사실을 믿을 때 죄의 형벌에서 구원을 받고 약속된 천국을 기업으로 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엡 2:8).
둘째,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시 62:5).
소망은 내일에 대한 희망이자 비전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나름대로 내일의 꿈과 희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자살이 왜 생겼을까요? 그것은 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꼭 가져야할 비전과 소망은 이 땅에 것보다 하늘의 영원한 것이 되어야 하고 궁극적인 소망은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는 것과 부활의 세계인 천국이 최상 최대의 소망인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거기서 왔기에 다시 본향으로 돌아가는 산 소망이 있어야만 합니다(딛 2:13).
셋째, 사랑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요1서 3:14).
사랑이 세 가지 중에 제일로서 사랑의 창시자가 하나님이시오, 사랑의 행동자가 주님이시며 사랑의 본체가 예수 그리스도시라 성경을 떠나 사랑을 논하는 것은 이론과 환상의 구호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사랑은 진리요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셔서 몸소 사랑을 보여주신 분이십니다.
인간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과 사랑을 먹어야 살게 되어있습니다. 텅빈 불상 속에 사장된 자비는 우상이요 맹종이지 결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곧 생명이요 영원한 능력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육적 생활에만 치우쳤던 것을 깨닫고 영적존재 속 사람의 생존에 필요한 믿음의 집을 마련하고 소망의 옷으로 단장하고 사랑의 진리를 먹으면서 영생복락의 삶을 준비하는 일에 더 바빠져야 할 것입니다.
속지말라!
고전 15:33-34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오늘 현대인들은 수없이 남을 속이기도 하고 또 속으면서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주변에 아직도 인생을 사기 당하며 살고 있는 안타까운 현장을 먼저 소개하면서 독자와 함께 어떤 것이 참으로 바른 생각이며 지혜로운 삶인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몇 일전 서산시 대산읍 독곳이란 동네에 출가한지 10년이 된 딸이 정신병에 걸린 것을 보고, 2백만원 짜리 굿을 했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이웃교회 목사님이 농촌경제가 어려운 줄 알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치료의 길을 상담하여 안내해 주었습니다. “따님을 위해 부모님이 모두 교회로 나가셔서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병원치료를 받으면 좋은 결과가 있을 테니 절대로 옛 풍습을 좇아 굿을 하거나 미신적인 행위는 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옛날부터 점쟁이나 무당을 좋아하는 가정은 한결같이 망해 버리고 자손들도 성공한 적이 없으니 속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러나 7명의 무당들이 2일간 굿을 하면서 “귀신(?)에게 정성(돈)을 바치며 큰절을 해야 낫는다.”라고 하였습니다. 무당의 속임수에 빠져 수 십 만원을 드리며 절을 해도 효과를 보지 못한 채 아까운 거액의 돈만 빼앗기고 말았답니다. 첨단의 과학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도 어리석고 사회가 혼란스러운가요? 영혼을 좀 먹는 암적 요소들을 누가 좀 과감하게 소탕할 자가 없을까요? 대도시는 사이비 이단종파에 시달려 단란하기만 하던 가정들이 파괴되어지며 악마의 세력에 미혹되는 것을 볼 때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아 답답한 심정을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온갖 거짓 귀신 판치는 세상이 되었나 봅니다. 교계나 정계에 세례 요한같은 정의의 지도자가 필요함을 절감합니다. 신약성경 누가복음 11장 17절에 보면 예수님이 그 당시 귀신들린 자를 좇아 고치시는 것을 본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보고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으로 병자를 고친다고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에게서 말씀하시기를 “귀신이 귀신을 좇아낸다면 자기들끼리 서로 분쟁하여 그 세력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라고 어리석은 군중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정신병자들을 창조자의 절대적인 능력과 권세 있는 말씀으로 치료하시고 마음의 참 평안과 자유를 주시면서 죄악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생명의 구세주이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의 귀를 거짓된 소리에 기울이면 사기 당하고 실패하는 인생이 되지만 하늘의 소리 진리의 말씀에 귀가 열리고 눈이 떠지면 인생이 부도나지 않을 뿐 아니라 영․육간에 엄청난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귀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하늘의 음성보다 땅의 소리, 세속적이고 거짓된 소리, 마귀적이며 퇴폐적인 소리에 귀가 예민한 사람은 인생을 망쳐 버리고 마는 무지한 귀, 영적 귀머거리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복된 소리를 따라 든든한 신앙 위에서 남을 유익하게 하는 성공적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0~12절에 기록된 말씀을 깊이 상고하며 묵상해 봅시다. 10절에 “도적(거짓종교, 이단자, 무당, 마귀, 삯군)이 오는 것은 도적질(평안과 돈, 건강 강탈)하고 죽이고 멸망(지옥행)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예수)가 온 것은 양(신자)으로 더불어 생명(구원, 영생)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영․육의 풍요로운 삶)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대하면서 무엇을 발견하고 느낄 수 있습니까?
그 다음 11절~12절 말씀은 오늘의 교회 모습을 보여 주시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신령한 목장이 되어야 합니다. 좋은 목장은 세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 온순한 양(신자)들이 있어야 하고 둘째, 양을 사랑하는 목자(섬기는 목자)가 있어야 하고 셋째, 쉴만한 초원의(성령의 은혜) 물과 좋은 꼴(생명력이 있는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건물치장이나 지도자의 인기로 지탱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화와 말씀의 능력에 붙들려 신자들의 삶속에 성령의 열매(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를 맺도록 양육하고 계속 가르치고 지키게 하는 교육(훈련)이 있어야 좋은 교회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이 시대의 교회다운 교회가 얼마나 될까요?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는 주님의 심정으로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말씀 위에 바로 세우기 위해 목숨 걸고 사역하는 예수 닮은 목회자가 있는 교회는 예수의 부활생명이 역사하여 성령충만한 교회로 만백성들에게 소망을 줄 수 있는 교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예수의 제자가 되지 못한 목회자 때문에 상처받는 신자들을 볼 때 가슴이 아파옵니다. 주님은 “섬기러 왔다”고 하셨는데 … 아직도 교회(신자)를 이용하여 자기의 풍요와 명성을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출세주의, 인기주의, 영웅적 권위주의 병에 걸려있는 자가 있다면 주님의 몸된 교회와 자신을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섬기는 자세로 고침 받아야 되겠다는 의식개혁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잘못된 부흥사들과 사이비 이단들에 속지 않도록 목회자는 주님을 본받아 생명걸고 교회를 지켜야 하고 잘못된 관행들을 바로 잡아 나가야 할 때가 왔습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더 이상 물량주의와 명예의 사탄에게 속지말고 흩어지며 나누고 섬기는 초대 교회로 돌아가 주님의 지상명령(마 28:19~20)을 수행하고 성결한 복음운동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생명의 교회가 되게 해야 합니다. 순수한 진리의 복음으로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신학교와 교회가 자유주의, 신비주의, 종교다원주의, 물량주의 세속에 오염되어 영적 혼돈 속에 많은 백성들을 방황하게 하고 있습니다.
제 2의 종교개혁이 필요한 때입니다. 인생은 위대한 스승이나 지도자를 만날 때 위대한 인생이 된다는 말과 같이 이제 우리는 깨어 일어나 더 이상 속이고 속는 인생이 되지 말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직접 만나봅시다. 지옥의 땔감으로 버려져야 할 내가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가는 놀라운 변화를 체험하면서 복음으로 살면 엄청난 축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유제곤목사 편 ∙∙∙∙∙∙∙∙∙
● 성결대학교 24회 졸업
● 성결교 신학대학원 졸업
● 합덕제일교회 담임목사
당진군 합덕읍 운산리 서동 675-44
☎ 0457-362-5534, 363-1956
▣ 저서 ▣
◉ 평신도를 위한 성경공부 씨리즈(1-4권)
◈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롬 8:31-39)
◈ 인간의 한계가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눅 5:1-11)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롬 8:31-39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나무의 뿌리가 흔들리면 그 나무는 얼마 못가서 죽습니다. 신앙 생활의 뿌리는 구원의 확신인데 이 구원관 흔들리면 바른 신앙인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본문 31절 이전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지예정하시고 불러주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하시며, 본문에서는 구원의 절대성에 관해 말씀해 주십니다.
1. 확신을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1.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31절-32절).
우리를 위하신다는 말씀은 편들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시편 118편 6절에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라고 했고, 이어서 7절에서는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편만 되어 주신다면 돈도, 명예도, 권세뿐 아니라 마귀도 나를 대적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대적하는 원수가 셋이 있습니다.
① 세상 ― 세상은 항상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온갖 세상은 불의와 불법이 판을 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② 정욕을 좇는 육신 ― 육신은 죄의 씨를 그 안에 가지고 있기에 우리는 언제나 그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③ 사탄 ― 사탄은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우는 사자와 같이 항시 달려듭니다(벧전 5:8).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0명과의 싸움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나아갈 때 승리했습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편들어 주시는데 무슨 말하리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편 되어 주시면 말이 필요없는 것입니다. 홍해같은 문제가 앞에 놓여 있어도 하나님께서 위하시면 말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시편 3편 5-6절에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시니 천만 인이 나를 둘러 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말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독생자까지 주셨는데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했습니다. 즉, 가장 귀한 독생자를 주셨는데 덜 귀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2. 송사할 자가 없습니다(33절).
송사는 고소와 고발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억울하게 고발하는 것을 참소라 하며, 그것을 하는 자는 마귀입니다.
욥기 1편 9절 이하에 보면 사탄은 하나님께 욥을 참소했습니다.
“하나님! 욥을 사랑하십니까? 그러나 하나님 욥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평탄하면 누구는 그렇게 못합니까? 환란을 당하면 욥의 마음도 좀 달라질 것입니다. 한번 시험해 보십시오. 환란을 당하면 욥도 별 수 없을 것입니다. 욥도 시험을 당하면 그 어려움을 감당하지 못하고 신앙을 저버릴 것입니다.”라고 송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욥은 많은 시험 가운데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하신 이상 우리를 송사할 자가 없는 것입니다.
3. 정죄할 자가 없습니다(34절).
판사의 최종 판결을 보통사람이 뒤집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재판장되시는 주님께서 의롭다고 판결하셨는데도 마귀는 자꾸 정죄케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죄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2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에서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니라”
이사야 5장 8-9절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가 누구뇨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헤어지며 좀에게 먹히리라”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 잡힌 여인을 보시고 군중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하시니 사람들이 다 사라진 후 그 여인과 마주 대하시는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리니 가서 다시는 이와 같이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는 감히 우리를 정죄할 자가 없는 것입니다.
4. 어떤 외적인 악조건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35절).
믿음으로 의를 얻은 사람, 하나님의 생명을 물려 받는 사람은 절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습니다.
본문에 보면 일곱 가지 고통이 와도 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일곱 가지 고통은 환란,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입니다.
2. 구원받은 자라도 일시적인 고난과 위기는 올 수 있습니다.
본문 36절에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어떤 자입니까?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어려운 시험과 질병 등 장애가 있을 때, 우리에게는 큰 문제인 것 같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큰 뜻이 숨겨져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한 가지 단면만 보고, “이것은 시험이다. 잘못된 증거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는가? 보다”라고 비관하지 말고 딱딱한 껍질을 깨보면 고소한 호도맛을 맛볼 수 있는 것처럼 고난과 환란 속에 숨겨져 있는 비밀을 발견해야 합니다.
3. 최후 승리의 결과가 있습니다.
1. 넉넉하게 이기게 됩니다.
내 힘으로 패할 수 밖에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넉넉히 이깁니다. 사무엘상 17장에 보면 다윗이 골리앗을 물맷돌 단 한 개로 쓰러뜨렸습니다. 물맷돌이 네 개나 남았으니 넉넉히 이긴 것입니다.
지글러가 가정예배를 드리는 중에 “6척 장군 골리앗을 아주 작은 소년 다윗이 이겼다. 다윗은 참 용감한 소년이었다”라고 설교하니 어린 아들이 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했답니다.
“아버지! 소년 다윗이 용감한 것이 아니라 골리앗이 용감하네요.”
“아니, 왜 골리앗이 용감하냐? 다윗이 용감하지.”
“아버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 다윗에게 겁없이 나오는 골리앗이 용감하지 않습니까?”라고 말하자, 지글러는 무릎을 탁 치며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나는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종속 선언을 하는 사람과 골리앗과 같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독립선언을 하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요한복음 16장 33절에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했습니다. 벌써 주님께서 이겨 놓으셨으니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또 사도 요한은 선포하였습니다. “대저 하나님께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었노라”(요일 5:4)
아버지의 성공이 나의 성공이요, 아버지의 승리가 내 승리가 되는 것이니 주님 승리는 내 승리인 것입니다.
2. 완전한 정복입니다(38-39절).
바울은 확신의 사람입니다. 어떤 외적인 조건 즉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들이 나를 넘어뜨리려 해도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당에는 출석하고 있는데, 아직도 구원의 확신이 없어 남들 앞에서는 구원받았노라고 말을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 혼자 고민하지는 않습니까? 구원의 확신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으십시오. 암벽 등반을 하는 사람에겐 자일과 같은 생명줄이 있습니다. 성도의 생명줄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잡으십시오. 그리고 요동하지 마십시오.
기도하면서도 믿음이 없어 흔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동하는 사람에 대해 바울은 야고보서 1장 6-8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신앙의 뿌리인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간의 한계가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눅 5:1-11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어떤 일에 경험이 풍부하여 자신감을 가지고 남다르게 일하는 사람을 일컬어 그 사람 나름대로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어부로서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기에 그 바다의 지형적인 특성과 물고기의 특성,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시간, 또 많이 잡을 수 있는 방법 등을, 누구 못지 않게 어부로서 갖추어야 할 여러 가지 경험과 지식들을 갖추었기에 밤만 되면 배를 띄우고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오곤 했습니다.
이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베드로는 밤이 가까워오자 그물을 손질하여 바다로 나갔습니다.
베드로가 고기를 잡고 있는 곳은 갈릴리 바다였습니다.
그런데 이 갈릴리 바다에 대한 별칭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긴네렛 바다(민 35:11), 디베랴 바다(요 21:1), 게네사렛 호수(눅 5:9)라고도 불렀습니다.
이 바다에서 베드로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한 마리도 못 잡고 새벽녘에 빈 그물만 씻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는 것이 본문 말씀의 대략입니다.
1. 베드로의 정신을 살펴봅시다.
어떤 일이든 성공한 사람들의 특징이 각기 다르지만 그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남다른 정신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에게서도 남다른 정신력이 있었음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근면성입니다.
고기를 잡되 초저녁에 조금 잡다가 새벽녘에는 피곤하다고 그만 둔다거나, 아니면 초저녁에는 잠을 자다가 새벽녘에 가서 고기를 잡을 수도 있겠으나 베드로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은 것을 보아 대단히 부지런한 사람이었습니다.
2. 끈기와 노력하는 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한두 번, 아니 열 번 스무 번, 한두 시간 아니 몇 시간 동안은 빈 그물을 끌어 올릴 수 있겠으나, 밤새도록 헛수고가 반복되었는데도 날이 밝도록 포기하지 않고 계속 했다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노력하는 정신이 뛰어났습니다.
3.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과감히 포기하는 정신이 있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잘되면 자신감을 갖습니다. 그러나 평상시에 잘되던 일이 하나하나 꼬이다가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데도 그 원인이 무엇인지 발견하지 못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려 합니다.
베드로는 언제나 자신감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밤새도록 그물을 던지고 끌어 올리면서 계속 빈 그물임을 보았을 때 그는 점점 자기를 포기하고 결국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고기가 한 마리도 안 잡히는데 아무 생각없이 밤새도록 그물을 던지지는 안했다고 봅니다. 처음에는 그물을 던졌고, 마지막에 가서는 자기 전체를 던지며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포기했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밤새도록’이라 표현되어 있지만, 이 말을 다른 말로 바꾸어 표현하면 이제까지 헛수고만 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헛수고할 때는 배나 힘이 듭니다. 헛수고할 때는 괴로움도 배나 더하게 됩니다. 헛수고할 때는 물질도 더 많이 투자해 보기도 합니다. 헛수고할 때는 사람도 다시 써보기도 합니다. 이 방법 저 방법 다 동원해서 그래도 가능성이 없으면 한계를 인정하고 포기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렇게 철저하게 실패하고 있는 순간에도 계속 지켜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지켜보셨을까요?
“이것이 한계로구나, 이젠 더 이상 안돼!”하며 포기하고 그물을 씻는 순간까지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제야 실패한 인간에게 다가서신 것입니다.
“자, 이젠 포기하는 거냐? 이젠 더 이상 네 방법대로 안되겠니? 다른 방법을 가르쳐 줄 테니 이젠 나와 함께 하자” 그리고 다가 오셨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다른 방법은,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2. 실패한 베드로의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1. 겸손했습니다.
5절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여기서 “얻는 것이 없지마는”이라는 말 가운데 여러 가지의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내 경험, 내 지식, 내 노력을 다 동원해 보았었을 뿐만 아니라, 당신의 제의가 현실적으로 타당치 못하지만 내 자신의 의지를 굽히고 말씀대로 따라하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낙심하고, 절망하고, 몹시 피곤에 지쳐서 자신을 포기하고자 하는 말이었습니다.
2. 순종함이 있었습니다.
본문 6절에 ‘그리한즉’이라고 했습니다. 그리했다는 말은 말만 한 것이 아니라 순종하고 그물을 깊은 곳에 던졌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엄청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서 꼭 기억할 일은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베푸실 때 반드시 자연섭리를 이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광야에서 백성들이 고기를 달라고 아우성을 치자 날아다니는 메추라기 떼를 바람을 통해 몰아 떨어뜨려 주셨고, 벳세다 광야에 모인 사람들의 배고픔을 아신 하나님께서 어린아이가 가지고 온 한끼 음식으로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돌이 떡덩이가 되게는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물이 깊은 곳에서는 기적을 베푸신 것도 자연 섭리를 이용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 깨달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깊은 기도,
깊은 찬송,
깊은 말씀, 묵상과 깊은 은혜 체험,
깊은 봉사가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무가치함을 알고 난 사람은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의 깊은 바다에 그물을 던질 수 있습니다. 아직도 깊은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에 자신의 그물을 내던지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아직도 의지하는 사람이요,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인정하는 사람이기에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3.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주께 맡긴 자의 결과를 봅니다.
1. 놀라운 만족을 얻었습니다.
본문 6절에 보니 고기가 얼마나 많이 잡혔든지 여기저기서 그물코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방법은 실패였으나 말씀에 의지했더니 놀라운 축복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아직도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결과 헛수고만 할 뿐 주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은 거리가 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헛수고만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풍성한 결실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인색하지 않습니다(빌 4:18).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과거의 생각에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과거의 습관과 방법에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과거의 자세에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말씀에 의지하여 나아가는 자세만이 필요로 합니다.
2. 나 뿐 아니라 이웃까지 복을 받았습니다.
본문 7절에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축복은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한 베드로에게 왔습니다. 그러나 이웃과 더불어 그 축복의 열매를 나눠 갖게 되었습니다.
3. 적극적으로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본문 8절에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본문 11절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베드로는 고기를 잡은 것에 만족할 수 있었으나 주님을 따라 더 큰일하겠다고 나섰습니다. 내 모든 것을 버려야 주님의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의 교훈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사상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주님과 같이 살려는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의 한계가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과거의 실패를 고백하는 일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지난 나의 실수가 잘못된 것만은 아닙니다. 자신의 수고가 열매가 없다는 것을 시인한다고 잘못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가 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을 시인하는 것도 죄가 아닙니다.
내 마음에 답답함을 주께 고하고 맡기면 주께서 접근하시며 인도하시고 책임져 주십니다.
시편 30편 11절에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지금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아직도 자신의 배 안에 앉아서 자신의 경험, 자신의 지식을 바탕으로 헛수고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깊은 은혜의 바다에 그물을 던져 보십시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시간을 적게 투자하고, 물질도 적당히 드리고, 염려와 수고도 적당히 하고, 말씀을 깊이 있게 들으려 하지 않고, 깊이 기도하려 하지도 않고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원하신다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므로 기적을 체험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김희신목사 편 ∙∙∙∙∙∙∙∙∙
● 성결대학교 24회 졸업
● 성결교 신학대학원 졸업
● 서울신학대학교 목회 대학원 졸업
● 단국 대학원 사회 복지과 졸업
● 現 충서지방 삽교교회 당회장
◈ 영성회복의 비결 (눅 24:13-35)
◈ 마지막 때의 신앙 (마 17: 1-23)
영성회복의 비결
눅 24:13-35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우리는 때때로 자신의 영력(영성)이 떨어지면서 영적인 침체기를 맞이하며, 목회사역에 치명적인 위기를 맞이하게 되며, 목회자의 탈진(Burnout)에 이르러 영적 사역을 포기하는 경우까지 보게 됩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 영성 회복이 안될 때 기도생활, 말씀생활, 형식적 설교 및 예배시 수동적 신앙인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영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며 주님과의 사명을 상실하게 되는 불쌍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예루살렘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저들과 동행했으나 눈이 가려져 예수님인줄 알아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눅 24:15-16). 영적 눈이 가려져 영의 본질이신 예수님을 발견치 못한 사례인 것입니다.
우리의 영성 회복은 날마다 주님을 발견하고 만날 때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사건입니다.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한 것이 영성 회복의 지름길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성 회복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요 ?
1. 예수님이 먼저 찾아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영적 침체가 올 때 우리는 좌절하고 비참해하며 염려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때 주님이 내 곁에 찾아오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 15절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매 하셨고 실망하여 고기잡이 하러간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새벽에 디베댜 바닷가에 찾아오사 실의에 찬 베드로에게 사랑으로 호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요 21:15-17).
영성 회복의 지름길은 과거에 주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고 현재도 주님이 날 얼마나 사랑하시고 계신가를 되새겨보며, 주님의 첫 사랑을 회복할 때, 우리의 영적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2. 말씀을 가까이 할 때 영성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누가복음 24장 32절에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 우리 속에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했습니다(27절). 그 동안 다양한 사역 속에 바쁘다보니 말씀의 지배 속에서 살지 못하고 말씀 중심으로 살지 못한 또한 지식적으로 하나님을 알려고 할 때 우리의 심령은 메말라지는 것입니다. 신학생 때보다 목회선상에서 더 성경을 가까이 하지 못함을 고백하면서 설교자로서의 말씀 연구보다도 하나님의 음성으로써의 말씀을 가까이 하며 묵상하고 충만한 말씀의 은혜를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히 4:12).
17세기 경건주의자였던 스페너는 교리적 전통신학에서만 머물 것이 아니라(딤후 3:5) 경건 신학으로의 삶의 회복이 일어나야 하며, 그의 저서 「경건을 동경함」에서 기도, 성경 공부, 생활의 순결을 3대 지표로 삼고 신앙을 부활시켰습니다. 또한 교회의 세속화 형식주의를 타파하고 성경반을 조직해 영적 성장을 위해 노력한 프랑케, 18세기의 요한 웨슬레, 19세기의 무디 등은 말씀과 성령 안에서 활동한 자들로서 예수의 현재성, 영적 눈이 띄어지게 한 모델들임에 틀림없습니다. 영성 회복은 성령의 글인 말씀으로 변화될 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3. 무뎌진 영적 감각을 회복할 때 영성은 회복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고 난 후의 최대 체험은 바울의 다메섹 체험이나 삼층천의 체험이 아닌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어주시고 오늘도 나와 함께 한다는 그 사실에 대한 확신입니다. 즉 구원의 은혜를 회복하는 길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님의 제자들 중 주님이 죽었다가 다시 산다고 한 말을 다시 기억해 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자들의 실의와 슬픔은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이지만 예수님을 죽은 예수님, 빼앗긴 예수님, 내 곁에 없는 예수님으로 생각했기에 슬퍼한 것입니다.
우리 속에 신앙적 감수성이 마비된 부분이 점차 커져 버릴 때 우리의 영성도 침체될 것입니다. 우리의 노쇠한 석양의 신앙을 아침의 청춘으로 돌아오는 신앙으로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신앙은 항상 현재 진행형이므로 날마다 성령 충만할 때 영적 회복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4. 일상 생활에서 그리스도의 현재성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오늘 본문 30절에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의 눈이 밝아져 그 인줄 알아보았다고 했습니다. 이 떡은 성만찬 떡도, 오병이어의 떡도, 광야의 만나떡도 아닌 가난한 사람들의 소박한 한끼의 식사였습니다. 우리는 소박한 일상의 삶 속에서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감사할 때 우리의 영성이 회복되리라 믿습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 교인들의 문제가 이원론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무조건 부정할 때 거기서 진정으로 살아있는 영적 은혜를 맛볼 수 없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의 주님, 생활 속에서 주님과 함께 동행하시는 만남과 교제의 삶이 진정 영적 회복의 삶이며 날마다 우리 안에서의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때 능력있는 일꾼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 때의 신앙
마 17:1-23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다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 이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마태복음 16장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이고 17장은 변화산상의 예수 그리스도 사건입니다. 이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계시적 고백신앙과 진리적 체험신앙의 확인이요 강조입니다.
예수님은 구원 성취를 향한 당신의 때가 다 됨을 아시고 예루살렘의 상경과 성전 청결, 십자가 수난을 앞에 두고 제자들을 향한 신앙적 무장을 위해 가이사랴 빌립보의 신앙고백 확인과 더불어 천국체험을 통한 종말적 신앙을 확인시켜 주신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의 사건은 종말을 사는 현대 크리스천의 신앙의 실존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신앙고백의 확인과 더불어 3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변화산으로 올라가사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위대성을 직접 체험시켜 주사 마지막 선교명령의 부탁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때를 사는 우리는 어떠한 신앙을 가져야 할까요?
1. 예수 중심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변화산상의 사건은 용모와 형체만 보였다는 종래의 해석보다는 8절의 예수만 보였다는데 더 관심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속사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초막, 엘리야의 초막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분만이 보였다는 결론적 사실 확인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현대 크리스천의 신앙의 위기는 예수가 희박하다는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실존적 의미는 그리스도안의 실존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의 위기는 그리스도 밖의 실존을 추구하는데 있습니다. 현대 크리스천의 신앙은 절대적 그리스도안에서의 실존 신앙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밖에서의 실존을 추구하는 크리스천의 삶은 혼돈이요, 무질서요, 사망이요, 죄악인 것입니다. 예수만 보여야 합니다.
「오직 예수와 신앙」주님의 모습에 감격하여 울고 주님 말씀에 의지적 결단과 자포자기를 통한 순종의 능력이 열매로 나타나야 합니다.
2. 우리는 문제해결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변화산상의 사건 이후 바로 강조한 내용은 겨자씨 믿음 즉 산을 옮기는 신앙이었습니다(20절). 겨자씨 믿음은 산을 옮기는 믿음인데, 당시 이스라엘 언어로 산을 옮기는 것은 어려운 것을 해결하여 풀어주는 스승을 의미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현대 크리스천의 신앙은 어떤 어려운 문제에 봉착해도 쉽게 실망하거나 타협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하는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와 믿음의 순종이 오늘을 사는 현대 크리스천들에게 더욱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은 사건 그 자체요 문제의 연속입니다. 어떤 위기적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방법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산을 옮기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을 통한 문제 해결은 우리를 승리로 인도하는 모세의 지팡이가 될 것입니다.
3. 천국소망의 신앙입니다.
본문 마태복음 17장 23절에 “죽음을 당하고 제 3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고 했습니다. 근심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의 단절상태의 부산물입니다. 제자들이 근심한 것은 부활이 아닌 죽음 그 자체에 실망했기 때문입니다. 근심은 절망의 뿌리입니다. 그리스도는 근심을 평안과 기쁨과 소망으로 바꾸어 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너희는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또 주님만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인생의 짐진 자들은 다 주님께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면 쉬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는 삶이 근심을 극복한 천국신앙이요, 부활의 실천적 신앙인 것입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의 신앙이야말로 어둠에 대한 초월이요, 희망이며 부활의 완성인 것입니다.
서창용목사 편 ∙∙∙∙∙∙∙∙∙
● 성결대학교 27회 졸업
● 성결교 신학대학원 졸업
● 평택대학교 대학원 신학과 입학
● 성광교회 교육목사
● 現 서울북지방회 주일학교연합회장
◈ 학사 에스라의 결심 (스 7:1-10)
◈ 믿음은 … 이겨냅니다 (창 13:10-13)
학사 에스라의 결심
스 7:1-10
이 일 후 바사 왕 아닥사스다가 위에 있을 때에 에스라라 하는 자가 있으니라 저는 스라야의 아들이요 아사랴의 손자요 힐기야의 증손이요 살룸의 현손이요 사독의 오 대 손이요 아히둡의 육 대 손이요 아마랴의 칠 대 손이요 아사랴의 팔 대 손이요 므라욧의 구 대 손이요 스라히야의 십 대 손이요 웃시엘의 십일 대 손이요 북기의 십이 대 손이요 아비수아의 십삼 대 손이요 비느하스의 십사 대 손이요 엘르아살의164
십오 대 손이요 대제사장 아론의 십육 대 손이라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저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으므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더니 아닥사스다 왕 칠년에 이스라엘 자손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과 느디님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때에 이 에스라가 올라왔으니 왕의 칠년 오월이라 정월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오월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사사기 2장은 역사의 전환기에 일어났던 비극을 보여줍니다. 6절을 보면 하나님을 섬기면서 은혜와 인도를 통해 가나안을 정복한 위대한 과제를 성취했던 한 세대가 가고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비극입니다. 신앙을 물려주지 못한 다음 세대의 비극이 기록된 부분입니다. 그들은 부모가 살아있는 동안은 교회에 출석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들의 삶에 능력이 되지 못합니다. 비극의 악순환을 거듭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다양한 세대를 사는 젊은이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은혜를 체험케 하는 일입니다. 믿음을 물려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훈련시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요즘 믿는 가정의 비극은 세상의 교육과 명예를 신앙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석․박사를 만들어 지옥에 보내려는 어리석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말씀이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교회 교육은 교사들과 함께 차세대 교회의 주인이 될 어린이들, 청소년, 청년들을 위해서 많은 재정과 정성을 아낌없이 투자하며 교육을 위해 지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음 세대에는 이들이 교회의 주인이 될 것이며 복음은 그들에 의해 땅끝까지 전해질 것임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장래는 우리 모두의 장래며, 국가, 교회, 가정의 장래입니다.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로 교육해야 합니다.
에스라는 아론의 16대손으로 스라야의 아들로 바벨론에서 태어났습니다. 에스라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로서 유대 포로귀환의 훌륭한 지도자 중의 한 사람으로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을 다 받은 축복의 사람입니다. 아닥사스다왕 때에 조국 이스라엘이 해방을 하자 바벨론 70년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동족들과 함께 귀국하여 이스라엘을 일으키며, 민족의 신앙부흥 운동과 사회개혁, 정신혁명 운동을 이끌어 낸 지도자였습니다.
본문 10절에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다”라고 했습니다.
에스라에게는 결심이 있었습니다. 이 결심이 삶을 추진해 나가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사람 에스라의 결심은 이스라엘을 그 백성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결심이었습니다.
1 율법을 묵상하기로 결심합니다.
에스라는 율법을 묵상(연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에스라는 율법에 익숙한 학자였습니다. 오리겐이라는 학자는 에스라를 “율법에 대한 가장 높은 학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실천적으로 율법을 다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만 이를 알려고 연구하는 중에서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7장 11-12절에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깊이 연구하는 중에 그 뜻을 바로 깨닫고 믿게 됩니다. 에스라는 여호와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는데 있어서 자신이 먼저 깊이 연구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시편 기자가 가르쳐 주는 대로 시편 19편 7-9절에서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라는 말씀을 항상 연구하여야 합니다.
시편 1편 2절에서는 이 율법은 “우리 인생들의 죄를 깨닫게 해주므로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시편 1편 1-2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이 율법의 말씀을 깨달을 때에 심령이 회복됩니다. 마음이 기뻐함을 얻습니다. 이 율법을 연구할 때에 지혜로운 자가 될 뿐 아니라 하나님께 복을 받는 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2. 율법을 준행하기로 결심합니다.
에스라는 율법을 묵상(연구)한 것만이 아니라 율법을 실천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삶을 위해주신 것이므로 반드시 묵상하여 깨달아 알고 나아가 실행하여야 하는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배워 아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행하는 일이 문제입니다. 야고보서 4장 17절을 보면 “오히려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된다”고 야고보서는 말합니다.
창세기에서 우리는 노아가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을 명령으로 받고 120년 동안이나 꾸준히 그대로 믿고 방주를 짓는 일로 시작해서 실천한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6장 22절을 보면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더 준행 하였더라"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7장 5절을 보면 노아는 방주를 짓고 준비하는 일 뿐만 아니라 방주 안에 들어가는 명령까지도 그대로 다 준행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율법의 근본은 인간을 살리기 위한 생명의 길을 가르쳐 지키도록 명령한 것입니다.
에스라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였으나 말만 하는 지도자는 아닙니다. 국민들로 하여금 따르도록 본을 보여준 책임있는 지도자였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지켜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율법을 준행함으로 노아와 아브라함과 다윗이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율법은 준행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율법을 행한다고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성도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행해야 합니다.
3. 율법을 가르치기로 결심합니다.
에스라는 율법을 가르치기로 결심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세상에서 가장 귀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혼자 연구하여 행하는 것만 하는 것은 그 보배를 홀로 가지고 있는 것이며, 자신이 먼저 준행하면서 또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그 보배를 아름답게 사용하는 것이라고 여긴 것 같습니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자신이 스스로 연구하고 또 준행 하였으며 가르치는 일에 전념을 다했습니다. 교사들은 에스라의 마음으로 가르치는 일에 임해야 합니다.
얼마나 바람직한 일입니까? 자신이 솔선 수범으로 준행하고 가르치는 일이야말로 책임 있는 교사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생명의 법이기 때문에 이를 가르쳐 깨우치며 알게 하지 아니하면 그 피값을 파숫군에게 찾겠다고 했습니다.
에스겔 3장 20절 “또 의인이 그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 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라 그가 그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 피 값은 내게 네 손에서 찾으리라”
출애굽기 18장 20절에서는 “그들에게 율례와 법도를 가르쳐서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그들에게 보이라”고 말했습니다.
신명기 6장 7절에서는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라”고 했습니다.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학사 에스라가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율법 책을 읽을 때에 백성들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굵은 베옷을 입고 티끌에 무릅쓰며 모든 이방인들과 절교하고 자기의 죄와 열조의 허물을 자복하고 여호와께 경배했습니다. 에스라는 학자로서 율법에 익숙하였지만 계속적으로 묵상하는 겸손한 학자였습니다.
또한 연구한 것을 머리로만 간직한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 실천한 신앙의 지도자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로 가르친 위대한 스승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좋은 교사란 자신이 먼저 잘 배우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더 배울 것도 없고 더 알 것도 없다는 자만에 빠지는 사람은 벌써 좋은 교사는 아닙니다. 항상 배우기를 힘쓰고 배울 기회를 찾고 만드는 사람만이 좋은 교사로서의 자질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리고 누가 무어라 해도 좋은 교사란 잘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잘 가르치기 위해서는 가르치기를 즐겨하는 열심과 가르쳐야만 되겠다는 사명감과 가르치는 기술(교수법)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가르치는 일에 흥미가 없어 하거나 태만해 하거나 성의가 없어 가지고는 좋은 교사가 결코 될 수 없습니다.
좋은 교사는 또한 좋은 것을 가르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나만 많이 알고 잘 가르치는 것으로 좋은 교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잘 가르치되 좋은 것을 가르쳐야 좋은 교사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가르치는 일에 능란하고 익숙해 있을지라도 그가 가르치는 내용이 사람됨과 장래를 위해서 건전하고 유익한 것이 못될 경우 결코 그는 좋은 교사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좋은 교사가 가르쳐야 할 좋은 것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교과서입니다. 아울러 이 세상을 바르게 이끌어갈 가장 아름다운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교사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가 되심과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아버지가 되심과 그의 성령이 우리들의 보혜사가 되신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합니다.
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말씀을 잘 알지만 세상에 대하여 빛된 삶을 살지 못한다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말이나 글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가르친 만큼 실천해야하고 교사가 먼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장래에 누군가가 그들에게 “너를 가르친 믿음의 스승이 누구냐? ”묻거든 “네, 제 믿음의 스승은 예수님입니다.” 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이름을 불러주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올해도 가르치는 일을 위해 더위와 추위와 피곤함과 싸울 사랑하는 여러 교사님들께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은 … 이겨냅니다
창 13:10-13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 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믿음은 성도로 하여금 기근을 만나게도 하며 갈등도 겪게 합니다. 이것이 아브람이 겪었던 일입니다. 아브람은 처음 기근을 만났을 때 실패하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보다 기근을 더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큰 실패를 경험한 아브람은 두 번째 갈등과 기근에서 믿음으로 서게 됩니다. 아브람의 승리의 원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자신의 이익과 명예를 하나님을 인하여 포기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포기는 믿음의 시작입니다.
아브람은 롯에게 찾아가서 이렇게 제안합니다.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리라
믿음이 없을 때는 자기 중심의 생각을 합니다. 모든 것의 중심은 자기 자신입니다. 그러나 믿음에 바로 서면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믿음이 없을 때는 자신의 손익분기점에 예민합니다. 손해보는 일은 절대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게 되면 손해도 볼 줄 알고 포기할 줄도 아는 여유와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이 없었던 롯은 이러한 갈등 상황에서 하나님을 선택하기보다 이해관계에 예민했고 물질과 눈에 보이는 세상의 행복을 따라갔습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 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10절)고 말씀합니다. 우리들 주변에는 우리를 유혹하고 현혹하는 세상의 물질과 명예와 쾌락과 자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행복을 약속하는 소돔과 고모라
롯은 선택했습니다. 롯은 자기가 본 세계가 자기를 행복하게 해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10절에 보면 롯이 바라보는 요단 들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① 물이 넉넉했습니다. 물이 많다는 것은 농사가 잘 되고, 모든 것이 풍족한 것을 의미합니다. ② 여호와의 동산같았다고 합니다. 잃어버린 에덴을 생각나게 할 만큼 아름다운 곳이라고 합니다. ③ 애굽 땅과 같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브람과 롯은 기근 때문에 애굽 땅으로 피신한 적이 있었습니다. 롯은 그곳에서 나일강을 중심으로 찬란한 도시문화가 꽃피었던 애굽 문명의 화려함을 보았던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물댄 동산 같고,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은 그곳은 행복이 보장된 곳처럼 보였습니다. 롯은 눈에 보이는 것에 온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그 땅이 어떤 땅입니까? 바로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역사적으로 가장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될 곳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분명 화려한 도시요, 롯의 마음을 훔칠만큼 매력적인 도시였지만 하나님이 없는 도시입니다. 화려한 것에 속지 마십시오. 그럴 듯한 곳에는 언제나 함정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롯에게만 주어진 유혹은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거주지를 선택할 때 많은 가능성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런데 집을 어느 곳에 얻느냐는 여러분 자신이 결정해야 할 몫입니다. 아마도 집 값이 빨리 오를 것으로 예상되거나 자녀교육이 편리한 곳에 집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직장선택 기준은 무엇입니까? 월급도 많이 주고 좀 더 다른 이들이 부러워 할 만한 직장입니까? 아니면 월급은 좀 적어도 하나님께 영광을 올릴 수 있는 자리입니까? 결혼을 위해 여러분이 선택한 남자나 여자의 선택 기준은 무엇입니까? 학벌 좋고 가문 좋고 능력 있어서 그와 결혼하면 나를 행복하게 해줄 것만 같은 조건들이 있기 때문에 선택하는 것은 아닙니까? 롯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내가 바로 롯입니다.
아브람을 떠난 롯
1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결국 롯은 하나님을 택하지 못하고 세상을 택하였습니다. 자신의 눈에 아름답고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향해 그는 용감하게 떠납니다. 아마 그는 아브람을 비웃으며 갔을 겁니다. 그러나 선택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입니다. 잘못된 선택에는 비록 그것이 10년이나 20년 후일지라도 반드시 댓가를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롯은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마치 부모가 아무리 이야기해도 알아 듣지 못하는 사춘기 아이들처럼, 아무리 이야기해도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알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롯의 비극은 아브람을 떠나면서 시작됩니다. 왜 아브람을 떠나는 것이 비극입니까? 아브람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가난했지만, 가진 것은 없지만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을 뒤따라 다니며 축복의 사람들을 만나십시오. 기도의 사람, 믿음의 사람들을 만나면 평생 후회가 없습니다.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12절)
아브람이 끝까지 거주한 땅은 바로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외로운 땅이었으며 기근이 있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그 땅을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롯은 세상을 따라가며 행복을 추구했습니다.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소돔까지라는 말이 나옵니다.
믿음없이 살면 ‘소돔까지’ 갑니다. 처음부터 그 곳까지 갈 마음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결국은 소돔입니다. 이 길은 멸망의 길이요, 심판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넓은 길로 가지 말고 좁은 길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넓은 길은 편하고 넓어서 많은 사람이 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좁은 길은 사람들이 피하는 길이요, 가지 않으려고 하는 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좁은 길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13절)
화려한 것과 쾌락 뒤에는 항상 죄가 있습니다. 넓은 길 뒤에는 멸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좁은 길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불편하다고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편하다고 평안을 얻은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매일매일 무엇에 기준을 두고 사십니까?
거듭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롯은 아브람을 떠났습니다. 아브람은 홀로 남았습니다. 믿음을 가지면 혼자되어지며 외로워집니다. 믿음을 가지면 세상의 인기를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래도 그 길을 가야할 것인가를 묻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청춘과 젊음을 아까워합니다. 그래서 어느 날 늙고 병들어서 모든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났을 때에야 비로소 후회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14절)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은 언제 찾아오셨습니까? 아브람은 롯과 갈등을 겪고 있을 때 손해볼 것이냐 말 것이냐를 가지고 많은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아브람은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포기와 손해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롯은 떠났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롯이 떠난 후에 하나님이 찾아 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하나님은 이미 아브람 곁에 계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계를 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기다림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응답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근을 만나고 갈등하고 고민할 때 하나님은 그곳에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때를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의 눈물을 보고 계시고, 한숨을 알고 계시며, 기도를 들으시며 우리의 믿음이 성숙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여러분의 믿음이 다시 태어나고 승리하길 원하십니다. 자기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새로운 생명 얻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얻기 위해서는 이런 고통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롯은 아브람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도 롯은 있습니다. 내 속을 들여다보면 롯과 아브람이 끊임없이 갈등합니다. 하루는 롯처럼 생각하고 또 하루는 아브람처럼 살아갑니다. 우리 안에 있는 롯과 이별을 고하시기를 바랍니다. 소돔이며 고모라며 우리의 눈을 속이는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그 거짓된 행복에 눈 감고 포기하십시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등에 강하신 약속의 손을 올리십니다.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믿음
믿음은 기근을 만나고 갈등을 겪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벗어나 승리하면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합니다. 한 번도 보지 못했고, 상상하지 못했고, 가보지 못했던 놀라운 세계를 보게 됩니다. 인간의 경험이라는 것이 너무나 뻔한 것 아닙니까? 공부해서 좋은 학위를 갖고, 좋은 직장을 얻고, 재벌이 된다고 해도 죽음 앞에 서면 한 주먹의 재에 불과합니다. 시간이 지나가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한 줌의 행복을 얻기 위해 얼마나 피나게 경쟁하고 싸우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과 동행하면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나는 상상할 수 없는 세계를 보게 됩니다.
롯이 떠난 후 아브람에게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믿음은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유대인이었고 그의 관심은 이스라엘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찾아 왔을 때 그는 새로운 세계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이전에는 개처럼 취급했던 이방인들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게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세계를 보게 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 유배당해 그가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버려진 땅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 곳에서 보게 된 것은 하늘의 문이 열리고 이리로 올라오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그는 새로운 세계에 접하기 시작했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있는 여러가지 하늘의 세계에 대해 목격하기 시작합니다.
마틴 루터는 카톨릭이라는 우물 안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고 예수를 만난 후에 성경의 진리를 발견합니다. 새로운 세계를 본 것입니다. 웨슬레는 죽어가는 영국을 살려냈습니다. 영국에서 가장 존경받고 유망한 C. T. 스터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이었으며 켐브리지 7인 중의 한 사람이었고, 유명한 크리켓 선수였으며 성공이 보장된 청년이었습니다. 그 청년의 마음 속에 예수님이 들어가고 믿음이 생기면서부터 시야가 달라졌습니다. 허드슨 테일러와 중국에 갔다가 더 시야가 넓혀져서 선교사로서는 최초로 아프리카의 선교사가 되어 그곳에 뼈를 묻게 되었습니다. 윌리암 케리는 하나님이 그에게 인도라는 큰 땅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나서 어떤 세계를 봅니까?
믿음은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하며 내 눈으로 보여지는 세계 그 뒤에 계신 하나님의 약속의 세계, 놀라운 은총의 세계까지 들어가게 합니다.
현실 속에서 하늘을 바라 봄.
1.너는 눈을 들라(14절)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찾아 오셨을 때 그에게 비전과 믿음과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시는 첫 번째 이야기로 ‘네 눈을 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땅을 보며 절망하고 좌절하지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그곳에는 하나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2. ‘너 있는 곳에서’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서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고통스럽고 질척거리고 따분한 이 현실을 피해 어딘가 가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있는 곳에서 기적이 시작된다고 합니다. 내 모습 그대로 나를 드릴 때 하나님의 축복은 일어납니다.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15절)
무엇을 보느냐가 비전입니다. 어떤 총각이 한 처녀를 계속 보고 있으면 결국 어느 날부터 그 여인과 함께 살게 됩니다. 보고 있으면 그것이 비전이 됩니다. ‘네가 보는 땅을 내가 주리라’ 눈을 감고 있으면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늘을 보고 하나님을 보십시오. 이 축복은 아브람에게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약속은 영원한 것입니다.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16절)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은 셀 수 없으며 상상할 수 없으며 크기를 측량할 수 없습니다. 이 약속은 자식이 없는 아브람에게 주시는 약속입니다. 그런 그에게 자손을 땅의 티끌 같게 해 줄 것이라고 하십니다. 아무 것도 없는 중에 축복하시는 하나님, 그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아브람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17절)
“얼굴을 들라”, ‘보라’에 이어 아브람이 받는 세번째 축복의 메시지는‘일어나 걸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향하여 일어나 걸으며 땅을 밟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 축복을 거저 주지 않으십니다. 그는 보았고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일어나 종과 횡으로 걷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미래는 어느 누구도 확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미래는 약속을 믿는 믿음의 사람의 것입니다. 미래는 갖는 사람의 것입니다. 축복도 갖는 사람의 것입니다. 우리의 학생들이 청년들이 러시아, 중국의 땅을 밟기 바랍니다. 아프리카의 땅을 밟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많은 미전도 종족을 향하여 걸어가기를 바랍니다
믿음은 새로운 세계를 바라봅니다. 새로운 마음을 갖게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갖게 하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꿈을 소유하게 해주는 것이 믿음입니다.
상수리 수풀에서 쌓은 단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18절)
아브람이 그 모든 꿈을 보았지만 그는 아직 ‘상수리 수풀’에 서있습니다. 어제나 오늘이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변화된 사람이었습니다. 이미 그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고 듣고 맛본 사람이기에 현실은 외롭고 고독하고 가난할지라도 그의 마음에는 약속의 말씀, 새로운 세계, 축복의 세계가 불타 오르는 것입니다.
그런 아브람이 무엇을 하였습니다.
‘단’을 쌓았습니다. 그는 고독하고 외롭고 성취감이 없는 현실에서 하나님께 예배하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예배하는 순간 믿음이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환경이 변하고 기적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예배합니다. 이제 아브람이 변합니다. 보통 사람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말입니다. 갈등을 겪고 기근을 만나고 손해를 경험하면서 그는 점점 더 하나님과 가까이 동행하는 사람으로 변해 가고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축복이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오현철목사 편 ∙∙∙∙∙∙∙∙∙
● 연세대학교 문리대학 생물학과 졸업(B.Sc)
● 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신문방송학과 졸업(B.A)
● 성결대학교 29회 졸업
● 평택대학교 대학원신학과 졸업 (실천신학, Th.M)
● 한영대 및 성결대학교 강사
● 성결대 성결신학 연구소 연구원
◈ 올 해 고난받는 그리스도의 삶을 사신 모든 분들께 (욘 1:1-3)
◈ 류경미, 요나 그리고 하나님 (욘 1:1-3)
올 해 고난받는 그리스도의 삶을 사신 모든 분들께
욘 1:1-3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올해는 정말 말 그대로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습니다. 수많은 유명한 인사들이 사망했습니다. 중국의 등소평, 영국의 다이애나비, 그리고 테레사 수녀. 그 외에도 KAL기가 괌에 추락한 이래 계속해서 세계 곳곳에서 비행기가 땅으로 곤두박질하며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그런가하면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세계경제가 어려워지고, 특히 올 하반기에 들어서며 아시아 경제금융 위기가 시작되고 한국도 태국과 인도네시아에 이어 IMF 경제식민통치시대에 돌입하게 되고, 올 한 해 만 5천 개의 중소기업이 도산했고, 이젠 국가부도의 위기 속에 직장인들과 사업가들뿐 아니라 주부들도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우리의 몸과 영혼을 지치게 하는 일들은 너무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올 해 고난받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신 여러분이 새해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이 밤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는 “어떻게 하면 승리의 삶,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삶을 살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오늘 니느웨 선교사 요나의 삶을 살펴보며 그 해답을 찾아보기로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승리의 삶,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욘1:1-2).
제 친구 중 한 사람인 Sharon Holm은 매일 아침 만나는 동료들에게 이렇게 물어보곤 했습니다. “오늘 아침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셨습니까?” 여러분에게도 묻습니다. 오늘 아침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셨습니까?
지금 여러분 중에 몇 분은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 겁니다. 그렇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까? 귀로 듣습니까? 예. 귀로 듣습니다. 욥이 “내가 귀로 듣기만 하였더니 이젠 눈으로 주를 보았다” 고 말하는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나타난 주의 사람들은 주님의 음성을 귀로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요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렇게 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는 못합니다. 제 친구 Sharon이 오늘 아침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냐고 물을 때 그것이 꼭 귀로 들었냐고 물은 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까? 구약시대에는 천사들을 통해서, 환상과 꿈을 통해서, 하나님의 또는 선지자의 말씀과 비유를 통해서, 기사와 표적 등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렇다면 사도행전시대부터 현재까지는? 그렇습니다. 성령님을 통해서, 보다 구체적으로는 성령, 기도, 환경,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주목하십시오.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셨느냐 하는 것이, 그 방법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개개인에게 독특하게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 줄 알았고 또 그분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를 알았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고, 사도 바울도 그러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비 인륜적인, 패륜적 명령을, 도저히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믿겨지지 않는, 우리가 들었다면 우린 아마 그것이 사탄의 음성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 것을 알았고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가시나무 떨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가 본 것은 불타는 나무뿐이었지만 그는 그가 하나님을 만났다는 사실을 의심치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그가 잡아죽인 무리들의 지도자였던, 자기 생각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불렀던 죄인 예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특별한 만남이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되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요나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들이 그럴 수 있었겠습니까? 어떻게 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 줄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첫째, 그들은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두번째, 그 음성에 익숙했었습니다. 우리가 친한 사람의 전화음성을 쉽게 인식하듯이 말입니다. 구원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순간적으로 주어질 수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대로 사는 성숙한 삶은 결코 순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세례받았다고 해서, 집사가 되었다고 해서, 목사안수를 받았다고 해서 어제까지 들리지 않던 하나님의 음성이 오늘 갑자기 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으십니까? 그래서 승리의 삶, 부활의 그리스도의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 축복과 영광은 몇 일 금식으로, 몇 주일의 특별기도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지금 시작하십시오. 주안에서 선한 계획을 세우시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경건의 훈련을 시작해 보십시오.
기도실에서부터 그러나 삶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 있으시길 그래서 여러분이 주님을 부르면 주가 응답하시고, 주께서 여러분을 부르시면 즉각 응답할 수 있는 그래서 만사가 형통하고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는 축복의 삶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다면 승리의 삶,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욘1:3).
최근 “‘90년대의 사회와 기독교 문학”이란 논문을 읽었습니다. 저자 Melba Maggay는 우리 크리스천을 가리켜 “Word-keepers"(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들) 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매우 잘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 크리스찬들은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의 사람 요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음에도 그 음성에 순종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불순종의 문제는 요나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솔직히 말한다면 바로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합니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왜 제사하는 사람은 많은데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적을까요? 이것은 왜 기독교 인구가 전 인구의 25%-30%이고 믿음의 대통령을 두고 세계기독교사에 유례가 없는 부흥을 이룬 4만 5천여 개의 한국교회가, 이 나라가 이 지경이 되기까지 과연 무엇을 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변이 될 것입니다. 즉 제사하는 교인은 많을지 모르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너무도 적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지난 봄인가 여름인가 청년회원들과 이런 실험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서서 동그란 원을 만들고 그 원 안에 한 사람을 두고 그로 하여금 눈을 감고 10회 정도 빙글빙글 돌다가 멈춰서 그대로 뒤로 넘어지도록 요청했습니다. 그러면 원을 형성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넘어지는 그 사람을 받쳐주도록 말입니다. 여러 번 실험을 했지만 부탁한 대로 순종하여 그대로 뒤로 넘어진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대부분 넘어지기 전에 발을 뒤로 내밀거나 안 넘어지려고 몸을 일으키곤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이 사람들이 나를 제대로 잡아주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감 때문입니다.
순종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순종하기가 힘드십니까? 순종하는 것이 시험거리가 되십니까? 순종은 해야겠는데 실제 순종하기는 죽는 것보다 어렵고 갈등이 되시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마음 고생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이 미워지고 때론 한심스럽다고, 내 성격에 문제가 있거나, 인격이 덜 되었다고 자책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인격의 문제도, 성격의 문제도 아닙니다. 이것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내 기준과 내 판단에 따라 내 인생의 배가 항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믿기를 작정한 이상 우리의 인생의 배는 믿음이라고 하는 키에 의해서만 항해를 계속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에 기초해서 우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만나 서로를 알게 되고 그 관계가 깊어지다 보면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 발전합니다. 만약 그들의 사랑이 진실하다면 그들은 서로의 단점까지도 포용하고 상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제 3자의 눈에는 단점으로, 약점으로 보이는 것들이 그들 두 사람의 눈에는 장점으로, 최소한 용납할 수 있는 모습으로 인식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제 3자들은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의 눈으로 바라보지만 그 두 사람은 사랑의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원하는 것들을 들어주고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에게 순종하게 됩니다.
순종은 믿음의 문제인 동시에 사랑의 문제입니다. 요한 사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주안에서 온전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의 요지는 그것이 율법이어서가 아니라, 그래야 천국에 가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을 한다는 이유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순종은 사랑의 문제입니다. 올 한해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말씀에 충분히 순종치 못하셨다면 그것은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을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을 신뢰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사랑과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기도 중에, 환경 속에, 교회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요청하시는 그분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시므로, 순종하시어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승리된 삶을 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하나님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다면 승리의 삶,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욘3:10-4:3).
1912년 4월 4일 영국 사우샘프턴 항에는 뉴욕 항으로 처녀 출항하는 길이 259.08m, 너비 28.19m, 길이 19.66m의 초대형 호화 여객선이 정박해 있었습니다. 처녀 출항하는 이 배에 탑승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신청서를 내고 흥분과 기대 속에 기다렸습니다만 그중 2,268명만이 탑승허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실망이 컸습니다. 그들은 그날 사우샘프턴 항을 떠나는 배를 바라보며 아쉬운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반면 배에 탄 승객들은 선택되었다는 만족감과 우월감에 휩싸여 항구에서 손을 흔드는 친구들과 시민들을 바라보며 행복한 표정들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2시간 40여분 후에 희비가 크게 엇갈리고 말았습니다. 그 배는 뉴펀들랜드 해역에서 빙산과 충돌하여 침몰했기 때문입니다. 승객 2,268명중 1,513명이 사망했습니다. 그 배의 이름은 너무나도 유명한 타이타닉 호였습니다. 불과 2시간 전까지만 해도 탑승객명단에 끼지 못했다고 한숨짓고 좌절했던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2시간 전에 탑승객명단에 끼었다고 하나님께 감사하던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 속에 물에 잠겨갔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때로 이와 같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태로 말입니다. 요나가 그랬습니다. 그는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심히 노하고 싫어했다고,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불평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요나와 같지 않았습니까? 배에 탑승했다고 좋아하지 않았습니까? 아니면 그 배에 타지 못했다고 하나님께 불평하거나 시험에 빠지지 않았습니까?
꼭 사보고 싶은 책들 중에 이런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가장 절망적일 때 가장 큰 희망이 온다” 마음에 감동을 주는 101가지 이야기의 저자 잭 퀸필드의 책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오히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비로소 시작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신앙과 인생에 관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이해하고 싶다면 이제부터 제가 드리는 말씀을 주목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당신은 어떤 일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의 명확한 지시가 없으면 기도하고 기다리십시오. 인내를 배우십시오. 하나님의 시간을 의지하십시오. 하나님의 시간이 항상 옳으며 최선입니다. 서두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이 간절히 하나님을 찾게 하기 위해서 지시할 사항을 감추어 두셨을지도 모릅니다. 무엇을 하려고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뛰어 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이 그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보다는 당신과의 사랑의 관계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헨리 블랙가비, 클로드 킹 저.「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서울: 요단출판사, 1996). 127>
하나님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다면 승리의 삶,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해하기 힘든 일이 닥쳤을 때, 입술과 생각으로 하나님께 범죄하지 말고, 자신의 판단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고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겸손히 기다릴 줄 아는 지혜로운 주의 백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 때문에 감사할 수 있다면 승리의 삶,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욘4:6-8).
언젠가 말씀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겼던 강세현 목사님의 딸 유은이를 작년에 만났을 때였습니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고 물어보니 유은이는 엄마가 좋다고 했습니다. 그때 옆에 있던 강세현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얘는 엄마가 제일 좋고 그리고 둘째는 냉장고, 그리고 셋째가 아빠래요. 냉장고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 안에 자기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이 있기 때문이고요. 그 아이스크림을 누가 사다 넣은지도 모르고 참 … ” 이 아이는 아빠보다 냉장고를 더 좋아합니다. 그리고 아빠보다 냉장고에게 더 감사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과 세상의 사람들을 구분하는 차이점들 중에 하나는 감사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다 중요한 것은 그 감사의 기초가,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하는 문제입니다. 물질에 있는지 주님께 있는지, 환경에 있는지 주님께 있는지, 사람에 있는지 주님께 있는지에 따라 중대한 차이를 가져오게 됩니다. 오늘 요나도 감사와 기쁨의 근거가 그늘을 허락하신 사랑의 주께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그늘을 만든 박 넝쿨, 물질 자체에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딸을 위해 냉장고에 아이스크림이 떨어질세라 부지런히 채워 넣는 아빠가 아니라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보관하고 있는 냉장고에게 감사한 어린아이의 신앙과 주의 선지자 요나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감사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아니라 물질에, 환경에, 사람에 감사하는 삶은 분명히 그 물질에, 그 환경에, 그 사람에게 상처받고, 시험당하고, 불평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물질이 아니라, 환경이 아니라,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으로,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시고 감사하심으로 승리의 삶,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삶을 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결 론
올해 제 마음의 고통이 극심할 때에 전 욥기를 다시 읽었습니다. 인류역사상 그리고 인류문학상 욥만큼 시련을 받은 사람이 있을까 할 정도로 엄청나게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섞게 원망하지 아니하였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역사를 잘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그의 고통은 극심했습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어찌 이러실 수 있는가?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않았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하고 괴로워 했지만 최후에 그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이해하고 오직 그 안에서 감사할 수 있었을 때,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니다”라고 주안에서 감사할 수 있었을 때 그의 고통의 삶은 승리의 삶, 부활의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주목할 것은 그가 하나님께 감사한 시점입니다. 상황이 회복된 후가 아니라 아직 고통의 상황이 여전히 그를 짓누르고 있는 그에게서 평화를 빼앗고 있는 그 시점에서 오직 하나님만으로 인해,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감사하였다는 것입니다.
올해 고난의 그리스도의 삶을 사신 여러분들께 다시 한번 하나님의 위로가 있으시기를 축원하며 아울러 새해에는 니느웨 선교사 요나에게 주셨던 교훈을 따라, 그리고 그 교훈을 실천하여 승리의 삶을 산 욥을 본받아, 승리의 삶,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삶을 사시는 저와 여러분 아울러 이 민족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류경미, 요나 그리고 하나님
욘 1:1-3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본문을 읽으며 우리는 이방인 선교사로 부름 받은 요나가 우리가 아는 대로 니느웨로 가라는 주님의 명령을 듣지 않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주변과 하늘을 가끔 힐긋 힐긋 쳐다보며 뱃전에 줄을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의 손에는 무언가가 들려져 있는데, 거기에는 “행선지-다시스”라고 적혀 있는 배표가 들려져 있습니다. 잠시 후 배는 다시스로 향해 뱃고동을 울리며 힘차게 항해를 시작하고 이내 수평선 너머로 우리 시선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면 이곳은 다시스 항구입니다. 이제 막 욥바를 떠나 다시스에 도착한 배에서 사람들이 소란스럽게 떠들며 하선하고 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요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오는 길에 폭풍을 만났는데 히브리 사람 하나님을 믿는 요나란 사람이 자기 때문에 하나님이 노하신 것이니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하기에 마침 제비를 뽑은 결과도 그였는지라 그를 바다에 던지니 바다가 잔잔해져 무사히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고 그리고 그 사람은 아마 물고기 밥이 되었을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는 대로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나와 니느웨 해안에 던져지게 되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복음을 전파하여 니느웨 백성을 죄악가운데서 구원합니다. 이것이 요나서의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몇 가지 교훈을 찾아보겠습니다.
1. 요나는 목적을 가지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지만 하나님은 목적을 가지시고 그를 니느웨로 보내십니다(욘 1:1-3).
류경미 자매는 교환학생으로 러시아 하바로브스크로 공부할 목적으로 떠났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아멘교회와 선문대학생 그리고 동료학생들 사이에서 믿는 자의 삶이 어떠한지 그것이 그들의 삶과 어떻게 다른지, 또 믿는 자가 살아가는 세상이 얼마나 그들의 세상과 다른지를 보여주실 목적으로 그를 그 땅으로 보내셨습니다.
요나와 류경미 자매의 모습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인생의 계획을 세우고 목적을 정하지만 그러나 결국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성경은 기록하기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라”(잠 16:9)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1993년, 지금으로부터 6년전 제가 카나다에 가게 될 때에 저의 목적은 물론 하나님과 성경에 대해 배우는 신학공부를 하는데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에 신학서적이 많이 있고, 신학교수님들이 많이 계시지만 대부분의 서적이 번역서적이고, 대부분의 교수님들이 외국에서 공부하고 오셨기에 직접 외국에 가서 신학문을 접하겠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저를 통해 그곳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시려는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셨고, 말할 수 없는 시련과 고통의 과정이 있었지만 결국 하나님의 교회는 세워졌고, 그 교회는 지금 이 시간에도 그 지역에서 생명력 있는 복음과 하늘의 위로를 전하며 건강하게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우선 순위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에 보다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주관하실 때에 보다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계획하는 일을, 류경미 자매의 학업이나 저의 유학을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잘 마치게 하셨습니다.
류경미 자매는 총 6과목을 수강했는데 3과목은 A+이며 나머지 3과목은 A를 받았답니다. 훌륭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그를 통해 그를 둘러싼 사람들 사이에서 믿는 자의 삶이 어떠한지 그것이 그들의 삶과 어떻게 다른지, 또 믿는 자가 살아가는 세상이 얼마나 그들의 세상과 다른지를 보여주시려 하신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비록 발을 땅에 딛고 살아가지만 하늘을 바라보며 별을 바라보며 하늘의 사역을 붙들게 하시려는 것이 우리 주님의 뜻이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 목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어디론가 보내시는 겁니다. 때론 러시아로 때론 카나다로 그리고 우리의 직장으로, 사업장으로, 누군가의 가정으로, 어느 학교로, 어디로 부르시고 보내셨든지, 그곳에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부탁하시는 바 분명한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고 내 목적하는 대로가 아니라 그분의 목적하시는 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십시다.
2. 요나가 니느웨에 복음을 전하지만 니느웨를 구원한 것은 하나님이십니다(욘3:1-10).
저는 류경미 자매가 자기 공부하고 몸 신경 쓰기도 바쁜데 현지의 아멘교회를 섬기며 이모저모로 수고하고 도움을 주고 온 것을 늘 감사히 여깁니다. 그녀에게서 현지인과 현지의 교회를 아끼는 선교사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작년 11월 말인가 12월 초 아멘교회의 율리아 사모님께서 전화를 주셔서 “목사님! 류경미 자매가 얼마나 아름답고 귀하게 교회와 친구들을 섬기는지 몰라요. 많은 도움이 됩니다. 목사님께서 참 잘 훈련시키신 것 같습니다”라고 말씀하실 때 얼마나 흐뭇하고 감사가 되던지.
그러나 가만히 지난 6개월 동안 류경미 자매로부터 받았던 편지며 함께 했던 전화 통화를 생각해보면 또 한국에 돌아온 후로 약 3주 가까이 시간을 보내며 바라보고 대화하며 그리고 오늘의 간증을 들으면서 느끼는 것은 류경미 자매가 아멘교회를 섬기고 도움을 준 것이 아니라 아멘교회가 류경미 자매의 믿음을 지키고 훈련시키고 성장시키고 그가 외롭고 힘들고 어려울 때 힘이 되어 주었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한 것은 분명 요나였으며 그가 선포한 복음을 통해 그 백성을 구원한 것은 분명 하나님이셨습니다. 본문 4장 1절에 보면 오히려 요나는 니느웨 백성들에게 구원이 임한 것으로 인해 분통이 터져 불평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가 이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백성을 구원하시고 그들에게 생명을 주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교회 일을 하는 것 같고 실제로 우리에 의해 많은 교회의 일들이 진행되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고 교회가 있어 우리의 믿음을 지켜주고, 믿음을 훈련시키며, 성장시킨다는 사실을 믿읍시다.
교회와 성도와의 관계는 서로에게 생명력을 주는 관계입니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공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생명력을 주고받는 관계를 말합니다. 교보문고의 벽에 새로운 글이 걸려 있습니다.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듭니다” 맞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교회를 섬기고 교회가 사람을 섬깁니다. 성도들이 교회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며 교회를 부흥시키고, 교회가 성도들에게 생명력을 공급하며 성도들의 믿음과 성도들의 가정을 지켜줍니다.
저와 여러분을 성광교회로 부르시고 각자 저마다의 크고 작은 사명을 맡기신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고 하나님의 분명하고도 확실한 목적과 정확한 시간표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마음속에 믿읍시다. 그리고 우리를 부르신 주님은 우리가 이 교회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충성스런 성도가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과 우리 교회를 통해 우리들의 영혼, 가정, 직장, 학업, 사업을 지키고 책임져 주실 것을 의심없이 믿읍시다.
3. 평안을 빼앗기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교훈은 있으며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됩니다(욘 4:1-11).
류경미 자매가 러시아를 떠나오던 날 공항에서, 올 때와 달리 가방의 무게에 대한 규정이 다르다고 해서 짐을 다 풀어헤치고 무게를 쟤느라고 비행기 시간은 쫓기고 그 동안 없는 돈, 남 쓸 때 쓰지 않고 남 먹을 때 먹지 않고 모아 두었던 돈을 벌금으로 다 내놓게 되어 얼마나 속상하고 마음의 평안이 없었는지 몰랐답니다. 아멘교회에서 만난 안드레이라고 하는 고려인 청년이 옆에서 “뜨이(너) 걱정하지 마 주 너를 지키리” 라고 위로하는데도 짜증스럽기만 하고 위로가 되지 않더랍니다.
지난 8월 류경미 자매가 러시아에 도착할 때도 가방이 다시 서울로 돌아갔다가 일주일만에 찾게 되어 현지 적응에 많은 불편함과 또 마음의 평안을 빼앗겼던 일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요나도 똑같은 일을 경험합니다. 더운 들판에 내리쬐는 태양 빛을 피해 그늘을 만들어주었던 박 넝쿨이 시들어 태양 빛이 그대로 요나의 머리에 내리쬐자 요나의 마음은 평안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이렇게 마음의 평안을 빼앗기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교훈은 있으며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되었습니다. 류경미 자매가 가방을 잃어버리고 “마음의 평안이 없어요” 라는 편지를 우리에게 보내왔을 때 우리는 눈물로 그를 위해 기도하며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번에 그녀가 그 땅을 떠나면서 소중히 간직했던 돈과 마음의 평안을 빼앗길 때 우리는 하나님이 그 땅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수중의 돈 몇 십불이라도 그들에게는 필요하기에 그것마저 내놓게 하신 하나님! 그래서 우리는 류경미 자매가 돌아왔지만 아멘교회와 러시아를 위해 계속 기도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증거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사랑하십니다. 사랑하는 종의 소유된 재산도, 그를 보호할 박 넝쿨도 아끼시지만, 당신을 예배하고 당신의 일을 하는 우리도 사랑하시지만, 당신을 대적하고 죄악가운데 헤메이는 니느웨 백성, 러시아백성, 이 세상을 더욱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천만이 넘는 성도를 자랑하고 세계교회사에 유례가 없는 부흥을 이루고 밤이면 빨간 십자가가 물결치는 한국교회와 한국성도들도 너무나 사랑하시지만 얼어붙은 땅, 부정과 불의가 성행하는 질서가 마비된 땅, 어린 유학생의 주머니에서 돈을 갈취하는 얼어붙은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땅,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분 앞에 무릎꿇고 예배할 줄 모르는 러시아의 헐벗은 백성들을 더욱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요 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교회를 사랑하시지만 교회 밖 저 어두운 세상, 그 곳에서 살아가는 영혼들을 더욱 사랑하시고 안타까워하시고 그들 때문에 눈물 흘리시는 하나님! 우리 안에 있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위해 산과 계곡을 헤매시는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한이 없으신 사랑을 바라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눈을 들어 마음의 눈을 뜨고 그분의 그 크고 위대하신 사랑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과 역사하심과 깊이와 넓이의 제한이 없으신 마음을 바라보며 우리가 한다고 하는 사랑이 얼마나 보잘 것 없으며, 우리가 한다고 섬김과 봉사가 얼마나 하찮으며, 우리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비좁은 것인가를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입니다. 오늘 이 예배가 끝나면 청년들은 겨울바다여행을 떠납니다. 이번 주제는 ‘성숙’입니다. 성숙이 뭡니까? 하나님 앞에서 두 손을 드는 것입니다. 나의 안다고 하는 것, 나의 할 수 있다고 하는 것, 나라고 하는 것을 버리고 두 손을 드는 것,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을 제대로 바라보는 것, 나를 제대로 아는 것 그것이 성숙인줄로 압니다. 이번 기회를 여러분들의 신앙이 크게 성장하시기 바랍니다.
이강우목사 편 ∙∙∙∙∙∙∙∙∙
● 기독교대한신학대학 졸업
● 성결대학교 졸업
● 성결대학교 32회 졸업
● 성결교신학대학원 졸업
● 상옥리 교회 담임목사
충남 태안군 태안읍 상옥2구 447-3
◈ 심령의 눈을 뜨라! (엡 1:17-19)
◈ 예수의 발자취 (요 14:6)
심령의 눈을 뜨라!
엡 1:17-1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1. 시작하는 말
눈은 마태복음 6장 22절에서와 같이 ‘몸의 등불’이요 사람에게 지식을 제공해 주고 우리 몸에서 무엇인가 보는데 사용되는 중요한 신체기관입니다. 그러기에 열왕기하 25장 7절에 보면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당할 때 유다왕 시드기야의 눈을 뺀 것은 적의 힘을 완전히 없이하려는 바벨론의 의도가 숨어있었습니다.
1. 눈의 종류
1) 육신의 눈입니다.
불행스럽게도 그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으나 대부분은 육신의 눈을 통하여 멀고 가까운 것과 길고 짧은 것과 검고 희며 둥글고 모나며 크고 작으며 잘나고 못난 것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2) 지각은 눈입니다.
지각은 눈으로는 자기에게 관계되는 것들에 대해서 유리한 것과 해로운 것을 분간합니다. 이성에 대한 사랑도 지각의 눈으로 가능해 집니다. 또 지각의 눈으로 글을 익히고 배웁니다. 그래서 글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켜 문맹자(文盲者)라고 하는 것입니다.
3) 정신의 눈입니다.
이 눈으로 만물의 이치를 깨닫기도 하고 새로운 것을 발명하고 미지의 세계로 탐험하게 하여 예술 과학은 이 눈으로 가능합니다.
4) 심령의 눈입니다.
이 눈을 가리켜 본문 18절 ‘마음의 눈’이라 했습니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15장 14절에서 심령의 눈을 뜨지 못한 사람을 가리켜“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과 같다”고 하셨고, 마태복음 23장 17절에서 “우맹이요 소경들”이라 하셨습니다. 계시록 3장 18절에는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하라”는 말씀은 우리들에게 심령의 눈이 있음을 말씀하심 입니다.
2. 심령의 눈을 뜰 이유
1. 신령한 지혜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골 1:9)
골로새서 1장 9절“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당시 골로새 교회에는 이단사상이 만연되어 있었습니다. ① 철학과 헛된 속임수(골 2:8) ② 금욕주의(2:21) ③ 천사숭배(골 2:18) ④ 잘못된 율법(골 2:16)등입니다.
이렇듯 잘못된 이단사설에 미혹되지 않기위해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 때 기쁨과 감사의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바울사도는 교훈했습니다.
신령한 지혜와 총명은 철학자처럼 이치를 깨닫아 얻는 것도, 금욕주의처럼 몸의 수양과 훈련을 통해서 얻는 것도, 율법주의자처럼 율법에서 온 것도 아니라 오직 성령님을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고린도전서 2장 5절에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했습니다.
2. 천국의 영생과 복락을 보기 위해(행 7: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에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할 때 그의 심령의 눈이 밝아져 ① 하늘의 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고(요 1:55) ② 예수께서 보좌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행 7:55).
바울사도는 고린도후서 12장 2절 삼층천까지 가보았고 요한 사도는 밧모섬에서 계시를 받아 우리에게 전했습니다.
그런고로 로마서 8장 18절 “생각컨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했습니다.
3. 하나님의 권능과 보호하심을 알기 위해(열왕기하 6:17)
열왕기하 6장 17절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열왕기하 6장의 말씀은 엘리사를 죽이려고 아람군대가 도단성을 포위했을 때 엘리사의 종이 두려워서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왕하 6:15)하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때 엘리사는 “두려워 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왕하 6:16)라고 종의 위로하면서 종의 눈을 열어 보게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사환의 눈을 여시며 엘리사를 둘러싼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러싼 것을 보게 됐습니다.
여호수아 5장 13-15절에서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에 가까이 있을 때 그의 심령의 눈이 밝아져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칼을 빼어 들고 여호수아를 돕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울사도는 로마서 8장 31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했고, 노아를 홍수에서 건져내시고, 모세와 그 백성을 바로왕과 홍해에서 구원하시고, 롯을 소돔과 고모라의 유황불속에서 살리시고, 세 청년을 풀무불 가운데서 보호하시고, 다니엘을 사자굴속에서 지키신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 끝날까지 우리를 보호하실 줄로 믿으시면 아멘! 이와 같은 하나님의 권능과 보호하심을 믿는 일은 심령의 눈을 뜰 때 비로서 가능한 줄로 믿으시면 아멘!
3. 심령의 눈을 뜨면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1. 자신의 허물과 죄악을(마태복음 7장 3절)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세상사람들은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못보고 남의 눈속에 있는 티만 보이게 되는 것은 아직까지 심령의 눈을 뜨지 못한 까닭입니다.
① 사도행전 9장에서 바울 사도가 눈에 비늘같은 죄악이 가리워 심령의 눈이 가리워 율법으로 완전한 자신만을 의롭게 여겨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죽이려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환한 빛으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을 때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고 있다가 아나니아가 안수했을 때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되었습니다. 훗날 그는 고백하기를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서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하였습니다.
②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가 심령의 눈을 떠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났을 때 자신의 입술의 부정과 죄인임을 고백했습니다.
2.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민수기 22장)
민수기 22장은 발람 선지자의 실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지도를 받아 출애굽하고 홍해를 무사히 건너서 모압평지에 당도하여 요단강을 건너기 바로 직전에 있었습니다. 이때 모압왕 발락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는 곳마다 승리한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의 선지자를 매수하여 발람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저주하여 싸움에서 패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모압왕은 금, 은, 보화를 가득 싣고 발람 선지자를 찾아가 이스라엘을 저주할 것을 부탁했을 때 발람 선지자는 처음 몇 번이나 거절하였으나 재물에 눈이 어두워져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기 나귀를 타고 모압사람들과 함께 길을 갔습니다.
① 그때 하찮은 미물에 불과한 나귀 눈에는 하나님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길에서 벗어나 밭으로 도망하자 발람 선지자는 나귀를 길로 돌이키려고 채찍질했습니다.
② 또 하나님의 사자가 좌우에 담아있는 포도원의 좁은 길에서 발람 선지자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을 본 나귀가 몸을 담에 대고 발람의 발을 담에 비비어 상하게 했을 때 발람이 다시 채찍질했습니다.
③ 그래도 심령의 눈을 뜨지 못한 발람 선지자를 위해 좌우로 피할 수 없는 좁은 곳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섰을 때 나귀는 그것을 보고 땅에 엎드리자 발람이 나귀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나귀의 입을 여시사 발람을 책망하시고 발람 선지자의 눈을 밝게 하시자 그때서야 비로소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게되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이것을 해도 실패요, 저것을 해도 손해요 안 되는 까닭이 천사가 칼을 들고 길을 막아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심령의 눈을 뜨지 못한 사람들은 발람 선지자처럼 죄없는 나귀만을 채찍질하고는 있으니 불쌍하고 가여울 따름입니다.
④ 예레미야 애가 2장 16절에서 예레미야는 온 유대와 예루살렘 도성의 사람들이 노래하고 춤추며 태평시대로 알 때에 죄악으로 인한 조국의 멸망을 바라보고 눈물을 강같이 흘렸습니다.
⑤ 우리 주님도 마태복음 23장 37절에서 예루살렘의 함락과 환난을 생각하사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고 통곡을 하셨으며 그 옛날 노아는 물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방주를 준비하여 가족을 구원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심령의 눈을 떠서 주의 재림의 날이 가까워짐에 따르는 시대의 징조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3. 성경의 진리와 교훈을(시편 119:18)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하소서”
심령의 눈을 뜨지 못한 사람은 세상 잡지나 T.V나 연애소설을 잘 읽고 잘 보지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읽을 수도 없고 읽어도 무슨 뜻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누가복음 24장 13절 이하에 나타난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 함께 하셨을 때도 “저희의 눈이 가리워서 그 인줄 알아 보지 못했다”고 누가복음 24장 16절에 기록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을 때(눅 24:27) 저희 눈이 밝아져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눅 24:31).
사도행전 16장 14절에서 두아디라성의 루디아에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이 말을 청종케 하므로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서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하셨습니다.
4. 심령의 눈을 뜨는 방법
1. 기도하므로(왕하 6:17)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엘리사가 사환의 눈을 열어 보게해 달라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사환의 심령이 눈을 뜨게하사 불말과 불병거를 보게하셨습니다.
① 기도하되 기름을 짜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누가복음 22장을 보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심으로 친히 기도의 모범을 보이신 것입니다. ‘겟세마네’라는 말의 뜻은 ‘기름을 짠다’라는 뜻이 있는 고로 예수님께서 그곳으로 가셔서 기도하러 가신 것은 기름을 짜내듯이 기도를 해야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두 번째도 세 번째도 같은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도 단번에 기도해 보시고 그 다음에는 우연에 맡기는 그런 일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도 세 차례에 걸쳐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기도를 다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 나셨을 때 제자들에게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웠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6:45)
② 바울 사도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 육체의 가시가 무엇인지를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그 가시가 바울을 괴롭게 만들고 마치 가시처럼 찌르는 것이었음에는 분명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이 가시를 제거해 달라는 기도를 세 차례에 걸쳐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 말씀으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이같은 응답을 받기까지 바울은 세차례에 걸쳐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런고로 기도하므로 심령의 눈을 뜰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의 응답이 있기까지 계속적인 기도가 필요로 합니다.
2. 비늘이 벗겨져야(행 9: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사울의 눈에서 벗어진 비늘 같은 것은 사울의 죄였습니다.
① 모세의 율법만이 의를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율법의 비늘입니다.
그의 눈에서 율법의 비늘이 벗겨지자 갈라디아서 2장 6절에서 그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고백했습니다.
② 예수믿는 사람들을 박해했던 잘못된 열심의 비늘이 벗겨지자 그는 이방인의 사로도 부름을 받았습니다(롬 11:13).
③ 사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요 1:14).
이와 같이 사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져 심령의 눈을 뜨게 될 때 온전히 보게 되었습니다.
3. 눈에 안약을 바름으로(계 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안약은 신령한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성령의 전망력이며 판단력이라고 골로새서 1장 27절에 말씀했습니다. 그러기에 신령한 안약은 성령에게서 살 수 있습니다.
시편 62편 11절에 ‘하나님이 한 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권능을 내게로 전달해 주시는 분이 성령이기에 우리가 성령의 역사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고로 심령의 눈을 뜨기 위해 성령을 사모하면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함을 주시고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5. 결 언
심령의 눈을 떠야 합니다.
기름을 짜는 기도로 영혼의 비늘이 벗겨지고 성령의 안약으로 마음의 눈에 바를 때 심령의 눈이 떠질 줄 믿습니다.
예수의 발자취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어린이 찬송가에 보면 ‘주의 발자취’란 제목의 찬송이 있습니다. 이 찬송에 대한 저의 기억은 어린이 주일 예배를 드리기 전에 교회 마당에서 놀다가 학교에서 조회를 할 때처럼 각 반별로 줄을 서서 예배당안으로 들어갈 때 부르던 것이 생각납니다.
본문의 말씀처럼 예수께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기 때문에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곧 예수의 발자취를 따르지 않고는 아버지가 계신 영광의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예수의 발자취를 좇아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즐겁고, 행복합니다.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어두움 가운데 밝은 빛을 비춰 주십니다.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좇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1. 이 땅에 내려디딘 발자취
예수께서 이 땅에 내려디딘 발자취로 말미암아
1. 임마누엘이 되셨습니다(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 말씀을 통하여 이사야 7장 14절의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예언의 말씀을 확증하게 된 것입니다.
2. 낮고 천한 땅에 거하셨습니다(마 2:23).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예수를 다른 말로 나사렛 예수라고 합니다. 나사렛은 이스라엘에서 아주 보잘 것 없는 곳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께서 빌립을 부르셨을 때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메시야를 만났다고 했을 때 이에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고 의심한 것으로 보아서 나사렛이란 동네는 낮고 천한 동네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3. 종으로 오셨습니다(빌 2:6-7)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종은 주인에게 순종하고 복종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습니다.(빌 2:8).
종은 주인을 섬기고 남을 잘 섬겨야 하기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므로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마태복음 20장 28절에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하셨습니다.
2. 피고한 발자취
예수께서는 이 땅에 내려디딘 발자취는 임마누엘의 발자취요,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천한 땅에 종의 발자취로 오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의 발자취는 피곤한 발자취였습니다.
1. 기갈로 피곤하셨습니다(요 4: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래도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2. 곤고하셨습니다(마 8: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니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사람에게 먹고, 자는 것이 불편하면 살맛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공생애를 기록한 사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 편안히 잡숫고 편안히 쉬셨다는 기록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잡수실 때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모세의 율법을 문제삼아 손을 씻어느니 세리와 창기와 함께 식사하느니 등으로 예수를 책잡으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예수가 가는 곳마다 많은 병자와 귀신들린 사람들이 따라다니므로 그들을 고쳐주시느라 편안한 식사는 기대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런고로, 예수의 발자취는 피곤한 발자취였습니다. 성경은 예수의 피곤한 발자취를 가리켜 “행로에 곤하였다”(요 4:6)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3. 견고한 발자취
예수의 발자취는 피곤한 발자취였으나 견고한 발자취였습니다.
1. 마귀의 시험에 빠지지 않았습니다(마 4:1-1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예수의 발자취는 피곤했습니다. 40일을 밤낮 금식으로 말미암아 주리시고 지쳐있었습니다. ‘사흘 굶어 도적질 아니할 샌님은 없다’는 속담이 있듯이 40일을 주리신 예수에게 돌을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시험은 매우 견디기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마귀에 시험에 빠지지 않고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라는 신명기 8장 3절의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2. 사람의 시험에도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요 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신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한 아이가 가져온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장정만 오천명을 먹이시고 열두 광주리나 남게하신 이적을 보고 사람들은 예수가 메시야인줄 알고 이스라엘의 새로운 임금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임금이 될 수 있는 사람의 유혹을 물리치시고 혼자 산으로 기도하려 가셨습니다.
이 시험은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에 따른 영광을 보여주며 유혹했던 시험과 같은 것입니다(마 4:8-10).
3. 인정에 끌리지 않으셨습니다(요 2:24-25).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치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사람에게 가장 약한 부분이 있다고 하면 인정(人情)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기에 부모 자식간에 사랑, 부부간의 부부애, 친구간에 우정 등이 인간에게만 있는 정(情)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인정, 정은 유한합니다. 자칫 변질되기 쉽습니다. 아무리 금슬이 좋은 부부간도 헤어지면 남남이 되는 것이 인간의 정입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정을 아셨기에 십자가의 고난이 가까워지자 자신의 몸을 아무에게도 의탁치 않으시고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라고 하시면서 이 땅에서의 생을 마치셨습니다.
4. 고난의 발자취
우리가 따라야 할 예수의 발자취는 고난의 발자취임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1. 탄생하실 때부터 고난을 당하셨습니다(눅 2:7).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리라”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 편안히 누울 곳이 없어 말구유에서 잠들어 계셔야 했고 헤롯왕은 아기 예수를 죽이려 했습니다.
2. 전도할 때도 고난을 당하셨습니다(마 8: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예수의 생애를 형편을 가장 잘 표현한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깃들일 곳이 있건마는 예수는 머리 둘 곳이 없으셨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에서 제자들을 전도하러 파송하실 때도 주머니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 것과 두 벌의 옷이나 신발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 것을 분부하셨습니다.
3. 배척을 당하셨습니다(눅 9:52-53).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저희가 가서 예수를 위하여 예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들어갔더니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고로 저희가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실 때 사마리아를 통과하셔야 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과 원수지간인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향한다는 말에 격분하여 예수를 배척했습니다. 한마디로 문전박대를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 가장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 까? 상대방이 복음을 잘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등입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들은 예수께서 배척을 당하신 일들을 생각하면 사치스러운 것입니다.
4. 임종하실 때 고난당하셨습니다(눅 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 되더라”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이 가장 큰 고통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큰 고난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앞에 놓고 갈등하고 고민하시며 기도하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가 군 생활 할 때 무슨 잘못을 해서 고참한테 매맞는 때보다는 맞기 전에 기다리면서 밀려드는 불안, 공포, 두려움이 더 큰 고통임을 알았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새 기도하실 때 땀방울이 핏방울같이 되는 간절한 기도가 예수께서 걸어가신 고난의 발자취입니다.
5. 결 언
이와 같은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면류관을 봅니다.
① 금면류관(계 4:4)
② 생명의 면류관(약 1:12)
③ 썩지 않는 면류관(고전 9:25)
④ 의의 면류관(딤후 4:8)
⑤ 즐거운 면류관(빌 4:1)
⑥ 영광의 면류관(히 2:9)을 받을 것입니다.
성결의 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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