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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 천수만 바닷가 그곳에 갈마연이 있다. 말이 목말라 찾는다는 형세! 명당 자리로서 사람들은 갈마연이라 불렀다. 서울에서 165km, 두시간 삼십분이 소요된다. 구름이 가득한 하늘아래 천수만 아침, 정막하다.
천수만은 태안반도 남단에서 남쪽으로 뻗은 태안군의 안면읍과 홍성군·보령시·서산시 사이에 있다. 신생대 구릉성 산지가 바다에 잠겨 생긴 익곡만(溺谷灣)으로 남북으로 길게 놓여 있으며, 만입구는 남쪽으로 열려 있다.
만입구 너비 2㎞, 만입 길이 40㎞이며, 해안선은 드나듦이 복잡한 리아스식 해안으로 해안선의 길이가 284.5㎞에 이른다. 조석간만의 차가 6m나 되며, 수심이 10m 내외로 얕고 작은 섬들이 많아 대형선박의 출입이 어렵다. 이곳은 본래 수초가 무성하고 영양염류가 풍부해서 농어·도미·민어·숭어 등 고급어종의 산란장이었고, 다양한 어류의 서식지였다. 또한 광천젓갈로 유명한 젓새우와 광천김의 주산지였으며, 김과 굴의 양식이 활발했다.
갈매못에서 1866년 3월 30일,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사제 세 분과 장주기 요셉, 황석두 루까는 군문효수를 당해 순교의 길에 들어선다. 아시아 전교를 위하여 설립된 파리외방전교회는 아시아에 4000여명의 선교사를 파견한다. 조선순교사를 기록한 드블뤼 비망록은 조선순교의 역사를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달래신부께서 완성한 순교사 역시 드블뤼 주교님의 비망록을 근간으로 한 순교사 책이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사제들은 맹렬하였다. 특히 조선으로 떠나는 사제들은 출정가를 부르며 전교의 의지를 불태웠다.
파리외방전교회소속 선교사들은 임지로 떠나기 전 선교사들의 출발 노래를 부른다. 이 노래는 조선순교사를 저술한 달래신부가 작사를 하고 구노가 작곡한 노래다. 노랫말을 정리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발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오늘은 그대들이 원하는 날, 그 어던 것도 그대들의 열정을 막을 수 없네.
떠나라 형제들이여, 그대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가. 형제들이여! 이 세상에 하직 인사를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먼 곳으로 떠나라!. 그리스도의 병사들이여, 세상 모든 땅이 복음을 들도록 십자가의 깃발을 도처에 꼿아라! 하느님께 그대들의 땀을 받쳐라!
그대들은 포승으로 묶일 것이고, 그대들의 시신은 형장에 버려질 것이다. 사나운 폭군들의 칼 아래에서 그대들의 승리를 나눠라
우리가 죽어야 한다면 죽으리라!. 그대들 뒤를 곧 따라가리라, 한 영혼을 개종시키기 위해 땅끝까지 찾아가리라~
이 노래처럼 다블뤼 주교와 위앵신부, 오메트르 신부께서 갈매 못 형장에서 칼 아래 쓰러진 것이다. 또한 조선이 임지로 정해진
선교사들은 다음 노래를 불렀다.
“오, 조선이여!
오, 나의 기쁨이여! 오, 나의 새로운 조국이여,
나는 너를 보고야 말며
너를 위해 내 삶을 바치리라.
큰 배가 흔들거리며 항구에서 나를 기다리도다.
안녕, 프랑스여, 나는 너를 떠나노니,
순풍이여 네 나래를 펴라.
나는 거기에서 더욱 아름다운 해변을 찾게 되리라.
그렇다. 나는 죽어도 살아도 조선인이다.”
프란치스칸 순례자들은 이 두 노래를 기억하며 십사처를 향해 걸었다. 오늘따라 모두 신중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순교현장 터, 서 있을 수 없었다. 모두 무릎을 꺾었다. 그리고 어깨를 나란히 한 다음 나즈막한 목소리로 순교자들을 위한 기도를 올려 드렸다.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시며~~~ 바다내음이 울타리를 넘어 순례자들의 먹먹한 마음을 위로하듯 몰려 왔다. 다시 일어서서 몸을 추수린 후 절을 올린 후 순교형장 터를 벗어났다.
이 기념관은 조선 제5대 조선대목구장 다블뤼 주교님을 기려 1999년 주교 모관을 본따 지은 성전으로 2006년 10월말, 승리의 성모 성당으로 봉헌된 건물이다. 그리고 이후 다시 리모데링 하여 기념관으로 재 봉헌 되었다.
기념관에는 베르뇌(제4대 조선대목구장)ㆍ다블뤼 주교 유해를 비롯해 다블뤼 주교 중백의, 다블뤼 주교가 한국에서 사목을 하면서 21년간 집필한 저서 10권 중 「신명초행(묵상서)」 「회죄직지(임종 준비서)」 「영세대위(영세 준비서)」 「성찰지략(고해성사 준비서)」 등 9권, 오매트르 신부가 사용했던 제병기와 회중시계 등이 소장돼 있다.
다블뤼 주교 중백의는 1841년 다블뤼 주교가 사제수품 때 입었던 것으로, 중백의 안쪽에 다블뤼 주교를 뜻하는 안토니오 다블뤼의 이니셜인 'A.D'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이 중백의는 2004년 4월말 다블뤼 주교 출신 교구인 프랑스 아미앵교구의 교구장 장 룰 부이에레 주교와 교구 사제단, 신자들이 방한했을 때 갈매못성지에 기증한 것이다
기념관이면서 성전으로 사용하는 건물 오른쪽 (드블뤼주교님에 의하여 조선최초 성모성심회가 수리치골에서 탄생하고 성모님은 조선교회의 주보성인이 되신다. 성요셉형제를 함께 모신다는 조건부로...) 한국적인 모습의 성모님이 장미밭 사이에 서서 순교터를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 보신다. 이곳에서 순교하신 오메트르 신부님께선 전교목적으로 다니실 때 항상 성모님을 가슴에 품고 다니셨다.
그런 사연 때문일까? 자꾸 성모님의 눈치를 보게 된다. 그 마음을 헤아리고 계신듯 한 모습을 보게된 것이다.
나라는 국가를 위태롭게 하였다는 중죄인으로 결정한 후 군문효수형을 결정한다. 그러나 형장이 문제였다. 당시 국혼이 있었기에 한양부근에서 처형할 수 없었다. 조선시대 국사범을 처형할 때 처형장을 결정하는 기본적인 요소가 있었다. 국가의 기본축인 경복궁을 중심으로 우측엔 사직단이 있고 좌측으론 종묘가 있었다. 그 안에서 처형은 없었다. 사직단 밖으로 벗어나야 하고, 물이 흐르는 곳으로 군중들이 모이고 왕래 많은 곳이어야 한다. 서소문 사거리, 당고개, 새남터, 절두산이 그런 곳에 행당되는 곳이다. 내포지방 신리부근 거더리에서 잡힌 선교사들은 한양으로 압송된 후 국혼관계(고종황제)로 보령 갈매못으로 형장이 결정된 것이다.
예수님을 가진자는 모든 것을 가진자다. 드블뤼 주교님께서 평생 마음에 심고 사제의 길을 걸으셨던 말씀이다.
황석두 루까 순교자님이시다. 드블뤼 주교님을 도와 교리서와 교회에 필요한 각종 문헌을 편집하고 출판한다.
성 다블뤼 주교는 자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 마리 니콜라 앙투안 다블뤼(Marie Nicolas Antoine Daveluy), 1818-1866의 한국이름은 안돈이(安敦伊)입니다. 나는 1818년 3월16일 프랑스 아미앰(Amiens)에서 태어나 소신학교를 졸업 후 1834년 10월 파리 교외의 잇시(Issy) 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 동안 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리고 파리 생 쉴피스(saint supice) 신학교에 입학하여 5년 동안 신학을 배운 다음 1841년 12월 18일 사제로 서품 되었지요. 서품 후 르와(Roye) 본당의 보좌로 20개월 동안 사목하고 1843년 10월 4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이듬해 극동 선교사로 임명 받았습니다. 1845년 페레올 주교와 함께 상해로 가서, 8월17일 김가항 성당에서 거행된 김대건의 사제 서품식에 참석한 뒤, 8월24일 상해에서 30리 떨어진 힁당신학교 성당에서 첫 미사를 집전한 김대건 신부를 보좌하였습니다.
내가 갈 선교지 조선의 첫 사제의 첫 미사를 보좌할 수 있었던 그날의 감희를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웠습니다. 저보다 먼저 조선에 들어간 방인 사제를 길러낸 여러 선교사들의 노고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조선에 가서 내가 이렇게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지 … 하느님만이 모든 것을 아시겠지요. 마침내 8월31일 나는 조선 향해 출발하였습니다. 페레올 주교, 김대건신부와 함께
상해를 떠나 어려운 항해 끝에 10월 12일 저녁 8시경 충청도 강경부근 황산포에 상륙했지요.
조선에 입국한 이튿날부터 나는 페레올 주교의 명에 따라 교우촌 공동으로 가서 조선말을 배우는 한편 1846년 1월부터는 공동 주변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수리치골에서는 몇몇 신자들을 모아 신심 단체인 성모 신심회를 조직하였습니다. 하지만 김대건신부의 순교 이 후 박해를 피해 이곳 저곳으로 피신하면서 큰 고초를 겪었고, 이때 겪은 고생으로 오른쪽 무릎인대가 늘어나 평생 동안 보행에 불편을 감내해야 했지요, 1850년 1월에는 병이 너무 위중해져 최양업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기도 했지요. 그러던 중 1857년 3월25일 나는 서울에서 제4대 조선 대목구장 베르뇌 주교로부터 승계권을 가진 부주교로 서품되었습니다.
주교 서품 예식에는 메스트르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와 최양업 신부가 참석했습니다. 한밤중에 서울의 회장들과 신망 있는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주교관에서 이루어졌는데 마치 로마의 카티콤바와 같았습니다. 1856년부터는 조선교회사 및 조선 순교사 사료를 수집하는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이와 더불어 신입 교우들을 위한 교리서도 편찬하였지요. 그리고 1862년에는 그동안 수집 정리해 온 조선교회사 및 조선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들을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장 알브랑 신부에게 보냈습니다. 이 자료들이 바로 여러분이 이른바 다블뤼 비망기라 부른 것입니다. 애통하게도 비망기를 쓰면서 모았던 한국 순교자 관련 자료들이 주교관이 불이 나면서 소실되고 말아 두고두고 안타까운 마음을 다스리기 어려웠습니다. 후에 달레 신부가 이 비망기를 바탕으로 하여 한국천주교회사를 썼다니 하느님의 계획은 참으로 오묘하십니다. 1866년 2월 베르뇌 주교가 서울 태평동 주교댁에서 체포되어 3월 7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셨고 내가 대목구장직을 승계하여 제5대 조선 대목구장이 되었지요 그러나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나의 대목구장 재임기간은 23일 불과했습니다. 베르뇌 주교가 순교하고 4일 뒤인 3월 11일에 나 역시 거더리에서 체포되었고, 위앵 신부와 오메트르 신부, 그리고 신자 황석두, 장주기와 함께 3월 30일 갈매못으로 이송되어 내 나이 48세에 하느님께서 주신 순교의 영광을 받았습니다. 사제로서 산 지 25년 이었고 조선에서 활동한 시간을 따져 보니 21년이었습니다.
드블뤼 주교님과 황석두 루까 순교자께서 교리서와 교회에 필요한 책을 집필하는 모습이다.
오메트르(베드로 1837-1866)
한국 성이 오씨인 베드로 오메트르는 1837년 4월 8일 앙굴렘 교구에 있는 애젝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첫 아들이었는데 이 집안은 넉넉지 못한 집안이었으나 자녀는 다섯 명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조그마한 땅을 경작하면서 나막신을 만들었다. 아버지는 훌륭한 천주교인이었고 어머님도 교인이셨다. 어머니는 어떤 신비스런 예감을 받은 후 천주님께 맏아들을 내놓으려고 항상 준비하고 있었다.
1862년 6월 사제서품을 받은 베드로 오메트르 신부는 8월 3일, "천주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사랑하시고 찬미하게 하라고 저를 보내시는 나라는 조선입니다."하고 아버지에게 알렸다. 그 뒤 고국을 떠나 패낭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던 두 조선인 신학 생을 데리고 그 다음해인 1863년 6월달에 중국 어선을 타고 연평 바다를 거쳐 비교적 무사히 1863년 6월 23일 그의 전교지방에 도착하게 되었다.
조선에 도착한 뒤에 수원 샘 골에 배치된 오메트르 신부는 평소와 같이 끈기 있게 조선말을 배웠고 그런 다음 거주지가 미리 내로 되어 있는 구역에서 성무 집행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얼마 안 되어 다불뤼 주교가 활동하는 신 리 마을 거더리에서 꽤 가까운 곳인 내포지방에 자리잡았다.
그의 성직수행을 교우들은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했고 오메트르신부를 너그럽고 착한 사람으로 보았다. 베르뇌 주교도 그의 성직수행을 높이 평가했는데 오메트르 신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전해 주었다.
<이 작은 초심자가 어지간히 놀라운 일을 곧 잘합니다. 그는 힘과 어짐을 겸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가 맡은 교우집단을 잘 다스리고 그들에게 성체와 성모께 신심을 가르쳐 줍니다.>
1866년 초 서울을 중심으로 박해가 가해지기 시작하였고 베르뇌 주교 등이 잡히게 되었다. 이런 소식을 듣고 교우들이 불안해 하자 그는 교우들에게, "걱정 마시오. 외교 인들에게 천주교에 대해 소리 높이 말해 줄 때가 왔습니다."하고 말했다.
그래도 그는 자문을 구하기 위해 거더리에 있던 다블뤼 주교를 만나러 떠났다. 오메트르 신부를 만난 다블뤼 주교는 인근마을 세거리에서 활동 중이던 위앵 신부도 불러서 여러 가지 의논을 하였다. 이 때가 다불뤼 주교가 잡히기 이틀 전인 3월 9일이었다. 다블뤼 주교나 두 신부 모두 이번 박해를 모면하리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박해는 심각하였고 그런 불안 속에 그들은 일단 헤어졌다.
이 때 오메트르 신부는 소덜로 갔고 위앵신부는 세거리로 돌아갔다. 그 뒤 오메트르 신부는 다블뤼 주교와 함께 밤을 이용하여 배를 타고 조선을 탈출해 보려고 하였으나 역풍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그는 다시 그가 머무르던 교우촌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곳에서도 오래 숨어 있을 수 없었고 오메트르 신부 자신도 숨어 있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곧 다블뤼 주교를 찾아 거더리로 향했는데 그가 머무르고 있던 마을을 떠나기 전에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성물들을 어느 우물 속에 감추었다.
그것들을 가지고 떠날 수는 없었고 발각되면 교우들에게 누가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복사 이 빈첸시오를 데리고 신리를 향해 떠났다. 어느 갈림길에 이르렀을 때 오메트르 신부는 빈첸시오에게 "나는 신 리 쪽 거더리로 갈 텐데, 당신은 나하고, 같이 거더리로 가든지 공주 쪽으로 가든지 마음대로 하시오"하고 말했다.
그러자 빈첸시오는, "저는 신 리로 갈 수는 없어요"하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가서 잘 숨어 있으시오. 나중에 다시 만납시다"하고 말하고 오메트르 신부는 혼자서 길을 계속해 새벽에 신 리 마을 다블뤼 주교가 사는 동네에 이르렀다.
그가 정자나무 곁에 서 있는 것을 한 포졸이 발견하고, 누구냐고 물었으나 신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포졸은 집안으로 들어가, "방금 이상한 사람이 하나 왔습니다"하고 일렀다. 다블뤼 주교가 문을 열어 보고는, "여러 말 하지 말고 저 삶을 들어오게 하시오" 하고 말했다.
그 뒤 서울로 압송되어 오메트르 신부는 그의 어른이요, 아버지인 주교와 같이 문초를 당하고 고문을 받았다.
그리고 군문효수의 사형선고를 받고 400리나 떨어진 사형장인 갈매 못에서 1866년 3월 30일 정오에 주교 다음으로 참수 치명하니 바로 그 날이 예수 수난 날이요 바로 그 때가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신 시간이었고, 그의 나이 29세였다.
1866년 3월 30일 갈매 못에서 처형된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 이 세 성직자는 죽기 전에 특히 다불뤼 주교가 옷을 모두 벗겨 버리고 다른 순교자의 옷은 저고리만 벗겼으나 그 날밤에 어떤 악한 무리가 나타나서 남은 옷조차 모두 벗겨 가 버리게 되었다.
따라서 알 몽둥이의 다섯 시체가 이후 3일 동안을 그대로 그 자리에 버려져 있게 되었으나 이상하게도 그 많은 까마귀와 개가 이들의 시체를 조금도 해치는 일이 없었다. 그러던 중 3일 후에 그 근처에 살던 외인들이 이들의 시체를 그 자리에 모래로 묻었으며 황석두 시체만이 며칠 후에 친척이 찾아가고 남은 시체는 그 해 6월 초에 이르러 교우들이 찾아서 그 곳에서 30리쯤 떨어진 홍 산 고을에 옮겨다가 묻게 되었는데 돈이 없어서 관을 마련하지 못하고 무덤 하나를 넓게 판 후 시체를 칠성판 하나씩에 받쳐서 묻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미 죽은 지 두 달이 넘은 이들 시체는 모두 썩지 않고 있었고 다만 위앵 신부의 그것만이 조금 썩기 시작하였을 뿐이었다고 한다. 성인의 유해는 절두 산 순교기념관에 안치되어 있다.
민 위앵 마르티노 루카 (Huin Martin Luc)
성 마르티노 루카 위앵(Martin Luc Huin) 신부의 세례명은 마르티누스 루카(Martinus Lucas)이며, 한국 성은 민(閔)이다. 그는 1836년 프랑스 랑그르(Langres) 교구의 기용벨(Guyonvelle)에서 태어났다. 포도밭을 경작하던 그의 부친은 항상 그의 가문에서는 성직자와 수도자가 많이 배출되었음을 자랑하면서 9남매가 모두 훌륭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교육시켰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막내로 태어난 위앵은 1851년에 랑그르 소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856년 10월에 랑그르 대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861년 6월 29일 사제로 서품되어 랑그르 교구의 사제가 되었다.
그 후 그는 믈레(Melay)와 부아제(Voisey) 본당에서 보좌신부로 활동하면서도 선교사제의 꿈을 키우다가 마침내 1863년 8월 20일 교구장 주교의 허락을 받고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1864년 6월 13일에 자신이 전교해야 될 지방이 조선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기뻐하며 부모님에게는 물론 옛날 본당 신부님에게도 편지를 썼다고 한다.
1864년 7월 15일 위앵 신부는 브르트니에르(Bretenieres, 白) 신부, 볼리외(Beaulieu, 徐沒禮) 신부, 도리(Dorie, 金) 신부와 함께 전교지인 조선을 향해 파리(Paris)를 떠나 홍콩, 상해를 거쳐 1864년 11월 만주의 차쿠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조선과의 연락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아 한문과 조선어 공부를 하며 그 해 겨울을 지냈다. 그 이듬해인 1865년 5월 27일에 비로소 위앵 신부는 일행과 함께 충청도 내포 지방에 상륙하여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의 환영을 받으면서 조선에 입국하였다.
도착 후 위앵 신부는 6월 18일까지 다블뤼 주교와 함께 내포 지방에서 조선어 공부를 하며 지내다가, 그 후에는 내포 지방에서 20리쯤 떨어진 당진 합덕 지방의 세거리 공소로 떠났다. 위앵 신부는 1866년 2월에 벌써 교우들의 고해성사를 듣고 신자들을 가르칠 수가 있었다. 위앵 신부는 박해 직전까지 5백여 명에게 고해성사를 주었고, 15명 내지 20명에게 병자성사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몇몇 교우들에게 혼인성사도 집전해 주었다.
1866년 3월 12일 그는 다블뤼 주교의 편지를 받고 순순히 체포되어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Aumaitre, 吳) 신부와 함께 3월 19일 서울로 압송되어 의금부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1866년 3월 30일 보령 수영 갈매 못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되었다. 이때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내 마음에 아픈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이토록 젊은 나이에 죽는다는 것도 아니요, 이곳과 같은 처절한 장소에서 죽게 된 때문만도 아니라, 이 나라 불쌍한 백성들의 구령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죽게 되니 그것만이 마음 아플 뿐이오.” 그의 유해는 현재 절두산 순교 기념관 지하성당에 모셔져 있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 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 되었다.
장주기 요셉
낙소’라고도 불렸던 장주기는 경기도 수원(水原) 느지지(현 경기도 화성군 양감면 육당리)에서 태어나 1826년에 세례를 받았다. 박해와 친척들의 방해를 피해 충청도 배론으로 이사하였고, 회장이 되어 모범적인 신앙 생활을 하였다. 1855년 배론에 신학교가 설립될 때에는 자신의 집을 임시 신학교로 내어 주고, 자신은 신학교에 딸린 땅에서 농사일을 하며 잔일을 도맡아 하였다. 1866년 3월 1일 배론 신학교에서 신 신부와 박 신부가 체포되자 장주기는 제천 부근의 노럴골로 피신하였지만, 다른 교우들이 피해를 입을까 염려하여 자수한 뒤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의 포청에서 고문을 견뎌 내며 끝까지 신앙을 지켜, 때마침 홍주 거더리에서 끌려 온 안 주교, 민 신부, 오 신부, 황석두 등과 함께 3월 30일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6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황석두 루까
재건’이라고도 불렸던 황석두는 충청도 연풍(延豊)의 양반 가문에서 자라나 부친의 뜻에 따라 과거 시험을 치르러 상경하다가, 한 주막에서 천주교인과 사귀게 되어 입교하였다.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3년 동안 벙어리 행세를 하며 교리서를 탐독하였고, 이에 감동한 부친과 가족들도 입교하게 되었다. 그는 덕행이 뛰어나고 교리 지식이 풍부하여 주교와 신부들의 복사로,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고 주교에게 금욕과 절제를 위하여 아내와 별거할 것을 허락받고 독신 생활을 하였으며, 안 주교를 도와 교리서 번역과 교회 서적 출판에도 참여하였다. 1866년 3월에 먼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던 안 주교를 몇십 리나 따라간 황석두는 결국 함께 체포되어, 3월 30일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5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저기 보이는 숲 가운데 십자가가 있는 곳이 효수된 순교자들의 목이 내걸렸던 자리다. 아멘.
순례일정을 순교터에서 마친 후 갈매못을 나왔다. 걸음여행을 하며 갈매못에서 일어난 순교의 역사를 되새기고 창초적인 질서에 의하여 확입된 자연, 자연안에서 현존하신 하느님과 소통하며 걷고자 충청 수영성을 찿았다.퇴락한 산성문이 걸음여행자들을 반긴다. 한양에서 이곳까지 약 165km, 이곳까지 끌려 온 순교자들은 이곳에서 인수인계된다. 충청 수군사령부였던 수군들에게 인계된 후 서양선교사 세분과 조선의 순교자 두 분은 다음날 갈매못으로 옮겨져 군문호수형으로 순교의 길을 떠난다. 그 사실을 지금도 기억하는지 천수만은 숨죽이고 있었다. 잔득 흐린 하늘, 그 이래로 느릿느릿 흰갈매기 날았다.
순교자 역사의 현장인 충청수영성은 지금 보수중이었다. 순교자들이 한양을 떠나 이곳에 도착한 날은 1866년 3월29일이었다. 이곳에서 하루 감옥에서 묵은 후 형장으로 결정된 갈매못 그곳으로 옮겨진 후 칼날에 쓰러져 순교로서 생을 마감하였다. 성 후문으로 돌아 나와 순교자들이 이끌려 온 길을 걸어 살핀 후 성문에 모두 모였다. 5년 째 함께하는 성지순례와 걸음여행자들이다.
순례 걸음을 끝내고 걸음여행을 떠나기 위하여 백제 개루왕 때 이야기인 도미부인 정절의 전설이 깃든 도미부인 사당이 있는 숲으로 자리를 옮겼다. 전설에 관련된 이야기를 세베리노형제에게 청취한 후 숲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울창한 숲향기가 진동하는 오솔길, 흙길이라 걷기가 참 편했다. 산도라지 꽃이 아름답다. 싸리꽃이 한참이고 까치수염은 끝물, 칡꽃은 이제 막 개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보령방조제 넘어 전원이 아름답고 천수만 뱃길을 드나드는 선박이 그림처럼 다가 온다. 저 멀리 보이는 안면도 검고 긴 그림자가 되어 천수만 입구를 가로질러 있었다. 다들 환호한다.
호쾌한 전망대에 잠시 머물며 하느님과 소통하는 시간을 ~~~~ 그리고 다시 숲 길을 걸어 어촌으로 내려섰다. 어촌식당에 들러 마지막회합을 갖은 후 귀경길에 올랐다. 어디를 가나 기도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놓은 갈매못성지,오늘 우리들이 기억한 순교자는 다섯분이시지만 이름도 모를 무영순교자 수백명이 천수만에 수장된 사실이 아름아름 역사의 시간을 타고 알려지고 있다. 그분들은 신원을 몰라 영원히 무명순교자의 세계에 머물 수 밖에 없다. 화초는 사람이 카우지만 야생화는 하느님께서 키우시고 지켜 주신 것처럼 그들도 하느님께서 지켜 주신다. 그들을 기억하며 서울에 도착한 시간은 9시30분, 손을 들어 서로 배우하고 헤어졌다. 8월 성지순례와 걸음여행을 약속하며.....
세베리노 보충설명,
프랑스 작곡가 샤를 프랑스와 구노(Gounod, C. F., 1818-1893년)는 1843년 파리 외방 전교회 신학교 성당의 악장(樂長)이 된다.
구노는 그때부터 사제의 길을 걷고자 성 슐피스 신학교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선교사의 꿈을 접고 1848년 교회를 떠나 음악에 전념하지만 선교사에 대한 미련 때문에 아름다운 종교음악을 작곡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조선교구의 제5대 교구장, 순교 성인인 다블뤼(Daveluy, 1818-1866년)와 같은 시대에 파리 외방 전교회의 신학교에서 살았다. 구노는 다블뤼를 비롯한 자신의 신학교 친구들이 죽음의 땅 조선으로 들어간 소식들 듣고 아베 마리아'를 작곡했다. 구노는 1869년 조선에서 순교한 순교자들을 찬양하는 노래를 작곡한다. 구노가 곡을 붙인 성가곡 카돌릭성가 284번 무궁무진세는 자신이 친애한 선교사 다블뤼를 비롯하여, 신학교 시절의 동료와 후배들의 순교를 기린 조선에 단 하나의 성가, 구노의 곡이다.
첫댓글 예수님을 가진자가 모든것을 가진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