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여동의 역사
반여동이라는 동명은 이곳의 지형이 소반처럼 둥그렇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인구 약 8만명의 반여동은 동쪽은 반송과 좌동, 서쪽은 동래구 명장동, 남쪽은 재송동, 북쪽은 반송동과 석대동과 접해있다. 동명은 이곳의 지형이 소반처럼 둥그렇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동래구 동상면(東上面)지역에서 고종 33년인 1896년 부산부로 편입되었다.
1914년 다시 동래군 동래면 반여리(盤如里)로 되었고, 1942년 다시 부산부에 편입되었으며 1957년에는 부산시 동래구로 편입되었다.
1973년 반여동은 반여1, 2동으로 분동되었고 1978년 부터는 동래구에 속하면서 행정은 해운대 출장소가 담당하였다.
1979년 반여 2동이 반여 2, 3동으로 분동되어 반여1,2,3의 3개동으로 되었으며 1980년 동래구에서 해운대구로 편입되었다.
옛날부터 이곳은 대장군(大將君), 명대(名臺)가 서리어 있는 지세라고 구전되어 왔으며 원래는 상리(上里),중리(中里), 무정리(舞亭里), 삼어리(三魚里)의 네 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상리는 반여 1동의 6개 자연부락중 제일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옛날에는 농토가 많아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으나 지금은 주택가로 변모해 있다.
중리는 반여 1동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 중리라고 하는데 남평문씨, 청도김씨 등이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중리에서 장산쪽으로 올라가면 신라시대 창건된 인지암(仁智菴)이라는 암자가 있었으나 빈대가 너무 많아 다른곳으로 옮겼다고 전한다.
삼어리는 반여1동 서쪽 수영강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봄, 여름, 가을 맑은 물에서 물고기가 뛰어 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청동기 시대에서 가야 시대까지로 추정되는 고분군에서 유물이 발굴된 곳으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마을이다.
무정리는 현재 왕자아파트 주변에 형성되었던 마을로 해림사(海林寺)란 절이 있는 산을 오지봉(五指峯)이라 하였는데 이 오지봉은 다섯 손가락으로 거문고를 타고 춤을 춘다는 뜻으로 옛날 이곳에 무정(舞亭)인 정자가 있었다는 전설이 있는 마을이다.
고기등(古器嶝)은 옛날 이곳에서 옹기를 만든 곳이라 하여 고기등이란 지명이 붙여진 것으로 전하고 있다.
신촌마을은 1960년대 후반부터 형성된 새로운 마을이라 하여 신촌(新村)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현 장산시장이 있는 지역을 지칭한다.
반여2동은 1972년 9월 서구 구덕 수원지 수재민 165세대가 지금의 반여2동에 이주해옴으로써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인구가 증가하자 1973년 4월 반여동에서 반여1동과 반여2동으로 분동되었고, 10월에는 좌천동 고지대 철거민 1,643세대가 이주해오고 1975년 12월 초량동 고지대 철거민 802세대도 이주해와 점차 동세가 커져 1979년 8월 반여2동이 반여2동과 반여3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반여 2, 3동은 단층 연립주택의 지붕위에 빨강, 파랑, 노랑색 등의 페인트 칠을 하였기 때문에 일명 무지개 마을이라고도 하였으나 새로 정착한 이주민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서 붙여진 명칭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