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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릉 이제겸의 생애와 시문학 정신
이원걸(문학 박사)
Ⅰ. 머리말 Ⅱ. 두릉의 Ⅲ. 두릉집에 대하여 1) 체재와 내용 2) 두릉 시 개요 Ⅳ. 두릉 시문학의 특징 1) 수신과 정심의 미학 2) 유배의 고독한 서정 자아 3) 유배의 객수 서정 4) 유배의 비애와 한탄 5) 굴원의 「어부사」 수용과 그 의미 6) 우의 표현을 통한 울분의 투사 7) 침잠과 사색의 서정 8) 한거와 정취의 서경 Ⅴ. 두릉의 유적 Ⅵ. 마무리 |
1. 머리말
두릉과 이인좌의 난은 떨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 청주에서 일어난 이인좌李麟佐의 난亂은 조선 후기 이인좌 등의 소론少論이 주도한 반란으로 영조 4년(1728)이었다. 조선 후기 소론이었던 이인좌와 정희량이 신임사화를 일으켰던 김일경 등과 영조를 몰아내고 밀풍군 탄을 임금으로 추대하려고 일으킨 난이다. 소론이 주도한 반란이며, 일어난 해의 간지를 따서 무신란(戊申亂)이라고도 부른다. 소론은 경종 연간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노론과의 대립에서 일단 승리하였으나, 노론이 지지한 영조가 즉위하자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박필현 등 소론의 과격파는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며 경종의 죽음에 관계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고 밀풍군 탄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였다. 여기에는 남인들도 일부 가담하였다.
한편 이들이 일어나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중요한 요인이 있었다. 생활이 궁핍해지자 유민流民들이 증가하고 도적들이 자꾸 늘어났다. 그런 연유로 기층 민중의 저항적 분위기가 자연스레 형성되고 있었다. 청주에 살고 있던 이인좌는 양성의 권서봉, 용인의 박완원, 안성의 정계윤, 괴산의 이상택 등의 반란군과 합세하여 1728년 3월 15일 청주성을 함락하기로 하였다. 그들은 상여 행렬로 꾸민 다음 상여 속에 병기를 감추고 청주성으로 들어가 장례를 치르는 척하다가 날이 저물자 청주성으로 들이쳤다.
이인좌는 충청병사 이봉상과 그의 비장이었던 홍림을 그 자리에서 죽이고, 영장 남언년에게 항복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가 말을 듣지 않자 그 역시 죽인 후에 스스로 대원수라고 지칭하였다. 그들은 경종의 원수를 갚는다는 점을 널리 선전하면서 서울로 북상하였고, 신천영은 가짜 병사를 칭하며 북상하였다. 그러나 24일에 안성과 죽산에서 도순무사 오명항과 중군 박찬신 등이 거느린 관군에게 격파되었다. 청주성에 남아 있던 세력도 상당성에서 박민웅 등의 창의군에 의해 무너졌다. 영남에서는 동계 정온의 후손인 정희량이 거병하여 안의와 거창 그리고 합천, 함양을 점령하였으나 경상도관찰사가 지휘하는 관군에 토벌되었다. 호남에서는 거병 전에 호남을 책임지기로 했던 박필현 등의 가담자들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인좌의 난 진압에는 병조판서 오명항 등 소론 인물들이 적극 참여하였지만, 그 뒤 노론의 권력 장악이 가속화되었다. 결국 소론은 재기 불능 상태가 되었다. 이 사건 이후 정부에서는 지방세력을 억누르는 정책을 강화하였고 토착세력에 대한 수령들의 권한을 대폭 증가시켰다. 이 난은 조정에만 경각심을 준 것이 아니라 조선 후기에 일어난 수많은 민란에도 영향을 주었다. 즉 민란 주동자들이 이인좌가 군사를 동원한 방식을 채용했던 것이다. 결국 이인좌의 난은 1812년 홍경래의 난으로 이어졌다.
본고는 봉화 선비 문화 연구의 일환으로 이러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 두릉 이제겸에 대해 주목하고자 한다. 두릉에 대한 연구는 전무하며 그가 남긴 문집 표점과 해제가 있을 뿐이다. 그의 문집 탐색에 이어 생애와 시문학 유산을 면밀히 살펴 두릉의 생애와 시문학 유산의 상관성을 밝혀보고자 한다.
2. 두릉의 생애
두릉 이제겸(1683-1742)의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선경善卿 또는 사달士達이며, 호는 두릉杜陵이다. 그의 선대를 소급해 보기로 한다. 시조는 고려 때 현리로서 생원시에 합격한 석碩으로, 밀직사密直使로 증직되었다. 아들 자유子攸는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통헌대부通憲大夫에 이르렀다. 홍건적을 토벌한 공으로 송안군松安君으로 봉해졌으며 후일 안동安東으로 이거移居했다. 손자 정禎은 강개慷慨하고 큰 포부를 지녔으며 말 타고 활을 잘 쏘았다. 모적毛賊을 정벌한 공으로 이급二級의 벼슬을 받았으며 선산부사善山府使를 역임했고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증직되었다. 정禎은 계양繼陽을 낳았는데 단종端宗 때 진사進士가 되었지만 은둔하여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고 호를 노송정老松亭이라 했다. 예안禮安의 온혜溫惠로 이거移居했으며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증직되었다.
계양溪陽은 우堣를 낳았는데 호는 송재松齋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호조판서戶曹參判에 이르렀다. 문장文章과 행의行誼로 당대에 추앙을 받았다. 형 찬성공贊成公 식埴과 계현사啓賢祀에 병향幷享되었다. 이분들은 퇴계退溪(1501-1570)의 숙부로서 훈적訓迪한 공이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우堣는 수령壽苓을 낳았는데 황산찰방黃山察訪을 지냈다. 수령樹苓은 아들 빙憑을 낳았는데 빙憑은 첨정僉正을 지냈다. 빙憑은 자식이 없어 아우 충冲의 아들 일도逸道를 후사後嗣로 삼았으며 좌승지左承旨로 증직되었다. 이분이 두릉의 고조부이다. 일도逸道는 지온之馧을 낳았다. 지온之馧은 생원시에 합격했다. 연산군대燕山君代에 상소를 올려 이이첨李爾瞻의 목을 벨 것을 주청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참봉參奉 벼슬을 얻었다. 자식을 얻지 못하여 종형從兄 지형之馨의 둘째 아들 운익雲翼을 양자로 맞아들여 후사를 삼았다. 운익雲翼 이 분이 두릉의 조부祖父이다.
두릉의 부친은 동표東標로서 명종대明宗代에 문과에 급제하고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지냈으며 호는 난은懶隱이다.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인현왕후仁顯王后 손위遜位 문제가 대두되자 상소를 올려 직간했다. 출처가 대의에 부합되어 당시 사람들은 그를 두고 소퇴계小退溪라고 하였다. 영조 신유년에 역주청의力主淸議 수립탁연樹立卓然이라는 여덟 자의 증첩贈牒을 받았다. 정조 무신년에 충간忠簡이라는 시호를 받고 청백리에 기록되었다. 모친 정부인貞夫人은 안동 권씨로 현감縣監 의檥의 오대손五世孫 협鋏의 따님이다. 두릉은 1683년(숙종9) 윤 6월 23일에 예천군醴泉郡 고산리孤山里에서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역임한 부친 이동표李東標(1644-1700)와 모친 안동권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두릉은 어려서부터 아름다운 자질을 갖추었으며 성품이 근후謹厚하며 용모가 단정하고 매사에 신중했다. 조금 자라나자 엄한 독서 과정을 주지 않아도 스스로 독서하되 영리하여 성취한 바가 많았다. 14세 때(1696)에 부친이 삼척부사로 재직할 당시 부친의 임소任所를 방문하였는데, 그곳에는 명승지가 많았지만, 그는 그런 곳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학업에만 열중했다. 16세 때(1698)에 모친을 여의고 애통해 하며 예를 다했다. 예법에 따라 장례를 치루고 춘양春陽 어로동漁老洞으로 반장返葬하였다. 그 해 가을에 부친이 임기를 마치고 귀향했다.
이듬해인 17세 때(1699)에 조모상을 당해 모친 묘소 위쪽에 장례를 지냈다. 부친은 조모 묘소 아래에서 시묘侍墓를 했는데 그 해를 넘기고 지나치게 애통해 한 나머지 몸을 상해 별세하였다. 당시 새로 이주한 곳이 산골짜기였는데 큰일을 당하고 나서 사방에 친척이라고는 없었고 두릉 형제는 예법을 자문할 방법이 없었지만 각종 상례 및 가례家禮를 참고하여 빠트림이 없게 하였다. 이에 주위 사람들의 형제의 극진한 효성에 감탄하였다. 하당荷塘 권두원權斗寅(1643-1719)이 부친 난은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제문에서“두 형제는 재주가 있고 학문에 뜻을 두었으니 형의 집안은 끝나지 않았소.”라고 하며 두릉 형제가 난은 가문을 훌륭히 이어가길 기대하였다. 부친상을 마치고 선조의 유업을 실추시킬까 염려하여 더욱 힘써 학문에 전념하였다. 의문점이나 난해한 부분은 표시를 해두었다가 사우師友들을 만나면 질문을 하고 했으며 18세(1700)에는 부친상을 당했다.
당시 부친은 조모의 시묘를 하다가 여막에서 별세했다. 두릉은 봉화가 낯선 곳이고 산골짜기였기 때문에 인근에는 일가친척이 없었다. 당시 두릉과 형 회겸晦兼이 모두 성년이 아니었기 때문에 상례에 대한 자문을 구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선조들의 유업을 실추시킬까 염려되어 각고의 노력으로 예법을 공부하여 칭찬을 받았으며 혹여 의문이 나는 점은 창과 벽에 기록해 두었다가 지나가는 선비들에게 물어 보고는 이를 해결하였다. 두릉은 부친상을 마치고 부친이 살아 계실 때 면학하여 입신할 것을 당부한 점을 명심하여 아우 회겸과 함께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렇게 면학한 두릉은 32세였던 1712년(숙종38)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이어 42세인 1724년(경종4)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으며, 이듬해 43세인 1725년(영조1)에 증광별시增廣別試에 합격하였다. 45세인 1727년(정조3)에는 율봉도찰방栗峯道察訪에 임명되었다. 두릉의 출사는 이렇게 시작되어 희망적이었다.
그러나 두릉의 불행은 이인좌李麟佐(?-1728)의 난으로 인해 시작되었다. 두릉이 율봉도찰방으로 근무한 이듬해 1728년(정조1)에 이인좌가 영조의 즉위로 소론少論이 실각하자, 불평 세력을 규합하여 밀풍군密風君 탄坦을 추대하여 그 해 3월 청주에 잠입하여 충청도 병마절도사 이봉상李鳳祥(1676-1728)을 죽이고, 대원수라고 자칭하고는 진천․죽산․안성 등으로 진격하다가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明恒(1673-1728) 등의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두릉은 이들이 청주를 점거할 무렵에 말 숫자를 파악하느라 옥천沃川 증약관增若館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윽고 두릉은 변란의 소식을 접했다. 말은 이미 빼앗겨 버렸고, 허술한 역으로 수많은 적도를 막아낼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두릉은 대사마大司馬 오명항의 군문軍門으로 달려가 전말을 고백하고 처분을 기다렸다. 이에 두릉이 당시 옥천에 있었고 율봉이 청주 근처였던 만큼 율봉역에서 적도賊徒에게 말을 빼앗기는 것은 형편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병마사兵馬使나 영장營將이라도 당해 낼 수 없었을 것인데 마관馬官의 처지에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회답을 받았다. 그리고 옥천군수와 함께 병사와 말을 정돈하고는 관군을 기다리는 한편 영남의 동지들에게 통보하고 의거하기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이내 적도는 토벌되고 말았다.
이에 두릉은 역예驛隸를 각 읍으로 보내어 잃었던 말을 모두 되찾았다. 이 소문을 들은 자들은 모두 놀라고 탄복했다. 그러나 지평持平 강필신姜必愼(1687-1756)이 자신의 처벌을 피하고자 율봉도찰방 두릉이 반란군에게 역마를 제공하였다는 무계誣啓로 선천宣川에 유배되었다. 두릉이 유배지로 떠날 즈음에 자질子姪들이 억울한 사정을 소송하려고 하자 그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태연하게 유배 길을 떠났다.
두릉은 먼 유배지에서 독서하고 연찬하며 후학을 기르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두릉은 유배지인 선천에서 도덕과 의리를 숭상하고 배우러 오는 자들을 재주에 따라 학문을 가르쳐 성취시켰다. 뿐만 아니라 독서와 저술 활동에도 힘을 쏟아 성리학 관련 서적에서 중요한 대목을 베꼈으며 저술을 편집한 것이 백 여 권에 이르렀다. 이처럼 두릉은 처한 환경과 무관하게 투철한 선비의 본분을 잃지 않고 굳건한 삶을 영위해 나갔다. 거기서 두릉은 5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였다.
50세인 1732년(영조8)에 이르러 중신 홍치중洪致中(1667-1732)․조문명趙文命(1672-1748) 등이 두릉을 신원伸寃하기 위해 주청하였다. 즉, 영상領相 홍치중洪致中은“그 당시 강필신이 이런 장계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이제겸은 이미 그렇게 한 적이 없고 적도에게 인마를 약탈당했지만 어찌 할 도리가 없었던 상황이니 정상을 참작해야 합니다.”라고 했으며, 좌상左相 조문명趙文命은“두릉이 이미 적도의 칼날을 막을 수 없었으니 흉도들이 말을 약탈해 가는 것은 형세상 어찌할 수 없는 것인데 대관이 이를 빌미로 적도에게 인마를 바쳤다고 무고한 것입니다.”라고 했으며,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송성명宋成命(1674-1740)도“안무사 박사수도 일찍이 이런 연유로 방면된 사례가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주상은 방면放免을 하명했지만 대신들은 우선 이배시켜 경감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하여 두릉은 제천提川으로 유배지를 옮겼다.
두릉은 거기서 3년의 유배 생활을 하고 난 뒤 53세인 1735년(영조11)에 방면되어 귀향 조치되었다. 방면된 두릉은 거주지를 팔록동八鹿洞으로 옮기고 작은 연못을 파고 꽃을 심고는 후학을 길렀다. 두릉은 거주지를 따라 자호를 창랑자滄浪子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당시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1552-1629)과 강좌江左 권만權江(1688-1749)과 도의로 친교를 하였다.
두릉에 대한 신원은 말년인 59세(1741)에 이루어졌다. 승지 원경하元景夏(1698-1761)가 영조에게 두릉의 선친 난은이 인현왕후仁顯王后 손위시孫位時에 상소를 올려 부당을 극간했던 점과 아들 제겸이 무고를 입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신원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신원을 호소하였다. 이에 정조는 난은을 이조정랑吏曹正郞으로 포증褒增하고 제겸濟兼을 등용하라는 비답을 내렸다. 두릉은 성은에 감격하였으나 출사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선대의 행적을 수습하는 한편 경전에 잠심하였다. 두릉에 대한 신원을 촉구하는 상소는 이어졌다. 역시 59세(1741)에 영상 김재로金在魯(1682-1759)가 장계를 올려“영남 사람들의 무신년戊申年의 사건은 일시적 패행悖行에 불과하며 사람들마다 반드시 이러한 것은 아니므로 청하옵건대 거두어주십시오.”라고 했다. 이처럼 두릉의 신원을 주청한 사례가 빈번하다는 것은 두들이 무고를 당해 극난한 어려움을 겪었다는 점을 반증해 준다.
이렇듯 두릉은 미관직을 시작으로 8년 동안의 한 많은 유배 생활을 거쳐 7년 정도 귀향 생활을 하다가 1742년(영조18) 5월 26일에 60세(영조18)의 일기로 운명하여 그해 11월에 구가동九佳洞 미향未向에 안장되었다.
두릉 사후인 1742년(영조18) 9월에 경연經筵에서 신료들이 두릉의 신원을 다시 주청하자, 정조는 특령을 내려 두릉을 거용하려고 했지만 이미 별세한 뒤여서 매우 애석하다고 하면서 자손들에게 제사를 받들게 이조吏曹에 명하여 자손들을 등용토록 조치했다. 두릉은 타고난 모습이 위엄이 있고 국량이 크고 중했다. 평소 지낼 때 종일 꿇어 앉아 있더라도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성품이 간결하고 엄했지만 사람을 대하고 사물에 응해서는 온화하고 즐거워했다. 장난을 즐기지 않았고 급하게 말하거나 갑자기 안색을 바꾸는 일이 없어 동료들 가운데 해학을 즐기던 자들도 두릉을 만나면 용모를 단정히 하고 공경했다.
이러한 두릉의 행적은 눌은 이광정은“너그럽되 가혹하지 않았고 침중하며 드러내지 않았고 소박하면서 꾸미지 않았네.”라고 했으며, 강좌 권만은 만사輓詞에서“얼굴을 대하면 친할 만 했고 얼굴색을 단정히 하면 참으로 두려워 사람들이 일컫는다”고 하였다. 두릉의 원래 호는 두릉이었지만 만년에 녹동鹿洞에 복거했기 때문에 녹은鹿隱 혹은 창랑滄浪이라고 했다. 남긴 유문 일부가 전한다.
부인은 문소聞韶 김씨金氏는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오세손五世孫 창현昌鉉의 따님으로, 묘소는 예천군醴泉郡 북쪽 와잠동臥蠶洞 여제단癘祭壇 아래 사향巳向이다. 1녀를 낳았는데 이지원李知遠에게 출가出嫁했다. 계비繼配는 풍산豐山 김씨金氏로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의 현손玄孫 집偮의 따님이다. 묘는 두릉杜陵의 묘소 우측 곤향坤向이다. 4남을 낳았는데 중연重延․중실重實․중경重慶․중정重定이다. 측실側室은 1녀를 낳아 이시현李始顯에게 출가出嫁했다. 중연重延은 진규鎭奎를 양자로 맞았다. 중정重廷은 첨추僉樞를 지냈고 5녀를 낳았는데 차례대로 박한명朴漢明 ․ 김문찬金文燦 ․강식 姜植 ․ 김영익金永翼 ․박병도權秉度에게 출가했다. 진규鎭奎는 3남 1녀를 낳았다. 3남은 한기漢綺․한우漢遇․한중漢中으며 따님은 권재언權載彦에게 출가했다.
류치명柳致明(1777-1861)은 두릉의 행적을 집약하여 다음처럼 기록했다.
참으로 빛나는 충간공의
이름이 큰 전범으로 남아 있네.
의론을 세운 것 탁월하여
성상께서 포상하고 기리셨네.
공께서 그 유업을 이어
많은 이들 선망했다네.
일시에 뒤틀어져 배척당해
좋던 진로가 갑자기 좌절되었네.
남을 모함하던 자들도
심하게 위태로워졌네.
결백한 이에게 죄 씌워
지껄이며 농간했네.
떼를 지어 주청했지만
공의 내심은 깨끗했다네.
두릉께서 이내
나라 명을 받으셨네.
내면에 지킨 바는
궁한 도였음을 알겠네.
행불행에 연연하지 않았고
운세에 옮겨 다녔네.
호연히 별세해
천성을 보존했네.
공의 행적 명으로 남겨
영영 비치게 하리라.
3. 두릉집에 대하여
1) 체제와 내용
두릉집杜陵集은 목판본 4권 2책이다. 권1에 序文은 없고, 시 52題 77首(5언 절구 6수․5언 고시 1수․7언 절구 56수․7언 율시 14수)와 만사輓詞 5제題 11수首(李東厓2 ․ 金濟州4 ․ 成文夏2 ․ 金進士2 ․ 權斗光)가 실려 있다.
권2에는 서간문書簡文 33편篇(外舅金偮․趙德隣5․金濟州3․金良鉉․柳聖和․柳敬時․金琦․金爾甲․權萬․柳聖久․權進士․權正泰 ․趙仲久․任命台․白守一․洪熙績․金時儁․李知遠․李守約․再從兄休仲3․再從弟仁兼․從姪堉塾․李光姪․李重延․仲兒重實)과 제문 5편(趙德隣․外舅金偮․權述夫․權通卿․淑人金氏)이 실려 있다.
권3에는 기문記文 2편(岐谷齋菴記․孤山齋舍上樑時記)과 발문跋文 2편(喪祭禮節要跋․書同門稧帖後) 및 제문祭文 3편(問犯顔敢諫中當求伏節死義之士․問誦詩讀書不知其人可乎․問財聚民散)과 가장家狀 1편(先考通政大夫行承政院右副承旨懶隱府君家狀)이 실려 있다.
권4는 「부록附錄」으로, 애사哀辭 1편(李光庭撰)과 만사輓詞 12편(權萬․柳聖和․金景必․河瑞龍․權正始․權墉․邊有達․權蕙․柳春榮․權蘊․丁志恒․李徵兼) 및 제문祭文 6편(權蕙․李朸․申命岳․李義兼․族姪垕․李重光)과 묘지墓誌(李漢膺撰) 및 행장行狀(姜必孝撰)․墓碣銘(柳致明撰)이 실려 있다. 이어 내용을 정리한다.
두릉집杜陵集은 권1의 시 47제 68수로서 절구가 62수인데, 그 중 7언이 70수를 차지한다. 두릉이 7언시를 즐겨 썼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전체 시의 내용은 전반부의 일부 작품들 가운데 자손에게 학문하기를 권장한 시(示兒五首)에서 우애와 예의를 견지한 채 학문에 몰두하기를 권면하고 있다. 그리고 명절을 당해 여러 감회를 차분하게 읊은 경우(淸明․寒食․九月)를 제외하면, 이어지는 시 대부분이 유배 이후의 고독한 심정과 가족에 대한 안부와 주변 정황 등에 대한 술회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시편에 그의 고단한 생활의 편린들이 담겨 있는데, 대부분 비관적이고 체념적인 내용이다. 몇 가지로 나누어 내용을 정리하면, 유배지에서 만난 인물에 대한 감회 표현(次宋都事逢源韻 ․復次前韻寄宋都事藥泉之行․次宋都事韻․次桂萬長韻)이다. 자신이 고독한 처지에 놓인 만큼 극한 상황에서 지우나 안면을 익힌 인물에게 차운한 시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별의 정서 속에 고독한 유배 심정도 드러나 있다.
그리고 유배 온 자신의 처지를 딱하게 여기고 관심을 기울인 인물에 대한 감사의 심정을 표현한 시(秋夕主倅送一床饌忘送酒戱贈․酒泉校院以數百靑銅見饋以此謝之)에서는 명절 절기에 별미를 제공한 후의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내었다. 이외에 대부분의 시에서는 유배지에서 겪는 고독한 심정과 우울한 마음이 표현되고 있다. 신세 한탄조의 처량한 곡조와 고향의 가족에 대한 그리움, 자녀들의 면학을 염려하는 아버지의 심정이 시에 담겼다.
그렇기 때문에 두릉의 시에서 無眠․孤臣․心愁․無友․寒․寂․奈何․斜日․滄浪․獨 등의 시어들이 즐겨 구사되고 있다. 그래서 두릉은 때로는 자신의 식자우환을 탓하는가 하면(贈諸生製策二首), 자유를 희구하면서 하늘을 훨훨 나는 흰 갈매기에 가탁하기도 하였다(辛亥十月之望旺登待變亭呼韻三首). 유배지에서 접한 지우의 죽음은 그에게 처절 의식을 더하였다. 두릉은 11편의 만사에서 망자亡者에 대한 슬픔을 자신의 슬픈 현실과 연계하여 비정한 심정을 표현해 내고 있다.
권2의 서간문 33편의 전반적 내용은 대개가 유배기 이후의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서두에 먼 곳까지 서찰을 보내 온 상대방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곡진하게 표현하였다. 자신의 현재 안부 및 상대의 근황을 묻는 내용이 주조를 이루고 있으며, 간결한 문체로 이루어져 있다. 문학이나 예설에 대한 문답 등의 편지글은 보이지 않는다. 이렇듯 유배기의 어려운 현실 여건이 상대와 자신의 안부를 묻는 정도의 서찰 왕복으로 이어진 것이라 생각된다.
당시, 두릉은 설사로 매우 고생했던 것 같다. 유배지의 병약하고 애절한 심정이 시에서처럼 편지글에서도 익히 파악되고 있다. 한편 유배지의 가장으로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답김제주무신答金濟州戊申」에 잘 드러나 있다. 그리고 유배지에서 겪는 정신적 고독과 방황의 정서는 「답김기答金琦」에서 돋보인다. 친족들에게는 자식들의 면학을 염려하는 심정과 선대의 유묵을 수습하여 문집으로 정리하는 데에 소홀하지 말라고 연신 당부하고 있다. 이어지는 제문 5편에는 범인이 망자를 애통해 하는 이상으로 처연한 두릉의 심정이 표현되어 있다.
권3의 「기곡재암기岐谷齋菴記」는 종가에서 선조들의 겸양지덕을 추모하여 세운 기곡재암岐谷齋菴에 대한 기문이다. 문면에 퇴계의 유훈과 덕망을 강조하고 있다. 「고산재사상량시기孤山齋舍上樑時記」는 선인들이 수축한 재사가 허물어짐을 애타게 여기던 후손들이 이를 고산재사로 이전하여 수축한 것에 대한 기문이다. 문면에 간략한 수축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상제예절요발喪祭禮節要跋」는 주자가례朱子家禮․주자어류朱子語類 및 우리나라 예설을 참고하여 예설을 익히는 지침으로 활용되기를 바란다는 편찬 목적을 밝혔다. 「서동문계첩후書同門稧帖後」는 동문수학하는 학계를 조직하고 쓴 글이다.
「문범안감간중당구복절사의지사問犯顔敢諫中當求伏節死義之士」는 군자의 출처의리와 신하로서의 직무에 대해 언급한 글이다. 「문송시독서不지기인가호問誦詩讀書不知其人可乎」는 두릉의 유학자적 면모를 느끼게 하는 글이다. 주자학을 신봉하려는 그의 심지가 담겨 있다. 「문재취민산問財聚民散」은 두릉의 애민 정서가 반영된 글이다. 위정자나 목민관들은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여 백성을 핍절하게 해서는 안될 것이며, 재물을 백성들에게 골고루 시혜하는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선고통정대부행승정원우부승지나은부군가장先考通政大夫行承政院右副承旨懶隱府君家狀」에는 부친 난은의 효행과 강직․청렴한 관료․선비 형상이 부각되어 있다.
권4의 애사哀辭와 만사輓詞에는 평소 두릉과 친밀한 교제를 가졌던 이광정李光庭과 권만權萬의 우정이 어린 슬픔이 곡진하게 담겨 있다. 이 외에 지우들이나 친족들에 의해 지어진 제문에는 불행하게 살다 간 두릉의 평생 행적이 슬프게 재구성되어 있다. 「묘지墓誌」와 「행장行狀」․「묘지명墓碣銘」 등에서 두릉의 율봉도찰방 당시의 불행과 이에 대한 신원․선대들의 청렴한 형상이 강조되어 있다.
2) 두릉시 개요
두릉의 시는 47제 68로서 절구가 62수이며 7언 시가 주류를 이룬다. 두릉이 7언시를 즐겨 썼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성리학에 전념하여 수신과 도학 공부에 전심전력하던 면모를 담은 시가 보인다. 이러한 시는 두릉의 출사 이전 청년기에 부친과 선조들의 유업을 이어 불철주야 학문에 정진하는 한편 수신과 정심의 성취를 위해 노력하던 시기에 창작된 것으로 본다.
이어 이인좌의 난으로 무고를 당해 뜻하지 않게 유배를 가게 되어 보낸 7년 세월의 고뇌와 향수 서정을 반영한 시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마지막으로 평온한 시상을 바탕으로 묘사된 은거한적의 미학을 그린 서경시와 서정시도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이런 부류의 시는 해배기에 지은 작품군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두릉시는 면학기에 이은 유배기와 해배기의 특징에 따라 시적 변화가 이루어짐을 파악할 수 있다.
시 표현 기법의 특징으로 초나라 삼려대부로 모함을 받아 내적인 울분과 지조를 처절하게 표현한 굴원의 「어부사」를 시적으로 채용한 점이다. 이는 두릉의 처한 시대 환경적인 요인이 굴원의 그것과 흡사했기 때문에 쉽게 수용하여 시문학에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 두릉시의 특징으로 소동파(1036-1101)의 시에 차운한 흔적을 많이 볼 수 있다. 그의 본명은 ‘소식蘇軾’, 자는 ‘자첨子瞻’이다. ‘동파東坡’는 그의 호로, ‘동파거사東坡居士’에서 따온 별칭이다. 그는 부친 ’소순蘇洵‘과 아우 ’소철蘇轍‘과 함께 ‘삼소三蘇’라고 불려졌다. 이들은 모두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에 속한다. 그는 문학적 측면에서 ‘시詩’․‘사詞’․‘부賦’․‘산문散文’ 등 모두에 능했으며 ‘송시宋詩’의 성격을 확립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한 시인이며 문장가였다. 소동파는 조정의 정치를 비방하는 내용의 시를 썼다는 죄로 황주로 유배되었다. 이 때 ‘농사짓던 땅을 동쪽 언덕’이라는 뜻에서 따와 호를 ‘동파'로 이름을 짓고 스스로 호를 삼았다.
이처럼 탁월한 재주를 지녔던 소동파가 정치적 이유로 유배된 이력을 따라 두릉도 소동파의 시적 경향을 추종하여 차운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굴원과 소동파의 특징을 두릉의 자기화 하여 문학으로 수용했다는 점에 큰 의의를 둘 수 있다. 억울한 신세를 지녔던 굴원과 소동파를 동일시하여 문학적으로 형상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5. 두릉 시문학의 특징
1) 수신과 정심의 미학
청년 시절 두릉은 부친 난은을 비롯한 선조들의 명성에 손상을 끼치지 않고 유업을 대대로 실천해 나가길 다짐하며 유교적 수양을 강화하는 한편 수신과 정심을 향한 공부에 주력하였다. 그의 시에는 이러한 경향의 작품들이 다수 보인다. 두릉은 늘 근신과 자중을 일삼아 성리학적 수양에 충실했다. 그러한 두릉의 정신 지향의 근저에는 영남 유학의 후예라는 데서 찾아진다.
말 몰아 별 따라 떠도는 나그네
어느 가문의 효자인가?
그대가 고례를 사랑하니
우리 영남인임을 알겠네.
길손을 만난 두릉은 단번에 그가 고례古禮에 익숙한 인물임을 감지한다. 비록 여기저기를 전전하는 나그네이지만 그에게서 고가古家 풍모와 고례에 정통한 면모를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아울러 그가 진정한 효자로서 행적이 탁월하다는 것도 서문을 통해 장황하게 기록해 두었다. 결론적으로 두릉은 그가 고례에 정통하고 가문 역시 훌륭하여 효행을 실천한 인물로 깊은 인상을 남겼기에 시로 남겨두었다. 문흥과 예법의 고장인 영남의 인물 우월 의식을 드러내는 반면에 자신도 그러한 동일 부류임을 문면에 강조했다. 그의 이러한 의식 저변에는 선조를 추모하는 내심의 작용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예로부터 계곡과 산의 빛은
해마다 시들다가 되살아난다네.
그 가운데 유감이 생기니
요동의 학은 다시 오지 않구나.
고인을 추모하는 서정이 발휘된다. 종래 변함 없는 산천은 해마다 동일한 면모를 선사하지만 선조를 추모하는 마음은 떨쳐버릴 수 없다. 이 탓에 ‘요동遼東의 학鶴’ 고사를 떠올리게 한다. 도사 정령위丁令威가 학으로 화한 뒤 천 년 만에 고향 요동 땅에 찾아온다. 추모하는 선조를 뵙지 못한 감회는 도리어 천 년 요동 학의 울음과 같아 산천은 예대로나 사람은 옛 사람이 아님을 느끼게 한다. 두릉이 추존하는 선조는 송재松齋 이우李堣(1419-1517)이다. 송재 선조는 조선조 문신이며 중종반정 때 공을 세워 청해군靑海君에 봉해졌던 인물이다.
그는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의 숙부로서 퇴계에게 논어를 가르쳤던 엄한 스승이기도 하다. 송재는 노송정老松亭 이계양李季陽(1424-1488)의 4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498년(연산군4)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어 예문관검열, 대교, 봉교를 거쳐 1501년 성균관전적에 올라 사간원정언, 이조좌랑, 사헌부헌납, 병조정랑 겸 지제교사헌부장령 겸 춘추관기주관, 봉상시첨정, 사간, 군기시부정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동부승지에 임명되어 지제교와 춘추관수찬관을 겸하였다가 마침 입직하던 날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하여 협력한 공로로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녹훈되어 청해군靑海君에 봉해지고 우부승지로 벼슬이 승진되어 경연참찬관을 겸하였다. 중종 3년에 부모 봉양을 위하여 외직을 희망하여 진주목사로 부임해 청렴과 검소를 위주로 백성을 다스렸다. 이듬해 동지중추부사로 전임되어 호조참판겸오위도총부부총관, 형조참판을 거쳐 강원도관찰사가 되었지만 양친 봉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송재는 문장이 맑고 전아典雅하다는 평을 받았으며, 특히 시에 뛰어나 산천의 명승을 읊은 것이 「관동행록關東行錄」과 「귀전록歸田錄」 등에 전해지고 있다.
특히 사직 후 본가, 용수사, 청량정사에서 온계 이해, 퇴계 이황 등 조카 등의 가학 교육 양성에 많은 정성을 쏟았다. 송재는 사후 유림들의 발의로 고향인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의 청계서원淸溪書院에 형인 이식, 조카 이우와 함께 배향되었다. 송재의 신도비는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온혜초등학교 앞에 있다. 묘소는 신도비 뒤쪽의 수곡樹谷이라 불리는 골짜기에 있다. 두릉은 선조께서 노니시던 곳을 현장 답사하면서 존모심을 드러낸다.
스승께서 일찍이 노니시던 곳
맑은 개울 비단처럼 돌아 흐르네.
사모하는 정에 잠 이루지 못하고
이제 자손들에게 전해지네.
두릉은 선조께서 노니시던 곳을 답사하면서 선조를 존모라는 마음이 샘솟듯 일어났다. ‘장구杖屨’는 ‘지팡이와 신발’이란 의미이지만 여기서는 어른에 대한 경칭으로, 사람을 직접 가리키지 않고 그 사람에게 딸린 물건을 들어 존경하는 뜻을 표시한다. 맑은 개울이 긴 세월을 반추하며 선조의 위업과 존경심을 쉼 없이 흘러나오게 하였다. 쉼 없이 흘러내리는 샘물은 이 땅에 전래된 유학의 지속적인 발전과 계승이라는 명제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 그러한 사유 의식을 두릉 역시 인식했을 것이고 선조의 선비 정신 기맥을 지속해 나가리라는 내심을 다지는 계기로 삼은 것이다.
두릉이 선조를 존숭하는 마음은 밤까지 이어져 사모의 정으로 상승되어 잠을 이루지 못한다. 직접 뵙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안고 전전반측하지만 선조의 유업이 자손들에게 이어지고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자위한다. ‘갱장羹墻’은 ‘죽은 이나 어진 이를 사모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요堯임금이 돌아가시자 순舜이 그를 사모해 ‘앉아 있으면 요임금이 담장에서 어른거리는 것처럼 보였고 식사를 할 때는 국 그릇 속에 요임금의 모습이 비치는 듯했다’는 데서 유래한다.
이는 죽은 사람에 대한 간절한 추모의 정이 그만큼 지대하다는 것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하다. 두릉은 이러한 고사를 원용하면서 선조를 추모하는 내면의 깊은 정회를 드러내었다. 이러한 내면의 승화 작용은 결국 자손을 통해 선조의 유업이 대대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진중 일언에 공경이 주가 되니
은근히 써서 세업을 대신한다네.
평생 가슴에 지녀 잃지 말지니
자손에게 전하여 세세토록 전하게 하리.
두릉의 유학자적인 풍모가 돋보인다. 거경의 생활이 주가 된 것만큼 경자[敬]를 써서 세업으로 삼고 자손들에게 수칙하는 준거를 삼도록 하겠다고 했다. 아울러 자손들에게 이를 가슴에 지녀 평생 잊지 않고 실천해 나가갈 다짐하도록 했다. 이러한 조상들의 유업을 후손들이 이어가도록 배려하며 추동했다는 사실을 위의 시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두릉의 자손 교육은 어릴 때부터 시작된다. 두릉은 아이가 말을 배울 나이 때부터 성리학적 사유를 체계화하도록 교육하였다.
네가 말하길 배워 재잘대며 말하니
어른처럼 가지런하고 엄숙하구나.
공경과 의리가 원래 두 가지가 아니니
안이 곧으면 외모가 곧 방정해 진다네.
두릉의 성리학적 사유 체제 교육은 어린 자녀가 말을 익히는 정도의 나이가 되면서 이미 교육적인 효과를 얻었다. 아이가 말을 익히고 재잘대는 순간부터 이미 학습화된 성리학 유아 학습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여실히 증명해 보였다. 어린 아이의 행동거지가 가지런하고 엄숙한 데서 그런 실효를 파악할 수 있다. 여기서 공경과 의리가 강조된다. ‘공경恭敬’과 ‘성의誠意’는 ‘신독慎獨’의 효과를 얻게 된다. 이는 주역周易의 「곤궤문언편坤卦文言編」에서 “경敬하여 속마음을 곧게 하고 의 義로 행하여 몸가짐을 바르게 한다[敬以直內 義以方外]”는 데에 근거를 둔다. ‘신독’의 목적 역시 ‘속마음을 곧게 함[直內]’에 있다. ‘속마음을 곧게 한다’는 것은 본연적인 자기, 곧 자신의 주체를 회복해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러한 ‘신독愼獨’․‘성의誠意’․‘경敬’은 결국 “성誠은 하늘의 도이고 誠해지려고 하는 것은 사람의 도이다”라고 한 ‘성誠'의 경지에 이르기 위한 길이다. 논어의 「안연편」에서 사마우란 자가 공자에게 군자는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더니 공자는 “군자는 근심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다[君子不憂不懼]”라고 대답했다. 사마우가 “근심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기만 하면 군자라 부릅니까?”하고 다시 물으니까 공자는 이렇게 밝혔다. “내면을 살펴보아 병 될 흠이 없는데 대체 무슨 근심이며 두려움인가!”라고 했다. 이는 결국 부단한 ‘신독’으로 체득한 안정과 평온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 때문에 우러러 하늘에게나 굽어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게 되며 지극히 크고 지극히 굳세어 천지를 가득 채울 수 있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확립하는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두릉은 성리학 사유 의식 세계가 굳건하여 선조의 성리학 유업 계승과 발전을 자각하고 이를 후손들에게 진작시킬 것을 강조했다.
방심하고 지나칠 때 게으름이 따라오니
예로부터 경에 집중하긴 참으로 어렵다네.
암실에서 아무도 안 본다고 하지 말지니
곁에 있는 어린 아이가 아비의 증인이라네.
매사 방심하고 소홀히 하면 태만이 수반된다고 전제한다. 그러한 탓에 늘 거경으로 일관하기는 참으로 어렵다는 점을 들었다. 하지만 어떤 경우가 오더라도‘거경궁리居敬窮理’의 생활을 포기할 수 없다는 내심을 다진다. 이러한 거경의 생활 일환으로 ‘신기독愼其獨’을 들었다. ‘신독愼獨’은 ‘성의誠意’이면서 한편으로 ‘경敬’을 의미한다. 공자는 논어 「옹야편」에서 “인간의 생은 곧음이다. 사곡되게 산다는 것은 요행으로 면하는 것일 따름이다[人之生也直, 罔之生也, 幸而免]라고 언급했다. 인간이 타고 나온 생의 본질은 ‘곧음’이라는 것이다. ‘속마음을 곧게 한다’는 것은 결국 그 본래의 ‘곧음’을 바르게 함이다.
이는 곧 본연적인 자기의 주체 회복을 의미한다. 그 회복의 과정이 ‘신독’이며 ‘경’이다. ‘경’은 송대宋代에 들어와서 ‘정靜’, ‘성誠’과 함께 자기 회복을 위한 삼대 핵심 과제로 대두되었다. 주돈이는 ‘정靜’을 가장 핵심적인 요소로 꼽았다. 반면에 정호는 ‘성誠’을, 정이와 주희는 ‘경敬’을 꼽았다. 결론적으로 “남에게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곳을 삼가고 두려워한다”는 ‘신독’은 본래 자아를 회복하여 자기가 ‘도道’의 온전한 주체가 되게 하는 길이며 동시에 ‘천天’에 대한 신앙을 행하는 길이다. 두릉은 ‘암실기심暗室欺心’을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사소한 방심과 안일한 태도를 배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비록 곁에 있는 어린 아이가 사물의 이치에 아직 밝지 못할 지라도 그 아이가 아비의 사소한 행동의 증인이라 점을 밝혔다. 두릉이 투철한 성리학적 자기 수양을 실천하고자 노력했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학문의 의지 날로 나태하고 귀밑털 희어지니
갑자기 밤중에 일어나 깊이 상심해하네.
만약 별다른 마음 깨우는 법이 있다면
혹여 늘그막에 광기를 면할 수 있으리라.
학문하는 자세는 초지일관해야 한다는 논지를 보여준다. 두릉은 최근 자신의 안일함과 나태함으로 인한 학문 정신이 퇴축될 것을 염려하였다. 학문에 대한 열정이 식어지고 게으름이 잇달아 와서 학문 자세가 흐트러짐에 따른 각성을 하며 밤중에 홀로 앉아 고민한다. 마음을 일깨우는 별다른 방도가 있다면 늙기까지 이러한 자세를 견지해 나갈 수 있겠다는 다짐을 한다. 학문을 온축하며 이를 지속해 나가려는 의지가 반영되어 있있다.
성리 학문에 대한 열정과 지속적인 추구를 위한 마음가짐이 파악된다. 두릉의 젊은 시절, 마음먹었던 성리 학문 추구의 정신이 잠시도 간단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의지를 반영한 작품이다. 때문에 성리학은 이단 잡설과는 차별화된 특화성의 학문이라는 것이 입증된다.
애석하게 순자와 양웅은 택한 게 정하지 못해
우리 유학의 지결이 가장 분명하다네.
마침내 경으로 바르게 하길 거울처럼 한다면
거울이 밝을 때 모름지기 얼굴을 비춰보리라.
순자荀子는 중국 고대의 3대 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공맹孔孟 사상을 가다듬고 체계화했으며 사상적 엄격성을 통해 이해하기 쉽고 응집력 있는 유학 사상의 방향을 제시했다. 유학 사상이 2,000년 이상 전통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유교 철학을 위해 공헌한 순자 때문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이다. 그의 생애와 활동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대략 조나라 출생이며 몇 년 동안 동쪽에 있는 제齊나라의 직하稷下 학파에 있었다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후 그는 중상모략을 받아 남쪽의 주周나라로 옮겼다. BC 255년 경에 그 나라의 지방 수령을 지내다가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곧 죽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 선한 것은 수양에 의한 것일 뿐이다.”라고 하여 공자의 사상 가운데 예를 강조하여 발전시켰다. 사람의 본성은 착하다는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에 반대하여 악한 본성을 예를 통해 변화시켜 선하게 만들어야 한다는性惡說을 주창했는데 그의 책 순자 전 20권은 현재 유교 연구의 귀중한 문헌이다. 맹자孟子는 ‘사람의 성품이 선하다’고 말했고, 순자荀子는 ‘사람의 성품이 악惡하다’고 했다. 반명에 양자楊子는 ‘사람의 성품은 선善하며 악惡하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두릉은 정통 유학의 진수를 강조하면서 순자와 양자가 주장한 이론이 정精하지 못한 단점을 들었다. 오직 정통 성리 유학이 지결을 분명히 하여 잡된 사상에서 독보적 존재로 부각된다는 것이다. 유학의 핵심 실천 원리로 이른바 ‘거경居敬’을 들었다. 경으로써 마음을 바르게 하면 자기 수양의 경지에 들게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실천궁행의 원리를 통해 경으로 내면을 정화하여 내면의 단정과 함께 몸가짐까지 단아하게 되는 원리를 보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포부와 이상은 뜻하지 않던 이인좌의 역란을 맞아 좌절된 형상의 시적 표출로 이어졌다.
2) 유배의 고독한 서정 자아
두릉 시의 특징으로 유배기를 배경으로 창작된 시가 많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두릉은 뜻하지 않은 유배를 맞아 상실과 번민, 향수 서정을 시로 담아내었다. 두릉의 시문학을 구별 짓는 중요한 관건이 유배 문학인 점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시를 통해서 두릉의 문학 사유 의식을 간취해 낼 수 있는 주요 관건이 된다. 유배기에 지어진 서정성의 문학적 형상화 작품을 보기로 한다.
사송정 송석 유래가 오래인데
문 앞의 봉래산 주야로 떠있네.
정자에 오르기 벌써 상쾌해지니
그대에 의지해 내 근심 모두 씻기네.
선천 유배기에 지은 작품이다. 유배지에서 사송정에 올랐다. 이 정자의 유래가 유구하다고 언명하면서, 특히 소나무와 암석이 빼어난 점을 강조했다. 정자 앞에 봉래산처럼 신기한 모양의 경관을 지닌 섬에 대해서도 감탄을 발했다. ‘봉호蓬壺’는 ‘영주산瀛州山’, ‘방장산方丈山’과 함께 중국 전설상에 나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다. 이 산에는 신선이 살며 불사의 영약靈藥이 있고 이곳에 사는 짐승은 모두 빛깔이 희며 금과 은으로 지은 궁전이 있다고 한다. 사송정의 유래 소개에 이러 경관 묘사를 통해 전체 시상의 시적 상승을 시도했다. 이 때문에 시인은 상기된 감정이 정자에 오르기도 전에 상쾌한 기쁨을 누리게 되어 내면의 희열에 도취된다. 이로써 모든 근심과 걱정을 떨쳐내고 충일充溢한 기쁨을 표백한다.
즐겁게 술 마시며 더위를 식히니
태수의 풍류가 술자리와 어울린다오.
취한 채 서쪽 숲 단풍 바라보니 흥겨워
봄 풍경이 가을빛과 닮았네.
고을 원이 보낸 술을 마시며 풍류에 젖기로 하였다. 술을 마시며 더위를 식히니 태수의 풍류를 느낄 수 있다. 술기운에 젖어 서쪽 산의 단풍 숲을 바라보니 흥겨움이 넘친다. 곱고 화사한 단풍이 깃든 풍광이 봄 정경과 흡사하다. 유배지에서 시름을 접어 두고 한때의 평온한 정감을 그려본 것이다. 유배객으로 술에 의지해 한때의 멋과 풍류를 즐긴다. 내재된 시적 풍류 서정이 발동된 터이다. 다음 시에 이러한 정조는 더욱 내밀화된다.
저 달은 오늘 저처럼 밝은데
꽃이 질 때 향기 짙게 전해지네.
술잔을 들어 마시기 권하노니
네 가지 즐거움 함께 해 더할 것 없네.
달밤에 펼쳐지는 풍광을 그린 작품이다. 밤이 깊어 달이 기울 무렵에 꽃향기가 짙게 우러나온다. 깊은 밤이 되도록 시인은 고독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잠을 이루지 못한다. 복잡한 내면의 심리적 상황으로 전전반측하는 신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를 맞아 주는 네 가지 즐거움 때문에 잠시 평안을 회복한다. 네 가지 즐거움은 ‘좋은 시절’․‘아름다운 경치’․‘경치 구경하는 마음’․‘유쾌한 일’이다. 좋은 시절에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해 유쾌한 경지에 이른 것이다. 일시적인 기쁨은 이내 현실 유배객의 복잡한 심사 표현으로 이어진다.
낚시 마치고 오니 해가 지려하는데
그 옛날 굳게 강가에서 노닐라 약속했지.
만약 달 뜬 서강에서 탁족한다면
조용히 맑은 물결 나와 친해지겠네.
문득 고향에서 지내던 시절을 떠올렸다. 두릉이 유배객으로 낚시를 하며 지낼 만큼 그렇게 여유롭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런 기회가 가끔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고향에서 생활할 때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며 향수에 젖었다. 오늘 이처럼 한가롭게 낚시하며 소일할 것을 기약했지만 그런 처지가 되지 못한 현실이 못내 안타깝지만 지난 추억을 회상하는 자체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불가능한 현실 속에서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해 보기로 했다. 서강에 밝은 달이 뜰 무렵 탁족濯足을 하게 되면 맑은 물결과 친밀한 대화를 나눌 수 있겠다는 미래를 상상한 것이다. ‘이루지 못할 미래에 대한 현실화의 상상’은 ‘현재 처한 상황이 고독하며 견디기 힘든 것’임을 역설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 조용한 중양절 달 빛 아래 그의 서정은 더욱 깊어만 간다.
기우는 달빛 고요한 가운데 꽃이 차갑고
그 누가 이 늙은이 찾아왔는가?
중양절 좋은 시절 가까우니
용산 귀객은 서두르지 마오.
조용한 달빛이 내리는 밤의 향연이 펼쳐진다. 달이 기운다는 표현에서 밤늦은 시간임을 감지케 한다. 때문에 꽃에 내린 찬 이슬은 무게를 더한다. 평온한 시상의 전개와 함께 시인의 내적 긴장이 다소 이완된 상태이다. 누군가 늙은 그를 찾아와 유배의 객수를 달래준다. 중양절이 가까운 터에 멋진 풍류를 누릴 겸 길손이 바삐 떠나지 말기를 희망한다. 객지에서 반갑게 만난 길손과의 헤어짐을 염려하며 아쉬워하는 정서를 투영했다. 잔잔한 시적 흐름 속에서 시인의 외로운 서정을 읽는다.
산 정자에 누우니 두 세 채 집이 있고
저문 물가 물결 일렁거려 해문임을 알겠네.
이 한 소리 가장 한가한 뜻이니
백구 물결 위에 하늘은 끝없네.
정자에서 한적한 정경을 읊은 작품이다. 정자에 몸을 기댄 시인의 시야에 두 세 채의 오두막집이 들어온다. 게다가 정자 아래에 출렁이는 강물 역시 풍류를 더해준다. 강 입구에서 다소 평온한 느낌 가운데 일시적 한거의 미학을 그려낸 작품이다. 찰랑거리는 물결과 물새 소리가 합성되어 한거 미학을 제고시킨다. 결구에서는 색채감이 어우러져 있다. 백구와 푸른 물결 및 파란 하늘의 색감이 아름답게 연상된다. 한적함 속에 객수 서정성이 역설적으로 강렬하게 반사된다.
서풍에 말 몰아 석양촌을 찾아가니
궁한 산하 바다가 문일세.
민나라 상인은 어젯밤에 물결 타고 떠났고
강남 오나라 초나라에 배 떠난 흔적 남았네.
서풍이 불 무렵 말을 타고 석양이 깃든 마을을 찾아간다. 궁벽한 산하가 모두 해문이 된다. 바닷물을 바라보니 민나라 상인은 이미 어제 밤에 배를 타고 떠났고 강남 땅 오나라 초나라의 배도 떠난 흔적만 남았다. 모두 떠나고 난 포구에서 애잔한 별리의 정한을 가슴에 안는다. 고독한 객수는 배 떠난 잔영을 되새기며 더욱 깊은 내면의 고독감으로 작용된다. 이러한 고독 속에 기약이 없는 희망 사항을 표출해 낸다.
하늘 끝 세모에 홀연히 세 해가 지나
찬 골짜기 번뜩이며 놀라 맑은 기운 전하네.
이제부터 시절이 태평 운세로 돌아가리니
아프고 힘겨우나 기뻐하게 되리.
유배지에서 세 번이나 세모를 맞았다. 한 해가 저무는 시점에서 지난 한 해를 돌아보는 감회와 수 년 간 지나온 세월에 대한 반추를 통해 갖은 상념이 뇌리를 지배한다. 시인이 묵는 오두막집 찬 골짜기에 맑은 기운이 전해진다. 새로운 희망을 암시하기라도 하듯 새 기운이 감돌고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두릉은 이내 태평한 기운이 돌아 현재의 고난과 힘겨운 장애가 해소되고 즐거움을 회복하리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자신의 명예 회복과 현재의 고난이 지나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태평의 시절을 희구한다. 그 길 만이 극난한 현실 위기를 이겨내는 극복 대안이기 때문이다.
아득한 만 리 하늘에 묻나니
백발이 남들보다 먼저 났다네.
공도가 모두 이와 같지만
차가운 재가 다시 불이 일어나리라.
이는 선천 유배지에서 지은 작품으로 이 시를 주고받은 당사자인 송 도사 역시 유배객으로 그과 함께 그곳에서 지냈다. 아득한 유배지 선천에서 남들보다 백발이 먼저 생긴다고 한 데서 지난 세월의 역정이 고단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유배의 극난한 현실을 함께 이겨낼 송 도사와 허심탄회한 객회를 담아내었다. 이처럼 신세가 초라하고 영락하지만 언젠가 다시 회복될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차가운 재에서 불이 날 것이라는 표현은 ‘寒灰更煖’이라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는 곧 ‘꺼진 불이 다시 붙어 살아나고 마른 나무에 새 움이 돋음을 뜻한다’는 회생과 부흥을 상징한다. 두릉은 기사회생의 고사를 들어 자신의 입지 회복과 새로운 희망의 도래를 기대하였다.
그대를 산 너머 하늘같은 바다로 전송하는데
전 달엔 영천이 나보다 앞서 갔네.
서호에게 묻건대 아직 굽혀진 채
낙타의 돌아가는 배가 꿈에 선연하네.
상대방을 바다로 전송하며 지은 작품이다. 서호로 떠난 이를 잊지 못해 아직도 꿈에 선연하다고 언급한다. 약천의 서쪽에 꽃이 핀 풍경이 장관인데 외로운 섬과 떠나는 배의 모습이 절경이어서 짓게 된 것이다. 절친인 송 도사를 떠나보내면서 아쉬운 정을 담았다.
봄 맞아 조용히 지내나 맑고 그윽하지 못해
뜰의 풀은 보기만 해도 생기가 돋네.
강의 새와 만날 약속 어겼으니
무심한 나그네는 되는 대로 살아가려네.
봄을 맞은 유배지 생활이 만만치 않다. 언뜻 보기에는 평온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완연한 봄기운을 느낄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유배객의 내면 심리 정서가 평안을 찾지 못했음을 반증해 준다. 하지만 뜰에 돋은 풀은 삼라만상 자연의 이법에 따라 파릇파릇한 생기를 띄우며 자란다. 시인의 암울한 심리 묘사와 대조된 무구한 자연 현상이 드러난다. 전구에 이르러 시인의 심리 묘사가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유배지에서 맞는 봄이 그렇게 정겹지 못하고 방면放免의 전망은 아득하고 귀향할 기약도 없다. 그래서 귀향하여 강의 새와 조우遭遇하리라는 기약은 아예 생각하지도 못한다. 말미에서 좌절조의 어투를 발하며 형편이 되는 대로 살아가리라고 한다. 체념이 담긴 탄식을 하며 고독한 내면 정서를 표현하고 만다. 그래서 또 다른 추억을 더듬게 된다.
달 아랜 황량한 누대 그 아래는 마을
강가에 노니는 나그네 해서에 와있네.
눈 내린 집의 좋은 경치 오늘 밤과 같고
만고의 정신은 수면의 달빛에 남았네.
유배객의 고독한 심상 심상이 드러난다. 달 빛 아래 황량한 누대는 처량한 서정을 조성하는 장치이다. 시인의 시선은 상하로 이동된다. 달에서 누대로 이어 마을을 주목한다. 기구의 주어진 환경 묘사에 이어 승구에는 해서로 유배된 나그네의 영락한 신세 표현이 이어진다. 달 빛 아래 비친 마을을 보노라니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솟구친다. 눈 그치고 적막한 분위기가 전개된다. 조용한 달 빛 아래 설경은 나그네 외로움을 증폭시킨다. ‘고향의 평온한 겨울밤이 오늘 밤과 같았다’고 하면서 단란했던 지난 추억을 떠올리며 복잡다단한 현실 세상에 대한 아픔을 쏟아낸다. 반면에 이러한 시인의 내면 고충과 상관이 없이 휘영청 밝은 달빛은 수면에 머물러 시인으로 하여금 애잔한 심상을 고조시킨다. 유배지 풍물도 다음처럼 담아낸다.
허리춤 활 당기니 손의 살촉이 급히 날아가
이를 꿰뚫고 버드나무 뚫어 고풍보다 낫네.
산서에는 예로부터 무사가 많다고 하는데
어찌 반드시 사람마다 배움에 궁한가.
유배지 풍물 묘사이다. 무사들이 많고 무예를 숭상하는 지방색을 소개하였다. 활솜씨가 뛰어난 무인들의 활약을 실감 있게 그려내었다. 무사가 허리춤에서 화살을 뽑아 쏘아대면 활촉이 신속히 날아가 이를 명중하고 먼 곳의 버드나무까지 명중하는 신기를 발휘한다. 무예를 숭상하여 출중한 무인들이 많지만 학문하는 풍토는 찾아볼 길 없다는 아쉬움을 토로한다. 이러한 의식 이면에 유교 성리 학문을 진흥하고픈 소박한 마음이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오두막에서 경서 읽는데 해는 기울고
이 몸 유배지에 와 있음을 느끼지 못하네.
만년에 촛불 잡고 노닒이 비록 늦겠지만
아침에 도를 듣고 저녁에 죽어도 좋다네.
유배지 작은 오두막에서 석양 무렵 경서를 읽는 감회를 표현했다. 유학을 체득한 선비로서 경서에 잠심하다 보니 유배객임을 느끼지 못할 정도이다. 그 언제 해배될 지 모르는 처지이지만 만년에 촛불을 잡고 밤을 지새우는 풍류를 희망도 해본다. 그렇게 될 기약이 없지만 희망 사항을 상정해 본 것이다. 하지만 현재 시점으로 돌아와서 도를 추구하는 성리 구도자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공자의 말씀을 떠올리면서 도학을 성실히 수행해 나가려는 자세를 버리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충직한 신료의 형상도 잃지 않았다.
신의 죄 단서는 응당 크지만
주상 은총은 어딘들 크지 않음 없네.
참으로 주린 백성 버쩍 말라
사탕수수 씹듯 하여 다른 것 바라지 않네.
두릉은 비록 유배객으로 지내지만 주상의 은총을 잠시도 잊지 못한다. 그리고 유배지에서 주린 백성들의 고충을 간파하고 이들이 피죽으로 쥔 배를 채우는 광경을 주목하였다. 두릉의 충정과 연민 정서를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주상에 대해 충직한 신료요 백성들에게 신임 받는 관료로 살았더라면 어진 행적을 많이 남겼을 것이라는 여운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복권에 대한 염원이 강렬하게 반영된다.
가을 비 내리는 빈 집이 서늘한데
안주는 있지만 술이 부족했더니
관청 술은 원래 나눠주지 않거늘
근심스런 내 신세 어떻게 회복되리.
유배지에서 추석을 맞았다. 가을 비 내리는 텅 빈 집은 분위기가 서늘하다. 가을 계절감에 유배객은 술을 마시고자 한다. 안주는 있지만 술이 부족하여 아쉬웠는데 마침 그 고을 원님이 술을 보내주어 사례하며 지은 시이다. 원래 관아의 술을 나눠주는 법이 아닌데 후덕한 고을원의 인심 덕분에 술을 마시면서 새삼 유배객의 겪는 가을 서정을 표현한다. 결구에 시인의 복잡한 내면 심리가 복합적으로 그려져 있다. 수심으로 가득한 자신의 어려운 신세가 그 언제 풀려지고 안정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한 정서를 담았다. 스산한 가을비가 내리는 시적 분위기와 함께 유배객의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 심리가 담겨 있다. 일련의 시를 통해서 서러운 유배객의 신세 한탄과 기약 없는 미래에 대한 소망 및 체념 의식 등이 다양하게 표출되었던 것을 볼 수 있다.
3) 유배의 객수 서정
두릉의 시의 특징으로 유배기에 지은 작품이 주류를 이룬다고 언급한 바 있다. 유배의 서정성은 유배기의 객수와 고뇌를 반영한 시편에서 유배의 고난과 내면의 아픔의 고백으로 나타난다. 고향과 친척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사우에 대한 그리움 등이 그려진 시를 보기로 한다.
춘산의 눈을 밟으니 걸음마다 그윽하고
산 바깥 절간 문은 하늘에 떴구나.
갑자기 한 줄기 봉래의 비가 내려
삼 년 나그네 시름을 모두 씻어주네.
봄 산을 답보하면서 경쾌한 서정 묘사를 시작한다. 봄 동산에 펼쳐진 자연 경관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흥에 겨운 시인의 발걸음도 가볍다. 산 바깥 입구 절간까지 걸음을 옮겼다. 높은 산에 위치한 절이기에 절간 문이 하늘에 맞닿아 있는 것 같다. 전구에서 갑자기 내리는 비로 인해 시상은 긴박히 전개된다. 비는 경쾌히 걷던 시인의 걸음을 멈추게 했고 급기야 마음의 우울한 묵은 응어리를 씻어낸다. ‘삼년 나그네’라는 표현을 통해 유배객으로 지낸 지 이미 삼 년이 경과했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다. 가을 정취를 담은 시에도 객수 서정성이 담긴다.
높은 곳에 올라 남쪽 하늘 바라보니
기러기 한 떼 날 버리고 먼저 가네.
가을 지난 찬 산에 객수는 깊어가소
술동이 곁 산수유 국화가 활짝 피었네.
가을 국화가 만발한 시절에 남쪽 산에 올라 먼 곳 고향 남쪽 하늘을 바라본다. 기러기 한 떼가 날아감을 보니 강한 향수 서정이 일어난다. ‘기러기 떼가 자신을 여기에 버려두고 앞서 떠나간다’는 표현에서 고독한 시적 자아 형상이 표백된다. 이로써 작가의 고독한 형상화가 선명히 표현되었다. 가을을 지난 산의 모습을 바라보며 객수는 더욱 심화된다. 버려진 자아 형상이 계절감에 결부되어 처절한 고독을 느낀다. 이러한 시상은 결구에서 반전을 이룬다. ‘술동이’․‘산수유’․‘국화’의 시어들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활짝 핀 국화는 우울한 시인의 심기를 밝게 해 주는 매개물이다. 이와 함께 술은 흥을 돋우며 빨간 산수유 열매와 노란 국화는 색감을 더욱 밝게 해준다. 늦 가을 정취에도 이러한 객수 서정 표현은 여전히 이어진다.
황량한 누대 세월 가도 즐겁지 않고
공연히 벌목가 부르니 객수가 더해져.
산성에 취해서 다시 찾아오길 약속했고
가을에게 분부하여 달리하지 말라 했네.
시상 전체가 스산하다. 세월의 흐름 속에 황량한 누대에 올랐지만 즐거운 일이라고는 없다. 공연하게 ‘벌목가’를 불러도 객수를 달랠 길 없다. 이러한 기분 탓에 술을 마셔도 기분 전환이 되지 못한 채 유배객의 시름만 깊어간다. 먼 훗날 이 산성에 다시 찾아오리라는 약조를 하면서 가을에게 자신이 이곳을 다시 찾을 때 지금의 이 풍경을 다시 선사해 달라고 하며 마무리한다. 이러한 객수는 중양절을 맞아 더욱 깊어진다.
좋은 시절 중양절에 오후가 가까운데
서늘한 바람이 불어 나그네 옷을 펄럭이네.
오늘 변방에서 높이 올랐더니
만 리 고향이 그립고 아득하여라.
중양절을 맞아 객수를 표현하였다. 오후가 되자 가을의 서늘한 바람이 옷깃을 스치며 스산한 분위기를 점증시킨다. 풍속에 따라 높은 산에 올라 먼 고향 하늘을 바라본다. 아득한 고향 산천이 뇌리에 맴돌고 그립고 안타까운 마음만 깃든다. 변방 유배지에서 높은 산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아득한 먼 산을 바라보니 고향 땅이 그립고 애틋한 정념이 일어난다. 고향 집과 가족 친지들 안부와 보고픈 마음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하게 일어난다. 돌아갈 희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암울한 현실 장벽이 높음을 실감한다. 이런 심정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망향대에 올라 끝없이 고향 하늘을 주목하게끔 한다.
가을의 검각 밖에 날이 저물고
망향대 위의 나그네 먼저 오네.
끝없이 아득한 곳 안력 다해 보다가
홀로 넋을 잃고 멍하니 앉았네.
검각 바깥 가을의 저녁 무렵이다. 여기의 ‘검각 바깥’은 “관군이 검각 밖에서 갑자기 검북薊北을 수복했다고 전해 오니 처음 듣고 눈물이 옷깃을 적시네. 처자를 생각하니 더 이상 걱정거리 없어 만 권 시서를 챙겨 미칠 듯 기뻐하며 백수로 노래하며 마음껏 술 마시리. 푸른 봄을 짝해 고향으로 돌아가리니 곧 파협巴狹에서 무협巫峽을 뚫고 바로 양양襄陽으로 내려가 낙양洛陽으로 향해 가리.”라는 시구에 근거를 둔다. 전장戰場에서 승전 소식을 접수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희망에 들떠 있는 병사의 기쁨을 빗댄 작품이다.
시인은 이 고사처럼 현재의 고통과 번뇌의 근원이 모두 해소되고 안전한 귀향을 떠올리며 일시 기뻐하며 상상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그것은 아련한 환각일 뿐이다. 현재 놓인 현실은 조금도 개선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다시 망향대에 올라 하염없이 먼 하늘을 주시한다. 눈 길 가는 데까지 주시를 했지만 더 이상 보이지 않는 한계에 부닥친다. 지나친 향수와 처절한 고독감이 환상과 환각에 이르게 할 정도로 향수 서정이 내밀화되어진 작품이다. 이런 정서는 고향 산천을 현시하게끔 하였다.
고향 산천 소식 묻나니
계수 열매 영글고 국화에 이슬 맺혔으리.
만 리 고향 삼년 동안 가질 못했으니
원숭이 근심 학의 원망과 다르지 않네.
고향 산천을 떠올리며 지은 작품이다. 이 무렵 고향 산천에 계수나무 열매도 익었고 국화에 이슬도 맺혔을 것을 상상했다. 만 리 길 고향에 3년 동안 가지 못한 신세 한탄을 하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곡진히 그려내었다. 이 때문에 시인의 고독한 심상은 ‘원숭이의 근심’과 ‘학의 원망’과 다를 바 없다. 이 고사는 퇴계가 단양의 구담봉을 바라보며 이는 중국의 소상팔경보다 더 낫다고 하며 지은 시에서도 엿보인다.
이는 구담봉에 집을 짓고 기거하던 은자 이이성을 생각하며 지은 시이다. “새벽에 구담을 지나는데 달은 산마루에 걸려있네. 높이 웅크린 구담봉 무슨 생각 저리 깊은 지 예전에 살던 신선은 이미 다른 산으로 숨었고 학과 원숭이 울고 구름만 한가로이 흘러갈 뿐일세.”라고 했다. 고독한 두릉의 이미지가 ‘학’과 ‘원숭이’에 투영되어 그 이미지가 더욱 확대되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끝없이 이어져 긴 밤을 지새우게 된다.
들판 절의 경관 속에 밝은 달 빛 비치고
서호에 술이 넉넉지 못한 게 흠일세.
창 앞 나무의 두견새는 울지 않아
향수 탓에 밤이 더욱 길게 느껴지네.
달 비친 절간의 풍경 속에 담겨진 객수 서정이다. 들판의 고즈넉한 경관 속에 밝은 달빛이 흐른다. 조용한 달밤과 아름다운 서호의 운치는 퍽이나 낭만적이다. 하지만 흠이라면 술동이에 술이 넉넉하지 못한 점이다. 서러운 유배객의 신세를 감지한 듯이 두견새도 울지 않는다. 이 때문에 객수를 함께 할 대상을 잃은 시인의 고독한 서정 자아는 향수에 깊이 빠져든다. 그래서 밤 내내 잠을 이루지 못한다. 밝은 달은 외롭고 힘겹게 지내는 시인의 동반자가 된다. 홀로 지새우는 방안은 적막감만 맴돈다. 차리라 두견새라도 울음소리를 내어준다면 위안이 될 성 싶다. 하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아 시인의 고독의 강도는 더욱 고조되어 밤과 함께 깊어간다. 차라리 고독의 질곡 속으로 들어간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봄을 맞아도 이러한 향수 정서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삼천에서 사랑의 가르침 어기지 말고
독에 술 향기 가득하고 사립문 닫혔네.
누워 북으로 가는 다정한 기러기 울음 듣고
한가한 봄 되어 무수한 쥐며느리 있네.
천애의 지기를 어찌 다시 얻을까
강계의 옛 친구 역시 돌아온다 하네.
큰 화롯가에서 명을 듣건대
그 언제 맑은 낙동강에 낚시하러 갈까.
봄을 맞은 객수 표현이다. 예를 규정하는 삼천 가지 조목이 있지만 그 가운데 ‘사랑의 실천’이 가장 소중한 것임을 강조했다. 그러한 가르침을 어기지 않게 되길 다짐한다. 술동이마다 술이 가득하고 사립문은 한가롭게 닫혔다. 은일자의 구도적인 자세와 평온한 기상이 시에 표백되고 있다. 누워 있으면 북으로 날아가는 기러기 떼의 울음소리를 듣고 무수한 쥐며느리들의 행렬도 볼 수 있다. 벗의 근황을 궁금해 하면서 언젠가 낙동강으로 돌아가 낚시하게 될 날을 소망하였다. 두릉은 이러한 현실을 이겨낼 방안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자신의 성찰을 통한 현실 위기의 탈출구를 찾고자 시도한다.
마음 깨우는 관루 소리 똑똑 거리고
번뇌 가득한 나그네 밤마다 한 가지 일세.
암실에서 다만 부끄러움 없어야지
촛불 켜서 부끄러워진 얼굴 비출 필요 없네.
똑똑 떨어지는 관루 소리에 따라 마음을 집중하고 정화시키는 노력했지만 역시 큰 소용이 없다. 번뇌로 가득한 나그네의 뇌리를 깨끗하게 정화시켜 줄 수 없다. 유배객의 고뇌를 벗어날 길이 없다. 시인은 이러한 현실 극복 대안으로 자신을 더욱 성찰하기에 이른다. ‘암실에서도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는 이른 바 ‘신기독愼其獨’의 자기 성찰 경지를 모색한다. 이러한 자기 수양을 실천하기에 굳이 촛불을 켜서 자신의 안색을 살필 필요가 없기까지 내면의 정화를 위한 수양에 전념하겠다는 것이다. 현실 위기를 대처하고 극복하기 위해 부단한 자기 수양을 전념하겠다는 것이다. 현실 초극의 대안을 자기 수양과 내적 충실로 치환함으로써 현실 장벽을 헤쳐 나가겠다는 결연의 의지를 보인 것이다. 다음 시도 이러한 두릉의 의지를 담은 작품이다.
죽어도 달게 여기고 주림을 두려워 않나니
추운 장수의 배고픔을 고인들이 알았네.
다정스레 서강 물을 한 움큼 떠서
세 상수가 마를 때 적셔 주리라.
선천 유배지에서 ‘장수의 고사’를 떠올리며 ‘지조’와 ‘신념’을 강조한다. 장수가 ‘의’를 위해서 ‘죽음’을 초개 같이 여겼던 점을 반추하면서 ‘선비 정신’과 결부시켜 동일시하였다. 장수의 배고픔은 결국 청빈한 선비 형상과 다를 바 없다. 전구와 결구에 이르러 경세지향적인 선비 정신 발현을 거론했다. ‘서강 물 한 움큼’으로 ‘세 상구가 마를 때까지 적셔주겠다’고 천명한 점이 그러하다. 아무튼 이 시도 위의 시와 같이 유배지에서 낙척하고 좌절된 선비 이미지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을 모색한 것으로, 현실의 고난과 위기를 더 큰 정신 지향을 통해 극복해 나가려는 마음가짐의 일단이라 하겠다. 그러한 정신세계가 곧 두릉이 추구하는 ‘선비 정신’ 구현의 일면이다. 이어 유배지에서 겪는 비애를 반영한 시를 보기로 한다.
4) 유배객의 비애와 탄식
두릉의 유배지의 고독한 심리 묘사는 비애와 우의를 담은 시에서 심층적으로 표현된다. 두릉의 절실한 내면을 파악할 수 있다. 이런 두릉 시에서 ‘한국유배문학’의 자료를 확보할 수 있는 작품이 다수 발견된다.
출렁이는 상수는 주려도 즐겁고
웃으며 배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앉았네.
세한의 높은 절의 고을에서 으뜸이니
식사 대접하니 한 때 배부름을 알겠네.
출렁거리는 상수를 바라보니 주려도 즐거운 서정이 발동되어 배고픔 것도 잊은 채 조용히 지낼 수 있다. 상대의 고결한 인품은 고을에서도 으뜸임을 인정하면서 공궤한 고마운 정에 대해 감사하였다. 상대방의 올곧은 절개와 고상한 인품이 출중하다고 하면서 식사 대접한 것을 감사해 한다. 유배지에서 느끼는 온정을 치하한 것으로 두릉의 인간적 미덕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유배객의 서정성은 감호에서도 표현된다.
못가에서 읊조리며 걷는 것 슬퍼 말지니
감호 한 면에 꽃 그림 펼쳐졌네.
신선 되어 떠난 뒤로 소식이 없더니
하느님이 나를 보내 다시 유배되어 왔소.
유배 신세를 스스로 위로하며 그림처럼 곱고 아름다운 호수의 경관을 소개했다. 이미 이곳에서 유배객으로 지냈던 상대방의 덕망을 추모하면서 그의 뒤를 이어 자신이 여기에 온 것을 언급했다. 유배지에서 느끼는 정서를 잔잔한 심상으로 표현하였다. 못가에서 지내는 신세를 서럽게 여기지 말라고 하면서 꽃처럼 곱게 펼쳐진 호수 정경을 극찬했다. 상대방이 ‘신선이 되어 떠났다’고 함으로써 유배객의 애처로운 형상을 변호했다. 이는 자기 미화를 통한 극난한 현실 장애를 초극하고자 하는 의지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고독한 유배지 형상은 왜소해 지고 둥지를 떠난 새처럼 외롭다.
비가 앞 산 봉우리를 씻어주나
삼춘의 소식은 냉기 가운데 있네.
북쪽 산 상로는 내 마음 슬프게 하고
남쪽 밭에서 농사지으려던 계획 사라졌네.
자소하며 긴 수염으로 마음을 덮고
애처로이 짧은 머릿결 노인이 되고 말았네.
그 언제나 새처럼 둥지를 찾아갈 런지
술동이 찬 등불 앞에서 아녀자 같은 신세.
슬픈 봄소식을 전하고 있다. 비가 내려 앞산을 깨끗하게 씻어주었다. 삼촌의 소식은 여전히 냉기 가운데 있다고 함으로써 처한 여러 가지 정황이 암울한 것임을 말해준다. 유배지에 내린 서리와 이슬은 자신의 마음을 슬프게 하여 남쪽 밭에서 전원생활을 즐기려 했던 모든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였던 것이다. 슬프고 어처구니가 없는 현실 장애에서 시인은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짧아진 머릿결을 보며 애태운다. 둥지를 찾아드는 새를 보면서 한 층 더 슬픈 심정을 드러내었다. 둥지를 찾아가는 새가 도리어 행복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찬 등불 앞에 술동이와 마주한 자신의 신세는 참으로 초라하기 짝이 없다. 전원생활을 동경하는 내면에는 비참한 현실 위기에 놓인 자신의 영락한 신세 한탄과 다를 바 없다.
비 개인 뒤 남녀가 다투어 산에 오르고
봄단장으로 가는 곳마다 꽃이 만발했네.
마의도 구름 정기 받아 말을 돌보는데
송아지도 어미 따라 언덕을 오르네.
삼 년 세월 동안 애타게 바라만 보았고
만 리의 선영에 제사도 올리지 못했고
류주는 나보다 먼저 마음을 칠 터
읊으며 감개가 같음을 알겠네.
봄소식을 전하면서 슬픈 봄을 맞는 유배객의 심정을 표현하였다. 비 개인 봄 동산에 남녀가 다투어 오르고 온 산천은 꽃이 만발하여 단장하였다. 조선 시대 사복시司僕寺에 딸려 말의 질병을 치료하는 정7품의 벼슬아치인 마의도 구름의 정기를 받아 말의 질병을 치료하는 좋은 계절이다. 어미를 따라 언덕을 오르는 송아지의 모습은 풍경화 같다. 하지만 이 모든 봄의 정경이 유배객 두릉에게 즐겁지만은 않다. 고향 산천을 삼 년 동안 애타게 바라만 보았으며 선영에 제사도 올리지 못하는 불효자가 되고 만 것이다. 시를 읊노라니 감개가 무량함을 새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흘러가는 물과 사귄 정 어느 것이 더 많으랴
궁하게 만난 다섯 귀신이 홀로 따르네.
병든 몸 근심 많아 슬픔이 잇따르고
잠 못 이루는 나그네 이 밤도 길어라.
작년에 우레 울려 해를 흔들 것 같더니
세월과 천명은 때를 모르나니
시서를 배웠지만 끝내 쓰지 못하고
흰 머리털만 다시 턱을 덮네.
과거 회상과 한탄의 정서가 복합된 작품이다. 그대와 사귄 정은 흘러가는 강물보다 더 길고 오랜 것이라고 하면서 궁벽하게 지내는 교우 관계가 돈독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자신은 궁한 귀신에 홀린 것처럼 어렵고 힘든 난관에 봉착했다고 토로하면서 슬픈 내심을 비쳤다. 병들고 지친 몸에 근심도 많아 잠을 이루지 못하는 서러운 나그네 신세로 전락되고 말았다. 이러한 연유로 잠을 이루지 못하여 긴 밤을 홀로 보내는 곤란을 겪는다. 전반부에서는 신세 한탄과 병약해진 현실 위기를 묘사하였다.
이어 해를 거슬러 올라가 이러한 변고를 당하게 된 조짐과 시대적인 어려움을 회상하였다. 작년에 우레가 울려 천지를 뒤흔들었다고 하며 천시가 조화되지 못해 이처럼 혼란한 시대를 맞게 되었다며 해명한다. 세월의 변천과 천명은 인간이 알 수 없다고 하며 시서를 배웠지만 이처럼 불우하게 된 점이 못내 안타깝기만 하다. 후반부는 시대적인 어려움과 유배객으로 낙척한 신세 한탄 토로이다. 하지만 그는 조선의 신료로서 주상에 대한 충정에는 변함이 없다고 언명한다.
매사 이와 같아 계획이 어긋났고
변방 강가의 석양에 홀로 사립문 닫네.
나그네 머릿결 천 가닥 눈처럼 희고
선명한 호상에는 쥐며느리 많구나.
한스럽긴 두견새 울음 이르지 못하고
아녀자는 떠난 파랑새를 한하네.
신의 마음은 죽더라도 후회 없나니
초승달이 선명히 옷을 비추네.
불우한 형상이 표출된다. 매사 계획이 어긋나서 이처럼 유배객으로 전전한다. 변방에서 석양 무렵 홀로 지내는 고독한 형상을 담았다. 사립문을 닫으면서 외로운 밤을 맞을 준비를 한다. 갖은 고초를 겪느라 머릿결이 천 가닥이나 눈처럼 희어졌다. 쥐며느리들이 많이 나다니고 두견새도 울지 않아 나그네 설움을 달랠 통로가 막혔다. 아녀자가 날아가 버린 파랑새를 한스러워하는 형상이다. 말미에서 자신의 결백과 충정을 호소했다. ‘신의 마음은 죽더라도 후회가 없다’고 언표함으로써 결백과 굳은 지조를 표출하였다. 고독한 시인의 모습을 초승달만 환하게 비쳐준다. 이처럼 두릉은 억울하게 무고를 당해 먼 이역 땅으로 유배되어 지내는 서러운 신세 한탄과 비애를 토로했다. 그래서 그는 굴원의 문학을 수용하여 시로 승화하고자 했다.
5) 굴원의 「어부사」 수용과 그 의미
두릉 시의 주요 특징은 굴원의 「어부사」를 시에 채용하여 형상함으로 불운한 굴원과 동일시했다는 점이다. 그의 시에 이런 작품이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우연히 강으로 나와 숲을 걷노라니
유월의 맑은 바람 석양에 들리네.
멍하게 종일 기미를 잃은 나그네
상수는 어이 하여 정을 담은 듯하네.
유배객의 유연한 심상을 표백하였다. 강으로 나와 숲을 걷는데 석양 무렵에 유월의 맑은 바람이 불어온다. 기미를 잃은 나그네는 평화롭게 사색하며 지난 세월을 반추하며 신세를 돌아본다. 출렁이는 강물은 그 옛날 굴원이 거닐던 ‘상수’湘水의 지류인 ‘멱라강’汨羅江을 뜻한다. 상수가 굴원의 억울한 심정을 담고 쉼 없이 흘러가듯 이 강물 역시 자신의 울분과 한을 머금은 채 유유히 흘러간다. 강물을 상수와 견주었고 이에 따라 자신과 굴원의 입장이 동일하게 투사된다는 논리를 제시해 우울한 정서를 집약해 표출했다. 굴원이 거닐던 상수를 회상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투영시킨 작품이다.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은 두릉의 분한과 억울한 심정을 대변해 주는 매개체이다. 다음 시는 굴원과 자신의 심정을 동일시한 것이다.
큰 꿈 깨어났어도 하늘 의심 않으니
당시 굴원의 심정을 알게 되었네.
깔깔 웃는 무당이 세상을 미혹하려고
망령되게 북두칠성 운운하니 과연 그럴까?
큰 꿈을 상실했다는 것은 두릉의 좌절을 의미한다. 하지만 하늘을 원망하지는 않는다. 이로써 초나라 삼려대부 굴원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유배지에서 전개되는 풍속을 소개한다. 무당이 세상을 미혹하려고 북두칠성 신을 운운하는 것에 대해 비웃는다. 유학자적 면모를 반영한 작품이면서 유배지 경물 묘사를 한 작품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자신의 현재 처지가 굴원의 그것과 동일하다고 한 점이다. 두릉은 결백하지만 그를 모함하고 결박하는 무리에 의해 억울한 처지에 놓인 점에서 굴원의 신세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두릉의 시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굴원이 남긴 「어부사」를 이해해야 한다.
「어부사」를 지은 굴원屈原의 이름은 ‘평’平이다. 일명 ‘정칙’正則이라고도 하며 자字는 ‘영균’靈均으이다. 그는 초楚나라의 귀족 출신으로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정치가이며 시인이다. 생몰 연대는 대략 BC343-BC278로 추정된다. 일찍부터 그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그의 시편은 초기 중국 시단에 큰 영향을 주었다. 굴원은 양자강揚子江 중부 유역의 큰 나라였던 초나라의 왕족으로 태어났다. 그의 친척이었던 회왕懷王의 신임을 받아 20대에 이미 ‘좌도’左徒[侍從]라는 중책을 맡았다. 법령입안法令立案 때 궁정의 정적政敵인 상관대부上官大夫와 충돌해 중상모략을 입어 면직당하고 국왕 곁에서 점차 멀어지게 되었다.
굴원은 ‘제齊와 동맹해 강국인 진秦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진의 장의張儀와 내통하고 있던 정적과 왕의 애첩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회왕은 제齊와 단교했으나 결국 진秦에게 기만을 당하고 진의 포로가 되어 살해당하고 말았다. 이어 큰아들 경양왕頃襄王이 즉위하고 막내인 자란子蘭이 영윤令尹이 되었다. 굴원은 백성들과 함께 회왕을 객사하게 한 자란을 비난하다가 다시 모함을 받아 양자강 이남의 소택지沼澤地로 추방되었다. 이 당시에 이 작품을 썼다.
그는 유배지에서 무속적 민속 의식을 관찰하고 그의 작품에 큰 영향을 끼친 전설을 수집했다. 맨 처음 회왕에게 내쫓기어 유배되었을 때 최대 걸작으로 꼽히는 373행의 장편 서정시 「이소離騷」를 지어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여기서 ‘이離’는 ‘만나다’라는 뜻이고 ‘騷'는 ‘근심’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소離騷’는 ‘근심을 만나다’라는 의미이다.
「이소경離騷經」이라 하는 것은 후세 사람들이 높여 부르는 이름이다. 왕일王逸과 주자朱子는 굴원의 「이소경」 서문에서 “이것은 위로 당우唐虞 삼후三后의 성왕을 법을 들어 언급했고 아래로는 걸傑·주紂·예羿·요澆의 패망을 들어 말함으로써 군왕이 깨닫고 정도正道로 돌아가 다시 자기를 불러줄 것을 기원한 것이다.”라고 했다. 굴원은 간신들의 말만 듣고 두 왕이 정치를 잘못해 나라가 망해가는 것을 보며 울분에 가득 차 이 시를 썼다.
굴원은 그토록 애타게 자기의 충정을 노래하다가 한 번 용서받은 바 있었지만 다시 참소를 받아 경양왕에 의해 멀리 강남 지방으로 추방당했다. 애국 시인 굴원은 유배에 대한 절망감으로 강가를 하염없이 거닐며 시를 읊조리다가 고결한 성품을 그대로 간직한 채 돌을 안고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졌다. 예순둘의 나이로 멱라수에 몸을 던져 자살한 굴원에게 중국인은 ‘시신詩神’이란 별칭을 붙여주었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그가 죽은 5월 5일에 찹쌀을 댓잎에 싸서 찐 떡을 강에 던지는 의식을 한다. 물고기가 이것을 먹고 굴원의 시체를 뜯어먹지 말라는 뜻이다. 용머리로 장식한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시합을 하는 이유는 굴원의 시체를 찾기 위함이다. 중국에서는 아직도 5월 5일에 벌어지는 유명한 ‘용선龍船 축제’를 성대히 개최한다. 이는 애국 시인의 유체遺體를 찾던 데서 비롯되었다.
굴원이 남긴 작품은 고대 중국의 명시 선집인 「초사楚辭」에 실려 있다. 이 시집은 후세 시인들이 굴원의 전설적인 삶에 대해 쓴 글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한부漢賦’에 큰 영향을 주었고 후대에 높이 평가되고 있다. 굴원의 「어부사漁父辭」를 보기로 한다. 당시 굴원의 내면세계가 투철하게 반영된 작품이다.
굴원이 쫓겨나 강과 못에서 노닐며 못가에서 시를 읊조리고 다니는데 안색은 초췌하고 모습은 수척해 보였다. 어부가 그를 보고 묻기를, “그대는 삼려대부가 아니십니까? 무슨 까닭으로 이 지경에 이르셨습니까?”하니 굴원이 말하기를, “세상이 모두 혼탁한데 나 혼자 깨끗하고 모든 사람이 다 취해 있건만 나 홀로 깨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추방을 당했다.” 고 하니 어부가 말하기를, “성인은 세상 사물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따라 변하여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탁하면 왜 진흙탕을 휘저어 흙탕물을 일으키지 않습니까? 뭇사람들이 모두 취해 있다면 왜 술지게미를 먹고 박주를 마시지 않으시고 어찌하여 깊이 생각하고 고결하게 처신하여 스스로 쫓겨남을 당하셨습니까?”하니 굴원이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관을 털어서 쓰고 새로 목욕한 사람은 반드시 옷의 먼지를 털어서 입는다고 했소. 어찌 결백한 몸으로 더러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소? 차라리 상강에 가서 물고기 뱃속에 장사지낼지언정 어찌 결백한 몸으로서 세속의 먼지를 뒤집어 쓸 수 있겠소?”하니 어부는 빙그레 웃고 뱃전을 두드리고 노래를 부르면서 떠나갔다. 이에 곧 노래하기를,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하고 마침내 떠나가 다시 함께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열전史記列傳에서 굴원의 행적을 집약했다. 그는 굴원의 지조를 들어 “진흙 속에서 씻어 진흙을 벗어나고, 먼지 바깥에 유리하여 세상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진흙 속에서 결백을 지녔다. 굴원의 지조를 살펴보면 일월과 빛을 다툰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라고 했다. 회왕은 굴원을 신임하여 모든 정사를 의논했으나 간신의 모략으로 굴원을 멀리하게 되었다. 굴원은 슬프고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돌을 안고 멱라수에 빠져죽었는데 「어부사」는 당시 자신의 심경을 묘사한 것이다.
비록 짧은 글이지만 그 속에는 곧고 깨끗하게 충성을 다해서 나라를 생각하던 굴원이 왜 죽을 결심을 했는지, 그 심경을 알 수 있다. 진흙 속에서 참혹했던 자기 처지를 의식한 굴원은 아픈 마음으로 강가를 헤매다가 강물에 비치는 자기 얼굴을 보고 ‘내가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되었나’를 생각한 것이다. 임금이 자기의 욕심 없는 충성심을 몰라줄 때 ‘그분이 어찌 내 마음을 몰라줄까’하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억울하고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그는 이 억울함을 초월해야 했다. ‘나는 이 나라의 신임을 받았던 삼려대부가 아니었던가?’ 그는 강가를 거닐면서 자문자답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그는 죽음을 택했다. 이로써 그의 결백을 온 세상에 밝히고자 했다.
두릉은 중국 역사와 문단에서 슬픈 애국 시인으로 추앙받는 굴원의 행적을 문학적으로 수용하여 이를 통한 자신의 신세와 울분을 토로하였다. 굴원과 동일시하면서 문학적 형상화를 시도했던 것이다. 관련 작품을 검토해 보기로 한다.
이 몸이 새 같아 화살이 무섭고
하늘 끝에 와 택반옹이 되었네.
죄 얻어 한가하니 이 또한 성은이니
만나고 헤어짐에 연연할 필요 없다네.
시인은 ‘새 같은 몸이 되어 화살이 두렵다’고 토로한다. 남의 이목 집중을 받아 공격의 표적이 되어 결국 극난한 지경에 이른 현실을 설명한다. 그러한 고난 끝에 하늘 끝의 바깥 유배지로 전락하게 된 어려움을 토로한다. ‘택반옹澤畔翁’은 상수를 방황하던 굴원의 형상과 다름 아니다. 하지만 불행을 체념하며 자위하여 혼란한 시대를 멀리하고 한가롭게 유배되어 도리어 안온하다고 한다. 실제 두릉의 내면 심리가 안정적이지는 않을 터이다. 이 때문에 만나고 헤어지는 것에 연연하지 않는 여유를 보인다. 극난한 현실 위기는 결국 시인에게 체념의 정도를 넘어 자학의 단계에 이르러 헛웃음을 띄게 할 뿐이다. 자학 속에 묻어나는 웃음에서 비통한 내면의 정서를 읽을 수 있다. 이처럼 낙척한 신세에서 지내는 동류에게 강한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세월 지나고 늙어가니 어이 할꼬?
술친구 시 벗은 많아도 사양 않네.
그대는 낙척하여 나와 처지가 같아
초나라 죄인처럼 서로 바라보며 다른 뜻 없네.
속절없이 세월이 흘러가고 늙음을 막을 길이 없어 안타까움을 드러낸다. 그러기에 술자리를 함께 할 벗이나 시를 짓는 사우가 많음을 사양하지 않는다. 상대방 역시 자신과 동일한 입장인 지라 서로 위안을 삼을 수 있다. 무기력한 현실 앞에 좌절하여 좌초된 신세로서 서로 바라만 볼 뿐 다른 도리가 없다고 탄식한다. 이러한 둘의 처지는 ‘초나라 죄인 굴원의 행적과 흡사하다’고 하면서 굴원의 입장을 자기화하여 시문학에 채용하였다. 두릉은 굴원의 삶의 방식을 채택하여 고난의 길을 걸으며 울분을 시로 표현하며 마음을 달랬다.
거듭 찾아오니 자연 경관 모두 새롭고
상전벽해가 안석 사이에 있네.
하늘 끝 초나라 산은 끝이 없고
오년 동안 유배객으로 돌아가길 잊었네.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다시 찾아오니 경물이 새롭다. 세상 변천사를 피부로 느끼면서 인생무상을 느낀다. 하늘 멀리 유배객으로 전전하는 신세를 한탄하며 끝없는 그리움과 사무침 속에 나날을 보내고 있다. 유배객으로 지낸 지 이미 5년이 되어 귀향할 기약이 없어 체념을 한 지 오래이다. 유배지에서 느끼는 고독한 정서 표출과 함께 서러운 인생에 대한 비탄 형식의 정념을 토로하였다. 유배객으로 만난 지우와의 우정은 각별하다.
그 어디의 집과 산이 북창일까
삼 년 찬 눈 맞으며 나그네로 지냈네.
애절한 향수 차가운 재처럼 사라지랴만
때로 돌아가는 기러기 패강을 건너네.
황생을 열흘 동안 보지 못하니
어찌 해야 세모의 외로움 달래랴.
상수에서 자네 만나 자주 흉금 털어 놓았고
새외에서 그대 아니면 누가 불쌍히 봐주리.
금빛 밤톨 벌어지지 않아도 간밤에 쓰러졌고
옥경은 응당 동산 봄을 찾아오겠네.
부옹 사달 내가 편안히 놓아주고
그대 좋은 말을 취해 삼가 띠에 써주네.
삼 년 간 유배객으로 생활하는 고난의 현장을 스케치했다. 고향 산천을 그리워하며 찬 눈비를 맞아 가며 역경을 견딘 지난 세월을 회고하였다. 향수가 결코 사라질 수 없다며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주시하였다. 그리움을 가득 담아 고향 하늘로 날아가는 기러기에게 안부를 전하고 싶은 소망도 담았다. 열흘 동안 황생을 만나지 못해 괴롭고 세모를 외롭게 보내자니 더욱 애절하다. 황생과 자주 만나 흉금을 털어놓으면서 고독과 울분을 삭혔던 점을 강조했다. 황생의 고마운 인정에 새삼 감사하는 마음도 털어 놓았다. 고향 산천의 봄과 가을 정경을 회상하면서 향수 서정을 표현했다.
십 년 동안 형설지공으로 공부하여
지금처럼 나라 등지고 이 땅을 전전하네.
어부도 신의 죄가 큰 것을 알아
상강에서 어부가 한 곡조 위로 삼네.
멍하게 삼순구식을 하나
천산에 눈 씹는 사람보다 낫지.
내 생애 돌아보니 주려도 즐거워
그대 재주와 기개가 노쇠해 가련하네.
근심의 좋은 실마리 다시 꿈에 뵈고
술 깬 뒤 쇠한 얼굴 곧 봄일세.
만사는 분수 외에 구하는 것 용납 않으니
당시에 웃으며 조신을 매었지.
청년기 시절 회상과 현재의 좌절된 자아 형상을 담았다. 십 년 동안 어려운 가운데 학문에 정진했던 지난 시절을 돌아보면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는다. 하지만 그 꿈을 제대로 펼쳐 보지 못한 채 먼 이역에서 유배 생활에 골몰하는 극난의 현실을 감내해야 한 하기에 무척이나 괴롭다. 굴원의 입장을 동일시하여 굴원이 불렀던 ‘어부의 노래’를 부르며 자위하기로 하였다. 유배 생활이 녹녹치 않음을 언급하면서 ‘만사는 분수 외에 구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체념 의식을 표현했다. 결국 두릉은 굴원의 노래를 시문학에 채용하여 시화함으로써 자신의 억울한 심경을 토로하며 자위하는 통로로 삼았던 것이다. 이외에도 두릉은 우의적 표현 수법을 동원하여 자신의 울분을 털어 놓는 방식을 택했다.
6) 우의를 통한 울분의 투사
병든 국화 이종하니 절로 예쁘고
추풍이 불어 살아나니 기쁘네.
재앙을 만날 이유가 없는데
가지와 잎이 꺾여 시들해졌네.
말이 국화를 손상시켜 애절한 마음으로 이종하여 잘 살아주길 바라며 지은 시이다. 새로 옮긴 국화가 생기를 찾는 것 같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가을바람이 불어오니 살아날 기미가 보여 흥분하였다. 하지만 ‘상해를 당하지 않고 곱게 자랐더라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라는 여운을 남겼다. 가지와 잎이 시들해 져서 겨우 연명을 하고 있는 국화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싶은 시인의 소망을 담았다. 자연 미물에 대한 애호 정신을 찾을 수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 숨겨진 키워드는 ‘국화에 가탁된 두릉의 형상’이다.
너를 의지해 병든 나를 위로했더니
향기 찾아 이슬에 씻고 고운 얼굴 보였네.
곧은 마음 재앙 만나도 후회 않고
중구절 남은 향기 눈처럼 곱게 피우렴.
두릉이 국화를 의지했던 이유가 해명된다. 자신의 병든 몸을 국화를 보면서 치유하고 회복했는데 뜻하지 않은 액운을 당해 국화가 시들해 졌음을 보고 애석한 마음을 표현했다. 시인은 국화를 의지해서 병약한 심신의 장애를 이겨냈던 것이다. 때로 국화의 향기를 찾고 영롱한 이슬 머금은 국화의 모습을 통해 평안을 얻었다. 국화가 상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곧은 절개를 지녀 강인한 생명력을 부지했던 점을 주시했다. 이는 두릉의 자아 형상이 감정이 이입된 표현이기도 하다. 위기를 당했지만 좌절하지 않은 절개를 고수한다는 의미이다. 국화에게 목숨을 이어 중구절에 향기를 피우며 만개해 주길 부탁했다. 자신 역시 좌절하지 말고 굳센 기절을 이어나가길 다짐한 우의적 심상이 반영된 시이다. 이는 붕鵬을 의탁한 표현에서도 발견된다.
애석하게 남아가 때를 잘 못 만나
선계를 오르니 달이 가지에 걸렸네.
늙은이 이 은근한 뜻은
붕새를 기다린 뒤에야 알리라.
자신의 신세를 우의적으로 빗댄 작품이다. 남아로 태어나 큰 포부를 지니고 한 때 불철주야 학문에 정진했지만 시대를 잘못 만난 탓에 이처럼 곤경을 당하게 되었다는 탄식을 발했다. 이에 선계를 방문하여 상처 난 마음을 다스리는데 나무 가지에 달이 걸린 고운 모습을 포착하였다. 자신의 큰 뜻을 붕새의 전설에 비유하여 스스로 위로하였다. 붕이 때를 얻으면 비상하는 것을 연상하면서 낙척한 신세를 타파하고 비상하는 꿈을 그려본 것이다.
그 당시 때를 만나지 못하여
선계에 잘못 올라 달이 가지에 걸렸네.
지금 같으면 식자우환이니
때를 조심하고 분수 외에 간여하지 말지니.
시대를 잘못 만난 탓에 시련을 당하였던 점을 그리고 있다. 선계를 방문하여 안식을 얻으려고 하여 달이 오른 산의 정경을 그려내었다. 현재 같이 어수선한 세상에서는 ‘아는 것이 도리어 근심이 되니 분수를 알고 간여하지 않겠다’고 함으로써 현실 외면을 통한 체념의 상념을 드러내었다. 현실 부정을 통한 자기의 위안을 보상 받고자 하는 심리를 담아내었다.
백전 풍상 속에 추윈들 어쩌랴
그대 역시 액운 당한 게 많구려.
지금 다시 도끼 재앙을 당했는데
굳센 절개는 어디에서 왔을까.
우의적 작품이다. 갖은 풍상 속에 추위를 견디고 모진 목숨을 부지해 온 잣나무는 두릉의 자화상이다. 자신을 위해하려는 온갖 모략과 중상 속에서 견디기 어려울 만큼 유배까지 당한 자신의 형상이 잣나무의 형세와 같다. 추위를 당해 액운을 당한 잣나무의 형태는 바로 액운을 당한 두릉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또 다른 도끼의 재앙을 당했다고 하면서 잣나무의 위기 앞에 못내 슬퍼하고 말았다. 하지만 굴하지 않는 그 절개를 칭송하면서 두릉은 자신의 기백이 다시 위축되어서는 안 된다는 견고한 내심을 드러내었다. 늙은 잣나무를 조롱함으로써 위축당한 형상 묘사와 함께 고고한 기상을 드러냄으로써 두릉의 굳센 기상을 함의하는 표현을 구사하였다.
만사가 푸른 물이니 어이 할꼬
소나무 계수나무로 나와 같은 이 많소.
그대는 지금의 좌절을 한하지 말지니
천문을 버틸 기둥이 나 말고 누구겠소?
이 시도 우의적 작품이다. ‘만사가 모두 푸른 물인데 자신 홀로 어쩔 수 없다’고 함으로써 벼슬에 나선 이들이 무성하여 저마다 잘난 체 하며 위세를 부리고 세력을 형성하여 아귀다툼하는 현장을 목도하고 목격한 두릉은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소나무와 계수나무로 나와 같은 부류가 많다’고 함으로써 자신과 비슷한 부류의 인사들이 많음을 비유하였다. 하지만 잣나무에게 다시 격려의 말을 전한다. ‘천문을 버틸 대들보는 바로 당신’이라고 언명함으로써 잣나무의 위용을 극찬하였다. 여기에 빗댄 잣나무는 두릉의 굴절된 자화상이다. 자신의 불행과 위기를 역발상하여 극찬함으로써 위안과 새 희망을 상정한 것이다. 이렇듯 두릉은 우의적 표현을 통해 삭히던 울분을 투사하는 기제로 삼았다. 이제 평담하고 한적한 미학을 담은 시를 보기로 한다.
7) 침잠과 사색의 서정
7년간의 유배는 두릉에게 참담한 현실 위기 그 자체였다. 그러한 고뇌와 번민의 흔적을 관련 시를 통해 파악했다. 여유와 한적의 미학이 반영되어 있는 시를 보기로 한다. 이런 작품은 유배기와 해배기 이후 작품들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그 어느 해 옛 고을 지났나
작은 암자에 쇠잔한 단풍에 이끼 낀 바위
구름 골짜기 깊어 신령한 개가 짖지만
그 누가 흥에 겨워 달을 찾아 올까.
과거에 지나왔던 고을을 다시 찾아 온 감회를 담은 시이다. 작은 암자를 배경으로 쇠잔한 단풍이 고아하게 장식된 풍광에 감명을 받았다. 화려한 단풍보다 쇠잔한 단풍을 보면서 시인은 계절적 무상감에 젖어 비애를 느낀다. ‘깊은 골짜기를 찾아 올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하며 그윽한 골짜기의 자태를 묘사하였다. 사람의 인적이 없는 한가하고 평온한 시적 소재를 택해서 한가로운 서정 세계를 진솔하게 그려내었다.
상정을 따르지 않고 만물 형태가 옮겨지니
고향 그리는 나그네 모습 서로 따르네.
빈 집에 벗이 자주 찾아 와도 반갑고
병든 몸 즐겁고 벗이 떠나는 게 더디네.
시 짓기 좋은 경자일이요
근심에 매여 국화 피는 시절 잊었네.
옛 우정과 높은 절의를 겸해 알게 되니
별미로 회까지 마련하여 입이 즐겁네.
유배지의 서정을 표현한 시이다. 세상사가 상정을 따르지 않고 변칙적으로 운용되는 것에 대한 우려를 드러내었다. 상대방도 자신과 처한 입장이 동일하다. 고향을 떠나 와 고향을 그리워하는 속사정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빈 집을 자주 찾아 준 벗이 고맙고 헤어짐이 아쉽다고 하였다. 시 짓기 좋은 절기임을 깨닫지만 근심이 깊은 탓에 국화가 만개하는 절기도 잊었다. 우정과 절의를 높이며 상대방이 회까지 곁들인 온정을 감사했다.
맑은 하늘에 우레 비 내리고 눈바람 몰아쳐
파도 아래 용이 울고 노한 쥐가 불어졌네.
언덕 처마에 먹이 던지니 고기가 배부르고
도리어 그물망이 공교롭지 못한 것 기롱하고
맑던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광경을 포착했다. 우레가 몰아치는 눈비가 내리고 모진 바람이 가세하는 정경을 표현했다. 거센 물결 밑에서 용이 노했고 주변 상황이 반전되는 것을 묘사했다.
무단한 근심 봄바람이 몰아내고
그 누가 날 위로하러 술을 보냈네.
석양의 강촌은 모두 살아 있는 그림인데
파릉은 끝내 시구 찾기 어려웠네.
끝없는 근심을 봄바람이 몰아내 주고 위로하는 술까지 얻게 되어 기쁘다. 석양 무렵 강촌의 풍광은 한 폭의 그림이다. 좋은 풍광에 압도되어 시구를 찾지 못할 정도이다. 술과 봄 흥취와 좋은 풍광이 겹쳐 시인의 흥겨움은 극에 달한다. 이 때문에 시로 표현하지 못할 만족감에 충만해 진다. 살아 있는 그림 속에서 여유와 풍류 미학을 즐기는 시인의
멋과 여유가 반영된 작품이다.
밤 사냥하던 장군이 돌도 뚫었으니
정신을 집중하면 쇠붙이 없이도 되네.
그대 묘한 기술은 온전한 안목 없으나
결국엔 서생으로 파강을 건너 돌아왔구려.
유배지에서 무술을 숭상하는 풍습을 읊었다. 정신을 집중하면 못 해낼 일이 없다고 하면서 바위를 호랑이로 착각하고 시위를 당겼더니 살촉이 바위를 뚫었다는 고사를 원용하여 활솜씨에 뛰어난 점을 극찬했다. 한나라의 명장 이광은 어릴 적부터 힘이 장사였고 천성이 쾌활하여 동네 꼬마들을 거느리고 산야를 달리며 사냥하기를 즐겼다. 그는 대단한 명궁이었는데, 그의 화살이 날아간 곳에는 어김없이 새나 짐승들이 쓰러져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산중에서 혼자 사냥을 하다가 깊은 숲 속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날이 어두워지고 밤새들이 우는데 그는 길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풀숲에서 거대한 호랑이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놀라 뛰는 가슴을 진정하고 급히 화살을 집어 들었다. 호랑이가 너무나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이 화살이 빗나가면 그는 하릴없이 호랑이 밥이 되고 말 처지였다. 이광은 온 몸의 신경을 곧추세우고 호랑이를 향하여 활시위를 당겼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호랑이가 분명히 화살을 맞았는데도 움직이질 않았다. 이광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까이 가서 보니 그것은 호랑이가 아니라 호랑이 형상을 한 바위였다. 그가 쏜 화살은 바위 깊숙이 박혀 있었다.
기이한 생각에 그는 그 바위를 향하여 화살을 날려 보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화살이 박히기는커녕 화살촉은 돌에 튕겨 나가고 화살대도 부러지고 말았다. 이광이 집에 돌아와 양자운이란 사람에게 이일을 말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쇠붙이나 돌덩이라도 열 수 있는 법일세.” ‘상대가 호랑이라고 생각했을 때 날린 화살과 호랑이를 닮은 바위라고 생각했을 때 날린 화살의 모양은 같지만 그 날린 사람의 뜻은 엄청나게 다르다’는 의미를 준다. 두릉은 무술에 뛰어난 인물이 낙척하여 낙향하게 된 점을 애석해 하였다. 이 역시 자신의 입장과 유사한 점에 착안하여 그와 자신을 감정이입한 시이다.
세 농부 농사철 되어 하늘 올려 보고
때에 맞는 좋은 비로 온 땅이 파랗네.
저녁 되도록 기다린 사람 오질 않고
그대 생각 하루가 일 년 같구나.
농부의 일상 표현으로 서두를 시작한다. 세 명의 농부가 농사철에 맞추어 농사에 전념하는 광경을 클로즈업했다. 적절한 단비가 내려 농사에 도움을 주어 더 없이 기쁘다. 온 전답에 파란 이삭들이 예쁘게 자라나 농부의 마음을 흡족케 한다. 전구에서는 이러한 시상의 전환을 가져와 기다리던 사람이 오지 않아 우울한 정서를 담아냈다. 기다리던 이가 오지 않아 기다림으로 초조해 하는 모습을 담았다.
이 나그네 좋은 풍류 아니니
바위 위에 붉은 꽃이 곱구나.
궂은비가 한가로운 정서 해치고
강가의 꽃이 어찌 이 근심 풀어주리.
나그네 풍류 서정을 잔잔하게 표현했다. 바위 가에 붉은 꽃이 아름답게 핀 광경을 포착했다. 궂은비가 내려서 한가로운 시인의 정서를 해쳤지만 강가의 꽃이 나그네의 시름을 풀어 주어 흥겹다. 내적으로 우울했던 심리 정서가 아름다운 자연 경관으로 인해 치유될 수 있다는 뉘앙스를 남겼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시인의 내면에 간직된 깊은 상처를 치유할 여건이 되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잔잔한 시상의 전개 속에 시인의 내면 깊은 고독과 번민을 반영한 시이다.
8) 한거와 정취의 서경
두릉 시에서 한가롭고 평온한 시편에서 정취를 반영한 작품을 보면 자연 경물 묘사와 평담한 기상이 담긴 작품이 많다. 이런 작품은 해배기 이후에 지은 작품들로 보인다.
흐릿해 앞을 분간하지 못하는데
천지가 밝게 개여 가장 먼저 드러나네.
천 리에 구름 흩어져 산 빛 푸르니
나를 도원동 신선으로 봉해주네.
흐릿하던 날씨가 선명하게 개여 산의 광경이 환하게 드러났다. 구름과 산이 깨끗하게 드러나는 광경을 담았다. 흰 구름과 깨끗한 산 모습이 어울려 색감이 조화되었다. 무릉도원의 신선이 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시상의 극적인 변화를 통해 긴박감을 더해 주었다. 흐릿한 안개비가 내리던 산 풍경이 이내 변전되어 비구름이 걷히자 천지가 환하게 트여 밝은 산 빛을 선사한다. 이어 신선한 자연 풍광이 찬란하게 그를 맞아준다. 순간 그는 무릉도원의 신선이 된 느낌을 받게 된 것이다.
봄은 자취 남기고 조용히 갔고
남포의 이별 수심에 백발이 더하네.
번화하던 봄 어디가고 적막한 지
남은 꽃을 보니 옛 관인을 대한 듯.
갓 봄이 지난 시점에서 시적 서정성을 발휘하였다. 이별의 남포에는 늙은이의 수심이 깊어간다. 번화하던 꽃 잔치가 끝나고 쇠잔한 꽃을 보니 애잔한 정서가 남아 애처롭게 느껴진다. 봄이 흔적만 남기고 가버린 애상과 이별 수심으로 시인의 고독한 서정 자아는 깊은 시름에 잠긴다. 하지만 그마나 위로를 받는 것은 쇠잔한 꽃이 그를 맞아주기 때문이다. 꽃을 바라보니 마치 옛 벗님들을 만난 것 같다.
병법에서 그 무엇이 봉화 만드는 것에 비하랴
만 리 변방에서 순식간에 만들었네.
어찌해야 주천자의 웃음을 사서
거짓 봉수 잡고 한가롭게 지낼까.
유배지에서 봉수대를 보고 지은 작품이다. 병법 전략상 봉화대의 유용한 점을 언급하면서 주천자의 고사를 들어 봉화대를 쓰지 않는 평화의 시절 도래를 상상했다. ‘주천자’의 고사를 보기로 한다. 주원장朱元璋(1328-1398)은 중국 명나라의 초대 황제이다.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거기에 가담하여 차차 세력을 얻어 명나라를 세웠다. 그 후 원나라를 물리치고 중국을 통일하였다. 관료제를 정비하고, 토지 제도의 개혁을 실시하여 부역과 조세의 정수를 공평히 하는 등 나라의 기초를 닦았다.
야사에 의하면 주원장의 선조는 원래 신라 사람으로서 중국 오나라로 건너갔다고 하는데,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으나 그의 선조가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다. 주원장은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17세에 고아가 되어 탁발승으로 지내다가 홍건적 부장이었던 곽자흥郭子興의 부하가 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후에 그는 강남의 거점인 남경을 점령하여 양자강 유역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각지의 군웅들을 모두 굴복시켜 명나라를 세웠다. 두릉은 이러한 주원장의 고사를 원용하면서 혼탁한 정치 세력이 평정된 안정된 조선을 염원하였다.
누가 외로운 심지 잡고 높은 산에 비춰
평소에 밤마다 세상에 알려줄까.
백년 성세에 큰 경계하지 말지니
봉수인이 장차 백운과 짝하여 한가히 지내리.
봉화대에서 횃불을 잡고 밤마다 세상에 알려줄 대상을 찾았다. 역설적인 발상을 하면서 봉수대의 기능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였다. 봉수를 당당한 사람이 백운과 친하게 지내며 태평성대를 구가하길 기대하였다. 봉수대가 필요하지 않는 희망의 세상을 희구하면서 역발상 전환을 하여 전쟁과 다툼이 없는 평화의 세상이 도래하길 염원하였다. 나라와 민족의 안정을 생각한 두릉의 애국 정서가 표현되었다.
지척의 권역은 돌길에 들어 있고
별다른 신선 고을이 수운 가에 펼쳐졌네.
하늘 색 산 빛이 조용한 못에 비치고
골짜기 나무 숲 창에 둥근 달 비치네.
춘풍에 취기 올라 얼굴이 붉어졌고
시에 옛 의미 담겼고 푸른 연기 피오르네.
주인은 늦복으로 공후와 짝하겠고
어찌 해야 산을 나눠 함께 살아볼까.
돌길의 시골 풍경을 스케치했다. 무릉도원처럼 고운 마을이 물가에 펼쳐졌다. 하늘과 산 빛이 조용한 연못에 비치고 골짜기 나무숲 우거진 창에 둥근 달이 비춘다. 춘풍에 취기가 올라 얼굴이 붉어졌고 푸른 연기가 오른다. ‘붉은 색’과 ‘청색’의 적절한 안배로 시각적 이미지가 강화되었다. 시인은 늘그막에 산 속에서 즐기는 즐거움을 만끽하며 공후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라며 감사해 한다. 봄바람과 함께 취기가 올라 시인의 풍류 서정이 발휘되었다. 그러기에 시에는 시인의 풍만한 낭만 서정이 담겨지는 것이다. 상대방의 진출을 축하하며 이 아름다운 산 풍경을 공유하며 즐거움 나누길 소망했다.
용문 별장 용두에 누워
가운데 유인 있어 일마다 한가롭다.
요임금 섬돌 연못에 푸르고 붉은 조화
마을 두른 성곽이 남아 있네.
한가로운 일월이 늙음을 잊고
비 그친 뒤 이내 가을임을 깨닫네.
시주와 풍류로 생계를 이어가니
세상 영리로 영화롭길 구하랴.
별장에 한가롭게 기거하며 여유와 멋을 누리는 삶을 표백하였다. 섬돌과 연못은 푸르고 붉은 조화를 이룬다. 오랜 성곽은 세월의 유구함을 말해주며 한가롭게 뜬 해와 달 역시 무궁한 자연의 순환과 섭리를 보여준다. ‘시’와 ‘술’로 ‘풍류’를 이어가니 세상 영리를 구할 필요가 없다고 자부하면서 자연 속에선 누리는 미학의 경지를 극찬하였다. 비가 그치면 이내 가을이 성큼 다가올 듯하다. 시와 술로 풍류를 이어가니 세상 영욕이 간여할 수 없다는 논리를 제시했다.
닭 우고 개 짖는 류안댁이요
묻건대 구름 속에 몇 년을 살았소.
구름 뚫고 나는 새를 보고
구슬 씻어 찬 샘물 소리 듣는다.
술로 시름을 잊은 지 오래
금단은 도리어 늙음을 재촉하네.
부끄럽긴 늙고 졸렬하여
함께 즐겁게 지내지 못한다오.
닭이 울고 개가 짖는 시골 동리의 풍경을 담았다. 깊숙한 자연 속에서 상당한 기간 동안 은거했던 경력을 언급하면서 은일자의 미적인 생활 미학을 자랑한다. 시인은 먼 공중을 주목하여 구름을 뚫고 멀리 날아가는 새를 바라본다. 이어 구슬처럼 영롱한 돌을 씻어 내리는 샘물의 청아함도 담아내었다. 시각적 심상과 청각적 심상을 안배하여 시의 완성도를 제고시켰다. 술로 시름을 한껏 잊었고 상대방과 그리워하면서도 함께 미를 공유하지 못한 점을 아쉬워한다.
조용히 용문의 눈 밟으니
한가히 지팡이 소리 상외에 길게 들려.
샘물 소리에 석수가 그치고
시구 찾는데 어느 주머니인지.
달에는 티끌조차 없는데
세상엔 냉온이 있다네.
세모를 잊고 머물지니
왜 홀로 용기를 내는가.
눈 내리는 서경을 담은 작품이다. 용문의 눈을 밟노라니 지팡이 소리가 먼 곳까지 울린다. 맑은 샘물 소리가 쉼 없이 들려오고 시구를 찾는 시인의 한가한 미학도 아울러 담았다. 문득 청아한 달을 응시하면서 티끌세상과 변별되는 달세계의 멋을 그리며 세모에 홀로 지내는 고독한 정신세계를 표현하였다. 청아한 달빛을 조망하면서 이 세상의 영욕을 반추하면서 지난 세월도 돌아보았다. 세모를 당해 종형이 더 머물기를 만류하면서 지은 것이다.
벗이 몇이나 있는지
물가에 별 두 세 개
우연히 좋은 모임 가져
취해 새벽까지 이어졌네.
벗과 단란한 시간을 보내며 귀한 모임이 새벽까지 이어진 풍경을 그렸다. ‘별이 총총 떠오른 새벽까지 술자리 모임이 이어졌다’고 함으로써 깊은 우정을 과시하였다. 벗도 취하고 시인도 취해 새벽 별이 떨어지는 시점에 이른 것이다. 두릉의 인간애와 자연 애호 미학 심상이 아우러져 있다.
이 밤은 풍류가 넉넉하니
주객이 별처럼 많다오.
술을 가장 애호하니
허명을 적셔주네.
풍류가 충만한 밤이다. 주객이 별만큼 만다고 하면서 주객과 별의 동반 의식을 드러내었다. 두릉의 시에 이처럼 ‘벗’과 ‘별’을 함께 거론한 점은 특이하다. 별처럼 청아한 벗님과 함께 술자리를 마련하여 흉금을 터놓고 시를 주고받았을 광경을 짐작케 한다.
두 배에 홍백 일반 청이니
기쁘게 서로 바라보니 환해졌다네.
산새가 숲 건너 짹짹 거리고
태평스런 노래 소리 들려오네.
자연 속에서 즐기는 미학적 풍류를 담았다. 기쁘게 서로 바라보면서 즐거워하며 환한 웃음을 짓는다. 숲 건너에서는 산새가 짹짹 거리며 지저귀고 민가에서는 ‘태평가’가 들려온다. 시인의 평온한 기상과 여유로운 미학이 표현되었다.
산중에 일이 없어 참 기쁘고
눈 가득한 바위의 꽃 환하게 밝네.
백 년 우주에 오늘 밤 취하니
인간 세상 영욕 풀벌레 소리에 잦아지네.
평온한 산속 생활의 단면이다. 산 속에는 아무런 일이 없고 평화롭기만 하다. 산 가득하게 암벽 주위로 예쁜 꽃이 만개하였다. 광활한 우주를 바라보면서 밤과 함께 취하니 인간 세상 영욕은 오간데 없고 풀벌레 소리만 들려오는 경지를 묘사했다. 벌레 소리를 강조함으로써 인간 세상의 영욕이 들려오지 않는다고 설정했다. 벌레의 울음이 세상의 잡된 소식을 차단해 준다는 의미이다.
평생 벗 없이 홀로 지내니
어찌 지금 같이 세상 정이 아닌지.
세한의 지기는 이 달인데
맑은 빛 밤마다 마음을 비추이네.
고독한 서정이 반영된 시이다. 이 당시 두릉은 홀로 지내며 외로운 심정을 토로했다. 아마 유배기의 작품이 아닌가 한다. 벗과의 교유를 끊은 채 지내자니 세상의 일반 정서와 상반된다고 했다. 하지만 고독한 그를 짝해 주는 것은 세한의 시절에 밝게 비쳐주는 달이다. 고독한 신세를 달에게 투영함으로써 고고한 달의 이미지를 수용하였다. 이로써 고독한 시인의 형상은 더욱 고결하고 청고한 이미지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시적 발상도 두릉 시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이밖에 전원 생활을 동경하며 풍류 서정과 고민을 반영한 작품도 있다. 일련의 시를 통해 두릉의 풍류 미학 정신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드릉 시의 주류는 유배기에 창작한 시작품이라 하겠다.
6. 두릉의 유적
1) 창랑정사滄浪精舍
두릉杜陵 이제겸李濟兼을 추모하기 위해 1901년에 건립한 정사로 봉화군 법전면 소천리 247-1에 소재한다. 창애정滄厓亭에서 옥천마을로 통하는 도로 동쪽 언덕위에 위치하고 있다. 정사는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다. 평면은 우측에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당실형中堂挾室形의 평면을 한 강당講堂 형태의 평면을 구성한 후 좌측에 누마루 1칸을 연접시켜,강당의 용도와 정자의 용도를 결합시킨 것 같은 특이한 평면형을 이루고 있다. 가구(架構)는 오량가(五樑架)의 소로수장집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2002년 10월 14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434호로 지정되었다. 1901년(고종38) 두릉의 후손들이 이 마을 입향조인 이제겸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창랑정사라는 이름은 만년에 바꾼 이제겸의 호를 따서 지었다. 봉화의 명산 태백산이 남쪽으로 뻗어내려 주룡을 이룬 화장산華獐山 아래 자리 잡고 있는 녹동鹿洞은 진성이씨 후손들이 3백여 년 째 세거하고 있는 고장이다. 행정구역상으로 경북 봉화군 법전면 소천리에 속하는 이곳 창주는 푸른 송림이 사철 울창하고 맑은 강물이 굽이쳐 흐르는 뛰어난 천혜의 절경인데다가 동쪽 언덕위에는 조선 숙종조 때의 명현인 충간공의 신도비가 우뚝 서있어 가히 가경을 이룬다.
두릉의 7세 적장손인 종대鍾岱씨가 족인들의 협력을 얻어 두릉의 유적을 보존하고 추모하기 위하여 광무 9년(1905년) 정사를 창건했다. 이 정사의 명칭을 창랑滄浪이라고 정하게 된 연유는 두릉이 일찍이 평안도 선천에 체류할 때에 지은 「선천억고산운시宣川憶故山韻詩」 말미에서 인용한 것이다. 창랑정사가 건립된 후부터 매년 여름 중복 때마다 원근의 선비들이 모여 시회 연시회연을 열고 있으며 이따금씩 자손들의 문주회도 이 정사 위에서 열리게 되어 후손들에겐 영광스러운 경사가 아닐 수 없다.
2) 九佳庵
두릉 이제겸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건립한 재실로 봉화군 법전면 눌산리 579에 소재하며 눌산마을의 산중턱에 서남향하여 자리 잡고 있다. 낮은 산골짜기 속 작은 건물 이 건물은 봉화군 눌산리 579번지에 위치한다. 법전에서 영양 나가는 길과 법전에서 현동 나가는 길이 갈라지는 곳, 높고 낮은 길들이 뒤엉켜 있는 그곳의 동쪽 모서리 부분으로는 작은 소나무 동산이 있다.
규모는 정면 6칸 측면 3칸 규모의 ㄱ자형字形 건물이다.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온돌방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부엌을 두고 좌측에는 통간通間 온돌방을 연접시켰는데, 좌측 온돌방의 전면에는 누마루 1칸을 돌출시켰으며 어간御間의 온돌방 뒤에는 반 칸 규모의 퇴칸을 두었다. 가구架構는 오량가五樑架의 초익공初翼工집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구가암은 19세기 건축양식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상당히 대범한 건축양식을 갖추고 있는 매력적인 건물이라고 하겠다. 이곳은 추측컨대 두릉이 머물면서 공부하고 마음을 닦았던 곳일 것이다. 그곳에 후에 후손들이 재사를 마련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원래 있던 집을 재사로 쓰기 위하여 개축한 것인지, 아니면 완전히 새롭게 재사 건물이 지어지는 것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두릉은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른 후 방면되자 깊은 산 속으로 숨어 들어온다. 산과 들의 자유로움을 배우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더러운 세상에서 도피한 결과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 결과 그의 족적은 여기 법전의 한 귀퉁이, 깊은 산 속이면서도 그리 깊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구가암 영역에까지 이르게 된다.
3) 두릉정
봉화군 법전면 어지리 녹동 마을에 있는 정자로서 비지정 문화재이다. 두릉이 은거하며 건립한 정자로서 산수를 벗하고 시서를 즐기던 곳이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고, 정면에서 보이는 좌측 1칸은 측면 2칸을 터서 방을 만들었다. 중간 칸과 우측 칸은 안마루와 대청마루로 나뉘어져 있고 정자 앞에는 원형의 연못이 있고 두릉정 정면 연못가에는 회화나무 두 그루가 잘 자라고 있다.
연못 주변에는 단풍나무와 산당화, 복숭아나무, 엄나무, 불두화 등의 나무가 자라고 있고 연못 좌측에 회화나무 한그루와 정자 우측 편에 향나무 한그루가 자라고 있다. 정자 뒤편 좌측에 종택이 있고 정자 좌측으로는 두릉의 후손인 귀은 이교영의 호를 딴 귀은재가 쇠락한 채 서있다. 두릉정 대청마루 추녀 아래에는 두릉정杜陵亭이라는 현판과 방당헌方塘軒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두릉은 높은 언덕이라는 뜻이 있고 방당은 네모진 연못을 뜻하는 것으로 두릉정의 연못은 지금은 원형이나 두릉정 건립 당시는 네모진 연못이었다.
4) 귀은재歸隱齋
귀은歸隱 이교영李敎英(1823-1895)이 1876년(고종13)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한 후 1878년에 익능참봉에 제수되어 이 해부터 벼슬길에 나서서 내직內職으로 사옹원봉사․의금부도사․사재감봉사․태능직장․상의원주부․사헌부감찰․호조좌랑․사직서․경모궁령을 역임하고, 외직外職으로 군위․직산․안산․청송․풍기․영해․영덕․하양 등 여덟 고을의 수재守宰를 역임하고 만년에 고향인 녹동에 돌아와 귀은재歸隱齋를 건립하여 학문을 연구하며 후진을 양성하던 건물로서 비지정 문화재이다. 귀은 이교영의 스승은 이한응이다. 그는 영남 류림의 전형적인 인물이다.
이교영李敎英은 퇴계의 숙부인 송재松齋 이우李堣의 후손으로 이득로李得魯의 아들이다. 자가 화여華汝, 호는 귀은歸隱이다. 숙조叔祖 경암敬庵 이한응李漢膺 문하에서 배우고 성재性齋 허전許傳 등과 교유하였다. 귀은은 갑오개혁 당시 박영효朴泳孝·서상범徐光範 등의 개화 시책에 반대하여 사직하였으며 고을을 맡았던 여덟 고을에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그는 학문적으로 주자朱子·퇴계退溪를 추숭追崇하였으며 개화 시책에 반대하는 등 전통적 유학자의 풍모를 보였다.
그의 행장行狀을 지은 향산 이만도李晩燾(1842-1910) 역시 을미사변으로 민비가 살해되자 의병을 모집하여 항거하였으며 1910년 망국國亡후 자결한 영남 지방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의 대표적 인물의 하나였다. 귀은의 묘갈명을 지은 김흥락金興洛(1827-1899)은 학봉 김성일金誠一의 후손으로 류치명柳致明의 문인이며 한말韓末의 영남유림嶺南儒林의 대표적인 한 분이다. 귀은은 1895년(高宗32)에 63세로 사망하였는데 문집과 송서요훈宋書要訓을 남겼다.
귀은재는 봉화군 법전면 어지리於旨里 녹동鹿洞에 소재하며 건물은 정면 여섯칸, 측면 두칸의 팔작지붕의 형식을 갖추고 있는데 전면에서 둘째 칸은 부엌이고 다섯째와 여섯째 칸은 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은 후손이 살지 않고 타인에게 살도록 해서 사람은 살고 있으나 지붕 위의 기와에는 풀이 나있고, 살고 있는 사람의 문화재관리 인식부족으로 많이 훼손되어 안타깝다. 이에 대한 보전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
7. 마무리
두릉집은 비교적 작은 분량의 문집으로 시와 서간문에서 두릉이 유배기에 겪었던 고독한 형상이 돋보인다. 아울러 그의 가족애와 우정미도 드러나고 있다. 7년간의 긴 유배 생활로 인해 두릉의 인생은 좌초되어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한 채 불행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현실의 불행을 거부하지 않고 초연히 수용하였으며 체념과 달관의 자세를 유지하였다.
두릉의 시 특징을 정리하면 청년기에 해당하는 작품에서 ‘수신과 정심의 미학’을 파악했다. 이어 유배기 시문학 특징으로 ‘유배의 고독한 서정 자아’․‘유배의 객수 서정’․‘유배의 비애와 한탄’을 파악했다. 이러한 시 문학 작품 분석 가운데 ‘굴원의 「어부사」 수용과 그 의미’를 통해 두릉이 자신의 입장과 굴원의 입장을 동일시함으로써 억울한 심정의 항변을 모색했고‘우의 표현을 통한 울분의 투사’를 했던 점과 ‘침잠과 사색의 서정’ 작품을 분석하여 두릉의 내면 세계를 조명했다. 마지막으로 ‘한거와 정취의 서경’ 작품을 분석하여 두릉의 자연 친화 사상과 한거 미학의 흥취를 파악했다.
실제로 그는 이인좌의 난에 의한 간접적 피해자였다. 이로 인해 꿈 많은 두릉의 인생은 상실과 좌절로 이어졌다. 물론 그에 대한 신원과 복권이 이루어졌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변고가 그에게 치명적인 손상을 준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때문에 두릉집은 당대 조정과 영남 사림들간의 역학 논리에 의해 전개되었던 정치 행태와도 일정한 연관성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시 안동의 야인 세력을 형성하였던 눌은 이광정을 비롯한 영남 사림층과의 심도 있는 검토를 거쳐 파악되어야 한다. 그리고 두릉집은 유배 문학적 가치를 지닌 문집이라 하겠다.
[참고 문헌]
晉書
大東野乘
冲齋年譜
巖泉世稿
中宗實錄
仁宗實錄
明宗實錄
蘇東坡詩集
國朝人物考
冲齋集(權橃)
退溪集(李滉)
桑村集(申欽)
冲庵集(金淨)
陰厓集(李耔)
江左集(權萬)
乙巳錄(李浚慶)
晦齋集(李彦迪)
靜庵集(趙光祖)
慕齋集(金安國)
眉叟記言(許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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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이원걸 : [두릉 이제겸의 생애와 시문학 정신], [봉화문화] 제23집, 봉화문화원,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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