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불교에 새로운 바람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초기불교를 연구하고 초기불교의 경전에 의거하여 수행을 해 나가는 집단과
중론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대승의 현 시대에서의 재대결입니다.
초기불전연구소의 각묵, 일묵(현 제타와나선원장)스님등의 유학파 스님들을 주도로
아비달마의 교리가 번역되어 실제 수행에 적용되고 있으며
반대로 용수보살의 중론을 배경으로 한 교수집단(이중표, 김성철, 서정형등)의
이론적 대결이 바로 그것이라 생각합니다.(물론 이것은 저 만의 생각입니다)
다만 대승에서 모든 교수들의 의견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통점은 나가르주나(용수보살)의 중론을 핵심텍스트로 삼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아공법유를 주장하는 아비달마와
아공법공을 주장하는 대승중관의 대결이 앞으로
한국불교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대목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이들의 대결은 실제로 이론적 다툼을 통해 일어나고 있는 대결은 아닙니다.
주목해서 볼 것은
이중표교수의 '붓다나라'라고 하는 신행집단입니다.
위빠사나 사마타를 중심으로 한 초기불교의 수행포교와
아함을 바탕으로 대승중관의 이론적 이해를 중심으로 한 포교가
어떻게 진행될 지 사뭇 궁금해지네요.
불교의 수준이 점점 올라가고 있네요. 참으로 좋은 일이고
그야말로 반가운 다툼이라 아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에 올바른 부처님의 가르침이 더욱 잘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첫댓글 이것이 더욱 흥미로운 것은 유신론과 무신론간의 대결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물론 유신론쪽이지만 무신론쪽의 의견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잘 새겨듣고 필요한 것은 가져다 써야겠지요.
문득 의문이 들어...아.. 인간보다 나은 신이 있다고 인정하고 이신들에게 의지 하는 마음이 있으면 유신론자로 간주 되는건가요?? 그러면 저도 유신론자 입니다 ^^
그런 신들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뿐더러 있다고 해도 굳이 의지할 마음도 없고 의지 안해도 잘 살수 있다는 입장이 불교 무신론자 들이라 생각하면 되나요? 이런 부류가 이중표 등등 반야쪽 분들 같아요. 아.. 초기불교분들 중에도 위와 같은 유신론자도 무신론자도 있으니.. 음.. 딱 초기불교, 대승불교로 나눠 유신론 무신론 나눌수는 없긴 하네요^^
유튜브에서 개인 행복을 위해 신이 필요없다는 식으로 말씀하시는 스님들 부류가 있죠.. 내 마음에 다 달려 있다는 법문 하시는 분들요. 이분들도 무신론자로 분류 되는거죠?? 이런 분들이 불교 무신론자라면.. 네..법문이 합리적이고 뭔가 이성적으로 생각하여 추종하는 분들이 상당히 있죠. 저도 어느쪽이 더 추종자가 많아질지.. 궁금하네요.
하나 확실한듯 한것은 한쪽이 아무리 우세해져도 무신론과 유신론자들은 항상 존재 한다는 사실요. ^^
불교의 유신론 무신론을 정확히 가르는 기준은 윤회설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입니다. 제가 알기로 윤회설을 인정하지 않는 쪽의 대표주자로는 학자로는 이중표교수가 있고, 스님으로는 법륜스님이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아함경에서의 오온의 해석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들의 관점에 따르면 세계자체가 오온이고, 오온이 곧 세계입니다. 저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물자체에 대한 설명이 이들의 이야기와 매우 흡사하다는 생각을 한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왜 저분들께서 부처님의 교설중에서 오온에 중점을 두는지도 어느 정도 이해는 됩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관점에 대해 너무 인간중심적인 사고가 아니냐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제 수준에 그들에 대해 반박할 엄밀성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공부중입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저분들이 갖춘 교학적이해는 어설픈 지식을 갖고 반박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저분들의 말씀도 새겨들을 수 있는 것은 받아들이고 제 나름의 검증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저들의 주장이 옳다고 해도 종교는 지식을 넘어선 효용이 가장 중요하기에 효용이 없다면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도원 윤회를 인정치 않는 그들의 관점은 또한 중론을 배경으로 한 무자성, 즉 공성에 그 맥락을 또한 두고 있습니다. 중론의 핵심인 공성을 이해하는 첫 번째는 바로 만법에 자성(어떤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것, 또는 존재함)이 없음을 이해하는 것인데, 용수보살도 중론에서 밝히고 있듯이 푸드갈라(개인아, 자아)라는 것도 살펴보면 자성이 없음에도 그것이 윤회라는 연속성을 가질 수 있느냐의 관점에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김성철교수는 억세밭에 이는 불길이 옮겨붙는 현상을 예를 들어 윤회를 설명하기도 합니다. 결국 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야 윤회의 문제가 풀릴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엄밀한 연기와 공성의 관점에서 본다면 윤회는 결국 윤회하는 자가 있다는 말인데 그게 누구냐는 말입니다. 윤회와 윤회하는자에 대한 관계로 이분화된 문법으로 문제를 풀 경우 중론에 의하면 논리적 모순에 봉착합니다. 결국 이 사태의 본질을 깨닫는것이 견도에 이르는 첫번째 관문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윤회에 대한 믿음을 기준으로 유신론자 무신론자 구분 기준이라면.. 제 개인적인 생각은 무신론자들은 명상이나 기도 등 경험을 통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식"을 발견 못했다에 500백원 걸겠습니다.^^
12연기에서 역관하시다 발견하신 그 식이요..
제 개인 의견이지만... 그 식을 무어라 불리던간에.. 6식이던 아뢰야식 이던.. 이식이 윤회하며 업을 만든다는 것을 깨닫고 그 식작용을 멈추게 하셔 열반을 증득하셨다 생각합니다. 그 식이 윤회하지만 멈추게 하는 방법을 알려주신거죠.. 4성제 8정도로요... 저의 이런 생각은 부처님 오도송을 보고 이렇게 생각하게 됐습니다
아.. 이 식을 경험적으로 발견하지 못한 사람끼리 논쟁하면.. 윤회가 없다는 저들을 이길 길이 없다고 생각 합니다. 나도 윤회를 믿는쪽이지만.. 저 역시 머리로 믿는 수준이니.. 도원스님 말씀처럼 저들의 논리로 이성으로 깨기는 어려울듯 합니다. 경험이 없어 못 믿는 사람에게 경험있는 사람이 아무리 말해도.. 그건 니 경험이고.. 이래 버리면 뭐..
윤회는 그냥 선택의 문제로 될듯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에게 귀의 된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해서 경험해야 진짜 귀의할듯합니다.
중론의 견해에 따라 청운스님의 의견을 제가 반박해보겠습니다. 식이 윤회한다고 할때 그렇다면 그 식의 정체가 무엇이냐가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식이 있다고 한다면 상주론이고 식이 없다고 한다면 단멸론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면 식은 식 그 자체로 존재할 수 가 없다는 것입니다. 식도 연기하여 나타난 것이므로(12연기순관의 세번째) 행에 의존하여 식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윤회를 가정할 때 식 단독으로 윤회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행을 떠난 식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식이 단독으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연기가 아닙니다. 따라서 12연기 자체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제가 다시 제 의견을 피력해 보겠습니다. 전에 7식 8식 이야기와 같은 맥락 설명이 될듯합니다. 서로 이야기 할때는 속제적 관점에서 말 할수 밖에 없고 속제적 개념 단어 즉 7식 8식 표현은..도원스님 말씀처럼 모순을 지적할수 있고 그러니 틀렸다고 말할수 있겠지요. 그 속제적 말을 짤라서 반박하면 어떤 말도 개구즉착이 되겠지요. '식'이라고 말했지만 진제적으론 독립된 존재일수 없죠.
여러 존재와 조건으로 끊임없이 흘러가는 '나'라는 존재를 짤라서 사진찍어 보면 '식'이라 이름 붙일 이름을 쓸수 있을 뿐이죠. 지금도 한번도 끊어진 적이 없는 지금의 내 모습이 있잖아요. 지금이 모습도 없다고 할때는.. 지금 이런 모습이 고정된 모습으로 변하지 않고 존재할수 없다는 의미로 "이 모습은 없다, 즉 무아다' 라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 하고 있습니다.
'없다' 라고 말하는 것은 니가 생각 하는 개념으로 현실에는 그렇게 존재하지 않다는 의미로 '없다'라는 말을 이해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부처님께서 존재의 실상은 이렇게 존재한다고 설명한 부분과.... 머리로 개념적으로 그렇게 존재하지 않다고 부처님 께서 지적할때 없다는 말씀을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 지한이가 자서. 다시 생각하며 스님 말씀을 읽어보니.. 제가 너무 장황하게 말한듯 하네요 ㅠㅠ
이부분이 궁금하여 여쭈어보겠습니다.
"식이 있다고 한다면 상주론이고 식이 없다고 한다면 단멸론이다"
이부분에 대한 대답으로 이렇게 말하면 어떤 모순이있나요?
" 식은.. 탐지치 번뇌가 있어 존재하고 탐지치가 소멸되면 그 식 작용도 멈춘다"
@청운45 식과 탐진치는 애초에 서로 연결되어 연기적으로 상호의존적 조건의 상태입니다. 즉 언어적으로만 분리할 수 있을 뿐입니다. 굳이 모순을 이야기하라면 질문하신 부분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은 무한소급의 오류에 빠지는 질문입니다. 또한 탐진치만을 놓고 볼 때 탐진치가 있다고하면 상주론이고 없다고 하면 단멸론입니다. 탐진치가 있다고 하면 애초부터 식과 상관없이 존재한다는 것인데 굳이 식과 연결될 이유가 없습니다. 식이 있어도 없어도 탐진치는 존재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탐진치가 소멸되었다고 한다면 이미 소멸된것이 다른것에 어떤 작용을 한다는 것도 논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탐진치가 존재하면서 소멸로 넘어가는 순간이라고 한다면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호모순의 오류가 됩니다.
중론의 입장으로는 모든 말을 다 부실수 있죠. 위에 올려드린 부처님 오도송도요.. 진제의 깨침을 증득한 부처님 입장에서는 중관론자 입장으로만 실상을 알려주려는 자세를 취하셨다면... 8만 4천 법문을 하실수 없었겠지요..
그 법문들은 다 세속적 개념이고.. 하지만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들은 그 개념을 사다리가 되어 주어 어느 정도 수행의 길로 인도 하는 효능이 있기에 말씀으로 진제를 드러 내셨다고 생각 합니다.
깨달은 분 입장에서는 입을 열든 단어를 쓰던 그 진제 자리를 알기에 속제가 진제고 진제가 속제이겠지요.
중론도 약입니다. 정말 이 약을 처방하면 개념이 무너져 진제를 맛보게 될 그 특정인에게 쓸 약입니다. 이 방법을 마치 보편적으로 이해 해서.. 아 이 중론이 진실이구나 하면.. 맥락도 없이 윤회는 없다는 말만 주구장장 하게 되는것 같습니다. 중론은 치료 대상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설일체유부. 불교도가 아닌 외도들.. 그들은... 강성용 교수님 강의에서 보았듯이 그 정도로 실체를 인정하고 그 수행도 어머어마한 사람들 대상이었다는 점을 조금 알게 됐습니다.
불교도로서 윤회가 있냐 없냐는 정말.. 음... 깨달으면 믿겠다 입장이면 윤회를 못 믿을듯 합니다. 윤회가 어떤 방식이고 어떻게 되는지 설명되고 이해 되야 믿겠다는 입장 아닌가요.??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지만.. 꽃이 피는 이유는 식물학자처럼(그들도 모른다 하지만 ㅠㅠ) 모르지만 꽃이 핀다는걸 받아 들이듯이.. 좀 비유가 딱맞는것 아닌긴 한데 ... 암튼..요지는 완벽하게 알때 받아들이겠다는 자세 같아서요..
윤회는 논증의 문제가 아니라 깨닫기 전에는 선택의 문제이라 생각합니다. 논증될 거라면 벌써 됐을거라 생각됩니다. 또 수많은 윤회논증을 읽고 개인적으로 받아들이냐 말거냐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 전생 이야기를 경전에 수도 없이 말씀하셨는데 그건 못 믿겠고 윤회 방식이 이해 안되서 윤회를 부정한다면.. 아.. 참 아이러니네요 불자라고 하기엔.. 그냥 범불교도.. 내지는 불교 가르침을 통해 자기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사람들이지.. 불자는 아니다. 정도로 규정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하게 되네요 ^^
불교도 삼귀의 하면 불자라도 하긴 하는데.. 거기에 보태서 윤회와 연기법을 믿는냐를 묻고 ㅋㅋ 수계를 줘야 할듯 하네요
청운스님의 말씀에는 논리보다는 굳건한 믿음이 더 중요하다는 입장이신것 같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중론을 설파하신 용수보살님도 중론의 첫번째 귀절인 귀경게에서 부처님에 대한 믿음과 존경 그리고 귀의를 나타냈지요. 하지만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신바 당신께서 하신말씀에 조금의 의심이라도 있으면 그것을 맹목적으로 추종해서는 안된다하셨습니다. 굳건한 믿음은 그런 철저한 검증과 확인을 거쳐서 생길 수 있는것이라 저는 믿습니다. 따라서 철저히 검증치 아니하고 대강 부처님께서 설마 중생들에게 거짓된 가르침을 펼치셨겠어? 그러니까 무조건 믿자는 믿음으로 때워뭉개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위배됩니다. 그냥 부처님말씀이니까 믿어야 한다. 부처님 오도송이니까 믿어야 한다는 것은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의 진의와는 정반대의 방향입니다. 용수보살의 중론도 단순히 약으로 치부해서는 그 위상이 너무 축소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쉬운 가르침이 아닙니다. 세계관을 바꾸는 일인데 그것이 어찌 단순하다 하겠습니까.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인간의 문명과 역사를 뒤바꿔놓았습니다. 그래서 바뀐 세계관을 이야기할때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위에서 제 나름대로 윤회를 믿게된 말씀을 설명하였고 제 나름의 검증한 만큼 설명하여 윤회를 물어보는 분들에게 설명할수 밖에 없죠. 무조건 믿으라는 입장은 아니고 나는 이정도로 윤회를 받아들였으니 믿고 안믿고는 듣는 사람 선택이겠지요
부처님의 가르침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다시 뒤집어 엎는 충격적인 세계관입니다. 그것을 용수보살께서 친절하게 다시 설명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그 가르침이 단순히 외교도나 치료의 대상에 한정하겠습니까. 인간인이상 모두에게 해당되는 가르침입니다.
윤회에 대한 한 스님 입장입니다. 저는 동감하는 입장입니다
https://youtube.com/shorts/0NvblQHtsOc?feature=share
저는 윤회를 당연히 믿습니다. 그러나 윤회가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어떻습니까. 윤회도 연기한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윤회는 연기의 하위 카테고리일뿐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연기법을 바로 아는 것이 윤회를 바로 아는 것이라 저는 결론 짓습니다. 불교의 핵심은 연기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연기적 관점에서 바라볼때 선대조사들과 제불보살님들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연기를 바로 이해하기가 너무나도 어렵기에 공부를 해야하는 것이고 또 공부를 넘어 증지를 해야 연기를 바로 본다 할 수 있는것이니 어찌 윤회에만 매달려 있겠습니까. 시간이 부족할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