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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O 40주년 특집 박용택 일러스트 / 출처=KBO
입단 첫해 플레이오프 MVP를 차지한 신인
모든 게 술술 풀리는 것만 같았다. 입단 첫해부터 가을야구를 원없이 하며 플레이오프 MVP까지 됐다. MVP 인터뷰를 위해 잠시 기다리던 때다. 승리 사령탑 인터뷰를 마친 김성근 감독이 인터뷰실을 나오며 박용택과 스치듯 마주쳤다. 김 감독은 가던 길을 멈추고 두 팔을 살짝 벌려 박용택을 안았다. “잘 했다. 수고했다”
2002년 11월1일 금요일 밤의 광주구장. 정규시즌 4위로 가을야구에 올라와 준플레이오프에서 현대를 격파한 LG는 파란을 이어가고 있었다.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정규시즌 2위이던 KIA를 8-2로 꺾고 3승2패로 한국시리즈행 티켓을 거머쥔 것이었다.
관중석 한 쪽에선 일부 성난 팬들의 시위로 불길마저 솟아오르고 있었다. 정규시즌 다승왕(19승) 마크 키퍼를 선발로 내고 승리를 낙관하던 KIA의 계산을 송두리째 흔든 선수는 그해 LG 신인 박용택이었다. 박용택은 5차전에서만 홈런 2개 포함 3안타 4타점을 뿜어내며 플레이오프 MVP가 됐다.
짧은 만남, 영원한 이별 한국시리즈
“저는 당연히 처음이었는데, 김성근 감독님도 한국시리즈는 처음 올라가는 것이었어요. 저를 안아주시면서 칭찬해 주시더라고요. ‘잘 했다’면서요. 그런데 그해 한국시리즈가 제 선수생활의 마지막 한국시리즈 될 줄은 정말 몰랐죠.”
한국시리즈는 6차전에 끝났다. 이승엽의 동점 3점홈런, 마해영의 끝내기 홈런 등 가을야구 역사에 남길 명장면과 함께 삼성의 드라마로 끝났다. LG에는 ‘새드 엔딩’이었지만, 한 세대의 마감을 예고하는 시리즈이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박용택은 눈 앞에 짊어져야 할 짐이 그토록 많을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박용택은 선수생활 내내 눈물도 참 많이 흘렸다. 2013년 11년만에 포스트시즌 진출을 굳혀놓고 벌인 두산과 정규시즌 최종일 경기에서 2위를 확정 지었을 때 묵은 감정을 모두 폭발하듯 울었고, 그해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고도 다시 울었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미루고 미룬 끝에 2022년 7월3일에야 진행한 은퇴식에서도 끝내 눈물을 보였다.
▲ 2009년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박용택의 모습 (앞줄 왼쪽) / 사진 출처=KBO
LG는 2002년 한국시리즈 준우승 이후로 한해 한해 ‘암흑기’로 접어들었다. 1990년대 LG 전성기를 대표한 간판스타들도 하나씩 은퇴하거나 팀을 떠났다. 류지현과 서용빈이 시차를 두고 은퇴했다. 이상훈도 SK로 트레이드된 뒤 은퇴했다. 김재현은 SK 트레이드된 뒤 ‘남의 식구’로 활약을 이어가고 있었다. 박용택의 하나 남은 우산처럼 팀의 간판으로 버텨주던 이병규도 2006년 이후 일본프로야구 주니치로 떠나 3년을 보냈다.
“솔직히 나 하나 ‘밥벌이’ 하기도 힘들 때인데 너무 빨리 ‘중심선수’가 돼버렸어요. 결과로 욕 먹어야하는 자리의 선수가 된 것이죠. 나중에 눈물을 자주 흘렸던 것은 뭐 그런 거였던 것 같아요. 이것 저것 다 섞여서….”
▲ 19년의 프로선수 시절 내내 박용택은 오직 ‘LG 트윈스’ 한 팀에서만 뛰었다 / 사진 출처=KBO
박용택의 운명 바꾼 ‘교내 스카우트전’
1989년 11월 서울 고명초등학교에 야구부가 생기지 않았었다면, 혹은 당시 야구부 감독으로 부임한 최재호 현 강릉고 감독의 집요한 설득만 아니었다면 박용택 앞 길에 ‘야구선수 박용택’은 없었을 일이었다.
박용택에게 야구부원 모집 공고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박용택이 야구부에 들어가게 된 것은 팀이 창단되고 어느 정도 구성이 완료된 이후였다. 최재호 감독은 ‘교내 스카우트 작업’에 나섰다. 주변 아이들에게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제일 운동 잘 하니?”(감독) “박용택이요”(학생들), “그러면 발을 누가 가장 빨라?”(감독) “박용택이요”(학생들), “그래? 박용택이 누구니? 어디 있어?”(감독)
박용택은 초등학교 시절 내내 반장을 도맡아했다. 공부를 굉장히 잘 했다. 박용택은 당시 석차 또는 점수를 소개하는 대신 “문제를 잘 틀리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운동마저 너무나 잘 했던 것이 딜레마가 됐다. 박용택은 육상부도 없는 학교의 육상 대표로 서울시 대회에 출전해 단거리와 멀리 뛰기 종목 예선까지 가볍게 통과할 정도였다. “정식 육상부로 대회에 나온 친구들은 스파이크 신고 뛰죠. 저는 보통 운동화 신고 뛰었죠. 그래도 성적이 꽤 좋았어요.”
최 감독은 박용택의 아버지 박원근씨가 실업농구 엘리트 선수였던 것까지 파악한 뒤로는 ‘유전적 시각’에서 더 큰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끈질기게 부모님 설득에도 나섰다. 그렇게 간신히 허락을 받은 것이 1990년 6월. 박용택이 초등학교 5학년 1학기를 마칠 무렵이다. 박용택은 야구 시작 5개월만에 우투좌타가 된다.
“감독님이 ‘너 좌타자 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때 플라이 아웃 하고 삼진만 아니면, 2루수 땅볼로 그냥 살았거든요. 전형적인 발 빠른 1번타자 스타일이었어요.”
박용택은 휘문중 3학년 때까지만 학교 야구부 훈련을 마친 뒤 귀가해서 교과 과외를 했다. 혹여 야구선수로 가는 길이 불투명하다면 다시 공부에 전념시키려는 어머니의 의지 표현이었다. 또 아버지는 키가 제법 컸던 박용택이 야구로 미래가 불투명하면 농구로 진로를 바꿔주려는 생각까지 했다.
박용택이 부모님이 준비하던 ‘플랜B’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휘문고 진학 이후였다. 특히 휘문고 2년이 되던 해 이명섭 감독 부임과 함께 프로 출신 이상대 타격코치 등이 합류하면서 성장의 속도가 붙었다. 박용택은 그해 1번타자 중견수로 뛰면서 휘문고를 대통령배 정상에 올리며 MVP가 됐다.
“나중에 프로선수가 돼서 가장 길게 쓴 타격폼이 ‘오픈 스탠스에서 다리를 찍어 놓고 치는 것’이었는데, 고등학교 때 타격폼과 흡사한 면이 많아요. 그때부터 힘도 붙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 극적인 끝내기포를 터뜨리는 박용택
김성근 감독 같은 분 다음은 진짜 김성근 감독
박용택은 그때를 돌아보며 “부모님도 그런 말씀을 하신다. 학교 운이 좋았던 것 같다”고 말한다. 박용택은 고려대 진학 뒤 경기도 송추 훈련장에서 4년을 보냈다. 고대는 훈련량이 가장 많은 학교였다. 당시 고대는 MBC 청룡 개막전 만루홈런이 사나이 이종도 감독이 사령탑으로 재임하며 OB와 쌍방울에서 선수생활을 한 김광림 코치가 타격을 지도하던 시절이다
“송추 숙소에서 밥 먹고 타격하고, 밥 먹고 다시 타격하고, 훈련의 반복이었어요. 김광림 코치님이 훈련량으로 김성근 감독님을 이기는 분이거든요. 계속 훈련만 했습니다.”
송추 훈련장은 해가 지면 빛 하나 없는 어둠으로 빨려들어간 곳이었다. 고대 시절을 돌이키며 송추생활만 기억나는 박용택은 어쩌면 ‘훈련 복’을 타고난 선수였다. 프로 입단과 함께 첫 만난 감독도 ‘지옥훈련’의 대명사인 김성근 감독이었다.
“저는 그때는 그냥 야구를 하려면 그렇게 훈련을 많이 해야하는 것인 줄만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어느 순간 제 루틴이 돼버린 것이죠.”
그래서인지 박용택은 노력에 관한 질문에는 답을 잘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어떻게 말해도 너무 뻔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라는 반응이다.
“프로야구 선수가 노력 얘기하는 것은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선수는 잘 하고 싶은 게 당연하고, 잘 하려면 훈련을 더 하려는 것도 당연한 일이잖아요. 연습을 자제하도록 말릴 수 있을 정도가 돼야죠. 그래야 프로선수죠. 그리고 무조건 많이만 한다고 좋은 건 또 아니고요.”
박용택은 2018년 6월23일 잠실 롯데전에서 1회 첫 타석에서 노경은 상대로 개인통산 2318호 안타를 터뜨리며 앞서 기록 보유자이던 양준혁과 타이를 이룬 뒤 4회 3번째 타석에서 고효준으로부터 2루타를 뽑아내 KBO리그 통산 최다 안타 선수로 우뚝 섰다. 2020년을 마지막으로 은퇴할 때까지 프로 19년 동안 2504안타를 쳐냈다. 통산 타율 0.308에 213홈런 313도루 1192타점을 올리며 전 부문에서 레전드 타자의 발자취를 남겼다.
골든글러브 4회 수상과 함께 10년 연속 타율 3할에 7년 연속 150안타, 통산 최다경기(2237), 통산 최다타석(9138) 및 타수(8139) 등 여러 빛나는 기록이 박용택 이름 뒤에 놓여있다.
▲ ‘Mr. Twins’ 박용택은 핀스트라이프 유니폼을 입고 KBO리그의 굵직한 대기록을 남겼다. / 사진 출처=KBO
김용달 코치와 2년 사투 ‘타격의 눈’을 떴다
입단 첫 시즌부터 순탄했지만, 타격에 대한 고민은 거의 하루도 멈추질 않았다. 가능성 있는 신인타자의 등장에 이리저리 손을 대는 코치들도 많았다. 그런대로 타협하며 성적을 내던 가운데 만난 지도자가 2007년 부임한 김용달 타격코치였다.
박용택은 2006년 타율 0.294 140안타 16홈런 25도루 64타점으로 나쁘지 않은 성적을 이어가고 있었다. 타법 수정이 필요하다는 김용달 코치의 주문에 처음에는 마음을 선뜻 내놓지 못한 이유였다. 김용달 코치도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리그 전체 톱5 안에 드는 타자가 되려면 바꿔야한다”는 구체적인 분석을 곁들이며 접근했다.
“2007년에 오시더니 ‘그렇게 치면 안된다’고 하시는 거예요. 요약하자면 밑에서부터 열기 시작해서 마지막에 상체 꼬임이 풀리면서 타격한다는 것인데, 그 당시만 해도 그 얘기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어요. 정말로 2년 동안 미친듯이 싸웠습니다.”
김용달 코치의 초점은 박용택의 콘택트존을 넓히려는 것이었다. 우측 쏠림이 컸던 타구 방향을 다양화하려는 것이었다. 김 코치의 기억 속에 그때 과정은 여전히 선명히 남아있다.
“용택이가 3할 가까이 치는 타자였지만, 확실한 3할 타자는 아니었어요. 가만 보니 용택이가 힘도 있고 스윙스피드도 좋더라고요, 그런데 코킹이 빨리 풀려 타구 방향이 고르지 않았어요. 헤드를 뒤쪽에 오래 두도록 해서 맞는 시간과 면을 늘리려고 했는데 나중에 어느 정도 됐다 싶을 때 제가 그랬어요. ‘용택아, 넌 이제 눈 감고도 3할 칠 수 있다’고.”
박용택은 2007년 타율 0.278, 2008년 타율 0.257로 고전 속에 2시즌을 보낸다. 그러나 과도기 같던 투쟁의 2년을 보낸 뒤로는 2009년 타율 0.372로 타격왕이 된 뒤로 10년 동안 타율 3할을 놓치지 않았다.
박용택은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치기 시작했다. 타법을 이해하고 바꾸는 데 2년이 걸렸다. 그 다음부터는 내 스스로 정립할 수 있는 방법이 생겼다”고 말했다.
▲ 2022년 은퇴식에서의 박용택
박용택에게 LG는 운명이었나, 선택이었나
박용택의 은퇴식에서는 김용수·이병규에 이어 구단 역대 3번째 ‘영구결번(33번)’ 행사도 함께 진행됐다. 박용택이 오로지 LG에서만 뛴 것이 운명만은 아니었다. 그의 선택이기도 했다.
야구를 시작한 해가 바로 LG가 창단과 함께 첫 우승을 이룬 1990년이었다. 박용택은 그때부터 LG팬이 됐고, 훗날 LG 선수로 뛰면서 ‘LG 하면 박용택’이 떠오르게 되는 날을 그렸다. 1998년도 LG로부터 고졸 우선 지명이 된 뒤로 대학 진학부터 했지만 대학 4년 내내 한 시도 LG 외야진의 판도 변화를 놓치지 않고 살폈다. “입단 뒤 내가 주전을 하려면 누구를 밀어내야 하나, 그런 생각을 계속 했어요. 이병규, 김재현 같은 형들이 많았지만 내가 주전을 하려면 누구를 밀어내야 할지, 또 무엇으로 어필해야할지 따져가면서 야구를 할 정도였어요.”
야구를 그만 둘 때까지 LG 선수로 뛰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여겼던 박용택이 잠시나마 혼란스러웠을 때는 두 번째 FA 자격을 얻었던 2014년 말이었다. LG의 최초 제시액은 4년 총액 40억원. 박용택과 LG의 협상이 난항이라는 것이 알려지자 롯데가 총액 기준 몇 십억원 많은 조건으로 타구단 협상일을 기다렸다. 롯데 핵심관계자가 원구단 협상 마감일에 잠실구장에서 불과 지하철 두 역 거리인 잠실 롯데호텔에서 대기했다.
롯데의 움직임을 간파한 LG는 그제서야 4년 총액 50억원으로 조건을 수정했다. 구단 사무실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던 박용택은 수정안에 서명했지만, 이적을 한다면 적어도 금전적 이익은 보장되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LG를 떠나고 싶지 않았던 게 그때 박용택의 솔직한 심경이었다. 다음날 롯데 관계자가 부산으로 내려가며 전화통화로 박용택에게 남긴 말은 “당신 참 멋있다”는 것이었다.
박용택은 사실, 타격만큼이나 수비력도 뛰어난 선수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어깨부상으로 송구력이 떨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지명타자로 출전하는 횟수가 늘어났다. 어쩌면 박용택의 야구인생에서 가장 아쉬운 대목일 수 있었다.
▲ 영구결번된 LG 트윈스 33번 유니폼은 박용택에게 ‘천생연분’ 그 자체였다. /사진 출처=KBO
“어깨 부상은 아주 조금씩 누적된 것이었어요. 조금씩 나빠지면서 슬랩(관절 와순) 손상 상태였는데, 요즘 같으면 선수가 그냥 뛰겠다고 고집해도 구단에서 수술을 시키든 재활을 시켰을텐데 그때 안그랬죠. 선수가 버티고 하겠다고 하는 데다 타격하는 데는 큰 지장이 없다 보니 계속 뛰다가 악화된 것이었어요.”
박용택은 선수생활 마지막까지도 대리인 없이 본인이 직접 FA 협상을 진행할 만큼 자기 표현에 능했다. 은퇴식에서도 잠실구장 스탠드에 수 만명 관중을 앉혀놓고 마치 토크콘서트를 하듯 대본 없는 은퇴사를 해 큰 공감을 얻었다.
초등학교 야구부 감독 선생님을 피해 공부하려고 했던 그 아이는 어쩌면 지금 또 다른 적성을 찾아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프로야구 해설위원으로 뛰면서 하이라이트 프로그램 패널이 아니라 진행자로 주목받고 있다. 이른바 ‘MC택’ 이다.
“전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제 꿈 다 이뤘어요. 2017년에서 2018년으로 넘어갈 즈음인 것 같아요. 아버지가 그러시더라고요. 아들이 나이 마흔살이 되도록 프로 선수 하는 것을 보고 ‘후회 없이 잘 했다. 더 욕심 부리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 하시더라고요.”
30년 전, 공부 잘 하는 아들의 진로를 놓고 아들보다 더 깊은 고민을 해야했던 부모님께 박용택은 줄무니 유니폼을 입고 뛴 19년 동안 명쾌한 답을 드릴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것이 감사한 모양이었다.
안승호 기자 / 경향신문
자료출처 : 네이버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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