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명
치명 / 김산 /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 파란시선(세트 0011) / B6(신사륙판) / 118쪽 /
2017년 5월 15일 발간 / 정가 10,000원 / ISBN 979-11-87756-05-7 / 바코드 9791187756057 04810
신간 소개
위험하고 위약하고 위악하고 위태한 시
김산 시인의 두 번째 신작 시집 <치명>이 2017년 5월 15일,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에서 발간되었다. 김산 시인은 1976년 충청남도 논산에서 태어났으며, 2007년 <시인세계>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키키>와 이번에 발간한 <치명>이 있다. 현재 프로젝트 포크 밴드 ‘김산 밴드’에서 보컬을 맡고 있다.
김산 시인의 시는 유니크하다. 물론 모든 좋은 시들은 제각기 유니크하다. 따라서 어느 시인의 시를 두고 ‘유니크하다’라고 적는 일은 극히 조심스러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단언컨대 김산 시인의 시는 유니크하다. 시집의 제목을 차용하자면 ‘치명적’으로 유니크하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시는 유니크하게 죽음에 이르고자 한다. 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의 일절을 변용해 적은 「치명」의 마지막 연은 이렇다. “바람이 분다. 죽어야겠다./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죽어야겠다.” 이를 두고 금방 ‘죽음충동’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유보되어야 할 의견이다. ‘바람이 불건 불지 않건’ “그래도 죽어야겠다”라는 저 끔찍하고 결연한 죽음을 향한 열망이 역설적이게도 김산 시인의 이번 시집 <치명> 전체에 걸쳐 시의 탄생과 지속의 동력이 되는 까닭은 “그래도”라는 단어에 내장되어 있다. 무슨 말인가?
김산 시인이 제시하는 생(生)의 실체는 “죽어 가는 사람은 죽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데 있다. 즉 “살아도 산 게 아닌” 삶 곧 “죽음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울상을 짓고 죽은 척 눈을 감고 있”다. 그러니 스스로를 두고 “나는 오래전에 죽은 귀신”이라고 명명하는 일은 차라리 당연해 보이기까지 한다.(「겨울의 할례」) 이러한 인식은 죽음을 통한 삶의 재편과 재생이라는 지극히 전략적인 통상의 방법론을 훌쩍 넘어선다. 김산 시인에게 삶은 이미 죽음에 압도되어 있다. 그러니 그가 “죽어야겠다”라고 처음 발화하는 순간은 죽음에 휘말린 삶이 자신 속에 깃든 죽음과 동귀어진(同歸於盡)하고자 하는 “절체절명의 몸부림”(「치명」)인 셈이다. 그래서 그 앞에 “바람이 분다”라고 적혀 있는 것이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는 그러므로 삶뿐만 아니라 삶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죽음마저 끝장 난 상태다. 이 영역은 일찍이 한국 시사에서 드러난 적이 없는 실재의 전면화다. 때로 <치명>의 지면들에 “말들이 흘러넘”(「비의 제국」)치기도 하는데, 생각해 보면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것은 마치 슬라보예 지젝이 헤겔의 해골을 들고 외친 비루하고 착잡하기 짝이 없는 숭고와 다르지 않다. 그러니 “그리하여 영영 침묵으로 말하겠다고 쓰겠다”(「겨울의 내계」)라는 문장은 “그래도 죽어야겠다”라는 두 번째 발화의 의미를 확정한다. 그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서정’이나 ‘감각’, ‘사유’, ‘정신’이라는 시 이전의 그 무엇에 대한) ‘받아 적기’로서의 시가 아니라 (비로소 쓰기에 의해 추동되고 개진되는) ‘쓰기’로서의 시의 탄생이다. 이런 맥락에서 “개미들이 죽은 나무를 타고 올라가고 있다”(「죽은개미나무」)는 김산 시인의 시행들을 요약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그래서 “시방 나는 위험하고 위약하고 위악하고 위태하다”(「아귀의 아기」)는 엄살이나 과장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한국시를 향한 결연한 고별사이자 영구혁명의 선언인 셈이다. 확언컨대 한국시에서 진정한 의미의 ‘쓰기’로서의 시는 김산 시인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추천사
김산은 노래하는 악동이다. 어쿠스틱한 배음을 깔고 두근두근 노래하며 관념적으로 읊조린다. 사각사각 약진하다 잠시 멈춰 서서 흔한 노래를 흔하지 않게 부르는 시객(詩客)이다. 은하의 애인이자 아들이자 친구인 김산의 가면은 놀이를 넘어서서 실존의 본면을 드러내며 웃고 떠든다. 우주 소년으로 명명되는 그의 레테르는 사실상 공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지구와 외계의 경계에서 새로운 중간계의 언어적 질서를 궁구하는 시적 노고가 이번 시집에서도 가득하다. 김산은 언어와 싸울 준비 태세가 되어 있다. “나는 당신이 남긴 최후의 배경입니다”라는 구절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언어”와 “당신의 혀”와 수많은 기호들을 이리저리 공글려 제 몸에 시라는 것의 증거를 새긴다.
언어에 대한 메타적 사유뿐 아니라 시 장르 자체에 대한 회의도 시집 곳곳에서 펼쳐진다. 은하에서 유희하던 시적 자아가 은하의 시원과 노래의 본질에 대해 본격적으로 탐구한다. 가령 “사각사각”이란 의성어를 만나거나, 사과 한 알을 통해 취향과 계절의 운동성을 만나고, 이를 통해 다른 우주의 길을 만나는 격이다. 김산은 자주 존재를 증명할 유일한 방법은 기호라는 것을 설파한다. 기호에 대한 자각이 풍자적으로 드러나다가 다시 언어의 근원으로 환원하는 치명적인 그림을 시집에서 많이 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흔한 시”를 가장 오래 기억할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그는 “흔한 시”를 쓰고 싶은지도 모른다. 가장 흔한 일이 먹고, 싸고, 죽는 일이라는 것을 말하면서도 그것은 흔한 일이 아니라고 한다. 우리는 흔하지만 “흔한 시”가 아닌, 그러면서도 “흔한 시”가 김산에게 매일 향연처럼 펼쳐져 ‘태양의 시민권자’로 신이 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재훈(시인)
김산은 시의 리듬이 단순한 스타일과 독특한 효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캄캄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갇힌 사람과 일상의 견고한 개념에 둘러싸인 사물, 그리고 생기를 잃은 모든 존재의 잠재력을 일깨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준다. 하나의 얼룩이나 음가에 불과했던 말이 조금씩 색조를 띠고 진동하는 과정을 지켜보자. 커졌다 작아지는 음량의 조절과 점차 짙어지다가 지워지는 농도의 변화 속에서 설명할 수 없는 감정과 복잡한 심경들이 천천히 어떤 무늬로 떠오르다가 마침내 화음을 이루는 과정에 눈과 입과 귀를 맡기자. 함부로 향하는 말의 틈에서 오묘한 향이 퍼지고 불쑥 튀어나와서 아무렇게나 쏠리는 감정들이 비밀스런 리듬을 이루는 과정에 동참하자. 아무 곳에나 넘치는 허술한 위로나 비슷하게 반복되는 조언들이 야릇한 매력에 기대어 무책임하게 감정을 뒤흔드는 것과 달리 정체를 알 수 없는 고통과 불안한 감정이 스스로 힘을 얻는 경험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감정을 자극하는 말과 망상에 시달리는 언어에 짓눌린 마음이 구체적인 몸과 접촉하는 시적 경험, 이것이야말로 감정시학의 리듬이 지닌 힘이다.
―장은석(문학평론가, <해설> 중에서)
저자 약력
김산
1976년 충청남도 논산에서 태어났다.
2007년 <시인세계>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키키>가 있다.
프로젝트 포크 밴드 ‘김산 밴드’에서 보컬을 맡고 있다.
시인의 말
나의 못된 귀와 눈과 손은
아직 당신을 기억하고 있다
차마 만질 수 없지만
부르면 언제든 달려오는 너의 빛
조금씩 너에게로 다가가고 있다
‘은하’에게 이 비루함을 바친다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사과는 무럭무럭 자라나고
013 현대시
014 word
016 관념적인 박수
017 두근두근 주황
018 밤의 증폭
020 모른다는 말
022 사각사각
024 비의 제국
025 약진하는 사과
026 우리들의 공익
027 유니크한 계단
028 캘리포니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030 토마토가 빛나는 밤에
제2부 흔한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처음 불렀던 노래들
033 kiss the rain
034 she
036 들창코 우주 소녀 이원
038 발인
040 다시, 은하에게
042 흔한 시
045 어쿠스틱 꾸움
046 임사
047 주먹왕
048 흰 운동화
050 죽은개미나무
052 죽음의 시퀀스
053 허밍
제3부 그것은 모든 세상의 끝
057 겨울의 내계
059 겨울의 외계
061 겨울의 무기
062 겨울의 할례
064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065 옥상달빛
066 아마도이자람밴드
068 아귀의 아기
069 울림의 미시
070 차례차례 불꽃쇼
071 태양의 시민권
072 팥색입니까? 팥빛입니까?
073 하울링
제4부 날개는 자꾸 공중의 저편으로 날아가고
077 기형도 박물관의 기형도
078 나무의 나무
079 가족의 탄생
080 흰 벽
082 미라
084 차음
086 마흔
088 사서
089 게르
090 검정감정
091 명랑
092 休止
094 치명
해설
096 장은석 감정시학
시집 속의 시 세 편
두근두근 주황
주황 책을 읽는다 명랑하게. 주황에서 주황 종소리가 난다. 종소리는 부서지고 책은 찢겨지고 주황은 외따로이 주황주황 훌쩍인다. 신작로에는 하얗고 노란 주황들이 맹인처럼 서 있다. 선글라스와 선글라스 사이로 주황들이 흩날린다. 그리고 계속 주황은 어디론가 빨려 들어간다 저돌적으로. 활자가 주황을 버리자 주황은 책갈피 속에서 난분분하다. 주황이. 종소리가. 선글라스 속으로. 아무런 대사도 없이 지문 속에서 파열한다. 백 살이 넘은 태아가 주황의 배를 냅다 걷어찬다. 엄마의 주황이 하혈을 한다. 없는 아빠가 애타게 주황을 부르지만 주황은 태초에 없다. 주황은 색이 아니다. 색은 주황의 미라. 주황은 너의 이름 너의 이름은 주황. 모든 주황은 네가 죽였다. 주황주황 죽어서 지금 너의 옆에 있다. 전근대적으로 새근새근 잠들어 있다. 우리 모두 주황의 이마에 키스를. 주황의 피사체가 반짝인다. ***
겨울의 내계
한 떼의 위약한 살들이 겨울의 빛을 망쳤다고 쓰겠다.
담배 연기가 죽은 구름을 위로하고 무딘 낫이 때때로
공중의 살들을 헤집었다고 쓰겠다.
그리고 한 여자 한 여자 한 여자가 눈의 빛 속으로
장엄하게 걸어 들어갔으니.
그것은 감히 신성한 일의 전조라고 차마 발설하지 못한 죄인에게
혀를 내미는 일에 불과했지만.
부러진 나뭇가지 사이로 바람의 입구가
견고하게 구축되었다.
돌아오지 못한 철새들이 서로의 몸을 부대끼며
종소리 종소리 종소리 울렸다.
쩌렁쩌렁 공중의 길이 산탄처럼 퍼져 나갔다.
당신은 그리고 그날 비로소 죽었다고 쓰겠다.
‘이미’라는 부사 앞에서 장렬하게 산화되었다고 쓰겠다.
운구의 행렬을 따라 겨울의 빛이 검푸르게 곡을 했으므로.
그것은 모든 세상의 끝.
소멸하는 지리멸렬함이 부르는 탄성.
아! 하고 입을 벌리자
오! 하고 따라붙는 불온한 겨울 무지개.
색을 잃은 빛들과 빛을 잃은 색들의 위태로운 군무.
천칭의 추 하나가 별자리에서 이탈했으므로.
그리하여 영영 침묵으로 말하겠다고 쓰겠다. ***
치명
푸른 저녁이 등의 짐을 잠재우는 시간으로 돌아가겠다.
고독의 밀실로 말하노니,
구름의 검은 조등이 맨발 아래 스멀거리는구나.
죄를 지은 사람과 죄를 벗은 사람 사이에서
분분이 포말 되는 겨울의 말로 이해하겠다.
섬이 떠다닌다. 한 섬 두 섬 세 섬 선한 양들을 부르듯.
섬은 별의 공동묘지. 저기 아래,
주검의 정박을 절체절명의 몸부림이라고 부르겠다.
어둠이 하얗다고 소년이 소리친다. 그것은 비석의 그림자를 본
늙은 매의 날갯짓이 전생을 파닥거리는 불온한 외침.
어린 송장이 관의 문을 열고 비로소 명멸하는 저녁,
잔디들이 일제히 일어나 향을 피우며 음복을 한다.
바람의 후레자식들이여!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라.
썩은 눈동자로 집을 잃은 별들이 뜨거운 손을 잡는다.
들개 한 마리가 앞발을 천천히 거두어 가슴으로 덮는다.
바람이 분다. 죽어야겠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죽어야겠다.
*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를 변용한 것임. ***
❚펴낸곳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07552) 서울특별시 강서구 공항대로59길 80-12(등촌동), K&C빌딩 3층
Tel 02-3665-8689 Fax 02-3665-8690 Mobile-Fax 0504-441-3439 E-mail bookparan201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