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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순환에 따르는 절대가치 구현
-한흑구의 <보리> 조명
보리
한흑구韓黑鷗(1909-1975) 수필집 ⟪동해산문⟫ 등
1
보리.
너는 차가운 땅속에서 온 겨울을 자라 왔다.
이미 한 해도 저물어, 벼도 아무런 곡식도 남김없이 다 거두어들인 뒤에, 해도 짧은 늦은 가을날, 농부는 밭을 갈고, 논을 잘 손질하여서, 너를 차디찬 땅속에 깊이 묻어 놓았었다.
차가움에 응결된 흙덩이들을, 호미와 고무래로 낱낱이 부숴 가며, 농부는 너를 추위에 얼지 않도록 주의해서 굳고 차가운 땅속에 깊이 심어 놓았었다.
"씨도 제 키의 열 길이 넘도록 심어지면, 움이 나오기 힘이 든다.
옛 늙은이의 가르침을 잊지 않으며, 농부는 너를 정성껏 땅속에 묻어 놓고, 이에 늦은 가을의 짧은 해도 서산을 넘은 지 오래고, 날개를 자주 저어 까마귀들이 깃을 찾아간 지도 오랜, 어두운 들길을 걸어서, 농부는 희망의 봄을 머릿속에 간직하며, 굳어진 허리도 잊으면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2
온갖 벌레들도, 부지런한 꿀벌들과 개미들도, 다 제 구멍 속으로 들어가고, 몇 마리의 산새들만이 나지막하게 울고 있던 무덤가에는, 온 여름 동안 키만 자랐던 억새풀 더미가 갈대꽃 같은 솜꽃만을 싸늘한 하늘에 날리고 있었다.
물도 흐르지 않고, 다 말라 버린 갯강변 밭둑 위에는 앙상한 가시덤불 밑에 늦게 핀 들국화들이 찬 서리를 맞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논둑 위에 깔렸던 잔디들도 푸른빛을 잃어버리고, 그 맑고 높던 하늘도 검푸른 구름을 지니고 찌푸리고 있는데, 너, 보리만은 차가운 대기大氣 속에서도 솔잎과 같은 새파란 머리를 들고, 하늘을 향하여, 하늘을 향하여 솟아오르고만 있었다.
이제, 모든 화초는 지심地心 속에 따스함을 찾아서 다 잠자고 있을 때, 너, 보리만은 그 억센 팔들을 내뻗치고, 새말간 얼굴로 생명의 보금자리를 깊이 뿌리박고 자라왔다.
날이 갈수록 해는 빛을 잃고, 따스함을 잃었어도, 너는 꿈쩍도 아니하고, 그 푸른 얼굴을 잃지 않고 자라왔다.
칼날같이 매서운 바람이 너의 등을 밀고, 얼음같이 차디찬 눈이 너의 온몸을 덮어 엎눌러도, 너는 너의 푸른 생명을 잃지 않았었다.
지금, 어둡고 찬 눈 밑에서도, 너, 보리는 장미꽃 향내를 풍겨오는 그윽한 유월의 훈풍薰風과, 노고지리 우짖는 새파란 하늘과, 산 밑을 훤히 비추어 주는 태양을 꿈꾸면서, 오로지 기다림과 희망 속에서 아무 말 없이 참고 견디어 왔으며, 오월의 맑은 하늘 아래서 아직도 쌀쌀한 바람에 자라고 있었다.
3
춥고 어두운 겨울이 오랜 것은 아니었다.
어느덧 남향 언덕 위에 누렇던 잔디가 파아란 속잎을 날리고, 들판마다 민들레가 웃음을 웃을 때면, 너, 보리는 논과 밭과 산등성이에까지, 이미 푸른 바다의 물결로써 온 누리를 뒤덮는다.
보리다.
낮은 논에도, 높은 밭에도, 산등성이 위에도 보리다.
푸른 보리다. 푸른 봄이다.
아지랑이를 몰고 가는 봄바람과 함께 온 누리는 푸른 물결을 이고, 들에도, 언덕 위에도, 산등성이 위에도, 봄의 춤이 벌어진다.
푸르른 생명의 춤, 새말간 봄의 춤이 흘러넘친다.
이윽고 봄은 너의 얼굴에서, 또한 너의 춤 속에서 노래하고 또한 자라난다.
아침 이슬을 머금고, 너의 푸른 얼굴들이 새날과 함께 빛날 때에는, 노고지리들이 쌍쌍이 짝을 지어 너의 머리 위에서 봄의 노래를 자지러지게 불러대고, 또한 너의 깊고 아늑한 품속에 깃을 들이고, 사랑의 보금자리를 틀어 놓는다.
4
어느덧 갯가에 서 있는 수양버들이 그의 그늘을 시내 속에 깊게 드리우고, 나비들과 꿀벌들이 들과 산위를 넘나들고, 뜰 안에 장미들이 그 무르익은 향기를 솜같이 부드러운 바람에 풍겨 보낼 때면, 너, 보리는 고요히 머리를 숙이기 시작한다.
온 겨울의 어둠과 추위를 다 이겨 내고, 봄의 아지랑이와, 따뜻한 햇볕과 무르익은 장미의 그윽한 향기를 온몸에 지니면서, 너, 보리는 이제 모든 고초苦楚와 비명悲鳴을 다 마친 듯이 고요히 머리를 숙이고, 성자聖者인 양 기도를 드린다.
5
이마 위에는 땀방울을 흘리면서, 농부는 기쁜 얼굴로 너를 한 아름 덥석 안아서, 낫으로 스르릉스르릉 너를 거둔다.
너, 보리는 그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자라나고, 또한 농부들은 너를 심고, 너를 키우고, 너를 사랑하면서 살아간다.
6
보리, 너는 항상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1955년 <동아일보>에 발표
한흑구의 <보리>는 한국의 현대수필을 대표하는 작품 중의 하나이다. 다년간 중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어 교과 담당 선생님들이 저마다 찬사를 쏟아낸 명수필이기도 하다. 그런데 <보리>가 어째서 명수필인지에 대한 설명이 똑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유명세에 밀려 어떤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를 지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보리>를 재조명함으로써 수필작품으로서의 우수성과 함께 작가가 범하고 있는 오류에 대해 냉철한 고찰을 시도해보려 한다.
<보리>의 줄거리 전개는 계절의 변화에 따른다. 가을, 겨울, 봄, 여름으로 이어진다. 대부분의 농작물은 봄에 파종하면 발아하여 여름에 성장하고 가을이면 결실, 수확한다. 계절에 따른 발아, 성장, 결실에 적정한 기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리는 대부분의 농작물을 수확한 이후, 쌀쌀한 늦가을에 파종, 발아하면 혹한의 겨울을 견디고, 논에 못자리를 하는 이른 봄부터 성장하여 모내기가 시작되는 초여름에 결실하고 모내기가 끝날 무렵 수확한다. 이것이 작가가 <보리>를 쓰게 된 모티브이다. 그러나 작가가 주목하는 것은 보리의 파종, 성장, 결실 과정에 따른 생태적 특성이 아니다.
보리.
너는 차가운 땅속에서 온 겨울을 자라 왔다.
이 <보리>의 첫머리에 유의해야 한다. 화자에게 보리는 일반적인 곡물이 아니라 ‘너’이다. ‘자네’나 ‘당신’ 같은 이인칭 대명사가 아니라 허물없는 친구나 가까운 동생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너’이다. 여기에는 친구나 동생이 고난에 굴하지 않고 맡은 바 임무를 수행했을 때 느끼는 대견함이 배어 있다.
이미 한 해도 저물어, 벼도 아무런 곡식도 남김없이 다 거두어들인 뒤에, 해도 짧은 늦은 가을날, 농부는 밭을 갈고, 논을 잘 손질하여서, 너를 차디찬 땅속에 깊이 묻어 놓았었다.
차가움에 응결된 흙덩이들을, 호미와 고무래로 낱낱이 부숴 가며, 농부는 너를 추위에 얼지 않도록 주의해서 굳고 차가운 땅속에 깊이 심어 놓았었다.
"씨도 제 키의 열 길이 넘도록 심어지면, 움이 나오기 힘이 든다.
옛 늙은이의 가르침을 잊지 않으며, 농부는 너를 정성껏 땅속에 묻어 놓고, 이에 늦은 가을의 짧은 해도 서산을 넘은 지 오래고, 날개를 자주 저어 까마귀들이 깃을 찾아간 지도 오랜, 어두운 들길을 걸어서, 농부는 희망의 봄을 머릿속에 간직하며, 굳어진 허리도 잊으면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보리의 파종이다. 파종은 농부의 몫이다. 추위에 얼어 죽지 않게, 움이 잘 트도록 너무 얕거나 너무 깊지 않게 잘게 부순 흙 속에 정성을 기울여 심은 씨가 무성히 자라 녹색의 물결로 일렁일 날을 꿈꾸며 어스름에야 귀가하는 농부. 농부는 온종일 파종에 지친 몸인데도 피로를 잊는다. 보리에 의탁한 농부의 희망이다.
온갖 벌레들도, 부지런한 꿀벌들과 개미들도, 다 제 구멍 속으로 들어가고, 몇 마리의 산새들만이 나지막하게 울고 있던 무덤가에는, 온 여름 동안 키만 자랐던 억새풀 더미가 갈대꽃 같은 솜꽃만을 싸늘한 하늘에 날리고 있었다.
물도 흐르지 않고, 다 말라 버린 갯강변 밭둑 위에는 앙상한 가시덤불 밑에 늦게 핀 들국화들이 찬 서리를 맞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논둑 위에 깔렸던 잔디들도 푸른빛을 잃어버리고, 그 맑고 높던 하늘도 검푸른 구름을 지니고 찌푸리고 있는데, 너, 보리만은 차가운 대기大氣 속에서도 솔잎과 같은 새파란 머리를 들고, 하늘을 향하여, 하늘을 향하여 솟아오르고만 있었다
늦가을 보리의 발아이다. 그런데 늦가을의 황량한 분위기와 보리의 발아를 대조시킨 기법은 탁월하다. 그런데 늦가을의 황량한 분위기 묘사 중 ‘무덤가에는, 온 여름 동안 키만 자랐던 억새풀 더미가 갈대꽃 같은 솜꽃만을 싸늘한 하늘에 날리고 있었다.’는 어색하다. 우선 억새가 자라는 산과 갈대가 자라는 해변이나 강변은 가깝지가 않다. 더구나 억새꽃이 바람에 날리는 모양을 갈대꽃과 직유直喩한 것도 어색하다. 두 꽃은 얼핏 유사해 보이지만 조금만 유의해 보면 갈대꽃은 꽃의 엉킴이 강해 솜을 연상할 수 있지만 억새꽃은 엉킴이 없어 깃털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그 색도 갈대꽃은 자갈색을 띠는데 비해 억새꽃은 백색이다.
‘너, 보리만은 차가운 대기大氣 속에서도 솔잎과 같은 새파란 머리를 들고, 하늘을 향하여, 하늘을 향하여 솟아오르고만 있었다.’는 압권이다. ‘솔잎’은 침엽針葉이다. 보리 싹이 차가운 흙을 뚫고 나오는데 활엽闊葉은 감당할 수 없다.
‘하늘’의 상징성 역시 뛰어난다. 하늘은 무한한 자유, 절대적 가치의 상징이다.
이제, 모든 화초는 지심地心 속에 따스함을 찾아서 다 잠자고 있을 때, 너, 보리만은 그 억센 팔들을 내뻗치고, 새말간 얼굴로 생명의 보금자리를 깊이 뿌리박고 자라왔다.
날이 갈수록 해는 빛을 잃고, 따스함을 잃었어도, 너는 꿈쩍도 아니하고, 그 푸른 얼굴을 잃지 않고 자라왔다.
칼날같이 매서운 바람이 너의 등을 밀고, 얼음같이 차디찬 눈이 너의 온몸을 덮어 엎눌러도, 너는 너의 푸른 생명을 잃지 않았었다.
지금, 어둡고 찬 눈 밑에서도, 너, 보리는 장미꽃 향내를 풍겨오는 그윽한 유월의 훈풍薰風과, 노고지리 우짖는 새파란 하늘과, 산 밑을 훤히 비추어 주는 태양을 꿈꾸면서, 오로지 기다림과 희망 속에서 아무 말 없이 참고 견디어 왔으며, 오월의 맑은 하늘 아래서 아직도 쌀쌀한 바람에 자라고 있었다.
보리의 강인함이다. 차가운 기온 속에서 푸른빛을 잃지 않고 자라는 보리의 강인한 생명력이다. '칼날같이 매서운 바람' '얼음같이 차디찬 눈’은 보리를 엎눌러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이다. 부토敷土를 해주거나 밟아주지 않으면 자칫 얼어 죽을 수도 있다.
수사적修辭的관점에서 눈은 구속, 압박을 암시한다. 부정적 상황인 것이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육사의 <광야> 넷째 연과 다섯째 연이다. 이 시의 ‘지금 눈 내리고’ 역시 현재 처해 있는 부정적 상황이라는 점에서는 <보리>의 눈과 동일하다. 그러나 <광야>의 눈은 싸워서 찾아야 할 대상이다. 그래서 아득한 매화 향기를 꿈꾸며 눈 내리는 광야에 노래의 씨를 뿌린다. 얼어붙은 땅에 씨를 뿌리는 행위는 저항이다. 이를 통해 언젠가는 매화가 활짝 피어 향기를 내뿜는 봄이 와 마음껏 노래 부를 수 있는 날을 갈망하고 있다. 싸워서 찾아야 할 기약되지 않은 봄인 것이다.
그러나 <보리>에서의 눈은 부정적 상황이라는 점에서는 <광야>의 눈과 다르지 않지만 부정적인 상황을 극복하는 방법에서는 <광야>와 다르다. 저항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견뎌내야 할 대상인 것이다. 희망을 품고 견디고 있으면 계절의 순환에 따라 봄은 저절로 온다. 이 이법은 어떤 인위적인 힘으로도 제어할 수가 없다.
춥고 어두운 겨울이 오랜 것은 아니었다.
어느덧 남향 언덕 위에 누렇던 잔디가 파아란 속잎을 날리고, 들판마다 민들레가 웃음을 웃을 때면, 너, 보리는 논과 밭과 산등성이에까지, 이미 푸른 바다의 물결로써 온 누리를 뒤덮는다.
보리다.
낮은 논에도, 높은 밭에도, 산등성이 위에도 보리다.
푸른 보리다. 푸른 봄이다.
아지랑이를 몰고 가는 봄바람과 함께 온 누리는 푸른 물결을 이고, 들에도, 언덕 위에도, 산등성이 위에도, 봄의 춤이 벌어진다.
푸르른 생명의 춤, 새말간 봄의 춤이 흘러넘친다.
이윽고 봄은 너의 얼굴에서, 또한 너의 춤 속에서 노래하고 또한 자라난다.
아침 이슬을 머금고, 너의 푸른 얼굴들이 새 날과 함께 빛날 때에는, 노고지리들이 쌍쌍이 짝을 지어 너의 머리 위에서 봄의 노래를 자지러지게 불러대고, 또한 너의 깊고 아늑한 품속에 깃을 들이고, 사랑의 보금자리를 틀어 놓는다.
드디어 봄이다. 황량한 가을과 고난의 겨울을 견디고 무성하게 자란 보리에 대한 감격이다. 화자는 이 감격에 격앙되어 운문에 가까운 표현을 하고 있다. 논도, 밭도, 산등성이도 푸르게 뒤덮은 보리의 물결에서 느끼는 벅찬 환희에 격앙된 것이다. 이 환희는 생명이 절대적 가치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기인한다.
어느덧 갯가에 서 있는 수양버들이 그의 그늘을 시내 속에 깊게 드리우고, 나비들과 꿀벌들이 들과 산위를 넘나들고, 뜰 안에 장미들이 그 무르익은 향기를 솜같이 부드러운 바람에 풍겨 보낼 때면, 너, 보리는 고요히 머리를 숙이기 시작한다.
온 겨울의 어둠과 추위를 다 이겨 내고, 봄의 아지랑이와, 따뜻한 햇볕과 무르익은 장미의 그윽한 향기를 온몸에 지니면서, 너, 보리는 이제 모든 고초苦楚와 비명悲鳴을 다 마친 듯이 고요히 머리를 숙이고, 성자聖者인 양 기도를 드린다.
보리의 결실이다. 여름이 온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섬세한 초여름의 분위기 묘사는 탁월하나 보리 이삭에 대한 묘사에는 오류가 있다. ‘너, 보리는 고요히 머리를 숙이기 시작한다,’ ‘고요히 머리를 숙이고 성자인 양 기도를 드린다.’ 문학평론가 오하근吳河根이 1970년대에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린 글들에서 발견한 오류 중의 하나로 지적한 바 있다. 보리는 이삭이 팰 때에도 익어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익을수록 살을 더 벌리고 하늘을 향해 꼿꼿하다.
그리고 보리를 고개를 숙여 기도하는 성자의 모습으로 비유한 것은 <보리>의 주제를 흐리게 하는 측면이 있다. ‘너, 보리만은 차가운 대기大氣 속에서도 솔잎과 같은 새파란 머리를 들고, 하늘을 향하여, 하늘을 향하여 솟아오르고만 있었다.’
‘하늘을 향하여 솟아오르고만’의 이미지는 하늘을 향해 살을 벌리고 있는 보리 이삭이 하늘을 받드는 성자의 모습으로 이어지게 한다. ‘하늘을 향하여’의 반복과 ‘솟아오르고만’에서 ‘―만’이 오직 특정한 대상으로 한정하는 보조사라는 것을 감안하면 하늘, 곧 절대적 가치를 받드는 성자의 모습과 결부되어 주제를 뚜렷하게 하는 역할도 한다.
이마 위에는 땀방울을 흘리면서, 농부는 기쁜 얼굴로 너를 한 아름 덥석 안아서, 낫으로 스르릉스르릉 너를 거둔다.
너, 보리는 그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자라나고, 또한 농부들은 너를 심고, 너를 키우고, 너를 사랑하면서 살아간다.
글의 끝에서 두 번째 단락이다. 여기서 비로소 수확하는 농부가 등장한다. 첫머리 두 번째 단락의 파종 이후에 전혀 언급이 없던 농부다.
이 수필에서 농부는 시작과 끝을 관장한다. 농작물은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 하지 않던가. 보리가 추위와 어둠 속에서 겪은 고난은 농부의 고난과 동일하고 보리가 겨울의 어둠을 참고 견뎌 결실에 이르는 과정 또한 농부가 끈질긴 참을성으로 심고 가꾸어 수확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보리, 너는 항상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보리>의 끝맺음 단락이다. 보리와 농부의 동일성과 영원성을 제시하고 있다. 보리는 계절에 따라 싹이 트고 자라고 열매를 맺는다. 농부도 계절에 따라 보리를 심고 가꾸고 수확한다. 아득히 먼 날부터 아득한 훗날까지 계속될 순환이다. 과거의 농부가 그래 왔고, 미래의 농부도 그럴 테니 말이다. 자연 순환의 이법에 따른 것이다. 보리의 순환주기는 짧고 농부의 순환주기는 길다는 차이가 있을 뿐, 자연의 순환은 절대적이다.
상대적 가치는 시대나 지역 또는 상황에 따라 유동적일 수 있다. 그래서 그 시대가 지나거나 그 지역 밖에서, 또는 그 상황에서 벗어나면 가치가 떨어진다. 그러나 절대적 가치는 언제, 어디,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다. 그 대표적인 것이 하늘로 상징되는 자연이다.
<보리〉는 자연 순환에 따르는 절대적 가치를 일깨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