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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번째 남자는 왕족 벽계수이다. 벽계수는 황진이가 명사가 아니면 만나주질 안아 고민하다가 친구인 이달에게 물어 꽤를 내어 황진이 집근처 정자에서 노래 한곡을 크게 부르고 황진이가 따라와서 돌아보지말고 앞만 보고 갔다고 한다. 그때 황진이가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오기 어려오니 명월이 망공산할제 쉬어간들 어떠리"라고 읊었다고 한다. 그 소리를 듣고 벽계수가 뒤돌아 보다가 말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황진이가 명사가 아니라 풍유랑이라 라고 말하고 돌아가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이 노래는 벽계수 낙마곡으로도 유명하다.
여섯번째 남자는 이생으로 황진이가 말년에 금강산 유랑을 하고 싶어 하여 동행을 청해서 함께 금강산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갈때 이생이 먹을것을 짊어지고 갔는데 여행도중 다 떨어져서 곳곳의 절을 돌아다니며 황진이가 몸을팔아 음식을 얻었다고 한다. 여행이 끝나고 헤어졌다고 한다.
일곱번째 남자는 지족선사로 그는 면벽수련 30년이라고 유명했다고 한다. 그래서 황진이가 지족선사를 찾아가 유혹했다고 하는데 얼마나 용모가 빼어났던지 면벽수련 30년을 깨고 파계승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마지막 남자는 황진이가 정말로 사랑한 서경덕이었다. 황진이는 서경덕의 학문이 높음을 듣고 서경덕에게 가서 유혹하였으나 넘어오질 않았다. 여러가지 방법을 써보고 함께 오랜 시절을 지냈으나 서경덕은 의연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황진이가 감탄하여 "지족선사는 30년 면벽수련에도 내앞에 무릎을 꿇었는데 서경덕은 함께 오랜 시절을 지냈으나 끝까지 나에게 이르지 않았으니 진정 성인이다."라고 말해고 서경덕에게 제자로 받아줄것을 부탁했다. 그래서 제자가 됐고 황진이는 서경덕 황진이 박연폭포이 세개를 송도삼절이라고 불렀다한다.
서경덕을 위해서 황진이는 많은 시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에 흐르나니 옛 물이 있을손가
인걸도 이와 같아 가고 아니 오노매라
청산은 내 뜻이요 녹수는 님의 정이라
녹수는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이 그리워 울어 예어 가는가
한편 송세양을 그리워 하며 쓴 시라고 전해지는 것도 있다.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베혀내어
춘풍 이불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님 오시어든 구비구비 펴리라
어져 내 일이야 그릴줄을 모로더냐
있으라 하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황진이는 조선 중종 때 개성(송악)의 기생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정확한 생존연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그녀가 1520년대에 나서 1560년대쯤에 죽었을 것이라는 것만, 황진이와 사귄 사람들의 일화로부터 추측할 수 있다.
황진이 어머니는 진현금이란 아전의 딸로서 그다지 미인은 아니었다고 한다. 어느날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는데 마침 지나가던 황진사의 아들과 서로 반하였다. 둘은 정을 통하였지만 결혼은 할 수 없는 사이였다. 이후 진현금은 딸을 낳았는데, 바로 황진이다.
세월이 지날수록 황진이의 거침없는 성격과 미모는 돋보이기 시작했다. 황진이가 15세 되던해의 일화이다.황진이가 글을 읽고 있는데 지나가던 상여가 황진이의 문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황진이를 사모하다가 상사병으로 죽은 동네 총각의 상여였던 것이다.황진이가 소복을 입고 밖으로나가 자기 치마를 벗어 관을 덮어주며 슬프게 곡을 하였더니 그때서야 상여가 움직였다. 사람들은 이일로 인하여 그녀가 기생이되었다고도한다.
황진이는 첩의 딸로서 멸시를 받으며 규방에 묻혀 일생을 헛되이 보내기보다는 봉건적 윤리의 질곡 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였다. 그 결심을 실천하자면 당시 그의 신분으로서는 불가능하였으므로 오직 길이라면 기생의 인생을 걷는 것이었다. 황진이는 부모의 만류를 뿌리치고 기적에 입적하게 되었다. 황진이가 기생이 되자 각지의 내노라 하는 풍류객들이 그녀를 보기 위해 송도에 몰려들었다. 당시만 하여도 전국에 공식적으로 약 3만 명의 기생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개성에는 유명한 학자와 선승이 있었으니, 학자는 곧 화담 서경덕선생이요, 선승은 지족암에서 三十년동안을 면벽참선한 지족선사였다. 지족선사는 생불이라고 불릴 만큼 덕망이 높았다. 황진이는 평소에 두사람을 다 흠모하던 중 한번은 그 인물의 됨됨이를 시험하여 보려고 먼저 화담선생을 찾아가서 수학하기를 청하니 선생은 조금도 난색이 없이 승낙하였다. 황진이는 얼마 동안 선생에게 공부를 하러 다니다가 하루는 밤에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선생의 침실에서 같이 자며 공부하기를 청하니 선생은 또한 허락하였다. 그렇게 수년 동안을 한방에서 동거하는 중에 황진이는 별별 수단을 다 써서 선생을 유혹시키고자 하였으나 선생은 목불과 같이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황진이는 이미 여색의 경지를 넘어선 화담 앞에 무릎을 꿇고 정중히 말했다. “역시 선생님은 송도 3절의 하나이십니다.” 화담이 나머지 둘은 무엇이냐고 묻자 “하나는 박연폭포요, 다른 하나는 접니다”라고 당당히 답했다. 그 뒤로 이들 셋은 고려 왕도였던 송악에서 가장 빼어난 것으로 여겨졌다.
황진이는 이와 같이 서화담을 한번 시험하여 본 뒤에 다시 지족선사를 시험하여 보려고지족암을 찾아갔다. 황진이가 제자로서 수도하기를 청하니 지족선사는 여자는 원래 가까이 할 필요가 없다고 하며 처음부터 절대 거절을 하였다. 황진이는 며칠 있다가 다시 소복 단장으로 청춘과부의 복색을 하고 지족암으로 가서 그 선사가 있는 바로 옆방에다 침소를 정하고 자기의 죽은 남편을 위하여 백일간 불공을 한다고 가칭하며 밤마다 불전에 가서 불공을 하는데 자기의 손으로 축원문을 지어서 청아한 그 좋은 목청으로 처량하게 읽으니 그야말로 천사의 노래와도 같고 선녀의 음률과도 같아서 아무 감각이 없는 석불이라도 놀랄만 하거늘 하물며 감정이 있는 사람으로서 그 누가 감히 귀를 기울이고 듣지 않을까 보냐. 이와 같이 며칠 동안을 계속하여 불공축원을 하니 노선사가 처음에는 무심하게 들었으나 하루 이틀 들을수록 자연히 마음에 감동이 생겨서 그 三十년 동안이나 잔뜩 감고 옆에 사람도 잘 보지 않던 눈을 번쩍 떠서 황진이의 태도를 한번보고 두 번 보니 보면 볼수록 선계의 정념은 점점 없어지고 사바의 욕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여 불과 며칠에 황진이와 서로 말을 붙이게 되니 황진이는 예의 그 능란한 교제술과 영롱한 수완으로 그 선사를 마음대로 놀리어서 최후에는 그만 파계를 하게 되니 지금가지 세상에서 쓰는 「망석중 놀리듯 한다」는 말이라든지 「십년공부 아미타불」이라는 말은 그 사실을 일러서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