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昌德宮
창덕궁은 조선 3대 태종 때 지어진 이궁(離宮)으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에 있다. 고려를 멸망시킨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이곳에 경복궁을 창건했다. 그러나 2대 정종(定宗)은 다시 개성으로 환도한다. 이후 태종은 선왕(태조)의 창건지며 종묘와 사직이 있는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는 것이 선왕에 대한 효(孝)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라면서 다시 수도를 한양으로 옮긴다. 이 때 지은 궁궐이 창덕궁이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과 함께 소실되었으나 광해군은 경복궁은 놔두고 창덕궁만 다시 짓는다. 그 후로 창덕궁은 고종 때 경복궁이 복원될 때까지 약 300년 간 정궁(正宮)의 자리를 지켰다
특히 창덕궁 후원(後園)은 자연 그대로의 지형과 수림을 모태로 한 자연정원으로, 여러 가지 조원 수법을 동원하여 감상의 묘미를 극대화한 중국의 황실 정원이나 철저하게 인간 중심적으로 경영하여 축경화(縮景化)시킨 일본의 정원과 구별된다. 이런 점 때문에 창덕궁 후원은 세계 정원사에서도 매우 특별한 정원으로 취급된다.
昌德宮 全景(ⓇHeoKyun)
◎ 주요 전각
○ 仁政殿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正殿)이다. 이곳에서 왕의 즉위식, 세자 책봉식 등 국가적 행사가 벌어진다. 조선시대 궁궐 정전(正殿) 이름은 인정전처럼 모두 ‘정(政)’자를 포함한다. 경복궁의 勤政殿, 창경궁의 明政殿, 경희궁의 崇政殿 등에서도 그 예를 확인할 수 있다.
‘政’은 ‘바를 정(正)’과 ‘칠 복(攴)’의 합자로, ‘매로 쳐서 바르게 한다’는 뜻이다. ‘바르게 한다’는 것은 그 역할을 하는 주체가 바르지 못한 객체를 바르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 자신이 바르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바르게 할 자격이 없다. 예컨대 임금이 바르지 못하면 백성을 바르게 할 수가 없고, 스승이 바르지 못하면 학생을 바르게 가르칠 자격이 없는 것이다.
봉건시대 정치의 중심은 왕이다. 왕의 품성과 능력에 따라 민초들이 부동(附同)하는 것은 동서고금의 불변 법칙이다. 한 나라의 이익과 백성들의 행복은 최고 지위에 있는 왕이 바르냐 그렇지 못하냐에 달려 있다. 그래서 왕에게 수기(修己)는 가장 중요한 덕목이 되는 것이다.
무력이나 법의 구속력으로 다스리는 것은 패도정치(覇道政治)고, 하늘의 도를 따르는 천륜 위에서 교화를 통해 백성들이 스스로 따르게 하는 것이 왕도덕치(王道德治)다. 인정전의 ‘仁政’이란 두 글자에는 왕도덕치의 이상을 실현하려 했던 조선 왕들의 의지가 담겨 있다 할 것이다.
仁政殿(ⓇHeoKyun)
○ 宣政殿
인정전의 동문인 광범문(光範門)을 통해 동쪽으로 나가면 선정전이 나온다. 왕이 신하들을 만나 국사를 논의하고, 유교경전을 공부하던 임금님의 공식 집무실이다. 창건 당시에는 ‘조계청(朝啟廳)’ 이라 불렸으며, 세조 7년(1461)에 선정전으로 개명되었다. 오랫동안 편전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조선 후기 순조 연간부터 내전인 희정당(熙政堂)이 편전 역할을 하게 되었다.
宣政殿(ⓇHeoKyun)
○ 熙政堂
희정당은 원래 왕의 침전 건물이었으나 순조 때부터는 편전으로 사용되었다. 연산군 2년(1496)에 대조전 전랑(前廊)에 있던 수문당(修文堂)이 불 탄 후 복구하여 희정당이라 개칭했다.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때 불탔으나 광해군 즉위 초와 인조 25년에 각각 중건 되었다. 그 이후 여러 차례 화재와 재건을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희정당에는 한국 전통 건축에서 볼 수 없는 돌출 현관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것은 일제가 1920년에 자동차 진입을 편하게 한다는 명분으로 설치한 것이다.
인조, 숙종 등은 희정당에서 청나라 사신을 맞이했으며, 정조는 이곳에서 성균관 제술 시험의 합격자들을 위한 연회를 베풀기도 했다. 고종 즉위 직후부터 3년간 조대비가 이곳에서 수렴청정했고, 순종은 1875년 2월 18일 이곳에서 세자로 책봉되었다.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순종이 일본 등의 외교 사절을 접견하는 장소로 사용됐다.
희정당 내부에는 지금 붉은 카펫, 커튼 박스, 근대적인 테이블과 의자 등이 놓여 있는데, 이것은 개회기의 자취다. 대청과 방 사이의 벽에 걸린 그림은 해강 김규진의 <금강산만물초승경도>와 <촉석정절경도>이다. 고종은 재위 5년에 경복궁으로 이어하기까지 이곳 희정당에 거처했다.
熙政堂(ⓇHeoKyun)
○ 大造殿
대조전은 왕비의 침전으로서 창덕궁 내전의 중심 전각으로, 경복궁의 교태전(交泰殿), 창경궁의 통명전(通明殿)과 같은 성격을 가진 전각이다. 왕업을 계승할 큰 인물이 탄생해야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이룰 수 있다는 기원을 담아 침전 이름을 대조전이라 했다고 전한다. 대조전에서는 성종과 인조와 효종, 철종, 순종, 그리고 헌종의 왕비 효현왕후 김씨가 승하했고, 순조의 세자로 후에 왕으로 추존된 익종이 태어났다. 그리고 남행각의 양심각에서는 현종과 순조비 순원왕후 조씨가 승하했고, 서행각의 관리각에서는 영조비 정성왕후 서씨가 세상을 떠났다. .
大造殿(ⓇHeoKyun)
○ 樂善齋
낙선재는 창덕궁 동남쪽 방향, 창경궁과 인접한 위치에 있다. 원래 창경궁에 속해 있던 이 전각은 국상(國喪)을 당한 왕후들이 소복(素服)을 입고 은거하던 곳이다. 낙선재 일곽에는 석복헌과 수강재가 자리잡고 있다. 그 뒤편에 조성된 후원에는 취운정(翠雲亭), 한정당(閒靜堂), 상량정(上涼亭) 등의 아름다운 정자가 있다.
낙선재는 대한제국의 쇠락을 함께 했던 황실 여인들의 한 많은 삶의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 황제의 비(妃)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윤씨와 고종 황제의 외동딸 덕혜옹주(德惠翁主), 그리고 영친왕(英親王)과 그의 비 이방자 여사가 비운의 주인공들이다. 13살의 나이로 황태자비에 책봉되어 궁궐에 들어온 순명효황후가 이곳에 은거하다 낙선재 석복헌에서 심장마비로 별세했고, 1963년 일본에서 환국한 영친왕 이은(李垠)도 이곳에서 생애를 마쳤다. 그리고 조선왕조 마지막 며느리이자 영친왕의 비인 이방자 여사도 1989년 4월, 이곳 낙선재에서 89살의 생을 마감했다. 또한 고종이 환갑 나이에 복녕당 양씨로부터 얻은 외동딸 덕혜옹주 역시 일본 왕족과 정략결혼을 하면서 비극적인 삶을 살다가 1989년, 이곳 낙선재와 연결되어 던 수강재(壽康齋)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樂善齋(ⓇHeoKyun)
壽康齋(ⓇHeoKyun)
○ 敦化門
돈화문이 창건된 것은 태종 12년(1412)의 일이지만 지금의 돈화문은 광해군 즉위년(1608)에 창덕궁 복원과 함께 지어진 것이다. 돈화문은 넓은 돌계단이 있는 장대석 기단(基壇) 위에 지어졌다. 돈화문(敦化門)이라는 이름은 ≪中庸≫ 9장에 나오는 ‘대덕돈화(大德敦化)’에서 따온 것이다, ‘대덕돈화’는 “조화가 쉬지 않고 유행하여 만물이 돈독하게 동화(同化)한다.”는 뜻이다. 돈독하게 동화한다는 것은 모든 것이 도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서로 해치지 않는다는 의미다. 정치의 관건은 하늘의 이치에 따라 인심을 바로잡는 것이므로 인륜과 풍속을 돈화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敦化門(ⓇHeoKyun)
○ 錦川橋
금천교(錦川橋)는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과 진선문(進善門) 사이를 흐르는 금천(禁川) 위에 놓인 돌다리다. 태종 11년(1411)에 진선문과 함께 건립된 금천교는 서울에 있는 석교 유적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금천교는 경복궁 영제교, 창경궁 옥천교와 마찬가지로 정전으로 가는 길목에 있으면서 지엄한 내부 공간과 외부의 일상적 공간을 구분 지움과 동시에 두 공간을 연결해 주는 상징적인 다리다.
금천교는 때로 궁중 의례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왕이 거애(擧哀, 상례에서, 죽은 사람의 혼을 부른 후 상주가 머리를 풀고 슬피 울어 초상난 것을 알리는 절차)하는 장소가 되기도 했고, 고종 때에는 낮 12시와 인정(人定)과 파루(罷漏) 때 대포를 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고종 21년(1884) 윤5월 20일). 금천교 아래를 흐르는 물은 창덕궁의 명당수이지만 때로 불을 끄는 데 요긴하게 사용되기도 했다.
錦川橋(ⓇHeoKyun)
○ 誠正閣
희정당 남동쪽에 위치한 성정각은 원래 세자가 공부하는 처소였다. 그런데 순종 시절 창덕궁을 크게 개조․훼철할 때 인정전 서쪽에 있던 내의원이 헐리게 되자 성정각을 용도 변경하여 내의원으로 활용했다. 현재 이곳에서 볼 수 있는 돌절구 등의 유물과 몇 개 현판들은 내의원 당시 흔적들이다.
성정(誠正)은 《대학》의 내용에서 따온 것이다. 즉, 이상적인 정치의 단계를 설명하되,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순으로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성의와 정심을 합한 말이 성정(誠正)이다.
<東闕圖>에는 성정각에 속한 문으로 영현문(迎賢), 견현문(見賢), 친현문(親賢), 인현문(引賢), 방현문(訪賢), 상현문(尙賢) 등이 표시되어 있다. 모두 ‘賢’‘자가 들어 있어 이곳이 왕세자가 공부하는 처소임을 한 눈에 알게 해준다.
誠正閣(ⓇHeoKyun)
○ 璿源殿
선원전은 조선시대 역대 임금의 초상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건물로, 인정전 서쪽에 인접해 있다. 선원전은 고종 때 덕수궁에도 있었고, 경복궁에도 있었다. 선원전은 1695년(숙종 21)에 처음 마련되었는데, 원래 춘휘전(春輝殿)이었던 건물을 조선 효종 7년(1656) 광덕궁의 경화당을 옮겨지어 사용하다가, 숙종 21년(1695)에 선원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곳에는 숙종·영조·정조·순조·익종·헌종의 초상을 모시고 있다. 1921년 후원 서북쪽에 선원전을 새로 지어 왕의 초상을 옮긴 뒤부터 구선원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곳에는 숙종·영조·정조·순조·익종·헌종의 어진(御眞)이 봉안되었었다. 그러나 1921년에 창덕궁 후원 서북쪽에 선원전을 새로 지어 어진을 옮겼다.
선원(璿源)은 왕족의 유구한 계보를 의미한다. 선(璿)은 좋은 옥돌이라는 말로 왕족을 상징하며, 원(源)은 시조로부터 흘러내려온 유래를 뜻한다. 왕은 삭망(朔望)에 선원전에 나와서 친히 분향·배례를 하며 탄신일에는 차례를 드렸다. 선원전에서의 차례는 신도(神道)가 아닌 인도(人道)로서 조상을 모시기 때문에 제기를 사용하지 않고 생전의 상차림으로 치룬다.
璿源殿(ⓇHeoKyun)
○ 新璿源殿
1912년에 신축된 신선원전(新璿源殿)이 있는 곳은 옛 대보단 터로, 대보단은 임진왜란 때 원군을 파병한 중국 명나라 신종을 기리기 위해 세웠던 제단이다. 일제가 이곳에 새 건물을 지은 것은 중국의 영향력과 조선왕실의 상징성을 동시에 제거하려는 의도에서 나왔다고 한다.
신선원전은 화강석 축대 위에 지은 정면 14칸 측면 4칸으로 이익공식 겹처마 팔작 지붕집이다 건물 내부 전체의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되어 있는데, 격간마다 화려한 색채의 봉황 한 쌍이 그려져 있다. 북쪽으로 어진을 모셨던 11칸의 감실(龕室)이 동서로 도열해 있는데, 각 감실마다 아름답고 화려한 장식이 가득하다. 중앙에 있는 혼백의자가 뒤쪽과 좌․우 벽에 걸쳐 오봉산일월도가 그려져 있고, 천장에는 오색구름 사이에서 여의주를 희롱하는 한 쌍의 황룡이 부조되어 있다. 전면 아래쪽에는 황룡이 나무에 부조되어 있다. 기둥과 문설주 사이에는 파련화(波蓮花)가 투각된 낙양강이 장식되어 있다.
선원전 신축 후에 태조에서 고종에 이르는 11분의 왕의 위패를 옮겨와 각 방에 한 분씩 모셨는데, 제1실에 태조, 제2실에 세조, 제3실에 원종, 제4실에 숙종, 제5실에 영조, 제6실에 정조, 제7실에 순조, 제8실에 익종, 제9실에 헌종, 제10실에 철종, 제11실에 고종을 봉안하였다.
新璿源殿(ⓇHeoKyun)
◎ 宮闕 裝飾
창덕궁에서 막중한 상징성을 가진 전각이 인정전이다, 그에 걸맞게 다양한 장식들이 건물 내외에 베풀어져 있다. 그 중 중요한 것이 어좌 뒤편에 설치된 일월오악도(日月五嶽圖), 천장과 월대의 답도에 장식된 봉황, 지붕 추녀마루에 도열해 앉은 잡상(雜像), 그리고 드무다.
○ 日月五嶽圖
일월오악도는 어좌 후면 장식 그림으로, 중국은 물론 동·서양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조선 특유의 장식 그림이다. 해와 달, 다섯 개의 청록색 산봉우리, 두 줄기 폭포, 붉은 소나무, 푸른 물결을 소재로 하고 있는 이 그림은 일월오봉병, 일월오봉도, 오봉도, 오봉병 등으로도 불린다. 이 그림의 상징적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된다. 먼저 ≪시경(詩經)≫ <천보(天保)>시의 내용을 담고 있다는 해석이다.
<천보>시는 왕족과 왕권을 칭송하거나 수복(壽福)을 기원할 때 자주 인용되는데, 세종 때 문신 윤회(尹淮, 1380-1436)가 임금을 우러르며 말하되,
“신하들은 덕에 취해 머리를 조아려 절하면서 천보시를 읊어서 갚으려고 천추(千秋)에 축수하네,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가 서로 만남은 고금에 드문데…….”라고 한 것도 왕을 칭송하고 축수할 때 <천보>시가 인용한 하나의 예이다.
<천보>시에 해·달·높은 산·큰 땅덩이·높은 산등성이·높은 언덕·강물·남산·송백 등 장생(長生)과 영원(永遠)을 상징하는 아홉 가지 자연물이 등장한다. 이 아홉 가지 장생의 상징물을 구여(九如)라 하는데, 이 이미지들이 모두 일월오악도에 등장한다.
또 다른 해석은 도법(道法) 자연의 도상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정치사상의 관점에서 보면 왕은 천명에 응하고 인심을 따르는, 즉 응천순인(應天順人)의 존재다. 황제라는 칭호가 처음 만들어지기 전에는, 군주는 왕 또는 천자(天子)였다. 천자는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하므로 ‘하늘의 아들로서 천명(天命)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하늘에는 일월성신의 광채가 빛나고 땅에는 오악(五嶽)이 굳건하다. 옛 사람들은 천지를 다른 말로 광악(光嶽)이라 불렀다. 일월오악도의 해와 달, 그리고 산은 바로 광악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일월오악도는 천지 상하의 존재 원리를 가시화한 그림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日月五嶽圖(仁政殿)(ⓇHeoKyun)
○ 龍과 鳳凰 裝飾
궁궐 莊嚴의 중심에 있는 것이 용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등널, 曲屛 등 어좌 주변에 장식된 용이다. 고대로부터 한 나라의 왕은 항상 자신의 지위를 용과 나란히 하려 했고, 용의 힘을 빌려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려 했다. 용을 장식물로 적극 활용했던 것은 말하지 않고도 왕의 능력과 권위를 드러낼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창덕궁에는 다른 궁궐에 비해 봉황 장식이 많은 편이다. 그중 인정전 천장 중앙에 장식된 봉황은 막대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용․거북․기린과 함께 사령(四靈) 중의 하나인 봉황은 전거에 따라 그 모습이 다르게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장식으로 나타난 봉황은 일반적으로 오색찬란한 빛깔의 몸과 날개, 볏, 그리고 길고 화려한 꼬리를 가진 새로 묘사된다. 옛 사람들은 봉황을 상서와 지혜의 상징으로 여겼는데, 그것은 봉황이 우주의 이치와 섭리에 은밀히 관여하고 있다는 믿음에 연유한 것이다. 인정전 천장의 봉황은 태평성대가 오리라는 것을 미리 아는 예언자, 혹은 태평성대로 이끄는 안내자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御座의 龍彫刻 (ⓇHeoKyun)
仁政殿 天障의 鳳凰 裝飾(DAUM 사진)
◎ 雜像
지붕 추녀마루에 도열해 앉은 작은 짐승 닮은 물상을 잡상이라 부른다. 건물을 邪鬼로부터 보호하여 상서로움이 충만토록 하는 역할을 한다. 이와 비슷한 잡상을 중국 궁궐 건축에서도 볼 수 있는데, 중국의 경우는 맨 앞에 기봉선인(騎鳳仙人), 그리고 용․봉․사자․해마․천마․산예․압어․해치․두우․행십 순으로 배치돼 있다. 한국의 경우는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의 ≪어우야담(於于野譚)≫이나 ≪상화도(像瓦圖)≫, ≪창덕궁수리도감의궤≫(인조 25년(1637)) 등의 문헌에 잡상의 이름이 소개돼 있다. ≪어우야담≫에서는 大唐師父․孫行子․저팔게․사화상․이귀박․이구룡․마화상․삼살보살․천간갑․나토두라는 이름이 나오고, ≪상와도≫에서는 나토두 없이 위와 같은 잡상 이름이 등장한다. 이들 대부분은 ≪서유기≫에 나오는 인물이나 땅의 신으로서, 모두 살(煞)을 막아주는 능력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창덕궁수리도감의궤≫에서는 손행자매(孫行者妹)․준견(蹲犬)․마룡(瑪龍․산화승(山化僧) 등으로 기록하고 있어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熙政堂 추녀마루의 雜像(ⓇHeoKyun)
仁政殿 雜像(ⓇHeoKyun)
○ 드무[頭無]
화재를 막기 위한 예기(禮器)다. 궁궐과 같은 조건축은 화재에 취약하다. 옛 사람들은 목조 건물의 화재를 막기 위해 여러 가지 묘안을 개발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드무이다. 길상항(吉祥缸), 또는 문해(門海, 문 밖의 큰 바다라는 뜻)라고도 불리는 드무는 주로 궁궐의 정전 또는 왕과 왕비의 침전 주위에 놓아둔다. 평소에 드무에 물을 담아 놓는데, 화산(火山)인 관악산에서 출발한 화마(火魔)가 건물에 접근하다가 드무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면 놀라 물러난다는 속신(俗信)에서 나온 것이다.
仁政殿 드무(ⓇHeoKyun)
○ 李花紋章
문장(紋章)은 국가 또는 특정 단체나 가문 등을 나타내는 상징 표지(標識)다. 한국의 경우는 상하로 결속된 혈연을 중시하기 때문에 문장보다는 족보가 발달하였다, 일본의 경우는 봉건제도가 시작되면서부터 웬만한 집안이면 다 가문(家紋)을 가질 정도로 가문(家紋) 문화가 발달했다. 그 이유는 혈연보다 소속 집단의 정체성과 동질성을 중요시하는 전통 때문이다.
고종 때 국권을 강탈한 일본은 조선조의 선원(璿源) 계보를 '李王家'라 부르면서 하나의 가문(家門)으로 평가절하 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인정전과 인정문 용마루에 새겨진 이화문장(李花紋章)이다. 이화문장은 조선 왕실의 상징 문장이다. 그런데 인정전 용마루의 이화문장은 조선 왕실이 아니라 조선총독부가 새긴 것이다. 굳이 일본이 자기주도하에 이 문장을 새긴 것은 조선왕조가 일본의 수많은 가문 중의 하나로 편입되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인정전 지붕의 오얏꽃 장식에는 소위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외형을 갖추려 했던 당시 일본제국주의자들의 흉계가 숨어 있는 것이다.
仁政殿 용마루의 李花紋章(ⓇHeoKyun)
◎ 昌德宮 後園
종로구 와룡동에 있는 창덕궁 후원은 조선 왕실의 대표적 정원으로서 수목이 우거진 산록과 언덕, 그리고 골짜기 등 자연 그대로의 지형과 수림을 모태로 한 정원이다. 지세에 따라 물이 머물만한 자리에 연못을 파고 숲 사이에 정자나 누각을 지어 그윽하고 은근한 자연의 정취를 느낄 수 있게 꾸몄다. 전(殿)이나 당(堂)의 한적한 뒤뜰에는 단정한 장대석으로 화계(花階)를 쌓아 화목을 심었고, 옥류천 맑은 물을 삼백척(三百尺) 폭포로 탈바꿈시켰다. 후원을 걷다보면 산비둘기 푸드덕 날고, 까치소리 청아하여 깊은 산중에 들어 온 것 같은 정취를 느낄 수 있다.
한국인에게 있어서 자연이란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고 할 때의 자연이다. 한국의 전통 정원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 여러 가지 요소들은 바로 한국인의 정신적 자연주의 사상의 산물이다. 이 점은 이웃 중국이나 일본 정원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스스로 드러난다.
중국이 자랑하는 궁실 정원의 하나인 북경의 이화원을 보면, 그들의 전통적 원림 조성 기술을 최대한 발휘하여 명승지의 경관을 재현해 놓았다. 정원은 산․호수․계곡․동굴․폭포 등 자연을 모방해 조성하고, 누정 등의 건물을 화려하게 장식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시각적 포만감을 만끽할 수 있게 했다. 이것은 정원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궁정취향에 의해 선택되었고, 어떤 목적, 예컨대 궁정을 불로장생하는 신선의 거처로 만드는 데 봉사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일본의 정원은 자연의 축소판을 만드는 쯔끼야마(築山)식과 모래나 자갈 등으로 산, 강, 바다를 표현하는 가레산스이(枯山水)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 오카야마의 고라쿠엔(後樂園)이 전자의 대표적 사례인데, 연못, 폭포 등의 물의 성질을 교묘히 이용한 정원 조성법으로 주목받고 있다. 후자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교토 료안지(龍安寺)의 선(禪) 정원이 있다. 가는 자갈을 깐 장방형의 마당에 일여덟 개의 크고 작은 돌을 배치해 놓은 이 고산수식 정원은 자연에 대한 일본적인 해석과 미학을 잘 드러내고 있다.
당초부터 자연을 모태로 조성된 창덕궁 후원은 울타리 저 넘어 있는 북악산과 인왕산은 물론이요 소나무 가지 사이로 비치는 구천의 달까지도 감상의 범위 안에 넣고 있다. 나무에 전지 가위 한번 대지 않고 제 속성대로 자라게 내버려 두고, 자연 질서를 흩트리는 분수를 버리고 폭포수를 즐겼다. 이처럼 자연 질서를 충실히 따르는 한국의 정원은 가장 자연적이고 가장 잘 정돈된 정원이라 할 수 있다.
○ 芙蓉池 區域
물색이 푸른 들판처럼 유유한 부용지에는 중앙에 소나무가 아름다운 원도圓島가 조성돼 있고 연못가 한쪽에는 아자亞字 평면의 부용정이 자리 잡고 있다. 지금은 연꽃을 찾을 길 없지만 옛날에는 연꽃 향기가 연못에 가득했다. 이 아름답고 환상적인 부용지 일대는 옛 임금과 신하들이 풍류놀이를 즐기던 곳이었다.
芙蓉亭(ⓇHeoKyun)
暎花堂(ⓇHeoKyun)
宙合樓(ⓇHeoKyun)
기록에 의하면 왕이 부용정 난간에 기대 앉아 낚시를 즐길 때, 여러 신하들도 연못가에 둘러 앉아 낚싯대로 물고기를 낚아 통에 넣었다가는 모두 놓아주기도 했다. 왕은 비단 돛이 달린 배를 연못에 띄우게 하고 신하들과 어울려 시를 지었는데, 정해진 시간 안에 시를 지어 올리지 못한 이는 연못 가운데 있는 섬에 귀양 보냈다가 풀어주는 낭만적인 풍류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꽃구경과 낚시 놀이가 끝난 후에는 왕이 술잔을 돌리며 먼저 시 한 편을 짓고,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그의 시에 화답토록 했다.
부용지 건너편 높은 언덕에 위의 날아오를 듯 한 모습의 건물이 주합루宙合樓이고, 주합루축대 왼쪽에 자리 한 건물이 영화당暎花堂이다. 주합루는 정조 즉위 해인 1776년에 지은 규장각 상층 누각 이름이지만 지금은 건물 전체를 주합루라 부르고 있다. 규장각은 당초 어제, 어필, 어진, 인장, 그리고 신간 서책을 보관하는 장소로 사용됐으나 차츰 학술 및 정책 연구기관으로 발전했다. 주합루 발아래 보이는 작은 일각문이 어수문魚水門인데. 좌우의 작은 두 문과 함께 삼문三門 형식을 갖추었다.
과거에는 영화당 일대와 근처의 춘당대에서 왕이 직접 참석하는 각종 행사가 벌어졌다. 왕이 영화당에 임한 가운데 전시殿試:왕이 보는 자리에서 보는 과거시험)가 치러졌고, 왕자 왕손 등 왕족과 신하들이 꽃놀이 행사가 이곳에서 벌어졌다. 가뭄이 심할 때는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한다.
○ 愛蓮池와 愛連亭 區域
부용지를 뒤로하고 숲길을 따라 걸어가다 보면 왼쪽으로 애련지가 나타난다, 말 그대로 ‘연꽃을 감상하며 즐기는 연못’인 애련지에는 지금 연꽃은 없고 군데군데에 떠다니는 수련만 눈에 띌 뿐이다. 산기슭 쪽 연못가에 공예품처럼 아담하고 아름다운 정자가 보이는데, 이름이 애련정이다. 인공물이 분명하지만 이미 자연과 동화된 모습이다. 숙종이 지은 <애련정기>에서는 애련정이 연못 한 가운데에 세워져 있는 것으로 묘사돼 있으나 지금 애련정은 물가에 자리 잡고 있다. 후세에 변화가 있었던 모양이다.
애련정 네 기둥마다에는 백색 바탕에 청색 글씨로 된 주련이 두 폭씩 걸려 있다. 정자 이름에 걸맞게 연꽃을 미화하고 칭송하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연잎에 구르는 빗방울을 진주에, 붉은 연꽃을 곱게 화장한 여자의 뺨에 비유했고. 연꽃을 부처가 앉는 여래좌로, 연잎을 도교의 신선이 타는 배로 묘사했다.
愛蓮池, 愛蓮亭(ⓇHeoKyun)
○ 演慶堂 區域
애련지를 지나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3면이 숲으로 싸인 안온한 터에 남향한 연경당(演慶堂)이 나온다. 뒷산 골짜기에서 흘러든 명당수가 대문 앞 석교 아래를 지나 애련지를 향해 흘러가다 잠시 머문 곳에 있는 네모난 연못이 조성돼 있다. 집 왼쪽으로는 취규정, 옥류천 가는 산길이 저만치 이어지다가 모퉁이를 돌아 숲속으로 사라진다. 군림하지 않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는 심성이 그대로 반영된 양반가의 모습이다. 선향재 뒤쪽 화계 위에 아담한 정자가 서있는데, 일러 농수정(濃繡亭)이다. ‘濃繡(농수)’는 ‘짙은 빛을 수놓는다.’는 뜻으로 녹음 짙은 주변 풍광을 묘사한 이름이다. 사대부들은 집에서 잠자고 생활하면서도 주변의 자연 경관 즐기기 위해 차경(借景, 경치를 빌려 옴)하기 좋은 곳에 정자를 짓고 생활하기를 사랑방 같이 했다. 농수정이 바로 그런 정자다.
演慶堂 사랑채(ⓇHeoKyun)
演慶堂 안채(ⓇHeoKyun)
○ 觀纜亭, 尊德亭 區域
연경당을 나와 애련지 뒤쪽 산모퉁이를 돌아가다 보면 또 하나의 연못을 만나게 된다. 언제인가부터 반도지라 불리고 있는데, 그 모양이 한반도를 닮아서다. 반도지 물에 두 기둥을 담그고 서있는 부채꼴 정자가 관람정(觀纜亭)이다. ‘관람’은 닻줄을 바라본다는 의미로, 뱃놀이를 구경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반도지 위쪽에 보이는 것이 존덕정(尊德亭)이다. 정조 때 꽃피는 봄이 오면 왕이 신하와 그 가족들을 초청하여 춘당대에서 활 쏘고, 부용지에서 낚시를 즐기게 했는데, 그 때 이곳 존덕정에서는 꽃구경 행사가 벌어졌다고 하니(정조의 『홍재전서』) 당시 이 부근에도 꽃이 많았던 모양이다.
觀纜亭과 半島池(ⓇHeoKyun)
尊德亭(ⓇHeoKyun)
○ 玉流川 區域
옥류천 구역의 중심 경관을 이루고 있는 것이 위이암(逶迤巖)이라는 바위다. 이 바위 표면에 인조가 쓴 ‘玉流川(옥류천)’ 글씨와 다음과 같은 오언 시구가 새겨져 있다.
飛流三百尺 날아 흐르는 물은 삼백척이요
遙落九天來 아득히 떨어지는 물은 구천에서 내린다.
看時白虹起 볼 때는 흰 무지개가 일고
翻成萬壑雷 기운찬 소리는 온 골짜기에 천둥 번개를 이룬다
‘위이암 앞쪽 넓고 평평한 암반에 활모양의 물길이 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옛날 이곳에서 벌어졌던 곡수曲水놀이 흔적이다. 곡수놀이는 옛 문인들이 굽이쳐 흐르는 물가에 둘러앉아 물길을 따라 떠오는 술잔이 자기 앞에 닿기 전에 시 한 수를 읊는 풍류놀이의 하나다. 근처 숲에서 흘러나온 맑고 찬 물이 이 물길을 따라 한 바퀴 돌다가 폭포가 되어 떨어지는데, 맑은 물소리가 지금도 심신을 상쾌하게 한다.
옥류천 구역의 정자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자가 소요정(逍遙亭)이다. ‘소요’는 어떠한 구속도 받지 않고 절대적 자유를 누리는 경지를 말한다. 옥류천 상류 쪽에 보이는 초가지붕 정자가 청의정(淸漪亭)이다. ‘청의’란 ‘맑은 물이 일렁이는 모습’이라는 뜻으로 바로 옆을 흐르는 옥류천 물길과 무관하지 않다. 옥류천을 거니는 왕과 신하들의 마음자리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이들 정자가 말해주고 있다.
逶迤巖(ⓇHeoKyun)
逍遙亭(ⓇHeoKyun)
淸漪亭 (ⓇHeoKy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