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0. 24.
단풍잎이 발치 앞에 떨어진다. 고개를 들면 단풍의 붉은 빛이 눈으로 풍덩 뛰어드는 것 같다. 여름이 제아무리 극성을 부려도 가을은 온다. 하지를 지나면서 점점 줄어든 낮의 길이는 9월 하순 추분을 거치면서 하루 12시간 아래로 줄어든다. 봄의 꽃소식은 북상하지만 가을의 단풍 소식은 남하한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우리는 꽃을 피우고 낙엽을 떨구는 식물의 행동이 빛과 관련이 있으리라 추측한다. 사계절이 뚜렷한 북반구 온대지방에 사는 덕택에 우리는 내장산의 붉은 단풍을 보며 ‘상엽(霜葉)이 이월 꽃보다 붉다’는 경탄 섞인 호들갑을 떨지만 푸른 잎을 단 채 겨울을 나는 동백이나 사철나무가 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상록수는 아예 잎을 떨어뜨리지 않는 것일까? 아니다. 우리는 경험으로 동백잎이 지고 상록침엽수가 솔가리를 수북이 떨군다는 사실을 안다. 정확히 말하면 상록수는 잎의 수명이 상대적으로 긴 식물을 일컫는 말이다. 식물학자들은 상록수 잎의 수명은 1년에서 4년 정도지만 40년이 넘는 나무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낙엽수는 매년 가을이 깊어 가면 잎을 떨어뜨리고 봄이 오면 한꺼번에 푸른 성세를 회복해 우리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한다.
온대지방에 가을이 오면 낙엽수는 딜레마에 빠진다. 아직 낮의 햇볕은 광합성을 시도하기에 충분하지만 밤에 맞닥뜨리는 낮은 온도가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주변 온도가 낮아짐에 따라 광합성 산물인 탄수화물과 영양소를 운반하는 체관의 구조가 변하면서 전체적으로 운반 효율이 떨어진다. 그에 따라 잎에서는 여름내 왕성하던 광합성 공장의 생산성이 줄어들고 식물의 세포들은 엽록소를 분해하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내년 봄에 싹틔울 이파리들이 사용할 모든 물질을 회수하여 보관하여야 한다. 잎이 넓은 활엽수들과는 달리 바늘처럼 촘촘한 잎을 가진 침엽수들은 겨울에도 여건이 허락하면 광합성을 시도한다. 그러나 땅속의 물이 얼어 있다면 엽록소를 푸르게 유지하는 일은 도로아미타불이 될 것이다. 겨울일지라도 소나무 둥치에는 물이 얼지 않은 채로 보관되어 있어야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낙엽수들은 어떨까? 낙엽수들도 겨울에 물을 얼지 않게 저장할 나름의 묘책이 있는 것 같다. 늦겨울부터 이른 봄까지 채취한다는 메이플 시럽이나 뼈에 좋다는 고로쇠(骨利樹) 수액이 바로 그 예이다. 식물의 부동액으로는 설탕이 대표적이다. 30~40살 먹은 메이플 나무 한 그루에서 채취한 하루 10ℓ 이상의 수액을 뭉근한 불로 고면 우리 조청처럼 그야말로 설탕 덩어리가 된다. 공교롭게도 메이플이나 고로쇠는 단풍나무과에 속한다. 그렇다면 당이 풍부한 단풍나무는 어떻게 그렇게 붉은 자태를 뽐낼 수 있게 되었을까?
엽록소가 활발하게 광합성을 수행할 때 이파리는 초록색이다. 눈에 보이는 가시광선 중에서 초록색 파장의 빛을 반사하기 때문에 나뭇잎은 온통 푸르다. 따라서 광합성에 사용되는 색소는 적색이나 청색 파장의 빛을 흡수하리라 추측할 수 있다. 가을이 되어 빛의 양이 줄고 밤의 온도가 내려가면 나무는 광합성 생산 기지를 서서히 닫기 시작한다. 잎자루 끝에 코르크 떨켜가 생기면 잎에서 만든 탄수화물이 줄기로 이동하지 못하고 반대로 물과 무기 염류가 잎으로 도달하지 못하게 된다. 할 일이 줄어든 엽록소가 분해되기 시작하면 그동안 녹색에 가려졌던 나무 안의 색소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은행잎의 노란빛은 크산토필이라는 물질의 색이다. 광합성에 참여하던 카로텐도 주황색 색상을 뽐낸다. 이렇게 색상의 변화는 서서히 진행된다.
하지만 짧아진 낮의 길이에 반응하는 생체시계를 작동하면서 붉은빛을 띠는 안토시아닌을 적극적으로 만들어내는 식물도 있다. 단풍이나 떡갈나무가 그런 나무들이다. 안토시아닌은 포도당의 분해산물을 빌딩 블록 삼아 만들어진다. 가을날 낮에 만들어졌지만 아직 잎에 남아 있는 탄수화물이 안토시아닌의 재료라는 뜻이다. 사실 단풍에서만 안토시아닌이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꽃이나 식물의 어린줄기에서도 붉은 안토시아닌 색소가 발견된다. 이파리가 넓은 여름날 수국 꽃의 색깔을 결정하는 것도 안토시아닌 색소이다. 하지만 수국 꽃은 항상 붉지는 않다. 액포에 녹아있는 안토시아닌의 색이 물의 산성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산성이면 푸른색이고 중성이나 염기성이면 붉거나 보랏빛 색조를 띤다. 수국이 자리 잡은 토양의 산성도가 꽃 색깔을 결정하는 것이다.
한편 안토시아닌의 역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설이 있다. 가을날 효율이 떨어진 광합성에 어설프게 가담하는 엽록소가 만드는 활성 산소로부터 세포를 보호하기 위해 안토시아닌이 만들어지는 게 아니냐는 가설을 주장하는 식물 생리학자들도 많다. 어떤 과학자들은 식물이 진드기와 같은 초식 곤충을 기피하기 위해 안토시아닌 합성 메커니즘을 발전시켰다고도 말한다. 안토시아닌의 합성은 낮의 길이에 좌우된다. 밤의 기온이 서서히 내려가지만 아직 얼지는 않고 건조한 북반구 온대지방의 단풍이 각별히 수려하다. 식물이건 동물이건 낮의 길이를 감지하는 일은 생명체의 생존에 지극히 중요하다. 낮의 길이가 줄어들면서 온도가 내려갈 때 동면을 준비하는 다람쥐나 북극곰의 전략은 낙엽수의 그것과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빛이 어둠에 비치되’ 생체시계가 이를 깨닫지 못하면 동물과 식물은 물론이고 세균조차도 살기가 힘들어진다. 밤에는 잠을 충분히 자되 먹지 말라는 게 그 생체시계가 전하는 메시지다. 가을이 깊어간다.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