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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시조 감상
「단풍」- 김영재
단풍도 처음에는 연초록 잎새였다
너와 나 사랑으로 뒹굴고 엉클어질 무렵
목이 타 붉게 자지러져 숨이, 탁 끊긴다
「석류」- 양승준
대체 누가 내 가슴에다
그리움의 비수를 꽂는가
어느 누가 내 목에다
사랑의 못을 박는가
마침내 터져 나오는
그 황홀한 비명, 석류
「먹감나무」-박구하
백 년을 살다 죽은 감나무 속을 보면
나이테 한복판에 먹물이 배어있다
어머니 타버린 속이 고스란히 들었다
「파도」-서일옥
그대를 보냅니다 등 떠밀어 보냅니다
명치끝에 아려오는 절절한 그리움을
다 덮고 혀를 깨물며 그대를 보냅니다.
「홍매」-김향진
봄날이면 다시 한번 연지를 찍고 싶다
함덕 시장 근처에 유물 같은 돌담집
4․ 3 때 그 집에서는 쉬쉬하는 곡절 있다
그렇게 반세기를 보냈으면 그만이지
혼사 한 지 며칠 만에 누가 산으로 갔는지
별안간 붉은 꽃대를 저리 훤히 올렸나
「겨울 사랑」-문정희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새벽달」-김일연
만리 밖에 바람 보내고 서러운 건 보내고
내 뜨락 빈 가지에 금지환을 끼우며
녹슨 문 열어 달라고 들어가고 싶다고
「바람」-문무학
내 어느 날 그대 향한 바람이고 싶어라
울 넘어 물 넘어 뫼라도 불러 넘어
그 가슴 들이받고는 뼈 부러질 그런 바람
「사랑」-윤현자
활화산 단풍 숲에 남모르게 덫을 놓아
너와 나 생살 찢겨 붉디붉게 물든다 해도
마지막 눈매 그윽한 한쌍 사슴이고 싶어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 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한 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기로운 흙 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가을 편지」-박영식
퍼담아도 넘쳐나는 벌레 우는 물빛 가을
차운 돌계단을 서성이던 잎새는
골똘히 웅크려 앉아 가을 편지 쓰고 있다
「별」-홍진기
아내의 이마에서 흐르는 땀 속에는
열 손가락 백금 반지 다이아보다 눈부신
우리가 가꾸며 사는 황금빛 별 하나가 있다
「시암의 봄」-정완영
내가 사는 초초 시암은 감나무가 일곱 그루
글썽글썽 여린 속잎이 청이 속눈물이라면
햇살은 공양미 삼백석 지천으로 쏟아진다
옷고름 풀어놓은 강물 열두 대문 열고 선 산
세월은 뺑덕어미라 날 속이고 달아나고
심봉사 지팡이 더듬듯 더듬더듬 봄이 온다
「속삭임」-백이운
매화가지 몸을 굽혀 무슨 말을 할 듯 말 듯…
정적의 한 순간 한 꽃잎 떨어져
찻잔에 파문도 없이 신의 길이 열린다
「왕개구리」- 허일
풍덩! 나는 천둥벌거숭이 천하장사다
봤지 하늘 박살 나고 구름 쫙 흩어지는 거
저 뱀도 잔뜩 겁먹고 설설 기잖아 에헴!
「숙명」 -권혁모
사랑아 너도 한 때 미쳐 불타지 않았니
비 내리는 포도에서 짓밟히고 마는가
헤매다 어쩔 수 없어 낙엽으로 누웠다.
「물음표」-이승은
문빗장도 풀지 않고 지레 길을 나서더니
눈과 귀 다 놓치고 껍데기로 돌아왔네
이렇게 놓인 돌 하나 알 수 없는 그 행방
「눈」- 조운
빰에는 이슬이오 가지에는 꽃이로다
곱게 쌓여 노니 미인의 살결 일다
비단이 밟히는 양하여 소리조차 희고나
「가을 소나타」-박영식
풀여치 가을 속을 포로 록 뛰어든다
달빛 밤 정으로 쪼아 축대 허무는 귀뚜리
바람은 고운 잎새를 따 빗소리를 뿌린다
「낮에 나온 반달」 윤석중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반달은
해님이 쓰다 버린 쪽박인가요
꼬부랑 할머니가 물 길러 갈 때
치마끈에 딸랑딸랑 채워 줬으면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반달은
해님이 신다 버린 신짝인가요
우리 아기 아장아장 걸음 배울 때
한 짝 발에 딸각딸각 신겨 줬으면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반달은
해님이 빗다 버린 면빗인가요
우리 누나 방아 찧고 아픈 팔 쉴 때
흩은 머리 곱게 곱게 빗겨 줬으면
「처서 무렵」 - 서숙희
풀벌레 울음소리 옥양목 가위질 같다
차가운 별빛은 물에 씻어 박은 듯
잊고 산 세상일들이 오린 듯이 또렷하다
「채석 강단애」 김옥중
종장이 압권이다.
바위에 새긴 고전 층층이 쌓였구나
한 권쯤 슬쩍 뽑아 달빛에 읽어 보면
구운몽 팔선녀들이 까르르 나오실까.
「가을」 -최승자
세월만 가라, 가라, 그랬죠.
그런데 세월이 내게로 왔습디다.
내 문간에 낙엽 한 잎 떨어뜨립디다. 가을입디다.
그리고 일진광풍처럼 몰아칩디다.
오래 사모했던 그대 이름
오늘 내 문간에 기어이 휘몰아칩디다.
「환」-한분순
내 아픔 여울진 골에 그는 연기로 피고
팔을 벌리면 잡힐 듯 가깝다가도
잡으면 저만치 물러서는 늘 타오르는 모습
「묵서재 일기 」- 신웅순
그리움은 언제부터 산이 되어 서 있고
외로움은 언제부터 강이 되어 흐르는가
쪽배로 갈아탄 흰구름 천축국 하룻밤 여관
「독작」-박시교
상처 없는 영혼이 세상 어디 있으랴
사람이 그리운 날 아, 미치게 그리운 날
네 생각 더 짙어지라고 혼자서 술 마신다
「설야(雪夜」- 김광균
어느 먼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 가며
서글픈 옛 자췬 양 흰 눈이 나려
하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나리면
먼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느뇨.
한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홀로 차단한 의상(衣裳)을 하고
흰 눈은 나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루에 고이 서리다.
「저 매화」-홍진기
노숙에 길들여진 저 자유의 빈 손짓
사는 일 짐이 된다며 소식조차 끊고 사는
누이의 모진 가슴에도 된바람이 치겠구나
양지에 손을 내미는 민들레 속잎에서
때로는 봄소식을 앞질러 듣지마는
밤새워 울던 문풍지 저 떨리는 매화가지
「산빛」-김현의
산빛은 수심을 재지 않고 강물에 내려앉는다
강물은 천년을 흘러도 산빛을 지우지 못한다
일테면 널 잊는 일이 그럴까, 지워지지 않는다
「사람을 찾습니다」-홍윤숙
사람을 찾습니다
나이는 스무 살 키는 중키
아직 태어난 그대로의
분홍빛 무릎과 사슴의 눈
둥근 가슴 한 아름 진달래빛 사랑
해 한 소쿠리 머리에 이고
어느 날 말없이 집을 나갔습니다
그리고 삼십 년 안갯속에 묘연
누구 보신 적 없습니까
이런 철부지 어쩌면 지금쯤 빈 소쿠리에
백발과 회한이고 낯선 거리 어스름 장터께를
해마다 지쳐 잠들었을지라도
연락 바랍니다 다음 주소로
사서함 추억 국 미아보호소
현상금은 남은 생애 전부를 걸겠습니다.
「붓 먼저 감잎처럼 물이 들어」 -서벌
물렁해 지기 위해 감들은 익고 있나
감밭에 언듯 실린 가을을 다는 가지.
특유한 저 손저울들 출렁이며 눈금 잰다
왁자턴 여름 벌레 무엇 그리 울다 갔나.
바위는 모래톱 쪽 실금 내며 가고 있네.
오늘은, 사진으로 미리 찍힌 서호(西湖)도 질 잎새다.
「징 」-박영교
삼천리 그 몇 천리를 세월 그 몇 굽이를 돌아
갈고 서린 한을 풀어 가을 하늘을 돌고 있네
수수한 울음 하나로 한평생을 돌고 있네
「맨드라미, 불 지피다」-김정희
섬돌에 묻어 둔 불씨 빠지직 불 지피다
언 가슴 녹인 불꽃으로 피어난 맨드라미 꽃
오지랖 데인 흔적을 주홍글씨 새기며.
몇 번을 까무러쳐도 끊어 오르는 더운 피
내림굿 손대 잡고 날고 싶은 나비의 꿈은
선무당 신들린 춤사위 바라춤을 추느니
귀뚜리 밤을 울어 풀잎도 잠 못 든 새벽
혼을 실은 낮달은 빈 하늘에 떠돌고
아 여기 불타는 집 한 채 지상에 머물고 있다
「3월에」-이영필
가슴 풀린 대지 위로 벚꽃이 톡톡 튄다
맑은 날 킥킥대는 꼬마 새싹 재롱 보며
뾰족한 연필 끝으로 세상 모서 릴 찔러본다
사춘기 나뭇가지 여드름이 송송 돋고
뻐꾸기 음성에도 변성기 소리가 난다
화냥끼 대지는 지금 신열을 앓고 또 앓고
선생님 호명 따라 차례차례 앉은 3월
산수유, 개나리꽃, 백목련, 진달래꽃
길길이 때때옷 입고 입학식이 한창이다
「임진강 뻐꾸기․2」-김춘랑
어쩌면 닿을 법한 멀고 먼 소식 하나
기다린 긴긴 날들 이끼 돋아 푸르도록
날마다 나 여기 와서 강물처럼 울고 있다
열릴 듯 열리쟎는 트일 듯 트이쟎는
쇠사슬 녹슨 사슬 절로 삭아 끊어지렴
사무친 말씀 하나로 흘러가는 물이어라
「내 사랑은」-신웅순
누군가를 사랑하면 일생 섬이 된다
유난히 파도가 많고 유난히 바람이 많은 섬
그래서 가슴에는 평생 등불이 걸려있다
‘그믐달’ -정수자
없는 이름 부르며 한 생 저어 가듯
어둠 끌어안고 살 지피는 밑불처럼
캄캄한 눈썹 하나로 산을 넘는 밤이 있다
없는 길을 찾아서 한 생 헤처 가듯
어둠으로 기르는 생금 같은 눈썹 들고
높다란 고독 하나로 밤을 넘는 밤이 있다
「아내의 노을」-정완영
산에서 살자 하니 그도 닮는 걸까
오늘은 약수터에 물 길러서 간 아내가
흡사 그 원추리 꽃 같은 산 노을을 입고 왔다.
「사랑은」-신웅순
불빛은 무얼 하는지 밤새 켜져 있고
바람은 무얼 하는지 밤새 창을 흔든다
어둠은 무얼 하는지 밤새 문을 기웃거린다
「행화촌」- 김상훈
봄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나면 행화촌엔 살구꽃이 핀다.
살구꽃 피는 마을 피는 꽃이 저리 곱다
피는 꽃 그 아래로 지는 꽃도 어여쁘다
목숨도 오가는 날이 저리 꽃길이고 저
「봄 아이들」- 김경자
외줄기 받침대로 버티는 다릿목에서
잠겨도 젖지 않는 연둣빛 꿈을 품고
개나리 제목을 놓고 글짓기하는 여울
「매화꽃, 떨어져서」 -이종문
다 저문 강마을에 매화꽃, 떨어진다.
그 꽃을 받들기 위해 이 강물이 달려가고
다음 질, 꽃 다칠세라 저 강물이 달려오고…
「아침」-진복희
생선 아줌마가 날마다 이고 오는 아침 바다
‘오징어, 갈치, 고등어 가자미도 왔습니다’
찌든 골목길을 말끔히 씻어주는 파도소리
「매미」-김양수
숨죽여 살금살금 나무에 다가가서
한 손을 쭈욱 뻗어 잽싸게 덮쳤는데
손안에 남아 있는 건 매암 매암 울음뿐
「주사 맞던 날」-서재환
예방 주사 놓으려고 의사 선생님이 들어오시자
왁자한 교실 안이 금세 꽁꽁 얼어붙고
차례를 기다리는 가슴이 콩닥콩닥 방아 찧는다.
뾰족한 바늘 끝이 반짝하고 빛날 때면
다른 아이 비명 소리에 내 팔뚝이 더 아프고
주사를 맞기도 전에 유리창엔 내 눈물이……
「생이 향기롭다」-정수자
한 송이 사과꽃이 순수히 명을 받은 뒤
피로 빚은 시간을 지상에 막 놓고 간 저녁
잘 익은 죽음으로 향하는 생이 온통 향기롭다.
「가을 하늘」-조규영
가을 하늘은 독수리도 탐이 나서
먼 산 위에서 뱅 뱅 맴을 돌며
며칠째 파란 하늘을 도려낸다 자꾸만
「지게 작대기」-이정환
세상을 가리키기에 너만 한 것 있으랴
세상을 떠 받히기도 너만 한 것 있으랴
세상을 두드리기에 너만 한 것 있으랴
‘그래 그랬으면’ -나순옥
어지러운 마음속에 신호등 하나 있었으면
머물고 떠나감이 꼭 그 좋은 때 되어
들끊는 무분별함을 잡아줄 수 있다면
어두운 마음속에 촛불 하나 있었으면
몸 다뤄 밝혀주는 미더움에 뜨거워져
절망의 빗장을 푸는 그런 빛이 있었으면
-서숙희의 「감포에서」
깎아지른 듯 돌아앉은 절벽의 등 뒤에서
무릎뼈 하얗게 꺾으며 애원하는 파도
사랑을 얻는 일이 저랬던가 내 젊음의 자욱한 자해
「빈 잔」-신웅순
제일 외로운 곳에 놓여 있는 빈 잔
그 바람 소리 듣는 이 아무도 없는 빈 잔
달빛이 가져가 제 눈물도 담을 수 없는 빈 잔
「눈 내리는」-조동화
달과 별이 숨었어도 스스로 차는 밝음
나무들 하나같이 뿔 고운 순록이 되어
한잠 든 마을을 끌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감」-정완영
눈물로도 사랑으로도 다 못 달랠 회향의 길목
산과 들 적시며 오는 핏빛 노을 다 마시고
돌담 위 시월 상천을 등불로나 밝힌 거다
「설일雪日)」- 이승은
수런대는 소문 마냥 먼데 눈발은 치고
애굽어 아스라이 철길을 비켜가듯
욕망도 희망도 없이 또 그렇게 저무는 하루
그 하루를 다 못 채우고 그예 누가 떠나는지
낮게 엎드린 채 확, 번지는 진눈깨비
더불어 살 비비던 것 먼 길 끝에 남아있다.
저물 무렵 한때를 떠도는 영혼처럼
덜 마른 건초더미 어설픈 약속처럼
찢어진 백지 한 장이 가슴속으로 날아든다
「섬」-홍성란
멍든 살을 깎아 모래를 나르는 파도
천 갈래 바닷길이여, 만 갈래 하늘길이여
옷자락 다 해지도록 누가 너를 붙드는가
「둑방길」-유재영
어린 염소 등 가려운 여우비도 지났다.
목이 긴 메아리가 자맥질을 하는 곳
마알간 꽃대궁들이 물빛으로 흔들리고.
부리 긴 물총새가 느낌표로 물고 가는
피라미 은빛 비린내 문득 번진 둑방길
어머니 마른 손 같은 조팝꽃이 한창이다.
「포신 끝에 앉아 있는 고추잠자리」-장순하
유신 헌법이 공포된 날 궁정동을 지났습니다
집채만 한 중 탱크 아름드리 포신 끝에
한 마리 고추잠자리 앉아 쉬고 있어요
「그 다섯째․어느 정박 고아의 눈」-장순하
내일이면 미국으로 입양 간다는 여섯 살짜리 정박 고아 소녀,
낯가림도 없이 내 가슴에 안겨 와서,
성모 마리아 같은 눈으로 내 눈을 들여다보며
머리와 얼굴 여기저기를 골고루 어루만진다.
그 눈은 ‘이 가엾은 것을, 이 가엾은 것을’을 되뇌고 있었다.
「도둑」 - 장순하
아무리 뒤져봐도 훔쳐갈 것 하나 없어
에이 재수 없다 침 택 뱉고 나가는데
여보게 도둑이 드니 문 꼭 닫고 나가소
「대장 위에 소장」 -장순하
국군 보안 사령관 그 서슬 시퍼런 자리
중장에서 소장으로 계급 격하한다 한다
대장의 위에 있는 게 바로 소장 아니던가
「달과 까마귀」-이지엽
한 놈은 머릴 처박고 달 속에서 웁니다
그걸 보는 다른 놈의 눈빛 아름답고 불안해요
세 가닥 굵은 전선이 나를 마구 휘감네요
눈빛 총총 달을 띄운 지금은 위험한 밤
불을 켜지 마세요 그냥 그대로 좋아요
저 봐요 튀어나온 눈알 푸르도록 슬프네요
「난」- 이용상
나보다 난 한쪽 먼저 눈을 떴습니다.
학처럼 깃을 펴고 화분에 앉았습니다.
이 세상 잠시 떠날 듯 그렇게 피었습니다.
「귀뚜라미」-백이운
지상엔 마지막 가을이 목발을 짚고 갔네
허리가 휘이도록 하얀 밤을 걸어갔어도
살아서 그리움보다 더 먼 것은 없었네
「바다」-김문억
까마귀 깊은 울음이 보리밭을 지나던 겨울
시렁에 매어 놓은 메주 한 줌 떼어먹던 날
몇 번씩 몇 번씩 바늘귀만 헛지르던 어머니
막소금 단지 속에 굴비 한 마리 숨겨두고
윤 팔월 그믐 가도록 기다렸던 우리 누야는
어머니 깊은 얼굴을 갈매기로 날아갔다.
「 동백, 지다」-신양란
부서지진 않으리 깨어지진 않으리
고스란히 참수되어 선혈을 땅에 뿌릴 지라도
가벼이 난분분 난분분 흩날리지 않으리
「인생」- 이은상의
차창을 돌아볼 때 산도 나도 다 가더니
내려서 둘러보니 산은 없고 나만 왔네
다 두고 저만 가나니 인생인가 하노라
「고향은 없고」-백수 정완영
고향에 내려가니 고향은 거기 없고
고향에서 돌아오니 고향은 거기 있고
흑염소 울음소리만 내가 몰고 왔네요
「첫눈」- 장순하
산으로 난 오솔길 간밤에 내린 첫눈
노루도 밟지 않은 새로 펼친 화선지
붓 한 점 댈 곳 없어라 가슴속의 네 모습
그리움이 내 마음을 어루만지며 밥 먹습니다
외로움이 내 마음을 쓰다듬으며 잠듭니다
평생을 그리움 외로움 나 셋이 살아갑니다
「담쟁이」
삶은, 가파른 벽을 온몸으로 오르는 것
무성한 잎을 드리워 속내를 숨기는 것
비워도 돋는 슬픔은 벽화로 그려낼 뿐
「초승달」-김강호
그리움 문턱쯤에 고개를 내밀고서
뒤척이는 나를 보자 흠칫 놀라 돌아서네
눈물을 다 쏟아내고 눈썹만 남은 내 사랑
「아기 미라」 김영재
실크로드 박물관에 강보에 싸인 아기 미라
유리관에 누운 모습 요람인 듯 평온하다
엄마는 비단길 가셨나 혼자서 잠들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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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매화 그늘 아래에서」 김옥중
그 누가 나를 보고 꽃 한 폭을 치시라면
선지보다 더 하얀 바람 한 필 끊어다가
저 핏빛 내 가슴을 적시는 당신만을 치리라.
「아내의 화원」- 김원각
베란다 전체를 화초로 다 채우고
일 년 내 물 대주면 보살피느라 바쁜 아내
가꾸기 제일 힘든 나무가 남편이라며 웃는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 박시교
그리운 이름 하나 가슴에 묻고 산다
지워도 돋는 풀꽃 아련한 향기 같은
그 이름 눈물을 훔치면서 뇌어 본다 어-머-니
「파도」- 서일옥
그대를 보냅니다 등 떠밀어 보냅니다
명치끝에 아려오는 절절한 그리움을
다 덮고 혀를 깨물며 그대를 보냅니다
「햇빛 좋은 날 」- 유재영
생각마저 갈색뿐인 햇빛 차암 좋은 날
등 마알간 바람이 길을 가다 멈춘 곳
마가 목고, 가지 끝에 초롱 닮은 알집 하나!
「남도창」- 이상범
소리를 짊어지고 누가 영을 넘는가
이쯤 해 혼을 축일 주막집도 있을 법한데
목이 쉰 눈보라 소리에 산 같은 한을 옮긴다.
「달맞이꽃」
작은 웃음 보이며, 맑게 맑게 반짝이며
노을 속에 서 있는 산 개울가의 너는
장님이 데리고 가던 어느 딸애의 살결 같은 꽃
「슬픈 편대」
허공을 찢으며 우는 기러기떼 발톱이여
멀건 국물에 뜬 노숙의 눈발들이여
한평생 오금이 저릴 저 강변의 아파트여
「소풍」- 홍성란
여기서 저만치가 인생이다 저만치,
비탈 아래 가는 버스 멀리 환한 복사꽃
꽃 두고 아무렇지 않게 곁에 자는 봉분 하나
「죽 」-장지성
이만큼 뻗었으면 한껏 자란 것을
나이테 팽개치고 세속 또한 물리치고
마음을 비워온 것이 영생하는 길이려니
바람이 불어오면 상념 끝을 쓸어내고
한 삭신 풍상 속에 마디마디 빈 공간
꺾이는 아픔이어야 이 시절을 노래하지
오로지 올려다보는 것이 하늘, 하늘임을
누대의 변혁을 신화처럼 잠재우고
초승달 괴괴한 밤엔 죽창으로 서 있는가
「신전의 가을」 -이상범
하늘이 만판 내려와 빛을 빚는 가을걷이
무슨 영을 받드는지 햇살은 눈을 굴리고
불 쓰는 제단의 손을 힐끔힐끔 돌아봤다
물소리 가슴을 흘러 고요가 눈을 뜨면
법의 자락에 끌려 빠지지 타는 생각
신전이 잠시 뜨는 걸 곁눈질로 보곤 했다.
가을빛 들끓는 곳 번뜩이는 갈겨니 떼
기도가 하늘에 닿으면 지상에 버는 꽃잎
그 꽃빛 밤이면 별로 숨 쉬는 걸 나는 보았다
「‘어떤 경영․」-서벌
목수가 밀고 있는 속살이
환한 각목 어느 고전의 숲에 호젓이 서 있었나
드러난 생애의 무늬 물드는 듯 선명하네
어째 나는 자꾸, 깎고 다듬는가
톱밥 대패밥이 쌓아가는 적자 더미
결국은 곧은 뼈 하나 버려지듯 누웠네
「어떤 경영」 -서벌
나루는 몸을 틀어 마을 가는 길을 내어
머슴새 쑥 빛 울음 그 소리 엮는 거냐
갑자기 돌이 되는 사내 목에 노을 걸었다
「부처」 -김원각
첩첩 산속 찾아갔더니 그분은 부재중이다
한 동자가 그의 처소를 일러준 대로 찾아갔더니
잠실의 우리 집 아파트 아내와 마주쳤다
「종소리」 -박석순
별들이 숨어서지 파도 소리 담겨서지
물소리 담아 서지 산소리 받아 서지
한 바달 흰나비 떼가 하늘 끝을 찾는다
「석류」- 조운
투박한 나의 얼굴 두툴한 나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을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임아 보소라 빠개 젖힌 이 가슴
「석류」- 이호우
토장 맛 덤덤히 밴 석사 베 툭진 태생
두견은 섧다지만 울 수라도 있쟎던가
말없이 가슴앓이에 보라! 맺힌 핏방울
「꽃」-이종문
꽃이 고운 꽃이 환장하게 고운 꽃이
사람은 간 데 없는 무덤가 거기 피어
돌 위에 창자를 놓고 찧는 듯이 아파라
「변조 」-류제하
천지에 왼 통 천지에 당신밖에 없습니다
내 안에도 내 밖에도 당신밖에 없습니다
나 하나 설자리에도 당신밖에 없습니다
「간이역」 -정수자
한 방향만 바라보다 늙어버린 문처럼
침목 긴 행간에 그늘이 깊어지면
그 몸을 관통해가는 검은 기차가 있다
그리움은 헤어진 그 직후가 늘 격렬해
등을 만질 듯 마른 손을 뻗지만
제 길을 결코 안 벗는 그는 벌써 먼 기적
희미해진 이름 속을 꼭 한번 섰다 갈 뿐
그때마다 피를 쏟듯 씨방이 터지는 걸
기차는 알지 못한다 폐허 위에 피는 꽃도
「가야금」-한설야
오동나무 숨은 소리 님이라 부르노라
열세 줄 오리 오리 젖 먹은 핏줄인가
가락은 내 모르건만 넋이 불러 님이라네
「귀뚜라미」-김남환
바윈들 마음 없으랴 산인들 귀 없으랴
쇠북도 목젖 속에 우는 강을 재웠는데
이 한밤 팽팽한 정적 위에 천 개의 얼음 못을 친다
「뼈마디 하얀 시」 -김광순
가시에 찔린 밤 방울새의 외마디 같은
남루를 다 버리고 밤에 홀로 야위는
하현의 곧은 뼈마디 하얀 시를 씁니다
「풍경」- 김제현
뎅그렁 바람 따라 풍경이 웁니다
그것은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소리일 뿐
아무도 그 마음속 깊은 적막을 알지 못합니다
「제야」-진복희
오늘은 너도 재우고 저무는 눈 벌에 섰다
지워지는 길 위로 저려 드는 목숨 한 닢
감감한 하늘 떠받들고 삭정이가 울고 있다
「어머니 얼굴」- 조운
주름진 어머니 얼굴 매보다 아픈 생각
밤도 낮도 길고 하고도 하한 날에
그래도 이 생각 아니면 어이 보냈을 거냐
「 새의 독백」-박재삼
영원히 사는 것은 세상엔 하나 없고
무성한 잎 속에나 슬픈 울음을 묻으며
가다간 하늘도 날아보는 그 짓밖에 못하네
「백목련」-남승렬
성균관 유생들이 상소를 올리고 있다
개혁의 먹을 갈아 하늘을 치든 붓끝
애채에 터지는 봄빛 일파만파 눈물빛
「파도」- 서일옥
그대를 보냅니다 등 떠밀어 보냅니다
명치끝에 아려오는 절절한 그리움을
다 덮고 혀를 깨물며 그대를 보냅니다
「월포리 산조」-유재영
녹슨 배경 하나 삐딱하니 버려졌고
그날 밤 빈 배 두엇 저음으로 가라앉는
바다는 4악장쯤서 가로 접혀 있었어
하얀 뼈로 떠오르는 달이며 늙은 구름……
누군가가 가만히 해안선을 끌고 와서
먼 기억 풍금 소리를 꺼내 듣고 있었어
「양심」-김원각
밤에도 대낮이 허옇게 걸려있다
누구냐, 내 숨을 곳 샅샅이 허물을 지은
천지는 거울을 대며 전 생애를 끄집어낸다
「 종」-강호인의
세상 허허롭기가 하늘보다 깊은 날도
사람 무심하여 눈물 절로 어린 날도
새벽녘 까치처럼 가야 할 은혜로운 땅에서
전설 속 석수장이 명품 빚는 석수장이
그 아린 정과 끌에 살과 뼈를 깎아낸 뒤
장엄히 또한 은은히 빛살 같은 울음 우는
「알 수 없어요」-한용운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루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 중략…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수행자」-한용운
흰구름은 끊어져 법의와 같고
푸른 물은 활보 다도 더욱 짧아라
이곳 떠나 어디로 자꾸 감이랴,
유연히 그 무궁함 바라보느니!
「일색과 후」-조오현
나이는 열두 살 이름은 행자
한나절은 디딜방아 찧고 반나절은 장작 패고……
때때로 숲에 숨었을 새 울음소리 듣는 일이었다
그로부터 10년 20년 40년이 지난 오늘
산에 살면서 산도 못 보고
새 울음소리는커녕 내 울음도 못 듣는다
「단풍」-정광영
너라고 어쩌겠느냐 이 가을 햇살 앞에선
푸른 하늘을 향해 짐승처럼 울던 산아
붉은 죄 고해성사를 온몸으로 쓸 수밖에
「소나기」 -장정애
몇 겹을 내비쳐야 푸른 속살 내비칠까
온 땅을 과녁 삼아 쏘아 붓는 그 화살을
그 누가 항변할 것인가 도리 없는 이 질책
맑아서 슬퍼지는 물빛 꽃 저 눈망울
별빛이 몇십 광년 미치게 달려와서
망울진 그 눈빛 속에 퐁당 빠져 있는 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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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꽃」 -최경희
꽃잎이 타오르면 몸속의 불 켜 들고
나는 저 어두워지는 못 아래로 내려갔다
어둠에 더욱 빛나는 고요가 끊는 뻘 속
죽은 이들이 돌아와 물은 홀로 넘치고
화톳불 이글거리는 내 음각의 눈물들은
깨끗한 팔을 들어해를 건져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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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시모」 -이승은
지금, 떠나는 자
흔들리는 어깨 위에
가칠한 놀 빛이 와
입술을 깨물고 있다.
잦아든 목숨의 심지
끝내 놓친 매듭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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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무리’ -이영도
우러르면 내 어머님
눈물 고이신 눈매
얼굴로 묻고
아 우주이던 가슴
그 자락 학같이 여시고
이 밤 너울너울 아지랑이
그대 그리움이 고요히 젖는 이 밤
한결 외로움도 보배냥 오붓하고
실실이 푸는 그 사연 장지 밖에 듣는다.
-이영도의 「비」 전문
피면 지리라 지면 잊으리라
눈 감고 길어 올리는 그대 만장
그리움의 강 져서도 잊히지 않는 내 영혼의 자줏빛 상처
선지보다 더 하얀
바람 한 필 끊어다가
종이보다 가장 깨끗한
훈풍 두 필 베어다가
도화지보다 덜 맑은
북풍 세필 찢어다가…
- 김종렬의 「갈치 찌개를 끓이다」
너를 범하는 것은 참으로 간단하다
가벼운 칼질 몇 번에 몸뚱이가 해체되고
바다를 지탱한 은비늘도 사정없이 벗겨지고
뜨거운 냄비 속을 욕심으로 들여다본다
짠 내를 토해 내며 공유하는 너를 본다
죽어서 더 향기로운 식탁 위의 갈치여
나도 우려낼 그 무엇이 남아있을까
접시 속의 네 뼈처럼 고요할 수 있을까
자꾸만 밥상 앞에서 무릎 꿇는 이 저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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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이영도
나의 그리움은
오직 푸르고 깊은 것
귀먹고 눈먼 너는
있는 줄도 모르는가
파도는 뜯고 깎아도
한 번 놓인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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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도록 오시는 이’ -한분순
저물 듯 오시는 이
늘 설운 눈빛이네.
엉겅퀴 풀어놓고
시름으로 지새우는 밤은
봄 벼랑 무너지는 소리
가슴 하나 깔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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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서숙희
닳아, 닳아진다면
천만 번 티끌 되었거니
쌓아, 쌓인다면
억만 번 태산 되었거니
이 자리 천년을 서서
강이 되고 바다가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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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그리움」 김원각
멀리 보낸 그리움,
그대 맘에 닿지 못하고
그 언저리 맴돌다
와도 마냥 행복했는데
그리움 그도 늙었나
저만치 가다 돌아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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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영이’ -김주석
우리 차(車)가 왜 이리
힘들어하죠, 아빠
뒤에서 밀어야
할까 봐요
어영차 차라 차 차 차
따르던 별들이 송송송
오선지를 달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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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밭의 모반’ -박재두
출렁이는 장미밭은
대낮 같은 불빛의 궁전
한창 어여쁜 음모
거미줄을 치고 있다.
수상한 기침 소리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누가 겹겹으로
도화선을 깔았는가
구석마다 부챗살 그리며
그림자 걷혀 가자
일제히 솟는 불기둥
뒤집히는 색채의 폭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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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 -한설야
오동나무 숨은 소리
님이라 부르노라
열세 줄 오리 오리
젖 먹은 핏줄인가
가락은 내 모르건만
넋이 불러 님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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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 이차남
그대는 총애받는
어느 왕조 여인처럼
색조도 짙은 미소
농염 어린 눈 길하며
담 너머 소문난 자색
뉘 가슴인들 성했으랴.
타고난 운명대로
끝 모를 유혹의 체질
더운 피 짙은 향기로
제 몸살 제 앓으며
한 왕조 사로잡고도
붉게 타는 저 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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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천년’ 이승태
언제부터 울었을까
백두의 햇살 눈뜨는 곳
차마 잠들 수 없는
저 천년의 피리 소리
별 하나 어둠을 사루며
단념 밖으로 나서고.
더께더께 쌓인 세월
뼈 시린 결빙의 땅
우직한 소 한 마리
휴전선을 넘고 있다
아득히 감겼다 펴는
천만년의 춤사위.
한 번도 주목받지 못한
하찮은 쑥부쟁이
때론 슬픔이고
기쁨인 저 들판에 서서
긴 세월 어두운 세상
등불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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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시 풍요』유만공
寶兒一隊太癡狂
截路聯衫小袖裝
기생 한떼 미치광이와 같이
길을 막고 긴소매 나부끼며
時節短歌音調蕩
風吟月白唱三章
시절 단가 부르는 소리 질탕한데
찬바람 밝은 달밤에 3장을 부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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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 있는
검정머리의 처녀는
표범처럼 날씬하게
숲 속을 헤매고
춤을 출 때는
팔이 긴 요정이 되어
공기의 흐름 따라 떠돌아다니네.
황금빛 버드나무
한 그루 언덕 아래에 서 있고
그 옆에 쫄쫄 흐르는
얕은 시내와 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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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싸리꽃」 김상옥
그 꽃은 작은 싸리꽃
산뜻한 가을이었다
봄 여름 가리지 않고
언제나 가을이었다
말라서 바스러져도
향기 남은 가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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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은」 신웅순
강을 건너기 위해
산은 서있고
산을 적시기 위해
강은 철석 거 린다
강물에 산이 빠질까
배 한 척 띄우는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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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수 아래」 김정희
그 나무 아래 머물면
잊었던 나를 찾을 것 같고
그 나무 아래 앉으면
사무친 사람 만날 것 같고
그 나무 아래 오래 앉으면
어떤 길이 열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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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초상」 김정희
갈 섶에 말없이 앉아
빈자일등 켜 놓고
머물다 떠난 인연
바람결에 보낸 후
빈 집에 허리를 꺾고
열반경을 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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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백민
점과 점이 방울방울
선긋기 공부하네
내려온 하늘 높이
깊이도 재보고
지구에
점을 찍어서
오목판을 만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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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절초 피었구나」 고정국
이 세상 모든 꽃이
다 그만한 아픔이란다
소망만큼 꽃잎이 다치고
절망만큼 마디가 굵은
노숙자 마른기침소리
온 들녘이 꽃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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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 정광영
너라고 어쩌겠느냐
이 가을 햇살 앞에선
푸른 하늘을 향해
짐승처럼 울던 산아
붉은 죄 고해성사를
온몸으로 쓸 수밖에
==========
「안개꽃」 신명자
눈송이가
쏟아진다
하하하 웃음꽃도
다발다발
묶어놓은
수다쟁이 계집아이야
까르르
입을 모으면
이야기가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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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이」 이우걸
쳐라, 가혹한 매여
무지개가 보일 때까지
나는 꼿꼿이 서서
너를 증언하리라
무수한 고통을 건너
피어나는 접시꽃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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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 장정애
몇 겹을 내비쳐야
푸른 속살 내비칠까
온 땅을 과녁 삼아
쏘아 붓는 그 화살을
그 누가 항변할 것인가
도리 없는 이 질책
「산꽃」 최경희
맑아서 슬퍼지는
물빛 꽃 저 눈망울
별빛이 몇십 광년
미치게 달려와서
망울진 그 눈빛 속에
퐁당 빠져 있는 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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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야 」 지성찬
나무들이
은빛 고운 드레스를 입는다
밤을 맞이하는
가슴은 달아오르고
외딴집
작은 불빛이
금단추를 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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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시(蘭詩) 」 이상범
때 안 묻은 그대로
태초의 숨결 그대로
신의 입김 그대로
자연에 내맡긴 그대로
뻗어서 자랑도 아닌
때 안 묻은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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