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그 영원한 이름
정희경
여성은 대부분 다른 이름을 하나 가지고 있다. 요즈음은 여성의 사회진출이 많아졌다고 하나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보다는 ‘00엄마’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또 ‘00엄마’는 ‘00아빠’로 불리는 경우보다 훨씬 그 빈도가 높다.
셰익스피어는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고 했다. 여성이 어머니라는 이름을 가질 때 가장 아름다우며 가장 고귀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백범이 ‘치하포’ 사건으로 감옥에 갇히자 객주집의 식모살이로 옥바라지를 하며 “나는 네가 경기감사나 한 것보다도 더 기쁘게 생각한다.” 고 아들을 격려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에서 저격 사살한 안중근 의사에게 “살려고 몸부림하는 인상을 남기지 말고 의연히 목숨을 버리거라.”라고 하며 수의를 지은 조마리아 여사 또한 위대한 어머니의 표상이다. 그러나 어찌 이 분들뿐이겠는가?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은 위대하다.
그런 위대한 어머니의 모습을 시인은 어떤 시각으로 바라볼까? 시인에게 있어 어머니는 돌아갈 고향이다. ‘나 날 적 궁전이었으나 내가 버린 폐가(廢家)’(홍성란「애인 있어요」)라는 어머니. ‘어머니’는 시인이 다룬 소재 중 가장 흔한 소재 중의 하나이다. 그만큼 어머니에 대해 할 말이 많고 감정이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어머니’는 가장 감동적인 소재이면서도 가장 가슴 아픈 소재일 것이다. 어떤 시조든 그 표현은 달라도 모두 ‘어머니는 위대하다’라는 명제로 귀결된다. 시인이 그린 어머니 다섯 분을 만나는 길은 그래서 더욱 감동적이다.
은행잎이 걸어간다 초록에서 노랑으로
은행잎이 야위어간다 유화에서 수채화로
제 갈 곳 아는 것들은 투명을 향해 간다
어머니 걸어가신다 검정에서 하양으로
어머니 날개펴신다 소설에서 서정시로
먼 그곳 가까울수록 어머니는 가볍다
-이옥진 「투명을 향하여」 전문, 『나래시조』 (2011년 봄호)
어머니와 은행잎을 병치시키는 방법을 취하면서도 어머니를 은행잎으로 은유하는 수사학을 보이는 작품이다. ‘은행잎’ ‘어머니’라는 경험적, 구체적 세계는 더 나아가 ‘인생’이라는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세계에 닿아 있다. 시인은 자연과 인간을 동일시하여 의미를 확장하고 시적 깊이를 더한다.
자식들에게 많은 것을 내어준 어머니는 가볍고 투명하다. 육체적인 가벼움은 비운다는 의미이며 비운다는 것은 곧 투명해진다는 정신적 세계를 의미한다. 또 투명해진다는 것은 결국 무소유의 삶이며 그 삶은 아름답다. 시인은 어머니의 삶이 복잡하고 굴곡과 갈등이 많은 소설 같은 삶을 넘어 순수와 감동과 감정에 호소하는 서정시 같은 삶이길 소원한다. 검은 머리카락에서 흰 머리카락으로 변해가는 어머니, 말 수가 소설에서 시처럼 점점 줄어드는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시인이 추구하는 삶은 고단하고 힘든 희생적인 삶이라기보다는 그 너머에 있는 가볍고 투명한 삶이다.
‘노랑’과 ‘수채화’가 ‘투명’이라는 시어와 잘 어울리고 ‘하양’과 ‘서정시’가 ‘가볍다’와 잘 어울려 대조와 대구가 이 시조를 튼튼히 받치고 있다. 각 시어들이 중의적으로 읽혀지는 것도 이 시조의 강점이다.
가벼워진 어머니의 모습은 「모지랑숟가락」에서도 보인다.
여름엔 감자 등을
겨울엔 호박 속을
쓱쓱 긁다 제 살 깎아
껍데기만 남은 당신
한평생
닳은 손끝엔
반달꽃이 피었다
-김덕남 「모지랑숟가락」 전문 『시조시학』(2013 겨울호)
‘감자 등’과 ‘호박 속’을 긁는 숟가락이 결국은 제 살을 깎고 있다. 숟가락은 닳고 닳을수록 ‘감자 등’과 ‘호박 속’을 더 잘 긁을 수 있는 법이다. 그래서 ‘껍데기만 남’아 가벼워진 어머니. 어머니의 희생적인 모습이 모지랑숟가락에 투영되어 있는 이 작품은 잔잔한 감동을 준다.
우리 생활에 있어 숟가락은 단순히 음식을 먹는데 쓰는 도구만이 아니다. 숟가락은 생명 자체를 상징하는 단어이며 어머니를 대변하는 단어이다. 시인은 ‘당신’과 ‘손끝’이라는 시어를 작품 속에 티 나지 않게 넣어 ‘모지랑숟가락=어머니’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 짧은 단수에서 시인은 숟가락을 그것도 다 닳고 닳은 모지랑숟가락을 어머니로 형상화하는데 성공을 거둔다.
소설가 윤대녕은 그의 산문집 『어머니의 수저』에서 “밥상에 놓여있는 수저를 보노라면 사람의 몸과 닮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젓가락은 두 다리를, 숟가락은 얼굴과 닮아 있는 것이다. 원래는 한 몸이었다가 각기 반으로 나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때 숟가락은 여성을, 젓가락은 남성의 이미지를 내포한다.” 라고 하였다. 시인 김선우는 「숟가락 - 날마다 어머니를 낳는」이라는 수필에서 “숟가락이 불러일으키는 향수는 흔히 세상의 어미들에 대한 그리움을 동반하곤 하는데, 아마도 그 ‘둥긂’과 ‘먹인다’는 것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들은 먹이는 일에 열렬하다.”라고 했다.
칼이나 다른 도구를 마다하고 한사코 모지랑숟가락을 사용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이 작품을 읽는 내내 오버랩 된다. 자신보다는 자식을 먹이는 일에 더 보람을 느끼는 어머니의 손끝이 다 닳고 닳았다. 시인은 그런 어머니의 ‘닳은 손끝’과 닳아서 반쯤만 남은 모지랑숟가락의 모습을 ‘반달꽃’으로 형상화하였다. 어머니에 대한 극진하고도 감동적인 헌사이다.
금이 간 손톱으로 밤낮 없이 벗기셨다
한 움큼 고구마 줄기 명줄처럼 붙잡고
자줏빛 천연 염색을 한
울 어머니 네일 아트
-황영숙 「네일 아트」 전문, 『시조21』 (2013년 겨울호)
고구마 줄기의 자줏빛 물이 든 어머니의 손톱을 ‘네일 아트’라고 노래한 시인의 역설이 놀랍다. ‘네일 아트’는 단순한 손톱 장식을 넘어 현실비판 의식까지 담고 있는 시어이다. 시인은 아내가 되기를, 어머니가 되기를 포기한 이 땅의 젊은이들을 향해 어머니의 고귀한 희생에 대해 목소리를 높인다. ‘한 움큼 고구마 줄기’처럼 보잘 것 없는 것조차 ‘명줄’이 되는 어머니, 그 어머니는 자신보다는 자식을 먼저 생각하는 어머니이다. 자식의 먹을 것을 먼저 챙기는 어머니이다. 어찌 고구마 줄기를 벗기는 일만이겠는가? 고구마를 심고 가꾸는 정성이 더해져 고구마 줄기는 ‘명줄’이 되는 것이다.
지극히 평범한 초장과 중장이지만 초장과 중장을 도치시켜서 단조로움을 탈피했으며 ‘밤낮 없이 벗기셨다’를 강조하고 초장에서 궁금증을 유발시키는데 성공을 거둔다. 그리고 종장에서 울컥 쏟아내는 역설이 잘 짜여진 3장 구조를 보인다. 그래서 감동의 여운 또한 길다.
비를 몬 손돌바람 갈기 바짝 세운 저녁
잘려나간 우듬지로 거먹구름 흩고 있는
입동의 플라타너스 그 몸피를 읽는다
결별의 낙숫물이 뚝뚝 듣는 거리에서
하릴없이 바라만 보는 먼발치 살붙이들
무젖은 한 겹 껍질마저 휘주근히 벗으며
옹이 밴 지난 이력 얼루기로 그려놓고
눈설레 땡볕마저 나이테에 새겼으리
우산도, 외투도 없이 떨켜만 키운 몸통
쭈글쭈글 접힌 뱃살 울 어매도 저랬을까
여섯 자식 배앓이로 살 트는 줄 몰랐던
나무의 드난살이가 거스러미로 일어선다
-임채성, 「뱃살무늬를 읽다」 전문, 『시조시학』 (2014년 봄호)
‘입동의 플라타너스’가 이 작품의 소재이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울 어매’를 노래한 작품이다. 직설법을 쓰지 않고 비유와 은유를 통해 전체적인 그림을 그린 이 작품은 독자로 하여금 여러 번 읽게 만든다. ‘플라타너스’를 그리며 읽다가 넷째 수에 와서 ‘어머니’를 읽고 다시 첫 수로 돌아가 ‘플라타너스’와 ‘어머니’를 동일 선상에 놓고 대비해가며 읽게 된다. 또 한 번은 ‘손돌바람’ ‘우듬지’ ‘거먹구름’ ‘무젖은’ ‘얼루기’ ‘눈설레’ ‘드난살이’ ‘거스러미’ 등의 시어를 눈여겨 읽게 된다. 이렇게 여러 번 읽으면 읽을수록 그 맛이 살아나는 작품이다. 읽을수록 플라타너스의 모습과 어머니가 겹친다.
우듬지가 잘려나간 플라타너스의 현재 처한 환경은 서글프다. ‘손돌바람’도 불고 ‘거먹구름’도 몰려오고 ‘낙숫물’도 듣는 저녁이다. 잘려나간 ‘살붙이’는 먼 발치에서 바라보아야하고 ‘무젖은’ 껍질도 벗는다. 자식을 다 키운 ‘울 어매’가 처한 환경이다. 객지로 나가버린 자식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울 어매’는 지금 쓸쓸한 황혼을 맞고 있다. 모진 풍파를 다 겪은 모습이다. 그 사이 플라타너스에는 ‘옹이’와 ‘나이테’가 생겼다. 그것도 ‘눈설레’와 ‘땡볕’을 견디고 ‘얼루기’로 남았다. 우산도 외투도 없다. 주위의 환경을 저항 없이 오롯이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자신을 위한 그 무엇도 가지지 않은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결국 플라타너스의 그 얼룩덜룩한 몸은 마치 훈장과도 같은 어머니의 뱃살이다. 얼마나 멋진 은유인가?
거침없이 유유히 흐르던 가락이 넷째 수에서 반전을 맞아 신선한 충격으로 각인된다. ‘저녁’ ‘입동’ 같은 시어들을 꼼꼼히 박아 ‘여섯 자식’ 낳고 기른 어머니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작품에 녹아있는 점도 이 작품의 미덕이다.
어머니 팔순잔치에
선물로 나눠 줄 우산
한 평생 하늘을 덮어
눈
비
막아주더니
오늘은 오롯이 접혀 탁자위에 누웠네
“야들아! 내가 이리 짐만 돼서 우짜노!”
꼬챙이 몸뚱이로
폭우도 견뎌냈던
어머니 남은 하늘이 우산위로 접힌다
-최재남 「우산」 전문, 『개화』 (2014년 제23집)
이 작품의 매개는 ‘우산’이다. ‘우산’은 팔십 평생 살아오신 어머니의 삶을 대변하는 물건이다. 시인은 ‘우산’을 자유자재로 그 형태를 바꾸고 유형과 무형의 경계를 없애 주제에 접근한다.
초장에서 ‘팔순 잔치에 / 선물로 나눠 줄’ 유형적인 ‘우산’이 중장에서 ‘한 평생/ 눈 / 비/ 막아’주는 어머니의 삶인 무형적인 ‘우산’이 되었다가 종장에서 ‘접혀 탁자위에’ 누워있다. 접혀 탁자 위에 누워있는 우산은 실제로는 팔순 잔치 선물인 우산이지만 둘째 수의 ‘꼬챙이 몸뚱이로 / 폭우도 견뎌냈던’ 어머니의 현재 모습이기도하다. 펼쳐있지 못하고 이제는 기력이 다해 접혀있는 우산이 곧 어머니의 모습이다. 첫 수 종장의 의미는 둘째 수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우산이 접혀있는 것처럼 ‘어머니 남은 하늘’도 ‘접힌다.’ 이제 더 이상 펼쳐서 눈, 비를 막아줄 수 없다. 그런 어머니를 바라보는 화자의 애틋한 마음이 “야들아! 내가 이리 짐만 돼서 우짜노!”라는 어머니의 말을 통해 짠하게 전달된다.
어머니의 팔순잔치에 ‘우산’을 선물로 드리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어머니가 아들, 딸의 우산이 되어주었듯이 이제 어머니 남은 일생에 자식들이 어머니의 우산이 되어 드린다는 의미는 아닐까? 적어도 이 작품에서는 그런 의미가 부여되어 있으리라.
미국의 어머니날 기념우표에 등장하는 ‘회색과 검정의 배열 제1번-화가의 어머니’(1871년 작·파리 오르세미술관 소장)를 그린 제임스 맥닐 휘슬러를 비롯하여 고흐, 피카소, 고갱, 렘브란트, 마네, 샤갈 등 수많은 화가들은 자신의 어머니를 화폭에 담았다. 그들이 그린 것은 단순히 어머니의 모습이 아니라 어머니의 기쁨과 고뇌와 헌신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감사이다.
‘어머니’를 그린 작품을 한 편씩 갖고 있지 않은 시인은 없을 것이다. 시인들은 어머니의 삶을 그대로 옮기기도 하고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과 동일시하기도 한다. 시인들이 가진 어머니에 대한 개별적인 감정이 수천수만의 다른 색깔의 작품을 낳는다.
그래서 ‘어머니’라는 작품은 오랜 세월동안 끊임없이 창작되고 또 읽혀지는 것이리라.
‘어머니’는 가장 고전적인 소재이면서도 가장 감동적인 주제이다. ‘어머니는 위대하다’라는 진리는 그래서 예술작품 속에 영원하다. 시인에게 끊임없는 영감과 감동을 안겨주는 어머니, 시대가 바뀌고 문명이 발달하고 의식이 변화해도 어머니는 영원하다. 그 영원함이 시조에 담겨 빛나리라 믿는다.
-《시조21》 2014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