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계집』 번역에 관한 약술(略述)
역자가 동계(東溪) 조형도(趙亨道, 1567~1637) 선생을 처음 만난 때가 4년 전이다. 바로 2012년 충주향교에서 『중용(中庸)』을 강의할 때 얼핏 본 선생의 문집인 『동계집(東溪集)』을 통해서였다. 생육신(生六臣)의 한 분인 어계(漁溪) 조려(趙旅, 1420~1489) 선생의 5세손인 선생을 만났던 것이다. 번역 집필을 하기 전에 시문 몇 편을 읽다보니 격렬한 파동이 밀려왔다. 오로지 선생께서는 나라를 위하는 한마음만 지니고 계셨던 것이다. 나라가 위태로운 지경에 처해 있을 때 붓을 던져버리고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및 병자호란의 소용돌이 속에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구국의 일념으로 선생은 자신의 몸을 초개와 같이 여겼던 것이다. 말로 아닌 행동으로 보여준 선생의 우국충정이 역자를 매료시켰던 것이다.
선생께서 붓을 던져버린 것은 26세이던 해인 1592년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에게 갔다가 곽재우(郭再祐)의 진영에 나아가 왜적과 싸웠다. 그 뒤 선생은 많은 전과를 올려 여러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그리 오래가지 않아 그만두기를 여러 번 하였다. 선생은 물욕에는 마음을 두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424년 전에 일어난 임진왜란부터 병자호란까지의 45년간의 한 인물에 대한 기록을 읽고 공부를 한 셈이다. 선생은 문인임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발발 2년 뒤인 1594년 28세의 늦은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생은 송나라의 충신이자 명장인 악비(岳飛, 1103~1142)의 말을 인용하면서 전쟁터로 내달렸다. 나라가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몸을 돌보지 않고 적진으로 내달렸던 것이다. 악비는 이렇게 말하였다. ‘문인불애전 무인불석사(文人不愛錢, 武人不惜死)’ ‘문인은 재물을 좋아하지 않으며, 무인은 죽음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선생은 그의 나이 71세에 인조 임금이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에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등창이 도져서 최후를 맞이하였다고도 하며, 한편으로는 자결을 하였다고도 한다.
선생의 문집은 선생이 돌아가신지 175년 만인 임신년(壬申年, 1812년)에 비로소 후손들이 집에 보관된 시문을 모으고 여러 곳에 산재되었던 기록들을 모아 편집을 하여 간행을 하려고 하였으나 간행을 하지 못하다가 철종 연간(1849~1863)에 간행을 한 듯하다.
선생의 문집을 번역하면서 문집 중에 나오는 어휘나 성어(成語) 등에 모조리 세밀한 주석을 달았으며 지명, 인명, 시대 및 연도 등에도 각별히 주석을 달았다. 지명은 지금의 지명과는 달라 『신중동국여지승람』을 일일이 찾아가며 주를 달았으며, 인명은 한국학중앙연구원 및 한국고전번역원의 데이터베이스를 참고하였다. 주석을 달다보니 원문보다는 주석이 더 많은 이른바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경우가 되어버렸다.
하나의 문집에는 동양의 문(文)·사(史)·철(哲)이 고스란히 배어있음을 보았다. 선현들의 글은 대단히 깊고 인간다운 맛을 음미할 수 있는 저작물로, 아니 웅숭깊은 맛을 씹어 삼키는 저작물(咀嚼物)임에는 틀림없는 듯하다.
『동계집』의 편찬 및 간행, 저본의 구성 및 내용에 관해서는 여러 기록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약술하고자 한다. 참고로 아래의 내용은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가져와 일부 내용을 첨가하였다.
* 『동계집』의 편찬 및 간행.
저자가 생전에 창석(蒼石) 이준(李埈, 1560~1635), 오봉(梧峯) 신지제(申之悌, 1562~1624) 등과 주고받은 시를 수록한 사고(私稿) 약간 권(卷)이 가장(家藏)되어 있었다. 1812년 5세손 조윤창(趙胤昌), 조응창(趙應昌)이 집안에 보관된 유고를 베껴 써서 4책으로 만들었으나 간행하지는 못하였다.
그 뒤 7대손 조기서(趙基緖), 조기평(趙基平) 등이 저자 사후 수백 년이 지나면서 왕복 서한이나 상소문, 임금의 교지 및 당시 제현들이 실상을 기술한 것들이 전해지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하여 신집(申楫)이 지은 묘지명과 후손 집안에 있던 제현들의 만시(挽詩)를 모으고 방손 조기영(趙基永, 1764~1841)으로 하여금 유사(遺事)를 쓰게 하였으며, 1845년 이병하(李秉夏)가 행장을 지었다. 그리고 유치명(柳致明)에게 서문을 받고 조기록(趙基祿)의 발문을 실어 목판으로 문집을 간행하였다. 초간본의 정확한 간행 연도는 알 수 없으나 이병하가 행장을 지은 연도를 고려할 때 간행 시기는 이병하가 행장을 쓴 1845년 이후로 추정할 수 있다. 간행 시기는 대략 철종 연간(1849~1863)으로 미루어 볼 수 있다. 역자가 지닌 『동계집』은 규장각(古 3428-738), 국립중앙도서관(古3648-文72-97), 경북대학교 중앙도서관, 경남대학교 중앙도서관, 대구가톨릭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 저본의 구성과 내용.
본집은 목록(目錄), 원집(原集) 5권 합 3책으로 되어 있다. 권두에 행서와 초서로 쓰인 유치명(柳致明)의 서문과 전체 목록이 실려 있다. 권1-3은 1편의 부(賦)와 495수의 시가 실려 있다.
권4는 소(疏) 하나, 편지(書) 11개, 서(序) 3개, 기(記) 2개, 제문(祭文) 9개, 행장(行狀) 1개이다. 「사괴산군수소(辭槐山郡守疏)」는 정묘호란 직후 과분하게 괴산 군수직을 받았으니 거두어 달라는 내용이다. 이명(李溟), 오운(吳澐), 권응수(權應銖)에게 보내는 편지는 시국에 관한 것이고, 손처눌(孫處訥), 채선길(蔡先吉), 김세렴(金世濂), 이준(李埈), 장내범(張乃範)과는 안부를 주고받은 편지글이다. 서와 기는 부모를 그리는 내용을 담은 망운정(望雲亭)과 화연당(和燕堂), 동계 선생을 포함한 다섯 신선이 노닐었던 내용을 적은 오선동기(五仙洞記)와 역시 부모를 그리는 마음을 담은 풍수당기(風樹堂記)에 관한 내용이다. 제문은 장인 오운(吳澐), 민추(閔樞), 매제 신지제(申之悌), 김종효(金宗孝), 이준성(李俊成), 권익(權翊), 조부모 개장(改葬), 숙부 조식(趙埴), 다섯째 아들 조함연(趙咸衍)에 대한 것이고, 행장은 오운(吳澐)에 관한 것이다.
권5는 부록으로 전식(全湜) 등이 지은 죽은 이를 애도하는 만사(輓詞) 57편과 1845년에 이병하가 지은 행장, 신집(申楫)이 지은 묘지명, 방손 조기영(趙基永)의 유사(遺事), 유치호(柳致皜)가 지은 「덕봉사봉안문(德峯祠奉安文)」, 홍양호(洪良浩)가 지은 「십삼충록서(十三忠錄序」가 실려 있다. 권말에 이종상(李鍾祥)과 7대손 조기록(趙基祿)이 지은 발(跋)이 실려 있다.
『동계집』을 무릇 2년 5개월여 집필을 하였다. 번역문은 200자 원고지로 3400여 매이다. 시문(詩文)만 495수이다. 이번에 이를 번역하면서 느낀 점은 동양 고전을 섣불리 읽었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어디서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어휘에 새삼 놀라기도 하였다. 대충 읽어버린 중국의 25사(史), 제자백가서, 당송(唐宋) 시대 시문집, 4서 3경을 포함한 동양 고전 13경(經)에 대한 미진한 독서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더하여 대자전(大字典)에도 나오지 않는 글자를 찾느라 몇 달을 헤매다가 겨우 찾기도 하였다. 미력하나마 번역 집필을 하였다. 동계 선생께 누가 되지는 않을까 내심 송구하다.
단기 4349년(2016년) 4월 30일
충주에서
강상규 돈수(頓首).
지은이
동계(東溪) 조형도(趙亨道, 1567-1637) 선생의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자는 대이(大而)·경달(景達)이다. 호는 동계(東溪)이다. 자칭 청계도사(淸溪道士)라 일컬었다. 생육신 여(旅)의 5대손이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지(址)이다. 큰아버지 우(堣)에게 입양되었다. 부인은 부윤 오운(吳澐)의 딸이다.
1583년(선조 16) 첨지 민추(閔樞)에게 수학했다. 1587년 정구(鄭逑)를 사사한 뒤 3년 간 향시에 연이어 장원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이러한 공으로 특별히 훈련원주부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무과를 지원해 1594년 무과에 합격하였다. 선전관 겸 비국랑(宣傳官兼備局郞)에 임명되고 이어 통정대부가 되었다. 이듬해 청하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다시 경산현령이 되었다. 1606년 고성현령에 임명되었다. 1608년 의병을 모집하는 임시직인 소모장(召募將)으로 창원에 차송되었다.
1609년(광해군 1) 본영중군 김명윤(金明胤)의 참소로 진주옥에 수감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첨지중추부사 정광적(鄭光績) 등의 변호로 풀려났다. 1614년 광해군의 혼란한 정치를 싫어하여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1617년 순찰사 윤훤(尹暄)이 수군 분담을 개청하는 일로 불러 중군에 들었다. 이 때 토포사를 겸행하여 영천감옥에서 탈옥한 죄수 이경기(李景祺) 일당을 붙잡는 데 공을 세웠다. 1622년 가선대부로 승진하였다. 이 해에 청나라가 침입하려 하자 순변사 유비(柳斐)의 종사관이 되었다가 곧 경덕궁의 호위장이 되었다.
이듬해 인조반정 때 군사를 모아 궐문을 지켰다. 이 공으로 보성군수가 되어 학문을 진작시켰다. 또한 미납되어 온 4,000여 석의 세미(稅米)에 대해 감사에게 진정해 2,800석을 감면받아 군민들의 칭송을 받았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로 피난할 때 본도중군을 겸하고 정예병을 모아 왕의 수레를 호위했다. 1625년 토호들의 부정한 청탁을 거절해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곧 호위별장으로 차송되었다.
1627년 청나라의 침략 낌새가 보이자 본도호소사(本道號召使) 장현광(張顯光)의 중군이 되었다가 별장이 되었다. 영장제가 설치되자 진주영장에 임명되었으나 신병으로 사직했다. 다시 상주영장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어 괴산군수에 임명되어 소를 올려 사직하려 했으나 허락되지 않아 부임하였다. 1629년 경주영장이 되어 3년 간 재직했다.
정조 때 편찬된 『충렬록(忠烈錄)』에 기록되었다. 또한 순조 때 만들어진 『존주록(尊周錄)』에도 기록되었으며 청송의 덕봉사(德峯祠)에 배향되었다.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에 동계정(東溪亭)이 있다. 저서로 『동계집』5권 3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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