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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 운하
프랑스 파리
영국 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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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2 런던 송혜교
시베리아 횡단철도.,신혼여행
시베리아 횡단철도
모스크바
2018.04.02 청소년에게
꿈을 주는 시베리아 여행
...............부산역(釜山驛)...................
동구 중앙대로에 있는 경부선 철도역 종점.
서울역, 동대구역 과 더불어 국내 3위 역(驛).
KTX, ITX-새마을, 무궁화호, 수서 방향 SRT.
광장에 부산 도시철도 1호선 부산역 출입구 위치.
.................................................................
'경부선 종착점'이자
'부산의 관문'.,부산역.
부산은 우리나라 제2의 도시이자, 제1의 무역항이다.
근대 이후에 우리나라 역사의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던
서구문물의 개항장이었고, 6·25 전쟁 중에 임시 수도였다.
.
부산.,임시수도 대통령 관저
1951년 1.4후퇴 부산역 피난민 행렬.
1951년 1.4후퇴.,부산항 피난민
1.4후퇴., 피난민 행렬.
1.4후퇴., 피난민
6.25 부산.,'보수천. 감천' 피난민촌
2013.12.30 부산.,임시수도 기념관
부산.,임시수도 기념관.,사진전
1948년 8월 정부수립~1960년 8월까지
이승만 대통령의 명명으로 제1공화국의
대통령 관저명 ‘경무대(景武臺)’로 불렸다.
1960. 8. 13 제2대 윤보선 대통령.,"청와대".
청와대 옛터는 고려 남경(南京) 이궁(離宮) 터.
조선시대 1426년(세종 8)에 창건된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 밖 후원에 해당하는 곳이라 하여 경무대.
경무대는 어영(御營 : 인조반정 군대의 하나)의
연무장(鍊武場)이나 과거장(科擧場)으로서,
또는 친경(親耕)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이 울안에는 융무당(隆武堂)과
경농재(慶農齋) 등이 있었으나,
일제강점 후 1927년 일제에 의해
헐리고, 조선총독 관저를 건립하여
제7·8·9대 조선총독이 관저로 사용했다.
광복이 되어서는 조선주둔군 사령관
하지(Hodge, J. R.)중장이 사용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한국정부로 이관되어 초대 대통령 관저.
경무대 이름을 되찾아 대통령 관저로 사용.
이승만(재임 1948∼1960) 대통령은
6·25 전쟁의 피난시절을 제외하고는
1960년 4월까지 초대·2대·3대 대통령
12년간 이곳에서 보내고 4·19 혁명 후
하야와 함께 이화장(梨花莊)으로 옮겼다.
경무대라는 이름은 3·15대통령 부정선거 등
독재와 비정(秕政)의 대명사처럼 인식되어
제4대 윤보선 대통령이 청와대로 바꾸었다.
그뒤 1963∼1979년(5∼9대) 박정희,
1979∼1980년(10대) 최규하(崔圭夏),
1980∼1988년(11∼12대) 전두환(全斗煥),
1988∼1993년(13대) 노태우(盧泰愚),
1993∼1998년(제14대) 김영삼(金泳三),
1998∼2003년(제15대) 김대중(金大中),
.
2003∼2008년(제16대) 노무현(盧武鉉),
2008∼2013년(제17대) 이명박(李明博),
2013~2017년(제18대) 박근혜(朴槿惠)
2017년(제19대) 문재인(文在寅) 대통령.
'1948~2018' 약 70년 동안에
한국 경제는 비약적으로 성장.
부산은 국가 경제성장에 크게 기여.
........................
........................
1876년 부산, 1879년 원산, 1880년 인천을 개항.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1883년 조독수호통상조약,
1884년 조로수호통상조약. 조이수호통상조약,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 등 구미 열강과 통상조약.
1884년 9월 14일 기독교 전파를 위해
세 선교사 알렌, 언더우드, 아펜젤러가
처음 조선시대에 밟은 땅은 부산항이고,
6·25 참전 유엔군을 통해서 전파된 몰몬교,
첫집회지 부산을 통해 국내에 전파되어 갔다.
.
.....'1876~1910' 부산 개항기(開港期)......
개항장은 '인종 전시장' 외국 선박들 정박처
외국 상품의 진열장인 동시에 유행에도 민감.
또한, 외국어의 혼합장이었으며, 풍속 변화와
각국 복장을 쉽게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외세 침투와 침략의 발판 구실을 하였다.
또한 치외법권지역이기도 하였으며
외형상으로는 근대화의 시발지였다.
그러나 범죄의 온상이 되기도 하여
고유 미풍양속을 저해하기도 하였다.
관제 수입처의 구실과 함께 도시화 촉진
우리의 생활 필수품·귀금속·문화재가 반출
외국인과의 관계 때문에 행정상 특수 지역으로
지방 제도 개편에 따라 근대 도시로 등장하였다.
1906년 10월 감리서가 폐지될 때까지
대외 관계 사무의 창구 구실을 하였다.
..................................................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를 거쳐 일본 및
다른 나라들과 교역창구 역할을 한 부산.
1960년 대에 수출 주도형 경제 개발 추진
동아시아 대표 무역항구로 부상하기 시작.
현재, 부산은 남동 임해 공업지역의 중심도시.
해운대해수욕장으로 대표되는 국제 관광도시.
매년 부산 국제 영화제가 개최되는 문화 도시.
'서면'은 부산의 중심 지역으로, 교통의 요지,
백화점과 멀티플렉스 영화관, 서점, 재래시장,
금융 기관 등이 밀집해 있는 부산 최대의 번화가.
'부산 최초 계획도시인 해운대 신시가지'
센텀 시티에는 대규모 주거 단지가 있으며
해운대역 주변은 해수욕장, 벡스코 등이 있다.
..............신해운대역(해운대역)................
ITX-새마을, 무궁화호와 광역전철이 운행된다.
서울로 가는 열차는 이 역을 시·종점으로 하여
부전, 구포, 경부선 경유하는 서울행 ITX-새마을,
중앙선 경유하는 부전~청량리간 무궁화호가
각 1일 4회씩 운행된다. 2013년 12월 2일 현재
역사 이전, 동해선 유일의 반지하역 구조이다.
.............................................................
해운대 비키니 축제.
해운대 깍두기녀
해운대 비키니 페스티발.
해운대 신시가지
광안대교
해운대 장산 야경.
부산시는 외곽지역 낙동강 동쪽 저습지를 개발
사상공업지역 내에는 조립 금속 및 기계장비 업체.
화학, 석유, 플라스틱 업체와 의복, 신발 업체 등 입지.
사상공업지역
부산은 대한민국 동남단에 위치한 광역시.
동쪽은 동해, 서쪽은 창원시 진해구와 김해시,
남쪽은 다대만·부산만·수영만을 끼고 남해(南海),
북쪽은 울산광역시 양산시, 김해시와 접하고 있다.
부산만 송도 해상 케이블카.
................부산만(釜山灣)..................
1930년대 부산역 & 부관 연락선
광복 전에는 관부(關釜)연락선이라 불렸다.
1905년 1월 1일부터 열차운행 시작한 경부선
같은해 9월 정기뱃길을 연 부관연락선 운행 시작.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수탈 시스템
경부선과 관부 연락선은 부산에 큰 영향.
두 교통망은 한국사회에 큰 변화의 요소.
.......................부산항....................................
한국 최초, 최대의 무역항. 항구 전면에 영도와 조도가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어 항만으로서 천혜의 입지조건
1876년(고종 13)에 "부산포"라는 이름으로 개항되었다.
1898년 매립공사 1906년 부두 축조공사
항구로서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되었다.
1970년 이후에는 부산항 제1·2·3·4단계 개발
북항 재개발사업을 통해 국제무역항으로 성장.
상하이,싱가포르,선전,닝보-조우샨-홍콩에 이은
세계 6위 컨테이너 항만(2016 물동량 3억 6천만톤).
여객 수송을 위한 국제여객터미널,
국제크루즈터미널, 연안여객터미널
부산항은 한국최초, 최대 무역항이다.
1876년 부산항은 근대항만으로 개항,
항구 전면에 영도와 조도가 방파제 역할
항만으로서 천혜의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항만법상 부산항의 지리적인 범위는
남서쪽 몰운말 남단을 기점으로 하여
서도 남단, 두도, 생도 남단, 오륙도 남단,
동백섬 산정을 이은 내해로서 북항·남항·
감천항·다대포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객 수송을 위한 국제여객터미널,
국제크루즈터미널, 연안여객터미널
일본의 여러 도시와 제주도를 운항
...............................................
경부선 종착점 & 관부연락선 기점.
부산은 국내 유일하게 두 교통망의
기·종착점을 동시에 보유한 곳이었다.
'부관'(釜關)은
부산 앞글자(釜, 부)와
시모노세키 뒷글자(關, 관).
일본에서는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
또는 관부항로(關釜航路)라고 부른다.
관부연락선은 1905년 9월 일본 한국을
비롯한 중국 동북지방·몽고 등지로 진출
이 연락선은 만주의 안봉선(安奉線)·
남만주철도·시베리아철도 등과 연결.
광복 전에는 세계일주 여행로의 일부.
일제의 한국침략의 한 수단이기도 했다.
수많은 한국인들이 징용으로 끌려갔으며
일제 수탈에 농토를 잃고 북해도 탄광으로
가기 위해 관부연락선에 몸을 맡기기도 했다.
..........................
'死의 讚美' (1926년)
...........................
황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건 허무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도다 .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찾는 인생들아 너찾는 것 허무.
허영에 빠져 날 뛰는 인생아
너 속였음을 네가 아느냐
세상에 것은 너에게 허무니
너 죽은 후는 모두 다 없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 윤심덕 노래 -
윤심덕 작사,
이바노비치 작곡,
1926년 발표 번안곡
윤심덕은 1923년 동경음악학교 관비생 졸업
일본 유학 후에 돌아와 음악활동과 교편생활.
1926년 극단 土月會 회원으로 신극운동에 참여.
1926년 7월에 연극관계로 알게 된 이기세(李基世)
주선으로 당시 유행하던 번안가요 「매기의 추억」
「어여쁜 새악시」 등 10곡 노래 취입을 위해 일본행.
그해 8월 1일 취입 예정에 없었던 '사의 찬미'를
동생 윤성덕의 피아노 반주로 취입하여 발표했다.
이틀 후, 8월 3일 윤심덕은 애인인 극작가 '김우진'과
관부연락선 타고 귀국 중 김수산(金水山)·윤수선(尹水仙)
가명으로 쓴 유서를 남기고 현해탄에 몸을 던져 동반자살.
유부남 김우진과의 사랑을
정사(情死)로 마감한 윤심덕,
'死의 讚美'는
이들의 정사사건과
더불어 많은 음반이 팔려
음반판매의 촉진제가 되었다.
윤심덕의 死의 讚美'는
당시 시대적 배경의 아픔.
그녀의 음악에 대한 고뇌 등
암울한 시대상황을 대변해준다.
'시모노세키~ 부산'
최초 취항 관부연락선은
이키마루(壹岐丸, 1,680톤)
배로 11시간 반이 소요되었다.
그뒤 3,000톤급 쇼케이마루(昌慶丸)·
도쿠주마루(德壽丸)·쇼토쿠마루 운항.
1935년 북중국·만주·몽고 진출 본격화
7,000톤급 공고마루·고안마루 등 운항
운항 시간도 7시간 반으로 단축하였다.
이들 연락선은 태평양전쟁 수행을 위해
전선과 일본 본토 운항에 투입되었으나,
미군의 폭격에 의하여 격침되고 말았다.
1945년 3월부터 관부연락선 두절
광복이 된 뒤에도 한일 간의 국교가
정상화될 때까지 연락선이 끊기었다.
러일 전쟁과 함께
시작된 관부 연락선은
제2차 세계 대전 패망과 함께
마지막 배가 일본으로 떠난 이후
부산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1968년부터 시모노세키와 부산은
다시 이 항로개설을 공동으로 논의.
.
1970년 6월 19일 재일 교포 정건영이
출자한 부관훼리주식회사에 의하여
3,600톤급 여객선 2척이 다시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정기적으로.,운항 시작.
현해탄 건너는 국제 객선 정기운항은
아시아에서는 부산과 일본이 최초였다.
그당시 이례적이고 동시에 이색적인 것.
"서울에서 자동차로 도쿄까지
내달릴 수 있는 길이 열렸다."며,
현해탄 하이웨이 ‘부관교’라 불렀다.
2014.12.13
2015.03.29 '부산 ~ 시모노세키'
오륙도 돌아가는., 부관연락선
부관 연락선에서 바라본.,오륙도.
부관연락선 선실.
선내 조식.
지금도 부관 페리는
늘 같은 자리에서 출발
부산과 일본을 잇고 있다.
.
일제때 식민지 정책이 본격화되며
부산은 급격한 근대화가 시작되었다.
몇 차례 매축과 착평으로 지형을 바꾸고
여러 근대 시설들을 짓기 시작했던.,부산.
당시 일본인들이 지은 건물과
위락 시설, 산업 시설의 흔적이
아직도 부산 많은 곳에 남아 있다.
부산에 남아 있는
근대 문화유산 200여 건 중
61건이 일제 강점기의 것이다.
특히 용두산 공원은
부산 사람들에게는 매우
친숙한 공간이지만 그 공원의
기틀은 일본에 의해 만들어진 것.
이순신이 바다를 보고있는 동상.
그 자리는 일본인들이 거주 장소.
일본인 남녀가 용두산 정상에서
사랑을 이루지 못해 음독자살 기도.
한 일본인 남성이 폭탄 자살을 하는 등,
일본인들의 에피소드 주무대였던 용두산.
광복 후 한일 첫여객선은 아리랑호
1964년 1월 부산항 제2부두에서 출항.
1970년 6월 17일부터 부산~ 시모노세키
이틀에 한번 오가는 부관페리호가 입출항.
.
연락선이라는 명칭은
일제강점기 및 그 이전의
일본 측 노선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항로를
이어받아 운행하는
현재의 '부관페리'를
'부관연락선'이라 한다.
부산의 관문인 부산역 주변은
이색적인 명소로 가득 차 있다.
부산역 맞은 편에는 '올드 보이'
영화 촬영무대 상해거리가 있다.
120년전 중국 영사관이 들어서면서
중국인들이 모여들었던 '차이나 타운.
부산역 5번 출구를 나오면
‘상해문’이라는 관문을 만난다.
붉은 색깔과 용무늬와 『삼국지』
관우 동상이 어색하지 않은 곳이다.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 부산역 맞은편,
부산 화교거리에는 상해거리 특구 흔적들.
조선시대 청나라인들의 전관 거류지였던 곳.
왜관에 대비되는
청관이라 불렸던 곳.
지금도 화교학교가 있는
그곳은 1884년 조선시대에
첫 청나라 영사관이 있던 자리.
1882년 임오군란 후부터
1895년 청일전쟁 발발 전까지
청관 거리에는 중국인들로 넘쳤다.
영사관이 들어선 이후에는
정주하는 중국인들이 많아지고
청 객주들이 부산으로 모여들었다.
그에 따라 부산의 청관은
중국에서 유명한 포목, 비단,
양복지, 꽃신 등이 거래되면서
한때 시집가는 부산, 영남 처자들
최대 혼수 시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부산항과 아주 가까운 청관은
왜관의 일본 상인보다는 훨씬
싼 가격에 물건을 거래하였다.
하지만 원래부터 인천, 원산에 비하여
일본의 세력이 막강했던 부산이었기에
청이 주도권을 갖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청일 양국 간
경제 주도권 경쟁 구도가
부산에서 격돌을 벌인 것이다.
1894~1895년
조선의 지배를
둘러싸고 벌어진
청.일 간.,청일전쟁.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중국 중심 세계질서’에
종지부를 찍고 신흥 일본을
이 지역의 패자로 등장시켰던
동양 사상 획기적인 전쟁이었다.
또한 당시 아시아에서 대립하던
영국과 러시아 등 제국주의 열강들
간의 영토분할 경쟁을 촉발시킨 계기.
.
이러한 전쟁의 결과, 조선은
뿌리깊은 청국의 종주권에서는
벗어났으나, 일제의 침략 대상으로
바뀌었고 인적· 물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수난을 당하였다.
청나라는 청일 전쟁에서 패배해
영사관을 잃고 청관은 급격히 쇄락.
청관 일대는 일본인들이 장악하였으나
1901년 경부터 중국인들이 돌아오기 시작.
1930년대 원로가수 김정구
「왕서방 연서」의 가사 마냥
‘비단이 장사 왕서방’의 이야기는
청관거리 에피소드였을지 모른다.
대외적으로 부산이라는
도시의 국제성을 말할 때
자주 언급되는 곳이 상해거리.
상해거리
.
상해 거리는 표면적으로는
중국의 문화를 대표하지만
그 내부를 면밀히 살펴보면
다양한 국제문화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조선시대 왜관이 있던 자리에
청관이 이어서 자리를 잡았고,
덕분에 일본풍 건물들이 남아 있던
그곳에서 중국의 문화가 거래되었다.
지금도 상해 거리에 남아 있는
백제병원 터만 하더라도 일본식
근대 건물이었지만.,중국 음식점.
지금 상해 거리 특구에는
유명 중화 요리점들이 즐비
홍성방, 사해방 등 큰 규모의
중화 요리점을 비롯하여 신발원,
일품향, 장성향 등 유명한 맛집들.
신발원 공갈빵과 중국식 콩국 등은
유명세를 타고 전국 택배 서비스 제공
장성향 군만두는 영화 '올드 보이'에 등장.
단순히 짜장면과 짬뽕 중국 음식이 아닌
제대로 된 ‘중국 요리’ 전문점들 상해 거리.
매년 상해거리 특구 축제가 개최되면
각 중화 요리점들은 짜장면 천원 행사.
점원들은 한국말과 함께 중국어를 사용.
이것 또한 식도락과 함께 신선한 경험이다.
현재, '상해거리 특구'는
1993년 부산시와 상하이가
자매결연을 체결하고, 1998년
부산이 옛 청관 거리 일대를
상해 거리로 조성하면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상하이에도 역시
부산거리가 생겼다.
이후 동구청은 1999년부터
도로확장 및 조명 시설 확충
등을 실시하여.,지금의 모습.
2002년 중국의 당서열 3위가
지켜보는 가운데 웅장하게
상해문이 건립되었다.
그런데 사실 이 상해 거리에
상하이 사람은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실제 청관에 자리 잡았던
중국인 대부분 산둥성 사람들이고
현재 청관에 정착한 대부분 대만 사람들.
부산에서는 상해 거리가 아니더라도
중국인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부산 대학가에는 유학온 중국인들이 많다.
,
그로 인하여 국 요리점, 양꼬치 술집,
중국 식재료 상가 등이 속속 늘어난다.
점포 아르바이트생 중국인들도 꽤 있다.
더 젊고 현대적인 중국이
부산으로 몰려들고 있다.
가히 부산 전체가
‘신 차이나타운’ 화
‘생활형 차이나 부산’
이라 부르는게 맞을듯.
상해 거리를 걷다가
길의 끝자락에 다다르면
거리를 수놓고 있던 붉은 빛깔의
중국간판 대신 영어간판이 늘어난다.
순식간에 다른 국가로
국경을 넘나드는 느낌.
‘클럽 텍사스’,
‘샌프란시스코’,
‘할리우드 클럽’ 등
영어 간판들이 즐비.
즐비한 거리 입구에
부산항에 미국 군함이 들어오게 되면
이 환락의 거리는 이국인들로 가득 찬다.
이 숫자는 엄청나고 빈도 또한 낮지 않다.
2008년 3월 부산에 미국의 항공모함
니미츠가 입항했을 때 5,600명 승무원.
그 이전에도 오하이오호, 프린스턴호,
폴 존스호[이상 미국], 몰랜도함[페루].
여기서도 모두 1,000명 이상 쏟아져 나왔다.
니미츠 호
레이건호
같은 해 7월 로널드 레이건호와
호위함정 2척애서 6천명이 내렸다.
이들이 약 3일동안 부산에 머무르면서
쓴돈이 6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로 인하여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대낮부터 이곳 각 유흥업소는 장사진.
상해 거리의 동편에 위치한
전혀 다른 이국의 이 거리가
‘텍사스 거리’로 불리웠던 곳.
일본이 물러가고 6·25 전쟁을 겪으면서
미군들이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주둔하자
부산에는 기지촌을 비롯한 일명 텍사스촌.
미군 대상 유흥단지가
속속 들어서게 되었다.
중구 중앙동 텍사스촌
1953년 역전 대화재.
텍사스촌이 타버리자
현재의 초량동 일대로
새로이 옮겨오게 되었다.
청일전쟁 이후
청일전쟁 이후
청관이 쇄락하고
그 일대가 또 다시
일본인에게 넘어갔다가
일본이 태평양전쟁에 패배
그후로 텍사스촌이라 불린 곳.
미군들과 외양 선원들이
회포를 푸는 유흥단지이자
상업지구로서 변모되었던 곳.
코카 콜라, 바이스로이 담배,
캐나디언 위스키 등이 버젓이
공공연하게 상거래가 되었던 곳.
1983년 7월 21일 자 『동아 일보』에 따르면
미국 항공모함 미드웨이호가 5일간 입항하여
쓴돈 2~3억 원(현재 가치로 10억원 훨씬 이상)
그 옛날 동래 권번 기생들의
주무대 초량 요정과 요릿집 거리.
미군이 들어오며 클럽과 카페로 변모.
부산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일본.
전통적으로 한반도는 중국 영향력이 컸지만
부산은 일본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은 국제도시.
부산의 이색적 문화에 가장 진한 색깔을 남겼다.
6·25 전후에는 미군 주둔 보급지.
깡통시장 같은 미군 부대문화 유입.
러시아 보따리 상인들이 드나들면서
부산은 러시아 향취까지 풍기게 되었다.
1990년 한국과 러시아가 수교를 맺었다.
이후 한국이 경제 발전을 이루고 부산도
1980년대 이후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코리안 드림’을 꿈꾸는
러시아 보따리 상인들이
대거 부산을 찾기 시작했다.
부산과 블라디보스토크
사이의 항로가 개설되자
부산을 찾는 러시아인의
숫자는 나날이 늘어 갔다.
부산은 이미 타국을 받아
들이는데 유연성을 가지고
있어 몇년 사이에 크게 변모.
청관 거리 일대와
텍사스촌 지역은
러시아 상인들의
상가로 바꾸어갔다.
1992년 6월 14일 자 『동아 일보』에 따르면
1991년까지만 해도 13개던 외국인 전용 술집
가운데 5개소가 신발과 옷 가게 등으로 바뀌고,
간판에 영자, 러시아 상호를 함께 써넣기 시작.
‘마이애미’ 술집은
러시아 인기 가수인
‘알라’로 이름을 바꿨다.
이 가게는 러시아 통역원 3명을 두고
부두까지 승합차를 운영하였다고 한다.
당시 가게 주인인 송영배는 “이곳을 찾는
러시아인들은 대부분 선원들이고 어선
선원들이 상선 선원보다 지갑이 두둑한 편”
속초나 부산을 주무대로
한국의 의류, 생활용품, 식료품을
사서 러시아로 돌아가는 보따리 상인들.
건장한 체구에 금발을 하고
동양인들과 뒤섞여 거리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당시 처음 보따리 장사를
처음 시작은 어선 선원들이다.
이들은 구입한 생필품을 자국민이나
친지에게 되팔아 5~10배 이득을 보았다.
1992년 월평균 4,000 명이
텍사스 거리를 찾아 왔으며,
1993년 동아 일보에 따르면
월평균 7,800여명이 다녀갔다.
당시 특히 인기품목 초코파이.
1993년에는 급기야 텍사스 거리
초코파이 품귀현상까지 빚어졌다.
러시아 상인들을 대신
상품을 구입해 러시아로
배송하는 대행자들까지
상당수 생겨났을 정도.
텍사스거리 점포들은
러시아 국가들과 이어져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과도 왕래, 거리명도 현재
‘초량 외국인 상가’로 바뀌었다.
부산역에서 30분 도보거리 은행 2층에는
러시아인 전용 외환창구가 마련되어 있고,
건물 8층에 러시아 총영사관이 들어와 있다.
'부산 속 러시아'
라고 말해야 할까?
2013.11.24
2014.03.26 러시아 태평양함대 해군예술단.
2017.05.07 부산., 러시아 전승일 기념 행사
부산 출입 러시아 상인들의
출입로는 주로 감천항이었다.
지금도 많은 러시아인들이
선원의 신분으로 입항하며,
입항하는 배들을 정비하고
직거래를 하는 러시아인들도
이곳에 상당수 상주하고 있다.
감천항은 부산의 항구이면서도
부산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곳
러시아의 향기와 문화가 묻어나는 곳.
"감천 사거리를 기점으로 감천항 쪽 골목에는
부두를 통해 입국하는 러시아 선원들이 드나드는
러시아어 간판을 내건 술집들이 즐비하며 도로가에
오래된 대중목욕탕 감천탕 주변에는 ‘다정’, ‘늘봄’,
‘메아리’, ‘옥이’ 등 손바닥 만한 빨간 간판들이 영업."
"감천에서 러시아 선원들 덕분에
생계를 이어가는 곳들이기도 하다.
감천초등학교와 서천초등학교 등 학교와
인접한 곳인데도 없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감천항에는 러시아 선원들이 풍기는
특유의 냄새가 난다”고 말들을 하는 곳.
부산의 경기는
곧, 러시아의 경기
한때 그렇게 움직인듯.
사실 초량 외국인 상가가
외국인들의 현대적인 쇼핑
거리로 비춰지기 시작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언제나
휘청거리는 외국인들의 밤거리라는
이미지를 벗기가 힘들었고, 그 속에
상인들의 문화가 뒤섞여 지금의 형태.
초량 외국인 상가 거리의 환전소에는
달러, 위안, 엔, 루블 등을 함께 거래한다.
‘돌고 돌아 돈’이라고 하지만, 이곳에서는
많은 돈이 돌았고, 또 역사가 돌고 돌았다.
지금 아시아 각지
외국인 노동자들이
그 거리를 걷고 있다.
환전소에서 파는
국제 전화 카드의
주 소비자들은 바로
외국인 노동자들이다.
이 거리는 다시 또
새로운 이국의 사람들을
품어주는 거리가 되어가는 중.
초량 외국인상가는 외국인들이 들어와
부산과 섞이면서 만들어진 곳인 반면에,
국제 시장은 이국 것들을 부산 사람들이
직접 추스르고 사고팔며 만들어진 곳이다.
1945년 일본이 패하고 급하게 퇴각하며
남기게 된 전시 통제 물자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이것들을 급히 팔아
치우기 위하여 지금의 부평동 공설 시장 일대와
주변 빈터들이 시장 터가., '국제깡통시장'의 유래.
“일본인들은 패망과 함께
수탈한 재산을 고리짝에 담아
초조하게 귀국선을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한국 젊은이가 소리쳤다고 한다.
‘당신들은
손가방 하나 밖에
배에 실을 수 없소.
나머지 고리짝은
모두 버려야 할 거요!’
‘고리짝 1개에
5원씩 주겠소’
이렇게 부두에서 고리짝 거래가 시작되었단다.
내용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5원이었다.
이 고리짝들은
다시 부산서정 4정목
123소개지로 옮겨져
10원씩에 거래되었다.
그렇게 즉석 시장이 열린 것이다.
누군가는 횡재했고 누군가는 헛장사.
일본인이 다 돌아가고 나서는 귀국 동포들이
다시 시장판으로 나와 당시 이 시장은 ‘도떼기시장’
"일본어로 ‘톳타!’,
즉 ‘얻었다!’, ‘취했다!’
라는 의미에서 유래된 이름.”
1948년, 도떼기시장은
단층 목조식 건물을 12동 가량 짓고
자유 시장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당시에는 광복 이후
여기저기 자유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유행이었던 시기다.
물론 지금의 부산 자유 시장과는 다르다.
이후 부산이 잇따른 전쟁의 보급지 역할을
하면서 미군군용 물자들이 흘러나와 상거래.
일명 깡통 시장이라고 불리는
국제 시장의 군용 물자 시장은
지금도 그 흔적이 군데군데 있다.
미군 캔 식료품을 주로 팔았던 시장이다.
지금도 일본의 과자와 함께 미국의 군용 양주,
통조림을 파는 상가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본래는 깡통 시장과 함께
국제시장에는 케네디 시장
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었다.
전쟁고아를 위한 구호물자를 빼내서
전문적으로 팔던 창선동 일대 시장으로
구호품이 끊긴후 수입 구제의류 취급 시장.
지금은 대부분 일반 의류 시장으로 바뀌었다.
지금 국제시장의 포목상과 의류 상가
일대가 바로 예전의 케네디 시장 자리.
물자의 다양성, 넓은 부지, 항구의 인접 등
당시로서는 유통의 정점에 있는 시장이었다.
홍콩, 마카오, 대만, 중국, 러시아, 미국
등에서 들어 온 밀수품들이 성행하면서,
국제시장은 전국 밀수품 보급시장 유명세.
당시 부산항은
밀수의 메카였다.
1959년 『동아 일보』의 기사를 보면
1958년 한 해 동안만 부산세관은 605건의
밀수를 적발하고, 검거된 밀수범만 1,000여 명,
압수 품목은 5억 9900만환, 부산 앞바다에서 해녀를
동원한 해저 밀수품 운반까지 나타나고 있다며 걱정.
벨벳 옷감, 화장품, 모피, 보석, 시계 등이
밀수선에서 트럭으로 국제 시장까지 직송.
밀수가 성행하자 히라마오, 마사이치,
로스케 등 불량배 집단들도 활개쳤다.
밀수로 한밑천을 잡은 상인들은
동대문, 남대문, 청계천 등지로 옮겨
새로 시장을 형성했는데 이들 3개 시장은
부산 국제 시장 출신들이 절반 이상이었다.
국제 시장이 태어났던 시절.
그 난장 시장의 질곡의 흔적인양
국제시장 온골목은 미로처럼 엉켜 있다.
그리고 그 골목 이곳 저곳이
세월을 이겨낸 다양한 상가들로
채워져 있으며 부평 시장 일대로
들어서면 미군용 위스키와 담배들이
상가 좌판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다.
이곳 노점상들은
일본에서 넘어온 화장품,
과자, 식재료 등을 팔고 있다.
몇몇 상점의 주인들은
고정 환율로 외환 거래.
옷가게들을 거닐다가 보면
이불 만한 바지도 볼 수 있다.
이 모든 흔적들이 그 옛날의
도떼기시장에서 이어져 온것.
살아가기 위한 생존의 수단으로 부산 사람들은
이국의 문화를 걷어다 이곳 국제 시장에서 팔아왔다.
국제 시장에서는 정말 ‘국제적인’ 것들이 거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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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異國)을 비벼
'부산의 맛'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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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장소뿐만 아니라
부산 사람들의 일상 속에도
이국은 그렇게 낯설지 않다.
낯설지 않기에 평소에는
느끼지 못하고 지나갈 만큼
평범한 것들이 많은 곳이 부산.
어떤 것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부산의 것이 되어
녹아 있을까?
먹거리만 하더라도
상하이 특구 거리에서
이미 짚었던 중국 요리나
초량 외국인 상가의 음식 등
부산에서 쉽게 접하는 이국음식
시내 곳곳에서 해당 국가의
현지인들이 운영하는 음식점
등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더욱이 현지 음식에 그치지 않고,
아예 외국음식이 부산에 녹아들어
지금은 부산의 음식이 된 것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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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오뎅[어묵]은
전국 제일 수준을 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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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사람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어묵이지만,
서울에서는 아예 포장마차에서 어묵과
부산 어묵이 따로 명기되어 판매될 정도이다.
어묵의 본고장 일본과
가까웠던 부산의 위용이다.
어묵은 개항 이후 일본인들이
부산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했던 어묵.
1924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의 시장』에서
부평동 시장에 대해 ‘쌀, 어묵,
채소, 청과물 등이 주종을 이루었다’
어묵을 따로 기록할 정도로,
부산어묵은 하나의 큰 식품군.
부산에서는 1936년 일본인이
처음 어묵 공장을 세우고, 광복 후
동광식품을 시작으로 삼진식품, 환공식품
등 큰 어묵 공장들이 연이어서 들어섰으며 이후
‘부산 어묵’ 자체의 고유 명사로 불릴 정도로.,맛 자랑.
삼진식품은 60년 지난 지금도
부산에서 어묵을 만들고 있다.
초량시장에 나가면 지금도
어묵 가게를 쉽게 만날 수 있다.
초량시장 영진식품의 즉석 어묵이
1966년 초량 시장의 천막에서 출발.
지금까지 이어져 온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남포동에서 소문난 메뉴 중 하나 ‘완당’
1948년 개업해 65년째 남포동에서 영업
‘18번 완당집’에 완당의 역사가 쓰여있다.
완당은 본래 ‘훈탕’이라는 중국음식.
이것이 일본으로 넘어가 완당이 되었고
한국으로 들어와 지금의 형태가 되었던 것.
근처 부산 시민들이 점심 한 끼,
저녁 한 끼로 먹는 이 완당 음식을
타지방에서 먹기 위해 부산을 찾는다.
중국의 음식도
일본의 음식도 아닌
부산의 음식으로서의
외지에서 완당을 찾는 것.
이외에도 부산의 명물 돼지국밥과
70년전 남포동 일대에 널리 퍼지고,
현재도 부평동 깡통시장에 노점 단팥죽.
역시 가까운 일본식의 문화가
부산에 접목되어 탄생된 것이다.
돼지국밥은 6·25 전쟁 때 서울의 피란민들이
소뼈를 우려내어 먹던 설렁탕에 돼지 뼈를 우려
육수를 내는 일본 문화가 녹여져 탄생한 것이다.
실제로 부산과 뱃길을 맞대고 있던
규슈[九州]의 명물은 돈코츠[豚骨].
즉 돼지 육수이며, 단팥죽 역시 우리
전통팥죽과 달리 갈분과 설탕을 넣는
일본식 젠자이 문화가 결합된 것이다.
.......................
'창조성의 발판',
칵테일 도시 부산.
........................
부산은 여러 이국(異國)들과 부대끼며
단맛과 쓴맛을 뒤섞어 함께 경험하였다.
제3자 입장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타자를
바라보는 위치가 아니라, 경제 관계에서부터
가장 밑바닥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의 단계까지
모든 속살까지 다 드러내 놓고 관계를 맺었던 곳.
이러한 경험은 “으이그 원수덩어리!”라면서도
내 가족이고 내 이웃이라며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는 부산사람들 모습과도 묘하게 오버랩된다.
살을 부대끼고 사는 가족처럼
타국 사람들의 무대 앞면과 뒷면을
모두 보아왔기에, 부산은 더욱 유연하게
타국의 문화를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었다.
‘무슨 놈 무슨 놈’ 하면서도
부산은 그들이 설수 있는 땅을
내어주고, 그들에게 삶을 제공했다.
부산 역시 이국을 상대로 또는
그들의 것들로 삶을 꾸려 나갔다.
부산의 국제적 위치와 역사는 나름대로
부산에 많은 이국간 경험을 축적시켜 주었다.
그로 인해 부산은 요즘 말하는 하이브리드를
훨씬 오래 전부터 다양한 분야에서 만들어냈고,
동시에 '이국 문화' 정착의 리트머스 시험지 역할.
1884년 9월 14일 기독교 전파를 위해
세 선교사 알렌, 언더우드, 아펜젤러가
처음 조선시대에 밟은 땅은 부산항이고,
6·25 참전 유엔군을 통해서 전파된 몰몬교,
첫집회지 부산을 통해 국내에 전파되어 갔다.
1970~1980년대 부산은
외국 영화가 가장 먼저
들어오는 외화 도시였고,
외화의 흥행 여부는 부산에서
얼마나 흥행하느냐가 기준이었다.
일본의 가라오케는
‘가라오케 박스’ 형태로
부산에 최초로 상륙하여
한국식의 노래방이 되었다.
부산이 트로트의 메카가 되었던 것도
일제 강점기 일본 요나누키 풍의 음계
엔카[演歌]가 부산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부산은 마치 서로 다른 맛과 빛깔의
술들로 빚어진 칵테일 같은 도시이다.
소주와 구수한 막걸리를 베이스로 하고
사케, 위스키, 빼갈, 보드카가 뒤섞여져서
부산이란 하나의 잔에 담겨지게 된.,칵테일.
달기도 하고 쓰기도 한 칵테일,
빛깔 곱지만 마시면 취하는 칵테일.
칵테일도 섞어본 사람만이 그 맛을 알고
그 맛을 아는 사람이 칵테일 비율을 아는 법.
부산이 앞으로 빚어낼 칵테일은
어떤 맛일지 궁금해지지 않는가?
칵테일은 유행 따라 새로 태어나며
오래 지났어도 고전으로 각광받는다.
창조는 언제나
새로운 만남과
충돌에서 생긴다.
부산만큼 이색적 만남을
일상적으로 늘 체험을 하는
국제적인 도시가 또 있을까?
이러한 부산의 강점(强點)은
'부산의 미래'와도 연결된다.
이색 문화 자체가 가지는
문화 관광 콘텐츠로서 가치도
물론 충분하지만 그 가치는 부산의
문화로서 더욱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부산은 북항 재개발과
허브 공항 논의 등과 함께
국제 문화도시로의 도약을
오늘날 또 다시 외치고 있다.
동북아시아 허브 역할을 할 수 있는
'세계의 관문이 되리라' 말하고 있다.
하지만, 부산은 인위적으로 국제성을
애써서 덧씌울 필요가 없는 도시이다.
부산은 그 정체성 속에
이미 국제성이 녹아있다.
왜관과 청관의 설치 이후 부산은 이미
동아시아의 교역과 문화 교류의 네트워크.
부산은 이러한 국제적 경험을 다시 살려내어
활성화하는 노력이 지속적으로 필요할 것이다.
부산이 가지고 있는 국제적인 친화성은
부산에 발걸음을 멈추는 전세계 사람들을
예나 지금이나 미래나 늘어나게 할 것이다.
2011년 부산 문화 회춘 프로젝트를 계기로
한국, 중국, 홍콩, 대만, 일본, 독일, 미국 등
많은 국가의 아티스트들과 문화 운동가들이
부산대학교 앞을 찾았고 조형 예술, 공연,
그라피티 등 많은 예술활동을 보여주었다.
당시 부산을 찾았던 전세계 젊은이들은
부산이 나라 안팎의 다양한 문화적 실험과
전세계 상상력이 모이고 자유롭게 교류하는
세게청년 문화의 중심지가 되는 미래를 꿈꾼다.
2012년 부산은 이미 거주 외국인
5만명을 바라보는 도시로서 변모.
부산 주민등록인구의 1.4%를 차지.
부산은 거리 외국인이 어색하지 않은 도시.
전세계 다문화를 선도해 나가는 부산의 미래도
부산의 전세계 이색문화의 포용성이 바탕이 될 것.
국제적인 물류와 산업뿐만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의 이국 문화를 통한 접점의
도시를 만들고 그 속에서 새로운 아이디어와
창조성을 발현할 수 있는 경험의 장이 구축될 것.
...............
...............
일본은 한국과 가깝고도 먼 나라.
왜관은 일본인들의 전관 거류지이자
상가 단지이며 조선시대 대일외교 중심.
차이나 타운이
생기기 이전에
있던 ‘재팬 타운’
부산진역 2번 출구 나서면
'고관 입구'라고 부르는 곳.
윤흥신공 동상이 있는
조그만 쌈지 공원 한쪽에
두모포 왜관 표지석이 있다.
1607년(선조 40) 설치되어
72년간 존속한 왜관이었다.
이곳이 고관 또는 구관이라고
불리는 것도 본디 이곳에 있던
왜관이 초량 왜관으로 이전하면서
예전의 왜관이 있었던 곳이라는 의미.
용두산공원 한쪽 아래로
초량 왜관 표지석이 있다.
초량 왜관은 1678년(숙종 4)에
용두산공원 일대에 신축한 왜관으로,
규모가 36만 3636㎡에 달하는 규모였다.
부산포왜관은 1407년(태종 7) 설치후
198년 동안 존속하였으며 이후 일본은
강화도조약을 맺고 전관 거류지로 전환.
........
완월동
...........
1912년 부산광역시 서구 충무동에 생긴
부산의 대표적인 유곽.,완월동(玩月洞).
1916년 3월 경무총감부령 제4호
'대좌부 창기 취체 규칙의 발표' 후
완월동(玩月洞)은 공창 시작 및 지정
부산시는 완월동 역사를 스토리텔링
국제시장이 연계된 관광벨트 구축 예정,
바다를 보며 휴식을 할 수 있는 친수공간
자갈치시장과 공동어시장, 국제시장,
영도다리, 용두산공원과 차로 5분 거리
요코하마 '고가네초'를 롤 모델로 재개발.
"완월동에서 성과가 나면
해운대 집창촌으로 사업을
확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완월동은 1907년 일제시대 미도리마치
홍등가로 시작 100년 역사를 지닌 집장촌
부산을 찾는 외항선 선원들이 주로 찾던 곳.
...........
...........
부산 초량동 골목길 주변에는
1970/80년대 향수가 서려있다.
부산역에서 차로 5분만 가면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명장면 촬영무대.,40계단 거리.
이곳은 한국전쟁 이후
암달러상들 장사진 삶터.
40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영화 〈하류 인생〉 등이
촬영된 동광동 인쇄 골목.
인쇄골목 곳곳에 벽화가
찾아온 이들을 즐겁게 한다.
부산역에 내린 객지 여행객들이
가장 즐겨 찾는 3곳은 자갈치시장.
국제시장 먹자골목, 남포동 번화가.
국제시장(속칭 깡통시장)
.
국제시장 먹자골목
부산 '중구의 충무동, 남포동, 광복동,
자갈치시장' 일대를 남포동이라고 부른다.
이곳은 1950년 한국 전쟁이 만들어 낸.,번화가.
당시 부산으로 밀려든 피란민들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큰 시장이 있는 중구로 몰려 들었고
용두산 일대는 피난민 판자집들로 가득.
국제 시장과
자갈치 시장에서
전시 물자가 유통.
생계를 위해 장사에 뛰어든
피란민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며
남포동 상권은 나날이 커지고 발전.
................광복동 먹자골목.........................
광복동 시장가에 위치한 부산의 명물 골목이자
한국의 대표적인 길거리 음식점들이 모여 있는 곳.
국제시장과 남포동 사이에 60년 전통의 20여 음식점들.
떡볶이, 오뎅, 만두, 오징어무침 등
저렴 깔끔한 먹거리와 주인들의 후한
인심에 외국인들에게 이미 인기가 높다.
.........................................................
2017.05.15
오늘날, 남포동은 패션, 영화,
문화의 중심지로 더욱 유명해졌고,
자갈치시장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수산 시장으로 여전히 북적이고 있다.
남포동 → 지하철 1호선 남포역 1, 3, 5번 출구
자갈치 시장 → 지하철 1호선 자갈치역 4, 6, 8,
10번 또는 지하철 1호선 남포역 2, 4, 6번 출구.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는 남포동
.
1945년 광복 후 시장이 형성되었고,
당시에는 남포동 시장이라고 불렸다.
한국 전쟁 이후 자갈밭에 있었던 시장.
자갈밭과 곳, 장소를 나타내는 처(處)가
'경상도 사투리'로 "치"가 되어.,자갈치 설.
"오이소."
"보이소"
"사이소"
좌판마다 부산 사투리가
발길을 잡는.,자갈치시장.
자갈치시장과 관련된
그 주변 일대의 지명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즉, 부산에서도 남포동 일대는
이미 많은 한국전쟁 피난민들을
수용할 기반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구덕산(舊德山 : 565m)..
사병산(四屛山)이라고도 하며
구덕산은 태백산맥의 지맥인
금정산맥 남쪽 부분에 속한다.
금정산맥은
북쪽으로부터
금정산(金井山, 802m)·
상학봉(上鶴峰, 638m)·
백양산(白楊山, 642m)·
구덕산·천마산(天馬山, 325m)
다대포(多大浦) 해수욕장에서부터
'낙동강 하구' 몰운대(沒雲臺)로 이어진다.
구덕산 동쪽 사면으로는 보수천(寶水川)
서대신동 계곡과 구덕고개에 이르는 산록은
경치가 좋고 각종 원예수와 꽃재배가 성하여
시민들의 산책로로 이용되며 남서쪽 사면에는
경치가 아름다운 제석곡(帝釋谷)이 있고,
경사급한 북쪽 사면으로는 학장천(鶴章川).
1984년에 구덕터널이 개통되어
부산의 도심에서 구포(龜浦) 방면 및
남해고속도로를 연결하는 도로망 구축
이로 인하여 구덕산의 북쪽
학장동 일대가 개발되었고,
1990년대 이후에는 구덕산의
남서쪽 당리동 일대는 아파트
건설이 본격화되었다.
...............................
구덕산 고원견 저수지(1902년 준공)
구덕산의 봄.
부산.,아미산 전망대
............아미산(163m)..............
부산광역시 서구와 사하구의 경계
부산항 개항 이후 일본인 공동묘지 산
산록이 완만해 대부분 주택지대로 변모
정상 전망대는 낙동강 삼각주 등을 관찰.
일본인들이 바다에서 올라오는 용을
닮았다 하여 불렀던 이름으로 추정된다.
콘삐라 신사와 벤사이텐 신사가 있어
일본인들이 성역으로 조성되었지만
해방 후 신사는 헐리고 용두산은
피란민들의 판자촌으로 변했다.
1954년 용두산 대화재로 인해
모든 것은 잿더미가 되었고 그후에
용두산은 공원으로 새롭게 조성되었다.
1957년 이승만 대통령 호
우남 공원으로 불리웠다가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고 나자
용두산 공원으로 불리게 되었다.
지금은 부산을 상징하는
부산 시민은 물론 부산을 찾은
이들의 쉼터로 사랑을 받고 있다.
...............................................
용두산(49m)은 부산 시내에 있는
구릉으로서 부산 3명산의 하나이다.
8 ·15 전에는 신사(神社)를 세웠던 산.
부산항과 영도가 내려다보이는 경승지
특히, 부산탑에서의 야경이 아름답다.
복병산
복병산 기상청
..............복병산.................
복병산(49m)은 용두산과 함께
독립적 구릉성 산지를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 복병막(伏兵幕)이 설치된 곳.
'잠복 군사초소' 복병막이 있어.,"복병산".
복병산은 용두산과 함께 초량왜관 터.
부산포 개항 후 1892년 일본인 공동묘지.
1924년 (주)조선키네마 촬영소가 들어서며
우리나라 영화 제작 효시가 된 곳이기도 하다.
현재 도심지에
작은 언덕으로
남겨진.,복병산.
.
낮은 산정부에는 복병산 체육공원
주민 휴식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산지의 북쪽 기슭으로 중구청이 있고,
동쪽 기슭에 남성여고, 남성초교가 있다.
남쪽 사면에는 1933년에 세워진
부산기상청사(대청동 기상관측소)
이곳은 근대 기상관측이 이뤄졌던 곳.
부산광역시 시도 기념물 제51호로 지정
또한 일제 강점기에 건립된
부산 복병산 배수지가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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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병산 배수지(1895년 준공)
금정산.,성지곡 수원지
성지곡수원지., 편백림 숲길
......성지곡수원지 (1910년 준공)......
한국 최초의 콘크리트 중력식 댐이다
1906년 대한제국 정부와 일본 거류민단이
공사비분담과 공동운영에 대하여 합의하고
1907년 4월 착공, 1909년 9월에 완공하였다.
수원지 형태는 한국 지형을 닮고 있는데,
수원지 공사 착공때 부산 인구는 4만 남짓.
30만 인구를 대비하여 이 수원지를 만들었다.
수원지가 준공되면서
서면~수정동에 이르는
지역까지 수돗물을 급수.
1972년 낙동강 상수도공사가 완공,
1985년 1월 부터 용수공급을 중단하고
현재는 호수로서 부산의 랜드마크로 사용.
............................................................
.
성지곡 어린이대공원.
복병산 배수지 공원.
복병산 배수지
복병산 체육공원
.............보수천....................
동대신동 엄광산 기슭에서 발원
충무동의 자갈치 해안도로를 지나
남항 유입 하천으로 서구와 중구 경계.
구덕산에서 발원하여 흘러내린 구덕천과
구덕저수지 물이 합류하여 이루어진 하천.
보수천은 동대신동 검정 다리(흑교)에서부터
서구와 중구의 경계를 이루면서 3.8km를 흘러
남항의 충무동 앞바다로 흘러들며 이 물길은
부평동· 토성동 ·보수동을 형성하고 있다.
보수천은 개항(1876년) 전만 해도
호안정비와 바다가 매축되기 이전에는
지금의 토성상가가 있는 곳까지 바다였다.
그 무렵 보수천은 침식곡을 빠져나온 물길이
홍수 때면 부평동 쪽으로 돌자갈을 밀어붙여
부평동 터를 넓히는 결과가 되었다.
개항 이후 일본인들은
1890년 보수천 상류로부터
대에 홈을 파서 중구지역까지
물을 끌어 들였다. 그러나 불어나는
일본인은 그 죽관(竹管)의 물도 모자랐다.
1894년에는 보수천 상류에서
끌어들인 물을 대청동에 모아
대청동에서 배수를 하는 배수지를
설치하여 일본거류민에게 공급했다.
이 배수장치가 상수도장치
일본인 필요에 의한 것이지만
부산 상수도의 효시가 되었다.
보수천의 원류인 구덕산 계곡에
구덕수원지를 본격적으로 축조한
시기는 1900년~1902년 사이 일로
그 생산량은 1일 2천톤이나 되었다.
지금은 복개가 되어 외견 상으로
하천 위치조차 분간하기 어렵지만
6.25전쟁 때 임시 수도 이전만 해도
물이 맑아 주위 주민들의 좋은 빨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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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당시 보수천.,빨래터
보수동
1910년대 남빈해변(현재, 자갈치시장 일대)
1922년 부산어시장(자갈치시장 전신)
1920년대 자갈치시장.
1920년대 자갈치 해안.
8.15해방 후 자갈치시장
6.25 전쟁 통에 자갈치시장.
1950년대 자갈치시장 피난민들
2016.06.10
남포동 남항의 바닷가.
부산 도시철도 1호선
자갈치역과 남포역
...............영도대교(影島大橋).................
부산광역시 중구와 영도구를 연결하는 다리.
1934. 11. 23 길이 214.63m, 너비 18m로 준공.
개통 당시 이름이 부산대교였으며
1966년 9월 영도구 인구증가에 따른
교통량 증가로 도개 중단. 전차궤도 철거.
1980. 1. 30 부산대교 개통
영도대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러나 기존 영도대교 노후화
안정성 문제로 기존 다리 철거
도개식 교량으로 복원하였다.
복원된 영도대교는 매일 낮 12시부터
15분 동안 교량 상판이 들어 올려지는데
이 드는 다리 길이는 31.3m, 무게는 590톤.
2분만에 75도 각도로 세워진다.
원래, 도개 시간은 12시였으나,
2015년 9월 14시로 변경되었다.
.............................................
6.25당시.,영도다리
2016.09.04 영도대교.
부산 중구, 영도구
'갈맷길 3코스 2구간'
부산진시장 - (1.5km / 30분) - 증산공원 - (4.5km / 80분) -
초량성당 - (0.8km / 20분) - 부산역 - (2.3km / 40분) -
백산기념관 - (1.0km / 20분) - 부산근대역사관 -
(0.4km / 10분) - 국제시장 - (1.0km / 20분) -
자갈치시장 - (1.0km / 20분) -
영도대교 - (3.2km / 60분) - 남항대교
'선사시대~부산 근대사' 전시장 부산박물관
실제 현장은 우암동 장고개 ~문현동 곱창골목
~ 자성대, 진시장, ~ 정공단, 증산~ 산복도로.
부산역~ 옛 부산 초량 해안선 따라 차이나타운
영선고개를 넘어 피난시절의 애환이 서린 40계단.
대청로를 건너면 백산기념관과 용두산 타워가 있다.
용두산 일대는
옛 왜관 터이며
국제시장도 있다.
남포동 극장가 지나
자갈치시장을 지나치면
6.25 전쟁때 피난민의 추억과
애환이 서린 영도대교가 나타난다.
.............부산광역시 연혁.............
1950년 부산은 6·25전쟁이 일어나자
1950년 8월 18일~ 1953년 8월 15일까지
남한의 임시수도로 반격의 기지가 되었으며,
전국에서 피난민이 몰려들어 인구가 급증했다.
1951년 유엔군 전사자가 늘자
대연동에 유엔묘지가 조성된다.
1955년 인구가 100만 명을 넘어
1957년에 6개 구청을 신설하였다.
1960년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연일 일어나 인근 각 지방으로 퍼져나갔다.
1963년 정부직할시 승격 후, 동래군 구포읍·
사상면·북면 및 기장면 송정리를 편입하였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
1973년 남해고속도로 개통
1976년 김해국제공항을 개설.
1978년 김해군 대저읍·명지면
가락면 일부를 편입하였다.
1983년경상남도 도청이 창원시로 옮겨갔다.
같은 해에 낙동강 하구언공사가 시작되었다.
1987년 지하철 제2단계 구간이 개통되었다.
1989년김해군 가락면과 녹산면이,
의창군 천가면이 각각 편입되었다.
1995년 1월 1일 직할시에서 광역시로
3월 1일연제구·수영구·사상구 기장군 설치.
부산만의 해안선과 낙동강 하구 및
내륙의 부산진·동래지역은 선사시대
유적이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는 곳이다.
해안과 강변의 동삼동·다대포·금곡동 등
신석기시대 패총이 있으며, 내륙의 동래·
전포동에는 철기시대의 패총이 있다.
그리고 동래지역과 사하지역의 여러 곳에서
청동기시대 고인돌과 각종 유적·유물들이 발견.
영도구 동삼동패총(사적 제266호)은
신석기시대의 여러 문화층이 겹쳐져서
우리나라 선사문화 연구에 중요한 유적.
동래구 낙민동 동래패총(사적 제192호)은
초기철기시대의 제철노지(製鐵爐址)가 발견.
................................................................
해운대
'부산 전역에 조성된 탐방로'.,갈맷길.
부산의 시조인 ‘갈매기’와 ‘길’의 합성어.
부산광역시 시민 공모를 통해 확정한 이름.
‘갈매’는 순수 우리말로., ‘깊은 바다’ 뜻말.
2009년부터 부산의 산과 강, 바닷가에 조성.
제주 올레길이 지핀 둘레길 걷기 바람도 한몫.
탐방로는 전체 184개소, 총연장 863㎞.
제주올레 빼면 육지에서 가장 빠른 행보.
2010년 유형 별 갈맷길 21개 코스를 지정.
해안 길 6곳(109㎞)
강변길 3곳(48.5㎞),
숲길 8곳(107㎞),
도심 4곳(37㎞)
총연장 302㎞
부산이 추천하는.,갈맷길 21선
안내책자 및 코스 안내도.,발간.
..............해안길...............
가덕도 둘레길, 장림~다대포~
두송 반도 해안 산책로, 암남 공원~
절영도~태종대 길, 광안리~이기대~
자성대 길, 해운대 삼포 길, 대변 해안길
.........................................................
.............강변길.........
낙동강 하구 길, 수영강~
온천천 길, 회동 수원지 사색길
............................................
............숲길.............
금정산 길, 승학산 능선,
장산 너덜길, 백양산 길,
황령산 길, 일광 테마 임도,
봉래산 둘레길, 엄광산 구봉산길
...............................................
............도심길.............
동래 문화 유적지 탐방 길,
근대 역사의 길, 원도심 옛길,
부산포 흔적길 2011년 9월 18일
‘제1회 부산MBC 갈맷길 트레일 러닝’
대회가 개최되었으며, 2011년 10월
제3회 부산 갈맷길 축제가 열렸다.
...............................................
700리 갈맷길은 개설 이래.,부산 시민과
외지 관광객들로부터 크게 각광받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들의 애환이 가득한 곳.
.
부산 중구의 충무동, 남포동, 광복동,
자갈치시장 일대를 남포동이라 부른다.
이곳은 6.25 한국 전쟁이 만들어 낸 지역.
당시 부산으로 밀려든 피난민들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큰 시장이 있는 중구로 몰려들었고
용두산 일대는 판자집으로 가득 찼다.
국제시장, 자갈치시장에서
전시물자 등이 유통되었고,
생계를 위해 장사에 뛰어든
피란민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며
남포동 상권은 나날이 커지고 발전.
1950년대 국제시장
2015년 국제시장
오늘날, 남포동은 패션, 영화,
문화중심지로 더욱 유명해졌고,
자갈치시장은 한국에서 가장 큰
수산시장으로 여전히 북적인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고 있는 남포동 일대.
한국전쟁 때는 혼란에 빠진
부산 피난민들을 끌어 안았고
지금도 부산을 찾는 객지인들을
어머니의 포근한 품처럼 안아준다.
부산은 1899년 대교동·남포동 일대 매립.
항만이 조성되면서 시가지가 형성되었다.
남포동· 광복동· 동광동 등이 중심 시가지.
1945년 8. 15 해방 후, 공업화.
시청 부근의 도심과 함께 서면과
온천장 일대 부도심지 형성되는 등
공업지역과 상업지역이 재편되었다.
남포동 일대는 쇼핑 서비스 업종.
밀집된 지역과 업무지구로 나뉜다.
북구·사하구 지역에 공업지역 형성.
현재, 대단위 택지개발이 진행되었다.
1970년 184만 2,259명,
1990년 379만 7,566명
2013년 353만 8,285명.
...................
...................
.
1945년 부산 인구수는 28만 1,160명
6·25전쟁 때 피난민이 대거 정착하여
1955년 100만 명을 넘는 대도시로 성장.
부산 자갈치시장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에
피난민들 애환이 가득한 곳.
1950년 6월 25일에
북한이 남침한 전쟁.
낙동강전선에서
치열했던 공방전.
1950년 9월부터 미군의 대대적인 원산폭격
수개월째 이어질 때 많은 군인과 피란민들은
가까운 흥남으로 몰려들어 흥남철수가 이뤄졌다.
흥남철수는 1.4후퇴의 시작
원산폭격과 또한 무관하지 않다.
1.4후퇴(January-Fourth Retreat).
원산폭격은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적을 교란하기 위해 벌인 것이라 한다.
개미 한마리 살아남기 어려웠을 정도 폭격.
원산폭격은 원산 초토화 작전이었기에,
1968년 미 해군 ‘푸에블로’호 북한에 나포.
‘원산폭격에 대한 보복’이라는 논평도 나왔다.
1950년 12월 크리스마스 즈음에
나는 원산에서 어머니 등에 업혀 피난.
원산폭격 속에서 겨우 흥남부두까지 탈출.
원산 앞바다에는
기뢰가 가득 깔려
원산항은 이미 폐쇄.
당시 원산에서 월남할 수 있는
유일한 피난 출구는 흥남부두 뿐.
그곳 유엔군 철수함대 동승 피난길.
내 기억에는 없지만
영하 27도 혹한 속에서
미군함 마지막 배에 동승.
그 마지막 배를 탈 수 있었기에
북한 공산학정 탈출 성공은 기적.
흥남부두에 몰린 30만 피난민 인파.
배를 탈수 있었던
피난민은 10만 미만.
생전 어머니 말씀은 극적으로 목숨을 부지.
1951년 한때 거제도 난민수용소에서도 살았고
그후, 부산 좌천동 방공호 속에서 피난생활을 했다.
북한 공산주의 학정 속에서
공산당에게 시달리다 죽느니
맨몸 피난을 선택하신 부모님.
일제 태평양전쟁 징용을 피해
아버지 어머니 고향 북청을 떠나
만주 목단강 길림성 등지 피난생활.
길림성(吉林省 : 발해 수도 동경)
그곳에서 누나를 낳고.,삼각무역
소련 일본 중국' 국경을 넘나드셨다.
.
아버지는 20대에 이미
자수성가 성공을 하셔서
북청 10대 상인으로 꼽혔다.
어머니는 함경도
새끼줄 꼬기 대회 1등.
생활력이 강한 분이셨다.
새끼줄을 꼬면
보통 사람들의
걸음걸이 속도와
엇비슷할 정도였다.
생활력이 워낙 강하신 부모님
맨손 피난을 겁내지 않으셨던 것.
'돈은 어디가서 언제든지 벌면 된다.'
확고한 신념과 자신감을 갖고
맨손 피난을 결행하셨다는 부모님.
공산학정은 그만큼 견디기 힘드셨던듯.
중공군은
한국전쟁이
일어날 때부터
휴전 때까지 개입.
장진호 전투에서는
유엔군을 상대로 하여
첫 인해전술을 전개한 것.
화력이 우세한 유엔군
공군 B-29 폭격기에게
제공권을 빼앗긴 중공군.
유엔군보다 보병 숫자가
10배나 되는 지상군을 투입.
유엔군 보급선 차단으로 맞대응.
백두산까지 진격했던 유엔군.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온 중공군
점령지였던 평양과 원산을 내주고
1950년 말 '흥남부두 후퇴작전' 전개.
이것은 곧
1951년 1.4후퇴
작전의 시작이었다.
중공군은 피해를 크게 고려하지 않고
수적으로 압도하는 파상적인 공격으로
유엔군을 돌파, 포위, 침투를 병행한 전법.
즉, 압도적인 병력투입으로 돌파구 형성.
유엔군 진지로 침입하여 방어 지역을 분단,
중공군 지역에 고립시키는 공격 전법을 사용.
'유엔군' 참전 병력의
10배가 넘었던 중공군.
중공군의 파상공세는
썰물처럼 빠져 나갔다가
밀물이 갯벌을 삼키듯 했다.
자칫, 깊게 빠져들면
헤어나올 수 없는 갯벌.
중공군이 11월 27일 제2차 청천강 전투와
장진호 전투를 일으켜 국제 연합 사령부는
중공군의 파상공세로 인해 전세가 불리해져,
1950년 12월 8일에 '흥남 철수' 지시를 내렸다.
12월 15일 미국 1 해병사단을 시작으로
12월 24일까지 열흘간 철수가 이뤄졌다.
장진에 머물렀던 미국 1 해병사단도
12월 24일에 마지막으로 흥남에서 철수
평양은 12월 4일에 국군이 포기하고 철수.
1950년 12월 6일 북한이 평양을 수복하였다.
..............................
..............................
북한은 남침 적화통일을 목적으로
1950년 6,25 이전부터 군수물자 생산.
북한은 김일성 집권 직후부터 전쟁준비.
그러한 막후에는
소련의 스탈린과
중공의 모택동의
공산당.,공산주의.
사유 재산제 대신에 재산의 공유를 실현하여
평등사회를 이룩한다는 공산주의 운동 및 사상.
19세기 중엽 마르크스 & 엥겔스(Engels,F.)에 의해
창시되어1917년 10월 볼셰비키에 의한 사회주의혁명.
1919년 3월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Comintern)’이 창설
이때부터 한반도에서도
'코민테른'의 영향을 받아
공산주의운동이 시작되었다.
공산주의 사상은
가장 짧은 시기에
거의 소멸되었지만
인류 역사 상 가장 큰
대학살 및 전쟁을 일으켜
수천만 인류를 죽게한 주범.
.....................
.....................
1950년 6.25 한국전쟁때 미군 B-29 폭격.
원산 시내에 2층 건물은 1채도 남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제2차대전 및 태평양전쟁 군수물자
대규모 공업단지들이 가득 조성되어 있었던 원산.
원산은 금강산 출입 관문이었고
동아시아 해상 국제무역 중심항구.
우리나라 3대 도시.,'서울 평양 원산'
3.8선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남한의 2대 도시는 서울 부산.
북한의 2대 도시로는 평양 원산.
원산은 일제강점기는 물론
1945년 8.15 해방 직후까지도
한반도에서 가장 살기 좋았던 곳.
그러나, 1950년 6.25 한국전쟁
3년 동안에 폐허가 되었던.,원산 일대.
전쟁 피혜가 가장 참혹했던.,역사의 현장.
2017.07.05 부산 남포동 60년 전통.,원산면옥.
원산 명사십리 해수욕장.
원산 갈마반도.,명사십리 해수욕장
2015.01.01
......................원산시.......................
1914. 8. 16. '서울~원산' 경원선 223.7km .
철로는 비무장지대 남북한 31km구간 단절
1950.6.25 전쟁 전까지 국가기강망 물자수송
금강산의 사실 상 관문인 국제적 관광지
외래관광객에게 개방되고 있는 지역이다.
북한에서는 부산과 유사한 국제 항구도시.
1771년(영조 47)에 창건된 명적사가 현존
명사십리해수욕장은 북한의 최대 휴양지.
송도원에는 현대적 대규모 위락시설을 갖춘
송도원유원지, 송도원국제관광호텔 등이 있다.
천연기념물 명사십리(북한 천연기념물 제193호)
1946년 9월 함경남도에서 강원도로 편입
도소재지도 철원에서 원산으로 옮겨졌다.
즉, 그 무렵 '강원도 도청소재지' 원산(元山)
원산은 농업이 발달했으며 쌀이 주로 생산된다.
도시 주민들을 위한 배추·무·시금치·오이·가지 등.
감, 호도 재배에 치중하고 있으며, 원산배가 특산물.
.
젖소·돼지·염소·토끼·양 등도 사육한다.
수산업은 원산수산사업소와 양식사업소
중심으로 명태·가자미·청어·굴·해삼 등 어획
조선·기계·방직 공업의 중심지,
버스·트랙터·기차 등도 생산된다.
원산조선소와 선박수리소가 있다.
충성트랙터공장,
공인자동차수리공장,
전동기공장, 텔레비전 조립공장,
송도편직물공장, 원산방직공장 등이 있다.
그밖에 일용품·화학·가구·
옥수수가공·수산물가공 공장
강원선(고원-평강)이 통과하며,
평양을 연결하는 고속도로를 비롯
함흥·통천·고성·고산·평강과 연결도로.
원산농업대학·
동해대학(옛 수산대학)·
원산공업대학(공장대학)·
송도원대학(옛 의학대학)·
정준택경제대학·
이수덕대학(옛 교원대학)·
원산제2사범대학 등 10개 대학
70여 개교의 각급 학교와 탁아소·
유치원·영화관·도서관 등이 있다.
............................................
'원산항 함흥항 흥남항'
삼국시대부터 동해 3대항
조선 태조 이성계(1335~1408)가
1408년 승하하면서 고향인 함흥에
묻히길 원했으나, 유명을 따르지 못한
아들 이방원이 함흥 억새와 흙을 가져다
봉분 위에 덮어.,건원릉은 억새로 덮혀있다.
함흥은 본래 옥저·고구려의 땅
고구려 멸망 후 당과 발해의 영토
그뒤 여진족의 할거지가 되었으나,
1107년 고려 예종 2년 윤관이 여진 정벌.
그후 한때 원나라 영토가 되기도 하였다.
1356년(공민왕 5) 유인우와 이자춘이
쌍성을 수복하고 함주지사를 두었다.
조선시대 1416년(태종 16)에는 함흥.
1467년(세조 13) 이시애의 난으로
군으로 강등되었다가 1895년(고종 32)
함흥군을 부로 승격, 1910년 도청소재지.
흥남항은 1960년 함흥시 흥남구역.
1927년 부전강·장진강 수력발전소 완공.
'국내 제1 전원지' 중화학공업단지로 부상.
동해안 제1의 항구였으며 6·25전쟁 당시에는
자유를 찾는 피난 대열이 아비규환을 이룬 곳.
.
지금 흥남구역에는
흥남종합비료공장·
흥남자동화기구공장·
제17호병기공장·흥남제철소·
흥남제련소·제약공장 등이 있으며,
흥남항을 통한 원료·생산품 수송체계.
흥남항 10.5km를 따라 사빈해안
그 앞바다에 대진도·소진도 등 섬들
흥남항 동쪽에 있는 서호항을 중심으로
정어리·대구·명태·청어·꽁치 등이 어획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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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과 함흥은
우리나라 냉면을
대표하는 고장이다.
그 다음으로는
황해도 해주냉면.
경상도 진주냉면.
평양과 함흥은 냉면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물냉면은 평양냉면,
비빔냉면은 함흥냉면으로 알지만
그것이 본질적인 차이점은 아니다.
......평양냉면 & 함흥냉면........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을 구분하는
본질적인 차이는 면을 만드는 재료.
평양냉면은 메밀로 면발을 뽑는 반면
함흥냉면은 감자 전분으로 뽑는 국수.
평양냉면은 순메밀로 만들기에
구수하고 담백하며 툭툭 끊어진다.
반면 감자녹말로 만든 함흥냉면은
쇠심줄보다 질기면서 오들오들한 맛.
평양에서 냉면은 원래 겨울 음식.
늦가을 메밀로 국수를 뽑아야 제격
함흥을 제외한 타 지역 냉면은 메밀.
유독 옛날부터 함경도에서만
감자녹말로 국수를 뽑은 까닭에
독특한 맛의 함흥냉면이 발달했다.
함경도는 지형이 험해
메밀 대량 재배가 불가.
메밀이 부족하다가 보니
감자 녹말로 국수를 뽑았다.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에서
최초 감자 재배지역 함경도.
1824년과 1825년 순조 갑신년과
을유년 사이에 만주의 심마니들이
두만강 넘어 함경도에 감자를 재배.
함흥냉면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냉면은 아닌 녹말국수 농마국수.
북한에서는 "농마국수"라고 부르지
함흥냉면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는다.
함흥냉면 특징은 냉면에 회를 얹는 것.
냉면에 홍어회, 가자미식해, 명태식해.
이것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1910년 전후.
.
감자가 우리나라에 최초로 전해진 1824년
종자 개량을 통해 보급된 것은 1900년 전후.
따라서, 함흥냉면은 20세기에.,발달한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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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이미 명성을 떨친 평양냉면
함흥냉면은 그로부터 1세기 후에 등장.
그로부터 전 국민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맥아더장군은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위해
사전에 전술적 작전의 일환으로.,'원산폭격'.
한편, '유엔군 1.4후퇴 작전'을 위한 사전공작.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한 맥아더
“유엔군이 원산 일대 상륙작전을
감행할 것”이란 거짓 정보를 흘렸다.
맥아더는 거짓정보를 진짜로
믿게 하려 원산에 대대적인 폭격
1950년 원산 정유공장 폭격,
우리나라 정유사업의 시작은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는 전쟁 수행에 필요한
군수물자를 통제하기 위해
석유비축 ‘석유업령’을 공표.
한반도를 대륙침략의 발판기지로
병참 기지화한 일본은 1935년 6월
조선석유주식회사를 세우고, 1938년
8월 원산에 연산 30만톤 정유공장 건설.
원산 공장 건설 후 머지않아 미국이
일본에 석유 공급을 제한함에 따라
가동이 중단되고, 해방을 맞게 된다.
일제 치하에서 미국의 스탠다드(Standard),
텍사스(Texas), 그리고 영국의 쉘(Shell) 등
3개 메이저 회사가 우리나라에 진출한다.
스탠다드는 휘발유와 등유 제품에
용마(Pegasus) 브랜드를, 쉘은
전통의 붉은 조개 문양을 사용했다.
이들은 해방 직후까지
우리나라에서 영업지속
해방 후 미군은
석유 제품의 수입,
배급 기관으로 미 군정청
‘석유배급대행회사’를 설립
조선석유주식회사도 미 군정 관리를 받는다.
1949년 초 석유 저장 판매 업무를 주관하는
대한석유저장주식회사(KOSCO)가 세워진다.
그러나 1949년 10월 KOSCO는
저장 업무만을 관장하게 되었고
판매는 스탠다드, 칼텍스, 쉘 등이 맡았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외국 3사가 철수한 이후 군용 유류와
수입 석유가 국내 시장을 장악한다.
1962년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그 일환으로 정유 공장 건설계획 수립
1962년 10월 대한석유공사가 설립되고,
1964년 대한석유공사가 대한석유저장
주식회사의 시설과 업무를 인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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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폭격
1953년 원산역 폭격사진.
화진포해수욕장
고성 화진포 해수욕장 .,김일성 별장
북한에서는 물이 가장 따듯한 해수욕장
남한에서는 피서철에 가장 적당한 휴양지.
그래서, 이승만 별장도 있는.,화진포.
이승만 별장은 숲이 시원한 산속에 있고
김일성 별장은 물이 따듯한 바닷가에 위치.
현재, 화진포해수욕장 군인휴양소 내에 위치.
2006.11.03 금강산 관광지도
2011.11.29
2014.06.14
2017.09.28 원산
2017.09.11 원산
2018.01.17 원산., 마식령 스키장.
원산 골프장
..........우리나라 골프의 유래..........
한국 골프의 시초는 1897년 무렵에
함경남도 원산을 통해 처음 들어왔다.
1900년경 원산항 한국정부 세관관리로
고용된 영국인들이 세관 안의 유목산
중턱에 6홀의 골프장을 만들어 경기.
1913년 원산 근처 갈마반도(葛麻半島)
외인촌과 황해도 구미포에도 외국인 코스
"나무울타리로 막아 일본인 출입도 금지하여
골프장 규모는 알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 골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조선 영친왕(英親王)이다.
영친왕 부처는 1924년 무렵부터
일본에서 골프를 치기 시작해서,
이따금 서울에 와서 골프를 즐겼다.
1921년 조선철도국은 미국인 댄트 설계로
서울 효창공원에 9홀 골프코스를 만들었다.
1923년 일대가 공원으로 지정됨에 따라 폐장.
1924년 이왕가(李王家) 청량리로 옮겨 18홀 완공
‘경성골프구락부(京城俱樂部)’라는 골프클럽이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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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폭격'은 '뒷짐진 채로 허리를 굽혀
머리를 땅에 박으라.'는., 구령이나 동작.
B26폭격기 투하 소이탄., 작렬
원산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기 전까지 6.25전쟁 내내 폭격.
평양은 B-29 전투기로만 미군이 공습.
원산은 B-29, 전함, 순양함 등 폭격.
함경도 군수공장에서 생산된 무기들이
원산을 통해서 남한 지역에 전달된 때문.
원산은 무려 3년 동안 미군이 집중폭격
북한이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했던 것은
전쟁 중반에 북한 해군과 공군이 이미 소멸.
물론 전투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운용한 전투기는 소련조종사가
조종했기에 북한 자체 조종은 불가했다.
북한에게 항구도시 원산은 목구멍이며
당시 평양 만큼 북한의 군사적인 요충지.
미군에 의해 전쟁이 끝날때까지 계속 폭격.
평양에는 건물이 두채 정도 남았지만
원산은 사람이 사는 가옥 한채도 없었다.
1953년 원산은 달 표면 같은 폐허 그 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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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인천상륙작전 하루 전
1950년 9월 14일에 첩보를 통해서
유엔군 상륙작전을 사전 간파했지만
그곳을 원산으로 오인해 손쓰지 못했다.
그 사실이 러시아 국방부
중앙문서보관소 기록을 통해
드러났으며 맥아더의 성동격서
거짓정보 작전이 성공한 것이다.
'1950년 음력 1월 2일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
그해에 태어난 내가 겪었던., 6.25 전쟁과 9.28 수복.'
그해 크리스마스 무렵 나는 흥남부두 미군함을 타고 피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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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 속에는 전혀 없지만
어릴때 부모님이 들려 주시던
나의 젖먹이 시절의 피난 이야기.
어머니는 7자식 중에서도
각별하게 늘 나를 보살펴주셨다.
피난둥이라 가장 병약했던 아들인 때문.
나는 원산 출생인 젖먹이 시절
원산폭격에서도 죽지 않았던 것은
어머니의 지극한 모성애 덕분이었다.
미군 B-29 폭격 때마다
어머니는 나를 등에 업고서
뛰다시피 원산 반공호로 대피.
그 덕분에 나는 기적적으로 생존.
그후로도 일평생 자나깨나
어머니께서 가장 두려워하신 것은
어머니 귀속에서 만 울리는.,B-29 환청.
자신이 죽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자식의 생사가.,염려.
한밤중 깊은 밤 잠결에도
미군 B-29 소리가 들려 오면.,
나부터 등에 업으셨다는 어머니.
6.25전쟁 때 원산폭격은
그만큼 무서웠던 것 같다.
1950년 12월 15일 ~ 12월 24일.,미군의 흥남 철수작전
약 10만 피난민을 함흥 흥남부두에서부터 부산으로 수송.
오늘날, 그 피난민들의 향수를 달래주는 전통음식.,함흥냉면.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서
피난민들이 생존을 위해
국물 없는 매운 음식으로
혹한 추위를 달랜 함흥냉면.
화장실 귀한 흥남부두에서
피난선인 군함을 탈 순서를
줄서 기다리다가 먹은.,음식.
추위를 이길
따듯한 국물은
상상조차 못하는
사치한 음식이었다.
약 30만 피난민 인파가
흥남부두로 몰려 들었다.
1945년 부산 인구 28만보다
훨씬 더 많은 피난민 인파였다.
북한의 공산주의 학정이
얼마나 치를 떨 정도인지
대변을 해주는 역사의 현장.
전쟁터 못지 않았던.,흥남부두
난리통에 겨우 먹었던.,함흥냉면.
화장실 갈틈 조차 없었던 피난민들.
당시 흥남부두에 몰려든 피난민이 약 30만명
그중에 겨우 배를 탄 피난민은 10만여명에 불과.
당시 피난민을 태우기 위해 군수품까지 버린 미군.
젖먹이 엄마, 노약자 우선순위로.
배에 승선할 수 있었기에 우리 식구는
젖먹이인 나 덕분에 겨우 탈 수 있었단다.
그러나, 피난 보따리 짐은
모두 부두가에 버려야했고
우리 식구는 모두 맨몸으로
군함을 탄 것 만도 다행이었다.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가사처럼
눈보라가 휘날리는 흥남부두에서
엄마 등에 업혀 피난길에 오른.,나.
...............흥남철수(興南撤收).............
중공군이 한국 전쟁에 개입하여 전세 불리.
1950년 12월 15일에서 12월 24일까지 열흘간
동부전선 미국 10(X) 군단과 대한민국 1군단을
흥남항에서 피난민과 함께 선박으로 철수한 작전.
미국 역사상 가장 고전한.,'장진호 전투'.
미국 1 해병 사단은 자신의 10배에 달하는
12만 중국군 남하를 지연시켰으며, 중국군
12만 포위를 뚫고 흥남에 도착해 흥남철수
남으로 탈출한 후퇴작전은 1.4 후퇴의 시작.
장진호 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은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12월 원산이 적중에 넘어가 퇴로가 차단되자
흥남 해상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으며, 흥남주변에
10만 북한주민들도 유엔군 도움을 받아 선박으로 월남.
한국정부는 유엔군이 중공군에게 밀려 평양을 포기
1950년 12월 4일 평양시 전 행정기관을 철수시키고
38선 접경 및 그 이북 전역에 다시 비상계엄을 선포.
아울러 정부는 자유를 찾아 남하하는
50여만 명에 달하는 이북 피난민동포
구출을 위한 긴급조치를 취하였다.
1951년 1·4 후퇴를 전후하여
많은 북한 주민들이 월남했다.
중공군 역습으로 가장 위급한 상태에 있던 유엔군
육로와 동해 해안 방면으로., 신속하게 후퇴하였다.
따라서 유엔군에 속한 해군은 서해에서의 철수보다는
흥남에서의 대규모 철수작전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1950년 12월 서부전선으로 북진한
제8군은 육로로 후퇴할 수 있었지만
동부전선 장진호 방면으로 북진했던
미군인 제10군단의 병력은 원산지역이
중공군에게 넘어가자 퇴로가 차단되는
지형특성 상 해상철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
장진호 전투 시 하갈우리에는 현지 주민 및
함흥 방면에서 올라온 주민들이 전투를 피해
계곡 동굴에 숨어 있다가 미군이 진주하자 운집.
피난민들은 영하 27도의 추위 속에서
중공군 공격을 방어하면서 작전기지인
함흥, 흥남으로 천신만고 끝에 후퇴했다.
원산 주둔 미 제3사단도
중공군이 남쪽 퇴로를 막아
이곳 흥남부두로 이동해 왔다.
이때 집결 병력은 10만 5천여 명.
1950년 12월 9일 맥아더 원수의 철수명령.,하달.
미합참 철수를 승인함으로써 흥남철수작전 개시.
.
같은 해 12월 11일부로 미 제1해병사단의 병력과
장비가 탑재되기 시작하여 같은 달 14일 선적 완료.
되었으며, 같은 달 15일 흥남부두에서 출항하였다.
이후 축차적으로 유엔군 부대와 국군 제1군단이
12월 23일(해군 기준으로 24일)까지 흥남철수 완료.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은 처음에
6백 톤 무기와 장비를 수송해야 했기에
피난민 수송이 어렵다면서 난색을 표명.
이때 국군 제1군단장 김백일 장군과
통역인 현봉학의 설득으로 군함에서
마지막 남은 공간에 피난민 수송 허락.
피난민 승선이 허락되자 부두는
아비규환 아수라장으로 변하였다.
LST 한 척에는 정원10배 넘는 5천명이 승선
30만 인파 중 배를 탄 피난민은 9만 1천여 명
피난민 승선을 위해 그대신 4백톤 폭약과 차량,
장비 등 5백 60만 톤의 군사 장비가 유기되었으며,
승선이 끝난 후 해군 함대와 폭격기가 집중사격 폭파.
1950년 12월 25일.,흥남부두 폭파
흥남철수작전은 여러 가지 기록을 남겼다.
10만 명이 넘는 병력과 17,500대의 각종 차량,
35만 톤의 물자를 함정으로 완전하게 철수시켰다.
그 과정에서 한국군 지휘관들의 강력한 주장으로
남행을 결심한 피난민 9만여 명까지 포함되었다.
이와 함께 항공기를 이용해 병력 3,600명과
차량 196대, 1,300톤의 물자를 철수시켰다.
흥남철수작전은 대규모 육해공
합동작전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작전 성공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상당한 전투력을 보존해 다음 단계
작전을 무사하게 수행할 수 있었다.
...............................................
김백일 1군단장과 10(X) 군단 소속의
민간인 고문관 현봉학은 에드워드 알몬드
10군단장을 설득해 피난민 철수까지 성공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흥남 철수 마지막 상선.
온양호는 가장 마지막에
흥남부두를 떠난 배였다.
메러디스 빅토리호
레너드 라루 선장의
결단에 따라 선적했던
무기를 전부 배에서 내리고
피난민 1만 4천여명을 태워
남으로 철수에 성공함으로써,
가장 많은 사람을 태우고 항해한
배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또한 절박한 피난길 중에
사람 많아 비좁은 배에서
5명의 새 생명이 태어났다.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는
흥남철수작전기념비에는
10만명의 인명을 구한 6명의
영웅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피난민을 가득 실은 군함.
1950년 7월 설치된 부산 포로수용소
1951년 3월에는 피난민수용소로 이용,
1951년 부산진역.
피난민수용소 시설들.
국제시장은 피난민 시장.
피난민들 간에
물물교환 상거래.
시 레이션, 군용담요,
군복, 군수물자 생필품.
본국으로 돌아가는
미군 및 유엔군들의
군수물자들 유통시장.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1950년 8월 포로 수가 2000명에서 그해
12월에 13만명으로 급증하자 관리에 문제.
고심하던 유엔군 사령부는
거제도에 새 수용소를 설치.
그당시 거제도 인구는 주민 10만 명,
피난민 약 15만 명, 포로 17만 명 등
약 42만 명의 사람들이 거주하였다.
수용된 포로들은 반공포로와
친공포로로 이념이 대치되어
유혈살상 사건이 자주 발생했다.
또한, 1952년 5월 7일에는
수용소 사령관 돗드준장이
포로에게 납치되어 4일만에
풀려나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냉전시대 이념갈등 축소판 현장.
............문제인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은 피난민 아들이다.
6.25 전쟁때 남으로 피난온 부모님이
처음 정착한 곳은 거제도였고, 그 이후
북한출신 피난민이 많이 살던 영도로 이사.
부친 문용형씨는 함경남도 흥남의
문씨 집성촌인 솔안마을 출신이다.
원래 흥남시청 농업계장,
농업과장으로 근무했으나
한국전쟁때 아내 강한옥씨와
거제도 피난민 수용소로 남하.
그곳에서 문 대통령을 낳았던 것.
문 대통령이 가장 존경하는 아버지.
문 대통령은 2남3녀 중에서 장남이다.
누나 문재월씨, 여동생 문재성씨 주부
남동생 문재익씨는 원양어선 선장이다.
막내 여동생 문재실씨는 모친을 모시고
부산 영도에서 살고 있으며 문 대통령은
1981년 경희대 2년 후배인 김정숙씨와 결혼
슬하에 1남(문준용) 1녀(문다혜)를 두었다.
자녀교육관으로 자식들이 좋아하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했다고 말했다.
아들 준용씨는 장인이 목사
2011년에 광주비엔날레 작품 출품
문 대통령의 딸 다혜씨는 회사원이다.
부인 김정숙 여사와
인연은 학생운동에서
시위 도중 문 대통령이
최루가스를 맡고 실신 때
대학 2년 후배인 김 여사가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준 것.
김여사는 입대한 문 대통령을
첫면회 때 일반적인 통닭 대신에
안개꽃을 들고 왔다는 일화가 있다.
문 대통령의 처가에 대해
알려진 내용이 거의 없다.
.
장인과 장모가 서울 동대문
광장시장에서 한복집을 했으며,
문 대통령과 김 여사의 결혼 당시
강화도에서 목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
거제포로수용소는 1951년 2월부터
고현, 수월지구를 중심으로 설치되었다.
1951년 6월말 인민군 포로 15만, 중공군
포로 2만명등 최대 17만3천명 포로 수용.
그 중에 300여명의 여자 포로도 있었다.
흥남부두에서 피난민을 싣고
부산에 도착한 배는 세계역사 상
유래 없는 1만4천명 피난민이 승선.
당시 부산은 이미 피난민으로
가득차 우리는 있을 거처가 없어
거제도 난민수용소에서 임시 피난살이.
당국에서 일주일만 있으라 해서 들어간 것.
거제도는 포로수용소 전용시설로 바뀐 이후
그곳에는 인민군과 중공군 포로들로 넘쳐났다.
그 포로들 간에 이념전쟁으로 그곳 또한 전쟁터.
그래서, 더 이상 머물 수 없어
그곳에서 나왔던 피난민들은 부산
좌천동 산비탈 난민촌으로 많이 이주.
1970년대 부산 좌천동
그곳도 이미 만원이라
갈곳없던 우리 식구들은
부산 좌천동 산비탈에 올라
그곳 토굴 반공호 속으로 이사.
반공호 토굴 속 한구석에
운좋게 자리잡을 수 있었고
임시로 가마니를 깔고 살았다.
겨울 땅속의 한기를 막으려 가마니를 깔고
담요 속에는 끓인 물을 통에 넣어 안고 잤고
토굴 우풍은 밀가루 포대 바람막이로 막았다.
그때 젖먹이였던 나는
누나가 좌천동 개울가에서
나를 업고 고무줄놀이하다가
잠깐 내려놓은 사이에 기어가
'좌천' 깨진 항아리 위로 떨어져
이마에 큰흉터가 지금도 남아있다.
당시, 젖먹이 시절
병약해 겨우 목숨을
부지한 것 만도 기적.
그로부터 어머니는
나를 등에 업으시고
좌천동 산꼭대기에서
자갈치시장까지 매일
행상때 업고 다니셨다.
찐고구마 행상을 하시면서
등에 나를 업고 다니셨는데
내가 얼마나 무거우셨을까?
6.25 전쟁 전까지는 40만 인구 도시였던.,부산
6.25전쟁 중 피난민이 몰려와., 200만 인구 도시.
공산주의 학정에 쫓겨 고향을 등진 160만 피난민
피난민들에게는
생리현상 해소가
가장 큰 애로사항.
공중 화장실마다 끝 없는 행렬.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줄서기 전쟁.
날마다 분초를 다투는.,다급함의 연속.
부산 산비탈마다.,난민촌
6.25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남북이 휴전선으로 가로 막혀
고향을 잃고 갈 곳 없던 피난민들.
'굶어죽지 않고
얼어죽지 않은 것만 해도
기적이었던., 1950년대 유아 시절.'
낯선 타향 피난살이 어머니는
영양실조로 젖이 잘 나오지 않아
동냥 젖으로 연명 했던.,나의 유아기.
먹고 살 땅 한평 없는.,타향살이.
아버지는 영도다리에서 군복 장사.
피난길에 헤어진 일가친척 가족들을
영도다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던 때문.
그 덕분에 나에게
할아버지와 할머니
큰형은 영도다리에서
기적적으로 상봉했다.
6.25 때 한강철교.
6.25 전쟁 통에 엄동설한
원산에서 부산까지.,피난길.
폭격으로 끊긴 한강철교를 건너
영도다리에서 혈육 간 극적인 상봉.
그후로부터 아버지는
영도다리에서 국제시장으로
일터를 옮겨 밤낮없이 일하셨다.
부양가족이 3명이 더 늘었고
그후로도 제 자리를 잡지 못한
피난 내려온 친척들까지도 모두
거두어 생계를 부양해야 했기 때문.
그후에도 어머니는 자갈치시장에서
가족 생계를 위해서 자갈치시장.,행상.
어머니께서 항상 손에 끼고 다니셨다는
결혼반지를 팔아 마련했던 행상 장사밑천.
군함을 타고 맨몸으로
피난 나와 그것이 전재산.
그당시 어머니는 영양실조로 젖이 나오지 않아
젖먹이였던 나는 자갈치시장 동냥젖으로.,연명.
그곳 생선장사 아주머니들 동냥젖 덕분에 살았다.
'처음엔 피난민 아낙이 젖이 나오지 않자
품속에 젖먹이가 배고파서 우는 모습 만을
애태우고 바라보며 눈물짓는 안타까운 모습.'
피난민 아낙네
행상 좌판 위에는
찐고구마 뿐이었다.
그것이 당시
어머니 모습.
자갈치시장 생선장사 상인들은
피난민 아낙이 동냥젖 아기까지
등에 업은 모습이 안스러웠던지
생선 내장과 머리를 모아 주었다.
그 보답으로 어머니는 자갈치시장
생선가계 청소를 매일 거들어주셨고
행상 찐고구마 앞꼭지, 뒷꼭지를 따서
버리느니 그것으로 자식들에게 먹이셨다.
그렇게 해서
우리 가족들은
피난 난리통에서
아버지는 국제시장에서
군복 행상. 일당 막노동 등.
어머니의 고구마 행상 덕분에
한명도 굶어죽지 않을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은 혹한기에
부산 좌천동 산비탈 끝
방공호 속 움막에서 거주.
.
어머니는 하루도 빠짐없이
자갈치시장 찐고구마 행상.
그곳 생선장사들로부터 얻은
생선 내장과 머리를 얻는 대신
생선가계 마감 청소를 거드셨다.
그리고나서도 남부끄러워,
해가 떨어진 후에야 버려진
채소시장 배추잎을 주으셨다.
어머니는 찐고구마 행상 후 귀가길에
시장 바닥에 버려진 배추잎을 주워모아
생선 내장국 시래기국을 끓여주신 덕분에
우리 가족은 굶어죽지 않았고 끼니를 연명.
어머니는 자식들과 가족이
식사한 후에야 남은 음식으로
식사하셨기에 영양실조로 고생.
우리 가족이 방공호 속 추위에 떨때
세계각국에서 피난민을 위해 보내준
구호물자 옷가지로 혹한기를 견디었다.
어머니는 맞지않은
구호물자 옷가지들도
행상하는 동안 틈틈이
바느질로 수선하셨고
작은 옷은 털실을 풀어
다시 맞는 옷으로 고쳤다.
헤어진 양말은
그 안에 전구를 넣어
수선해서 다시 신겼다.
그러한 어머니의
알뜰한 살림살이
습관은 평생 계속.
쌀 한톨도 하수구로
흘려보내지 않으셨다.
근검절약 표본.,어머니.
7자식을 모두 다
대학을 졸업시키고
그 뒷바라지 하시느라
자신을 위해서는 일평생
한푼도 낭비하지 않으셨고
평생 일손을 놓은 적이 없었다.
좌천동굴 반공호에서
피난생활을 하다가
좌천동 단칸방으로
이사한 우리 가족.
산동네 단칸방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화장실과 생활용수 부족.
배급 식수를 받으려면
기나긴 줄을 서야 했고
공동 화장실도 줄서 이용.
다행히 세든 주인집 인심이 후해
그집 우물과 화장실을 쓸 수 있었고
어머니는 그집 안마당을 보답으로 청소.
어머니의 깔끔하고 부지런하신
모습이 주인집 마음에 드셨던듯.
부산 피난시절 맘 편히 지낸 산동네.
1970년대 부산 좌천동.
1950년경 부산.,자갈치시장
1950년대 부산 피난민 움막촌.
한국전쟁 휴전 후, 상경한.,우리 가족.
남북 분단으로 돌아갈 수 없는.,고향 땅.
남북통일 그날을 기다리며.,영등포에 정착.
5살까지는 내 기억 속에 거의 없지만
성장하면서 부모님에게 들었던.,이야기.
배고플 때 물로 허기를 채운 기억은 난다.
'그후에도 강냉이죽, 분유. 국민빵 .밀가루 .
선진국 구호물자 덕분에 연명했던., 모진 목숨.
영양실조로 입이 삐뚫어질 만큼 배고팠던 성장기.'
"너는 배가죽이 등에 붙었구나".
그 말을 늘 듣고 자란.,어린 시절.
1950년대 6.25 전쟁 고아
1인당 1달 생계비.,1달러.
6.25전쟁 참전 외국기자들이 국제사회에 온정을 호소.
얼어 죽고 굶어죽는 한국 전쟁고아들의 참상 사진을 소개.
그당시 홀트에서 미국 입양한 한국 전쟁고아 만.,1만 6천 여명.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전쟁고아 입양을 무제한 허가.
하우스
하우스 보이
전란 통에 자식을 굶어 죽지 않게 하려고
전쟁 고아로 입양시키기도 했던.,피난민들.
1950년 6.25 전란이 빚어낸 그당시 현실이었다.
"일제 치하가 힘드셨어요?"
"공산당 학정이 힘드셨어요?"
"6.25 피난살이가 힘드셨어요?"
"7자녀 뒷바라지가 힘드셨어요?"
근대 격변기를 모두 겪으신
1922년생 동갑나기 부모님.
"공산 학정"
"그 다음은요?"
"일제 치하."
"그 다음은요?"
"피난살이."
"........."
성장하면서 몇번 물었지만
부모님의 대답은 늘 같았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부모님.
19살에 함경남도 북청에서 결혼
20살에 일제 징병을 피해 만주 행.
목당강에서 아들 딸 두 자식을 출산.
24살에 1945년 8.15 해방 후 귀국.
26살에 북청에서 원산으로 이주 정착.
29살에 1950년 6.25 사변을 겪으신 후.
그해 9.28 수복 후 4자식을 데리고 피난살이.
30살에 피난처 부산에서 서울 영등포로 상경 정착.
33살에 이미 7 자식을 낳아 기르신.,부모님.
"공산 학정"을 말씀 하실 때마다 치를 떠셨다.
6.25 피난살이와 일제 치하보다 훨씬 힘드셨던듯.,
부모님 두분 모두
고인이 되실 때까지
'생전에 7자녀 뒷바라지는 얼마나 힘드셨을까?'
평생 힘든 내색을 한번도 하지 않으셨던.,부모님.
그 생각을 하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눈앞을 가린다.
2018년 어느덧
내 나이가 69살.
현재, 전세계 유일한 공산국.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민주주의로 포장된 공산당 집단.
.................부산 밀면............................
밀면은 부산에서 여름철에 즐겨 먹는 찬 국수.
부산 사람들에게는 여름이 되면 생각나는, 또한
한국전쟁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대표적인 음식이다.
밀면의 종류로는 물밀면과 비빔밀면이 있다.
구포 국수, 돼지국밥 등과 함께 6·25 전후하여
생겨난 함경도 피난민들의 대표적인 피난 음식.
부산에서 '소, 돼지, 닭' 뼈를
고아 우려 낸 육수에 면을 말아
먹는 향토 음식으로 정착되었다.
1952년 개업한
부산 밀면 원조
내호 냉면 대표는
함경도 출신 실향민.
“밀면은 원래 ‘밀 냉면’,
‘경상도 냉면’으로 불렸으나,
성질 급한 경상도 사람들이 ‘밀면’
줄임말로 부르면서.,그 이름이 정착”
북한출신 실향민들은
냉면이 먹고 싶었지만,
냉면의 주재료인 메밀을
구하기 어려워 구호물자인
밀가루에 감자가루를 섞어
냉면 면발과 비슷하게 면을
뽑아 냉면 대용으로 먹으며
시작된 것이., 부산의 "밀면"
밀면의 면발은 중력분에
전분을 첨가해 반죽한 후에
국수틀에 넣어 압착해 만든다.
밀면 면발의 쫄깃한 질감은
소금, 반죽, 반죽의 숙성, 면의
삶는 속도와 면을 헹구어 내는
냉수온도 및 횟수 등에 의해 좌우.
육수는 소나 돼지의 사골 뼈, 닭 뼈나
쇠고기 양지 및 사태 부위를 고아 사용.
.
고명으로는 돼지고기 편육, 무초절임,
무김치, 오이절임이나 오이볶음, 생채,
완숙 달걀과 지단채, 다진 양념을 넣는다.
전체적인 만드는 법은 동일하지만,
가게에 따라 많은 차이가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면의 질감, 육수를 낼 때
사용하는 재료, 고명과 양념 등 다양.
육수는 집집마다 제각각이라
다른 육수의 맛을 비교하면서
음미해 보는 것도 좋으며 밀면에
곁들인 반찬은 대개 무생채 한접시.
밀면은 신맛, 단맛, 매운맛 등
3가지 맛이 조화된 것이 특징.
또한 저렴한 식재료를 사용해
값싸고, 짧은 시간에 만든다.
그래서 서민 문화에 맞춰진
대표적인 대중 음식으로 정착.
부산진구 부전동의 ‘춘하추동’,
연제구 연산동의 ‘가야 할매 밀면’ 등
2곳이 2009년 부산 향토 음식점으로 지정.
남구 우암동의 ‘내호 냉면’과
부산진구 가야동의 ‘가야 밀면’은
외지인들에게 추천되는 밀면 음식점.
..................................................
실향민은 명절 날이면
고향음식을 제사에 올리고
제수음식을 친지들과 나눈다.
함경도에서 피난온 실향민들은
그리운 고향으로 갈 수가 없으므로
고향 음식이 곧 꿈에 그리던 고향이다.
명태순대, 가자미식혜
남북간 분단 세월이 이미
이미 70년 가까이 지났기에
북한의 고향음식 전수가 끊기어
고향음식 맛을 보면 눈물을 흘린다.
밀면은 함경도 실향민들이
부산 피난시절에 너무 가난해
궁여지책으로 먹던 음식이지만
지금은 그때 그 시절.,추억의 음식.
해마다 겨울에 찬바람이 불면,
외투깃을 세우고, 즐겨 찾아갔던
부산 자갈치 곰장어골목이 생각난다.
'1980~1981년' 만 2년 동안을
부산에서 살던 시절의.,옛 추억.
그래서, 그후에 서울에 살면서도
그곳 생각이 나면, 가끔 찾았던 곳.
부산 토박이는
즐겨 찾지 않는다.
아나고회, 곰장어구이.
서울 사람이나
외지 사람이 오면
예의 상, 동행을 할뿐.
부산에서
2년간 살면서
체험한 경험담.
부산 토박이들이
즐겨먹지는 않지만
이미 부산의 대표음식.
.......자갈치 곰장어 골목......
부산광역시시 중구 남포동 5가
곰장어구이 집들이 밀집한 골목.
신동아 수산물 종합 시장과 수산물 경매장이
마주 보는 선창가의 자갈치 해안로를 따라 조성
길가 포장마차 매장을 따라 옹기종기 늘어서 있다.
각 매장에는 번호가 붙어 있다.
자갈치 곰장어 골목은 도시 철도
1호선 자갈치역 2번 또는 10번 출구.
실제 곰장어 골목뿐 아니라 자갈치 시장
곳곳에서 곰장어 파는 가게를 볼 수 있다.
부산에는 기장 짚불 곰장어와
양념 구이 두 가지가 유명한데,
온천장과 부전역 앞, 자갈치 곰장어
골목은 연탄불 양념 구이로 유명하다.
자갈치 곰장어 골목은 노점상
초기에 하루 몇번씩 단속을 피해
장사를 접었다 다시 열었다고 한다.
2013년 현재 국유지 무단점거 영업
곰장어 골목에는 곰장어집뿐 아니라
생선 좌판 등 340여 노점상들 삶의 터전.
자갈치 곰장어골목 가게들 중
40년 이상을 이곳에서 영업하여
자신이 자갈치 노점상의 터주라는
거제 장목 산 곰장어, 김해집 등 유명.
자갈치 곰장어골목
유래와 관련이 깊다.
6·25 전쟁과 산업화를 거치며
이곳 정착민 대부분 외지인들.
출신지를 상호로 사용하게 되어
외지 지명이 상호로 붙게 되었다.
이곳에 자리잡은 이들은
부산의 토박이는 아니지만,
이곳 역사이며 자갈치 토박이.
.........................................
갈맷길 3코스
초량시장
부산 갈맷길 9코스.,총 263.8km
부산 갈맷길.
2011.10.04 부산 갈맷길 축제
에덴공원
서울에 세시봉이 있다면
부산에 에덴공원이 있다.
음악감상.,옛추억의 공간.
부산 에덴공원.
주전자섬
이 섬에서 가까운.,동삼동 옛 어부들에게는
'바다어장의 쉼터이자, 풍랑 피신처' 성역(聖域).
인근어장 어부들이 신성시 여겨 깨끗하게 관리한 섬.
주전자섬은 태종대와 신선바위
사이에 동떨어져 있는 외톨이 섬.
이 섬까지가.,부산항 경계선점장소.
세가지 금기사항이 전하는.,주전자섬.
영도에 사는 어부가 고기를 잡던 도중에
이섬에 들러 용변 본 후에 고기 한마리 못잡고
어구까지 잃고 홧병으로 숨졌다는., 전설의 고향.
또 다른 전설은 고기잡던 어부가 추위를 피해
이 섬에 들러 불을 피웠는데 그뒤로 주전자섬이
불덩이로 바뀌는 꿈을 꾸고나서 숨졌다고 전한다.
그후, 어부들은 이 섬에 들러
절대로 용변을 보지 않지 않았고
추워도 불을 피우지 않았다고 한다.
옛부터 이러한 전설이 있어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는.,섬.
고동도 따고
다이빙도 하고
스노우쿨링도 하고
놀기 좋은.,해변이다
.....주전자섬........
칼새 집단 서식지로
독도 등 도서지역의
'생태계보전 특별법'
특정도서 지정.,등대섬.
면적 : 8,088㎡
태종대 앞바다에는 크고 작은 돌섬들이 있는데,
섬 하나가 주전자처럼 생겼다고 하여.,유분도(鍮盆島).
이 섬에 3가지 금기 중 하나.,"섬 안에서 통정하지 말라."
..........................................................................
주전자섬 일출
배를 타고, 주전자섬 안으로 들어가 보면
육지에서 바라보기보다.,크고 넓은.,무인도.
바다낚시 애호가들에게는 이미 널리 알려진 섬.
모기가 워낙 많은 섬이라서
모기장 없이 밤을 지새우기 힘든 곳.
남자 늑대보다 모기가 무섭다는.,무인도.
'대변', '불을 피우기' 및
'남녀 간 육체적인 관계'를
3 금기(三禁忌)로 여기는.,섬.
.
.............부산 팔경...............
몰운대(沒雲臺) : 市 기념물27호,
이순신 함대 우부장(右副將)으로
큰공을 세운 정운 장군이 순절한 곳.
태종대(太宗臺) : 기념물28호,
신선바위는 12만년전 융기파식대.
삼국시대는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낸 곳.
신선대(神仙臺) : 기념물 29호,
오륙도가 가장 잘 보이는 곳
해운대(海雲臺) : 신라 최치원이 이곳을 거닐다
지금 인어상이 있는 곳에 ‘海雲臺’라고 쓴데서 유래
오륜대(五倫臺) : 회동수원지(1931년 건립)
수몰되었지만 아직도 가히 절경이다.
강선대(降仙臺) :
덕포동에 있는 岩山,
나무숲과 堂山이 있다.
겸효대(謙孝臺)
부산시기념물 제14호
연산동 배산 근처에 있다.
高麗末 신선놀음을 즐기던
김겸호를 기리기 위해 붙였다.
의상대(義相臺) : 금정산,
여기서 보는 남해로 빨려드는
낙동강 절경을 義相望海라 한다.
................................................
부산.,몰운대 낙조
태종대.
신라 태종 무열왕이 삼국을 통일하고
이곳에 와서 절경에 도취되어 활을 쏘며
쉬어 갔다 해서 태종대라고 이름 지어진 곳.
자살바위로 유명한.,태종대(해발 250m)
전망대(과거 자살바위)에서 대마도 조망.
등대 곁 해안가 신선이 놀았다는 신선바위.
그위에는 왜구에게 끌려간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여인이
돌로 변하였다는 망부석이 있다.
태종대를 다 걷는데
약 1시간 남짓 소요.
태종대 망부석 & 주전자섬
오륙도 바라보이는.,신선대
달맞이고개 바라보이는.,해운대
부산.,오륜대
강선대
겸호대
부산.,의상대
금정산 의상대
8경은 단순한 8 명승지를 가르키는 것이 아니다.
전국에는 98곳 784경이 있다고 하는데(1985년 조사)
다방면의 미인을 八方美人, ‘朝鮮八道’처럼 8은 한국을
일컫는 것으로 모든 것, 많은 것, 으뜸이란 의미를 갖는다.
팔경은 宋나라 때
洞定湖 남쪽(양쯔강 중류)
소수(瀟水)와 상강(湘江) 근처
풍경을 그린 瀟湘八景圖에서 유래.
부산 오륙도
오륙도
오륙도 갯바위 낚시
오륙도
오륙도
태종대 망부석에서 본., 주전자섬
주전자섬
주전자섬
태종대 망부석에서 본., 주전자섬
태종대
태종대
태종대
해운대
부산 지하철 노선도
다대포 해수욕장
다대포해수욕장
부산 사상구 괘법동 사상역 앞쪽에 있는 회산(晦山)은
옛부터 유명한 명승지로서 '팔경대가 있었다.'고 전한다.
............사상 팔경(沙上 八景)......................
구덕조무(九德朝霧)[구덕산에 서리는 아침 안개],
원포귀범(遠浦歸帆)[멀리 포구에 돌아오는 돛단배],
평사낙안(平沙落雁)[하늘을 날다가 모래펄에 내려앉은 기러기],
칠월해화(七月蟹火)[칠월의 갈대밭에 게를 잡기 위해 밝힌 횃불],
팔월노화(八月蘆花)[팔월의 강변에 피는 갈대꽃],
서산낙조(西山落照)[서산으로 지면서 강물에 비치는 햇빛],
운수모종(雲水暮鐘)[운수사에서 들려오는 저녁 종소리],
금정명월(金井明月)[금정산에 떠오르는 밝은 달빛]
....................................................................
팔경 내용에서 이 지역의
자연 환경을 엿볼 수 있다.
사상에 공업 지대를 조성하면서
저습지를 매립할 토량 확보를 위해
팔경대가 있던 회산(벼랑산)을 깎으면서
팔경대는 사라졌고 팔경 옛 경관도 크게 변모.
.
부산.,갈매길 4코스
다대포 생태공원.,갈대밭
낙동강 하구 끝자락.,다대포
다대포해수욕장
다대포 선착장
......다대포(多大浦)........
부산광역시 사하구 구평동
부산광역시 서남단에 있는 소만입.
낙동강하구 최남단
다대반도와 두송반도에
둘러싸여 있으며, 5개의
작은 소만입으로 구성.
부산 시내에서 17㎞ 지점.
다대포 지명의 유래.
큰 포구가 많은 바다.
<일본서기 日本書紀>
다다라(多多羅)로 기록.
이곳은 일찍부터
왜구의 출몰이 잦았으며,
국방상 중요한 요새지였다.
조선 세종 때는 이곳에 수군만호영을 설치,
수군 123인과 병선 9척을 배치하였고, 성종 때는
높이 4m, 둘레 560m의 다대포진을 축성한 바 있으며,
임진왜란 때 다대포첨사였던 윤흥신(尹興信)과 그 동생
흥제(興悌)가 왜군과 접전을 벌여 전사한 유서 깊은 곳이다.
철새 도래지인 을숙도와 감천동 항구 사이에 위치한
다대포는 몰운대·화손대·해수욕장·낙동강 하구로 구분
태종대·해운대와 더불어 부산의 3대(臺)로 알려진
몰운대는 해송을 비롯한 각종 나무들이 울창한 숲.
다양한 모양 기암괴석에 둘러싸여 절경을 이룬 곳.
1972년 6월 26일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27호로 지정.
1960년대 말까지 부산 근교의 한적한 어항.
목재 및 조선업이 유치되면서부터 공업지역.
아파트단지 개발로 다대포해수욕장과 연계된
수변 조망권 확보를 위해 낙동강변 신평동 56호
광장∼다대포해수욕장 4.1㎞ 군사용 철책을 철거.
부산시는 강변대로 일부구간 도로 확장.
도로와 하구 사이 제방을 공원으로 조성.
자전거도로·산책로·휴식공간으로 조성했다.
주변에는
다대포해수욕장
몰운대·을숙도생태공원·
낙동강하구에코센터·
낙조분수 등의 주요 명소.
역사적으로 국방상 요충지
윤공단(尹公壇)·다대포·첨사청·
정공운 순의비(鄭公運 殉義碑) 등
선인들 무공을 알려주는 유적지 산재.
..................................................
다대포 몰운대
아미산 정상.,다대포 일몰
부산 - '갈맷길 ~ '철새도래지' 을숙도'
가거대교 휴계소
.....................갈맷길........................
부산 전역에 조성된 걷기좋은 탐방로 애칭.
갈맷길은 부산 시조 ‘갈매기’와 ‘길’의 합성어.
부산광역시 등이 시민 공모를 통해 확정한 이름.
‘갈매’는 순수 우리말로
‘깊은 바다’란 뜻말이다.
부산광역시가 2009년부터 부산의 산과 강,
바닷가[해안]에 집중적으로 조성한 갈맷길
슬로우 라이프 실현 & 생태도시 기초 인프라.
제주 올레길이 전국적인 길걷기 바람도 한몫.
대부분은 기존 산책로 및 등산로를 활용했으나,
일부 데크를 깔거나 새로이 조성한 길도 있었다.
이 사업에 투입된 예산은 약 630억 원이었고,
개설된 탐방로는 전체 184개소, 총연장 863㎞.
부산광역시는 2010년 갈맷길 21개 코스를 지정.
해안길 6곳[총길이 109㎞],
강변길 3곳[48.5㎞],
숲길 8곳[107㎞],
도심길 4곳[37㎞]
총연장 302㎞
부산이 추천하는 『걷고 싶은 갈맷길 21선』
안내 책자와 접이식 코스 안내도도 발간하였다.
...................해안길......................................
가덕도 둘레길, 장림~다대포~두송 반도 해안 산책로,
암남 공원~절영도~태종대 길, 광안리~이기대
~자성대 길, 해운대 삼포 길, 대변 해안 길
...........강변길..........
낙동강 하구 길, 수영강~
온천천 길, 회동 수원지 사색 길
.............숲길
금정산 길, 승학산 능선 길,
장산 너덜 길, 백양산 길, 황령산 길,
일광 테마임도, 봉래산 둘레길, 엄광산 구봉산 길
..........도심 길...........
동래 문화 유적지 탐방 길,
근대 역사의 길, 원도심 옛길,
부산포 흔적길 2011년 9월 18일
‘제1회 부산MBC 갈맷길 트레일 러닝’
대회가 개최되었으며, 2011년 10월에는
제3회 부산 갈맷길 축제가 열렸다.
부산 갈맷길은 개설 이래 시민과
관광객들으로부터 각광받고 있다.
.............................................
.
저도.,이승만 대통령
.........가덕도(加德島)..........
옛부터 더덕이 많이 난다는 섬.
동경 128°49′, 북위 35°02′에 위치.
낙동강 하구의 서쪽 해상에 유인도.
가덕도 등대(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0호)
가덕도 동백군락(부산광역시 기념물 제36호)
천가산, 연대봉(煙臺峰, 459.4m), 국수봉(269m)
동남쪽 해안에 100m 이상 해식애가 형성되어 있다.
'북동단에 가로놓인 육계도' 눌차도(訥次島)
북동에서 서남으로 뻗는 사주에 의해., 형성
내만은 천성만(天城灣)이라 불리는 석호이다.
해안선은 단조로우나
북서단 천성만은 항구.
섬의 동안·남안·서안은
수심이 매우 깊으나,
북안은 얕은 갯벌.
'통일신라~당나라' 국제무역 귀항지.
조선시대 웅천군(熊川郡)에 속하였다.
1908년창원군에 편입되고,
1910년마산부(馬山府)에 편입
1914년 다시 창원군에 편입되었다.
1980년 창원시 승격으로 의창군에 편입
1989년에 부산광역시 강서구에 편입되었다.
연평균기온 13.8℃,
1월 평균기온 1℃,
8월 평균기온 26.6℃
연강수량은 1,464㎜.
상록활엽수림과
낙엽활엽수림 혼생.
면적 20.78㎢, 둘레 약 36㎞
부산광역시에서 가장 큰 섬.
2007년 인구 3,021
(남 1,604 여 1,417)
세대수는 1,416호이다.
주요 산업은 농업과 수산업으로,
총가구의 50% 정도가 어업에 종사.
주요 농산물은 유자를 비롯
콩·양파·마늘. 가덕(加德) 대구는
예로부터 임금님에게 진상되었을 정도.
숙취 보양식품으로 희소가치가 높은 어류.
살아있는 대구는
가덕대구가 아니면
볼 수 없으나 앞으로
부산 신항만건설로 인해
멸종이 우려되고 있다.
그외 숭어, 붕장어,
광어 등이 어획되며,
패조류와 해태(물김) 등.
구비전승으로 전해오는
처녀바위와 총각바위 전설
등지노래, 가덕팔경가 등.
해마다 명절 때가 되면
성주신에 제사를 지낸다.
부산 지하철 1호선 하단역에서
'가덕도 선창마을' 행 시내버스.
진해에서는 진해 산업도로에서
용원에서 하차한 후 마을버스로
가덕도 천성마을에 도착할 수 있다.
거가대교(가덕도~거제시)
부산·거제간 광역도로망 구축
동남광역권의 산업, 항만, 물류를
담당하게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교육기관
천가초등학교,
덕문중·고등학교.
........................
.
가덕도 대구
가덕도 일몰
가덕도 갈맷길
가덕도항
가덕도등대.
가덕도등대.
가덕도 & 가거대교
가덕도
다대포
다대포 해수욕장
다대포 일출
다대포 일몰
다대포 강선대(에덴공원)
다대포 강선대(에덴공원)
다대포 몰운대
............낙동강(洛東江)........
우리나라에서 3번째로 긴 강이며,
길이 513.5㎞, 유역면적 2만 3,860㎢.
강원도 태백시 화전동 천의봉(1,442m) 동쪽 계곡에서 발원.
경상북도 봉화군·안동시·예천군·상주시·구미시·칠곡군·고령군
그리고 경상남도 밀양시·김해시 등을 지난다. 김해시 남동쪽에서
2갈래 서쪽은 서낙동강, 본류는 낙동강 하구둑 갑문 지나서.,남해.
강에 지류는 반변천·내성천··금호강·밀양강 등 742개
주요평야로는 상류부의 안동분지, 중류부의 대구분지,
하류부 경남평야 등 강유역은 내륙분지형 기후의 특성.
하구 을숙도는 철새도래지(천연기념물 제179호).
낙동강은 삼국시대 황산하·황산강·황산진으로 불렸고
고려·조선시대 와서 낙동강·낙수·가야진 등으로 불렸다.
본래 낙동이란 가락국의 땅이었던
'상주의 동쪽으로 흐르는 강'이란 뜻.
낙동강은 영남지방 대동맥으로
삼한시대부터 이 지역의 문화를
발달시킨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
부산 낙동강 하구 을숙도.
'가야(가락)'의 동쪽.,낙동강.
1960/70년대 을숙도
옛 '부산 구포 ~ 김해 을숙도' 나룻배
부산 구덕산에서 바라본.,을숙도
을숙도 아미산 전망대
을숙도 갈대밭
일웅도 둘레길.
추억의 길을 되찾다.
1970년대 을숙도.,추억 속 에덴공원
1970년대 낙동강 하구.
을숙도 하구.,재첩잡이
을숙도 가을
...........................
철새도래지.,을숙도
............................
천연기념물 제179호. 면적 232,358,458㎡.
낙동강 하구는 부산과 김해평야 사이에 있는
넓은 하구로, 수많은 삼각주를 형성하고 있다.
하구의 상부에는 일웅도(日雄島)와 을숙도(乙淑島)
낙동강 본류와 죽립강 사이에 거대한 삼각주를 이루고
하구 전면에는 하천의 유하작용(流下作用)과 간만작용에
의하여 이루어진 크고 작은 사구(砂丘)가 여기저기 있다.
사구들은 간조 때 부상하여 넓은 갯벌을 이루지만
만조시에는 수몰하여 광활한 하구를 이루게 된다.
이들 사구들은 낙동강 범람이나 태풍 등에 의하여
이적(移積: 옮겨 쌓임)되거나 유실이 심하고,
사구의 면적도 이에 따라 변하게 된다.
철새들은 사구의 출현과 수몰에 따라
사구를 중심으로 주변의 갯벌을 따라서
먹이를 찾아 장소를 옮겨가며 내려앉는다.
이곳은 물에 사는 작은 동식물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갈대밭도 끼인 아직 개간되지 않은 광범위한 초습지도
물새들의 안식처로 적합하여, 봄과 가을에는 우리나라를
통과하는 도요새와 물떼새류의 대집단이 이곳에 기착한다.
또한, 겨울에는 월동을 위하여 모여드는
오리·기러기류를 비롯하여 갈매기·가마우지류
등의 물새류와 적지않은 수리류 등이 모여들게 된다.
엄동에 접어들어 중부 이북의 물이 결빙된 이후에도
낙동강 하류 삼각주 일대는 거의 얼지 않으므로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해마다 규칙적으로 많은 겨울철새가 모여든다.
간혹 재두루미·저어새·수리류 등 천연기념물도 도래 월동,
제비물떼새·넓적부리도요 등의 희귀한 통과조도 눈에 띈다.
또한, 우리나라에 있는 대부분의 수금류(오리·기러기)·
고니류와 섭금류(도요·물떼새)를 이곳에서 볼 수 있다.
.
그런데, 근래에 이르러
이 지역에 모여드는 철새 종류와
집단의 크기가 크게 줄어들고 있다.
.
이것은 하구언 건설과 매립공사, 상류의
공단폐수·인분, 가정하수에 의한 수질 오염,
농지 개간에서 오는 환경의 파괴, 밀렵 등이
철새들이 도래하여 휴식하는데 위협을 주는 탓.
.
이 지역에서 지금까지 채집 또는 관찰된 조류는
1974년에 137종 및 아류이며, 1992년 90종 미만에
불과하여 약 50종이 자취를 감춘 결과를 보여주었다.
.
.............을숙도(乙淑島 : 0.08㎢).............
낙동강 하구로 향해 길게 뻗어 있는 을숙도는
중앙부가 넓고 북단과 남단부가 튀어나와 있다.
북단에는 좁은 수로를 사이에 두고.,일웅도(日雄島).
남단에는 크고 작은 모래톱 사주(砂洲)가 형성되어 있다.
미세한 토사로 이루어졌으며,
대부분 해발 1m 이하 평지로
수로가 미로처럼 뻗어 있고,
수로를 따라 높이 2∼3m의
갈대가 생육하고 있다.
동양 제1의 철새도래지로 잘 알려졌으며,
천연기념물 제179호 낙동강하류철새도래지.
특히, 겨울철 철새 군무, 비상하는 모습은 장관.
철새는 총 138종에 10만여 마리.
이 중에 천연기념물인 황새· 저어새·
재두루미· 느시 등 희귀종도 있으며,
오리과에 속하는 것이 가장 많고, 다음으로
갈매기과· 농병아리과· 아비과· 매과· 수리과· 멧과 등.
철새의 대부분은 겨울새이나
여름철마다 찾아드는 여름새도 있고
봄가을 잠시 쉬다가 떠나는 나그네새도 있다.
을숙도는 낙동강 하구를 잇는 하중도(河中島)로
낙동강이 운반해 온 토사퇴적에 의해 형성된 모래섬.
낙동강사주 말단은 크게 하중도군과 사주군으로 구분된다.
상류 쪽은 하중도군이,
말단부는 사주군으로 구성.
이들 사이에는 갯벌이 분포한다.
사주 말단의 미지형 배열은
하구 부근에서 운반된 토사가
연안류와 조류의 영향으로 퇴적
‘수중사주→사주→하중도→전면→
신사주→합성→하중도’의 과정을
거치면서 발달된 결과이다.
원래 이곳에는
400여 명의 주민이
파를 비롯한 각종 채소와
땅콩을 재배하고 있었는데
1987년 4월에 을숙도 동서횡단
낙동강하구둑 완공후 육지로 이주.
섬 자체도 하구둑 건설로 수몰 또는
육지화되면서 옛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1916년경 을숙도가 지도상에 처음 나타난다.
1978년 2월 김해군에서 부산시로 편입
1983년 12월 15일 강서구 대저2동에서
사하구 하단동으로 편입되었다.
갈대 수초 무성
어패류가 풍부해
한때는 동양최대
철새도래지였다.
1987년 하굿둑 건설 후
낙동강 하구역 일대에는
매우 빠른 지형·수문·생물
등 자연환경 변화가 나타났다.
2005년 철새도래지 을숙도 일원 낙동강 하구를 보전하고,
을숙도의 불법 경작지를 복원해 생태공원으로 조성하고자
을숙도 인공 습지 생태계 즉, 을숙도 생태공원이 조성되었다.
생태공원 조성 후 갈대가 급속하게 확산하는 문제발생.
갈대 확산은 육역화 초래로 습지 생태계 훼손이 예상된다.
을숙도 남단에는 특정 폐기물 처리를 위한 부두 시설이 축조.
그리고, 철새 탐방을 위한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낙동강 하굿둑이 지나는 을숙도와는 달리
남단의 경우는 일반인 출입이 금지되고 있어
인위적인 토지이용과 인공시설물이 거의 없는
상태로 습지환경을 유지하고 있다.
을숙도 상단부에는 주차장,
문화화관, 자동차 전용극장,
야외공연장, 인라인스케이트장,
간이 축구장, 휴게소 등 편의시설.
또한 을숙도 조각공원에
세계 여러나라 작품 20여 점을
전시해,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곳.
................................................
부산광역시 사하구 하단동에 위치한 섬.
수많은 삼각주가 형성되어 있으며 강 상류의
영양분 많은 퇴적물이 떠내려와 강하구에 쌓이고,
강과 바다가 만나 모든 생물의 발생원이 되는 곳이다.
하등동물인 원생동물에서
연체동물, 갑각류, 환형동물,
어류까지 다양한 생물들이 산다.
1966년 천연기념물 제179호로 지정되었으나,
1987년 4월 낙동강 하구둑 공사로 인해 대부분
갈대밭이 훼손되고, 철새도래지가 축소되었다.
이에 부산시는 일대를
핵심보전구역으로 지정
을숙도 복원사업을 추진.
현재는 을숙도철새공원
낙동강하구에코센터 설치,
생태교육장소로 활용된다.
을숙도는 낙동강과 남해가 들고나는
낙동강 끝자락에 하중도(河中島)이다.
1916년경 진우도·대마등 등과 함께 등장.
부산광역시 사하구 하단동에 속한다.
남포동 자갈치시장에서 하단역까지
지하철로 20분 남짓, 하단역에서
버스로 한 정거장 이동하면 을숙도.
거리만 놓고 보면
그리 멀지는 않지만
남포동이나 해운대처럼
알려져 있지 않아 생소한 공간.
그래도 생각해보면
매년 겨울 뉴스에서
'철새'와 함께 을숙도라는
이름을 들었던 기억이 나는 곳.
깊어가는 가을,
철새들의 휴식지로
더 친근한 을숙도를
찾는이가 의외로 많다.
사람들보다는 철새들에게
더 유명할 것만 같은., 을숙도.
철새들은 어째서 이곳을 찾는걸까.
'을숙도(乙淑島)'라는 이름부터
새와의 인연을 눈치 챌 수 있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낙동강이 먼저다.
을숙도가 낙동강 하구에 자리했기 때문이다.
낙동강은 강원도 태백 함백산(1573m)에서 발원
영남지방 전역을 위아래로 관통해 남해로 흘러간다.
1300리, 한반도에서
압록강(803km) 다음
긴 물줄기가 ,,낙동강.
함백산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안동 부근에서 반변천 등 지류와
합류한 이후 서쪽으로 방향을 튼다.
이는 점촌 부근에서 내성천과 영강을 품고
남으로 향하다 대구 부근 금호강을 받아들인다.
합천과 창녕을 지날 때 까지 남류하던 물줄기는
함안 부근에서 남강과 합수해 동으로 물길을 바꾼다.
밀양강을 지나 다시
남으로 방향을 돌린 물줄기는
부산을 지나 남해 짠물과 닿는다.
영남 전역을 관통한 낙동강 줄기가
강의 일생을 마치고 남해바다와 몸을
섞기 전, 낙동강 하굿둑에 을숙도가 있다.
.
기나긴 물길을 흘러온 강물은
모래 등의 퇴적물도 함께 쌓여
강 하구에서 유속이 느려진다.
긴 여정에 지쳤는지 힘이 빠진 모양.
흐름은 느려졌지만 물줄기는 쉬지 않고
이어지니 퇴적물 이흩어질 틈 없이 쌓인다.
이렇게 강 하구에 형성되는 '퇴적지형' 삼각주.
'삼각형과 닮은 모양'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풍부한 퇴적물로 이뤄진 만큼 영양가 넘치는 비옥한 땅.
이곳 낙동강 하류의 김해평야가 대표적인 삼각주.
드넓은 김해평야는 인간을 먹이고 강하구 모래사주는
철새들의 휴식처이며 강의 하구 즉 바다와 가까워질수록
퇴적지형, 모래사주는 늘어나며 을숙도도 그들 중에 하나,
토사가 퇴적되어 형성된 하중도이다.
비옥한 토양에는 갈대와 수초가 무성하고
짠물과 민물이 뒤섞이니 어패류도 다양하다.
넉넉한 공간에 먹이까지 풍부하니
긴 여행에 지친 철새들이 쉬어가기
좋은 조건이었을 것이다. 1950년대
'동양 최대 철새 도래지'가 이를 증명
.
1966년에 을숙도 일대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다.
하지만, 1987년 낙동강하굿둑이 완공되면서 공원화,
낙동강하굿둑 완공과 함께 섬이 공원화되기 시작했다.
새들의 휴식처는 사람들의 휴식처로 바뀌어갔다.
낙동강하굿둑 상단 일응도와 하단 을숙도가 하나.
한때 쓰레기 매립지이자 (새들이 먹지 않는) 파밭
을숙도 하단은 2005년에, 5년간의 복원공사를 통해
을숙도철새공원(낙동강하굿둑 하단)으로 태어난다.
을숙도철새공원은 3개 지구로 나뉜다.
교육이용지구· 완충지구· 핵심보전지구.
이중 들어갈 수 있는 곳은 교육이용지구 뿐.
완충지구와 핵심보전지구는 출입할 수 없다.
다만 낙동강하구에코센터에서 운영하는
체험 프로그램(문의 051-209-2051)을 통해
완충지구 등 부분적으로 탐방이 가능하다.
을숙도를 처음 찾는다면
낙동강하구에코센터(051-209-2000)
http://wetland.busan.go.kr/renew/main/
2007년 개관한 이곳을 찾아 문의하는 것이 좋다.
하구습지의 생태에 대한
전시 교육과 함께 국내 최대
인공 복원지인 을숙도를 안내.
철새나 낙동강에 대한 설명 뿐 아니라
을숙도를 어떻게 살펴볼지 문의할 수 있어
초행자에게 유용. 안내소에서 배부 책자에
지도가 있으니 챙겨두자. 야외용 쌍안경을
빌리는 것 가능( 2시간 기준 요금 2000~5000원).
2층에 올라가면 한 벽면을 시원하게 채운 유리창.
코앞 습지에 머물고 있는 철새들도 볼 수 있는 곳.
망원경이 있어 철새며 습지를 자세히 살필 수 있다.
좀 더 쉽게 새들을 보고 싶다면
중앙홀 모니터를 이용하면 된다.
CCTV 카메라가 습지를 비추고 있어
간단한 조작으로 가까이 멀리 볼 수 있다.
습지 뒤로 을숙도대교와 아미산
그리고 아파트 단지가 병풍 같다.
삐죽 솟은 아파트 단지와
공단을 배경으로 한 습지.
어색한 조화에 고개가 갸웃,
철새 구경을 했다면 2층을 찬찬히 살펴보자.
낙동강 발원지부터 습지식물, 낙동강 하구의
형성과정과 철새들의 이동경로까지 알려준다.
전시실 내에서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미니도서관.
3층에서는 낙동강 삼각주, 하구습지, 을숙도 철새 등을
다룬 미니다큐를 볼 수 있는데, 단체인 경우만 관람 가능.
낙동강하구에코센터를 둘러봤으면 남단탐조대로 가보자.
을숙도철새공원 안내판, 에코센터 초입 대형버스 주차장.
하루 5번(10:10, 13:10, 14:10, 15:10, 16:10, 주말은 17:10 추가)
이곳에서
전기버스가
출발한다.
.
버스 노선은 을숙도문화회관(정시)→
낙동강하구에코센터 대형버스 주차장(10분)→
낙동강하구 탐방체험장(35분)→
낙동강하구에코센터 대형버스 주차장→
을숙도문화회관을 잇는다.
출발 시간은 조금씩 변경.
개인차량은 통행할 수 없다.
에코센터~ 탐방체험장까지
도보로 25분 가량 소요된다.
탐방체험장까지 낙동강 하구와
남해바다가 왼편으로 따라붙는다.
철새들을 배려하기 위해 에둘러 지은 을숙도대교도 지나간다.
전기버스 종점 탐방체험장에 내리면 멀지 않은 곳에 남단탐조대
탐조대 앞으로 야생 갯벌에 작은 게들이 기어 다니는 것도 보인다.
이번에도 그뒤로는 빽빽한 아파트 단지가 펼쳐진다.
갯벌이며 습지 만큼은 자연에게 양보해야 하지 않을까?
올해도 큰고니 재두루미 겨울 철새들은 먼길을 떠날 것이다.
부디 이곳에서 편히 쉬어가길.
조금 더 추워지는 10월 말부터
겨울 철새들이 들기 시작할 것.
갯벌이 철새들 소리로 가득차길.
'을숙도의 겨울'을 기다려지는 곳.
여기서 끝이 아니다.
낙동강하굿둑 상단에 있는
수자원공사 건물 옥상 전망대는
빼놓을 수 없는 철세도래.,뷰 포인트.
낙동강 하굿둑은 물론
낙동강이 남해바다로
흘러가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을숙도를 다 둘러보면 아미산전망대에 들러
낙동강하구에 자리한 모래사주도 살펴보자.
진우도·
대마등·
장자도·
신자도·
맹금머리등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시간이 지나며 계속 변화하는
모습을 체크해 보는 것도 좋겠다.
낙동강 하구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아미산~다대포 해안~몰운대' 살펴보자.
.............몰운대(沒雲臺 )..............
부산 사하구 다대동에 있는 대지 일원.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27호' 이 일대는
지형상의 여건으로 인해 안개와 구름이
자주 끼어, 모든 것이 시야에서 가려져
'몰운대'라는 명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다대포와 몰운대는 조선시대 국방의 요충지로서
임진왜란 때는 격전이 벌어졌으며, 이순신(李舜臣)의
선봉장 정운(鄭運)도 이 앞바다에서 500척 왜선을 맞아
힘껏 싸우다가 순국하였는데 그는 이곳의 지명을 몰운대라
한다는 말을 듣고 ‘운(雲)’자와 자기 이름의 ‘운(運)’자가 같은
음이라는 점에서., “내가 이 대에서 죽을 것이다(我沒此臺).”
하여, 이곳에 정운을 위한 사당이 세워졌다고 하며
지금은 그의 순절(殉節)을 기리는 유적비가 서 있다.
이 곳은 16세기까지는 몰운도(沒雲島)라는 섬이었으나,
그 뒤 낙동강의 물에 밀려 내려오는 토사의 퇴적으로
인하여 다대포와 연결되어 육지가 되었다고 한다.
.................................................................
16세기 이전에 섬이던 몰운대가 육지와 이어진 것은
낙동강에서 밀려온 퇴적물 때문으로 추측하고 있다.
낙동강 하구의 아름다운 자연풍광과 다양한 생물을
직접 관찰하고 습지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곳.
가족 단위의 관광이나
단체체험학습장소로 좋다.
몰운대.,'동래학춤 & 발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