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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04 에녹이야기
창세기 3장 15절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인류가 이 복음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서 두 무리로 나누어진다고 우리가 말씀을 드렸습니다.
한 무리는 여자의 후손 또 한 무리는 뱀의 후손
그래서 창세기 사장에서 이 선언의 결과처럼 이제 인류도 두 무리로 나누어집니다.
한 무리는 가인의 후손이고 또 한 무리는 셋의 후손으로 나누어지는데 이 가인의 후에는 이제 하나님을 떠났잖아요.
그죠? 그래서 인간 스스로의 본성이에요.
그니까 타락한 본성과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에요.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죠. 그쵸?
근데 역사가 진행되어짐에 따라서 이들이 어떻게 변해가는가 하는 그 모습이 창세기 사장에 보면 나와요.
그 부분은 제가 오늘 시간이 안되고 하기 때문에 다루지 못할 건데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지고 누구와 똑같이 닮아가는가 하면 사단의 형상으로 똑같이 닮아가는 도시를 세워요.
하나님을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없으니까 에덴을 잃어버렸잖아요.
에덴은 기쁨이라는 뜻이죠.
그러니까 사람들 스스로 그 기쁨을 찾기 위해서 거기에 보면 두발 가이이니 그 다음에 또 뭐 여러 사람들이 등장해서 뮤지션 음악과 퉁소를 부르는 사람, 기계를 만드는 사람에서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행복과 즐거움 를 찾기 위해서 계속 노력하는 모습이 나와요.
근데 그 속을 들여다 보면 폭력과 부패와 음란한 이 모든 것으로 지옥같이 변해가는 모습이 창세기 사장에 보면 가인의 후예들이 만든 도시의 모습이에요.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그 창세기 육장 십일절에 보면 노아 홍수 직전의 상황을 이렇게 쭉 묘사해보는 그런 내용이 나오는데 그 세상은 강포와 폐괴로 가득 차고 있었다고 성경은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이 사람들이 그렇게 살면 계속 불행해지잖아요.
이 세상을 하나님의 자비를 통해서 멸망시키는 게 노아 홍수에요.
이들은 너무너무 불행하게 살고 있었을 거야.
사람들 만나면 툭하면
폭력이 이루어지고 사람이 죽어나가고 잔인한 일들이 벌어지고 하는 그게 지옥이에요.
근데 그게 대비해서 창세기 4장 25절부터 5장까지 세세 후손 여자의 후손의 족보가 흘러나오는데 거기에 이름들이 쭉 흘러 나오다가 특별히 세 사람의 행적이 짧게 짧게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름만 나오다가 이름과 나이만 나오다가 스토리가 있는 사람들이 딱 세 사람이 등장해요.
그러니까 모세가 이것을 기록하다가 갑자기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특별한 영감 때문에 이 부분에서 뭔가 한 구절 한 구이 처만한 게 있어요.
그 딱 세 사람이 있는데 이 세 사람은 여자의 후손이라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지 이 창세기 삼장 십오 절에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이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그걸 설명해주는 내용들이에요.
이 사람은 이 세 사람은 어떻게 보면 종의 종말에 살아남은 자의 특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죠.
그 첫 번째가 누굴까요? 노아는 마지막이고요.
첫 번째 에녹은 두 번째고요. 그 앞에 또 나오는 사람이 있어요.
한 사람. 그 사람이 누굴까요? 첫 번째가 창세기 이제 사장 이십육 절이네요.
이게 그 사장 마지막 절부터 나오는데 이 셋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셋은
에노스를 낳고 그 다음에 어떤 얘기가 나오죠? 읽어볼까요? 시작.
이 셋은 에노스를 낳고 이 사람들이 같이 모여서 그 뭐를 하는가 하면 공중 예배를 드렸다.
여호와를 불러 이름을 불렀다고 하는 것은 함께 공중 예배를 드렸다고 하는데 이들이 누구인가 하면 여자의 후손들이에요.
그렇죠? 가인의 후손이 아닌 여자의 후손들의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한 장면이 보이는 거야.
반대 사장의 반대. 그 위에 내용들은 전혀 예배 드리는 모습이 없죠 근데 이 사람들은 어떻게 했다? 첫 번째 예배를 드렸다고 하는 거예요.
여자의 후손은 첫 번째 예배를 중심으로 모이며 살아가는 예배공동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어요.
함께 모여서 하나님을 찬미하고 예배하는가 어디를 가나 무엇을 하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을 중심으로 해서 사람들이 모이는 거예요.
그리고 두 번째 우리가 주목해야 될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아담의 칠세손인 에녹입니다.
그 에녹은 육십오세에 무드셀라를 낳은 후에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합니다.
오늘 이 얘기를 조금 더 집중적으로 할 텐데요.
우리가 이 엔옥을 통해서 기억해야 될 아주 중요한 사실 중에 하나는 뭔가 하면 여자의 남은자손은 어떤 사람들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이에요. 예 그들이 바로 역사의 마지막에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하면 어린 양이 어디로 우리를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거 행하는 거예요.
그 끌려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거예요.
그 길을 끌려가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가는 게 아니라 동행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과 저의 뜻이 똑같아요.
저도 그렇게 살고 싶어요 하면서 동행하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누구다? 여자의 남은자손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된다? 또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돼요.
늘 자복하고 굴복하고 회개하며 하나님이 좋아하는 걸 나도 좋아하고 하나님의 뜻이 나의 뜻이 되는 그런 사람 하나님과 뜻이 맞추어져서 계속 함께 살아가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게 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인물 세 번째로 우리가 주목해야 될 인물은 바로 노아입니다.
이 노아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백이십 년 동안 구원의 기배를 전하고 저 나는 어떤 사람이다? 선교하는 사람이었다고 하는 거 어쨌든 이 세 가지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리는 오늘 우리는 그 어떤 삶을 살아야 되는가 이 마지막에 여자의 남은자손들이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여러분 이 땅에서 이 종말을 맞이하잖아요.
그죠? 노왕수 직전도 종말 직전이에요.
이 땅에서 당시에 그들에게 의미 있는 일은 이 세 가지일 뿐이었어요.
첫 번째 예배하고 예배하는 게 의미 있어요.
동행하고 성교하는 거.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그들보다 훨씬 더 짧게 살아요.
그죠?
근데 이 죄로 죄로 인해서 망가진 세상에서 특별히 종말을 살아가는 오늘 우리에게 제일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 무엇일까? 여러분, 지혜를 가지고 한 번 생각해보세요.
그 일은 바로 뭔가 하면 하늘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가는 거예요.
여러분 그래서 주님이 승천하신 후 지금까지 오늘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이 하늘에서 행하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그분은 지금 무엇을 행하고 있죠? 하늘에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살 집을 짓고 계시죠 그죠? 내가 너희들과 함께 그할 처소를 하늘에서 예비한다고 하는 거
그래서 이것을 믿고 있는 사람들은, 이것을 믿고 있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하늘에서 그렇게 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이 땅에서 그분과 영원히 함께 살 삶을 준비하며 살아가야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뭔가 하면 예배하고 동행하고 선교하는 거예요.
그 분의 그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이 세 가지의 삶 외에는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삶은 다 부수적인 거예요.
그죠? 제일 중요한 게 이 세 가지에요.
그래서 오늘 이 시간 5장의 족보를 조금만 더 세밀하게 살펴보면서
에녹의 이야기를 좀 더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 장 삼 절부터 쭉 보면 이제 이 족보가 의미가 없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굉장히 의미 있는 인포메이션들을 우리에게 주고 있어요.
아담이 백삼십 세에 셋을 낳고 팔백 년 동안 자녀를 낳다가 구백삼십에 죽었대요.
그 아담이 죽은 해는 그 창세 후 구백삼십 년에 죽은 거예요.
셋은 백오세에 에노스를 낳고 구십, 구백십이세에 죽었고, 에노스는 구십세에 개난을 낳고 구백오세에 죽었고, 개난은 칠십세에 마할알레를 낳았고 구백십세에 죽었고, 마을알레는 육십오세에 야렛을 낳았고 팔백구십오세에 죽었고 야렛은 백육십이세에 애녹을 낳았고 백육십이세 백구백육십이세에 죽었다고 하고 그 다음에 에녹은 육십오세에 므두셀라를 낳고 육십오세에 므두셀라를 낳고 무드셀라를 낳은 후에 삼백 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삼백육십오세에 승천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드셀라는 백팔십칠세에 라맥을 낳고 라맥을 낳은 후에 쭉 살다가 구백육십구세에 죽었어요.
그리고 라맥은 백팔십이세에 노아를 낳고 칠백칠십칠세에 죽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노아는 육백 세에 홍수가 찾아왔다고 하고 세상이 그 때로 인해서 한 번 딱 멸망이 되어 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담부터 노아가 태어날 때까지 이때 그 연대를 쭉 계산해보면 천오십 년이라고 하는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천오십년
근데 이 족보가 오늘 우리에게 던져주는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있어요.
이렇게 딱 붙고 보면 아담이 구백삼십 세를 살았다고 하니까 아담을 살아 생전에 본 사람은 누구까지일까요? 천 육십 천 천 오십 년의 세월이 흘러갔는데 아담은 몇 세까지 살았다? 구백삼십까지.
그러면 아담을 살아 생전에 본 사람은 누구까지일까요? 셋은 봤겠죠
에노스도 봤을 거고 계란도 봤을거고 마을 알렐도 봤을 거고 야렛도 다 아담과 함께 살았어요.
그리고 야래씨 백육십이세 에녹을 낳았다고 하는데 이때 아담의 나이가 얼마인가 하면 쭉 계산이 가능해요.
아담이 6백2십2세가 되는 해에 에녹이 태어납니다.
그리고 삼백팔 년을 아담과 함께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에녹은 평생 하나님과 동행하였지만 아담과도 평생 동행한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아담과도 평생 동행한 거예요.
이게 왜 중요한지를 제가 다음 내용을 통해 설명을 해드릴 거예요.
그리고 에녹의 아들 무드셀라도 심지어 노아의 아버지인 남핵도 아담과 함께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노아를 제외한 노아의 아버지 라메까지 전부 다 아담과 함께 지내면서 무엇을 배웠을까요?
아담을 통해서 탈락 전 세상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죄 지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복음 이야기를 귀에 따갑도록 거의 진짜 완전히 애울 정도로 애울 정도가 아니지.
그 사람들은 다 애우죠. 그냥 얘기만 하면 워낙 뛰어났으니까 귀에 따갑도록 들었을 거야 듣고 배웠다고 하는 거죠.
홍수 이전에 세계가 사악하기는 하였으나 그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흔히 상상하듯이 무지와 야만의 시대는 아니었다.
홍수 이전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서 곧 하나님께서 물질 세계에 대한 모든 지혜를 가르쳐 주신 아담과 수백 년 동안 함께 있었다.
그래서 아담에 대한 지식을 얻는데 있어서 그들만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는 데 있어서 그들만큼 유리한 때는 그때 이후로 결코 다시 없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수세기 또한 에덴동산의 출입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쫙 나타나고 있었고 당시에요 그리고 입구를 지키는 천사들이 막고 있는 낙원의 문이 다 있었어요.
이제 들어가지 못하지만 그 이유를 설명해줬겠지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는 수많은 증거들이 다 눈에 펼쳐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어떻게 돼가고 있다? 급속도로 타락하여 가고 있었다고 하는 거
여러분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결코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고 하는 거죠 아무리 우리가 온전한 지식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사단도 마찬가지죠 그죠? 우리가 우리의 자아가 굴복되지 않으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주식이 전혀 하나님께로 우리를 이끌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하는 거예요.
부조와 성자에 보면 아담의 칠세손인 이 에녹이 살아가는 시대에 세상이 불과 육백 년 조금 더 지난 시대였는데 그런데 세상은 거의 종말로 들어가면서 온 세상 사람들이 전부 다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면
하나님에 대한 어떤 그런 모든 것들을 다 포기하고 오직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해 살아가요.
그게 죄악이죠. 그런 것으로 가득 찬 세상이 바로 그 이 세상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가 하면 자고 일어나면 면 오늘 뭐 더 재미있는 거 없나 오늘 더 쾌락적인 거 없나 오늘 나를 더 기쁘게 해줄게 뭐가 없나 이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예 그 삶의 의미가 전부 다 이런 어떤 쪽에 다 맞춰져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때 그 시대 사람들과 전혀 다른 기쁨을 추구하며 이런 사람으로 살아간 사람이 바로 누군가 하면 에녹이라고 하는 거예요.
전혀 다른 기쁨을 추구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기쁨이 되어서 살아갔던 사람이 바로 누군가 하면 세상 종 노아 우수 직전에 에녹이었다고 하는 거예요.
이 구절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창세기 오 장 이십이절부터 이십사절 말씀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제 생각해야 될 건 뭔가 하면 이거를 딱 듣고 난 다음에 어떤 생각을 해야 되는가 하면 그가 어떻게 그런 죄악이 창고라고 만연하는 그 시대에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을까 이걸 생각해야 되는 거야.
이 구절을 통해 찾아야 돼요. 그 이유를 아주 짧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가 있죠.
창세기 오장 이십이절에 보면 그가 언제
육십오세 때에 무드셀라를 낳고 그 다음부터 어떤 일이 벌어졌다.
그 에녹의 인생은 무드셀라를 낳기 이전과 이후가 완전히 달랐다고 하는 거예요.
그렇죠 에드 무드셀라를 낳기 전에는 어떻게 보면 신앙이라고 하는 게 아주 나쁘진 않았지만
그 이전보다 완전히 비약적으로 확 성장하는 그런 계기가 있었어요.
그게 바로 무드셀라의 탄생이에요. 그래서 저는 바라기는 오늘 우리에게도 이 다니엘 빌리지에서의 경험이 여러분과 저의 신앙생활을 이전과 이후로 완전히 달라지게 만드는 그런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네 그러니까 이 무드셀라의 탄생은 에녹이로 에녹으로 하여금 일대 신앙적 새로운 경험을 추구하도록 만든 계기에요.
추구하도록 만들었어요. 그래서 그 추구하도록 만든 그 에너지가 하나님이 그를 그 원하는 만큼 계속 계속 더 성장시켜주는 거예요.
오늘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추구하고 전적으로 헌신하며 나가면 하나님은 그만큼 원하는 만큼 우리에게 계속 계속 믿음의 성장을 이루어 주신다고 하는 거예요.
그럼 이 무드셀라의 탄성이 에녹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첫 번째는 우리가 맨날 아마 들었을 거예요.
아담에게서 배운 그 하나님의 사랑을 이제 어떻게 깨닫는거요? 이 아이의 탄생과 이 아이를 이렇게 돌보면서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그 사랑을 느끼기 시작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가 나의 자녀를 깊은 애정을 가지고 보살피고 보호하고 돌보는 그 자애로운 사랑의 근원이 누구에게로부터 왔다? 하나님에게로부터 왔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리고 무드셀라가 어떻게 하죠? 에녹을 아주 단순하게 신뢰하잖아요.
그리고 의지하잖아요. 그런 것처럼 하나님을 그렇게 믿고 의지하는 그것이 신앙이라는 거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랑하기를 바라고 있어요.
좀 단순하게 마치 아이가 부모를 의지하듯이 그래서 이 이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에녹은 이 무드셀라의 탄생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깊은 사랑을 경험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는 거죠.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게 있는데
이것만 가지고는 우리가 우리의 본성 자체가 하나님께 오인하는 그런 신앙을 할 수가 없어요.
우리는 죄로 기울어지는 타락한 본성이 있기 때문에 또 하나가 뭔가 하면 이 무드셀라의 탄생은 뭐를 깨닫게 되죠? 이 무드셀라의 탄생을 통해서 인류 전체에 보내는 메시지가 하나 이 무드셀라의 계시처럼 주어집니다.
이때부터 선지자가 돼요. 이 무드셀라는 이 무드셀라의 탄생은 그가
노아 홍수 즉 종말에 대한 특별한 계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계기가 됩니다.
이걸 증명하는 게 바로 뭔가 하면 그 이름이에요.
그러니까 에녹이 무드셀라를 딱 낳고 난 다음에 그 이름을 어떻게 지었는가 하면 무두셀라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이 무드셀라라고 하는 이름의 의미가 뭐죠? 무드라고 하는 거는 그가 죽을 때에요.
그가 죽을 때 무드 그리고 셀라는 뭐예요?
보내리라고 하는 거야. 뭘 보내는 거예요? 그것을 보내리라 뭘 보내리라 홍수를 보내리라고 하는 거야.
그래서 홍수의 계시를 최초로 받은 사람은 누구다? 에녹이라고 하는 겁니다.
에녹. 예 당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급속도로 악해져 가는 걸 보면서 와 진짜 너무 악해져 간다.
막 이렇게 하면서 세상이 이대로 영원히 지속된다 하면 우리가 살 수 있을까 이런 두려움이 잃었을 거예요.
근데 그래서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계속 뭘 고대할까요? 그들이 그도인들이 고대하는 게 뭐예요? 창세기 삼장 십오 절을 이 계시 복음을 받아들인 이후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꿈꾸는 게 뭐예요? 메시아가 하루속히 임하여 이 죄악을 끝내고 다시금 그들이 잃어버렸던 그 낙원으로 돌아가기를 소망하고 있었을 거야.
근데 그렇게 기도하던 그때 하나님은 에녹에게 이 세상의 죄악을 물로써 심판하실 것이라는 것을 예언해주는 거예요.
그런데 언제는 임하지 않는다 언제는 임하지 않는다 무드셀라가 살아있을 때는 홍수가 임하지 않는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가 죽을 때 그가 죽을 때 홍수가 임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을 하셨어요.
근데 무드셀라가 죽을 때가 언제예요? 무드셀라가 죽을 때가 언제죠?
언제인지는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오직 하나님만 아시는 거예요. 예 그래서 이때부터 이 무드셀라가 탄생했을 때부터 종말이 시작되는 거예요.
마치 예수님의 칭찬 이후로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이 자기가 죽기 전에 올 거라고 생각을 하면 계속 고대하며 살잖아요.
한 해 한 해가 매해가 뭐예요 올해 주님이 오시기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거예요.
그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언제까지? 무드셀라가 죽을 때까지 예
근데 노아 이 창세기 오장의 계보를 쭉 살펴보면 홍수는 정확히 무드셀라가 죽던 해에 시작되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근데 이 무드셀라는 언제 죽을지 몰라요.
그죠? 근데 언제 죽죠? 언제 죽죠? 이전에 이거 얘기하기 전에 그러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그러면 이 사람들이 어떻게 재림 준비를 노하홍수 이 종말을 준비하며 살아갔을까요?
그 준비가 세상 끝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게 어떤 거였죠? 그들에게는 딱 하나예요.
그 준비는 오직 하나 창세기 삼장 십오 절에 하나님께서 준비한 구원의 선물 복음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거예요.
이게 뭐냐 그러면 종말을 준비하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애요.
오늘 우리가 복음을 갖고 살아가는지를 날마다 날마다 증명하며 그것이 내 안에 있는지를 살피며 살아가는 거예요.
그들은 그렇게 종말을 준비하며 살아갔어요.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할까요? 방주에 대한 계시가 또 주어지는 거예요.
먼저 주어진 빛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다음에 빛이 주어지는 거예요.
근데 이 무드셀라가 죽던 해가 언제냐 그러면 바로 노아가 육백세 되던 해였는데 그때 그 무드셀라가 죽는 날 홍수가 보내리라는 말씀처럼 노아의 홍수가 임하게 됩니다.
근데 이때 무드셀라의 나이가 몇 살인가 하면 무드셀라가 몇 살까지 사는가 하면 구백 육십 구세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생존한 사람으로 기록되어져 있어요.
여러분 이게 저한테 큰 감동이었어요.
너무나 큰 감동이었어요. 세상이 너무나 악해져 가고 있는데 그냥 빨리 무드셀라를 죽이고 세상을 홍수로 멸망시키면 되잖아요.
근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너무너무 사랑해서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서 오래 참고 기다리시며 자비를 베푸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을 볼 수 있어요.
조금이라도 더 가능성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희망이 더 있다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그 은혜의 기간을 어떻게 하신다?
연장 연장 연장 계속 하시면서 다른 믿음의 선조들보다 이 무드셀라를 수십 년을 더 살게 하시며 은혜의 기간을 연장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어요.
여러분 노하우수 직전에 이제 우리가 내일 공부하겠지만 세상의 형편은요 사람들의 생각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온 온종일 악에 가득 찬 모습으로 살아가요.
생각하면 모든 것들이 다 그렇게 기능하는 세상이 될 때까지도 하나님은 단 한 명이라도 마치 기생 라합을 그 뭐예요
여리고성이 멸망하기 직전에 그 한 사람이라도 구원할 사람이 있으면 찾아가시잖아요.
그런 것처럼 하나님께서 기다리셨다고 하는 이야기가 바로 이 무드셀라라는 의 이 죽음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큰 사랑의 기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 에녹은 무드셀라가 태어날 때부터 이 종말의 계시를 받은 이때부터 세상의 덧없음을 알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과 평생 동행하며 살아갑니다.
근데 이 에노에 대한 기록이 이 창세기 오장 이십사절에 무드셀라를 낳은 후 삼 년과 하나님 삼백 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하는데 여기에 대한 조금 더 특별한 계시를 받고 그걸 성경에 기록한 인물이 있어요.
이것만으로는 조금 뭔가 하나님 더 애녹에 대한 계시를 보여주세요 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주신 또 하나의 특별한 계시를 받은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이 에녹의 기록은 딱 세 군데 있어요.
성경에 보면 어디 또 있죠?
또 하나가 히브리 21장 5절에 보면 이 구절은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이 그 에녹이라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살아갔다고 하는 기록이 나와요.
하나님과 동행했다. 동행하는 것은 무엇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살아간 연결을 시켜야겠죠 이 말은 그는 이 땅에 살아갈 때 세상 사람들이 에녹의 별명을 하나 지어줬어요.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이제 그걸 이제 모세는 표현했는데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면 사람들이 이 사람의 별명을 하나 지어준 거예요.
살아갈 때 이 에녹이라고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다?
한 승천하기 전에 사람들은 뭐라고 불렀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이게 이제 에녹의 삶의 특징들을 딱 설명해주는 별칭으로 불려준 이름이라고 하는 거예요.
근데 이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또다시 창세기 삼장 십오절을 적용시키면 보통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자는 어떻게 살아가죠?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해 살아갑니다.
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이에요.
에 당시 가인의 후예들의 삶의 기록을 보면 그들은 오직 어떻게 하면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나를 기쁘고 즐겁게 할 수 있을까가 그들의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에녹은 그런 시대에 그런 흐름에 역행하고 거스르면서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살아갔다고 합니다.
근데 에녹의 이런 삶은 에녹 한 사람만 이렇게 살았을까요? 아니라고 해야 돼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에녹은 그걸 대표하는 사람이었지만 에녹만이 아니에요.
당시 노아 홍수 당시에 구원 받은 사람들은 전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살아갑니다.
노아도 그렇게 살았을 것이고 무드셀라도 그렇게 살았을 것이고 라맥도 그렇게 살았을 것이고 전부 그렇게 살아갔을 거예요.
왜냐하면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어떤 사람이다? 더 이상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누구를 위해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누구에요?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에요.
근데 이렇게 살아가는 게 쉬운가요?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이렇게 알려주니까 아 나도 이제 이렇게 살아야지.
하면 되나요? 억지로 하면 되나요? 절대 안 됩니다.
근데 또 하나 생각해야 될 게 뭐냐 하면 복음을 받아들일 때 그 복음이 우리를 이렇게 변화시킨다고 하는 거야.
근데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중요한 거예요.
사도 바울이 이런 경험을 했대요. 근데 바울은 그것을 어떻게 경험했는가 하면 주의 사랑이 나를 어떻게 안다? 강건할 때 그것이 가능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자 이 말씀을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예 사도 바울은 에녹처럼 나를 기쁘게 하는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았는데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내가 스스로 노력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건할 때 그것이 가능했다고 하는데 근데 그 사랑이 나를 그토록 강하게 그런 삶을 강건한 이유는 여기 보면 생각해보건데 하는 거예요.
내가 생각해보면 내가 왜 이렇게 살았지 생각해보건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하여 죽은 것 때문이라고 하는 거예요.
예 그럼 이 사랑이 어떻게 나에게 돌아오 들어오는가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이면 동시에 역사하는 게 무엇이다? 성령 하나님이 역사하신다고 하는 거예요.
예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면 동시에 역사하는 게 뭐냐 그러면 성령 하나님이 예수님을 대신해서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세요.
근데 그 성령께서
로마서 5장 5절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마음에 어떻게 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어떻게 된다? 부어지는 막 쏟아 부어지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이 계속 우리 마음속에 계속 풍성하게 부어주신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을 느낄 때마다 그것을 크게 느낄 때마다 우리는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무엇이 일어난다 갈망이 일어난다고 하는 강권하는 거예요.
여러분 이것이 마치 이런 것과 같은 거예요.
조금만 좀 버텨주세요. 여러분 피곤하시더라도 조금만 버텨주세요.
우리가 누구를 깊이 사랑하면 밤낮 생각하는 주제가 무엇일까요? 그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곧 나의 기쁨이 되어지는 거예요.
그죠? 그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게 나의 기쁨이 되는 거예요.
아무리 먼 거리를 가야 해도
아무리 피곤해도 아무리 무리 무리하게 힘든 일이 요구되어져도 만일 그 일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하면 어떻게 할까요? 기쁘게 하려고 할 거예요.
그렇죠?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 안에 심어진 사람이라면 이게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 창세기 3장 15절에 이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 안에 심어진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라고 하면 오늘 우리는 나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창세기 3장 15절에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에게 나타나는 증상 중에 하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특별히 마지막 시대에 특별한 헌신과 순종이 요구되어지는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이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주님을 정말 깊이 깊이 사랑하는 일이 요구되어진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이 사랑을 우리가 모르면 이 사랑을 우리가 충분히 깨닫지 못하면 마지막 때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야 되는데 못 따라가요.
우리는 그 일을 할 수가 없어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하게 권해야 돼.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를 깨닫고 느껴야지만 마지막 때 우리가 목숨을 내놓는 일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그 길을 동행하며 따라가겠습니다라고 할 수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정말 하나님 말씀에 푹 빠져 살아야 돼요.
그 속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지를 계속 봐야 되는 거예요.
또 하나 에녹에 관한 기록이 성경에 실려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그 유다는 에녹이라고는 하는 사람이 이런 예언을 했다고 이걸 봤어요.
이 주의 형제 유다가 이제 아 이 에녹에 대한 계시를 보는데 에녹이 이런 예언을 했대요.
어떤 예언을 했다고 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미래를 보여주셨는데 보라 주께서 수많은 천사와 함께 세상에 임하는 장면을 쫙 보여줬대요.
애농에게
에녹이 그럼 이게 무슨 장면이에요? 수많은 천사와 함께 이 땅에 임하는 장면 무슨 장면이죠? 노아 홍수가 아니에요.
재림이에요. 그 부조화선자에 보면 나와요.
재림의 광경까지를 쫙 보여주는 거예요.
노하 홍수만이 아니라 홍수로 세상이 끝나는 겁니까? 그렇지 않아요.
다 끝까지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 때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시는데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죽게 거스려 한 모든 강박한 말을 인하여 하나님께서 정제하실 날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하는 심판의 기별을 누가 전했다?
에녹이라고 하는 사람이 전했다고 하는 심판의 기별을 전했다고 하는 그래서 에녹의 삶과 기별은 역사의 종말에 여자의 남은자손으로 살아가는 하나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잘 보여주는 표상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던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에녹이라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에녹이 세상에 심판을 증거한 것처럼 종말의 여자의 남은자손인 우리도
이 세상에 하나님이 심판에 가까이 이르렀다고 하는 이 세천사의 기별를 전하는 사람들이 바로 누구에요? 오늘 우리들이죠 비슷하게 흘러가는 걸 볼 수 그러면 이제 마지막 한 가지만 좀 더 설명을 좀 드리겠습니다.
그 에녹이 세상을 창조한 후에 이제 육백 년이 지난 후에 이제 야레세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근데 에녹이 태어날 당시에 인류 역사 속에 아담 할아버지도 살아계시고 이 대조, 삼대조, 사데조, 오대조까지 모든 사람들이 하나도 죽지 않고 다 함께 살아가는 그런 시대였어요.
에녹이 조금만 문을 열고 나가면 어떤 일이 있는가 하면
출입이 제한되어져 있지만 뭐가 보일까요? 문만 열고 나가면 뭐가 보이시죠? 바로 앞에 에덴동산이 눈앞에 쫙 보이고 있고 그리고 매일 에덴동산 출입구에서 뭘 볼까요? 불칼처럼 이렇게 이제 하나님의 영광이 쫙 임하는 장면 그리고 그 옆에 천사들 둘이 같이 이렇게 움직이는 장면이 쫙 보이는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매일같이 바라봐요.
그렇게 예배를 드리는 시대가 바로 에녹이 살던 시대였어요.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종말이 임박해 오고 있었어요.
근데 여러분 에녹이 이렇게 선교사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에녹의 신앙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 사람이 누구일까요? 제가 서두에 계속 설명을 했어요.
누구일까요? 에녹은 하나님과도 동행했지만 누구와도 함께 살았다 아담이에요.
예 부조와 선지자를 보면 바로 아담이었어요.
에녹은 아담과 더불어서 평생을 같이 살다가 아담의 죽음을 목격한 후 얼마 안 되어 승천한 사람이 바로 누구인가 하면 바로 그 에녹이라고 하는 사람
아담의 죽음을 목격하기 전에 승천한 사람이에요.
근데 이 에녹이 태어날 때 아담의 나이가 육백이십이세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담이 구백삼십 살에 이제 그 사망하기 때문에 삼백십팔 년간 아담과 함께 살다가 아담이 사망한 후에 사십칠 년을 더 살다가 하늘로 성찬하니까 아 제가 잘못 얘기했네.
지금 저도 지금 잠깐 예
그러니까 이 에녹은 평생 아담과 함께 살았어요.
근데 평생을 아담과 함께 살던 에녹에게 그 당시 사람들에게 아담의 죽음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아담이 죽었어요.
예 어떻게 보면 당시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 아담이 죽으면 한 시대의 종언을 고하는 어마어마한 충격과 혼란을 주는 사건이었어요.
예 여러분 아담은 초기 노아 홍수 전에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면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예수님 같은 존재가 바로 누군가 하면 아담이었어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신앙을 배워나가는 것처럼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아담을 통해 들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아담은 그 시대에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거의 모든 것을 다 하는 가장 위대한 영적 지도자가 바로 누군가 하면 아담이었어요.
하나님에 대해서 뿐 아니라 모두 알고 있죠 세상의 기원 세상이 돌아가는 모든 원리에 대해서 그는 하나님께 직접 배우는 사람이요.
하나님께 직접 그래서 모든 것을 다 대답해줄 수 있어요.
이게 왜 그렇습니까? 하면 그거는 이런 거야 하고 다 대답해줄 수 있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거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기억해서 아는 사람이 바로 누군가? 하면 아담이었다고 부조하는 자에 보면 적혀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죄 없는 세상에서 살다 온 유일한 사람이었고 그리고 인류 역사상 유일 무리하게 가림 장치 없이 죄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과 직접 교제하면서 하나님을 가장 밝은 눈으로 보고 교제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바로 아담이었어요.
그리고 그는 잃어버리기 전에 그 낙원의 모습을 직접 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했어? 살다 왔어요.
오늘 우리 시대에는 하늘나라에 가서 살다 온 사람이 없잖아요.
물론 계시를 잠깐 보고 오신 분들이 계시지만 그래서 오늘날 엘레노아이이나 초기 교회 사도나 심지어 모세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밝은 빛을 가진 사람 그 사람이 누구다? 아담이었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담이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아직까지 세상에 빛이 있다는 의미였다고 이제 얘기를 해요.
그 예수님이 계실 때 빛이 있었던 것처럼 그래서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나마 어느 정도 사람들은 이 아담의 이야기에 말을 들으면서 어느 정도 악을 제어하면서 통제가 가능했던 시대가 아담이 살아있을 때의 시대였다고 합니다.
이런 글이 있어요.
아담이 그들 가운데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최고의 존 최고의 존재와 최고의 권위 그분의 율법에 순종할 의무 등은 좀처럼 문제시 되지 않는 진리였다고 하는 그러니까 이거는 인정한다고 하는 거야 사람들이 그거는 아담이 얘기한 거는 맞아 이렇게 얘기한다고 비록 순종은 못하더라도 부정할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들 조심조심하며 살았다고 하는 거예요.
근데 그 사람이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근데 이것이 얼마나 큰 충격이었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이 아담의 부재는 세상에 완전히 뭐가 왔다? 어둠이 덮였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담이 죽는 것을 처음 본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주를 경외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킨 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왜냐하면 아담도 죽었는데 법을 지키는 것과 지키지 않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겠냐고 하면서 그러면서 악인이든 의기 의인이든 다 뭐로 돌아간다? 흙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이제 하는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하는 이게 부조화 선지자에 나와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혼란한 세상에서 아담 사후에 그 아담의 역할을 감당하며 아담에게 넘겨받은 복음을 가장 열정적으로 세상에 증거하며 아담이 그전에는 계속 전했거든요.
아담의 바톤을 이어받아서
가장 열정적으로 그 시대에 아담을 대신해서 복음을 전하면서 여전히 세상에 빛을 강력하게 증거하기 위해서 일어선 사람이 누군가 하면 선교사 에녹이였다고 하는 거예요.
예 여러분 아담의 후손들이 전부 천년 가까이 아담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고 있었는데 에녹은 왜 그렇게 그들과 다르게 살 수 있었을까 이거를 이제 한번 제가 생각해 봤는데요.
아마 에녹은 이거 제가 상상을 한번 한 거예요.
근데 이거는 부조한 선지자이의 기록을 토대로 해서 상상한 거예요.
에녹은 아마 이 날을 잊지 못했을 거예요.
그것은 아마 아담 이후에 모든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이 느끼고 체험했을 것 같은 그런 거예요.
이날 모든 가족들이 전부 다 정신을 차리시고 저를 마지막 스토리입니다.
여러분들이 자꾸 조시면 저도 힘들어요.
모든 가족들이 에덴 동산 출입구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던 예배일이었을 겁니다.
근데 그날 언제나 익숙하고 평범하게 들려오던 그 아담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이날 이날 이 에녹의 가슴에 사무치도록 감동적으로 들려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근데 그날은 어떤 날인가 하면 어떤 날이었겠어요? 성경의 기록을 보면 그의 첫 아인 무드셀라가 무드셀라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그런 시점이었어요.
그런데 그날 아담 할아버지의 설교를 듣고 난 후 그날 예배가 마쳐지고 모든 사람들이 다 떠나간 후까지 그 에덴동산 출입구에 남아서 그 하나님의 임재 임재의 영광을 바라보며 이 에녹은 펑펑 울었을 거예요.
그러면서 기도했을 거야. 하나님 주님과 동행하며 살겠다고 그 사랑을 더 깊이 깨닫게 해달라고.
여러분 그런데 만약 오늘 우리에게도 언제나 익숙하고 평범하게 들려오는 그 하나님의 말씀이 육십오 년 동안 들어왔던 이야기요 그죠? 다르게 들려올 때가 있다면 만약 그런 때가 찾아온다면 우리는 그때를 놓치지 말아야 된다고 하는 거예요.
그때는 어쩌면 우리가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을 시작할 기회가 찾아온 곳일 수도 있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그날이, 그 기간이 이번에 이 기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근데 그 날 그의 마음속에 사무치게 들려지기 시작한 그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였는가 하면 아담 할아버지가 구백삼십 년을 살면서 밤낮없이 그 후손들에게 전한 이야기에요.
그 이야기는 바로 모세의 구전을 통해서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의 계시의 빛을 통해서 창세기 3장에 아주 짧게 기록한, 우리가 원 복음이라고 하는 복음 이야기했을 거예요.
제가 생각할 때 이 복음 이야기는 매주 빠짐없이 그 예배를 드릴 때마다, 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릴 때마다 계속 이게 어떤 의미인지를 더 감동적으로, 더 새롭게 하기 위해서 끝없이 몸부림 치면서 그들에게 의미 있게 전달하려고 애썼던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아담 할아버지였을 거예요.
그러면 잠시 한 오천 년 전으로 돌아가서 에녹이 울며 듣던 그 예배 시간으로 한 번 잠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담이 에덴동산 출입문 앞에 서서 어느 안식일이었을 거예요.
예배를 드리는데 그 때 제사를 집내하던 아담 할아버지가 당시 후손들에게 설교를 합니다.
언제나 시작부터 아마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을 거야.
왜냐? 그럼 눈물 흘리지 않고는 이 설교를 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밝은 계시에 그런 빛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이 이야기를 하는데 안 울었을 거냐? 얘들아 내가 처음 태어나서 보았던 그 세상은 지금처럼 이렇게 망가지고 더럽혀지고 추악하게 변해버린 그런 세상이 아니었다.
그 세상은 정말 너무너무 아름다운 세상이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곳에 만들어놓은 모든 것들이 그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있었어.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다 생각하시며 하나하나 만들었다고 하는 거 오늘 우리가 속리산을 걸어 다니면서 그걸 봐야 돼요 그걸 느껴야 돼.
근데 아담은 그것을 볼 때마다 느꼈을 거예요.
근데 그런 세상을 잃어버린 걸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고 하는 그때 너희 할머니와 함께 즐기던 그 거룩하고 아름다운 그 행복들을 생각하면 우리가 지금 이 땅에서 즐기는 그 어떤 것들도, 그 어떤 쾌락들도 그 에덴에서 우리가 누리는 것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거 훨씬 더 크고 훨씬 더 영광스러운 즐거움과 기쁨이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창세기, 창세기 삼장에 벌어졌던 그 이야기를 또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할머니인 하와가 뱀으로 둔갑에 찾아온 그 마귀에게 유혹되어서 죄 무너져 버렸을 때, 그때 우리는 그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몰랐다고, 우린 세상이 이렇게 변해버릴 줄 몰랐다고 하는 거예요.
근데 죄를 짓고 나니까 모든 것이 너무나 무서워 보였고, 모든 것이 추하고 수치스럽고, 그렇게 사랑스럽던 아내가 미워지고 그러면서 나는 생각하기를 이제는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결과로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공포에 떨고 있었다고 하는 거
그런데 그날 저녁 변함없이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나를 부르시는데 그 나를 애타게 부르시는 그 소리는 이전과 다르게, 너무나 슬펐다고 하는 옛날에는 다정하게 부르시는데 갑자기 부르는 목소리가, 하나님의 음성이 달리 들리는 거야.
그런데 그때 나는 이상하게 내가 그렇게 자랑했던 그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 소리가 들려오는데도
하나님, 저 여기 있습니다 라고 달려갈 수가 없었다고 하는 거야.
왜냐하면 이전과 다르게 하나님이 너무나 두렵고 무서워 숨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거야.
근데 계속 하나님은 나를 찾으시면서 아담아, 아담아 어디 있느냐 하고 나를 찾고 있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다 결국 하나님은 내가 숨어있는 그곳까지 찾아오셨고, 그리고 떨고 있는 우리를 바라보시며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하는 거예요.
아담아, 하와야 두려워하지 말라고
내가 너희를 결코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라고 너희를 결코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이 수치스러운 악의 구렁통에 결코 그냥 버려두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거 그래서 내가 너희를 살릴 계획을 가지고 왔다고 하는 거야.
그러면서 그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고 하는 거 그 이야기를 듣는 데 그 이야기가 너무나 충격적인 이야기, 그 계획들이 그 이야기는 이런 것이었다고 하는 거예요.
너희가 범한 그 율법은 변경되거나 폐기되거나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이어서 그 율법을 범한 너희를 살리기 위해서 너희를 대신해서 누군가는 피를 흘려 죽게 된다 그러면서 당시에 단 한 번도 피를 흘린 적이 없는 그 세상에서, 그 아담의 정원에서 행복하게 돌아다니는 양을 하나님이 한 마리를 잡으시는 거예요.
그리고 그 피를 흘리고 죽어가는 양의 모습을 보여주셨는데,
그때 아담과 하와는 너무나 충격적이었다고 하는 당시에는 낙엽 하나만, 나무 잎 하나만 떨어지는 걸 보더라도 슬퍼질 정도로 세상에 죽음이 없는 세상이었어요.
근데 양이 죽는 거예요. 자기가 그렇게 사랑하던 하나님의 형상을 받아서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릴 때 하나님의 마음으로 다 돌보던 것들이었거든요.
그 피를 흘리고 죽어가는 양의 모습을 보면서 너무너무나 가슴이 아파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라는 걸 본 적이 없는 세상에서 이 한 마리의 무고한 양이 자신들을 대신해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걸 볼 때 밤새 가슴이 아파 견딜 수 없었을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 죽은 양의 가죽을 하나하나 다 벗겨내시면서 그 가죽으로 아담과 하와의 옷을 지어 입히시면서 에덴동산 밖으로 함께 나올 때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더 하셨다고 하는 거예요.
그 말씀은 바로
아담과 하와야 이 동산에서 너희가 죽어서 나와야 하는데 근데 살아서 나오게 되었는데 그런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양이 너희를 대신해서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너희를 대신해서 죽음을 당하게 되는 나의 희생 때문이라고 하는
그러면서 이 양은 먼 훗날 너희 죄를 대신해 죽게 될 나의 모습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쭉 들려줬을 거야.
그러면서 이 희생을 잊지 말라고 이 사랑을 잊지 말라고 이 사랑이 너의 마음에 심어지고 새겨져야지만, 이 사랑이 너를 이끌어서 죄를 이기게 할 것이고, 나의 율법을 다시금 지키게 할 것이고 그리고 이 사랑이 다시금 우리가 행복하게 교제하던 그 모습으로 너희를 변화시켜낼 것이라고 이야기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근데 이 이야기를 들을 때 아담과 하와는 그 동산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서 아마 펑펑 울었을 거예요.
그리고 동시에 그들의 마음에 물 밀듯 밀려들어오는 생각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런 어마어마한 사랑을 나에게 베풀어주시는지 그 사랑이 너무나 커서 감당할 수가 없었을까요? 그러면 떠오르는 생각이 뭔가 하면, 우리를 속여서 죄에 빠지게 한 마귀가 너무너무 미워지게 되었고, 두 번 다시 죄를 짓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게 되는 이 하나님이 주신 이 복음을 위하여 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을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부조와 투자에 보면 평생 아담은 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자신을 바치며 살아갑니다.
이거 외에는 다른 의미가 없어요. 무조건 다른 세상이 빨리 메시아가 올 날을 바라보면서 매일같이 그가 한 일은 뭔가 하면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어.
그리고 에녹보다 더 깊이 깊이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은 저는 아담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면 그 아담은 원래 최 타락하기 전에 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훨씬 더 밝은 빛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그렇게 됐지만 실제로는 에녹보다 훨씬 더 깊이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은 아담이었을 거예요.
여러분 이것이 바로 바로 아담이 그의 후손들에게 들려준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오는 복음 이야기였을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근데 이 이야기를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그리고 에노과 무드셀라 라멜까지 다 들려주었는데 근데 그 중에서 가장 크게 감동받은 사람이 바로 누구였다? 에녹이였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부조 같은 자에 보면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그는 에녹은 아담으로부터 탈락에 어두운 이야기와 그 약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위안을 주는 이야기를 배웠고 누구로부터 배웠다? 그는 에녹이에요.
에녹은 아담으로부터 해요. 아담으로부터 타락의 어두운 이야기와 그 약속에 나타 약속이 뭐예요? 창소기 3장 15절이잖아요.
하나님에 관한 위안을 주는 이야기를 다 배웠어요.
그리고 그 이야기를 그 이야기가 다시 말해서 그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무한하고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의 이야기예요.
그렇죠? 이 배우고 난 다음에 이것이 어떻게 되었다?
밤낮 그의 명상의 주제가 되었다고 하는 거 여러분 오늘 우리도 밤낮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가 어떻게 돼야 될까요? 이게 우리의 명상의 주제가 돼야 되는 거예요.
무엇을 생각하든 어떤 순간에도 계속해서 이 하나님의 사랑을 계속 느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그걸 배워야 되고 볼 수 있도록 해달라고 계속 노력해야 되는 그게 바로 어떻게? 에녹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300년 동안 동행하게 만든 이유가 되었다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는 이 밤낮 하나님의 사랑을 그가 계속 성경을 통해 받고 난 후에 이게 그의 삶의 주제가 된 후에 그는 또 어떻게 했다? 전심 전력을 다하여 그가 살고 있는 주위 사람들에게 이 사랑을 나타내려고 애썼다고 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이것이 바로 그로 하여금 심판의 기별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게 했을 거예요.
아무리 아무리 세상 사람들에게 배척받는 그런 심판의 기별을 경고하는 것이 두려운 일이고, 힘든 일이고, 불편한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에 이걸 전하지 않고는 안 되는 거예요.
전하는 거예요 계속 여러분 구조와 선지자 이 내용이 바로 저로 하여금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든 근거였습니다 여러분 그리고 이것이 바로 300년 동안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모습이었고, 비결이었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결국 핵심은 이 사랑이, 아담으로로부터 들은 이 십자가의 사랑이 그의 밤낮 영상의 주제가 되었기 때문에 그는 더 높은 경험에 이르고, 그리고 하나님과 더 친밀한 교제로 이끌려 들어가서,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게 되었고, 이 사랑이 계속 강건하니까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게 무엇일까가 그의 삶의 주제가 되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기쁘게 다 하는 거예요.
그리고 전신 전력을 다하여 그가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사랑을 나타내려고 애쓰는 선교사가 되도록 만들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동력이 끊어지면 모든 것이 다 불가능해지게 만드는 거예요.
여러분 그래서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기별 가운데, 그 경고의 기별 가운데 하나가 뭐죠? 너희의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 교회가 당시 여러 가지 문제에 빠지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바로 그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결론은 아담부터 지금까지 이 사랑에 빠진 사람은, 이 십자가의 사랑에 빠진 사람은 밤낮 하나님의 무한하고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이 그의 명상의 주제가 될 것이고, 그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은 더 크게 부어질 것이고, 그 결과 그들은 모두 전심 전력을 다하여 이 사랑을 나타내려고 애쓰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이 사랑을 회복한 창세기 3장 15절의 기별을 정확하게 다시금 그들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그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재해석해내고 그 복음을 담은
사도행전의 모습이었고요. 그리고 이 모습이 바로 재림 운동 당시의 선조들의 모습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오늘 마지막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재현되어져야 될 모습이라고 하는 사실을 꼭 잊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에녹이라는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고, 그 사람은 특별한 신앙의 경험을 한 사람이 아니라, 오늘 마지막 사람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모본이 되는 사람이고 모델이 된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번 기간 특별히 하나님의 깊고 깊은 사랑에 푹 빠져보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랑 때문에 여러분의 모든 자아가 압도되어지고,
그 어떤 어려운 순종도 기쁘게 순종할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변화되어질 수 있게 해달라고 여러분 이 시간 기도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신앙하는 것이 행복할 수 있는 그런 사람 여러분 이 사랑이 회복되어지면 신앙하는 게 기뻐요.
그래서 종로의 계단 마지막에 보면 주를 기뻐하는 것이 바로 뭔가 하면 신앙의 정점이라고 하는 거예요.
오늘 우리 모두가 그런 사람이 되어서 그것을 우리가 믿는 이 신앙을 기쁘게 복음으로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그런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늘 아버지 오늘 우리에게 애녹의 삶을 통해서 배워야 될 정말 중요한 교훈들을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오늘 우리에게도
애녹이 느끼고 경험했던 그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을 통해서 풍성하게 부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오늘 그 사랑이 우리 삶에 밤낮없는 삶의 주제가 될 수 있을 만큼 오늘 그 사랑을 우리가 갈망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고, 주님께 기도하며 구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주님 도와주시옵소서.
특별히 이 집회에 참여하는 모든 분들의 마음속에 함께 하시고, 또 육신에도 함께 하여 주셔서
영육의 치유의 경험을 경험하게 하여 주시고, 정말 이 곳을 떠나 떠나 나갈 때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감사하며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난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를 축복하시고 성령으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잠시 무릎 꿇고 기도하는 시간 주의 성령으로 우리에게 임재하여 주셔서 그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생각하고 명상하며, 우리의 마음이 주님 앞에 온전히 드려지는 은혜로운 시간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