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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막부흥회 / 인간관계, 어떻게 맺어야 하나 _ 오재호 목사
평안히 주무셨습니까? 인간관계 어떻게 맺어야 하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대언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잘 못하는데 이 부분을 말씀을 드려야 됩니다.
혹시 이런 문장을 들어보셨습니까? 인간은 섬이 아니다.
말 그대로 섬이 아니기 때문에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인 걸 표현하는 것이죠.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같이 살아야 되는데 같이 살면 좋은 점이 있죠.
근데 같이 살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도 있습니다.
칡나무를 한자로 가리라 그럽니다. 등나무를 한자로 등이라 그럽니다.
그래서 여러분 몸이 안 좋고 감기가 증상이 있을 때
갈은탕 뜻이잖아요. 책나무 뿌리로 만든 거죠.
둘 다 넝쿨과에 속하는데 여러분 이 칡나무와 등나무를 합친 단어가 갈등이라는 단어입니다.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칡나무는 자라나는 방향이 반식의 방향입니다.
등나무는 자라나가는 방향이 시의 방향입니다.
이 나무가 자라는 방향이 달라요. 이 두 나무가 같이 있으면 꼬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하고 갈등이 생기는 이유가 뭐예요? 내 생각하고 그 사람의 생각이 반대가 안 되고 똑같으면 갈등이 생길 리가 없죠.
내 생각과 상대방의 생각이 반대고 전혀 다르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는 것이지 그 갈등을 우리가 잘 해결을 하지 못할 때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같이 살지만 상처도 주고받고
나하고 별로 상관없는 사람한테는 상처를 잘 안 받습니다.
있어도 그냥 흘러버리지. 근데 내가 많이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많은 상처를 또 받고 상처를 받을 뿐 아니라 상처도 주면서 살아갑니다.
우리의 인간관계를 좀 어떻게 하면 잘 맺을 수 있을지를 살펴보는데 정답은 있습니다.
근데 이 정답을 우리가 잘 활용을 못하지.
함께 우리
소 제목을 한번 읽어볼까요? 시작. 먼저 예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라.
여러분 이건 우리가 다 알고 있는데 잘 안 되는 것이지만 또 확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마태복음 18장 21절부터 35절까지에 보면 1만 달란트의 탕감을 받은 빚진 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데 이 어제 제가
마테에게 기록한 주기도문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주옵시고
어
그 이야기할 때 죄라는 단어는 전혀 없다 그랬습니다.
전부 다 빚이라는 단어입니다. 호바라고 하는 아람어가 빛과 죄를 같이 표현하는 용어이기 때문에
그
빛 이야기를 해도 그것이 죄에 관한 이야기인 것을 유대인들은 다 알아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1만 달란트 탕감의 비유도 마찬가지인 거죠.
여러분 비유 어제 제가 중심 사상 찾기를 말씀드렸는데 비유를 성경 본문을 읽으실 때는 비유는 하나님이 예수님이
듣는 대상이 누구이고 왜 말씀했는지가 비유는 정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그걸 확인하면 그 본문 전체 내용은 파악하기가 쉬워요.
앞부분에 기록합니다. 그때 베드로가 나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까? 7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7번을 70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내보던
고3 학생이 선생님한테 그 대학을 들어가려면 수능 점수를 몇 점 받아야 됩니까? 이렇게 묻는 학생은 공부를 잘하는 학생일까요 못하는 학생일까요? 잘 모르십니까? 그렇게 선생님한테 질문하는 학생은 공부 못하는 학생이 아닙니다.
여러분 예수님한테 베드로가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이렇게 묻는 질문은 용서를 잘하는 사람이 물을까요? 용서를 못하는 사람이 물을까요? 용서를 잘하는 사람이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몇 번까지 하오리까? 여러분 솔직히 말해 봐요.
여러분 한 사람 잘못한 거 똑같은 잘못하는데 7번 용서해 줄 수 있어요? 열받아서 못 해요.
그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는 세 번까지 해주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더블로 하고 한 번 더 하면 되겠습니까?
이렇게 물은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으로부터 무슨 기대를 한 거야 베드로 세 번 정도만 용서해 주면 되는데 너는 7번까지 할 수 있느냐 칭찬 듣고 싶었어요.
근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뭐예요? 10번씩 7번 완전히 베드로의 그 질문에 따른 예상되는 답은 상상할 수 없는 충격적인 답변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한 비유를 설명해 주죠. 그러니까 이 비유는 돈 이야기가 아니고 용서에 관한 이야기예요.
그죠? 이 질문에 따른 비유이기 때문에 이 내용을 여러분이 다 아시기 때문에 제가 따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한 사람이 1만 달란트에 빚을 졌는데 갚을 수 없는데 주인이 채권자가 탕감을 시켜주는데 나가다가 자기한테 빚진 자 몇 대 날이요
10대 나리온 빚진 자의 동관에 목을 틀어쥐고 갚으라고 그랬습니다.
이런 스토리를 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이게 비유가 좀 가깝게 와닿기 위해서 이 돈의 여기에 나오는 돈의 가치가 현재 가치하고 얼마나 오늘 가치로 환산을 해봐야 이 비유가 좀 이해가 됩니다.
한 달란트는 무게 단위이기도 하고 화폐 단위이기도 했습니다.
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데나리온은 하루 일당이었습니다. 그러니까 6천일 일하고 버는 돈이죠.
그러니까 여러분 지금 일당을 뭐 비싸게도 잡고 싸게도 잡고 할 수 있겠지만 한 10만 원으로 잡아보겠습니다.
이 정도는 그렇게 많은 일당은 아니잖아요.
그러면 1 달란트는 6천 곱하기 10만 원 하면 됩니다.
얼마죠?
6억 원입니다. 1 달란트가 그러니까 이게 1만 달란트이기 때문에 여기다가 동그라미 4개를 곱해야 돼요.
그러니까 얼마죠? 6만 억입니다. 6만 억이라는 단어는 계산이 없기 때문에 이게 6조예요.
작아요 적어요? 많아요 굉장히 많은 돈입니다.
이 돈은 사람이 갚을 수 있는 돈이 아니에요.
내가 뭔가 열심히 저금하고 해가지고 내 수익해가지고 이 빚을 갚을 수 있는 돈은 아닙니다.
그러면 100대 나리오는 100일 일하고 버는 돈이지.
그러면 일당을 10만 원으로 잡았으면 천만 원입니다.
그러면 1만 달란트와 100데나리온의 비율이 어떻게 되는가 하면 6조 원하고 천만 원이에요.
6조가 여러분 너무 감이 없으니까 동그라미
몇 개씩 뗄까요? 동그라미 3개를 뗍니다.
각각해서 동그라미 3개를 떼면 6조에서 동그라미 3개를 떼면 60억이에요.
천만 원에서 동그라미 3개를 떼면 만 원입니다.
보시 여러분이 빚을 졌는데 60억에 빚을 졌어요.
작아요 많아요 굉장히 큰돈의 빚을 진 겁니다.
그래서 채권자로부터 시달리다가 저 돈 못 갚겠다.
그래서 탕감을 시켜준 겁니다. 60억을 이런 일은 안 일어나요.
그죠? 60억의 탕감을 받고 나가다가 내가 만 원을 빌려준 사람을 만났네.
근데 그 사람 목을 틀어쥐고 만 원 갚아.
여러분 이 스토리가 가능한 스토리예요.
내가 60억을 지금 탕감을 받고 가는데 나한테 많은 빚진 사람을 내가 만났어요.
근데 내가 지금 60억 탕감받고 나오면서 나한테 많은 빚진 사람의 목을 틀어쥐고 갚으라는 이야기가 나오겠냐 이 말이에요.
대답을 한번 해보셔요. 말이 안 되죠 내가 60억을 지금 탕감을 받고 나가다가 1만 원을 빚진 사람을 어떻게 목을 쥐고 갚으라고 이야기하겠냐 이 말이에요.
그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는 거예요.
왜 이런 이야기가 있었겠냐 이 말이에요.
그럼 예수님이 이걸 갖고 뭘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60억 대만은 이거 뭘 이야기하는가 하면 1만 달란트의 탕감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죄의 용서가 무한히 크다는 것을 설명하는 거죠.
백데나리온의 탕감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에 대한 용서를 해주어 봐야 하나님의 용서에 대해서는 비해서는 지극히 작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저희가 하나님께 지은 죄를
저희 형제가 그들에게 지은 죄와 비교한다면 1만 달란대 100다나리온 거의 100만 대 1이나 되는데도 저희는 용서하는 마음이 없다.
한 가지 질문을 드릴게요. 여러분 이 본문에 보면 1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을 이제 현재 가치로 환산을 해서 60억 하고 만 원으로 이제 환산을 시켰습니다.
이 사람이 60억 여러분 생각해 봐.
60억이라는 돈을 탕감을 받았으면 기쁠까요 안 기쁠까요? 여러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야 돼요.
어떻게 이런 자비로운 주인이 채권자가 있는가 이 돈을 내가 탕감을 받았다니 여러분 자다가도 일어나서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불러야 되고 잠을 안 자도 피곤하지 않아야 돼요.
그러면
자기한테 그거하고 비교할 수 없는 만 원의 빚진 사람이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게 정상이에요? 그냥 가라고 그냥 가라고 내가 지금 얼마를 탕감받고 왔는지 아느냐고? 만 원 그냥 가라 그냥 가라.
괜찮다. 여러분 그렇게 기쁨으로 돌려보내야 정상이죠
맞아요
근데 왜 이 기쁨이 없었는가 하는 거죠.
여러분 이 세계의 십자가라고 하는 그림이라기보다는 애칭 기법으로 만든 철판에다가 화학약품을 부어가지고 못이나 송곳 같은 아주 날카로운 도구로 긁어가지고 만든 그림이에요.
그림이라 그럴까요 작품이라 그럴까요? 17세기에 유명한 네덜란드의 화가인 렘브란트가 그 작품 만든 것인데
렘브란트는 별명이 있습니다. 빛의 화가라고 어둡고 밝은 것을 통하여서 이제 작품을 만드는데 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좌우에 두 강도이고 많은 사람들이 있는 그런 애칭 기법으로 만든 작품인데 여기 지금 원 안에 이 노란 원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렘브란트 작이에요.
렘브란트는 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관련된 작품들을 그릴 때는 자기도 거기에다가 그려 넣었어요.
이게 뭘 의미하느냐는 거죠. 여러분 렘브란트는 17세기 사람이고 예수님의 십자가는 ad 31년에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시대가 안 맞는데 자기를 거기다 그려놓은 거는 뭐냐 하면 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자기하고 무관한 게 아니다는 거거든요.
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려 돌아가신 것은 내 죄 때문이고 저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로 인하여서 이루어진 용서는 나에게 이루어지는 용서라 그 십자가에 이루신 공로와 그 혜택이 자기에게도 미쳐 온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작품을 만들 때 자기도 거기다 집어넣은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한 책임이 자기에게도 있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신 용서에 자기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증하는 그런 의미로 자기를 그려놓은 것입니다.
여러분 1만 달란트의 탕감을 받은 사람이 왜 백 데나리온을 빚을 진 사람에게 목을 틀어쥐고 갚으라고 했냐 하면 이 사람은
자기가 그 어마어마한 빚을 탕감받은 것에 대한 실질적인 확신이 없었어요.
여러분 있었다면 기쁨이 있어야 되겠죠 감사가 있어야 되겠고 그게 당연히 뭐로 나타날까요?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로 나타나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가 십자가에 달려서 우리 죄를 용서했다는 말을 우리 많이 들어요.
많이 듣는데 그게 진짜 나한테 실질적으로 믿겨져서 이게 너무 감사하고 고맙고 기쁨이 넘쳐오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가지고 뭐예요 예수님께서 내 죄를 그렇게 용서해 주셨구나 그 사실을 안다 그러면 삶이 다르다는 거예요.
근데 우리는 의뢰이 너무 많이 들었어.
그래서 내가 그걸 믿는 줄 알아 근데 여러분 그걸 믿는지 안 믿는지는 어디에서 나타나요?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나타나지 내 삶 속에서는 그게 그러니까 여러분 진짜 여러분과 제가 예수님으로 인신 십자가의 용서로 인해서 여러분의 죄와 죄의 용서가 용서받았어요.
진짜예요 여러분 이건 저한테 대답할 필요 없어요.
여러분이 저한테 대답해야 될 의무도 없어.
여러분 정말 곰곰히 한번 생각해 봅시오.
혼자 돌아가셔가지고 혼자 여러분한테 한번 물어봐.
내가 정말 내 죄가 과거에 지은 모든 죄, 앞으로 짓게 될 모든 죄까지도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서 그걸 다 용서받았는지 여러분 거기에 대해서 확신이 없으면 우리는 여전히 나한테 용서 잘못한 사람에 대해서 흥분하게 돼 있습니다.
폴리 빌라드라고 하는 미국의 아동 작가가 쓴 이해의 선물이라는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너무 감동적이어서 중학교 교과서에 실렸습니다.
지금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부부가 관상어 가게 물고기 관상어 가게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어린 남매가 물고기를 사러 왔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막 돌아보면서 몇 마리 사고 싶은 물고기를 주인한테
포장을 해달라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담아가지고 물도 넣고 물고기를 정성스럽게 포장을 해서 줬습니다.
이 산행 아이 오빠처럼 보이는 이 산행 아이가 주인한테 돈을 주는데 동전 몇 개를 올려놔요.
그 동전 몇 개는 물고기 한 마리 값도 안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주인이 황당했습니다. 이렇게 동전을 한 번 보고 애들 얼굴을 한 번 보고 동전 한 번 보고 애들 얼굴을 보니까 애들이 당황을 했습니다.
그 사내 아이가 당황을 해서 묻습니다.
왜요? 좀 모자라요 그렇게 물으니까 그 모습이 너무 천진난만하고 그래서 이 주인이 아니 좀 남아 그러면서 물고기도 주고 거스름돈도 거슬러 줘요.
그걸 옆에서 자기 부인이 봐요. 그러니까 황당하죠.
남편한테 말합니다. 당신 오늘 장사를 하자는 거 하자는 거예요 요 말자는 거예요
그렇게 이제 아내가 퉁명스럽게 말을 할 때 이 관상어 가게의 사장님 주인이 자기가 어릴 때 겪었던 한 경험을 이야기해 줍니다.
여보 내가 저 아이들이 말할 때 엄마와 늘 동네에 있는 한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부식가게에 함께 가곤 했었어.
엄마하고 같이 가서 엄마가 부식을 사고 내가 좋아하는 사탕을 고르면 엄마가 뭘 할아버지한테 주고 왔어.
근데 그 아이는 그게 돈이라는 건지를 모르는 거예요.
할아버지한테 뭘 주고 오면 갖고 오는 거예요.
그 어느 날 엄마가 없는데 그 사탕이 먹고 싶었던 거예요.
그래서 혼자 간 겁니다. 혼자 가서 사탕을 고르고 할아버지한테 이 사탕 사겠다고 그러고 하니까 그러면서 할아버지가 손을 내미니까 그 할아버지 손에다가 버지씨 5개를 올려놔요.
그러니까 뭘 줘야 되는지를 모르는 거죠.
그러다가 자기가 버지 시를 갖고 가서 5개를 할아버지 손에 올려놓으니까 할아버지가 얼마나 황당해요.
그래서 버지 씨 한 번 보고 애 얼굴 한 번 보고 버지씨 한 번 보고 애 얼굴을 보니까 애가 굉장히 당황을 했습니다.
그때 이 아이가 물어요. 할아버지한테 왜요? 모자라요? 그렇게 물었을 때 할아버지가 핑클 웃으면서 아니 좀 남아.
그러면서 그
사탕도 주고 거스름돈도 거슬렀죠. 그러니까 그때는 그게 돌아왔는데 뭔 의미인지를 모르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 그게 거래를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아이가 알게 되죠.
커서 그러면서 그 할아버지가 자기를 무한을 주지 않고 자기가 먹고 싶은 그 사탕을 주면서 그렇게 돌려보낸 기억이
가슴속에 따뜻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말이에요.
여러분 그런 상태에서 이 관상어 가게를 하다가 이 어린 남매를 만난 거예요.
그러면서 물고기 한 마리 값도 안 되는 돈을 내어놓을 때 뭐 자라느냐고 그렇게 물을 때 누가 생각이 났어요? 자기 옛날 모습도 생각나고 자기를 그렇게 대해주었던 할아버지의 그 인자하신 모습도 같이 생각이 났던 거죠.
그러면서 물고기도 주고 거스름돈도 걸러준 겁니다.
질문 하나 드릴게요. 이 관상어 가게의 주인이 자기가 어릴 때 그런 할아버지로부터 받았던 그 은혜의 경험이 없었다면 이런 거래를 이 아이들에게 이런 대접을 해줄 수 있었겠습니까? 어렵잖아요.
물론 할 수도 있겠지만 굉장히 어렵죠.
근데 자기가 어릴 때 할아버지로부터 그런 대접을 받아본 것을 있었고 그것을 떠올리면 이런 대접을 하는 것이 쉬웠을까요? 쉬웠죠 그러니까 여러분 봐요.
이 지금 이 아이들과의 문제가 아니고 자기가 과거에 무슨 경험을 했는지가 이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로 나타났다는 거죠.
여러분 이게 지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이야기예요.
내가 예수님하고 무슨 관계에 의해서 내 죄가 예수님하고 어떻게 해결이 되었는지를 기억하고 생생하게 잊어버리지 않고 감격으로 갖고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이 인간관계에서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로 1만 달란트까지 가지 말고 60억이라고 하는 돈을 내가 누군가의 채권자로부터 탕감을 받았는데 만 원을 빚진 사람의 목을 틀어쥐고 갚으라고 말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우리는 다 이해하잖아요.
근데 지금 우리 모습이 딱 그렇다는 거예요.
내 힘으로는 갚을 수 없는 죄의 용서를 예수님한테 받았다고 우리는 말하면서도 그죠? 내 남편의 그 말 한마디
함께 교회 생활하는 그 교인의 아무개 집사의 그 섭섭한 말 한마디가 안 잊혀진다는 거죠.
우리 재림 교인들은 현미를 먹고 채식을 잘해가지고 정신도 맑아.
그래서 남들이 섭섭한 이야기한 게 잊혀지지를 않아.
하루가 지나도 또 생각나고 일주일이 지나도 또 생각나고 한 달이 지나도 1년이 지나도 안 잊혀지는 근데 또 예배를 드리러 같이 와
얼마나 불편해요 그게. 그러니까 여러분 그 사람이 잘못한 것도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게 근본 문제는 아니라는 거예요.
근본 문제는 뭐다? 예수님하고 나하고의 관계라는 거지.
그래서 제가 어제 말씀드렸잖아요.
모리스 벤덴의 그 믿음으로 말미암는 95개조 이야기할 때 우리가 신앙할 때 노력이 의도적인 노력과 자발적인 노력이 있어야 된다 그랬잖아요.
그래서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 노력하고서 사랑하고 용서하려고 그거 하지 마세요.
안 됩니다. 괜히 힘 빠지지. 그러니까 그 관계는 접어둬요.
그냥
접어두고
예수님하고 나하고의 관계에서 내가 어떤 용서를 진짜 받았는지를 여러분 확인하셔야 돼.
그래서 여러 여러분 다른 사람하고 섭섭하고 힘든 일이 생기면요 저는 그 사람하고 쇼브를 보지 않습니다.
조용히 제가 혼자 골방으로 갑니다. 그리고 시대의 소망을 펴놓고 알바리 십자가 펴놓고 다시 읽습니다.
읽고 나서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용서를 받았는지 다시 확인합니다.
여러분 그거 다시 한 번 정말로 확인하고 나오면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이 좀 바뀌어 있습니다.
왜냐면 그 사람하고 나하고의 문제가 아니라니깐요.
그건 예수님하고 나하고의 문제지. 이 용서에 비해서 이 용서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 용서를 확인만 하면 이 용서는 된다는 거거든요.
그냥
그러니까 여러분 용서는 내가 하는 게 아니에요.
그 용서받은 힘으로 그 용서받은 감격으로 그 용서받은 기쁨으로 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여러분 이거 안 되는 거는 어디에 문제가 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
모든 인간관계의 문제는 그 사람하고 나하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예수님하고 나하고 문제지
한 삼육학교 선생님의 간증문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말씀을 볼 때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되었고 나의 인생과 내 속에 숨은 죄들을 이 말씀 속에 다 기록해 놓은 것 같았습니다.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것처럼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지곤 했습니다.
나의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면서 잘못 살아온 것들을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내 남편, 내 아이만 원망하고 살았는데 그들의 잘못이 아닌
내가 더 큰 잘못이었고 죄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이 얼마나 평안하고 기뻤는지 모릅니다.
이 경험을 통해 제 삶에 엉킨 실타리들을 주님이 하나하나 풀어주셨고 세상에 얽매여 있는 것들을 끊고 버리는 그 일들이 제가 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전에 먹고 입고 즐겁게 여기던 것, 좋아 보이던 것, 해보고 싶었던 것들, 나를 자랑하고 싶었던 것들이 얼마나 가치 없게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누가 시키고 가르쳐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제게 그런 마음들을 주셨던 것입니다.
미웠던 남편이 얼마나 고맙고 친정 아버지를 미워했던 마음이 불쌍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뀌었습니다.
기도할 줄 모르던 제게 순간마다 기도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게 해 주시고 성경의 내용도 모르고 예수님이라는 분도 얘기할 줄도 몰랐던 제게
오직 말씀과 예수님 이야기만 하고 싶어졌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늘나라를 가는 원칙은 딱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한 말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내가 뭐 하지 아니하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다.
여러분 그건 똑같은 말입니다.
제가 어제 이야기했죠 거듭난다는 말이 뭐냐 다시 태어난다는 말이 뭐냐 종로의 계단에 보면 새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새
욕망과 새 동기와 세 사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스스로는 세 사람 될 수 없어요.
여러분 세 사람 되는 거는요 다시 태어나는 거는 처음 태어나는 걸 보면 알아요.
여러분 남자 혼자 여자 혼자 애 낳을 수 있어요 여러분 생명은 혼자 못 낳습니다.
생명은 반드시 남녀가 만나야 돼요.
여러분 영적인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속에 새 마음이 탄생되는 건 내 혼자서는 못 나와요.
그래서 불교에서 말한 건 틀렸어요. 여러분 불교에서 불교 이야기까지 하면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이야기 좀 할게요. 여러분 불교의 원리가 뭐냐 하면 사성제 8정도라는 거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사성제가 뭐냐 하면 고성제 멸성제 집성재 고성제 집성재 멸성제 도성제 이렇게 고지 멸도라 그래.
고가 뭐냐 고성제가 뭐냐 하면 이 네 가지 진리인데 인생은 고통이 대 이유가 뭐냐 집성재 집착이다.
욕심 때문에 고통이 생긴다. 그걸 멸해야 된다.
이 멸성제 불교가 추구하는 건 멸성제예요.
해탈 니르반 열반 그럼 이거 어떻게 해야 되느냐 도성제
도를 닦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8가지 도를 닦습니다.
정념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동 이런 것들.
그래서 여러분 정통 불교는 도 닦는 것입니다.
하거 동안거 그래서 일체유심조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어디에 달렸다? 마음먹기에 달렸다.
외교는 불교예요. 여러분 불교는 굉장히 매력적인 종교입니다.
왜? 내 속에서 끊임없이 드는 욕심을 버리는 거거든요.
근데 여러분 그게 굉장히 멋있는 이론이지만 안 돼요.
내 속에서 욕심이 나오기 때문에. 그래서 성경이 새 마음을 갖는 그 비결은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서 다시 태어난다고 해야 된다고 말하면서 뭐라고 이야기하는가 하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처럼 인자도 뭐 하게 하려니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이렇게 나와요.
여러분 모세가 여러분 그거 다 아시니까 민수기 21장 사건을 아시니까 모세가 광야에 뱀을 들었을 때 저 놋뱀을 쳐다보며 산다라고 말했을 때 사람들이 믿었을까요? 여러분 생각해 봐요.
독에 물렸어. 지금 독뱀에게 지금 물렸는데 내가 지금 몸에 독이 퍼져서 죽어가고 있는데 노뱀을 매달아서 쳐다보면 산대.
여러분 독에 물려서 죽어갈 것 같으면 어떻게 처방을 해줘야 돼요? 해독제를 주든지 주사를 맞게 해주든지 약을 주든지 그렇게 해야 되잖아요.
근데 놋뱀을 만들어놓고 쳐다보면 산대요.
과학적으로 맞아요 의학적으로 맞아요
아니요
안 맞아요 여러분 근데 그거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시험한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은 독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을 해독제 주지 않고도 고칠 수 있습니까? 있어요.
그 놋뱀을 만들어서 쳐다보며 살겠다는 그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한테는 하나님이 고친 거예요.
해독제 없이.
그래서 그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쳐다보면 영원한 생명을 얻겠다.
즉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말은 하늘나라로 들어간다는 말 아니에요 이게 거듭난다는 거거든요.
그래서 믿는다는 것은 쳐다보는 거하고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저를 거의 대부분이 처음 보셨어요 오지호라는 사람을 믿을 수 있겠어요? 솔직히 대답해 보세요.
못 믿어도 괜찮아요. 저는 하나도 안 섭섭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저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거든요.
근데 제가 여러분하고 한 3개월 1년을 같이 살았는데 만약에 저를 못 믿는다면 저는 좀 섭섭할 거예요.
저를 모르기 때문에 못 믿는 건 당연해요.
그래서 여러분 예수님은 그냥 믿을 수가 없어요.
예수님을 알아야 믿지 그래서 알려면 뭐 해야 되냐면 쳐다봐야 되거든요.
자꾸 쳐다봐야 돼.
여러분 굉장히 멋있는 남자와 굉장히 아름다운 아가씨가 계속 쳐다보면 어떻게 돼요? 뭔가 없는 게 생겨나요? 그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나요? 여러분 그거는 쳐다보기 때문에 생겨나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 새 마음도 그런 거예요 새 마음도 예수님을 자꾸 뭐 하라는 거지? 쳐다보라는 거지.
쳐다보니까 죽어가는 거야. 쳐다보니까 뺨 맞고 있어.
자꾸 쳐다봐. 왜 뺨 맞지 왜 죽어가지? 그러면 세상에 제일 슬픈 이야기는 사람이 죽는 이야기예요.
사람이 죽어가는 이야기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 저 사람이 왜 죽었지? 저게 자기들 때문이야 남색이 무슨 저 죽음이 나하고 상관이 있어 여러분 자꾸 그 대상을 쳐다봐요.
자꾸 쳐다보면 내 속에서 기쁨이 되고
감동이 되고 여러분 제가 어제 말씀드렸잖아요.
제가 그 워싱턴 dc에 한국전쟁 기념관에 가서 그 사람들 한국전쟁에 와가지고 참석해서 죽었던 사람들 이름이 쫙 적혀 있어요.
그거 자꾸 쳐다보고 있으면 괜히 미안하고 괜히 감사하고 그 사람들 앞에 머리가 숙여져요.
당신들이 흘린 피 때문에 내가 지금 여기 와서 공부할 수 있고 내가 여기 자유를 누리고 있다.
자꾸 쳐다보고 자꾸 생각하면 감사가 나오지.
그러면 그것처럼 그거하고 비교할 수 없는 우리의 죄를 구원하기 위해서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그분이 그렇게 희생하셨다는 사실을 자꾸 쳐다보면 내 속에서 없던 마음이 생겨나요.
감사하는 마음 고마운 마음 용서하는 여러분 그게 새 마음이에요.
그래서 불교가 새 마음을 갖도록 하는 방법은 도를 닦으라는 것이고 바른 생각 바른 행동 바른 말을 하는 것이고 성경에서 말하는 새 마음은 그분을 자꾸 쳐다보라는 거예요.
쳐다보라는 거예요. 여러분 그거 외에는 답이 없습니다.
자꾸 쳐다보라는 거예요. 여러분 그게 거듭나는 방법이에요.
쉬워요 어려워요? 쉬운 것 같기도 하고 어려운 것 같기도 하고 여러분 회사에서 사람들이 하루 종일 일해가지고 왔어요.
피곤한데 밤에 자야 되는데
오늘 이 고객하고 밤중에 아주 중요한 상담이 있으니까 밤새도록 고객하고 전화로 상담을 하라 그러면 하고 싶겠습니까? 근데 연애하는 사람 정말 이 사랑의 마음이 뜨거워진 사람한테 아내 저기 여자친구하고 밤새도록 통화해라 그러면 안 하라.
그래도 해요. 여러분 그렇게 피곤한데 잠 안 자고도 전화 붙들고 밤새도록 통화하는 그 열정과 그 마음이 어디서 나오는 거예요?
사랑하니까 나오는 거 그게 여러분 사랑하면 사람이 이상해져요.
나오잖아요. 여러분 예수님을 사랑해도 그런 마음이 나올까요? 안 나오는 게 이상한 거다는 거죠 여러분 그 힘으로 우리는 용서하는 거지요.
여러분 이게 제가 단순하게 말씀드리지만 이게 성경 전체에서 말씀드리는
우리가 구원을 얻고 하나님 나라를 들어가는 유일한 방법이 이거 외에는 없어요.
예수님을 뭐 하는 거 어떻게 하는 거 쳐다보는 거 자꾸 쳐다보시.
자꾸 쳐다보면 그분이 누군지를 알게 돼요.
또 쳐다보면 믿을 수 있는지 없는지가 나와요.
그 방법밖에 없습니다.
자
한 가지 질문을 드리죠. 마태복음 18장 35절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제가 ox 퀴즈를 낼 테니까 답을 하셔요.
ox 우리가 마음으로 잘못한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 아버지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는다.
어?
x ox니까 겉으로 하겠습니다. 오 손 드셔야 우리가 우리 마음으로 다른 형제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 죄를 용서하지 않는다.
저 다시 손 들어보십시오. 크게 드시고 제가 안 보여요
오케이
손 내리시고 x 손 드셔요. 고맙습니다.
내리시고 손 안 든 분들은 뭐예요? 잘 모르겠습니까? 이 성경 구절 마태복음 18장 35절에 의하면 o예요 x예요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o예요 x예요. 이 구절에 의하면 o예요.
맞죠? 이 구절에 의하면 o예요. 이게 o라면 제가 질문하겠습니까? 질문을 또 하나 드릴게요.
만약 우리가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그래서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수준이 어때요? 우리랑 달라요 우리랑 똑같아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 안 했어요 니 저 사람 용서 안 하냐 나도 너 용서 안 한다.
그럼 하나님 수준하고 우리하고 어때요? 도찐개찐이지 하나님 그래 우리가 믿는 하나님 그런 거 아닌 것 같잖아요 그럼 이게 무슨 의미인가 하는 거예요.
실물 교훈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는 자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것을 드러낸대.
우리는 남을 용서했기 때문에 용서받는 게 아니라 남을 용서한 것처럼 용서받는다.
빨간 글자 같이 읽습니다. 시작.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태도로서 우리가 과연 그 사랑을 내 것으로 삼았는지의 여부를 증거하게 된다.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태도로서 즉 용서를 하느냐 용서를 못하느냐에 대한 태도로서
우리가 과연 그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용서를 내 것으로 삼았는지의 여부를 증거하게 된다.
결과물로 드러내는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를 못하고 있어요 지금
네
못하는 사람 있잖아요. 못하고 있으면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용서를 내 것으로 삼았어요 못 삼았어요? 못 삼은 거지 못 삼은 걸 드러내는 것뿐인데 그거는 그러면 내가 저 사람을 용서 안 하기 때문에 용서 안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하나님이 용서하셨는데도 그걸 내 것으로 못 삼으니까 뭐예? 용서를 못하는 거죠.
하나님하고 우리하고 수준이 똑같지 않아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주지 않아도 하나님은 이미 용서하셨어요.
근데 그것을 내 것으로 못 삼았기 때문에 그 감격이 없기 때문에 용서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람 용서 못 해줄 때는 이미 이루어진 용서를 내 것으로 못 삼았기 때문에 못 누리기 때문에 용서 못 받은 거하고 똑같다 이 말이에요.
제 말 이해되나요? 그러면 이 마태복음 18장 35절이 이해되나요? 그럼 o예요 x예요.
그죠? 우리 하나님 오해하고 있다는 거예요.
내가 저 사람 용서해 주는 조건으로 나 용서해 주시는 분 아니에요 내 용서에 상관없이 그분은 용서하셨어요.
근데 내가 그 용서를 감격적으로 누리지 못하기 때문에 내 것으로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용서할 힘이 없는 거예요.
그것은 이미 용서한 용서가 나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거죠.
그러니까 용서 못 받은 거하고 똑같은 거죠.
당신의 싸움은 사람과의 싸움이 아닙니다.
당신의 싸움은 그 사람 너머에 있는 사탄과의 싸움입니다.
여러분 혹시 그 사람 악하게 말하고 함부로 행동하고 그 사람이 자기의 본성도 스스로를 해결하지 못하고 더 강력한 존재에 의해 사로잡혀 있는 불쌍한 존재라는 것이 느껴지십니까?
여러분 그 사람도 자기 마음을 자기가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우린 다 예수님의 은혜와 권능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우리는 다 사탄의 포로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이길 수 없는 거죠.
그 영혼도 자기도 못 이겨요. 우리가 섭섭한
마음이 있을 때 제가 꼭 비교해야 될 말씀을 꼭 기억해 주십시오.
그대가 마땅히 받을 만큼 평가를 받지 못하고 그대의 노력이 인정받지 못하고 여러분 뭔가 열심히 일했는데 열심히 내가 뭔가 했는데 남들이 안 알아주고 못 알아주고 그럼 어때요? 좀 섭섭해요 인간적으로 그래요 저도 그래요.
여러분 그때 어떻게 하시겠어요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알아 싸우지 마세요.
그들의 사업이 너무 어렵다는 등의 생각을 결코 갖지 말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참으신 것을 생각하고 불평하는 생각을 일체 버려라.
빨간 글자 읽습니다. 시작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받으신 것보다 더욱 좋은 대접을 받고 있다.
아까 제가 거듭나는 방법이 뭐 하는 거라 그랬어요? 쳐다보는 거예요 쳐다보는 거 그분 자꾸 쳐다보는 거야.
그분 자꾸 쳐다보니까 굉장히 무시와 멸시를 받고 있네.
뺨도 맞고 있고 침도 뱉음을 받고 있네.
여러분 솔직히 말해 봐요. 여러분 남들한테 무시받은 거 있었지만 침 뱉음을 받은 적 있어요 없어요 저도 남들한테 무시받았지만 제 얼굴에 침 뱉고 무시한 사람은 없었어요.
근데 예수님 쳐다보니까 뭐까지 하고 있네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가 어떤 이 땅에서 대접을 받아도 예수님보다는 대접을 잘 받고 있다는 거예요.
맞아요
여러분 우리보다 굉장히 인격적이고 우리보다 굉장히 신분이 높고 그 사람이 굉장히 학대받고 못 받는 걸 우리가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 어떤 느낌이 들까요? 저 사람도 저런 대접을 받는데 나라고 내가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지? 저 사람도 저런 대접을 받고 있는데 그러면 그 사람이 그런 대접을 못 받고 있는 걸 자꾸 생각하면 내가 못 받는 대접이 굉장히 그게 억울하지 않아요?
이게 예수님을 쳐다보는 거예요. 자꾸 쳐다보면 그분 때문에 나한테 자꾸 없던 생각이 생겨나요 여러분 이게 새 마음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쳐다보면 자꾸 쳐다보면 이게 생기고요 안 쳐다보면 안 생깁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구원을 어떻게 받아요? 은혜로 받아요 쳐다보고 받아요 에베소서 공부하잖아요.
자랑할 게 없다.
여러분 왜 구원이 은혜인 줄 아셔요? 제가 한 경험을 이야기해 드릴게요.
제가 대학생 때 부산에서 제가 부산대학교를 다녔는데 동과 서를 가로지르는 고가도로를 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방학 때 종종 아파트 공사장이나 이런 데서 일을 했습니다.
저기 한번 가봐야 되겠다. 가서 이제 작업반장한테 지시를 받고 우리 올라가라는 거예요.
밑에 도로가 있고 위에 도로를 다시 만드는 거예요.
고가 도로를 만든 거니까. 근데 이 아이 빔 아자로 된 철근 큰 것들을 이렇게 쫙 연결해가지고 그 사이를 트로스 구조물을 쌓아가지고 위에 아스팔트를 치는 거예요.
이제 그 트로스 구조물을 쌓아 올라가는 건데 딱 올라가니까 한 3m에서 한 5m 정도가 돼요.
높이에 따라서. 근데 한 아이빔이 한 1m 50 정도가 떨어져 있는데 그 밑에 아무런 그물이 없어요.
ib만 한 30cm 정도 돼요. 제가 딱 올랐으니까 다리가 후르두르 떨려 밑에 차가 쌩쌩 지나다니니까 거기를 지나다니면서 큰 이 철근 같은 걸 저기 기술자들한테 갖다 주라는 거예요.
이 사람들 이게 떨어지면 어떻게 되나 한 10시쯤 되면 잠을 먹는데 잠 먹을 때는 또 막걸리를 마셔요.
알딸딸한 상태에서 일을 해요. 제가 하루 가고 다시 안 갔습니다.
돈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떨어져서 죽으면 끝나니까.
여러분 그렇게 하고 나서 1년 동안 그 고가다리 공사가 끝났어요.
고가다리 다 만들어지고 그 고가다리를 딱 바라보고 있으니깐요.
여러분 제 속에서 희한한 생각이 생각이 나요.
뿌듯해요. 저 고가다리 제가 지은 것 같았어요.
굉장히 뿌듯한 마음이 드는 거예요. 며칠 일하고 그것도 달이 벌벌 떨면서 일도 제대로 못해.
여러분 제가 그때 깨달은 게 있어요.
구원이 왜 하나님의 100% 은혜여야 하는지.
여러분 인간의 공로가 조금이라도 들어가면요
절대로 감사 안 해. 그거 부풀리 생각합니다.
그러면 제가 하루 일했으면 얼마나 했겠어요 그 1년 넘어 무수한 공정 속에서 제가 뭔 일을 했겠어요 근데 그 다리 고가도로 다 지어놓고 나니까 저 고가도로 제가 지은 것 같아요.
여러분 그게 인간이에요 자기가 한 게 아주 조그마한 건데도 내 공로가 뭐라도 조금만 들어가 있으면 굉장히 부풀리는 게 그게 인간이에요.
만약에 인간의 구원이
인간의 공로가 예수님이 공로가 99.99%고 인간의 영적 조금만 들어갔다.
그래도요 감사 안 해요. 예수님 저 구원받을 짓 좀 했지요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내가 구원받은 것 같아요.
여러분 그래서 구원은 100% 은혜여야 합니다.
우리 한 게 없어. 그분이 한 거를 자꾸 쳐다보면 그분의 모습을 자꾸 쳐다보면 내 속에서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이 생겨나요
여러분 그게 새 마음이에요. 그게 거듭나는 그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불교가 굉장히 매력적이지만 불교가 가르치는 바는 인간의 본성을 몰라서 그래요 안 됩니다.
그래서요 여러분 우리가 오늘 다른 사람과의 안 좋은 관계들 많습니다.
근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거 일단 접어두시오.
그거 해결하려고 하지 마셔요.
뭐 해결하려고 하셔요? 예수님하고 나하고의 관계를 해결하시려고 조용히 그냥 골방으로 가셔요.
예수님 저한테 이루신 공로 저한테 베푸신 용서가 제가 잘 안 믿겨집니다.
그게 정말 믿겨지면 감격이 생기고 그렇게 용서가 된다는데
저는 자꾸 저 사람이 용서가 안 되는 걸 보니까 이건 분명히 제가 예수님이 하신 용서가 안 믿겨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용서가 제 속에서 감격이 되고 감동이 되고 믿겨져서 이 사람을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항상 사랑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 도와주십시오.
여러분 그렇게 그분하고 씨름해야 돼.
그 씨름을 하지 않는 사람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다 자기 노력으로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관계를 기초로 한 상태에서 이제 가족 관계의 관계를 한번 보겠습니다.
제가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빨리빨리 넘어가겠습니다.
여기 계신 남편들 남자분들 다 읽겠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10절 시작.
여러분 지금 여기 이 머그 컵이 있는데 이게 제가 떨어뜨리면 어떻게 돼? 깨지죠 이거 떨어뜨리면 안 되죠 근데 이게 만약에 녹그릇이나 스테레스면 어떻게 해요? 떨어뜨려도 괜찮아요.
그죠? 그래서 이 깨지기 쉬운 그릇이니까 함부로 대하지 않고 잘 다루어야 되죠 그게 귀하게 여기는 거예요.
남편들에게 질문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7절은 아내들을 더 연약한 그릇으로 알아라고 그럽니다.
그럼 남편들은 무슨 그릇일까요? 남편들 자신들은 무슨 그릇일까요? 이건 신학적인 질문이 아니고 국어 문제예요.
아내들은 더 연약한 그릇이다 그랬습니다.
그럼 남편들은 무슨 그릇이에요? 연약한 그릇 맞아요.
굉장히 어려운 질문 아닙니다. 아내들은 더 연약한 그릇이요 그랬으니까 남편은 무슨 그릇이에요? 연약한 그릇이에요.
그럼 여러분 성경적인 부부의 정의가 뭐냐 하면 연약한 그릇인 남편과 더 연약한 그릇인 아내가 사는 게 부부예요.
맞아요 여기가 아내분을 기억하셔. 여러분 남편이 강합니까? 여러분 남자는 강하지 않아요.
남자는 연약해요. 근데 여자는요 더 연약해요.
여러분 엄마는 강합니다. 엄마는 자녀를 보호해야 되고 키워야 되기 때문에 엄마는 강하지만 여자는 강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남자들은 자기도 연약하지만 내 아내는 더 연약하다는 것을 알고
이게
연약한 그릇이기 때문에 이거 떨어뜨리거나 함부로 대하면 안 되는 것처럼 내 아내는 나보다 더 연약하다.
정서적으로 마음도 신체도 여러분 올림픽 경기하면 남자하고 여자하고 똑같이 경기하면 안 되잖아요.
남자는 여자보다 훨씬 더 체력적으로 뛰어나요.
여자는 훨씬 약해요. 그러니까 여자는 더 어떻게 해야 된다? 여기 나와 있잖아요 어떻게 해야 된다 그지?
여기 남자들 잘 기억하셔요. 여자 이야기도 나옵니다.
그때도 생각하시 여러분 여자는요 남자보다 신체도 약하고 정서도 약해요.
그래서 여자들은 눈물이 많잖아요. 감수성도 있고.
여러분 근데 그러니까 여자는요 나이가 들어서 할머니가 되어도 여성성이 살아있어야 돼요.
여성은 애교도 있고 따뜻하고 부드럽고 친절하고 여러분 남자들은 그걸 먹고 살아야 돼요.
그래서 결혼한 아내로부터 그걸 먹고 살아야 남편은 행복해요.
근데 그 여자의 부드럽고 따뜻하고 친절하고 애교 있게 하는 그 여성성을 말살시키는 주범이 누구예요? 남자예요.
남자가 귀하게 여기면 아내를 귀하게 여기고 따뜻하게 말하고 친절하게 대하면 여성은 애교나 여성성이 살아 있어요.
근데 거기를 묵사발을 내버리면 그게 사라지죠.
그러면 그걸 고스란히 누가 받아요? 남자 자기가 받아요.
그러니까 그게 그리우니까 바깥에 가서 오빠 하고 이렇게 하는 사람들한테 간다는 거지.
근데 결혼한 아내로부터 받도록 한 것이 하나님의 법도예요.
그래서 그것이 아내로부터 그런 애교나 친절함이나 부드러움이나 따뜻함이 나오도록 하려면 남자가 어떻게 해야 돼? 아내를 귀하게 여겨야 잘해야 되죠 할 때 이거 잘해야 된다는 표현도 이렇게 쓰죠 잘해야 돼요.
요 잘하다는 그 표현을 굉장히 악센트를 주면 굉장히 한이 맺힌 거예요.
잘해야 돼 이렇게 표현하셔. 어쨌든 간에 아내의 여성성이 살아있도록 하는 것은 누구의 몫이다? 남편의 몫입니다.
여기 계신 우리 남편분들께서 지금까지 아내들을 귀하게 못 여기셨다면 이번 사슴의 동산에 캠프 야영 장막해 온 이후로부터는 바뀌셔야 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에베소서 5장에 보면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를 부부로 비유하잖아요.
여러분 그러면 남편이신 예수님이 연약한 교회를 귀하게 여기실까요? 여러분 봐봐요.
예수님은 연약한 교회를 귀하게 여깁니다.
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알아요
여러분 제가 97년도에 결혼했는데요.
결혼하고 제주도 신혼여행을 가려고 막 바빠서 정신없이 챙기고 나오는데 저희 어머니가 편지 한 통을 쑥 내밀어요.
가면서 읽어봐라. 저희 어머니는 15에 혼자가 되셨고 저희 삼남매를 그렇게 키우셨습니다.
제가 30살에 장가를 갔는데 저희 어머니가 편지를 주시길래 공항에 가서 이제 제주도 가는 비행기 안에서 그 편지를 열었습니다.
한 호주머니 넣고 가서 자기 어머니가 쭉 쓰셨어요.
둘째 아들이 장가를 간다니 이 애미가 너무 행복하다.
쭉 쓰셔서 제일 마지막에 뭐를 쓰셨는가 하면 너의 살아가는 동안 내가 사랑해서 만난 내 아내와 살아가는 동안 평생에 이 꼭 한 가지는 지켜주면 좋겠다.
내가 사랑해서 만난 내 아내와 살아가는 동안에 내 아내를 여왕처럼 모시고 살거라.
그러면 내 아내는 너를 왕으로 모실 것이다.
그 문장에 마지막에 적혀 있어요.
그 편지를 제 아내도 봤어요. 같이 봤다니까.
여러분 제가 제 아내를 어떻게 대했을까요? 여왕처럼 대했을 것 같아요 지금은 그렇게 대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회개했거든요. 근데 이전에는 그럴 때도 있었고 아닐 때도 있었습니다.
여종처럼 취급할 때도 솔직히 말하면 있었습니다.
부끄럽지만
그땐 저도 행복하지도 않았고 제 아내도 행복 안 했습니다.
근데 제가 정말 그것이 잘못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계속 이야기 드리면 시간 많이 갑니다.
여기 재림신도의 가정 215쪽에 그리스도께서는 권위를 남자분들 읽겠습니다.
시작 그리스도께서는 권위를 지혜와 모든 친절과 온화함으로 행사하셨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의 능력을 행사하되 교회에 큰 머리 되신 분을 모방하도록 하라.
여러분 남편의 권위가 있어요 있잖아요.
가장의 권위 남편의 권위가 있는데 여러분 예수님 권위 있었습니까? 있었잖아요.
예수님 권위를 어떻게 썼다고요? 파워포인트 띄워주십시오.
지혜와 모든 친절과 온화함으로 행사하셨던 이게 여러분 이게 리더예요.
리더는 자기가 힘이 있거든요. 그 리더는 자기 힘을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아니에요.
그렇게 못하셨으면 어떻게 할 건가? 남편들이 있습니다.
시작 존경이 사라지고 나면 사랑은 더 이상 오래 가지 않는데 그대에게 탄원하노니 남편들 읽습니다.
시작 지금 돌아서서 겸손이 그대의 아내에게 잘못했다는 사실을 고백하라.
제 말이 아니고 증언의 말씀이에요.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예수님의 이 모본을 닮아서 아내가 더 연약한 그릇인데 내가 함부로 대했고 함부로 말했고 함부로 행동했다면 정말 잘못했구나.
그 사실을 알고 관계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 그 관계를 새롭게 하는 관계로 나가기 위해서 그 시작을 아내한테 내가 정말 잘못했다라고 고백하라.
그래서 혹시 여러분의 마음이 오늘 찔림을 받고 내가 아내를 귀하게 여기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거든 이 사슴의 동산을 가시기 전에 혹은 집에 가서라도 조용한 시간을 내어서 아내에게 잘못했다고 고백하십시오.
여러분 그게 진짜 남자의 용기입니다.
내가 정말 당신을 사랑하는데 그 사랑하는 만큼 내가 말과 행동을 잘못한 것 같다.
미안하다.
앞으로는 잘할게. 한마디 하셔요. 대답을 안 하시네.
자
아내들은 아내들은 안 할 때 또 방법이 있어요.
이거 남편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아내들에게 아내들을 막 기쁘고 좋아하셨는데 예수님은 공평하신 분이기 때문에 다 나와 있어요.
아내들 있습니다. 시작 아내들어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여기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남편이라도 예수님 안 믿는 남편이라도 이 말이지 아내의 말로 말미암지 않고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여기 짝 신앙하는 분들 계시죠
얼마나 소원이 남편하고 같이 교회에 나와서 가족이 함께 나와서 예배드리는 거 신앙하는 거 여러분의 기도 제목이잖아요.
근데 남편의 구원이 안 믿는 남편의 구원이 어디에 달렸다고요? 믿는 아내의 말과 행동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이거 예수님 책임 아니에요 여러분 아내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그랬습니다.
그럼 이와 같이라는 말이 뭔 말이에요?
앞에
예가 있다는 거예요. 그렇죠? 앞에 예가 있다는 거 이게 베드로전서 3장이기 때문에 앞에 베드로전서 2장에 나와 있어요.
베드로전서 2장 23절에서 25절 이렇게 말합니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신이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의 마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대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아내들에게 이와 같이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하면서 그 앞의 말이 뭐예요? 욕당할 때 뭐예요? 맞대어 욕하지 않고 고난을 당할 때 위협하지 않고 억울한 일이 있을 때 하나님 제가 하나님께 이 억울한 일을 맡깁니다.
이렇게 한 예수님의 모습을 설명한 다음에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거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남편들이 아내를 귀하게 여기는 거 연약한 더 연약한 그릇으로 알아서 귀하게 여기는 게 쉬울까요?
예수님처럼 억울한 일 당하고 욕을 당하고 무시 멸시받을 때 억울한 일을 다 하나님 앞에 맡기면서 남편을 순종하는 일이 쉬울까요? 둘 다 어려워요.
여기 쉬운 거 하나도 없어요. 제정신으로는 못해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거듭난 마음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못합니다.
아내들은 남편이 제대로 못한다고 하기 때문에 무시하고 살았던 적이 있어요.
여러분 그거 회개하셔야 돼요. 남편이 잘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분이 아내로서 예수님을 믿는 아내로서 남편을 이렇게 대하셨는지를 돌아보셔야 돼.
이야기를 좀 드리죠. 목사님 그냥 오늘 토의 시간 없이 그냥 제가 설교를 이어가겠습니다.
아직 많이 남아서
유방암 진단을 받은 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장로교회에 약 10년을 출석했습니다.
이름만 신자였습니다. 형식적인 신앙을 하면서 늘 남편이 미웠습니다.
남편은 술하고 친구가 우선이었습니다.
자주 이혼을 생각했습니다. 그다음 몸이 아팠습니다.
병원에 갔는데 유방암이라고 판단을 내렸습니다.
화가 났습니다. 누가 누구 때문에 병이 난 것 같아요 남편 때문에
그렇게 항암 치료를 받던 중에 재림교회와 연결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성경을 가까이 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그전에는 그렇게 성경을 읽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성경을 읽고 깊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병이 생긴 게 남편 때문이 아니고 자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남편을 미워해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남편이 잘못했기 때문
남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해가 안 되었기 때문에 근데 그게 미워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했던 게 그게 죄라는 사실이 깨달아졌습니다.
이게 성령이 그렇게 하신 거예요. 어느 남편이 퇴근을 합니다.
남편 보고 이야기 좀 하자 그럽니다.
그래서 남편 앞에 고백을 하기 시작합니다.
여보 나 당신 참 미워했습니다. 당신이 이렇게 이렇게 가족들을 돌보지 않고 친구들 만나고 이렇게 다닐 때
정말 화가 났었습니다. 그래서 당신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근데 내가 성경을 보니까 그게 죄라는 사실이 깨달아졌습니다.
여보 내가 미워해서 미안했고 이해하지 못해서 미안했고 사랑하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진심을 다해서 고백을 했습니다. 남편이 듣고 있다가 갑자기 얼떨떨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회사 퇴근하고 와가지고 여러분 자기가 잘못했다고 고백을 하는데 당신 잘못했지 그렇게 할 사람 없어요.
남편은 자기 자신을 돌아봅니다. 자기도 잘한 게 없어요.
여보 아니야 내가 잘못했어 그래서 그날 부부는 완전히 화해를 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계속 성경을 보기 시작합니다.
그랬더니 아까 베드로전서 3장 1절이 나온 거예요.
아내들아 이와 같이 남편들에게 순종하라 믿지 않는 자라도 아내의 말과 행동으로 인해서 그 구절을 보면서 남편에게 순종해야 되겠네.
그래서 그 믿지 않는 남편을 향하여 정말 따뜻한 마음으로 순종하고 존경하고 그렇게 대합니다.
여러분 그랬더니 제가 이분의 간증을 듣는데요.
그랬더니 이 여인에게 놀라운 일이 생겼다고 그랬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남편이 그렇게 사랑스러워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단 한 번도 그렇게 안 보였다는 것입니다.
신혼 초에도 근데 그 남편이 너무 사랑스럽더라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생겨난 거죠. 그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죠.
그러면서 불순종하고 제대로 살지 못하는 남편을 이렇게 볼 수 있는 마음을 그분이 주셨다면 내가 남편을 미워하고 그렇게 제대로 살지 못할 때 예수님이 나를 어떻게 보셨을까 예수님이 나를 이렇게 불쌍히 여기고 이런 긍휼의 눈으로 자기를 보지 않았을까 이 마음이 생각이 난 거예요.
그러면서 완전히 마음이 치유가 됩니다.
그러면서 그녀가 이렇게 고백해요. 마지막 간증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게 이렇게 행복하구나.
이게 그 여인의 고백이었습니다. 완전히 회복이 됐어요.
함께 읽겠습니다. 어제 제가 읽어본 말씀이죠 시대의 소망 296페이지 시작 그리스도는 위대한 중심이심으로 그들이 그 중심에 접근하는 데에 비례하여 서로 가까워질 것이었다.
여러분 성경에 일어나는 화해는요 두 사람이든지 한 사람이든지 하나님하고 친밀한 가까운 관계가 되었을 때 회복이 됩니다.
여러 봐봐 야곱하고 에서하고 어떻게 화해가 돼요? 야곱이 약복강에서 그렇게 씨름할 때 하나님의 천사는 에스를 방문합니다.
여러분 요셉하고 형제들이 어떻게 화해해요?
요셉이 그 마음에 하나님 만난 감격이 있고 자신의 인생을 붙들고 계신다는 그것을 확신했을 때 형들을 용서하죠.
그러니까 성경의 화해는 쌍방이 다 하나님을 만나든지 적어도 한쪽이 하나님을 만난 상태에서 진정한 화해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두 사람이 다 하나님께 가까워지면 화해는 굉장히 쉽습니다.
근데 그렇지 않고 한쪽만이라도 하나님과 가까워지면 화해는 일어날 가능성이 굉장히 높아요.
이 여인처럼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가 위대한 중심이기 때문에 그 그리스도를 향하여 한 발짝 다가가는 순간 가까워지기 시작합니다.
아내들 오늘 지금 여러분들과 사시면서 남편들에게 어떻게 대하셨는지를 한번 돌아보셔요.
베드로전서 3장 1절에 있는 말씀대로 순종하셨습니까? 거의 잘 안 하셨죠
남편들에게는 아내들은 더 연약한 그릇으로 알고 어떻게 여기라 귀하게 여겨라.
아내들은 혹 도를 순종하지 않는 남편들이라도 뭐 하라 주 안에서 순종하라.
물론 하나님의 법도를 무시하고 인간의 말에 순종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의를 다하여서 여러분 이거 제정신으로는 안 됩니다.
이 기초에는 뭐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보는 그 마음이 기초가 돼야 됩니다.
안 될 때 또 쳐다보고 안 될 때 또 쳐다보고 내가 어떤 은혜 속에 살고 있고 어떤 용서와 그분의 사랑 속에 살고 있는지 또 쳐다보고 또 쳐다보고 이 쳐다보는 데 비례해서 내 마음속에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날 겁니다.
우리 남자들도 아내들을 귀하게 대하는 거 쉽지 않습니다.
잘할 때는 귀하게 여기겠죠 못할 때는 안 되죠.
부모들에게 제가 잔소리까지만 하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부모님들 다 읽겠습니다.
골로새서 3장 21절 시작.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여기 한 말씀 더 읽겠습니다. 의정원 이군 그대는 가혹하고 지나치며 전제적이다.
그대가 초조해하고 꾸짖고 깎아내리고 함으로 그들은 그들에게 애정을 주지 않는다.
그대는 그들에게 정당한 권리가 없는 듯
그대의 기분에 의해 손으로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기계라도 되는 듯이 그들을 대하였다.
그대는 그들을 노엽게 하였고 그들을 좌절시켰다고.
옆에 부모한테 하는 이야기예요. 여러분 일단 부모는 권위가 있습니다.
자식은 어리죠 그러니까 그 자식을 대할 때
부모가 원하는 대로 자식이 꼴지어지지 않고 말을 안 듣는다고 우리는 함부로 대할 때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면서 자녀를 노였게 하는 거죠. 여기 보면 뭐라고 비유하는가 하면 기분에 의해서 손으로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기계를 다루듯이 컴퓨터를 다루고 휴대폰 다루고 아무런 인격도 없는 내 마음대로 다루는 기계를 다루듯이 자녀도 그렇게 다뤘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녀들은 노하고 표현은 다 못하죠.
그러면서 좌절하고 여러분 한 엄마가
남편 일찍 죽고 아들이 공부를 좀 똘똘하게 잘해서 의대를 보내려고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건 아들이 기대에 따라주지 못했습니다.
재수를 했고 참수를 했습니다. 그 지방의대를 들어갔습니다.
고등학교 3년 재수 1년 3수 2년차 때 그 3년 동안 어머니는 매일 아침 새벽에 일어나서 1천 배를 했습니다.
3년 동안
천날이 넘는 동안 매일 아침 새벽에 몇 시간 동안 천배를 했습니다.
그걸 하루도 그러지 않고 3년을 했어요.
그 엄마의 지극 정성이 얼마나 대단하니까 아들이 지방의대를 졸업하고 한 지방에 있는 대학병원에서 인턴을 하기 위해서 엄마에게 인사를 하고 갔습니다.
근데 그 병원에서 연락이 왔어요. 며칠 후에 아들이 오지 않았습니다.
혹시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엄마는 미칩니다.
3개월 동안 아들로부터 소식이 없었습니다.
3개월 뒤에 발신자의
그
발신자가 없는 그러니까 문자 한 통이 들어옵니다.
아들이었습니다. 내용은 이랬습니다. 이제 어머니가 원하는 대로 지금까지 살았으니 이제부터는 제가 원하는 삶을 살 것입니다.
지금부터 저를 찾지 마십시오. 아들이 그렇게 문자가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힘이 없을 때 그렇게 엄마에 의해서 낙달을 당해서 지금까지는 살아왔지만
이제는 엄마 인생 아닌 내 인생 살겠습니다.
그리고 나를 다시는 찾지 말아달라는 것이 그 아들의 문자 메시지 마지막 문자 메시지였습니다.
엄마는 미칩니다. 근데 그게 자업자득이었어요.
마치 내가 조종해서 내가 내 마음대로 꼴집어질 수 있다고 착각한 거지.
그러면 자녀는 부모 마음대로 꼴지어지는 대상이 아니에요.
자녀는 하나님의 선물이지. 그래서 내 마음대로 키우는 게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이 내 자녀에게 주신 달란트 재능, 열정 무엇을 통해서 이 아이가 어떻게 살 때 가장 행복한지를 부모는 알고서 가이드 해주는 거지.
그래서 오늘 부모님들 중에서 내 자녀를 함부로 대하고 노엽게 하고 가혹하게 대했던 그게 깨달아지면 사과하셔야 됩니다.
저는 제 아들들한테 두 번 사과했습니다.
제가 어떤 때 보면 말을 친절하게 할 때도 있었지만 화가 나고 애들이 뭐가 되지 않을 때 하고 나서 곰곰히 생각해보고 이 말씀을 보니까 제가 정말 잘못했어요.
그래서 제가 아들 둘이를 불러 앉혀놓고 두 번이나 진지하게 아빠가 잘못했대 너희들 이렇게 대하고 함부로 말한 거 목사고 그리스도인이지만 함부로 말한 거 내가 진심으로 사과한다.
용서해 주라.
저는 지금 아이들하고 관계가 굉장히 좋습니다.
정말 지금은 멀리 떨어져 있어서 가까이 볼 수도 없지만 정말 내가 같이 살 때 왜 좀 더 따뜻하고 친절하고 더 부드럽게 못 대했을까 그거 굉장히 미안해요.
지금도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자녀들에게 출애굽기 20장 12절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내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내 하나님 여호와가 내게 준 땅에서 내 생명이 길리라.
여기 교지문 1권에 있는 말씀입니다.
자녀들은 유아 시절부터 그들을 돌봐주고 병들었을 때 간호해진 부모들에게 은혜를 입고 있음을 느껴야 한다.
그들은 부모들이 그들 때문에 많은 걱정을 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여러분 부모들은 자녀들을 바깥에 내어놓고 들어오지 않으면 잠 못 잤잖아요.
여러분 그거 자식들이 알까요? 몰라요 언제 알까요? 지 자식이 안 들어올 때 알아요 우리 부모님이 나를 이렇게 기다렸겠구나 그러면서 이제 철 드는 거예요.
여기 모든 자녀들 다 읽겠습니다. 시작 자녀들이 그들의 부모를 공경하는 일에서 면제되는 인생의 기간이란 없다.
내가 부모님에게 대해서 이제 할 만큼 했으니까 이제 그만해도 된다.
그런 인생의 기간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 정문 읽고 있는 말 또 읽겠습니다.
시작 어떻게 부모를 행복하게 해줄 것인가 하는 것이 그들의 인생에서 주요한 연구 과제 중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런 말씀이 있어요. 우리 자녀들한테 연로하시고 살아계신 우리 부모님들의 노후가
어떻게 평안하고 행복하게 되실 줄 자녀들은 그거 연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인간관계 중에서 가장 기본되는 인간관계는 가족 관계입니다.
우리 가족 관계가 회복이 돼야 우리가 제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모든 남편들 뭘 단어를 기억하셔요. 아내는 어떤 그릇이다? 더 연약한 그릇이다.
그래서 어떻게 돼야 된다?
귀하게 여겨야 된다. 귀하게 여러분 이거 하나만 기억하시면 여러분 이 캠프 온거 다 건지는 겁니다.
아내들은 뭘 기억해야 된다? 남편들에게 뭐 해야 된다? 순종해야 된다.
어떻게 순종해야 된다 예수님이 욕을 받으시되 욕하지 않고 무시와 멸시받을 때 맞받아치지 않고 억울하고 힘든 일 다 하나님 앞에 맡기며
진심으로 대했던 그 모습을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남편 그렇게 대하라는 것입니다. 하실 수 있겠습니까? 못해요.
하실 수 있다고 대답하지 마셔요. 하실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물으면 대답을 이렇게 하셔요.
예수님 쳐다보겠습니다. 그게 정답이니까 그걸 쳐다봐야 그 힘이 나오니까 여기 부모님들 잘 기억하세요.
내가 자녀들에게 어떻게 대했는지
내가 부모라는 권위 때문에 힘이 있다고 지금 경제적으로 이 아이들이 나한테 의존되어 있기 때문에 내 말을 들어야 된다고 전제적이며 가혹하게 하면서 뚜껑 열리게 하지 않았는지 잘 돌아보시오.
그래서 어린 아이지만 진짜 내가 그렇게 했다라는 생각이 들면 어린 아이지만 찾아가서 불러 앉혀놓고 사과하십시오.
내가 엄마로서 아빠로서 잘못했다 미안하다 용서해 달라 하십시오.
여러분 그러면 회복이 돼요. 모든 관계의 회복은 내가 어떻게 잘못 살아왔는지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에서 회복이 돼요.
그거 안 하면 자존심 팍 세워가지고 그거 있으면 계속 나중에 후회할 일 생깁니다.
네 번째 모든 자녀들은 부모를 어떻게 대해야 돼 그분들이 노심초사 우리를 향하여 염려하고 우리의
행복과 우리가 잘 되는 것을 자기가 잘 되는 것보다 더 큰 마음으로 부모님들이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자녀를 길렀다는 거 기억하시고 오늘 내 부모님이 지금 살아계시다면 그 부모의 노후가 어떻게 행복하고 기쁨으로 이 땅의 인생을 마칠 수 있을까를 자녀들은 고민하고 염려하면서 그 부모를 그렇게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사님 몇 번까지 해야 됩니까? 원래 아침 식사 시간이 몇 시부터입니까? 조금만 더 하겠습니다.
제가 타인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 있어서 여러분 평소에 좋은 감정을 좀 저축하시면 좋겠습니다.
큰 글자한번 읽겠습니다. 시작
사람의 마음은 창고와 같습니다. 이걸 잘 기억해 주십시오.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사람은 쌍은 악에서 악을 내는데 여기 산상복음 172페이님 말씀 있겠습니다.
시작 어떤 사람의 생애가 위기가 닥쳐 그대가 조언이나 권면을 주고자 할 때 그대의 말은 선을 위한 가마를 끼치되
평소에 그대 자신의 모범과 정신이 그들을 위해 확보해 놓은 정도까지만 끼치게 될 것이다.
무슨 말이죠 여러분 누가 잘못해가지고 조언을 하고 싶어요 근데 조언이 조언을 한다고 해서 먹혀 들어가지 않아요.
평소에 나와 그 사람과의 관계가 어떠했는지에 따라서 그 조언이 먹히기도 하고 안 먹히기도 해요.
그래서 이걸 스티븐 코비가 뭐라고 표현했는가 하면 감정 은행 계좌라 그랬습니다.
여러분 은행에 돈을 넣어야 내가 막 지출할 수 있잖아요.
그것처럼 저 사람하고 나 사이에 감정도 저장이 된다는 거예요.
좋은 감정이 저장이 되면 저 사람이 어려움이 생겼을 때 내가 한마디 충고를 딱 하면 들어가는데 나하고 악한 감정이나 그런 좋은 호의적인 감정이 없으면 내가 그 말이 아무리 좋아도 그 친구는 안 듣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평소에 어떤 관계를 쌓아놓는지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요 감정 은행 계좌에 저축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습니다.
친절하셔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대하여서 그리고 예의 있게 하셔야 합니다.
나이 많은 사람에게도 예의해야 되지만 있어야 되지만 젊은 애들한테도 청년 학생들한테도 어른들은 예의 있게 하셔야 합니다.
정직하셔야 됩니다. 거짓말하고 있으면 감정 은행 계좌에 부정적인 그가 엄청 쌓입니다.
여러분 약속 지키는 거 그렇죠 여러분 이런 것들을 우리가 평소에 하면 좋은 감정이 쌓입니다.
그 사람 마음의 창고 속에 그러면 그 사람에게 어려운 일이 딱 생겼을 때 뭐예요 한마디 딱 조언해주면요 그 말을 굉장히 깊이 새깁니다.
근데 그게 없는 사람들은요 말이 맞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고쳐지 따라가지 않습니다.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뭐와 같다? 창고와 같다 자꾸 쌓입니다.
좋은 것도 쌓을 수도 있고 안 좋은 것도 쌓을 수도 있습니다.
두 번째 갈등 시에 남의 말과 행동에 가장 좋은 해석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티븐 코비가 일요일에 한 뉴욕의 지하철을 탑니다.
한 정거장에서 탔는데 일요일 새벽이니까 지하철에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근데 한 정거장에 문이 열리고 많은 사람이 들어와요.
그 많은 사람이 한 가족이 들어오는데 남자 한 명과 여러 아이들이 들어오는데 그 아이들이 굉장히 시끄럽게 해요.
지하철 안에서 객차 안에서 코비가 굉장히 화가 납니다.
근데 남자는 멍청하게 해가지고 눈을 감고 있어요.
분명히 자기 자식들 같은데 해서 코비가 이 사람에게 찾아가서 정중하게 예의 있게 선생님 죄송하지만 보니까 대개 자녀들 같은데
이 새벽에 지하철 안에서 너무 소란스럽게 하니까 아이들을 조금만 자제시켜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주 예의를 다해서 정중하게 부탁을 합니다.
그랬더니 이 남자가 마치 정신을 번쩍 차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습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제 아내 저 아이들의 엄마를 장례식장에서 지금 공동묘지에서 묻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그 말이에요. 아내가 죽은 거죠 저 아이들의 엄마가 죽은 거죠.
여러분 그 한마디에
이 사람이 지금까지 이해 안 되던 모든 행동이 다 이해가 돼버리는 거예요.
어떻게 엄마 아버지로서 이 공공장소에서 저렇게 놔두는가 그렇게 이해가 안 돼서 머릿속에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이제 가서 예의 있게 말했는데 누가 죽었어요 내가 죽은 거예요.
무슨 정신으로 그 아이들을 챙기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사람이 깨닫습니다. 저 사람이 지금 보여지는 모습이 다가 아니구나.
내가 모르는 부분이 있어서 내가 이해 안 되고 내가 모르는 부분으로서 있어서 저런 결과가 나타났구나.
그래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를 한번 봅시 사도행전 319 제일 첫 문장 읽겠습니다.
시작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은 다른 사람들의 동기와 행위에 가장 좋은 해석을 가한데 어떤 사람이 이해가 안 될 때 있죠 그럼 뭘 싸웠나 보다.
부부 싸움 뭔가 자꾸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고요.
할 수 있는 대로 이게 이게 어디에서 나오는 의미인가 하면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사랑의 여러 가지 특징이 나오는데 한 특징이 사랑은 뭘 생각하지 않아요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좋은 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다른 사람이 어떤 행동에서 이해 안 되고 말과 행동이 이해가 안 될 때 분명히 무슨 연유가 있을 거야.
그래서 여러분 여기 중간 글자 있죠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파란색 그럴 만한 시작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여러분 살면서 주변에 이해 안 되는 말하고 이해하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있어요 우리도 그럴 때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근데 우리는 분명한 무슨 원인이 있어서 그 말과 행동을 하거든요.
그래서 여러분 누군가가 이상한 행동하고 이해 안 되는 말 하면 싸우지 마시고 속으로 한마디 꼭 하셔요.
저 사람이 저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이유가
있을 거야.
여러분 그러면요 이해의 폭이 확 넓어집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사랑은 가장 좋은 해석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지막 하나만 살펴보고 마치겠습니다.
윈윈 전략을 쓰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니 안 이기면 니가 이기든지 내가 이기든지 둘 중에 양당 간의 결정을 냅니다.
그래서 많은 관계가 파국으로 끝나요.
여기 보면 전도서에 보면 아침에도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마라.
이것이 잘 되고 저것이 잘 될지 알지 못한다.
그럼 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의 것이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의 다 바치라고 그러는 거지.
그렇죠? 제가 한 학원에 있을 때 이랬습니다.
제가 목회를 할 때 화요일 저녁에 아주 중요한 설교를 하는데 그 학원이 이제 운영을 해야 되니까 등록실 직원이 근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근데 제가 느낌으로 저 청년이 하나님의 말씀을 꼭 들었으면 좋겠는데 이제 근무를 해야 되니까 제가 어떻게 오늘 바빠요.
그렇게 했더니 목사님 지금 할 일이 많아요.
근데 제가 뭐라 그랬냐 하면 그러면 오늘 설교 마치고 끝나고 나서 내가 당신 일을 좀 도와줄 테니까 마치고 한 1시간 정도 남아서 도와줄 테니까 지금 시간은 잠시 학원 문 닫고 사람이 많이 안 오니까 예배를 드리면 어떨까요?
좋대요.
그래서
그 아가씨가 학원 문 잠시 등록실 문 잠시 닫고 예배를 드리러 왔고 예배드리고 나서 제가 남아서 1시간 동안 그 아가씨 일을 도와줬어요.
그러니까 여러분 이게 뭐냐 하면 윈윈 전략을 쓰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봐봐요. 오늘 내 아내의 결혼 기념일에 약속을 정해서 좋은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기로 약속을 정했는데 회사에서 야근을 하라 그래요.
https://www.youtube.com/live/lGtEzO4xfs4?si=VZot-zoZF2iqBoYv
그럼 어떻게 해야 돼 이런 일 없으셨습니까? 그럼 이제 남자들은 결정을 합니다.
회사가 더 중요하지 그러면 회사에 남을 것이고 아내가 더 중요하지 그러면 뭐예요? 할 거예요.
그러면 회사에 남아도 아내는 삐지죠 그럼 만약에 아내하고 가면 회사에서는 뭐라고 생각할까요?
저 사람은 회사 일이 중요하지 않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한쪽을 결정했을 때 한쪽이 한쪽이 상처가 돼요.
그럼 이거 어떻게 해야 되는 거죠? 이때 윈윈윈 전략을 찾으라는 거죠.
이게 뭐냐 하면 평소에 좀 친하게 지내는 동료가 있으면 오늘 내가 이렇게 결혼 기념일로 가야 되는데 회사에서 지금 이 일을 좀 해달라고 그러는데 오늘 죄송한데 당신이 이 내를 위해서 좀 해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해야 될 일 나중에 얼마 뒤에 내가 당신 일을 해주겠습니다.
하고 그 사람한테 자기 회사 일을 좀 해달라고 부탁하고 아내를 만나러 가는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 회사 일도 해야 되고 아내와도 해야 되는 그런 전략을 찾으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많은 경우에 서로를 만족하게 할 수 있는 해답이 있다는 거예요.
근데 우리는 아예 찾아보지도 않고 뭐예요 이쪽이냐 이쪽이냐를 결정하기 때문에 여러분 봐봐요.
부모가 모든 것을 희생하고 자식을 키웁니다.
나쁜 거 아닌데
자식이 부모한테 그 보답하고 은혜를 잘 알고 그러면 부모가 괜찮은데 나중에 지 자식 다 크고 나가지고 이제 마치 지가 잘나서 큰 것처럼 그렇게 가면 부모는 나중에 무슨 생각이 드냐 하면 굉장히 괘씸한 생각이 듭니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그렇게 하지 마셔요.
부모가 자녀를 키우면서도 엄마가 만족하고 엄마의 생활도 있어야 돼요.
엄마도 행복하면서 자녀도 행복할 수 있는 윈윈의 전략과 방법을 찾아야 돼요.
그거를 자꾸 그 방법을 찾지 않아서 그렇지 찾아보면 있어요.
그래서 그래서 여러분 인간관계는 한쪽을 향하여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관계가 되면 그게 하나님의 은혜에 연결이 되어서 희생하는 관계가 되면 섭섭한 게 없는데 내 힘으로 내 의지로 희생하는 게 되면 나중에 그게 다 억울하게 돌아와요.
그만하겠습니다. 이제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여러분 제가 많은 이야기했습니다.
인간관계 어떻게 해야 되는지 제일 중요한 거는 뭐예요? 누구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거다 예수님하고의 관계를 회복하는 1만 달란트 탕감에 빚진 자의 비유 이야기 기억하시죠? 두 번째 가족에게 어떻게 대해야 되는지 그리고 타인에게 어떻게 대하는지 제가 세 가지 이야기했습니다.
그죠? 평소에 좋은 감정을 저축하라.
두 번째
가장 타인의 말과 행동에 좋은 해석을 하는 것이 성경적인 사랑이 돼.
세 번째 어떤 충돌되는 상황 가운데 있을 때 누구 한 편을 듣는 결정을 하지 말고 서로에게 답이 되고 유익이 되는 윈윈 전략을 찾으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참 인간관계가 쉽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 행복할 때도 있지만
갈등이 생기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을 때가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저희가 그렇게 소모전을 할 때 참 많은 힘이 들었던 상황들을 겪을 때 우리 하나님 아버지 얼마나 안타깝게 보셨습니까? 이 이제 원리와 또 몇 가지 방법을 알았사오니 무엇보다 저희가 이번 기간을 통하여 예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우리 힘으로 스스로 사랑할 수 없고, 용서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새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그토록 큰 희생을 겪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날마다 순간마다 쳐다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것이 우리에게 감동이 되고, 힘이 되고, 감격이 되어서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도록 힘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태계원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가족이 행복하고, 성도들 간의 사이가 행복하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서 진정으로 작은 천국을 맛보는 아름다운 교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