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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통일의 비전과 소명 ..... DNIP에 기초한 21세기 신문명창신
평양선언이후 수정함
함석헌 선생 그리고 신영복 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진보적 사상가와 철학가들은 한국의 평화통일이 민족사적 과제이자 21세기 신문명사적 과제라고 한다.
베트남식이나 독일식 통일이 아니라 21세기 신문명을 창신한다는 소명으로 가장 늦은 통일을 가장 좋은 통일로 만들어 인류에게 새로운 비전을 주고 세계사에 기여하자는 것이다.한국의 촛불혁명은 제 1차 박근혜 탄핵,제 2차 대통령선거,제 3차 지방선거등을 통해 제도화되고 있다. 손에 손에 들고있는 스마트폰이 민주와 평화의 촛불로 타오르고 있다.촛불혁명은 한국 근세혁명사상 만민공동회이래 처음으로 대중항쟁과 선거투쟁이 결합하여 민중에게 작지만 소중한 승리를 안겨주었다. 지난 6월항쟁시 직선제는 쟁취했지만 제도정치권과 범민주진영의 분열로 인해 군부정권이 재연장되었다. 이는 민중에게 커다란 절망과 상처,허무를 안겨주었다. 더이상 매국 보수언론의 사실왜곡과 조작이 통하지 않고 있다. 촛불혁명은 결국 낡은 정치사회질서를 해체하고 사회혁명으로 발전할 것이고 종국엔 평화통일혁명을 통해 프랑스혁명, 소비에트 혁명에 이은 제 3의 한국혁명으로 완성될 것이다.
21세기 신문명으로서, 제 3의 한국혁명으로서, 촛불혁명의 완성으로서 ,그리고 탈근대시대 지혜의 보고라고 할 수 있는 역경의 화택규괘에 있는 다름같이 어울림 사상(同而異和 )의 실현으로서 평화통일혁명은 세계사가 한국 민중에게 부여한 소명이자 거부할 수 없는 역사의 성배이다. 김수영시인은 “38선은 세계에서 제일 높은 빙산의 하나이다. 이 강파른 철판덩어리를 녹이려면 참으로 깊은 사랑의 빛의 조용한 침잠이 필요하다“고 선언한다.이 강파른 증오와 불신의 빙산을 녹이기 위해서는 소란스러운 투쟁보다는 깊고도 깊은 사랑의 빛의 적연한 침잠으로 남북간에 먼저 깊이 연결된 되돌릴 수 없는 평화 DNIP(deep neworked irreversible peace)를 정착시키고 이후 장기간의 교류협력과 통일과정을 통해 21세기 신문명을 창신해야 할 것이다.
평화통일은 동의 논리가 아니라 남북이 다름같이 어울림으로 상호소통 상호변화 상호혁신하여 한반도를 아름다운 다름성채로 창신하는 것이다.
이같은 통일을 신영복선생은 화화통일 和化通一이라고 하였다.
남북이 사상 제도 체제의 차이를 승인하고 공감 소통 교류 협력하면서 서로간에 변화하는 것이 90% 정도의 통일(通一)이고 이 통일(通一)에서 제도상의 統一로 가는 길은 관리만 잘하면 될 것이고 험난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남과 북은 촛불혁명의 사상인 다름같이 어울림에 의거해서 먼저 상대의 다름 (사상 제도,체제)을 인정 존중하고 그 기반위에서 서로간에 어울림(공감 소통 교류 협력)하는 것이다.
이는 추상적 보편으로서 획일화 동일화등 동의논리를 반대하는 것이다.동의 논리는 남에서는 북진통일로, 북에서는 적화통일로 추구되었다. 이승만 정권당시 북진통일을 반대하고 평화통일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조봉암선생이 사법농단에 의해 빨갱이로 몰려 법살되었다.1986년도에는 유성환 국회의원이 본회의에서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 국시가 되어야 한다고 발언했다가 구속되는 야만적 시대가 있었다. 이같은 동의 논리에 의한 통일정책이 북을 흡수통일하겠다는 천박한 경제주의관념인 통일대박, 북이 멸망할 때까지 그 위험을 관리하며 기다린다는 전략적 인내정책등이다.
세계사적 총체적 모순이 집약되어 있는 문제 투성이의 남, 국가보안법등으로 인해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인 사상의 자유마저 없는 헬조선인 남한이 햇볕이라는 것부터 자가당착이며 오만과 위선이며 진정한 통일정책이 될 수 없다.햇볕정책이란 포용정책은 상호협력과 긴장완화의 긍정적 측면은 있지만 결국은 햇볕을 통해 상대를 동화시키겠다는 것으로 진정한 다름같이 어울림은 아니다.
물론 남북간 경제협력으로 한반도 신경제지도를 통해 공동번영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평화와 공존 공동번영에서 한걸음 더나아가 상호변화와 창신으로 한반도를 지구상에서 가장 살기좋고 아름다운 다름성채로 21세기 신문명으로서 새로운 정치사회경제 시스템을 창신하는 것이 남북 민중에게 부여된 세계사적 소명인 것이다.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남북민중에게 깊이 적연히 침잠하는 사랑과 철학의 빛에 의한 DNIP가 요구된다.
통일정세의 조성과 남북의 혁신
지금 세계 경제의 중심축이 동아시아로 이동하고 있다.
동아시아는 인구 16억으로 미국 4억,유럽 4억보다 많다. 역사는 변증법적 발전을 한다. 상대적 변방이 앞서가는 지그재그식 발전을 한다.
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된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고 ,장강의 뒷물이 앞물을 헤치고 나아간다. 근대에 들어 역동적인 서양은 정체의 동양을 앞질렀고 ,산업주의 영국은 중상주의적 스페인을 추월했고 과학기술의 독일은 금융의 영국을 추월했으며, 미국은 전쟁의 유럽을 추월했다. 이제 산업의 동아시아는 세계화의 덫에 걸린 금융의 미국을 추월하고 있다. 세계경제의 중심축이 동아시아로 이동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 독립운동가들이 그렇게도 간절히 꿈꾸어 온 동양평화를 실현할 물질적 토대가 마련되고 있다. 지식기반 네트워크 사회에서 한반도는 침략통로가 아니라 지식 정보 자본 물류 사람을 연결하고 해양과 대륙의 다양한 인적 물적 교류가 이루어지는 연결통로가 될 것이다.
지난 날 일본처럼 무력패권에 의한 동아신질서가 아니라 상호협력에 의한 동아시아 평화공동체 건설,21세기 신문명창신이라는 관점에서 한국의 냉전체제를 해체해야 한다.1989-1991년 사회주의는 몰락했고 2008년 금융위기로 인해 신자유주의도 종언을 고했다. 지금은 혁명적 위기를 넘어 미래에 대한 희망과 대안마저 박탈당한 문명사적 위기이다.한국뿐아니라 전세계의 청소년들이 신자유주의 절망속에 앞 날이 보이지않아 신음하며 방황하고 있다. 그래서 세계의 청소년들이 방탄의 러브유어셀프에 열광하고 스피치 유어셀프에 공감하고 있다. 인류는 21세기 신문명을 갈구하고 있다.
한국의 촛불혁명,북한의 사회주의 시장경제, 북의 한반도 비핵화노선,러시아의 신동방정책, 중국의 신시대 중국특색의 사회주의로서 구동존이 전략등은 동아시아 평화를 실현할 수 있는 계기이다.
북의 혁신과 평화노선
2018년 시작한 북의 한반도 비핵화 및 평화노선은 외적 압력이나 외재적 요인보다는 내재적 동인이 주요한 측면이다. 북은 그동안 흔들리던 정치경제시스템을 혁신하여 이제 핵없이도 자신들이 발전하고 체제를 수호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되었다.
북한은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사회주의 시장경제로 혁신하였고 또 정치를 선군 중심에서 당 중심으로 혁신하였다.
이러한 혁신의 추동력은 그간의 역사적 성과를 계승하고 또한 고난의 행군기간 기아와 아사로 인해 아래로부터 자생적으로 치고 올라온 시장경제 추동력이었다.
북은 1946.3 무상몰수 무상분배에 의한 토지개혁과 소련의 원조를 축적기반으로 삼아 중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고 경공업과 농업을 발전시켜 자립적 경제를 건설한다는 계획을 세웠다.그리고 휴전후 1954-1958년기간에 식량자급자족을 목표로 농업협동조합을 만들었다.1954년 흉년으로 식량생산이 부족하자 농민은 현물세 25%는 납부하였으나 정부의 양곡수매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김일성은 연안독립동맹 출신 최창익을 양곡수매사업에서 정치사업을 등한시하고 농민들의 자유방임에 의존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면서 쌀의 자유거래를 중단하고 기계화라는 물질적 조건없이도 소농경리보다는 협업경영이 생산성이 높다고 주장하면서 협동조합화를 강행하였다.소련과 동일하게 농업협동화가 농업생산성과 농민의 이익보다는 양곡확보라는 정치적이고 편의주의적 정책에 의한 것이었다. 소련보다는 저항이 약했는데 식민지배와 토지개혁 전쟁등으로 부농이 거의 소멸되었고 가축들을 보상해주고,약간의 텃밭을 허용하고, 다양한 형태의 협동조합을 제시했기 때문이다.농업의 강제적 협동화를 통해 양곡의 생산 유통을 국가가 장악하게 되었다. 한편 소련에서는 1953.3 스탈린사망후 흐루시쵸프가 실용주의적 개혁을 내걸고 스탈린의 숙청과 독재를 비판하였다.북한에게도 독재와 중공업우선주의를 비판하고 집단지도체제를 종용하였고,소련주도로 사회주의 국제분업을 지향하는 공산권경제협력기구인 코메콘 가입을 요구하였다.북은 코메콘 가입을 거부하였고 자력갱생,자립적 민족경제 건설노선을 천명하였다. 이에 소련은 원조를 50%삭감하였다. 북은 1956년 결국 박금철 최창익등 8월종파사건으로 친소파와 연안파를 숙청하였다. 이로인해 소련의 원조가 중단되었고 북은 축적위기에 빠져들었다.북은 외부축적에서 내부축적으로 전환하였다.
북은 축적위기를 천리마운동등 대중운동 ,관료주의 극복과 계획성강화로 타파하려고 했다. 관료주의 극복을 위해 위에서 아래를 도와준다는 청산리방법과 공장과 기업소를 지배인 유일관리제에서 공장당위원회(지배인,당비서,기사장) 집단지도체제로 바꾸는 대안의 사업체계 그리고 계획의 일원화와 세부화를 주장했다. 특히 김주석은 1965.9월 몇 만종이 되든 , 몇 달이 걸리든 , 계획일꾼을 늘려서라도 계획의 세부화를 완성하라고 다그쳤다.참고로 레닌은 러시아 전력화 같은 구체적 계획은 지지 찬성하였지만 일반적 중앙계획은 실현될 수 없는 무익한 토론이자 현학이라며 반대했다.
천리마운동은 소련의 스타하노프운동과 유사하지만 팀별로 작업반단위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북은 천리마운동을 간부의 지도와 대중의 자각과 창발성이 결합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초창기에는 그런 측면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기술기반이 없는 외연적 성장방식으로 생산요소의 낭비가 심했으며 노동자의 노동강도를 강화시켜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경제외적 강제노동이었다.
강력한 혁명적 열정에 사로잡혀 천 삽뜨고 허리를 편다해도 포크레인으로 작업하는 생산성을 따라잡을 수는 없다.
공장당위원회 집단지도체제는 혼란만 조성했고 관료주의를 극복하지 못했다.
오히려 당의 관료주의를 기업에 까지 확대 강화한 측면이 있다.
천리마운동으로 건설된 관개시설이나 인프라 시설은 거의 날림으로 만들어져
조그마한 자연재해에도 쉽게 유실되었다.
이후 북은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여러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계획의 일원화와 세부화는 현실에 부합하지않는 관념성과 추상성로 인해 파행성이 드러났고 각종 소조운동, 붉은 기 쟁취운동등 대중동원은 자원낭비, 설비의 과도사용,노동의 과도동원으로 생산저하를 초래하였다.관료주의도 극복하지 못했다.
북은 이같은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1969년 생산수단의 상품적 형태와 가치법칙을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계획의 한계를 비로소 인정하고 시장의 조절기능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관료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1973년에는 기업의 독립채산제가 주장되었다. 시장과 독립채산제를 통해 행정관료의 명령체계를 계약관계로 전환시키려고 의도했다.
북한은 다양한 속도전으로 즉 외연적 성장방식으로 1970년대 평균 15.9%성장하였다.그러나 제반 모순이 누적되었고 1974년에는 외채를 상환하지 못하고 동결하여 고립된 폐쇄적 경제가 되었다. 김 일성주석은 1980.10.10.일 전력 1000억 킬로와트, 강철 1500만톤, 알곡 1500만톤 ,수산물 500만톤등 80년대 10대 전망목표(생산량지표)를 밝혔다.
북은 이같은 상당히 가시적 목표를 특별한 전략없이 80년대 속도창조와 증산 절약운동으로 달성하려고 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는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총체적 문제점이 드러나 성장률이 하락 전환했다.남과 북의 경제는 80년대 역전되었다.남은 전자산업등 기술발전에 의한 내포적 산업화와 엔고등 3저호황의 계기를 맞아 경제가 발전했으나 북은 자급자족적 외연적 성장에 집착하였다.중국의 등소평이 1978년 흑묘백묘론을 내세우며 개혁개방 정책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북은 유연성없이 경직된 사고로 이를 사회주의 원칙의 포기로 간주하였다. 북은 천리마운동, 속도전등 대중운동에 의한 외연적 성장의 한계,날림공사, 제품의 품질저하,자원낭비,노동의 소외,노동력낭비,관료들의 부실한 보고,중공업과 경공업의 불균형,시장부재로 인한 비효율등 총체적 문제점이 드러났다.
북은 경공업과 중공업의 불균형 극복을 위해 1984년도부터 8.3 인민소비품운동을 전개 지방공업의 활성화와 국유기업의 부업작업반을 활성 장려하였다.
인민소비품은 처음부터 계획이 아니라 시장기제를 활용했다.
1986년에는 연합기업소를 전면도입하고 독립채산제를 전면화했다. 아울러 도덕적 자극과 함께 물질적 자극을 병행하고 상품화폐관계를 등가성의 원칙아래 이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군수 전략물자를 제외한 모든 물자를 시장을 통해 수공급하도록했다.그러나 이론과 실천의 괴리가 있었다. 시장이 형성되지 못하고 여전히 생산량지표였기 때문에 가격 원가 수익성 개념이 정립되지 못했다.계산가격은 생산물의 품질을 담보하지 못했고 현실의 시장가격을 반영하지 못했다. 각 연합기업소의 이중 독립채산제는 제대로 작동하지않았다. 소련과 마찬가지로 노동자의 사보타지는 만연했고 생산성은 저하되었다.협동조합의 옥수수는 말라죽어도 내 텃밭의 옥수수는 잘 자라는 식이다. 집단적 소유가 사회적 소유라기보다는 인민의 무소유로 전화되어 노동의 소외를 초래하였다. 게다가 1989-1991년 동구와 소련의 몰락으로 북은 원조와 사회주의 우호무역이 중단되어 에너지와 철강등 기간산업에도 문제가 발생하였다. 1989부터 석유와 코크스가 감소하다가 1994년에는 중단되었다.
우호국가에 대한 차관을 갚지못해 채무불이행국가가 되었고 동맹국에서
더 이상 차입을 할 수가 없었다.
1987.11월의 칼기 폭파사건으로 인해 미국은 북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하여 국제금융과 대외무역을 봉쇄하였다.이는 동구 사회주의권 몰락을 계기로 북의 몰락을 유도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엘친의 러시아는 석유대금으로 달러를 요구하였으나 달러가 없었다.1990년 중국마저 현금결제를 요구하였다.1991.9월 한소수교, 1992.8월에는 한중수교가 되어 북한은 더욱 고립되었다. 1992년 경제위기가 발생하였다.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1991.9월 유엔에 남북동시가입하고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를 합의하는등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나선자유무역지대를 개설하고 1992년 4차 화폐개혁을 실시하였다. 화폐개혁은 교환액 상한설정등으로 현금보유자가 많은 손해를 보았고 중앙은행에 대한 신뢰만 상실되었다.
1993.12 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농업제일주의 경공업제일주의 무역제일주의소위 혁명적 경제전략을 선포하고 국가주도하의 시장활용 및 확산을 결의하였다.
1984년부터 시작한 8.3인민소비품 생산운동이 획대되어 1994년에는 4만 6500개의 가내작업반과 부업반이 만들어졌다.인민소비품이 시장을 통해 거래되어 시장이 자원배분뿐아니라 필수적 생존수단으로 자리잡았다.
1994년에 협동조합 개혁이 이루어져 사실상의 독립채산제 단위로 10-25명으로 협동조합내 분조가 형성되었다.그러나 정부는 비료 농약 경유등 생산원소를 제공하지 못해 협동조합이 사실상 붕괴되었고 1994년 김 주석의 서거, 1995년 대홍수로 인해 둑, 관개시설 ,산 다락밭등 농업제반시설이 붕괴되었다.방공호에 비축해둔 비상식량마저 물에 잠겼다. 경제가 붕괴되었고 식량배급이 중단되었다. 대기근이 발생하여 100만이상이 아사하였고 석탄갱도에도 물이찼는데 전력이 없어 물을 퍼내지 못했다.발전능력의 85%를 상실했다. 코크스가 없어 제련을 하지 못했다. 고난의 행군(1994-1997),우리식 사회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결사전이 시작되었다.대규모 탈북과중국으로의 밀입국 및 이동의 자유가 묵인되었고 자연발생적 장마당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북한판 네프맨인 돈주가 형성되었다.아래로부터 자생적 시장화가 형성된 것이다.
배급이 중단되어 당원들마저 시장화에 나섰다. 당과 정부의 중하위 관료들은 자신의 지위를 활용하여 돈주들과 동업관계를 맺었다.
북은 위기에 처한 체제를 사수하기 위해 대내외적으로 핵과 미사일개발 선군정치등 군사국가화하였다. 핵 미사일 선군정치는 외적으로 뿐아니라 내적으로도 요구되었다. 재래식 군사력과 외교력만으로는 대내외적 체제유지를 할 수 없었다. .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2002.7.1. 경제관리개선조치가 있었다.
국가납부에 있어서 총수입 생산량지표를 번수입지표로 전환하였다.
이로인해 시장에서 가격기제를 통해 품질과 원가가 검증되기 시작했다.
또한 시장의 압박을 받아 노동생산성도 높아지기 시작했다.
계획과 자력갱생보다는 실리주의를 강조하였다.
시장과 번수입지표로 인해 계획과 경제관리가 오히려 합리화되었다.
지배인 권한을 강화하고 국가납부를 초과한 생산물의 30%에 대해 시장판매를 허용하였다.
2003.3 인민위원회 산하에 종합시장을 상설화하여 월별 자릿세와 매일 장세를 수취하였다. 2005년에는 식량배급제 정상을 선언하였다.
2009.11.30.-12.6까지 제 5차 화폐개혁이 있었다. 이는 2002년 경제관리개선조치이후 시장화와 함께 진행된 인플레를 타파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시장과 함께 국가의 계획적 공급유통체계를 강화하여 계획기구를 재정비하기 위한 것이었다.일인당 최대 현금 15만원,예금은 30만원까지만 환전이 가능했다. 구권 100원을 신권 1원으로 은행저축은 구권 10원을 1원으로 교환해줬다.또 개인들의 사사로운 빛 일체를 무효화했다. 돈없는 농민 도시빈민은 환영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북한돈을 신뢰하지 않아 외화를 선호했으며 은행 예금을 더욱 기피하여 화폐개혁은 실패하였고 이후 협동화폐제를 이용하게 된다. .
화폐개혁직전 노동당 계획재정부장 박남기를 해임하고 화폐개혁이후 2010.3월에는 간첩협의로 처형했다.
자본주의적 통화조절방법을 끌어들여 경제사업전반에서 화폐공간의 의의를 과신하는 우경적 오류를 범했고 남조선식 시장경제 도입을 시도했다는 혐의로 숙청되었다. 2010년에는 협동농장 재가동 준비를 완료했고 2011년에는 경제성장이 플러스로 전환했다. 그리고 2011.12.17 김정일 위원장이 서거했다.
김정일시대인 2003-2010년에는 국방 공업우선노선과 과학기술중시노선이었다. 북은 해방직후부터 인민경제의 주체화 자립화 현대화를 위해 과학기술을 중시하였으나 별 성과과 없었다.북은 낫과 망치와 함께 붓을 중요시했다. 그러나 김정일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오랜 투자와 연구를 통한 지적 역량의 결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95년에 이르러 비날론 대규모 상업생산이 가능하였고 비콕스제철 무연탄제철도 가능하였다. 핵미사일기술뿐아니라 인민경제 선행부분인 기초공업부문에서 획기적 성장을 하였다. 다단계 수력발전소도 건립하였고 장마당마다 태양광 판넬도 공급되었다.CNC기술도 고도화되어 이제 그간 천리마운동식 외연적 성장전략에서 내포적 성장전략으로 전환할 수 있게되었다. 협동조합내 분조를 다시 3-5명의 포전으로 나누어 포전담당제를 시범적으로 운영하였다. 농업기술도 발전하여 관개공사, 고마력의 트랙터, 농약, 비료의 기술이 증대되었다.
종자기술도 발전하여 생육기간이 단축된 보리 감자 종자도 개발하였다.
그간의 무수한 시행착오에 대한 반성과 모든 성과는 김정은의 2012.6.28일 우리식경제관리방법(사회주의 기업책임관리제)으로 집약되었다.
공장 기업소 협동농장은 독립채산제로 독자경영하고 생산물은 시장판매하였다. 운영은 지배인책임제로 지배인이 성과에 따라 노동자에게 차등임금제를 실시하고 초과수익도 기업에서 자율처분했다.
협동조합은 포전담당제로 생산량의 30%를 국가에 납부하고 70%를 자체 배분하고 시장처분한다. 과일 야채는 시장판매후 수익을 자체 분배한다.
생산조직에 무역 합영 합작권한 부여하고 외화계좌를 개설하도록했다.
그리고 돈의 출처를 묻지말고 이윤을 보장할 것을 담화로 주장했다.
남한도 1983년 금융실명제 법을 만들 때 모든 금융자산에 대해 자금출처조사를 면제한 적이 있다.
2013.3.1. 외화유통을 권장하고 협동화폐제 ,외화예금제 ,변동환율제를 실시하였고 2013.3.31.핵 경제 병진노선을 결의하였다.
2014년 러시아와 부채협상이 타결되어 소련시대부터 이어져온 110억달러중 100억달러를 탕감하였고 러시아는 그 댓가로 러시아에서 남한에 이르는 가스관을 지원해주길 희망했다.
2017.11 핵무력완성선언 2018.4.20. 병진노선폐기 사회주의 경제건설 총력집중노선을 천명하였다.
우리식 경제관리방법이후 3.26전선공장에서는 생산성이 향상되어 지배인이 월급을 인상하여 월급이 20-30배 상승하였다.
만경대협동조합에서는 알곡 2700톤을 생산하여 700톤을 국가납부하고 2000톤을 농민에게 분배하였다. 북한의 협동조합은 농업현대화 (비료 농약 관개공사 기계화 종자개량), 포전담당제,시장즉 이 3가지가 결합하여 생산성을 높여 식량문제를 해결해나가고 있다.
자료마다 차이가 있지만 고난의 행군기간에 500만톤의 식량이 부족했지만 2012년에는 식량부족분이 20만톤 ,2013년에는 4만톤, 2014년에는 식량부족분은 없었다. 물론 이것은 생존에 필요한 최소량이고 충분한 생산량은 아니었다. (헤이즐 스미스, 장마당과 선군정치,김지호역, 창비,p277)
미국 농무부 평가서에 의하면 북은 2023년에는 완전한 식량자급자족이 가능하다고 전망하고 있다.
북은 우리식 경제관리방법을 통하여 경제를 성장시킴으로써 비로소 자신들의 체제에 관한 자신감을 회복하게 되었다. 제재속에서도 시장과 배급의 조화,변동환율제 고수등을 통하여 하이퍼인플레이션에 노출되지 않고 있다. 미약하지만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북은 이제 핵이 없어도 자신의 체제를 유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회복하였다.북은 내적 시스템 붕괴와 외적 침략이라는 위기속에서 결사적으로 자신을 혁신하여왔다.북은 이제 내적으로는 핵미사일이 필요없게 되었다.북은 경제위기를 위기를 극복하고 핵무력까지 완성햇다. 이제 북이 주도적으로 비핵화와 평화공세를 이어가고 있다. 북이 제제에 못이겨 대화에 나왔다는 분석은 핵게임에서 패배한 네오콘의 자기합리화일뿐이다. 제제강화로 비핵화를 유도한다는 전술은 오류와 실책을 가져올 것이다.
또 박남기 숙청에서 보듯이 북의 시장화를 체제전환의 관점에서 보지 말아야 한다. 북은 1990년부터 거의 30년동안 우리식 사회주의를 사수하기 위한 결사항전을 해왔고 경제위기이후 자생적 시장화 압력을 지도부가 적절히 수용하여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사회주의 시장경제로 혁신하였다.
북의 협동조합은 소련이나 중국의 인민공사와 달리 해체하지 않고 집단적 소유를 유지하면서 경영책임을 소규모로 분할하는 포전담당제로 노동의 소외를 극복하고 시장을 이용하여 농민의 처분권을 확대한 것이다.포전담당제는 덩사오핑의 1978년 승포책임제...소유는 국가 ,경영은 개인 또는 기업....와 유사하지만 협동조합의 틀을 유지해 완전 개인영농으로 전화한 것은 아니고 향후 규모의 경제와 농업현대화에 대응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다. 북은 시장과 계획의 조화,독립채산제,포전담당제, 지배인책임제, 차등임금제 ,사회적소유 유지등으로 경제를 발전시키고 있다.그간 우리식 사회주의는 아무런 내용이 없이 그저 중국과 소련과 다르고 중소의 간섭을 배제한다는 추상적 내용이었지만 우리식 기업관리방법에 의하여 구체적 규정성을 갖게 되었다.그러나 북경제의 문제점은 은행에 대한 인민의 신뢰가 없다는 점이다. 5차례에 걸친 화폐개혁으로 북한 돈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다. 고육지책으로 나온 것이 외화도 같이 사용하는 협동화폐제이다. 또 은행에 돈을 맡기고도 찾을 땐 뇌물을 주고 찾은 경험이 있어 은행에 예금을 기피한다. 신뢰가 없으면 성립할 수 없는 무신불립이 금융기관이다.돈주로 대표되는 사금융의 제도금융화는 요원할 것 같다. 개성상인의 전통을 이어받은 돈주의 신용은 대단하다. 중국에 있는 화교 돈주와 북한에 있는 돈주간에는 청산거래도 이루어진다. 한국에 있는 탈북자들도 이런 시스템을 이용해 북한의 가족에게 돈을 송금하고 있다.자본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북으로서는 유휴자금을 동원하는데 많은 난관이 있다.
돌이켜보면 현실성과 유연성이 탁월한 레닌은 내전후 신경제정책을 제안하면서 상품은 구매와 판매로 분리되었다. 볼셰비키는 상업을 배우라고 하였다.
그리고 사회주의는 10만대의 고급트랙터 ,전기, 은행없이는 이룩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곡물강제징발을 중지시키고 수확량의 20%만 국가에 납부하라고
했다. 그리고 신경제정책을 장기간 유지할 것을 당부했다. 정치혁명과 달리 사회혁명은 절대로 단계를 뛰어 넘을 수 없다. 오만과 조급함에 의하여 스탈린이 신경제정책을 포기하고 강제적 집단화,부하린등이 주장했던 달팽이걸음의 산업화를 무시하는 바람에 소련이 몰락한 것이다.
북은 또한 앞으로 사회주의 법치를 강화하고 여론조작형 재판대신 공정하고 민주적 재판,선전선동의 자유, 복수정당제, 복수후보.집회 및 사상의 자유,북한내 남한 정당 및 사회단체 지부활동등이 보장된다면 인민대표회의나 인민위원회도 당의 거수기에서 벗어나 진정한 인민의 민주적기관으로 혁신할 수 있을 것이다.민주주의 기반위에서만 사회주의 시장경제도 번영할 수 있다.북이 초기에 남한보다 속도감있게 경제가 성장하다가 정체하게 된 것은 유일독재체제가 인민의 창조적 역량을 짓눌렀기 때문이다. 모든 반대파를 숙청한 1967년이후 주체사상은 김일성 유일사상으로 일색화 경색화되었고 철학이라기보다는 지배계급의 통치담론이 되었다. 온 사회를 한 색깔로 물들이는 일색화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아 창조의 역동성이 상실되었다.주체사상에서 수령독재는 수령만 주체가 있고 다른 모든 인민은 피동적 객체로,탈주체화된다는 것이 수령사상의 모순이다.수령독재는 이승만 정권의 일민주의 ,두령국가,국부론(어버이 수령)과 유사하다. 지식기반 네트워크 사회에서 수령독재는 시대착오임이 점차 드러날 것이다. 수령중심에서 인민중심으로 , 당중심에서 인민중심으로 민주주의의 혁신이 있어야 한다.백두혈통같은 봉건유제는 청산되어야 한다. 금강산 바위에 김일성 만세를 새기는 것은 북한산에 장삼이사가 바위에 자기 이름을 새기는 것과 그 본질이 다르지않다. 자연훼손이고 우스꽝스럽고 슬모없는 노동력 낭비이다. 북에서 혁신의 중심세력은 경제붕괴후 자생적 시장화에 내몰린 민중이었다. 수천만 민중이 시장경제에 전면적으로 참여하는 자기주도적 활동이 혁신의 원동력이다.그러나 1993.12 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국가주도하의 시장활용 및 확산을 결의하였기 때문에 당관료들이 시장화흐름을 묵인하고 자신들도 생계를 위해 시장화흐름에 동참한 것이다.
북한민중은 김정은에 대한 지지여부를 떠나
식민시대에 일제와 싸워 마침내 승리하고 일제잔재를 완전히 청산하고
6.25때 미국과 겨루고 전쟁후 초토화된 나라를 현대적 국가로 재건하고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핵무력을 완성하여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를 실현해나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지극한 민족적 자긍심이 있다.
이같은 내적분석에서 고찰해보면 북은 위장평화가 아니라 분명한 비핵화와 평화를 지향하고 있다.
북도 도약하기 위해서는 평화가 요구되고 있다. 또 그 방법은 중국의 쌍중단 쌍궤병행처럼 동시적 단계적 방법에 의하고 있다.북은 정세가 변해도 갈 길은 자력갱생이라고 자주강조하는데 빈말이 아니다. 남은 아메리카 패싱도 불사할 각오로 보다 대담한 평화와 협력전술이 필요하다
남한경제의 현황과 촛불혁명
남한은 1950.3 유상매입 유상분배에 의한 농지개혁과 일제가 남긴 귀속재산 불하, 원조물자에 의하여 삼백산업등 경제를 발전시켰다.유상매입은 생산물의 150%를 30%식 5년간 분할상환하고 지주에게는 5년만기의 지가증권을 발행하였다.그런데 이후 전쟁과 살인적 인플레로 지가증권은 액면가의 1/10로 거래되는 휴지조각이 되었고 자산가는 전쟁중 부산에서 지가증권을 매집하여 귀속재산 불하대금으로 납입 하였다. 귀속재산 불하대금의 53.6%를 지가증권으로 납입하였다.
지주계급의 몰락과 귀속재산불하는 남한경제 발전의 시원이 되었다.
그러나 토지개혁이 아니라 택지나 임야등은 제외되는 농지개혁이였기 때문에 친일 지주들의 정치세력화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고 이는 정경유착,부동산 투기등 수탈적 시장경제의 원인이 되었다.
귀속재산과 원조물자를 정치권력과 관료들이 배분함으로써 친일파들에게 분배되었다. 그리고 원조물자,귀속재산, 산은특별 대출을 받은 기업가는 자유당과 관료들에게 10-15%의 정치자금과 리베이트를 주는 것이 관례가 되어 정경유착이 고착화되었다.
미국의 잉여농산물등 원조는 농업근대화를 저해하고 농민들은 고리대의 수렁에 빠졌다.중소기업은 몰락하였다.국민들은 이같은 재생산 방식에 대한 거부로
1956년 정부통령선거에서 조봉암선생의 평화통일,수탈없는 경제체제,경제개발계획등 3대 테제를 지지하게 된다. .....조봉암선생의 이같은 3대 테제는 이후 한국사회의 민주화 현대화의 지향점이 되었다......
미국은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 국제수지와 재정적자로 인해 원조감축를 하고 차관경제로 전환을 모색했다.한국은 축적위기에 처했다.
미국은 냉전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효율적 체제로 한국등 신생독립국에 군사정부 수립을 기획하였다. 한미일동맹체제를 갖추기위해 친일파 박정희의 5.16쿠데타를 지원하였다.4.19 당시 김 정열 국방장관의 회고에 의하면 이승만 사임후 매카나기 대사와 매그루이 주한미군 사령관은 군사정부를 수립하겠다고 하였다고 회고하였다.
당시 CIA수장이었던 앨런 덜레스에 의하면 5.16공작이 CIA의 가장 성공적인 해외 비밀공작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미국은 박정권의 3선개헌마저 민주주의를 향한 전진이라고 우리국민을 우롱하는 논평을 발표하기도 하였다.미국은 민주화가 혹시 반미가 될까봐 항상 우려하였다.
해방직후 친일파를 완전청산하지 못해 친일파들이 사회곳곳에 지배세력으로 똬리를 틀고 있었기에 친일 군사정권이 가능하였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1962.6.9. 통화개혁을 긴급히 실시하였으나 오히려 사회혼란만 가중되었다.미국의 압력을 받은 국제기구들도 지원을 거부하였다. 결국 자금은 대중의 희생으로 이루어졌다. 나토 회원국 모두가 거부한 베트남전 참여, 독일에 인력송출(광부 간호사파견), 미국이 강요하는 굴욕적 한일국교정상화등을 통해 이루어졌다.
한일협정이후 미국은 한국에 최혜국대우를 하여 중저가시장을 내주었고
일본은 간사이경제권과 한국의 남해공업지대를를 연결해 일본의 노동집약적 산업과 사양산업을 이전하고 일본은 중간재판매를 하였다.... 기업들의 일본으로부터 중간재와 자본재에 대한 중복과잉 수입이 1997년 IMF 외완위기의 근본원인이었다.....
쿠데타 주역들은 제 2의 이완용이 된다고 노골적으로 선언하고 한일국교를 정상화했다. 자금은 1965년 굴욕적인 한일국교정상화를 통해 일본으로부터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민간차관 3억달러를 받아 포항종합제철등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광부와 간호사의 미래 급여를 담보로 독일로부터 1억5000만 마르크의 차관을 얻었고 광부 7800명 간호사 10000명이 파견되었고 1968년도 한 해에만 이들이 송금한 돈은 5000만달러에 이르렀다. 그리고 베트남전 참전을 조건으로 미국으로부터 1억5000만달러의 차관을 얻었고 베트남내 건설사업 및 미국내 한국상품 수출증대의 약속을 받았다. 1966-1972동안 군인과 기술자들의 인건비는 6억4000만달러 ,전쟁물자 납품은 2억 2000만달러에 달했다.무역수지 적자를 만회하기 위하여 문화공보부 장관이 매매춘를 애국적 행위라고 강변하면서 기생관광을 국책사업화하였다 쿠데타 주역들을 산업화 역군이라고 나발불기도 하는데 이는 매국보수진영이 사실왜곡과 조작으로 국민을 우롱하여 수탈적 시장경제를 온존하기 위함이다. 소위 박정희 신드럼은 매국보수의 사실왜곡과 민주화운동의 자기기만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허상이다. 쿠데타가 없었더라면 민주주의를 안착시켜 한국은 선진경제대국이 되었을 것이다.만약 자유민주주의가 실현되었더라면 1989년에 정주영 현대회장이 제안한 7대경협사업등 남북경협이 실현되어 지금쯤은 DNIP가 되었을 것이다. 박정희신드럼은 자원수탈과 대륙침략을 위해 1905년 개통된 경부선과 경의선을 한국경제발전에 기여했다고 주장하는 식민지근대화론의 박정희판 소극버전이다. 경제계획과 중화학공업도 북은 이미 1953년부터 시작한 것이고 크게 내세울 일이 못된다.북은 1950-60년대 놀라운 성장을 하였다. 1950-60년대 당시 “남한에 있던 미국의 관리들은 한국의 무능력한 경제와 중공업분야에서 빠른 성장을 거듭하던 북한으로부터 거대한 도전앞에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학자와 전문가들은 이 어려운 딜레마를 놓고 비통한 나머지 자신들의 손을 쥐어짰다.” (브루스커밍스,김정일코드,따뜻한 손,남성욱역,p268)
경제계획은 전후 인도 파키스탄 인도네시아등 신생 독립국들의 보편적 경제발전 방침이었다.일본은 1955년도 경제자립 5개년 계획을 세워 고도성장애 진입하였다. 경제계획은 1956년도 정부통령선거에서 조봉암선생이 수탈없는 경제를 위해 경제개발계획을 주장하여 220만표를 획득함으로써 대중적으로 이슈화되었다.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인해 사회의 문제점과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즉 부정을 지양할 수 있는 지양의 계기가 나온 것이다. 이로인해 이승만정부는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을 1960.4.15일 국무회의에서 의결하였다. 이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국민들의 대중적 압력,미국의 직접원조에서 경제개발계획원조로 전환(미국 네이션보고서 경제개발계획 필요성 주장),그리고 북한의 경제개발 성공압박의 영향을 받아 제 2공화국에서 시작하였다. 고속도로건설도 우리보다 후진국인 타이에서 1965년도 현대가 이미 고속도로를 건설한 기술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박정희정권이 70년대 경제위기를 극복한 방법은 10월유신, 8.3사채동결,긴급조치등으로 노동자 탄압,그리고 환율인상...1964년에 환율을 달러당 130원에서 255원으로 인상....등에 의한 인플레등 대중약탈이었다.이같은 방법으로 1977년 수출 100억달러를 달성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국민을 수탈한 것이지 크게 내세울 것도 없다.1977년까지는 북한이 남한이나 중국보다 더 잘살았다.1978년이 돼서야 남은 북과 동등한 경제수준에 다다른다. 1982년 북한의 음식섭취량은 평균 3051칼로리로 남의 2936칼로리보다 많았다.부정부패등 금권정치는 있었지만 민주주의가 정착한 일본은 1964년 OECD 21번째 가입, 1967년 무역흑자국으로 전화, 1967.6-1973.5 자본자유화,1968년 미소에 이은 세계경제대국 3위달성등 선진경제대국이 되었다. 박정권 당시 주 수출품은 지하자원 .수산물, 가발, 합판, 의류등 노동집약적 산업으로 기술경쟁력은 전무하고 순전히 가격경쟁력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중동 건설노동자들이 보내준 중동달러가 없었다면 위기는 더 빨리 닥쳤을 것이다.박정권은 결국 이듬해인 1978년이후 위기에 대처하지 못하고 몰락한다.1979년 박정권몰락을 초래한 YH무역은 가발회사인데 한 때 4000명이 넘는 노동자를 채용하였다가 수출감소를 빙자하여 폐업하자 노동자들이 신민당사에 농성하게 되고 살인적 강제진압으로 21살의 여성노동자 김경숙을 타살한다. 이것을 계기로 김영삼대통령의 철야농성투쟁,의원직 제명 ,부마항쟁, 10.26이 있게 된다.박정권은 계속해서 경제신화를 창조해야만 유지될 수 있는 독재정권인데 1970년대 중반에는 경제에 대한 자신감을 상실하였다. 경제가 단순히 수출 건설 증산으로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박정권은 세계적인 케인즈주의의 한계를 인식하지도 못했으며 경제위기에 대처하지 못해 몰락하게 된다.
세계경제는 전후 자본주의의 황금기라고 장기호황을 누렸으나
1971년 달러의 금태환중지라는 닉슨쇼크,1973년 석유파동으로 위기에 처했다.
1970년대가 되자 미국은 베트남전으로 인한 막대한 재정적자와 무역수지 적자를 감당할 수 없었다. 닉슨은 1944년도 브레튼우즈에서 합의된 금 1온스당 35달러의 태환을 중지하였다. 세계경제는 대혼란에 빠졌고 미국은 이 위기를 데탕트로 극복하려고 했다. 동서독이 1972년에 수교했고 닉슨은 베이징에서 마오쩌뚱과 회담하였고 베트남 철수를 합의하였다. 1972년도 박정희 정권은 시장경제에서는 있을 수 없는 8.3사채동결등 폭력적인 방법으로 대중을 약탈하여 재벌기업들을 회생시켰다. 그리고 7.4 남북공동선언같은 국민의 통일열망을 악용하여 더 약탈적이고 독재적인 유신정권을 출발시켰다.
한국은 1974년 씨티은행의 2억달러 점보론 차관,긴급조치, 그리고 건설업체의 중동진출로 위기를 극복하였다.
그러나 전후 호황을 구가하던 세계경제는 1975년부터 케인즈주의 한계가 노정되며 불황속의 인플레라는 스태그플레이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1978년 폴 볼커가 연준의장에 취임하여 80년대 목표를 통제하며 해체하기로 설정하고 인플레를 타개하기 위해 달러대출금리를 11,2%에서 1981년 20%로 ,연준기준금리를 12%로 인상하고 연이어 12주만에 17%로 인상하였다. 차입경영을 해온 한국 재벌들에게는 재앙이었다.게다가 호메이니 이란혁명으로 1978.12월 2차 석유파동이 발발하였다. 석유파동과 달러 금리인상으로 한국경제는 한일경제협력자금으로 위기를 겨우 극복하였으나 물가급등,무역수지 악화 ,실업증대,마이너스 성장등 정치경제적으로 대혼란에 처하게 되었다.
이시기에 YH무역 노조 투쟁,부마항쟁 ,10.26,12.12 쿠데타 ,광주민주항쟁등이 있었다.불황속의 인플레라는 스태그플레이션 위기에 처한 세계경제는 이제 케인즈주의를 버리고 통화주의와 신자유주의를 채택하게 되었다.
1982년에는 세계경제를 금융공학으로 조작할 수 있는 주가지수 선물상품이 개발되어 시카고상품거래소에 상장되고 이후에 다양한 금융파생상품이 개발되었다.금융자본주의가 파생금융자본주의로 전환되었다. 2008년도 금융위기때 한국은 환율파생상품인 키코의 덫에 1000여 기업이 걸려들었다. 원화가 평가절하되면 부품과 소재의 가격이 인상되고 물가가 인상되나 수출에는 유리하다. 그런데 키코로 인해 원화가 평가절하되는 과정에서도 수출을 하면 할수록 손해보는 상황이 발생했다.
신자유주의는 민영화,감세 ,금융화,무역자유화,변동환율제,금융개방, 정리해고의 자유. 복지축소등의 정책이다.1980년대는 세계적 추세에 맞게 한국경제도 관주도에서 민간주도로 성장전략을 전환하였다. 1981년부터 자본시장 자유화 추진계획을 수립하였다. 한국국민의 지적역량이 축적되어 반도체, 전전자교환기등이 개발되었다.1980년대 남이 북을 앞질렀다.
앞지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부정을 극복하는 지양성, 새로움을 창조하는 창조력이 남이 북보다 앞섰기 때문이다. 북은 자급자족적 폐쇄적 계획경제인데다 하나의 색깔로 물들은 관료주의 즉 주체사상의 일색화로 인해 사회의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지양성의 계기가 나타나지 않았다. 경제발전과 사회발전 창조력의 원천은 다름이다. 자유와 민주주의 시장경제가 다름을 보장한다.
남은 처음에는 북에 뒤쳐저 있었지만 1956년에 조봉암 대통령후보가 평화통일 ,수탈없는 경제체제,경제개발계획을 대안으로 제시했고 이후 끊임없는 민주주의 혁신으로 독재를 타도하고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한국이 필리핀과 아르헨티나를 추월한 것은 민주화를 위한 대중적 투쟁력 때문이다. 일본이 1960년대 후반에 개방적 선진 경제대국이 된 것은 전후 전범자와 군국주의자 들 21만명을 공직에서 추방하고 치안유지법체제를 청산하여 정치적 사회적 안정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한국이 30년동안 선진국 문지방에 서있는 것은 해방후 친일파들과 일제부역자들을 공직에서 추방하지 못했고 국가보안법등 치안유지법 체제를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촛불혁명으로 70년간 지속된 정경유착도 끝을 보게되었다. 이제 촛불사회혁명으로 일제잔재와 국가보안법등 반민주악법을 완전히 청산하고 남북간에 깊이 연결된 되돌릴 수 없는 평화 DNIP를 실현한다면 한국경제도 선진경제대국에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한국경제는 1997년 외환위기,2008년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신자유주의적으로 재편되고 민중들에게 더 약탈적인 경제시스템이 되었다.자산과 소득의 양극화가 고착되고 정리해고 비정규직이 만연하고 경제의 금융화 투기화가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같은 신자유주의화가 민주화운동진영에 의해 되었다는 것이 한국 민주화운동의 비극이자 자기기만이다.
특히 2008년 금융위기이후는 더욱더 약탈적이 되었다.
신자유주의가 미국에서는 파산되었지만 이명박 박근혜정권은 더욱더 신자유주의적 기제를 강화했다. 명나라가 망해도 소중화사상으로 명나라를 섬기고, 중국이 약해지면 일본이라도 사대하듯이 이 땅의 천민지배계급은 신자유주의가 망해도 신자유주의를 섬겼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민중들을 확실히 수탈하고 국유기업을 민영화해 이권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남한이 그간 경제성장을 이어온 외적 요인으로는 냉전시대 반공전초기지로서
체제경쟁상 경제성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처음에는 원조와 차관으로 지원했고 경제위기에 처할 때마다 미국과 국제단체가 지원해주었다. 그러나 소련이 몰락한 이후에는 사정이 바뀌었다. 1997년 외환위기때 미국과 일본금융기관은 지원을 거부하였으며 IMF를 통해 한국경제를 완전히 예속시키려했다. 그러나 월가는 한국의 금모으기운동과 국유화정책으로 인해 자신들의 목표와 의도를 관철시키지는 못했다. . 월가와 미 재무부는 자신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금모으기 운동이라는 의외의 일격을 받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미국은 대공황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1934년 황금소유금지법을 만들어 금을 헐값에 강제 매수한 전례가 있다.한국은 1907년에도 나라빚을 갚기위해 3개월간 금연을 하자는 국채보상운동을 한 바있다.월가의 개인주의적 상식으로는 한국의 금모으기 운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월가는 한국의 금융기관 공적자금투입을 사회주의적이라고 강력 규탄했으나 자신들도 2008년 금융위기시 한국의 정책을 모방하여 AIG등 금융기관들에 7000억불의 공적자금을 투입하였다.
그리고 1980년대부터 시작한 신자유주의적 국제분업....선진국은 금융업,지식기반사업등 탈산업사회,중진국은 제조업,.....과 소련개혁개방이 시작된 1985년에 미국이 일본과 독일을 견제하기 위한 플라자합의로 인한 3저호황으로 한국은 제조업발전의 또다른 계기를 갖게되었다.미국과 월가는 소위 탈산업화 사회를 지향하면서 한국의 제조업이 세계경영의 기치아래 글로벌로 진출하는 것을 제조업의 헤지펀드라고 냉소적으로 바라보았다.
한국경제는 북과 달리 세계경제에 깊숙이 편입되어서 기본적으로 세계경제의 충격을 피해갈 수 없었지만 국민들의 교육열 기업인과 과학기술자들의 연구개발 및 능동적 대응 즉 국민의 지적역량 및 민주화 역량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오늘에 이르렀다.유가파동시 건설사와 건설노동자들의 중동진출, 1983년 삼성의 반도체진출,자동차기술,조선기술,화학,정보통신기술,의료기술등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이후 미국은 다시 제조업강화의 길로 들어섰다.트럼프시대에는 노골적으로 자유무역의 외피마저 벗어던지고 보호무역주의를 강화하는 등 과거로 회귀하고 있다. 이로인해 한국제조업은 관세등 미국의 견제를 받게되었고 현재로서는 성장정체의 위기에 처해있다.일본이 1967년 무역흑자국이 되자마자 바로 선진경제대국으로 진입했는데 한국경제는 1986년 무역흑자국이 되었는데 30년이나 선진국 문턱에서 헤매고 있다.한국의 지식인들은 신생독립국중 경제기적을 성취했고 남미나 아세안보다 낫다는 쁘띠 부르조아적 자기위안 자기도취에서 벗어나 일본과 달리 선진경제대국으로 도약하지 못하는 이 비참한 현실의 원인을 연구 규명해야 한다.
현재 한국의 모든 산업이 모방의 한계에 처해있다.그리고 1989년 역사의 종언을 선언했던 후쿠야마는 2008년 신자유주의도 종언을 선언했다. 신자유주의 원조격인 영미가 좌충우돌하고 있다. 퇴영의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다. 이 지구상에 더이상 모방할 따라 잡을 경제시스템은 없다. 그래서 21세기 신문명을 창신해야 하는 것이다. 더 이상 따라잡기,모방 복사로는 발전할 수가 없다. 돌파구가 절실한 시점이다. 돌파구는 파생금융자본주의를 극복한 새로운 사람중심 경제시스템,남북경협. 한류등 지식문화산업 ,기존산업의 기술고도화와 4차산업혁명이다.그래서 남한도 평화와 경협의 내재적 요인이 있다. 남북경협은 북보다는 남이 더 절실할 수도 있다. .철도연결로 인한 물류이익,수출과 내수의 균형, 북의 자원, 북의 독창적 과학기술 활용등 공동번영의 이익은 상당하다.남북협력시 인프라나 철도보다도 항공우주산업이나 방위산업등 첨단산업이 세계 최강으로 발전할 수 있다.
한국경제는 외형적으로는 G10이 되었고 수출 7위가 되었다.
그러나 민중들에게는 금수저-흙수저이며 조물주위 건물주이며 헬조선이다.
부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부동산 금융등 간접착취가 심화되고 일자리마저 구하기 힘들다. 더 이상 나갈 길이 없다. 그래서 헬조선을 전도시켜 樂조선,사람사는 세상 사람사회로 전변시켜야 한다.
헬조선을 전도시켜 락조선을 만드는 출발점 그시원이 촛불혁명이다.
독일자본주의하면 그 특징이 공동결정법, 복지제도, 공영임대주택, 무상교육등으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이다. 독일은 과학기술이 발전했을 뿐아니라 독자적 경제시스팀을 창출한 것이다.
한국자본주의의 특징은 재벌체제, 정경유착, 민중약탈이다.
재벌들은 정경유착을 통해 세금감면 정책금융등 특혜와 불법과 편법으로 민중을 약탈하여 부를 축적해 왔다.위기시마다 민중약탈이나 국민의 희생으로 위기를 극복해왔다.정경유착은 그 시원이 귀속재산불하였다. 당시 산은 특융으로
대출받은 자금을 가지고 농지개혁으로 탄생한 지가증권을 액면가 10% 가격으로 매집하여 귀속재산을 불하받았다.귀속재산을 불하받은 사람들은 불하금액의 10-15%를 정치자금으로 한민당에게 헌납하였다.
이같은 정경유착 패러다임은 그 폭을 언론 사법부까지 획대하며 70년간 지속되었다.조선일보는 1968년도 차관 4000만달러를 가지고 신문사건물과 코리아나 호텔을 건설했다.
촛불혁명으로 70년간 지속된 정경유착은 드디어 소멸하였다. 국민앞에 재벌들의 흉악하고 비겁하고 무지몽매한 몰골이 드러났다.지식인과 언론인과 관료들이 재벌들에게 추파를 던지고 몸서리치는 매춘을 하고 있다.
이제 촛불혁명으로 민주주의를 창신했다.현재의 수탈적 시장경제를 사람중심 경제로 혁신해야된다는 공감대도 형성되었다.
오늘날 약탈적 시장경제의 본질은 주식 채권 선물 옵션 공매도등 파생금융으로 사회 전체를 금융의 사슬로 엮은 파생금융자본주의이며,서민수탈과 정경유착,갑질과 비리의 온상 재벌, 조물주위 건물주, 금수저-흙수저, 마지막 집세를 준비하고 자살한 송파 3모녀, 임대료 4배인상의 궁중족발,청년취업난,가계부채로 특징지워지고 있으며 한마디로 헬조선으로 규정되고 있다.
노동자와 자영업자,중소기업가의 소득을 재벌,금융자본,건물주가 약탈하는 시스템이다.
사람중심경제는 결국 재벌체제를 민주적 사회적 시장경제시스템으로 ,민중약탈은 복지제도 강화로 전변시키는 것이다. 21세기 신문명 창신의 관점에서 혁신이 있어야 한다. 민주적 사회적 시장경제시스템은 노동자가 대기업 이사와 대표를 선출하는 민주적 지배구조,공영임대주택 확대.무상의료,무상교육, 불로소득 환수(종부세,토지보유세,)에 기반한 기본소득 (사람의 유적생활에 보상하는 소득 ),이상촌건설등이라고 하겠다.또 경제의 금융화를 타파하기 위해 선물 옵션 공매도등 신자유주의 파생금융기제를 반드시 폐기해야 한다.
문재인정부는 사람중심경제를 위해 혁신성장과 소득주도 성장을 내걸고 있다.
그러나 부동산이 억소리내면서 1년에 5억씩 상승한다면 혁신성장과 소득주도 성장은 한 밤의 꿈에 지나지 않는다. 박근혜 정권때 빚을 내서라도 집을 사라는 것이 성장전략이었다. 부동산투기의 배후에는 금융자본과 고위관료 보수정치인등 토건동맹이 있다. 가계부채의 핵심은 부동산대출이다. 결국 주거정책을 소유형 자가정책에서 생활형 공영임대주택으로 대전환하고 모든 지대를 환수하여 기본소득으로 제공할 때만이 혁신성장과 소득주도 성장이 성공할 수 있다.주택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철학의 전환이 요구된다. 주택을 자산패러다임이 아니라 주거 패러다임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주택을 자산으로 보는 관점에 있는 한 투기억제를 위한 위한 다양한 정책은 그 효과가 극히 난망하다. 투기억제,지대에 대한 세금,영세민을 위한 소형 영구임대뿐아니라 중대형 공영임대아파트 200만호를 국가와 국민연금,p2p 자금등으로 투자하여 건설한다면 주택문제도 해결하고 일자리창출도 가능하다.아울러 국가와 국민연금이 선박에 투자하여 저렴한 용선료로 해운사에 대여한다면 조선해운업도 활성화하고 일자리 창출도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청년세대 기본소득등 제한적 기본소득을 제공하여 우회적으로 최저임금을 상승시키면 소상공업자와 노동자와의 갈등대립도 소멸될 것이다.
남북협력의 방도 .....DNIP로 상호변화와 창신
남북은 21세기 신문명창신이란 소명의식아래 다름간이 어울림 사상에 의거 하여 서로 협력해야 한다.동의 논리에 따라 상대를 강제 또는 설득으로 동화시킬려고 할 것이 아니라 즉 적대와 체제경쟁의 관점을 버리고 교류와 혁신으로 상호변화하고 남북 상호간에 새로운 21세기 신문명 창신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남북간에 먼저 깊이 연결된 되돌릴 수 없는 평화(DNIP...deep neworked irrevirsble peace)를 정착시켜야 한다.
DNIP를 정착시킨후에 장기적인 소통과 교류를 통해 인류를 위해 가장 적합한 사회경제시스템이 무엇인가 연구하여 21세기 신문명을 창신하고 점차적 단계적으로 통일을 실현해나가는 것이다.이를 위해서 다음과 같은 원칙과 방도가 필요하다.
1.DNIP를 위해서는 내적 혁신이 외적 협력보다 앞서야 한다.
북한과 경제협력이나 교류협력확대도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내적인 깊은 혁신이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북한의 신문 잡지 방송 서적 문화의 개방 포용 합법화가 시급하다. 북한 문화의 합법화를 통해 자유와 민주주의를 확대심화시키고 문미창신의 나라로 도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한국문화의 폭과 깊이가 강해질 것이다.자연히 출판사업등 문화산업도 융성 발전하여 일자리도 창출될 것이다. 북한 방송의 선동을 염려하는 매국보수진영도 있지만 북한방송이 엉성하고 조악한 콘덴츠를 지양하지 않는다면 자연스럽게 정리될 것이다. 이미 1967년도에 김 수영시인이 라디오 계란 시에서 주장했듯이 북의 방송도 일본의 방송처럼 폐허의 돌조각들보다도 더 값없게 발길에 차이는 인국의 음성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장기적으로는 북의 사회단체와 정당들의 남한내 조직결성 및 활동도 보장해야 한다. .
이러한 개방과 포용은 남한 사회의 발전과 복지향상에 기여할 것이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반공반북의 틀에 가둬서는 안된다.국가보안법이 폐기되어야 한다.매국보수진영은 국가보안법이 대한민국 국민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라고 나발불지만 사실은 강제와 탄압으로 기득권을 유지하겠다는 속셈이고 자유민주주의를 하지않겠다는 선언이다. 동독대비 서독이 자유와 복지가 확충되었기에 동독주민이 서독을 동경하게 된 것이다. 자유와 복지가 국민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이다. 자유와 민주주의 시장경제에서 약동하는 다름이야 말로 역사와 사회발전의 원동력이다.
2.기존의 합의를 빛의 속도로 이행해야 한다.
남북은 7.4공동성명에서 사상 이념 제도의차이를 인정하고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원칙하에서 서로 협력하기로 합의하였다.
또한 판문점선언에서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자주의 원칙을 다시 확인하였고 이미 채택된 선언과 합의를 철저히 이행한다고 합의하였다.
이렇게 볼 때 남북기본합의서,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6.15공동선언 , 10.4선언에서 그동안 서로 합의한 남북군사공동위원회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 ,남북경제교류협력위원회를 조직 운영하고 서해 평화수역, 철도 도로 연결이 시급하다고 하겠다.
먼저 남북군사공동위원회를 조직하여 인적교류, 훈련참관 ,독도수호 남북연합훈련,남북군대 교차주둔을 실시하여 적대관계를 완전히 청산한다. 현실적으로 한반도비핵화는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라 상당한 시일이 소요된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완전한 비핵화까지 15년도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그래서 남북이 1992년 한반도 비핵화선언에서 합의한대로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를 만들어 비핵화가 완료될 때까지 핵무기를 포함한 핵물질을 공동관리해야 한다.
또한 남북경제교류협력위원회를 만들어 개성공단 금강산관광등 그간 해왔던 사업과 합의했던 사업들을 신속히 빛의 속도로 처리해야 한다.
선비핵화 후경제협력은 잘못된 전술이다.이는 북이 비핵화화하지 않으면 몰락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데 북의 몰락을 기대하는 것부터 관점이 잘못되어있고 또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북이 성장발전하고 있지 몰락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비핵화와 경제협력은 동시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4.19직후 언제까지 우리들은 미국놈들의 턱밑만 바라보고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고 있어야 하냐던 김수영시인의 탄식이 반복되고 있다.
촛불혁명으로 민주정부가 탄생했다고 하지만 물론 기본정세가 다르긴하지만 대북관계에 있어서 자주성은 노태우정권때보다 못한 실정이다.
민족자주의 원칙은 말은 쉽지만 실천은 어렵다.
외교적 역량을 발휘하여 기존의 남북합의사항정도는 대북제제 예외로 인정받아야 한다. 북은 남북미 종전선언을 지렛대로 중국을 경악하게 하고 중국의 협조를 유인할 수 있었다. 남도 방위비분담문제, 사드철수문제 ,나아가 미군철수문제까지 지렛대로 활용하는 담대한 전술을 구사해야 한다.
아메리카 패싱도 가능하다는 관점에서 비핵화를 하고 남북중러 협력관계를 모색한다면 미국은 경악할 것이다.
3. 방북허가제에서 방북신고제로 전환되어야 한다.
남북협력은 대중적 협력사업이 되어야 한다.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실패에서 배워야 한다.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교류협력법을 개정하여 대중적 남북협력의 법적 기초를 놓아야 한다. 남북협력이 실정법상 불법이라면 또 대북송금 특검같은 불상사가 야기될 수도 있다. 모든 방북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전환해야 한다. 민간의 광범위한 대중적 협력을 기반으로 정부차원에서도 협력이 이루어져야 한다. 현재 정부는 대북 제재로 인해 시민과 시민사회보다 정책 입지가 협소하다고 할 수 있다. 시민의 힘을 이용하는 담대한 전술이 필요하다. 자유왕래가 되어야겠지만 우선은 DMZ만이라도 평화지대화하여 그안에서라도 남북이 자유롭게 만나고 거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촛불혁명대중이 경제협력의 문제에 있어 아메리카패싱의 입장에 설 때 정부의 입지는 더욱 넓어질 수도 있다. 1997 외환위기 당시 국민들의 금모으기 운동은 정부 당국으로 하여금 초국적 금융자본의 강압적 주장을 무산시키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방북신고제야 말로 DNIP와 대중적 경제협력을 실현할 수 있는 비장의 카드이다.대북제재를 돌파할 수 있는 무기가 방북신고제이다.
통일부가 통일운동을 발전시켜야지 통일운동을 독점하는 기관은 아니다.
김수영시인은 “ 38선은 세계에서 제일높은 빙산의 하나이다.
이 강파른 철판덩어리를 녹이려면 참으로 깊은 사랑의 빛의 조용한 침잠이
필요하다“고 선언한다.모든 죽은 세대의 전통의 약령이 우리의 머리를 짓누르고 현세의 모든 세계사적 모순과 문제점이 우리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DNIP는 강파른 증오와 불신을 녹이는 깊은 사랑의 빛의 조용한 침잠으로 실현된다.평화통일혁명은 시인이 주장하는 조용하고 아름답고 강한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4.비핵화와 비적대화
미국은 완전한 비핵화 CVID,FFVD가 되어야만 제제해제등 비적대화를 할 수 있다고 하고 북한은 먼저 비적대화로 신뢰를 회복한후 동시적 단계적으로 비핵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북은 지금 핵실험동결,핵실험장폐쇄. 미사일발사장 철거등 선제적 주동적 조치를 한후 미국에 종전선언과 제제완화등 비적대화를 요구하고 있다.한국내 보수진영도 선비핵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북핵은 왜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
북핵은 미북간 적대의 산물이요,부시의 선제타격론에 의한 북미제네바합의파괴의 결과물(Bush's bomb)이며,오바마의 북한이 몰락할 때까지 규제하며 기다린다는 전략적 인내정책의 파탄에 연유한다.
선비핵화요구는 북핵에 대한 몰역사적 판단에서 나온 것이다.
간단하게 북핵의 역사성을 고찰해보자
미국은 1958년부터 한국에 핵무기를 배치하기 시작했다. 핵탄두탑재 어니스트 미사일을 배치하고 1959년에는 마타도어 핵탑재 순항미사일대대가 상주하였다. 그리고 히로시마 원폭정도의 폭발위력이 있는 원폭지뢰도 설치하였다.
그런데 1989-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걸프전에서 스마트폭탄의 위력이 확증되자 미국대통령 조지부시는 1991.9.27.일 전세계 모든 전술핵무기와 원폭지뢰를 철수한다고 선언하였다.
이같은 기조하에서 노태우정부는 1991.12.31. 남북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을 합의하였다.당시 조평통위원장 김용순은 북한은 통일이후에도 주한미군의 주둔을 용인할 것이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그리고 1992.5월부터 6차례에 걸쳐 IAEA사찰을 받았다. 그런데 1993.2.22.일 IAEA는 미국의 스파이위성이 1989년 촬영한 사진자료.....원자로 100일동안 가동중지, 연료봉교체,폐기물 저장탱크에 플루토늄 재처리 플랜트 연결작업하는 사진.....를 공개하였고 CIA는 1989년 100일동안 10-16KG의 플루토늄을 추출하였다고 주장하였다.북은 재처리 실험을 한 적은 있으나 98그램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IAEA는 나아가 미국의 분석자료에 의하여 북이 제공한 폐기물 샘플과 플루토늄에 나타난 박자표가 일치하지 않는다고 발표하였다. 미국과 IAEA는 미신고장소 특별사찰을 요구했고 북은 이를 군사시설이라며 거부했다.클린턴은 1993.1.26.일 팀스피리트 훈련을 재개하여 다양한 핵전쟁 시나리오을 가동했다. 북은 이에 항의하여 1993.3.12. NPT탈퇴선언을 하였고 팀스피리트가 끝난후 북은 미국과의 고위급회담에 동의하고서 1993.6.12. NPT 탈퇴 연기를 선언하였다. 북은 이후 흑연원자로 프로그램을 경수형원자로로 대체한다고 제안했다. 협상이 다시 교착되어 1994.3 미국은 UN을 통하여 북을 제재 압박하기 시작했고 북에서 서울 불바다 발언이 나왔다.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에서 1994.6 카터가 북을 방문해 극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핵동결을 조건으로하여 북미간 고위급회담을 하기로 하였고 1994.10.21일 북미 제네바합의가 있었다.북한의 핵개발포기 댓가로 제제 철폐,북미수교, 평화협정,2003년 까지 100메가와트 경수로 2기제공,경수로제공시까지 매년 50만톤 중유공급,흑연감속로 및 영변핵시설 동결(8000개 폐연료봉 냉각연못 상태유지포함)후 경수로제공시 해체 등이었다.이같은 합의에 의해 북은 1994.11.1.일 핵활동동결선언을 했다.
그러나 미국은 1994.11월선거에서 야당인 공화당이 하원을 장악한 소위 깅리치혁명으로 인해 예산편성이 되지않아 클린턴 정부는 합의를 준수하지 못했다.공화당 및 네오콘은 북한 붕괴가 임박한 시점에 왜 돈을 퍼주냐고 비난하였다.당시 북은 1994.7.8.일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인해 고난의 행군등 대혼란기였다.당시 333붕괴론이라하여 빠르면 3일 아니면 3개월 늦어도 3년후면 북한이 붕괴한다고 이구동성이었다. 그러나 미국 네오콘의 기대와 달리 북은 고난의 행군기간(1994-1997,우리식 사회주의을 수호하기 위한 결사전)에도 망하지 않았다.1998.8.31.일 건국 50주년(9.9)을 기념하여 광명성 1호를 발사했다.미정보당국에 의하면 북은 1998년 이 미사일기술을 파기스탄의 우라늄농축기술과 교환했다고 한다.
미국은 여러 가지 전쟁 모의실험과 분석을 통해 1999.10월 페리보고서를 발간공개했다.페리보고서에 의하면 선제적 국부적 공격은 불가능하며 북한은 소멸되거나 붕괴되지 않기 때문에 미국이 의도하는 북한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북한과 관계해야 하며 포용정책을 통해 제반 문제를 일괄타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같은 전략적 기조하에 의해 2000년 김대중 김정일 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이 있었다. 그리고 2000.10.12일 조명록 차수가 워싱턴을 방문하여 김정일 친서를 전달하고 북미공동코뮤니케를 발표했다. 적대관계 종식선언, 평화보장체제를 위한 4자회담, 경제무역정상화, 제네바합의준수, 미사일시험발사유예, 클린턴 대통령 방북을 위한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방북등이 합의되었다. 클린턴은 북을 방문하여 중장거리 미사일 일괄구매등 제반 합의를 마무리하고자 하였으나 새로 당선된 부시의 반대로 무산되었다.부시는 기존의 비확산 포용정책에서 반확산 선제공격으로 전환하였다. 2001.9.11.테러로 인해 미국은 네오콘들이 득세하였다 부시는 2002.1월 연두교서에서 북을 이란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으로 지정하였고 향후 선제공격을 예고 하였다. 미국은 2002년이 돼서야 북이 우라늄농축을 하고있다는 증거를 확보할 수 있었다. 2002.10월16일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방북중 증거를 제시하자 북은 이를 인정하였고 핵무기뿐아니라 더한 것도 가질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였다.합의를 준수하지 않고 상호적대가 심화되자 2002.11 한반도에너지 개발기구(kedo)는 중유지원을 중단하였고 북은 2002.12.12일 IAEA 사찰요원추방, 영변발전소 봉인해제 및 재가동하였다.2003.1.10.일 NPT 탈퇴선언을했다. 그런데 부시는2001.10.7.일 아프간을 침공한데 이어 2003년 3.20일 이라크를 침공하였고 다음차례는 북한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아프간과 이라크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했다.대북정책과 관련해서 정권내부에서도 균열이 심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6자회담을 통한 현상유지 및 관리였다. 2003.8 1차 6자회담이 있었다. 6자회담은 별 성과가 없었다. 그러자 북은 2005.2.10.일 핵무기 보유선언을 했다.2005.5.1.일 영변에서 폐연료봉 8000개 인출을 발표했다. 긴박한 상황에서 2005.9.19.일 4차 6자회담에서 9.19공동성명이 채택되었다.
북은 모든 핵무기와 현존 핵계획을 포기하고 NPT와 IAEA에 복귀하고 미국은 한반도 비핵화와 핵위기 또는 재래식 무기로 북한을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확인한 것이다.남은 200만 킬로와트 대북송전을 약속했다. 이같은 합의는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 크리스토퍼 힐 6자회담 미국 대표 정동영 통일부장관 천영우 6자회담 대표등이 주도했다. 그런데 부시행정부는 분열되어있었다. 미재무부 대니얼 글레이저 테러자금 금융정보 담당 부차관보는 2005.9.30.일 9.19 공동성명의 잉크도 마르기전에 방코델타아시아(BDA)제제로 북의 금융자산 2400만 달러를 동결했다.그리고 존 볼튼등은 제네바합의의 재판이라고 비판했다.힐이 제제를 풀어달라고 요청했으나 글레이저는 불가하다고 했다. 북은 강력 항의했으나 효과가 없었다.6자회담은 BDA로 인해 다시 표류하였다. 북은 2006.7.5.일 대포동2호 미사일 시험발사를 했고 2006.10.9.일 제1차 핵실험을 했다. 2006.10.14.일 유엔은 안보리 1718호 결의로 북한 미사일 및 핵실험 관련 무역거래 중단등 재차 압박했다. 1차 핵실험후 부시행정부의 태도가 선제공격에서 대화와 협상으로 전환되었다. 2007.1.16-18북미 양자가 만나 베를린 회담을 갖게되었고 연이어 2007.2.13. 5차 6자회담서 합의가 되었다.
60일 이내 영변핵시설 폐쇄 봉인 및 불능화 IAEA 요원 복귀, 대북중유제공등의 합의가 있었다.2007.6.25일 21개월만에 BDA 자금 해제가 완료되었다.2007.7.15.일 북은 다시 원자로를 봉인했다. 2007.10.3일 6차 6자회담에서 10.3합의가 채택되었다.모든 핵시설 불능화,핵프로그램 정확하고 완전한 신고 ,중유 100만톤 제공등이 합의되었다.이러한 기조하에서 남북관계도 개선되어 2005년도 개성공단이 가동되었고 2007.10.4.선언이 있었다.
2008.6.26.일 미국은 테러지원국 지정해제를 표명 하였고 적성국 교역법을 종료하겠다고 하였다.이에 상응하여 북은 2008.6.26. 핵신고서를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에 제출하였고 2008.6.27.일 영변원자로 냉각탑을 폭파해체하였다.2008.7.4.일 북은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조치가 아직 발효되지 않았다고 미국에 항의하고 10.3합의 이행을 촉구하였다. 이 와중에 2008.7.11. MB정부는 금강산 관광 중단을 발표하였다.미국의 승인없이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금강산 관광 중단은 미국의 균열상....협상에 반대하는 네오콘의 의도....이 mb정부를 통해 현상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2008.8.26.일 북 외무성은 테러지원국 지정해제 연기가 10.3합의 위반이며 대응조치로 영변핵시설 불능화중단과 원상복구고려를 발표하였다.
2008.9.19. 영변핵시설 원상복구중이라고 발표하였다. 이에 2008.10.11. 미 국무부는 테러지정국 지정해제를 발표하였다.
이같은 상응조치로 북미는 핵시설 2단계 불능화에 착수하였으나 핵신고에 대한 검증방법 문제로 합의는 또 결렬되었다.미국은 미신고 핵시설에 대한 일방적 사찰을 요구했고 북은 군사시설은 사찰에 응할 수 없으며 상호합의에 의한 사찰을 주장했다.북은 현장방문 ,문건확인 ,기술자들과 인터뷰를 허용했으나 시료채취는 거부했다.상호적대관계가 해소되지않아 미세한 검증방법 때문에 협상이 결렬된 것이다.선비핵화 후 관계개선 논리가 전혀 현실에 부합하지 않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2008.12.8.-11 제 6차 6자회담 3차 수석대표회의 회의가 있었으나 끝내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이에 미국은 2008.12.12.일 대북중유지원을 중단하였다.합의는 또 파탄났다. 합의가 파탄된 상황에서 2009.1월 미 오바마행정부가 출범하였다.
오바마 행정부는2008년 발생한 금융위기 수습에 에너지를 집중하고 북에 대해서는 전략적 인내정책을 시행하였다.이는 북이 자체붕괴될 때까지 규제관리하며 기다린다는 정책으로 김정일 건강과 후계문제등 대립으로 북의 급변상태를 유도하여 리비아처럼 북의 몰락을 유도한다는 것이다.
MB의 당선, 남북관계 악화,북미합의 파탄등으로 볼튼같은 네오콘들이 다시 들고 일어나 대화를 강력 반대하였다.
북은 2009년 신년사설에서 강도높은 대남비방을 하고 2009.1.17.일 전면대결태세선언, 1.30일 남북간 정치 군사합의 무효선언, 4.5일 장거리 미사일 시험발사 ,4.25 폐연료봉 8000개 재처리 시작 발표, 5.25 2차 핵실험 ,11.03일 폐연료봉 8000개 재처리 완료선언 ,11.10일 대청해전이 있었다.
2010.1.11. 북은 6자회담 복귀조건으로 제재해제를 요구했고 선평화협정 후 비핵화를 요구했다. 그러나 2010.3.26. 천안함사건, 5.24조치, 11.23 연평도 포격 등 긴장이 고조되었다.북은 2009년도부터 숙청과 후계구도에 들어섰다. 북은 2009년에 화폐개혁을 하여 계획적 공급유통체계를 강화하고 2010년 당 계획재정부장 박남기를 남조선식 시장경제를 도입하려고 했다는 이유로 간첩혐의로 숙청했다. 2010년 김정은을 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임명했다. 북은 2011년 전방위 대화공세를 시작하였으나 남북간의 대결 적대구도는 심화되었다.미국 오바마는 2011.3.17.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함으로써 리비아를 공격했다. 위기감을 느낀 북은 2011.9월 미국 siegfried hecker 교수를 초빙하여 영변의 우라늄농축시설과 원심분리기를 공개했다.2011.12.1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와 오바마 행정부시대에 네오콘들에게 북의 급변사태가 자주 회자되었다. 그것은 북에서 김 정일이 유고되었거나 후계구도를 놓고 내분이 벌어져 쿠데타가 발생해 스스로 몰락할 수 있다는 시나리오 였다.박근혜정부가 2016.2월 개성공단을 철수할 때도 2년안에 북이 망한다는 샤머니즘적 유언비어도 나돌았다. 북한이 곧 망한다는 시나리오는 2013년 장성택 숙청, 2015년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숙청등으로 잦아들었다.2013년 2.12 3차 핵실험을 하였고 2013.4.2.일 영변 원자로 재가동을 발표했다.곧 전쟁이 터질 것 같은 긴박한 상황이었다.불똥은 통합진보당으로 튀었다. 2013.5 통합진보당 130명정도가 참석한 한 회합에서 이석기 의원이 전쟁이 나면 통신 유류 철도 가스등 주요 기간시설을 파괴하고 무기를 탈취해야 한다는 발언을 했다. 이 회합이 빌미가 되어 통합진보당은 해산되었다.그들은 혁명을 한 것이 아니라 시대에 뒤떨어진 낙후한 혁명개그였다.하지만 그 개그는 민주화운동에
막대한 폐해를 초래했다. 2015년부터는 미국 민주당내에서조차 전략적 인내정책에 대한 비판이 나왔다.다시금 국부적 선제공격, 김정은 참수부대등 과격한 언사가 나왔다. 2016.1.6.일 4차 핵실험(수소탄),2016.2.10.일 개성공단 철수 , 2016.9.9. 5차 핵실험(소형화 탄두실험)을 했다. 미국에서는 2017.1월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섰다. 아둔한 펜스,얼치기 볼튼, 미치광이 트럼프,화염과 분노,로켓맨등 과격한 언사가 오고갔다.
2017.7.4.화성 14호 ICBM 발사실험 2017.9.3. 6차 핵실험( ICBM 장착용 수소탄 실험) ,2017.9.15. 일본상공 통과 ICBM 미사일 발사, 2017.11.29.일 화성 15호를 발사하고 지구전역에 대한 핵공격능력을 확보했다고 주장하며 핵무력완성선언을 발표하였다.더이상 핵실험과 미사일시험 발사를 할 필요가 없게되었다.
2017.8월 미들베리 연구소 동아시아 비확산 프로그램 국장인 제프리 루이스는
게임은 끝났다. 북한이 이겼다고 선언했다.제프리 루이스 교수에 의하면 북은 대기권 재진입기술등을 확보하여 미중소와 버금가는 ICBM 기술을 확보했다고 한다,북은 미중러와 함께 4대 군사강국이 된 것이다.
무수한 합의와 파탄,미국내 균열을 통해 상호신뢰와 비적대화 없이 비핵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검증되었다. 이제 북이 핵무력을 완성한 시점에서 핵게임에서 완패한 네오콘의 선비핵화 후제제완화는 하나의 망상이요 허공중에 부서진 메아리일 뿐이다. 네오콘의 반복적으로 짖어대는 소리는 가을에 낙엽떨어지듯 처량하기만 하다. 1994년 북미합의에서 핵개발포기대가로 제제철폐, 북미수교, 평화협정 ,경수로제공,중유제공등이 있었다. 이제 핵포기대가로 미국은 무엇을 줄 것인가?
2018년도부터 기본정세가 역전되었다. 비핵화협상의 주도권은 미국에서 북한으로 넘어갔다. 미국은 모든 패를 다 소진하였고 북은 제재와 경제위기속에서 위기를 극복하고 핵무력을 완성했다. 이제 한미가 북에 대해 포용정책을 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북이 대미대남 포용정책을 구사하고 있다. 이미 북은 1992년 김용순 통일전선부장이 통일이후에 주한미군의 주둔을 용인한다고 발표했다.김 정일 위원장도 수차례 같은 언급을 했다.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선제적 주동적 조치로 핵실험 중지, 미사일발사실험 중지,유해송환, 핵실험장 폐쇄, 미사일발사장 폐쇄등을 하였다. 남에 대해서도 많은 양보를 하고 있고 문대통령의 능라도 대중연설을 허용하는등 광폭적인 대남포용정책을 구사하고 있다. 비적대화를 통한 상호신뢰로 동시적 단계적 조치가 비핵화의 유일한 방도이다. 이미 고난의 행군을 지나 경제가 성장하고 있는 북에 대해서 그 어떠한 제재도 일시적 곤경을 줄 수 있을지언정 결코 무기가 될 수 없다.
5.북미관계와 남북관계
그동안 남북관계는 북미관계에 종속되었다. 남한은 철저하게 미국의 하위파트너로서 역할했다. 그러나 미국이 독재정권을 지원한 사실이 드러나고 촛불혁명으로 정권교체를 하여 민족적 자존감이 고양되고 수출이 미국 중심에서 전세계적으로 다변화되어 자주의식이 고양되고 있다. 북은 고난의 행군을 이겨내고 계획경제를 사회주의 시장경제로 혁신하고 나아가 핵무력을 완성했다.
2018년을 기점으로 비핵화 협상의 주도권이 미국에서 북한으로 넘어갔다.
그래서 이제 남북관계가 북미관계를 선도하는 관계로 되고 있다.
남북정상이 백두산 천지에서 평화와 비핵화를 위해 두 손을 맞잡은 것은 촛불혁명을 주도한 남한 민중과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혁신한 북한 인민이 손을 맞잡은 것이다.
일본은 경악하고 미국은 긴장하고 있다. 남북이 한반도 전쟁위험제거와 우발적 충돌방지를 위해 군사합의서에 서명하고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에서 합의한 군사공동위원회를 가동하기로 하였다.서해분쟁지역을 평화수역으로 선포하여 공동어로를 하고 철도와 도로를 연결하기로 하였다. 파이낸셜 타임즈는 철도도로연결합의에 대해 남북합의는 미국에 대한 저항이라고 하였다. 미국무부는 남북협력은 비핵화와 별개로 진전되면 안된다고 하고 미 대사는 남과 미가 같은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한다. 미재무부는 국내 7개은행에 대북사업에 각별한 주의를 당부했다. 그리고 트럼프는 남북협력은 미국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는 망언을 했다.대한민국은 독립된 주권국가로서 어떤 일을 하든 미국의 승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단지 토론 협의할 뿐이다. 이는 협상의 주도권을 갖지못한 미국의 초조함을 반영한 것이다.경제협력은 UN제재라는 제약이 있어 쉽지않지만 경제협력은 비적대화의 한 계기이지 모든 것은 아니다.
우선은 군사적 정치적 비적대화에 성과를 낼 수 있다. 남북간 군사합의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의 가동, 남북간 정당 사회단체의 동시 합법화 국가보안법폐지,자유왕래,학술 문화교류등이다.남북상호간 서적 음반 신문 방송 통신의 상호개방이야말로 비적대로 가는 지름길이다. 남북간 평화협력관계가 견고해질수록 북미간 비핵화협상도 지난날처럼 파행을 겪지않고 원활하게 진행될 것이다. 남북관계는 DNIP(deep networked irreversible peace)를 지향한다.북미협상은 FFVD와 북미수교를 를 지향한다.DNIP는 FFVD의 선결조건이며 동시에 그 토대이다.
6.군사공동위원회와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
남북은 2018.9.19 한반도 전쟁위험 제거와 우발적 충돌방지를 위해 군사합의서에 서명하고 이를 위해 남북군사공동위원회를 설치 가동하기로 하였다.
군사공동위원회는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에 합의한 것으로 당시 군인사교류 및 정보교환를 하기로 했다. 이제 2018년 9월 남북양정상이 백두산 천지에서 서로가 손을 굳게 움켜쥐고 70년 된 적대관계를 청산하기로 하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고난의 행군등 천신만고를 겪으며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며 끝끝내 스스로 일어서고자하는 불굴의 용기를 보고 또한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자주의 원칙을 확인하고 끊어진 민족의 혈맥을 잇고 공동번영과 자주통일의 미래를 앞당기자고 김정은 위원장과 굳게 약속했다. 문재인대통령은 15만 평양시민앞에서 세계를 향하여 70년 적대를 청산하고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한 평화의 큰 걸음을 내딛었다. 백두산 천지에 두손을 맞잡은 두 정상은 8000만겨레에게는 전율과 감격의 소용돌이이었고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를 놀라게하고 일본을 경악 멘붕시키는 새로운 전설을 만들었다.
군통수권자가 두손을 잡고 70년된 적대관계를 청산하기로 했기에
우리 군대는 대결적인 분단국가의 군대가 아니라 민족군대의 비전을 갖고 활동해야 한다.이제 우리가 지켜야 할 선은 NLL이 아니라 압록강과 독도이다. 동족상잔으로 피흘리며 NLL을 사수할 것이 아니라 남북이 힘을 합쳐 한반도와 독도를 사수해야 한다. 군사공동위원회의 지휘아래 남북간에 인적교류, 군사훈련 상호 참관, ,독도수호 남북연합훈련을 실시하고 무엇보다도 교차주둔을 실시하여 적대관계를 완전히 청산해야 한다. 남한의 1개연대(협의에 따라 미군 포함 가능 )가 북에 주둔하여 압록강을 지키고 북의 1개연대가 남해와 독도를 사수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전문가에 따르면 한반도 비핵화는 북미합의가 되더라도 완전한 비핵화까지 15년정도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그래서 이미 1992년 비핵화공동선언에서 합의한 바 있는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를 설치 가동하여 핵무기가 완전히 폐기될 때까지 핵무기, 핵물질을 공동으로 관리해야 한다.
군사공동위원회를 통한 교차주둔,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를 통한 핵무기공동관리야 말로 비핵화와 평화통일로 가는 지름길이다.
7.남북관계와 국가보안법
2018.10.4. 10.4선언 11돌 기념행사차 방북했던 이해찬 더민주당 대표가 향후 평화체제가 되려면 국가보안법을 어떻게 할지 논의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에 대해 자유한국당 김영우의원은 해도 해도 너무한 조공외교니,북한지도부와 손잡고 사회주의 혁명이라도 하자는 건가?하면서 비판을 했고 이에 이해찬대표는 대립대결구도서 평화공존구도로 넘어가기 때문에 이제는 그에 맞는 제도나 법률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해명했고 북미간 평화협정을 맺어야 제도개선을 얘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제도개선을 먼저 하자고하면 본말이 전도되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남북관계가 먼저 개선되어야 국가보안법을 재검토할 수 있다는 것이다.이같은 논쟁은 우리 정치수준의 이론적 천박함과 철학적 기초의 부재를 말해주는 것이다. .
국가가보안법은 일제시대 치안유지법이 이름만 바뀐 것이다.
일본은 패전후 치안유지법이 폐지되었고 이로인해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고도성장에 의하여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적군파,혁명좌파, 연합적군등 급진좌파가 스스로 몰락 정리되었다.
반면 한국은 일본 군국주의에 협력한 친일파들이 청산되지않고
권력과 경제를 틀어쥐어 치안유지법 체제로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민중을 억압하고 있다.이로인해 자유와 민주주의가 실현되지 못해 한국경제가 선진경제대국으로 도약하지 못하는 한 원인이 되고 있다. 선진경제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창의와 공정이 필수적인데 국가보안법이란 족쇄가 창의와 공정을 질식시키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국가이자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공화국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자유는 무조건적 무제약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매국보수진영은 반공반북 민중배제의 국가보안법체제를 자유민주주의체제라고 강변하여 이를 사수하자고 한다. 그들은 자유를 파괴하고 민주주의를 유린하는 국가보안법체제를 자유민주주의라고 호도한다. 매국보수진영의 허위담론에 더 이상 놀아나서도 방관해서도 안된다.
국가보안법으로 인해 무고한 인사들이 간첩으로 몰려 살해되었고 많은 민주인사들이 억울한 옥살이를 했으며 합법정당인 통합진보당마저 종북의 굴레를 씌워 사법농단으로 해산했다.
자유민주주의는 사상의 자유를 기본으로 한다.
그래서 자유민주주의는 국가보안법폐지로부터 비로서 시작된다.
한국은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를 대부르조아가 독점하는 자유제한 민주주의이다.
자유민주주의는 국가보안법이나 반공반북의 틀안에는 결코 존재할 수가 없다. 남북관계가 개선되고 평화협정이 체결되어야 국가보안법 폐지를 고려한다는 것은 민주화운동의 자기기만이다.
그간 한국 민주화운동진영은 자유에 대한 철학부재로 인해
자신들도 모르게 대중의 지역감정 고착화, 반공의식강화, 신자유주의강화를 해왔다. 그들은 양김분열에 대해 ,김 대중씨의 민주진영 분열과 지역분할구도에 의한 4파전 필승론에 비판적 지지를 함으로써 지역감정을 결정적으로 고착화하였다. 그리고 민주화운동과정에서 획득한 국민적 권위를 가지고 매국보수진영에 의해 공산주의로 매도될 때마다 우리는 공산주의가 아니다라는 식으로 즉자적으로 대응하여 매국보수진영보다 백배 천배 강하게 반공반북의식을 대중적으로 강화시켜왔다.그리고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민주와 복지보다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민주화정책이라고 실시하여 양극화와 고용불안을 초래하였다.그래서 도탄에 빠진 민중은 민주화진영에 염증을 느꼈고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과정에서 있었듯이 퇴영적인 이집트의 고기냄비를 갈망하게 되었다.이로인해 박정희신드럼이란 허상을 불러일으켜 MB와 박근혜정권등 반동적 보수정권을 출현시키는 한 원인이 되었다. 깊은 철학적 반성이 요구된다. 이번에 이해찬 대표가 남북관계가 개선되고 평화협정이 체결되어야만 국보법 폐지를 고려할 수 있다는 발언도 결국은 반공반북의식을 강화시키는 반자유민주주의적 발언이다.
북한 노동당의 남한내 활동까지 민주주의적 질서하에 조건없이 보장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이다.서독같은 경우 사회민주당 빌리브란트의 동방정책에 의하여 동독 방송 및 언론, 동독공산당의 서독지부 활동까지 보장했다.
이처럼 포용정책은 내적인 민주개혁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김수영시인이 종북좌파라서 김일성만세라는 시를 지은 것이 아니다.
그만큼 자유에 대한 깊은 성찰과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인은 적색테러와 백색테러가 난무하는 생사가 경각에 달린 포로수용소 생활에서 시인의 말대로 세계사적 가치가 있는 자유를 죽음의 공포속에서 온몸으로 체득하였다.
필자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조사받을 때 아침이면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저들의 워카발소리,문을 여는 철문소리등 공포속에서 자유를 체득한 적이 있다.
김 수영시인의 온몸으로 체득한 자유에서 김일성만세라는 시와 라디오계란 시가 창작되었다.
김일성만세 (1960.10.6.)
김 일성만세
한국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 밖에
김 일성만세
한국정치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나눈 잠이 깰 수 밖에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김 일성 만세를 주장하는 정치세력을 인정하는 것이 한국 자유의 출발이 된다.한국 자유민주주의의 시원이 된다. 북한내 모든 사상과 단체가 남한에서 자유롭게 선전되고 활동할 수 있을 때 자유는 비로서 존재하게 된다.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더욱 발전한다. 국가보안법 철폐야 말로 자유민주주의의 시원이 되는 것이다. 당시 속물들은 요즘도 그렇지만 이만하면 언론자유가 있어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고 예술창작에도 장애가 없다고 주장하였는데 김 수영은 창작 자유의 조건이란 산문에서 “적어도 언론 자유에 있어서는 이만하면 이란 중간사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고 역설한다. 이만하면이란 중간사를 허용하는 순간 사람들은 내적 자기 검열의 덫에 걸려들게 된다. 인간의 모든 실천과 창작활동은 압제의 그림자를 갖을 수 밖에 없다.이만하면이란 중간사는 스스로 자유의 한도를 설정하여 고개를 들지않고 체제에 순응하면 무방하지만 고개를 들어 체제에 반대하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목이 잘리는 것이다. 자유는 이만하면의 양적인 문제가 아니라 유무의 문제이며 모든 것이며 무조건적이어야 한다.
분단체제와 대립하는 자유 북한과 대립하는 자유,사회주의와 대립하는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자유를 갈구하던 김 지하 시인의 비극이 여기에 있다. 시인이 자신의 사유지평을 생명성, 여성성, 전통성까지 확대했지만 시인의 자유가 분단체제와 대립하는 제한적 자유였기에 그 치열함을 상실하고 반동화되기에 이른 것이다.
자유가 모든 것일 때,모든 것이 자유롭게 드러날 때 진리가 창출되고 문화와 미가 창신되고 혁명적 창조력이 넘쳐난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근원적으로 부정하는 국가보안법체제를 자유민주주의로 포장하여 이를 수호한다는 매국보수진영의 기만적 궤변은 너무나도 역겁다.그러나 문제는 매국보수진영의 통치담론에 조종되는 민주화진영의 즉자적 대응이다. 이러한 허위담론의 포장을 뜯어내고 그 허구성을 대중적으로 폭로하고 사상의 관제고지를 장악하는 것은 대중정치투쟁에 있어서 사활이 걸린 문제인데 민주화운동진영은 그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현실의 민중은 자유민주주의 과잉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결핍에 의해 고통받고 있다.자유민주주의는 타도대상이 아니라 쟁취대상이다. 그런데 다분히 관념적인 진보인사들은 다른 대안을 제시하지도 못하면서 자유민주주의를 폄하하고 이에 대한 적극적 대처를 기피한다. 국가보안법이란 족쇄에 갇힌 자유를 두고 북한을 포용한다는 민주화운동진영의 햇볕정책은 하나의 자기기만이며 한계가 분명하고 정권의 이해타산에 의해 제약될 수 밖에 없다.
지난시기 김 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햇볕정책이 정권교체에 따라 무산된 것은 내적 자유의 토대없이 외적 포용정책만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자유가 국시가 되어도 부끄러운데 반공이 국시라니 역사와 민족앞에 너무나도 수치스럽다. 자유는 결코 국가가 보장해 줄 수 없다. 국가가 권장하는 자유, 국가가 보장하는 자유는 자유의 모래성이다.이는 자유를 황제가 보장한다는 자유제국처럼 황당한 형용모순이다. 자유는 오직 민중속에 스스로 자리잡아야 한다.
자유가 민중적 지반속에 깊숙이 뿌리박을 때 국가보안법은 무너질 것이다. 방탄의 스피치 유어셀프처럼 세종대왕의 한글창제처럼 니르고자 할 바를 니르자.두려움없이 니르자. 오직 그것만이 국가보안법을 없앨 수 있다.
국가보안법이 자유를 수호한다는 매국보수의 기만적 궤변에 자유론을 집필한 밀은...밀은 그것이 설사 진리가 아닐지라도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진리를 더욱 생생하고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다고 한다. ..... 저승에서 경악하고 김 수영시인은 60년이 지난 지금에도 김 일성만세라는 시의 유용함에 놀라고 있다.
< 라디오 계 ><1967. 12. 5>
6이 KBS 제2방송
7이 동 제1방송
그 사이에 시시한 주파가 있고
8의 조금 전에 동아방송이 있고
8.5가 KY인가 보다
그리고 10.5는 몸서리치이는 그것
이 몇 개의 판테온의 기둥 사이에
뒹굴고 있는 폐허의 돌조각들보다도
더 값없게 발길에 차이는 인국(隣國)의 음성
ㅡ물론 낭랑한 일본 말들이다
이것을 요즘은 안 듣는다
시시한 라디오 소리라 더 시시한 것이
여기서는 판을 치니까 그렇게 됐는지 모른다
더 시시한 우리네 방송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지금같이 HIFI가 나오지 않았을 때
비참한 일들이 라디오 소리보다도 더 발광을 쳤을 때
그때는 인국 방송이 들리지 않아서
그들의 달콤한 억양이 금덩어리 같았다
그 금덩어리 같던 소리를 지금은 안 듣는다
참 이상하다
이 이상한 일을 놓고 나는 저녁상을
물리고 나서 한참이나 생각해본다
지금은 너무나 뚜렷한 입체음을 통해서
들어오는 이북 방송이 불온 방송이
아니 되는 날이 오면
그때는 지금 일본 말 방송을 안 듣듯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무 미련도 없이
회한도 없이 안 듣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써도 내가 반공산주의자가
아니 되기 위해서는 그날까지 이 엉성한
조악한 방송들이 어떻게 돼야 하고
어떻게 될 것이다
먼저 어떻게 돼야 하고 어떻게 될 것이다
이런 극도의 낙천주의를 저녁 밥상을
물리고 나서 해본다
ㅡ아아 배가 부르다
배가 부른 탓이다
시인은 일본방송과 북한방송을 대비하고 있다.
현실의 비참한 일들이 라디오소리보다 더 발광을 쳤을 때는
광주민주항쟁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현실은 계엄군이 무차별 학살로 발광치는데 신문 방송 라디오는 언론통제로 인해 평온하기만 했다. 이간은 상황에선 사람들은 혹시하면서 인국방송인 일본방송을 듣게된다. 잘들리진 않지만 그 한마디가 금덩어리같다. 그런데 지금은 일본방송이 판테온 신전의 기둥 사이에 뒹굴고 있는 폐허의 돌조각들보다도 더 값없게 발길에 차이는 인국(隣國)의 음성이 되고 말았다.시시한 생각이 들어 듣지도 않는다.
북한 방송도 마찬가지다. 북한방송이 지금은 불온방송이지만 개방되어 합법화되면 지금은 너무나 뚜렷한 입체음을 통해서 몸서리치며 들려오는 이북 방송이 불온 방송이 아니 되는 날이 오면 그때는 지금 일본 방송을 안 듣듯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무 미련도 없이 회한도 없이 안 듣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라고 한다. 물론 시인은 북한 방송 콘덴츠가 엉성하고 조악함을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자유를 위해 개방되고 합법화되어야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북한이 어떻게 돼야한다는 것은 북한에 촉구하는 것이고 될 것이다라는 것은 개혁에 대한 희망이다. 그럼에도 북이 콘덴츠를 지양하지 않는다면 북한 방송은 반공반북주의자들을 오히려 양산할 것이다라고 경고하고 있다.
국가보안법은 자유의 원리나 남북관계발전을 위해서도 자유민주주의 출발을 위해서도 시급히 철폐되어야 한다.남북관계개선후 국가보안법철폐 운운은 자유의 기본원리에 맞지않는다.
자유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북의 방송 신문 잡지 서적 통신이 개방되어야 한다.
그로인해 한국사회가 문미창신의 나라로 빛나고
그것을 통해 남북간 깊이 연결된 되돌리 수 없는 평화 DNIP(deep neworked irreversible peace)를 실현할 수 있다. 그러한 내적 자유의 토대위에서만 남북간 경제협력등 제반협력이 지속적으로 성장발전할 수 있다.
4. 2018.9.19. 평양선언의 새 전설
남북정상이 평양 능라도 5.1경기장에서 15만 평양시민앞에서 대중연설을 하였다. 두 정상은 비핵평화 공동번영 자주통일의 새 시대를 선포하였다.
두 정상의 연설은 분단과 대결 적대의 시대에 종언을 선포하고
비핵평화와 교류협력 자주통일의 새 시대를 선포한 것이다.
평양시민에게 있어서 두 정상의 연설은 지난 1945년 10.14일 7만명이 운집한 김일성장군 환영 평양시민대회에서 김 일성 주석의 대중연설......“ 힘있는 사람은 힘으로,지식있는 자는 지식으로, 돈 있는 자는 돈으로 새 민주조선 건설을 위해 나서자”..........를 능가하는 민족사적 새로운 전설의 시작이다.
남북정상이 능라도 경기장 15만 시민앞과 백두산 천지에서 두 손을 꽉 잡고 치켜올린 하나된 모습은 새로운 이정표로서 역사의 화폭이며 이 설주 여사가 말한대로 새로운 전설이다.
그것은 남에서는 6월항쟁이후 근 30년에 이르는 민주화투쟁을 결집한 촛불혁명으로 매국보수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정부를 수립한 민중과 북은 1994년이후 근 30여년에 이르는 동안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혁신해온 인민이 두정상과 함께 천지주위에 결집한 것이다.
그래서 두 정상이 손을 맞잡은 것은 8000만겨레가 손을 맞잡은 것이다.
그래서 전설이다. 8000만 겨레에게는 전율과 감격이며 미국에게는 긴장을 ,일본에게는 경악을 안겨주었다.일본 언론 요미우리 신문은 백두산은 고 김일성주석이 파르티잔 투쟁으로 항일투쟁을 했던 거점으로 혁명의 성지로서 김왕조의 세습독재의 선전에 이용되고 있는데 문씨의 방문은 파문을 일으킬 것이라고 폄하하고 있다.대통령을 문씨로 표현한 것도 황당하지만 이같은 폄하는 일본의 김일성트라우마를 반영한 것이다.
일본에게는 이순신투라우마와 함께 김일성투라우마가 있다.
일본 최고의 장군으로 숭앙받는 히데요시의 정명가도의 야심이 이 순신장군에 의해 좌절되었다.대륙침략의 야심이 좌절된 것에 일본인들은 가슴에 한과 원한으로 맺혀 이순신 트라우마로 남았다. 1910.8.29.일 경술국치일에 통감이였던 테라우치는 히데요시의 장수였던 고바야카와 가토 기요마사,고니시 유키나가가 이 세상에 있었더라면 오늘밤의 달을 어떤 기분으로 봤을꼬라며 소감을 피력한다.이는 일본인들에게 이순신에 대한 깊은 트라우마가 내재함을 시사한다.일본은 이순신장군의 대장기인 수자기만 보아도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일본 잡지 만조보는 “그것보라니까 하며 사이고...최초의 정한론자.....는 염라대왕 상대로 술잔치벌여”라고 기사를 내보냈다.일본인들의 조선침략과 대륙침략의 야욕은 그 역사적 뿌리가 깊은 것이다.그러나 500년 내려온 그 야욕이 제 2의 정명가도 즉 중국과 소련등 대륙 침략의 야욕이 만주와 동북의 조선인 독립군 부대의 덫에 걸려 다시금 좌절되었다. 1909년 안 중근의사에 의해 일본 근세 최고의 정략가로 추앙받는 이토오 히로부미가 하얼빈에서 저격되었고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등 일본군 대부대가 전멸되었다. 이에 일본은 1931년 만주를 침략해 1932년 만주국을 수립하고 소위 피바다로 알려진 조선인 25,000명 학살등 각종 학살로 조선인과 유격대를 토벌하였으나 끝내 그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1933.7월에는 일본육사를 졸업하고 일본군을 탈출해 신흥무관학교로 간 지청천 장군이 한중연합군을 이끌고 대전자령에서 일본 이즈카부대를 전멸시키켰다. 이후 모든 유격대가 소멸되었다고 착각한 일본은 1936년부터 조선인 만주이민을 장려하였다. 친일파 박정희도 이같은 이민정책에 호응하여 1940년에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김창룡도 관동군 헌병보조원이 되었다. 그런데 1937년6.4일 동북항일연군....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반제 국제통일전선노선은 1936.7.23.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국 드미트로프의 통일전선 촉구에 의한 것이었다..... 제 1군 6사 사단장인 김 일성부대가 국내진공작전으로 보천보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일본은 경악하였다. 이후 일본은 노조에 쇼토구 장군을 책임자.....그 앞잡이로 한국인 김석원대좌가 있었다.김 석원은 그래도 나중에 민족앞에 죄를 지었다고 사죄했다. .... 로 하는 김일성특별체포대까지 만들어 김일성을 추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김일성부대가 일본군의추격과 추위와눈등 자연재해와 사투한 1938.12-1939.3 100일간을 고난의 행군이라고 한다. 1940.3.25.일 김 일성부대는 자신들을 추격해온 150명으로 구성된 마에다 다카시 부대와 전투를 벌여 일본군 58명, 군무원 17명을 사살하고 13명을 포로로 잡아 다카시 부대를 전멸시켰다.
북에서는 보천보전투를 2차대전사상 가장 위대한 전투라고 과장하지만
보천보전투는 피델 카스트로의 몬카다 병영 공격보다는 의미가 크다고 브루스 커밍스도 인정하고 있다.어떻든 유격대의 수렁에 빠진 일본은 대륙진출을 포기하고 남태평양으로 방향을 틀어 북수남진정책으로 진주만 공격을 하게 되었다.
일본역사학자 이에나가 사부로 (家永三郞)는 태평양전쟁이라는 책에서 일본제국군대는 만주에서 게릴라수렁에 빠져 최장기간 전투를 하였고 결국 중국본토장악이나 소련침공을 포기하고 남진하여 진주만공격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브루스 커밍스, 김정일코드, 남성욱역, 따뜻한손,P44)
이로인해 일본인은 이순신 트라우마와 함께 김 일성트라우마를 갖게되었다.
만주에서 1937-1940에 있었던 강렬한 유격대투쟁으로 인해 1937.7.7일 시작한 중일전쟁이 ....당시 일본은 속전속결을 시도했으나....배후가 불안해 정규군 중심인 관동군을 상해 남경전에 투입하지 못했고 상해 남경전은 후비병중심으로 편성돼 전쟁이 장기화 교착되었고 약탈 강간등 군기문란마저 심각했다. 이로인해 일본은 독일이 소련침공시 소련을 협공하지 못했다. 스탈린은 대러시아 국수주의입장에서 1931.9.18.일 일본의 만주침략을 용인하고 1931.12.21.일 일소불가침조약조약 체결을 제안한 바있었다. 이후 일본과 은밀한 물밑거래를 통해 코민테른에서 한국 혁명가숙청,독립군 후방기지인 사할린 20만 조선인 카자흐수탄으로 격리,김일성부대를 포함하여 유격대 항일투쟁 자제권고등으로 일본과 1941.4.13.일 일소 중립조약을 맺을 수 있었다.이를 통해 소련은 1941. 6.22일 시작된 독소전쟁에서 독일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이후 일본은 1941.12.8.일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을 개시하게 된다.
당시 만몽은 일본의 생명선이니 만몽의 옥토를 차지하자는 군부의 주장에
일본인들은 현혹되었고 지식인이나 신문논단이나 심지어 무산계급의 당마저
이같은 비열한 주장에 눈을 감았다. 소위 지식인이라는 법관들마저 당시 세계역사상 유례없는 만행이자 가장 비열한 야만적 범죄를 자행한 명성왕후 시해범 48명 전원을 무죄,면소판결하였다.일본은 청일 러일전쟁의 명분으로 문명의 이름으로 야만과 싸운다고 주장했는데 실은 일본자체가 포장된 야만이었다.
만주에서 한국독립 무장투쟁이 2차 세계대전의 방향을 바꾼 것처럼 8000만 민중은 남북 두정상과 함께 동북아 평화체제란 새 역사를 구축하고 나아가 세계적인 비핵평화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이는 일본이 신동아질서란 미명하에 참략과 약탈에 기반하여 아시아 패권을 노린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끝으로 다름같이 어울림 사상이 있는 주역의 화택규괘의 구절을 통해 오늘의 남북관계를 성찰해보자
天地睽而其事同也(천지규이기사동야) 천지가 다르나 그 하는 일은 같으며,
男女睽而其志通也(남녀규이기지통야)남녀가 다르나 그 뜻은 통하며,
萬物睽而其事類也(만물규이기사류야) : 만물이 다르나 하는 일은 유사하다.
睽之時用大矣哉(규지시용대의재) : 규의 때를 씀이 위대하도다.
象曰(상왈) : 상에 이르기를
上火下澤睽(상화하택규) 불은 위로 올라가고 못의 물은 아래로 흐르니 다르다.
君子以同而異(군자이동이이) : 군자는 다름같이 어울림을 추구한다.
上九(상구) : 상구는
睽孤(규고) : 다르니 외롭다.
見豕負塗(견시부도) : 진흙을 뒤집어쓴 돼지나
載鬼一車(재귀일거) : 수레에 가득찬 귀신처럼 보인다.
先張之弧(선장지호) : 먼저 활을 당기다가
後說之弧(후열지호) : 뒤에는 활을 놓는다.
匪寇婚媾(비구혼구) :도적이 아니라 혼인을 하자는 것이니
往遇雨則吉(왕우우칙길) : 가는 길에 비를 만나니 길하리라.
象曰(상왈) : 상에 이르기를
遇雨之吉(우우지길) : 비를 만나 길하다는 것은
群疑亡也(군의망야) : 모든 의심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오늘날 남북관계도 이와 같다. 역경의 통찰은 놀랍다. 서로가 귀축으로 보여 죽이려고 활도 당겼지만 모든 의혹과 의심이 사라지니 적도가 아니다. 사실은 혼인을 하자는 것이다. 팽팽히 당겨온 활을 내려놓고 다름과 어울림으로 결합할 방도,결혼할 방도 ,평화와 통일을 이룩할 방도를 생각하는 것이다. 모든 의심을 씻어줄 비를 어디서 만날 수 있을 까?
일찍이 신동엽 시인이 노래하지 않았던가
모든 허울을 벗고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 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앞에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 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5.북미회담결렬과 대응방안 ......시민주도 남북경제혁력
2019.2.28. 북미회담이 결렬되었다.
미국의 비건과 북한의 김혁철팀이 합의문을 작성했으나 회담은 결렬되었다.
북은 이미 핵실험장폐쇄, 핵실험동결, 미사일실험동결,유해송환등 선의로 주동적 조치를 취했으나 미국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남한의 경제협력에 대해 속도조절론등 압박을 가하였다. 북한과 중국은 기본적으로 동시적 단계적 비핵화노선에 의해 움직이고 있고 미국은 선비핵화 후제제완화의 입장에 있다. 이러한 대립지점이 모처럼 합의를 보는 것 같았으나 결국 무산되었다.결렬된 원인은 미국내 코언청문회,러시아특검등 트럼프의 정치적 위기 그리고 볼튼등 강경파의 입지강화이다.미국민은 기본적으로 제제강화로 북이 협상장에 나왔다고 착각하고 있으며 북의 선의적 주동적 조치를 굴복으로 오해하고 제제강화가 북의 파멸로 귀결된다는 환상을 갖고 있다. 결과적으로 볼 때 북의 선의적 선제적 주동적 조치는 제제강화론자에게 환상과 착각을 강화하는 전술적 오류로 판명되었다.
결렬원인도 트럼프와 폼페이오의 말이 약간 차이가 있다. 드럼프는 영변으로는 부족하고 영변 플러스 알파를 해야 한다는 것이고 폼페이오는 영변 일부를 폐기하면서 전면적 제제완화를 주장했다고 한다. 볼튼의 빅딜설명에 의하면 북의 완전한 비핵화,생화학무기,미사일등 대량살상무기 폐기를 제안했다고 한다. 이는 북의 무장해제를 주장한 것으로 회담을 결렬시키기위한 야바위 짓이라고 하겠다. 북의 설명은 오히려 일관성이 있다. 영변 핵시설을 미국입회하에 미북 기술자들이 공동으로 불가역적 폐쇄를 하고 유엔제제 중 5가지 그 중에서 민수부분 제제완화를 주장했다고 한다. 결국 핵협상은 다단계적 비핵화와 다단계적 제제 완화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한편 남한은 실제적으로는 가장 절박한 당사자인데도 실천이나 주체의 관점이 아니라 객체나 관조의 관점을 ,중재자적 방관자적 관점을 갖고 있다. 중재자적 관점이 아니라 당사자적 절박한 실천이 , 분단적 관점이 아니라 민족적 관점이 요구된다.
분단적 대결적 관점에서 일부 보수파는 남한의 핵무장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핵무장보다는 남북 군사공동위원회와 핵통제공동위원회에 의해 비핵화때까지 북핵에 대한 남북공동관리가 잠정적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남북 교차주둔으로 분단적 적대를 완전히 청산해야 한다.
남북관계 개선은 유엔제제하의 정세에서 정부의 경제협력보다는 정치사회적 협력이 우선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국가보안법이 철폐되어야 한다. 그리고 방북허가제가 방북신고제로 전환되어야 한다.이산가족은 자유왕래가 허용되어야 한다. 군사는 교차주둔,핵은 공동관리가 되어야 한다.유엔제제하에서 남북경제협력은 정부나 기업보다는 시민주도 남북경제협력이 되어야 한다.
1997년 외환위기당시 미국과 초국적금융자본에 의해 정부와 기업이 심한 압박을 받을 때 시민들이 금모으기 운동으로 초국적금융자본에게 일격을 가하고 외환위기의 활로를 개척한 바있다. 시민주도 남북경제협력을 위해서는 국가보안법폐지와 방북신고제가 전제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