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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세계 문화유산 조선왕조 영월 장릉 이야기입니다.
17세에 삼촌 손에 비참한 죽음을 당한 단종의 장릉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에 있습니다.
장릉은 조선 6대 단종의 단릉입니다.
영월군청 문화관광 해설사에게 장릉과 청령포해설사를 예약하실 수 있습니다.
강원도 영월군 소재로 문화재청이 아닌 영월군청에서 관할합니다.
일반적인 조선왕릉과 다르게 단종의 충신들을 위한 건조물이 있는 게 특이합니다.
단종이야기
단종은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아들로 1441년에 경복궁 자선당에서 태어났으나, 태어난 다음날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세종의 후궁 혜빈 양씨의 손에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1448년 왕세손에 책봉되었고 아버지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세자가 되었으며, 1452년 문종이 세상을 떠나자 12세의 나이로 경복궁 근정문에서 왕위에 올랐습니다.
당시 수렴청정을 할 대비(大妃)가 없어 고명대신 김종서 등이 단종을 대신하여 국정을 운영하였습니다.
그러나 숙부 수양대군이 불안정한 왕권을 되찾는다는 명분으로 1453년에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조정을 장악하였고, 이후 2년 뒤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었습니다.
1456년 성삼문, 박팽년 등 신하들이 단종 복위 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습니다. 이후 송현수(단종의 장인) 등도 단종 복위를 계획하였으나 발각되어 실패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단종은 1457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6월 22일 창덕궁을 출발하여 28일 영월 청령포에 유배되었습니다. 그 해 여름 홍수를 피하기 위해 관풍헌으로 옮기게 됩니다.
《숙종실록》에는 의금부 도사 왕방연이 단종을 찾아가 차마 아무 말도 못하자, 그를 모시고 있던 자가 그를 해하였다고 합니다. 교살당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단종 연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441년 탄생하셨고
1452년 즉위
1453년 계유정난이 일어났고
1455년 세조가 즉위하면서 상왕으로 물러났습니다.
1456년 사육신 사건이 일어났고
1457년 노산군으로 강등
6월22일 출발à6/28일 청령포 도착하고
여름 홍수로 영월관아 관풍헌으로 옮기게 됩니다.
10월21일 금성대군 사사되고 단종은 서인으로 각하됩니다.
10월24일 승하하셨습니다.
청령포
영월군 남면 광천리 남한강 상류에 위치한 단종의 유배지로,
1457년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첨지중추원사어득해가 거느리는 군졸 50인의 호위를 받으며 원주, 주천을 거쳐 이곳 청령포에 유배되었습니다.
청령포는 동, 남, 북 삼면이 물로 둘러싸이고 서쪽으로는 육육봉이라 불리는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어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밖으로 출입할 수 없는 마치 섬과 같은 곳입니다.
단종은 이 적막한 곳에서 외부와 두절된 유배생활을 했으며,
당시에는 이곳에 거처할 수 있는 집이 있어 호장 엄흥도는
남몰래 밤이면 이곳을 찾아 문안을 드렸다고 전합니다.
그 해 뜻밖의 큰 홍수로 강물이 범람하여 청령포가 물에
잠기게 되니 단종은 영월 동헌의 객사인 관풍헌으로 처소를 옮겼습니다.
금표비
Geumpyobi
금표비는 단묘재본부시유지비 북쪽에 있으며, 앞면에는「淸泠浦 禁標」라고 쓰여 있고,
뒷면에는 동서로 300척 남북으로 490척과 이후에 진흙이 쌓여 생기는 곳도 또한 금지하는데 해당된다. 라고 쓰여 있으며
측면에는「崇禎九十九年』이라고 음각되어 있습니다.
단묘재본부시유지비
『단묘재본부시유지비』는 1763년 세워진 것으로 총 높이 162cm 크기의
오석으로 제작되었는데, 앞면에는 단종이 이곳에 계실 때의 옛터이다.)」라는 글이 영조대왕의 친필로 음각되어 있고,
그 뒷면에는 영조 39년 계미년 가을 울면서 받들어 쓰고, 어명에 의하여 원주감영에서 세웠다. 지명은 청령포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단종어소
단종어소는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따라 기와집으로 그 당시의 모습을 재현했습니다.
어소에는 당시 단종이 머물던 본 채와 궁녀 및 관노들이 기거하던 행랑채가 있으며 밀납인형으로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소 담장 안에는 『단묘재본부시유지비』가 위치해 있습니다.
청령포 수림지
산림청 천년의 숲
영월군 남면 광천리 산67-1 일원 청령포에 위치한 이 수림지는 수십 년에서 수백 년생의 거송들이 들어 찬 수림지로 단종의 유배처를 중심으로 주위에 울창한 송림을 이루고 있어 2004년 산림청 천년의 숲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관음송
국가지정 천연기념물 제349호
청령포 수림지에 위치하고 있는 소나무로 단종 유배시의 설화를
간직하고 있으며 1988년 천연기념물 제34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단종이 유배생활을 할 때 두 갈래로 갈라진 이 소나무에 걸터앉아
쉬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또한 단종의 유배 당시 모습을 보았으며(觀), 때로는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다(音)는 뜻에서 관음송 (觀音松)이라 불리어 왔습니다.
소나무 크기는 높이 30m, 둘레 5m로 지상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동, 서로 비스듬히 자랐습니다. 수령은 600년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단종 유배시의 수령을 약 60년생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망향탑
청령포 뒷산 육육봉(六六峯)과 노산대(魯山臺)사이 층암절벽 위에 있는 탑으로 단종이 유배생활을 할 때 자신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근심 속에서도 한양에 두고 온 왕비 송씨를 생각하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막돌을 주워 쌓아 올렸다는 탑으로 단종이 남긴 유일한 유적입니다.
노산대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청령포로 유배된 후 해질 무렵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긴 장소라고 합니다.
왕방연시조비
금부도사 왕방연이 단종께 사약을 올리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비통한 심정으로 청령포를 바라보며 읊은 시조입니다.
김지남의 『용계유고』에 따르면 1617년 용계 김지남이 59세 때 영월을 순시하던 중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고 기록으로 남겼다고 합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 놋다』
관 풍 헌(觀風 軒)
영월객사(客舍)의 동헌으로서 조선 태조 7년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단종(端宗)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청령포에서 유배생활을 하시던 중 홍수를 피해 이곳으로 이어(移御)하시어 머무르시다가 1457년 10월24일 승하하셨습니다.
자 규 루(子規 樓)
이 누각은 세종10년에 창건, 연산조(燕山朝)에 영월군수를 역임한 신숙근이 중건하였습니다. 후에 단종(端宗)이 관풍헌(觀風軒)으로 이어(移御)하시어 머무시는 동안 이 누각에 오르시어 자규사(子規詞) 및 자규시(子規詩)를 읊으신 것이 계시가 되어 자규루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장릉
장릉은 조선 6대 단종의 능입니다.
『세조실록』에는 노산군이 자결하자 예로써 장례를 치렀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제로는 그 누구도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영월호장 엄흥도가 노산군의 시신을 몰래 거두어 현재의 자리에 가매장하였습니다. 이후 중종 때부터 노산군에 대해 거론하기 시작하여 1516년 노산군의 묘를 겨우 찾아 봉분을 만들었으며, 선조대에는 석물을 세웠습니다. 1681년 노산군을 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 추봉하였으며, 여러 논의 끝에 1698년(숙종 24) 왕으로 복위되어 묘호를 단종(端宗), 능호를 장릉이라 하고 신주를 종묘에 부묘하였습니다.
영월 장릉의 진입공간에는 재실 외에 일반적인 조선왕릉과 다르게 단종의 충신들을 위한 건조물이 있습니다. 장릉 입구에는 노산군묘을 찾아 제를 올린 영월군수 박충원(朴忠元)의 뜻을 기린 낙촌비각(駱村碑閣),
재실 옆에는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묘를 만든 엄흥도의 정려각(旌閭閣),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종친, 충신, 환관, 궁녀, 노비 등 268명의 위패를 모신 장판옥(藏版屋)과 이들에게 제사를 올리는 배식단(配食壇)이 있습니다.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정자각, 비각, 수복방, 수라간이 있으며 비각 안에는 『조선국 단종대왕 장릉(朝鮮國 端宗大王 莊陵)』이라고 새겨진 표석이 있습니다. 향로와 어로는 지형에 맞게 조성하여 ‘ㄱ’자로 꺾여 있습니다.
능침에는 추존왕릉 제도에 따라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능침 주변의 석양과 석호도 한 쌍만 조성하였습니다. 그 밖에 장명등, 망주석, 문석인, 석마 등은 정종의 후릉(厚陵)의 능제에 따라 작게 조성하였으며, 무석인은 생략하였습니다.
망주석은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세호(細虎)가 없습니다.
망주석(望柱石)과 세호(細虎)
명칭으로 볼 때, 바라볼 망(望), 기둥 주(柱)가 의미하듯이 묘가 있다는 곳을 멀리서 바라보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알려주는 것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망주석 가운데에는 상징적인 무늬를 새기는데, 『국조오례의』에는 ‘귀를 만들어 구멍을 판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국조상례보편』에는 ‘세호를 새긴다 《왼쪽 기둥에는 올라가는 모양을, 오른쪽 기둥에는 내려오는 모양을 새긴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호는 중국의 망주석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세호의 한자의 뜻풀이대로 하면 아주 작은 호랑이라는 뜻이나, 실제는 호랑이 모습과 닮지는 않았습니다. 세호의 역할과 새긴 목적이 기록에 없어 상징성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시대가 내려오면서 장식화 되었고 조선 중기부터는 구멍이 막혀 있으며 꼬리가 긴 동물이 조각되었습니다. 대체로 좌승우강(左陞右降)의 형태로 조각되나 일부 왕릉은 반대로 조각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단종은 영월 장릉에 있으며 정순왕후는 남양주 사릉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