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섬 소안도(所安島)의 위대한 독립운동#
-3.1 운동 104주년을 맞이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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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항일운동 3대 聖地가 있다.
부산 동래,함경도 북청,완도 소안(所安)
그런데 수도권에서 멀리 떨어진 조그만 섬 완도,
그것도 배를 타고 제법 들어가야 하는 소안면.
(지금도 완도에서 배를 타고 40분 소요)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의 억지 식민지정책에 대한 반발로 섬 주민
들이 제대로 항거한 계기가 발단이었는데 만세
운동은 물론 광복시까지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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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세운 동양척식회사가 있었다.이는 우리의
경제권을 수탈하기 위해 국유지를 비롯 사유지
까지 편법으로 착취를 담당했던 기관인데 섬 촌눔
으로 얕잡아봤지만 제대로 당했다.
하루 아침에 소작인으로 전락된 소안 주민들이
1909년 부터 법정 소송을 제기하여 1921년
드디어 승소하는 쾌거를 이루어냈는데 대표적
주도 인물이 송내호,정남국 등이다.
그 기념으로 1923년 사립 소안학교를 설립.
놀라운 것은 일장기를 달지 않았고 순 우리말
교육 외에도 독립군가까지 가르쳐 향후 독립운동
의 요람이 되었는바 그 소문을 듣고 전남 각지 및 제주에서까지 유학을 갔을 정도.
일제는 결국 1927년 강제 폐교를 감행했지만
당시 섬 인구 4000여 명에 무려 20여 명의
독립유공자와 69명의 독립운동가가 탄생되었고
그 영향으로 이웃 신지도,대모도 등에도 다수의
독립운동가가 배출된 귀한 사례
소안도에는 그 여파로 집마다 365일 태극기를 걸고 있다.그곳 많은 열사들 중 대표적 2분만 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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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내호(1895~1928)
서울에서 학업을 마친 후,교육을 통해 국권회복
을 이루어야 한다는 나름의 꿈을 갖고 낙향.
소안도에서 교사로 시작하였는데 3.1운동의
소식을 듣고 3.15일 만세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그리곤 곧바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군자금
모집 책임자로 활동을 했다.투옥을 거듭 당하면
서도 청년비밀결사단체,여성회,소년단 등을
결성하여 조직적인 투쟁에 앞장선 분
무려 6개 국어를 구사하던 최고 지식인으로
회유책에도 결코 협조하지 않았던 올곧은 성품.
복역중 고문으로 인한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치료
중 결국 운명하게 되는데 한참 나이인 34세
친동생 송기호 역시 독립운동가.
고문으로 한쪽 눈을 실명당하면서도 맹활약.
형보다 몇 달 앞 타계(1928년 2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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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국(1897~1955)
송내호와 같이 만세운동 주도 후 독립운동에 매진.그 역시 임시정부 지원 군자금 모금책을 맡았다
가난한 형편에 고학, 결국 돈이 없어 중퇴했지만
일본의 유명대학까지 다녔던 학구파로서 엿장수로
변신하여 비밀 연락 및 모금을 담당하였는데 하여 '엿장수 독립운동가'로 많이 알려지신 분
발각되어 투옥당하기를 수십 차례, 항일운동
수감자중 횟수로 거의 최고 기록 수준(90 여회)
총 수감생활 10년 동안 숱한 고문을 이겨낸 위인
번번히 구속되었지만 변호사 없이 유창한 일어
실력으로 항변,법정에서 늘 무죄 내지는 감형을
받고 풀려났는데 출옥하면 곧 소쿠리장수 등으로 변장하여 소임을 이어갔는데 광복후 국회의원도
지냈지만 고문 후유증 등으로 타계(195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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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오래전 익히 알고는 있었으나 새삼 史料를 찾아
대충 정리.마침 知人의 조부님이 그곳 독립운동
가시기에 집안에 내려오는 얘기들을 소상히
들을 수 있었지만 지면 관계상 축약縮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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