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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구조
패턴
패턴을 봤다면 무언가를 본 것이다. 구조의 이야기는 거기서 시작된다. 인간의 뇌는 자연의 패턴에 반응한다. 패턴을 닮은 꼴이다. 인간의 뇌는 닮은 것이 반복되는 것을 볼 때 쾌감을 느낀다. 흥분하고 집중한다. 인지의 시작이다.
인간은 자연에서 패턴을 발견하고 거기서 숨은 질서를 찾아 지식을 구성한다. 패턴이 뇌를 자극하고 뇌는 자극에 반응한다. 패턴을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어서 저장하는 것이 인식이다. 인간과 환경의 인지적 상호작용이 일어난다.
왼손과 오른손은 닮았다. 닮은 꼴 둘이 하나의 축에 꿰어지면 대칭이다. 대칭은 외부에 대해서는 하나의 개체로 행세한다. 원시인이 사냥한 토끼를 묶어서 운반하며 즐거워하듯이 뇌는 패턴을 카테고리로 묶으면서 즐거워한다.
인식은 패턴에서 카테고리를 추출하는 두뇌활동이다. 문제는 인간이 정적 인식에 능하고 동적 인식에 약한 점이다. 자연은 가운데를 꿰는데 인간은 외부의 상자에 담는다. 자연은 내부 밸런스로 묶는데 인간은 그냥 외부를 묶는다.
자연 - 움직이는 것의 내부를 관통하며 꿰어낸다.
인간 - 움직이지 않는 것을 외부의 상자에 담는다.
묶으려면 움직임을 멈춰야 한다. 자연이 멈추면 죽는다. 인간이 죽은 것을 잘 묶는데 산 것을 묶지 못한다. 분해는 잘하는데 합치지 못한다. 서구문명은 통째로 죽은 문명, 해체문명이다. 인간은 통합적이고 유기적인 사고에 약하다.
자연은 움직이며 스스로 묶는다. 움직임에 의해 묶인다. 새가 이동할 때 그룹을 만든다. 동력을 조달하면 동력에 묶인다. 안전을 꾀하면 위험에 묶인다. 늑대 무리에 쫓기는 사슴은 직진만 계속한다. 보이지 않는 끈에 묶이는 것이다.
인간이 움직이면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한다. 운반을 돕는 매개에 묶인다. 움직이면 간섭되고 간섭에 묶인다. 움직이면 충돌하고 깨진다. 깨지지 않고 버티려면 이겨야 하며 그러려면 밸런스가 필요하다. 밸런스의 효율성에 묶인다.
카테고리
인식은 패턴, 패턴은 대칭, 대칭은 움직임이다. 인식은 움직임을 묶어 저장한다. 자연이 스스로 묶는 것은 대칭의 코어이고 인간이 상자에 담아서 묶는 것은 카테고리다. 카테고리는 인간의 편의일 뿐 자연의 진실이 아니다.
인식은 묶음을 추적한다. 인간이 죽은 것을 잘 묶고 산 것을 못 묶으며, 멈춘 것을 잘 묶고 움직이는 것을 못 묶으며, 외부를 잘 묶고 내부를 못 묶는다. 이는 인식의 실패다. 구조론은 자연이 스스로 묶어내는 방법을 따라간다.
자연은 움직임을 묶고, 내부를 묶고, 산 것을 묶고, 효율성으로 묶고, 밸런스로 묶고 게임에 이겨서 묶는다. 진 것은 깨져서 가루가 되고 이긴 것은 모두 둥글게 묶여 있다. 양양 해변의 몽돌은 이겨서 살아남은 묶음들이다.
인간은 죽은 외형을 묶을 뿐 살아있는 내부 에너지를 묶지 못한다. 죽은 외형은 상자에 담으면 되는데 살아있는 에너지는 내부 밸런스의 축을 꿰어내는 게 쉽지 않다. 자연은 외부의 상자가 없으므로 에너지의 결로 묶는다.
묶지 않고 그냥 묶었다고 선언하면 원자다. 구조는 내부를 묶고 원자는 외부를 묶는다. 내부 에너지를 묶는 것이 진짜고 외부 형태를 묶은 것은 가짜다. 에너지는 내부압력과 외부간섭 사이에서 밸런스 조절로 묶어야 한다.
존재하는 것은 살아남은 것이고, 살아남은 것은 이긴 것이며, 이기는 것은 효율적인 것이며, 그것은 짝지어진 대칭 2가 축을 얻어 외부에 대해 1로 행세하는 것이다. 내부에 묶음을 갖춘 것이 구조다. 구조는 이기는 구조다.
움직이면 쪼개지고, 쪼개지면 압력이 발생하고, 압력이 발생하면 질서가 얻어지고, 그 질서가 축이다. 축은 쪼개져서 대칭된 둘의 간격을 조절한다. 닫힌계에 갇혀야 압력이 작동한다. 열린계는 간섭되고 상쇄되어 깨진다.
축을 움직여 구조를 작동시키는 것이 메커니즘, 메커니즘에 동력을 제공하여 완전체를 이룬 것이 시스템이다. 시스템은 독립적으로 작동하고 메커니즘은 사람이 작동시킨다. 작동하는 도구의 의사결정 하는 날이 구조다.
구조의 본질은 의사결정을 통한 모순의 해결이다. 움직여야 가능하다. 움직임은 방향전환이다. 우주는 방향전환으로 모두 설명된다. 방향전환은 내부를 잘게 쪼갠다. 쪼개는 자가 쪼개지는 자를 지배하는 것이 질서다.
대칭
에너지를 전달하려면 계 내부에 압력을 걸어야 한다. 압력을 걸려면 객체를 둘로 쪼개야 한다. 압력에 의해 계가 완전히 닫힌다. 이미 쪼개졌다면 한 번 더 쪼개야 한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으로 5회 쪼갤 수 있다.
대칭의 형태, 곧 내부를 쪼개서 압력을 조달하는 방식은 질, 입자, 힘, 운동, 량이 있다. 안과 밖의 대칭이 질, 중심과 주변의 대칭이 입자, 좌와 우의 대칭이 힘, 앞과 뒤의 대칭이 운동, 이것과 저것의 대칭이 량이다.
질 - 닫힌계 안과 밖의 대칭, 아我와 비아非我
입자 - 닫힌계 안에서 중심부와 주변부의 대칭, 서울과 지방
힘 - 축을 중심으로 공간적 좌와 우의 대칭, 몸통을 중심으로 왼팔과 오른팔
운동 - 축의 이동을 중심으로 시간적 앞과 뒤의 대칭, 기차의 순방향과 역방향
량 - 외부 관측자를 중심으로 이것과 저것의 대칭, 접시 위에 놓인 사과와 오렌지
접시의 사과와 귤은 그냥 존재한다. 그것을 대칭으로 보는 것은 인간의 관점이다. 량은 대칭이 없지만 인간이 운반하려고 대칭시킨다. 운동은 시간 대칭, 힘은 공간 대칭, 입자는 주종 대칭, 질은 계의 안밖 대칭이다.
질서가 있다. 대칭은 순서대로 작동한다. 순서가 앞선 것이 나중에 오는 것을 이긴다. 질이 입자를 이기고, 입자가 힘을, 힘이 운동을, 운동이 량을 이긴다. 인간의 모든 오류는 이 순서를 모르기 때문에 일어난다.
이긴다는 것은 쪼갠다는 것이다. 질이 입자를 쪼개서 대칭을 만들고, 입자가 힘을 쪼개서 대칭을 만들고, 힘이 운동을 쪼개서 대칭을 만들고, 운동이 량을 초개서 대칭을 만든다. 대칭을 만들어 압력을 유지한다.
문제의 해결은 축을 움직여 대칭의 형태를 바꾸는 것이다. 대칭은 단계적으로 국소화된다. 의사결정을 할 때마다 대칭의 범위가좁아진다. 사건이 원인에서 결과로 갈수록 쪼개져서 작아지는 것이 엔트로피 증가다.
질, 입자, 힘, 운동, 량 순으로 대칭의 작동범위가 좁아지므로 동일한 결과를 얻으려면 더 많은 의사결정이 필요하다. 질로 한 번 작업할 것을 입자로는 두 번, 입자로 한 번 작업할 것을 힘으로는 두 번 결정해야 한다.
더 적은 횟수의 의사결정으로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이기는 힘이다. 그것이 사회에서 권력으로, 자본에서 이윤으로, 자연에서 기세로 나타난다. 우리는 이기는 힘을 조직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권력
우리가 아는 대칭은 질, 입자, 힘, 운동, 량 중에서 세 번째 힘이다. 보통은 좌우대칭이다. 우리는 주변으로부터 압박받아 무언가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린다. 왼쪽 아니면 오른쪽을 선택해야 한다. 우리가 좌우대칭은 아는데 다른 대칭은 모른다. 이미 대칭에 잡혀 있기 때문이다. 보통 입자 대칭에 잡혀 있다. 정치적 프레임에 잡혀 있다.
우리는 남녀의 성별 대칭, 남북한의 이념 대칭, 한일관계의 민족 대칭에 잡혀 있다. 늑대에게 쫓기는 사슴은 직진만 계속하며 방향을 바꾸지 못한다. 하나의 대칭이 다른 대칭을 보지 못하게 한다. 인간은 집단의 역할에 잡혀서 독립적인 의사결정을 못 한다. 프레임의 압박을 받는다. 마술사의 속임수에 홀리듯이 역할에 홀린다. 대칭의 감옥에 갇힌다.
접시에 담긴 사과와 귤의 대칭은 접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듯 외부에서 개입한 것은 량의 대칭이다. 물체가 움직이면 전방과 후방이 발생한다. 움직임이 대칭을 만들어낸다. 멈추어 있는 물체는 앞뒤가 없다. 바닷가의 돌은 앞뒤가 없다. 많은 경우 대칭은 본래의 모습이 아니라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다. 정치적 대립이 대개 그러하다.
우주 안의 모든 것이 대칭이다. 대칭이 아닌 것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 대칭에 잡혀서 다른 대칭을 찾지 못한다. 프레임에 잡혀서 바보가 된다. 권력 속에서 호흡하면서도 권력구조의 작동 메커니즘을 모른다. 대칭들 사이의 서열이 권력이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조절 순서를 어기면 말단부에 힘이 전달되지 않아 의사결정에 실패한다.
몸통은 어깨보다 굵어야 하고, 어깨는 팔보다 굵어야 하고, 팔은 손목보다 굵어야 하고, 손목은 손가락보다 굵어야 한다. 이 서열을 어기면 팔이 부러질 수 있다. 잘게 쪼개야 압력이 발생하므로 쪼개져서 가늘어진다. 주먹을 꽉 쥐어보면 알 수 있다. 손가락이 다섯 개로 쪼개져서 압력을 발생시킨다. 손가락 마디 하나만 잃어도 힘을 쓸 수 없게 된다.
하나의 큰 대칭이 깨지면서 작은 대칭 둘을 만들어 압력을 발생시키는 형태로 우주는 작동한다. 의사결정이 반복되어 크기가 작아질수록 전체의 방향전환에 필요한 부담이 늘어나는 것이 엔트로피 증가다. 반대로 큰 결정을 한 번 해서 작은 결정을 여러 번 하는 수고를 줄이는 것이 이기는 힘이다. 외부를 끌어들여 새로 닫힌계를 만들어야 한다.
세상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원인에서 결과로, 시작에서 종결로, 질에서 량으로 가므로 우리는 앞선 단계의 의사결정에 개입하는 방법으로 의사결정 비용을 줄이고 객체를 통제할 수 있다. 조절할 수 있다. 말단부에서 용을 써봤자 되는 일이 없다. 외부의 적을 발굴해야 내부를 추스를 수 있다. 지렛대의 받침점 역할을 하는 동맹 세력은 외부에 있다.
구조
세상은 구조다. 반대는 원자다. 원자는 겉이고 구조는 속이다. 원자는 쪼갤 수 없다. 구조는 쪼개지고 합쳐진다. 구조는 관절과 같다. 어떤 둘을 연결할 수도 있고 그 연결을 끊을 수도 있다. 거기서 의사결정이 일어난다. 세상은 의사결정의 집합이다.
원자는 단위다. 단위는 외부와 연결한다. 그것은 사람이 세는 단위다. 열매가 낱개 단위로 존재하는 것은 씨앗을 퍼뜨리기 좋게 하려는 것이다. 씨앗은 참새가 운반하는 단위다. 단위는 외부와 연결하는 방식이지 존재 자체에 내재한 질서가 아니다.
원자가 하나의 객체라면 구조는 둘의 관계다. 구조는 대칭이고 대칭은 원래 둘이다. 세상은 상호작용하는 2가 독립적인 의사결정의 최소단위를 이룬다. 1은 다른 것에 빌붙어 있고 스스로 의사결정할 수 없다. 독립해 존재할 수 없다. 조절할 수 없다.
원자 - 외부를 연결한다. 외부의 인간과 대칭된다. 하나의 객체다.
구조 - 내부를 조절한다. 스스로 쪼개져서 대칭된다. 둘의 관계다.
원자를 뒤집으면 구조다. 뒤집어보면 되는데 인류 문명사 1만 년 동안 아무도 뒤집어보지 않았다. 이것이 아니면 저것인데 이것에 매몰되어 저것을 보지 못했다. 호기심에서라도 한 번쯤은 반대쪽을 살펴볼 만한데 아무도 반대쪽을 탐구하지 않았다.
에너지
데모크리토스가 원자를 떠올린 이유는 그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필요에 의해 발명한 것이다. 발견이 아니라는 게 함정이다. 집을 건축하려면 벽돌이 필요하듯이 자연이 존재를 건축하려면 원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우주는 스스로 건축한다. 원자론은 틀렸다. 원자는 누가 개입하여 대신 건축해준다는 전제를 깔고 들어간다. 자연스럽지 않으므로 자연과 어긋난다.
존재가 스스로 건축하려면 상호작용 구조가 필요하다. 생명이 자신을 건축하려면 DNA가 필요하듯이 존재가 자기 건축에 성공하려면 내장된 설계도가 필요하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이 존재의 DNA다. 구조론은 설계도가 동시에 건축재가 되는 점이 각별하다. 생명은 세포가 건축재와 설계도를 겸한다. 세포를 가져와서 조립하는 기술자가 따로 있는 건 아니다.
원자 개념은 인간이 벽돌과 모르타르로 건축하듯이 건축재인 벽돌 외부에서 별도로 기술자가 붙는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인간의 건축은 죽은 건축이다. 정적 건축이다. 존재의 건축은 살아서 움직이는 동적 건축이다. 존재의 건축재는 에너지다. 존재는 구조의 활로 에너지를 쏜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은 에너지의 발사다. 다단 로켓의 점화와 같은 다단 발사다.
량은 에너지의 도착점이며 질, 입자, 힘, 운동은 도착점의 위치를 특정한다. 계, 체, 각, 선 점 순서로 격발된다. 4, 3, 2, 1차원을 거치며 단계적으로 압축하여 0차원 점에 이른다. 질 4차원은 유체에 압이 걸린 상태, 체 3차원은 구심력에 의해 축이 계를 장악한 상태, 각 2차원은 축이 계를 둘로 나눈 대칭, 선 1차원은 에너지의 이동선, 점 0차원을 도출하고 종결된다.
화살이 과녁에 맞는 점이 점, 활에서 과녁까지 연결선이 선, 활과 화살의 겨냥하는 각도가 각, 화살과 활시위의 결합체가 체, 활과 화살의 닫힌계가 계다. 우리 눈에 보이는 부피와 너비와 길이는 에너지가 다녀간 자취다. 실제로 의사결정 하는 것은 존재 내부의 에너지다. 우리는 에너지 반대편을 본다. 실제로 의사결정 하는 차원은 점을 주변과 공유하는 정도다.
인간은 중력을 거슬러 건축하지만, 자연은 2층이 무너져서 1층이 된다. 2층이 무너지는 에너지 모순의 해소 절차가 자연의 설계도다. 무너지며 화살을 쏜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은 지진이 나서 2층이 무너지는 순서다. 에너지가 움직이는 경로다. 에너지는 0차원에서 4차원까지 다섯 겹의 겹침을 이루어 닫힌계에 압력을 발생시키고 그 공유를 벗기며 격발된다.
차원은 다섯으로 끝이다. 다섯에서 압력이 발생한다. 네 겹까지는 압력을 가두지 못한다. 우리는 부피가 있는 3차원을 최고로 알지만, 부피는 에너지를 가두지 못한다. 우리가 부피를 믿는 이유는 고체를 지구 중력이 잡아주기 때문이다. 기체는 3차원 상자에 담아봤자 잽싸게 도망친다. 야구공과 배트가 부딪치면 계에 압력이 발생한다. 의사결정이 가능한 상태다.
원자를 필요로 하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사람이다. 사람 위주의 주관적 사고가 객관적 진실을 방해한다. 핵심은 스스로 움직이는가, 아니면 누가 외부에서 개입하여 움직여줘야 하는가다. 자체 엔진에 의해서 능동적으로 작동해야 진짜다. 자연은 저절로 돌아가는 구조를 내장하고 있어야 한다. 원자는 에너지를 가두는 집이지만 전혀 에너지를 가두지 못한다.
원자가 있다고 치면 여러 가지 자연현상을 쉽게 설명할 수 있다. 플로지스톤이나 에테르나 칼로릭이나 우주상수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을 대충 뭉개려고 도입한 잠정적인 개념이다. 그런 게 있으면 편하긴 한데 진실은 아니다. 더 좋은 게 나오면 안 좋은 것은 폐기되어야 한다. 원자 개념은 그동안 인류가 잘 써먹었지만 이제는 구조로 대체되어야 하는 잘못된 개념이다.
레고블록은 요철이 있다. 원자론은 요철 없는 레고블록이다. 사람이 본드로 일일이 붙여줘야 한다. 요철을 갖춘 레고블록 속에 스스로 움직이며 밀고 당기는 자석이 들어 있다면 우주도 건축할 수 있다. 게를 이룬 에너지의 상호작용이 레고블록의 요철로 기능하므로 우주가 건축되었다. 생명이 스스로 진화하듯이 우주는 상호작용에 의해 스스로 조립된 것이다.
방향성
어떤 하나의 존재는 방향이 없는데 둘이면 방향이 생긴다. 정확히는 둘이 계를 이루었을 때 외부에서 제3의 것이 계에 작용하면 이에 맞서 반작용하는 과정에서 방향성이 도출된다.
혼자일 때는 방향이 없는데 둘이 커플을 이루면 방향이 생긴다. 누가 커플을 방해하면 커플은 그 둘의 연결상태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두 사람이 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게 방향성이다. 백 명이 한 사람처럼 행동하면? 그것은 일제히 한 방향으로 몰려가는 유체의 성질에서 잘 관찰된다. 쪽수가 많을수록 방향을 바꾸지 않으려는 집단사고에 빠진다.
둘이 계를 이루면 밸런스가 작동한다. 외력의 작용은 밸런스를 깨는 확산 방향으로 작용한다. 계에 전달된 에너지는 외력을 물리치는 수렴 방향으로 바뀐다. 계 내부에서 확산에서 수렴으로 에너지의 방향전환이 일어나는 것이 의사결정이다. 외력의 작용에 맞서는 반작용의 시작점을 중심으로 계가 평형을 이루기 때문이다.
하나의 사건 안에서 방향을 만드는 대칭은 다섯이다. 첫째 외력의 작용에 맞서는 계의 반작용은 질 대칭이다. 둘째 계 내부에서 반작용의 시작점 도출은 입자 대칭이다. 셋째 반작용에 의해 코어가 움직여서 새로 대칭을 만드는 과정은 힘 대칭이다. 넷째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하면 멈추지 못하는 것은 운동 대칭이다. 다섯째 간섭을 당하여 내부 모순을 외부로 배출하고 계의 평형을 회복하는 사건의 종결은 량 대칭이다.
모든 힘은 궁극적으로 밸런스의 복원력이다. 그러나 에너지 소모에 의해 원래 위치에서 복원되지 않고 보다 낮은 단계에서 복원되므로 무질서도가 증가한다.
계는 외력의 작용에 맞서는 반작용 과정에 코어의 움직임에 의한 연쇄적인 자리바꿈으로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5회에 걸쳐 부분적인 대칭을 새로 조직하는 방법으로 내부의 모순을 외부로 밀어내고 밸런스를 복원한다.
권투선수가 링에 오르면 두 선수의 대칭이 질, 척추를 중심으로 하는 신체 내부 대칭이 입자, 움직일 때 뒤를 받치는 자세와 휘두르는 팔의 대칭이 힘, 팔의 움직임에 따른 연쇄적인 신체의 움직임이 운동, 에너지의 신체 이탈에 따른 간섭의 대칭이 량이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으로 전개하며 전체 대칭에서 부분 대칭으로 좁혀진다. 전면전에서 국지전으로 가는 것이 에너지의 방향성이다. 에너지는 언제나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고, 큰 것에서 작아지는 것으로 가고, 압력에서 간섭으로 간다.
우리가 원자로 여기는 것은 두 번째 입자다. 외력의 작용에 대한 반작용의 시작점이다. 입자의 위치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외력의 작용에 따라 계의 평형을 도출하며 순간적으로 성립한다. 즉 관측이 입자의 위치를 결정한다.
변화
대칭만큼 쉬운 게 없다. 축구를 해도 한 사람이 드리블하면 패스를 받으려고 반대쪽으로 뛰어들어가는 사람이 있다. 이 정도는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안다. 심지어 늑대도 대칭을 안다. 젊은 늑대가 사슴을 쫓으면 노련한 늑대는 반대쪽으로 돌아가서 길목을 지킨다. 손발이 척척 맞는다.
대칭은 변화다. 모든 변화는 대칭을 띤다. 박힌 돌은 대칭이 아닌데 구르는 돌은 대칭이다. 날아가는 새는 대칭이다. 자라는 나무는 대칭이다. 자라고 있는 소금 결정도 대칭이다. 종유석도 대칭으로 자란다. 한창 자라고 있는 활화산은 대칭이고 성장이 멈춘 휴화산은 조금씩 풍화되어 비대칭이 된다.
산 것은 대칭이고 죽은 것은 비대칭이다. 움직이는 것은 대칭이고 멈춘 것은 비대칭이다. 움직이면 방해자를 만난다. 방해자와 충돌하면 반작용한다. 반작용의 시작점 코어를 중심으로 대칭이 만들어진다. 비대칭이면 형태가 깨지기 때문이다. 해변의 몽돌은 비대칭의 모서리가 깨지고 대칭만 남았다.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변화다. 변화는 대칭이다. 우주는 전 방위로 대칭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보고 저것을 안다. 앞을 보고 뒤를 안다. 오른쪽을 보고 왼쪽을 안다. 그런데 등잔 밑을 모른다. 좌우 대칭에 잡혀서 상하 대칭을 모른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대칭에 잡혀서 수도권과 지방의 대칭을 모른다.
문제는 변화다. 대칭을 추적해서 연결하면 된다. 왼쪽에 없는 것은 오른쪽에 있다. 왼쪽에도 없고 오른쪽에도 없는 것은? 주변에 없는 것은 중심에 있다. 중심이 우리가 찾아야 할 등잔 밑이다. 중심에도 없고 주변에도 없는 것은? 밖에 있다. 밖은 사건의 밖이다. 이것은 차원을 건너뛰는 대칭 추적이다.
- 질의 닫힌계는 안과 밖이 있다.
- 입자의 코어는 중심과 주변이 있다.
- 힘의 대칭은 왼쪽과 오른쪽이 있다.
- 운동의 방향은 앞과 뒤가 있다.
- 량의 위치는 이곳과 저곳이 있다.
대칭을 추적하여 변화의 원인에서 결과까지 사건을 연결하면 된다. 이곳에 없는 것은 저곳에 있다. 이곳에도 저곳에도 없는 것은 앞에 있다. 앞에도 뒤에도 없는 것은 왼쪽에 있다. 왼쪽에도 오른쪽에도 없는 것은 중심에 있다. 중심에도 주변에도 없는 것은 안에 있다. 안에도 밖에도 없는 것은 확실히 없다.
프레임
뭐든 대칭이라는 사실만 알아도 인생의 무수한 경쟁들에서 반은 먹고 들어간다. 그런데 사람들이 대칭을 모른다. 문제가 넌센스 퀴즈라는 사실을 알려주면 그 자체로 강력한 힌트가 된다. 넌센스 퀴즈는 답인데 답이 아니다. 그렇다면 답이 아닌 게 답이잖아. 관점을 비틀면 된다. 세상이 대칭이라는 사실을 알면 짝짓기만 열심히 해도 답을 찾을 수 있다.
사람들이 공간의 좌우대칭도 알고 시간의 전후대칭도 아는데 공간과 시간의 각운동량 보존 대칭은 모른다. 애초에 대칭을 찾으려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공간과 시간을 별개의 존재로 안다. 공간이 방향이면 시간은 방향전환이다. 시계추가 계속 방향을 바꾸는게 시간이다. 공간을 좁히면 그 변화는 시간이고 시간을 늘리면 그 변화는 공간이다.
우리가 아는 공간과 시간은 막연하다. 사실은 공간도 시간도 없고 변화가 있다. 공간과 시간은 변화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변화는 방향전환이다. 방향을 정하는 게 공간이고 바꾸는 게 시간이다. 변화가 한 방향으로 몰려가는 성질이 공간이고 가다가 막혀 되돌아오는 성질이 시간이다. 모든 변화는 좁혀져서 한 점으로 수렴된다. 시공간은 그 위치를 특정한다.
우리가 모르는 것은 비대칭의 대칭이다. 계급이 다른 대칭이다. 질과 질의 평등한 대칭은 아는데 질과 입자의 불평등한 대칭은 모른다. 입자와 힘의 대칭, 힘과 운동의 대칭, 운동과 량의 대칭을 모른다. 질 하나에 입자 둘이 맞서고, 입자 하나에 힘 둘이 맞서므로 쪽수가 맞지 않아 비대칭처럼 보인다. 그러나 계급 차이를 쪽수가 메워서 에너지로는 대칭된다.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의 여러 현상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맞다. 그냥 실험 결과를 받아들이면 된다. 원자론이라는 프레임을 깨면 된다. 우리는 원자론의 우물에 갇혔다. 우물 안에서 우물 밖의 세계를 상상할 수 없다. 플라톤이 말한 동굴의 비유다. 우리가 보는 것이 그림자라면? 우리는 집단이 제공하는 역할놀이에 붙잡혀서 집단사고라는 동굴에 갇혔다.
손가락이 아니라면 달을 보면 된다. 손가락도 아니고 달도 아니라면 둘 사이의 방향성을 보면 된다. 손가락과 달 사이를 연결하는 하나의 라인을 보면 된다. 발상의 전환을 통해 프레임을 깨려는 노력해야 한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이다 하고 한 놈을 찍어서 조지려는 태도가 프레임이다. 누구를 겨냥하는 것은 자신과 대칭시켜 자신에게 일을 주는 것이다.
답은 언제나 둘의 관계다. 진리는 언제나 메커니즘으로 존재한다. 메커니즘은 동사가 두 개 들어 있다. 둘을 통일하는 하나가 있고 그 하나의 방향성으로 조절한다. 메커니즘이 아닌 형태로 진술되는 것은 모두 거짓말이다. 메커니즘은 A면 B라는 조건부로 되어 있다. 조건이 명시되지 않은 일방적인 진술은 가짜다. 전제와 진술의 구조가 없으면 거짓이다.
구조의 눈
구조로 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 구조는 둘 사이다. 자연의 변화는 어떤 둘의 사이에서 일어난다. 모든 사건의 모든 원인은 어떤 둘의 사이에 있다. 만약 누가 다른 어떤 것을 원인으로 지목한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사이는 간격이 있고 간격은 조절된다. 조절되지 않는 것은 모두 거짓이다. 궁극적으로는 에너지에 도달하고 에너지는 조절되기 때문이다.
날씨는 고기압과 저기압 사이에서 결정되고, 사랑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결정되고, 꽃은 태양과 대지 사이에서 피어나고, 총은 뇌관과 공이 사이에서 격발되고, 불은 성냥개비와 적린 사이에서 발화되고, 게임은 공격과 수비 사이에서 진행되고, 가격은 수요와 공급 사이에서 결정된다. 좋은 일도 사이에서 일어나고 나쁜 일도 사이에서 일어난다.
모든 존재는 거쳐 가는 모태가 있고 자궁이 있다. 자궁은 내부다. 내부는 구조다. 자연의 모든 사건은 상호작용하는 둘의 밸런스에서 균형점의 이동으로 격발된다. 그것은 2다. 찾아야 할 것은 밸런스의 축이다. 그것은 상호작용하는 둘 사이에 있다. 어떤 하나는 원인이 될 수 없다. 1은 내부가 없으므로 압력을 가둘 수 없어서 사건을 격발할 수 없다.
사이에는 간격이 있고 간격이 좁혀질때 압력이 걸리면서 모순이 성립한다. 운동이 격발되어 모순이 해소되는 형태로 사건은 진행된다. 에너지는 한 점을 향해 발사된다. 사건은 2에서 격발되고 1에서 멈춘다. 우리가 보는 것은 변화다. 변화를 만드는 것은 압력, 압력을 만드는 것은 밸런스, 밸런스를 조절하는 것은 코어, 코어를 만드는 것은 계다.
구조를 보면 많은 것이 보인다. 구조를 모르는 사람이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릴 때 구조를 아는 사람은 그 열 배의 아이디어를 포드시스템으로 대량생산을 할 수 있다. 구조를 모르는 사람이 주인공 한 명의 성격은 이렇다고 말할 때 구조를 아는 사람은 주인공과 악역의 상성은 이렇다고 말한다. 대칭관계와 주종관계를 제시하면 사유는 풍부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