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터
손진숙
저녁 모임이 있어서 목욕탕에 가는 길이다. 목욕탕 방향으로 난 아파트 샛문에 이르기 위해서는 꼭 놀이터를 거쳐야 한다.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초겨울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학원에서 공부에 열중해서일까, 그도 아니라면 실내에서 게임을 즐기는 걸까. 놀이터에 아이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했던가. 텅 빈 놀이터 벤치에 앉는다. 등나무 한 그루가 지주를 타고 올라가 평평하게 얽히고설켜 포근히 추위를 막아준다.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평소 소식 전하지 못한 친구를 불러본다. “놀이터가 비어 있어 네 목소리 듣고 싶어서...” 언제나 따뜻하게 응대해 주는 친구다. 그동안 쌓인 이야기의 실꾸리를 풀기 시작한다.
적막에 졸고 있던 놀이터가 나의 수다에 움찔 놀라 깨어난다. 열중쉬어에서 차렷 자세로 바뀌어 나의 대화를 엿듣는 것 같기도 하다. 집안에서 가족이 듣는 것보다 놀이터의 햇살이나 먼지가 듣는 것이 훨씬 가뜬하다. 통화를 끝내고 놀이터를 벗어나면 한바탕 대화놀이를 잘한 것 같고, 내 안에 꼬깃꼬깃 구겨둔 말들을 자유롭게 날려 보낸 기분이다.
어릴 때 놀던 터가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아이들이 방안이나 집안에서 걸리적거리면 어른들은 “나가서 놀아라.”며 밖으로 내몰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사립짝을 나섰다. 마치 나가면 어디든 놀이터이기나 한 것처럼. 사립문을 나서서 동무를 만나면 금방 둘이 되고 셋, 넷이 되어 어울려 놀 수 있었다.
동네에서 제일 큰 기와집에 사는 향이네 솟을대문 아래서 공기놀이도 하고, 바깥마당에서 숨바꼭질도 하고, 뒤꼍에서 소꿉놀이도 했다. 하지만 가장 만만한 놀이터는 향이네 머슴이 살던 허름한 집 마당이었다. 흙벽과 창호지에 구멍이 송송 뚫린 문살이 서러워 보이던 초가집. 그 앞의 넓은 마당은 아이들이 모여 놀기에 그만인 놀이터였다. 울도 담도 없어 누구든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다. 매일 아이들 노는 소리로 떠들썩하고, 아이들이 일으킨 흙먼지가 풀풀 날리기도 했다.
가끔, 엄한 표정의 향이 아버지가 뒷짐을 지고 담 없는 골목에 나타나면 야단치거나 내쫓기라도 할까 봐 지레 겁먹고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기는 했다. 향이 아버지가 아무 말 없이 건넛집 담 모퉁이를 돌아 사랑채로 사라지면 완전히 해방된 아이들만의 세상이 되어 이리 뛰고, 저리 넘어지고, 뒤엉켜 신나는 놀이판이 되었다. 싸우고 얻어맞아 우는 일도 종종 있었다. 해가 서산에 기울어 집집마다 밥 짓고 쇠죽 쑤는 연기가 굴뚝에서 스멀스멀 오를 때쯤 각자 집으로 향했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는 놀이터가 군데군데 있다. 우리 집 거실에서 바로 보이는 ‘새봄어린이집’ 놀이터를 비롯하여 아파트를 돌아가며 적절히 배치되어 있다. 동과 동 앞에 있어 주민들 눈에 잘 띄는 어린이용 놀이터도 있지만, 건물과 건물 사이를 지나 뒤쪽에 있어서 사람들 눈에 쉽사리 띄지 않는 어른용 놀이터도 있다. 조용하고 한가하게 이용할 수 있는 운동기구도 몇 가지 설치되어 있다.
목욕탕 가는 길에 만난 놀이터와 반대편에도 샛문이 있다. 모임을 마치고 그 샛문에 들어선다. 우리 집으로 가는 왼편의 건물 뒤쪽 놀이터로 발길을 옮긴다. 도로와 인접해 있지만 측백나무 울타리가 소음을 줄여준다.
찾는 사람이 뜸한 이 놀이터. 아들이 해병대에 입영해 있을 때였다. 덩치만 컸지 여리기만 한 아이가 훈련이 고되고 군기가 엄하기로 소문난 병영생활을 무사히 소화하고 있는지 걱정이 몰아쳐 견디기 어려울 때 이곳을 찾았다. 그네에 앉아 이슥할 때까지 허공에 아들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울타리 너머로 교회 첨탑 위에 솟아 있는 열하루 달이 축 처진 내 어깨를 토닥여 주던 기억이 새롭다.
철봉대에 기대어 서서 흉금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에게 무사히 귀가했노라 결과보고를 한다. 모임에서 즐거웠던 정황을 털어놓을 때도 있지만, 언짢았던 상황을 토로할 때도 있다. 항상 묵묵히 받아 주고 조언해 주는 친구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한가. 불순했던 어른의 감정은 사라지고 순수한 아이의 심정이 되어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드문드문 떠 있는 별이 눈을 반짝인다. 내일은 또 내일의 별이 빛난다고 속삭이는 것 같다.
봄날이 어김없이 오고 있다. 거실에서 내다보이는 ‘새봄어린이집’ 앞의 놀이터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바람의 손길은 부드럽고 햇살의 미소는 따스하다. 하지만 어린이집 놀이터에는 보여야 할 어린이가 보이지 않는다.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삼엄하다.
하루라도 빨리 놀이터에서 아이들의 명랑한 웃음소리가 들렸으면 좋겠다. 초록 모자를 쓴 미끄럼틀에서 노랑 원피스를 입고 귀엽게 미끄러지는 아이들이 어서 보고 싶다.
《계간수필》 2021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