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장사
북구 금곡동에 있는 무등산 자락의 충장사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던 충장공 김덕령(1567-1596)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형인 김덕홍은 고경명 의병에 참여하여 금산에서 순절하였다. 선조 26년(1593) 어머니가 돌아가셨음에도 불구하고 담양에서 3천 의병을 일으켰다. 이 소식을 들은 전주의 광해분조(임진왜란 중 의주로 피난간 선조를 대신하여 정무를 보던 세자 광해군의 정부)는 김덕령에게 익호장군이란 칭호와 갑옷과 투구를 내려 주었다. 진주에 간 김덕령은 의병 총사령관이 되어 진해, 고성, 장문포 등지에서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선조 29년(1596) 이몽학의 난과 관련되었다는 터무니없는 밀고로 억울하게 옥에서 죽고 말았다.
그의 옥사 후 현종 2년(1661) 명예가 회복되어 관직이 복구되고, 정조12년(1788) 좌찬성에 추증(죽은 후 관직이 더하여 지는 것)되었으며 고향인 석저촌을 충효리로 바꾸어 표리비를 하사하였다.
1975년 국가와 후손들이 무등산에 충장사를 세우고, 광주시는 가장 번화가를 '충장로'라 이름하여 장군의 나라 사랑 정신을 기리고 있다.
▶김덕령
김덕령(자는 경수, 시호는 충장공)은 1568년 (선조 원년) 12월 29일 광주시 충효동(옛 석저촌)에서 김붕섭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1587년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2년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6월 형 덕홍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수백의 군사를 이끌고 고경명과 함께 전주까지 진군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형의 당부에 의해 곧 바로 귀가하여 노모를 봉양하였다. 그후 형 덕홍은 의병장 조헌이 이끈 금산싸움에서 전사하였으며 이듬해 8월에는 노모마저 세상을 떠났다. 장군은 아우 덕보에게 집안을 맡긴 다음 담양부사 이경린과 장성 현감 이귀 등의 천거로 선조로부터 형조좌랑의 벼슬에 임명되었다.
1593년 선조 26년 11월 "광주의 상인(喪人) 덕령은 온 고을 선비 여러분께 알립니다. 지금 왜적은 우리 강토를 침범하여 함부로 날뛰고 있습니다. 우리는 뭉쳐 일어나 왜적을 물리쳐야 겠습니다."라는 격문을 돌리고 담양에서 의병 오천명을 이끌고 출정하였다. 1594년 1월 나라에서는 장군을 선전관으로 임명하고 익호장군(翼虎將軍)의 호(號)를 내렸다.
1594년 장군은 권율 장군의 휘하에서 진해, 고성에서 왜군을 방어했으며, 9월 장문포에서 충무공 이순신과 수륙연합전으로 왜군을 크게 물리쳤다. 1595년 3월에는 의병장 곽재우 장군과 연합작전으로 정암전투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 6월에는 선조로부터 충용군(忠勇軍)이란 군호를 받았다.
1596년 7월 충청도 홍산(지금의 부여)에서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토벌하기 위해 전라도 운봉까지 진군하였으나, 이몽학이 관군에 패하여 참수당하자 환군하였다. 동년 8월 장군을 시기하는 이시언과 김응서 등이, 장군을 이몽학의 반란에 가담했다는 모략을 하여 투옥되었다.
선조는 장군을 잡아들이게 하여 쇠사슬로 묶고 큰 나무로 묶고 큰 나무로 깍지를 끼웠는데 장군은 크게 웃으면서 이르기를 『신이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왜적을 토멸하고자 맹세하였는데 어찌 역도(逆徒)를 쫓아 반역을 꾀했겠습니까…… 만일 내가 반역을 하기로 든다면 어찌 이런 것으로 막을 수 있겠습니까?』하면서 노하여 힘을 쓰니 쇠사슬이 끊어져 버렸다고 한다. 이렇게 호소하던 장군은 여러 대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20여일 간에 걸친 6차의 형문(刑問)과 수백회에 달하는 혹독한 고문으로 정강이뼈가 부러진 끝에 9월 15일 29세의 나이로 옥사하였다.
1661년 현종 2년 장군이 돌아 가신지 65년만에 그 억울함이 밝혀져 관직이 복고되었으며, 1668년 현종 9년 병조참의에 추증되고 1678년 숙종 4년 벽진서원(碧津書院)에 배향되었다.
▶김덕령 장군 의복
김덕령장군 의복은 1974년 9월 광주광역시 금곡동 이치에 있는 그의 묘소를 현재의 장소로 이장할 때 발견된 것으로, 장군이 돌아가신 후 379년이 되니 400여 년 전의 것이다. 이 의복은 저고리 1점, 직령포 4점, 바지 1점으로, 당초에는 전남도 지방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되었다가, 1980년 중요민속자료로 승격되었다.
▶충효리 정려비
광주 북구 충효동 마을 입구에 있는 정려비는 충장공 김덕령 장군과 부인 흥양 이씨, 형 덕홍, 동생 덕보 등 일가족의 충․효․열(忠孝烈)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김덕령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며 부인 흥양이씨는 일본군의 추격을 받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절개를 지켰다. 형인 덕홍도 의병으로 금산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동생 덕보는 효성이 아주 지극하였다.
비각의 건립 연대는 1792년이며, 그 뒤 몇 차례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비각은 앞면 3칸, 옆면 1칸으로 담장으로 둘러져 있다.
비각 앞면과 내부에는 여러 기록문들이 남아 있다. 기록에 의하면 정려비는 정조 13년(1789)에 세운 것이다. 이 정려비가 여느 것과 다름은 1788년 정조가 직접 '忠孝之里(충효의 마을)'라는 마을 이름을 지어 내리면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비석으로 세우라고 한 점이다.
김덕령 관련 시(詩)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군중작
鉉歌不是英雄事 현의 노래는 곧 영웅의 일이 아니니,
劍舞要須玉張遊 칼춤은 모름지기 옥장에서 추어야지.
他日洗兵歸去後 다른 날 싸움을 끝내고 돌아간 뒤에는
江湖漁釣要何求 강호에서 고기나 낚으리니, 다시 무엇을 원하랴.
▶ 春山曲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에 내 없는 불이 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충장공유사>
▶ 醉時歌(권필의 시)
醉時歌此曲無人聞 취해서 부르는 노래, 이를 듣는 이 아무도 없네.
我不要醉花月 나는 화월에 취하고 싶지 않고,
我不要樹功勳 나야 공훈도 세우고 싶지 않네.
樹功勳也是浮雲 공훈을 세운들 뜬 구름이요,
醉花月也是浮雲 화월에 취한들 뜬구름이라.
醉時歌此曲無人知 취하여 이 한 곡조 부르나 알아주는 사람 없네.
我心只願長劍奉明君 내마음은 다만 장검을 잡고 명군 받들기를 원할 뿐.
將軍昔日把金戈 장군은 지난날 쇠창을 잡으셨소
壯志中 奈命何 장한 뜻 중도에 꺾였으니 그 운명 어찌하리
地下英靈無限恨 지하 영령의 끝없는 한은
分明一曲醉時歌 분명 이 한 곡조의 취시가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