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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홍씨 족보(2008년판, 1985년판, 1930년대판)를 참고한 성석동 및 석문 선영에 있는 선조 묘소 설명 자료◇
12세 찬성공 홍주천이 1671년에 돌아가셨을 당시에는 고봉산 모당공의 묘소 인근 건좌(乾坐) 경향(庚向) 기슭에 임시로 매장했다가 17년 뒤인 1688년에 모당공 묘소에서 600m 정도 떨어진 현재의 토지로 이장했는바, 동 토지는 둘째 아들 정익공이 매입했거나 모당공 종중에서 임야의 일부를 떼어주어 찬성공의 묘소를 모시도록 한 것이 확실합니다.
고양시 성석동 710번 및 771-1번 토지는 330여년전 찬성공의 묘소가 처음 설치된 이래 찬성공의 장남 13세 정랑공 휘 만원, 찬성공의 손자 14세 휘 중적 및 중겸, 증손자 15세 휘 설보 및 철보 등 종가 계통의 중요 공동조상들의 묘소를 설치하여 종산으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그 후 종손이 당진으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종손가에서 이들 토지를 관리하기 곤란하자 종손 15세 설보의 2남 16세 시호의 후손들(시호의 4남 17세 낙사- 18세 진모- 19세 2남 학주-20세 우복)에게 위임하여 찬성공의 묘소와 종산인 이 토지를 관리하게 했던 것이 확실합니다.
그 후 일제 강점기인 1913. 5. 20. 그 당시 이 임야와 조상들의 묘소를 관리하던 20세 우복(1838-1917)의 단독 명의로 이들 토지에 대한 사정을 받았으며, 그 후 그 후손들 명의로 소유권이 이전된 상황인바, 이들 토지는 분묘 현황 등을 볼 때 본 종중의 명의신탁토지가 확실합니다. 그럼에도 이들 토지가 언제 매각되거나 토지 수용되어 찬성공의 묘소가 없어질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이상과 같이 이들 고양시 성석동 710번 임야(면적 8,169㎡), 성석동 771-1번 임야 (면적 8,244㎡) 및 성석동 786번 대지 (면적 631㎡) 등 10필지 총 21,598㎡는 330여년전부터 본 종중이 사용해온 종중 소유 토지가 확실하므로 이들 토지를 종중 재산목록으로 확정하고 ,
추후 현 등기 명의자들과 협의, 또는 명의신탁해지에 의한 소유권이전등기 청구소송을 제기하여 종중 명의로 소유권을 이전하고자,
지난해 2023. 6. 4일에 발족한 풍산홍씨찬성공종중을 설립한 후에 2023. 12. 11 정익공파종회에서 1차로 5천만원을 차입하고, 공조정랑공파에서 2023. 12. 19에 5천만원을 차입한 바 있고, 추후 정익공파종회에서 5천만원을 추가로 차입하고 2024. 2. 20 현재 임원 6명이 자발적 찬조금으로 3백2십만원을 찬조하여 우선 확보된 예산으로 종중 운영 및 소송에 따른 경비로 사용할 계획이며,
본 중중 홍만식 회장님과 송성재 자문 변호사의 책임하에 소송 준비(2024. 2. 21현재 99% 정도 소장 작성 완료)에 막차를 기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2023. 6. 4일에 발족한 풍산홍씨찬성공종중의 총무이사이며 본 카페의 카페지기인 제가 풍산홍씨 족보(1930년대판, 1985년판, 2008년판)를 참고하여,
12세 찬성공 홍주천의 큰아들 홍만원을 중시조로한 풍산홍씨공조정랑공파 종회의 선조 중심으로 참고(보충)자료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아쉬운 점은 그동안 종중 운영에 따른 전해오는 자세한 기록이 없고, 오래 전에 종사일에 참여한 분이 거의 작고하여 여쭈어 분이 없어서, 우선 그동안 본인이 종사일에 참여하면서 습득한 자료와 족보를 중심으로만 작성하였기에 자료가 미흡함을 참고로 알려드리며,
추후 종사일에 관여하셨거나 종원들이 선조들로부터 듣거나 알고 있는 사실을 찾아서 보완하도록 하겠습니다.
※ 아래의 토지중 노란색으로 된 토지가 2024. 1. 19현재 소송대상 토지( 10필지 총 21,598㎡)입니다
(고양시 성석동 선산에 있는 직계 묘소 설명 자료)
※ 관련 자료 : https://m.cafe.daum.net/pungsanhong12/bLtF/1?svc=cafeapp
■ 12세 홍주천(1618~1671) - 고양 벽제 성석동 간촌신좌(間村辛坐)
(1985년판 족보)
ㅇ 홍주천과 그의 부인 사망과 묘소 및 묘비 건립 현황
※ 1664년 첫째 부인 사망(고봉산 신좌(辛坐) 을향(乙向)의 기슭에 임시로 매장)
※ 1671년 선군(주천) 사망(고양(高陽)의 고봉(高峯) 선영 건좌(乾坐) 경향(庚向)의 기슭에 임시로 매장)
※ 1673년 둘째 부인 사망
※ 1688년 세분 합폄[고봉(高峯) 아래 성동리(城洞里) 선영 바깥 언덕의 인향(寅向)]
※ 1693년 묘비 건립
(관련자료 https://m.cafe.daum.net/pungsanhong12/atYH/10?svc=cafeapp)
■ 13세 홍만원(1640~1704) - 고양 벽제 가묘당임좌유표석(可墓堂壬坐有表石) 매지용미
(1985년판 족보)
(2008년판 족보)
(1930년대판 족보)
(13세 홍만원의 묘비)
※ 홍만원은 1704년에 사망하였는데 묘비에 새긴 글을 보면 묘비는 사망후 5년 후인 강희 48년(숙종 35년, 1709년) 을축 5월에 동생 만조(당시 경상도관찰사, 도승지)와 조카 홍중하(당시 전라도 관찰사)가 세웠음을 알 수 있음.
■ 14세 홍중적(1658~1735) - 고양 벽제 독정리 신좌(辛坐) -> 묘소를 현 위치로 이전 -> 2016. 12. 4 표지석 설치
(2008년판 족보)
(1985년판 족보)
(1930년대판 족보)
※ 위 족보상의 위치는 인근 군부대의 부지로 수용으로 인해 1970년경에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였으나 주소가 정정되지 않았으며, 비석이 있었으나 무거워서 옮겨오지 못했다고 함.
※ 종원들이 선조묘를 수차례 찾아 성묘를 하였으나 표지석이 없어서 정확한 묘 주인을 모르고 있다가, 2016년 5월 7일 선조묘 참배시에 현재 선산 관리자인 고)홍석철, 홍석현 형제의 설명을 듣고나서 위의 성석동 선산도를 작성하였고, 당해년인 2016년 12월 4일에 현재의 표지석을 설치함.
■ 14세 홍중겸(1677~?) - 묘가☆당 좌유표석(墓可☆堂 坐有表石)
(1930년대판 족보)
※ 1930년대판 족보를 보면 15세 홍중겸의 아들 홍철보는 자식이 없어서 형인 홍설보의 3남 홍승한을 양자로 삼았으며, 묘지가 현재 홍중겸의 묘소 아래에 있는데 족보에 묘의 위치가 "선영하"로 기록되어 있음.
그리고 양자 홍승한의 묘의 위치는 조부인 홍중적(홍중겸의 형)의 묘소가 있었던 "독정리 신좌"임.
■ 15세 홍설보(1689~1742) - 묘가묘당건좌(墓可墓堂乾坐) -> 2016. 12. 4 표지석 설치
(2008년판 족보)
※ 위의 14세 홍중겸의 자료 참조
■ 15세 홍철보(1699~1720) - 선영하 좌
※ 위의 14세 홍중겸의 자료 참조
(고양시 성석동 선산에 있는 묘소중 직계가 아닌 묘소 - 25세 홍석현의 직계 묘소)
ㅇ 19세 홍학주(1805~1847) - 성석리간촌 건좌
ㅇ 20세 홍우복(1838~1917) - 벽제면 간촌
ㅇ 21세 홍승기(1872~1949) - 성석리간촌 건좌
ㅇ성석동 선산에는 위의 묘소외에 3기의 묘소가 또 있으나 현재로서는 누구의 묘인지 알 수 없으나, 족보에 의하면 22세 홍양식(1992~1947)는 묘소의 위치가 성석리간촌 간좌아고, 23세 홍학희(1913~1973)의 묘소의 위치는 성석리간촌 계좌로 되어 있어 위 3기중에 2기임을 알 수 있다.
※ 성석동 선산에 직계가 아닌 묘소의 세계도와 묘소의 위치
ㅇ 16세 둘째 홍시호(1709~1797) - 당진 성산 => 17세 셋째 홍낙사(1738~1792) - 당진 성산 => 18세 첫째 홍진모(1770~1822) - 당진 하원덕리 1 => 19세 둘째 홍학주(성석동) => 20세 홍우복(성석동) => 21세 홍승기(성석동) => 22세 홍양희(성석동) => 23세 홍학희(성석동) => 24세 홍기오 => 25세 홍석철, 홍석현(종산 관리자)
※ 참고자료 1 : 위 자료를 보아 종손인 16세 3형제가 당진으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종손가에서 이들 토지를 관리하기 곤란하자,(3형제의 대부분 후손들의 묘소는 당진에 있음)
종손 15세 설보의 2남 16세 시호의 후손들(시호의 4남 17세 낙사 ->18세 진모 ->19세 2남 학주 -> 20세 우복)에게 위임하여 찬성공의 묘소와 종산인 이 토지를 관리하게 했던 것이 확실하다.
※ 참고 자료2 : 2023년 6월 4일에 12세 찬성공 홍주천을 중시로한 풍산홍씨찬성공종중 창립 총회를 갖은 후에,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날짜 미정)에 선산 관리자인 홍석현(1956년생)님이 전화가 왔는데,
본인이 군대에 갈 무렵에 종원 여러 명이 찾아와서 아버지에게 종중 땅이라고 항의하다가 그냥 갔다는 내용의 통화가 있었음을 참고로 적는다.
이는 일제 강점기인 1913. 5. 20. 그 당시 이 임야와 조상들의 묘소를 관리하던 통정대부인 20세 우복(1838-1917)의 단독 명의로 이들 토지에 대한 사정을 받았는데,
그후 홍석현이 군대갈 무렵인 1971년 2월 27일에 특별조치법에 의해 23세 홍학희 명의로 소유권 이전함에 따라 종원들이 찾아가 항의한 것일 것이다.
특별조치법에 소유권을 이전한 홍석현의 조부인 23세 홍학희는 소유권을 이전하고 1년후에 사망하였기에 아버지인 24세 홍기오에게 항의했다고 본다.
(당진시 석문면 삼화리 선산에 있는 묘소 19기 설명 자료)
(16세 묘소 아래 3기)
■ 16세 홍경호(1707~1773)
ㅇ 2008년판 : 당진 석문면 삼화리 1302
ㅇ 1985년판 : 당진 고산면 성산리 임좌
ㅇ 1930년대판 : 당진 고산면 성산리 임좌
(2008년판)
(1985년판)
(1930년대판)
■ 16세 홍시호(1709~1797)
ㅇ 2008년판 : 당진 석문면 삼화리 1302 ㅇ 1985년판 : 성산리 축좌
ㅇ 1930년대판 : 성산리 축좌
(2008년판)
(1985년판)
■ 16세 홍최호(1721~1763)
ㅇ2008년판 : 당진 석문면 삼화리 1302
ㅇ1985년판 : 당진고산면성산리 너머리곡 좌
ㅇ 1930년대판 : 독정리 신좌
(2008년판)
(1985년판)
(1930년대판)
◇40여년간 총무 및 회장이었던 홍원희님과 대화를 나누고나서? 새롭게 알게 된 16세 3형제의 묘소 현황입니다.
첫째 홍경호 묘소는 현 석문 선영 인근에 있던 종산에 모셔져 있었는데 이장 당시 관이 썩지 않아서 관채로 이장하였고,(종산은 매매하여 석문 선영 재장단 경비로 사용하고 남은 금액은 종친 경비로 사용)
둘째 홍시호 묘소는 현 석문 선영의 그 자리이며,
셋째 홍경호 묘소 현 석문 레미콘 공장 인근(매매)에 있던 묘소를 석문 선영으로 이장하였다고 하네요...
(17세 묘소 아래 4기)
ㅇ 17세 홍희원(洪羲元) : 첫째 경호의 아들, 1735년 ~ 1809년, 부인 경주 이씨, 부여 서씨
ㅇ 17세 홍낙도(洪樂道) : 둘째 시호의 첫째 아들, 자는 성주, 1732년 ~ 1799년, 부인 김해 김씨
ㅇ 17세 홍낙사(洪樂泗) : 둘째 시호의 셋째 아들, 1738년 ~ 1793년, 부인 평택 임씨
ㅇ 17세 홍낙수(洪樂洙) : 셋째 최호의 양아들 (생부 시호), 자는 성연, 1738년 ~ 1799년, 부인 안동 권씨 = 카페지기 직계존속
(18세 묘소 아래 6기)
ㅇ 18세 (희원의 첫째 홍성모, 희원의 둘째 삼모, 낙도의 첫째 심모, 낙도의 넷째 원모, 낙사의 첫째 진모, 낙수의 첫째 응모)
(19세 묘소 아래 5기)
ㅇ 19세 (성모의 아들 대주, 심모의 아들 경주, 진모의 첫째 봉주, 진모의 셋째 범주, 진모의 넷째 혁주) => 카페지기의 직계존속인 익주는 시곡동 선산에 계심
대주(大周), 경주(敬周), 정주(禎周), 성주(聖周), 원주(元周), 재주(在周), 택주(宅周), 상주(相周), 필주(弼周),영주(永周), 위주(渭周), 봉주(鳳周), 학주(學周), 범주(範周), 혁주(赫周), 열주(烈周), 은주(殷周), 헌주(憲周), 덕주(德周), 정주(鼎周), 익주(翊周), 도주(道周), 욱주(郁周), 철주(喆周)
(20세 묘소 아래 1기)
ㅇ 20세 홍원모의 손자 우명
(풍산홍씨 족보(2008년판, 1985년판, 1930년대판)를 참고한 성석동 및 석문 선영에 있는 선조 묘소 설명 자료를 마무리하며)
15세 홍설보의 아들 4명중 3남 홍승한은 홍설보 동생인 홍철보의 양자가 되었으나, 3형제(홍경호, 홍시호, 홍최호)가 어떠한 이유로 12세 홍주천, 13세 홍만조, 14세 홍중적(동생 홍중겸), 15세 홍설보(동생 홍철보) 묘소가 있는 일산 석성동을 떠나 당진에 거주하게 되었는 지는 알 수가 없지만,
당파싸움이 심하고 풍산홍씨의 권력이 정점에 달했을 무렵에 태어난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풍산홍씨 홍국영(1748~1781)이 권력에 눈이 멀어 추심을 일어 정조에게 내쳐져 한양에서 추방되어 유배지인 강릉에서 병사(1781년)한 후에,
홍국영 사후 5년 뒤인 1786년에 "역적"으로 몰리고 풍산홍씨 집안이 몰락이 되기 시작했기에,
당시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16세 홍경호(1707~1773), 홍시호(1709~1797), 홍최호(1721~1763) 3형제가 홍씨 집안의 박해를 피하여 당진으로 거주지를 옮긴 것으로 추측이 되고.
종산 관리를 위하여 15세 홍설보의 2남 16세 홍시호(가선대부동중구부사)의 후손들(시호의 4남 17세 낙사 -> 18세 진모 - >19세 2남 학주 -> 20세 우복)에게 위임하여 찬성공의 묘소와 종산인 토지를 관리하게 했던 것이 확실하다고 사료되며,
일제 감정기인 1913. 5. 20 그 당시 종산과 조상들의 묘소를 관리했던 통정대부 20세 홍우복(1838~1917)의 단독 명의로 이들 토지에 대한 사정을 받은 후에 현재에 이르렀는데,
다만, 1930년대판 족보를 보면 첫째 홍경호와 둘째 홍시호의 묘소 위치를 보면 "고산면 성산리"로 기재된 것으로 보아, 당진에 주로 거주하시다가 사망시에 당진에 매장하였음을 알 수 있고,
넷째 홍최호의 묘소 위치는 "독정리 신좌"로 되어 있어 있는 것으로 보아, 형들보다 먼저 사망(1763년, 첫째 경호 1773년, 둘째 시호 1779년)하여 조부인 14세 홍중적 묘소가 있는 벽제 독정리(15세 홍철보의 양자인 승한의 묘소도 독정리 신좌에 위치)에 모셨다가,
묘소가 1970년경에 군부대로 수용됨에 따라 14세 홍중적 묘소와 함께 성석동 선산으로 이장하였고,(2016년 5월 7일 선조묘 참배시 홍윤희 당숙의 설명으로 추측함) 다시 고산면 성산리 너머리곡에 묘소로 이장 하였다가,(1985년판 족보 참조)
이곳 당진시 석문면 삼화리 1302선영의 묘소 재장단시에 현재의 자리에 묘소를 이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 자료 https://m.cafe.daum.net/pungsanhong/8gSV/10?svc=cafeapp)
그리고, 1930년대 족보를 보면 14세 홍중적, 16세 홍최호, 16세 홍승한의 묘소의 위치가 "벽제 독정리 신좌"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당시 군부대로 수용된 부지의 일부가 종산이었을 것으로 추측해 본다.
(당진 옛날지명 참고 자료)
첫댓글 첫째 홍경호 묘소는 현 석문 선영 인근에 있던 종산에 모셔져 있었는데 이장 당시 관이 썩지 않아서 관채로 이장하였고,(종산은 매매하여 석문 선영 재장단 경비로 사용하고 남은 금액은 종친 경비로 사용)
둘째 홍시호 묘소는 현 석문 선영의 그 자리이며,
셋째 홍경호 묘소 현 석문 레미콘 공장 인근(매매)에 있던 묘소를 석문 선영으로 이장하였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