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병 고무마개
전의수
승가대학 명예총장 종범스님. 나는 스님의 법문을 즐겨 듣는다. 홀로 있는 시간이 많으니 그러하거니와 알아듣기가 비교적 쉬운 이유도 있다. 법문 도중 듣기로는 스님의 세속 연세도 나와 크게 차이나지 않는 것으로 안다. 그래서 더 친근감이 가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유튜브로 들은 법문의 주제는 ‘불안(不安)과 안락(安樂)’이다. 내용 모두를 기억할 수는 없다. 다만 빈병고무(貧病孤無)라는 구절이 귀에 남아 여러 생각을 일으킨다. 얼른 외우기 쉽게 빈 병의 고무마개를 떠올렸다. 세상 걷는 길에 생기는 불안을 극복하고 편안하게 사는 불교식 수행방법을 일깨워 주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물론 나는 불교 신도는 아니다.
법문 중반을 지날 즈음에 늙은 사람이 겪는다는 빈병고무의 고통을 꺼냈다. 당신도 나이를 제법 먹으니 동병상련이라며 설명을 이어 갔다. 나이가 든 노인 대부분은 지갑이 비어 있고(貧), 이런저런 질병에 시달리고(病), 홀로 있는 외로움에(孤) 우울하고, 일이 없어(無) 고통스럽다고 했다. 새겨 보면 이것들은 따로따로 존재하며 노인을 괴롭히기보다 서로 연동하며 노후 삶을 힘들게 하는 게 아닐까 여겨진다. 아마도 내가 장차 맞을 입장과 비슷한 모습이 아닐까 하며 지금 나의 형편을 비추어 본다.
먼저 지갑 사정을 살펴본다. 스님의 설명과 달리 아직 내 지갑은 가득 넘치지도 않지만, 텅 비어 있지도 않다. 공직을 퇴직하니 공무원연금 제도에 힘입어 매월 일정액이 통장에 입금되고 있는 덕분이다. 때로 친구들 만나 소주와 삼겹살을 즐긴다. 시집과 자서전 격의 수필집도 낼 수 있었다. 귀여운 손주들에게 넉넉하지는 못해도 용돈을 건네며 할아버지 체면을 세우고 지내니 적어도 빈고(貧苦)는 벗어 난 듯싶다. 재주 없는 내가 직장 하나는 잘 선택했다고 여겨지는 대목이다.
몸뚱이 건강 상태를 돌아본다. 내 건강에 가장 고질병은 고혈압과 더불어 경동맥 일부를 혈전이 막고 있는 거다. 당장 생활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만 계속 진행되면 뇌졸중이 온다 해서 걱정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십 년이 넘도록 더 두꺼워지지 않고 발견 당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의사는 죽음을 맞을 때까지 경계하며 약을 먹으라 이른다. 그밖에 두 번의 허리 디스크 수술로 허리가 약한 탓에 오는 잦은 요통이 있다. 또 이년 전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다친 인대 파열로 무릎이 성치 않아 거동에 조금의 불편을 겪는다. 하지만 이런 것이 일상을 크게 방해하지 않으니, 병고(病苦)까지는 아니다 싶다.
외로움이 가져올 수 있는 괴로움을 살펴본다. 퇴직 직후 사람을 만나면 나이 들어 홀로 지내기에 책 읽기와 글쓰기가 좋을 거라며 권고하던 기억이 있다. 권고뿐 아니라 그렇게 마음먹고 실천해 왔다. 시와 수필 쓰기 공부를 한다며 이곳저곳 강의를 들었다. 그런 일상이 매양 일 줄 알았다. 이제 종심(從心) 중반을 넘으니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써 놓고 보면 그게 그 글이 아닌가. 시는 더더욱 힘들다. 시공을 초월하며 영혼을 담아내는 시를 쓴다는 게 내 자질로는 한계가 있음을 실감한다. 하지만 허접한 글이라도 쓰는 건 정신건강과 시간 관리에 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아내는 여기저기 배움터를 찾아다니고 봉사활동을 하며 밖으로 나가는 날이 많으니 혼자 시간을 보낸다. 그럴 때면 유튜브를 통해 법문을 듣고, TV로 세상 물정을 파악한다. 또 장구 치고 민요 부르며 무료한 시간을 채운다. 가끔은 친구들 만나 세상을 논하고, 글쓰기 동인회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한다. 더불어 노인시설 봉사단 일원으로 민요 봉사활동도 참여한다. 이러고 보니 고고(孤苦)의 노후도 아닌 듯하다.
끝으로 일이 없어 괴롭다(無苦)는 것. 이 또한 빈병고(貧病孤) 세 가지 고통에서 힘들지 않게 이런저런 일을 지으며 지내니 다행인가 싶다. 바깥에 일이 없으니 집에서 혼자 일을 찾는다. 마땅하게 할 일이 없으면 조용히 앉아 마음 여행을 즐긴다. 그간 해 온 마음공부 덕분이다.
이렇게 보니 종범스님이 일컫는 빈병고무의 고통에 시달리지 않는 나를 발견한다. 법문은 사람이 안락하게 사는 방법으로 ‘눈에 보이고 귀로 들리는 등의 것들이 무상(無常)한 것임을 깨달아 그것들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본성(本性)을 알아차리는 것’이라 가르친다. 그게 말같이 쉬운 게 아니라면서 꾸준하게 수행하라 이른다. 내일부터는 짜증 나는 일이 생기더라도 하늘 위 구름처럼 그냥 흘러가는 것이려니 무심히 쳐다보며 지내고 싶다. 이 또한 물 마시듯 쉬운 게 아니겠지만. (23.8.)
첫댓글 또 신변잡기를 주절거려 봅니다. 좋은 조언을 기다립니다. 더운 날씨에 건강하시구요.
잠깐 머물다 금세 떠날 생에 고난,고통이 많고 많습니다.
'빈병고무' 피할 수는 없는 생의 여로를 지혜롭게 가십니다.
더운 날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격려 말씀 감사드립니다.
전샘의 넉넉하고 고결한 인품이 끊임없는 자기수양과 마음공부에서 오는가 봅니다. 글 한마디 한마디 가슴에 새기며 잘읽고 갑니다. 많이 보고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