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하는 무쇠 종
기억과 추억 사이/손바닥 동화
2005-12-25 16:04:53
노래하는 무쇠 종
마을 언덕에 서 있는 느티나무는 정확한 나이를 알 수 없었습니다. 덩치 큰 청년 둘이 손을 맞잡고 껴안아야 겨우 닿을 정도로 우람했습니다.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 사신 할아버지도 나무의 나이를 모른다고 고개를 가로저었어요. 그도 그럴 것이 할아버지가 태어났을 때도 느티나무는 여전히 두 팔을 벌린 채 하늘을 찌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느티나무를 신성하게 여겼어요. 마을을 보호해주고 평화를 준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마을이 이만큼이라도 평화로운 것은 순전히 느티나무의 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느티나무에는 언제부턴가 커다란 무쇠 종 하나가 매달려 있었어요. 그 무쇠종도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두텁게 녹이 슬고 한 쪽 귀퉁이가 깨져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 비바람을 맞고 심심하면 마을 사람들에게 쇠망치로 두들겨 맞은 탓입니다. 어쩌다가 마을에 불이라도 나면 무쇠 종을 쳐서 위급한 상황을 알려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마을 사람들은 양동이며 바가지를 하나씩 들고 모여 들었어요. 그리고는 마을 가운데를 흐르는 도랑가로 달려가 양동이나 바가지에 물을 가득 퍼 담아 무작정 불에 뿌렸습니다. 무서운 줄도 모르고 활활 타오르던 불도 삽시간에 꺼져 버렸어요. 그 덕분에 사람들의 생명을 많이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무쇠종의 힘은 대단했습니다. 그럴수록 무쇠 종은 불만이 많았습니다. 마을에 불이 나면 왜 자신을 두들겨 패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몇 번씩 두들겨 맞고 나면 정신이 없었습니다. 몸도 퉁퉁 붓게 되고 맞은 자국이 선명하게 나타났어요. 며칠 동안 끙끙 앓았습니다. 그렇지만 이 고통을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무쇠 종이 비명을 지를 때면 몇 십 년을 함께 붙어 산 느티나무조차 실바람에 잎새를 흔들며 노래를 흥얼거렸습니다. 그렇지만 더 괘씸한 것은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은 저들끼리 졸다가 심심하면 나무에 올라와 무쇠 종을 두들겼어요. 그 바람에 마을 어른들이 몰려 나와 웅성거렸습니다. 나중에 아이들의 행동인 줄 눈치 챈 어른들은 아이들을 불러 놓고 호통을 치기도 했습니다.
“ 야, 이놈들아. 저 무쇠 종은 마을에 불이나면 사용하는 줄 모르느냐. 너희들 때문에 몇 번 속았다가 진짜 불이라도 나게 되면 어떡할 참이냐. 나쁜 놈들”
그러면 아이들은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어른들의 훈계를 듣고 나서는 아이들의 짓궂은 장난이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무쇠 종은 마음을 놓지 못했습니다. 그 탓인지 무쇠 종은 얼굴을 항상 찡그렸어요. 느티나무는 그것이 못마땅했습니다. 무쇠 종의 찡그린 얼굴을 보고 느티나무는 오늘 기어코 한마디를 던졌어요.
정말 못 봐주겠다. 얼굴 좀 펴고 살아라
“모르는 소리 하지 마, 심심하면 맞고 사는 내 마음을 누가 알기나 해”
무쇠 종은 도리어 화를 냈습니다. 오랫동안 친한 친구로 지냈던 느티나무조차 무쇠종의 마음을 몰라주었기 때문입니다.
“너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구나”
“그게 무슨 뜻인데”
“너는 맞을 때마다 아픈 것만 생각했지. 다른 사람들 생각은 왜 못하냐는 뜻이야”
무쇠 종은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느티나무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더 자세히 설명해 줘,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네가 두들겨 맞을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구한단 말이야”
“어떻게 생명을 구한다는 거지”
“네 노랫소리를 듣고서 사람들이 미리 도망을 치거든”
“노랫소리라고, 그건 내 몸이 아파 내지르는 비명인데”
“천만에 모두를 노랫소리로 알고 있어”
“거짓말하지 마, 매일 나와 붙어 있으면서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지. 난 듣지도 못했는데”
“ 난 분명히 들었어”
사실 느티나무는 며칠 전 마을사람들 몇 명이 서로 수군대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어요. 햇살이 쨍쨍 내리쬐는 오후였습니다. 그 때 무쇠 종은 햇살에 축 늘어져 신나게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 한 명이 잠에 곯아떨어진 무쇠 종을 가리키며 ‘햐, 저 놈은 우리 마을의 보물이야. 불이 나면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 사람들을 미리 도망치게 하거든' 하는 말을 느티나무는 잊지 않고 기억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느티나무의 말을 들은 무쇠 종은 기분이 좋았어요. 그렇지만 한 편 걱정도 앞섰어요.
"그러면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언제까지 고통을 참으며 희생을 해야 되지“
“너의 고통은 잠깐이지만 생명은 고귀한 거야. 네가 고통을 참게 됨으로써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거든. 얼굴을 찡그려도 알아주는 사람도 없어. 차라리 신나게 맞고 즐겁게 노래를 불러”
무쇠 종은 느티나무의 말이 서운했어요. 신나게 맞고 즐겁게 노래를 부르라고. 그 뒤부터 무쇠 종은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자신이 쇠망치로 두들겨 맞을 때 사람들이 생명을 구할 수만 있다면 그것만큼 값진 희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쇠 종은 생각을 고치기로 했습니다. 느티나무의 말처럼 신나게 맞으며 즐겁게 노래를 부르기로 했습니다. 쇠망치가 자신을 신나게 두들겨도 고통을 꾹 참으며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주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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