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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폼드 투데이 제6호 9월 26일
정통개혁신학의 근간 17세기 개혁 신학
김영규 박사 기고
역사적 정통 개혁신학의 바른 노선의 요점
한국 보수교회에서는 정통개혁주의 신학에 대해서 강조해 왔으나, 실제로 정통신학의 계보에 대해서 잘 소개되지 않았다.
최근 퓨리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소개되었어도 회중 교회적인 퓨리탄들이 대부분이 소개되었고, 진정 장로교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많이 소개되지 않고 미미한 정도에 불과했고 더구나 칼빈 이후의 유럽 개혁주의자들의 소개들은 극히 적었다. 이런 면에서 정통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면서 진정 정통개혁주의 신학을 잘못 본 셈이 된 것이다.
하물며 전체적인 개혁주의 신학의 전통에서 어느 것이 바른 노선인지에 대해서 전혀 알려지지 않은 실정이다. 사실 웨스트 민스터 신학자들 중 죠지 길레스피가 품고 있는 '가장 좋은 개혁주의 신학' 을 이해하기 위해서, 처음 진정한 어거스틴을 재현한 종교개혁자들에게로 돌아가서 베자, 쨘키우스, 우르시누스, 올레비아누스, 피스카토르, 유니우 스, 파레우스에 이어진 선까지와서 도르트회의 당시의 다 양한 개혁주의 신학자들 안에 들어와야 16세기 말과 17세 기의 퓨리탄들의 신학의 다양성들과 비교되어야 한다. 그런 비교와 노선결정에 있어서 중요한 논쟁점들이 있다. 이것을 정확하게 인식하여 그 논쟁점에 대해서 각각 어떤 입장에 서 있는가를 보고 바른 노선이 결정되는 것이다.
1. 그리스도는 택자들 위해서 죽으셨다.
개혁주의를 대표한 도르트회의 성직자들이 아르미니우스 나동의한 점은 하나님이 사람을 택하시되 타락한 자들을 대하셨다는 사상이다. 즉 선택의 대상에 대한 싸움이 중요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과 달리 그 성직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타락한 모든 이들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점에서는 동의하지 않았다. 역시 같은 성직자들이 중세의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하나님의 예정 안에 구원의 방편까지 포함한다하여 행위로 구원하는 방식을 예정 안에 포함시키는 것을 거절하였다.
예정론은 오직 은혜로 구원하신다는 사실의 구체인 내용과 확증을 의미하고 있다. 물론 예정론은 예정의 대상들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구원의 방식들에 대한 것도 예정론 안에 포함한다.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뜻과 의지는 작정의 개념을 사용한다. 그러나 개혁주의 안에서의 논쟁점은 예정론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예정의 내용에 대한 것이다. 좀 더 예리한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죽으셨을 때, 과연 누구를 위해서 즉으셨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이 물음은 16세기 후기에 개혁주의 신학 내의 쟁점으로 드러나기 시작하여 도르트 회의에서 첨예한 문제가 되었다.
이미 칼빈이 이런 문제들을 그의 요한1서 2장 1-2절에 대한 해석에서 드러냈다. 직접적으로 칼빈이 제한 속죄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확충으로 인하여 여기에 덧붙힌 것은 신자들 즉 그리스도에 의해서 제공된 속죄는 믿음으로 복음을 수용하게 될 모든 이들에게 미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어떻게 온 세상의 죄들이 속죄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이것을 핑계로 모든 유기자들, 따라서 사탄까지 구원을 인정하는 미치광이들의 잘못들을 생략한다. 이 모순을 피하기를 원하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위해 서 충분히 고난을 받으셨으나 택자들을 위해서만 유효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일반적인 해결은 학교에서 확고히 되고 있다. 비록 그럴지라도 그 말은 진리임을 나는 고백한다. 그런데도 현 구절에 적합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요한의 의도가 모든 교회에 공통적으로 이것이 선한 것이라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모든 이들 아래서 유기자들을 이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앞으로 믿을 자들이고 세상의 다양한 재난들로 말미암아 흩어졌던 자들을 의도하였다".
여기에서 칼빈은 그 당시 학자들 사이의 건전한 해결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세상에 대해서 충분하되 그 실제적 예인 적용에 있어서 택자들에게만 유효하다는 주장이였음을 확증하고 있다. 그러나 칼빈 자신은 그 해결에 조건을 더 달았다. 즉 거기에서 칼빈은 모두란 말을 문맥의 정확한 뜻과 상관없이 유기자들을 제외한 택자들로 이해하였다는 점이다. 이런 칼빈의 입장이 도르트회의에서 다시 확증되었다.
즉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주장인 "그리스도는 영생을 위해 택한 그들을 위해서 죽을 수 없고 죽어서는 안되며 죽지 않았다(Christum pro iis, quos Deus summe dilexit, et ad vitam aeternam elegit, mori nec potuisse, nec debuisse, nec mortuum esse)" 는 명제를 그들이 공히 부정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아르미 니우스는 칼빈의 예정론과 같은 전통적인 예정론이 선교 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앞세웠다. 이런 입장은 웨슬레주의의 일반적인 입장이다.
그러나 구원의 근본원리가 인간론 중심으로 되어서는 안 된다. 카톨릭은 세례관(화체설)을 통하여 신앙없이 모든 지역주민들을 그리스도인으로 삼아 지역의 국가교회로 발전할 수 있었다. 역시 신앙으로 의롭게 된다는 구원론을 가 지고 종교개혁에 임하였던 루터주의자들도 세례관에 있어서는 카톨릭적인 정신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벗어나지 못하여 실제로 믿음이 없어도 그리스도인으로 삼는 길을 열어 놓았고, 그것에 의해서 독일의 국가교회로 발전되어 지금 까지 남아 있다. 웨슬레주의와 침례교도 믿음에 의한 구원을 강조하고 있으나, 전자는 아르미니우스의 입장에서 이 신칭의 교리를 취한 것이고 침례교는 같은 믿음의 원리에 의해서 유아세례를 부정하고 있다.
다만 침례교적인 퓨리탄인 존 스미스와 같은 이는 어거스틴의 참된 신앙의 개념을 받아들여 역사적 신앙 혹은 지식 신앙, 기적 신앙, 일시적 신앙을 비판하여 교회의 순수성을 보전하고자 하였다.
이런 비판의 최소한 선에서라도,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 안에 일어나는 신유 은사들을 바로 참된 신앙의 결과인 것처럼 함부로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어떤 사람에게 계시나 이상이 임하였다면, 그것이 두 사람 이상의 검증없이 교회안에 공적으로 선포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성경 계시가 종결되었다고 믿는 것은 교회의 기초로서의 그런 계시가 종결되었다는 것을 믿을 뿐만 아니라, 성령이 성경밖에서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항상 성경과 더불어 성경을 통하여 역 사하신다는 의미에서 종결되었다는 말이다. 참된 신앙의 정의에 대한 퓨리탄 침례교인의 좋은 어거스틴 주의에도 불구하고, 침례교가 유아세례를 부정하거나 재세례를 주장하는 경우, 혹은 가시적인 중생의 체험과 확신을 요구할 때, 거기에 아르미니안주의를 열어놓은 것이 된다.
그에 반해서 개혁주의자들은 신론에서 뿐만 아니라, 구원 과 교회에 관련해서도 예정론을 강조하였다. 신앙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성령의 열매이며 그 근원은 하나님의 영원 한 성정에까지 올라간다는 것이다. 예정론을 통하여 구원 에 있어서 인간의 역할을 전적으로 부정하였고, 그런 예정 론은 보이는 교회 안에서 아무도 하나의 지체를 오용하지 못하게 하는 근본 뿌리가 되었으며, 동시에 잘 믿는 자에게는 큰 위로와 확신을 가져오는 교리이다.
특별히 순전히 영적이고 오직 하나님 안에서 감추어진 비밀로 남아 있는 예정론 사상은 믿지 않는 일반 시민에 대해서도 진정한 인간 존중의 기틀이 되는 것이요, 가난하고 무시받는 자에 대해 서도 강한 사랑을 나눌 수 있게 하고, 반면에 보이는 교회의 부패와 사회부패에 대해서 비판정신과 혁명정신의 원 동력이 되게 한다.
루터주의는 이신칭의 교리만 가지고 어느정도 의식적이고 제도적인 교회와 그런 종교사회를 비판하는데 성공하였어도, 구약을 파괴하였고 성화(구원의 서정)를 도외시하는 결과를 낳았지만, 칼빈은 예정론에 의해서 참된 교회를 정 의함으로 복음의 순교자들과 나그네된 자들을 변명할 수 있었다.
즉 예정론은 개척하는 교회에 신실과 정성을 제공 할 뿐만 아니라, 개척된 교회에 내적인 성숙을 가져다 준다. 권징에 있어서도 교회가 흔들리지 않게 하고 진정한 화해와 용서의 밑거름이 되게 한다. 칼빈의 주장대로 권장의 목적은 사람앞에 정죄되어도,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는 영원히 정죄받지 않고 구원받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1638년 스코 총리는 그리스도가 모 드 든 이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미니안주의, 혹은 일명 카 메론주의와 박스터주의를 사랑으로 개혁하였으며 웨스트민스터 성직자들도 도르트 회의의 타락 후 선택설 정도만 허용하였다. 이런 고백의 선은 장로교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선명하고 확고한 것이다.
19. 20세기와서 선교에 방해 된다고 하여 구미의 보수주의 개혁교회안에서도 제한속 죄와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포기하려는 경향은 우리가 이 미확인한 바있고 한국장로교회도 그런 위험을 안고 시작하였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유기자를 위해서도 죽으실 만큼 충분한 은혜를 강조하다보면, 유기자의 구원까지 그리스도와 교회박에 구원을 허용하는 식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이미 웨스트민스터 성직자중에서도 평화주의자인 리차드 박스터와 절친한 에드문트 칼라미 (Edmund Calamy)는 요한복음 3장 16절에 대한 논쟁 에서 그리스도를 주신 하나님의 의도는 택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유기자를 포함한 모두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모든 이에게 충분하다 하였으며 그에 의해서 택자를 위한 절대적 의도, 유기자에 대한 조건적 의 도라는 용어를 사용하기까지 하였으나, 그래도 그의 주장은 아르미니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보편구원과 거리가 멀고 일부 도르트회의 성직자들의 입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죠지 길레스피에 의해서 카메론과 아미롤드가 그 와 비슷한 조건적 구원을 주장하였다고 논박하였을 때, 칼라미는 해명하기를 자신의 말은 유기자에 대한 은혜의 어떤 경륜 (ea administratio)에 대한 것이라 하였다. 웨스트 민스터 총회 석상에서 이런 칼라미의 언변이 유일한 예외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아르미니우스주의적이고 에큐메니칼적인 칼빈을 발견하려는 자가 칼빈연구 의 대표자들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칼빈 자신에 의해서 섭리에 관한 특별논고(De occulta Dei providentia)를 통하여 종결된 것이고 17세기에 비로 소리베트(A.Rivet)와 불란서 쇼무르학파(J.Camero. M.Amyraut) 사이에 칼빈의 예정론에 관한 논쟁에서 좋 결된 것이다.
역시 같은 경향으로서, 비록 창조전 선택설이라 할지라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예정의 주체로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강조하여 제한속죄를 포기하려는 바르트주의는 루터주의(종교개혁 주저서에서 희미하게 나타나는, 언약의 주체가 그리스도라는 사상)는 될지언정, 역사적 정통개혁주의와는 거리가 있음에 틀림없다.
2. 언약의 통일성
칼빈의 신구약 통일성을 말할 때, 단순히 기독론적인 통일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의 통일성이요 구원의 길과 서정에까지의 통일성을 의미한다.
비록 칼 바르트가 유태인을 배척하는 독일의 국가교회에 대해서 바른 성령론 이외에도 신구약 통일성 즉 칼빈의 예레미야 추석에 따라 율법은 복음의 한 형식이요 율법보다 복음이 먼저라는 사상을 가지고 저항하였지만, 아직도 그의 신구약의 실체의 통일성에 관한 견해는 기독교 강요의 증거에 머무른 기독론적인 통일성이였다. 일찌기 독일 칼빈연구자들의 대표자들과 오토베버(Otto Weber)의 제자들의 학위논문들은 이 선에 굳게 서 왔다.
그러나 칼빈의 증거 전체를 볼 때, 터툴리안의 삼위일체의 통일적 경륜과 어거스틴의 삼위일체의 경륜적 통일성이 칼빈의 언약의 통일성 뒤에 깔려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런 칼빈의 신구약 실체의 통일성이 정통 개혁주의안에서 계 속 되었고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현저히 고백되고 있다.
따라서 정통 개혁주의에서는 루터주의가 대화하기를 원하 고 만나기를 원하는 코케이우스의 성경신학적 언약론을 비판없이 지나치지 않았다. 구약의 성도와 신약의 성도 사이에 죄의 용서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세언약들이 신구약을 통해서 발전된 것(doctrina de triplici foedere) 도 아니다. 계시의 점진성이 신구약 사이의 실체의 통일성을 파괴하지 않는다. 이렇게 개혁주의가 독특하게 주장해 온 신구약의 실체적 통일성이 복음주의 신학아래에서 현 금 상당히 약해지고 있다.
즉 신구약 서론, 성경의 낱 권의 개별적 신학 연구, 계시의 점진성, 유기적 영감론의 광대한 적용, 적응계시 이론(Accommodation-theory) 아래 보 수주의 서구 신학계에도 가블러(J.Ph. Gabler)의 성경신 학(theologia biblica)의 개념등과 같은 계몽주의 시대의 산물인 루터주의적 신신학(Neologie)의 영향이 이처럼 강도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은 심히 우려되는 일이다.
3. 유한이 무한을 받지 못한다
(finita non recipiunt infinita)
기독론에 있어서 종교개혁자들의 통일적인 고백인 구약의 여호와에 대한 기독론적인 이해는 보존되어야 한다. 칼빈에 따라 여호와 이름 아래 그리스도의 현현 (manifestatio)은 인정하되 구약에서의 그리스도의 실 체적인 육체(substantiale corpus)는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루터주의처럼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음이 신성과 인성의 실제적인 통일성으로서 이해될 수 없 을 것이다. 즉 신은 죽었다는 신학이 루터주의안에서만 가능하다.
이런 면에서 보면 아타나시우스의 신조와 칼케톤 신조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루터주의와 칼빈주의 톡특성 (Extra illud Calvinisticum) 사이에는 약간의 충돌이 있다. 다시 말하면 루터주의는 두 본성의 실제적 통일성을 주장하되 육체밖에 로고스가 없다(neca ro carnem)는 주장이지만, 쯔빙글리 이래 개혁주의의 경우는 그리스도의 신성 (totus)이 인성 안에 거하는 인격적 통 일성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그래도 신성(totus)은 인성 밖에 있다는 주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주의의 기독론적인 전통에 있어서 구약의 그리스도와 성육신된 그리스도 사이에는 난제가 있다. 그러나 그 난제에 대한 해결에 있어서 개혁주의 내의 다양한 노선과 관련하여 또렷한 기준이 되지 못하고 있다. 아마 이런 입장은 개혁주의의 독특성이었다고는 할 수 있으나, 개혁주의의 보편성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이런 입장에 대해서 개혁주의자들 사이에 큰 논쟁이 되었 거나 모두에 의해서 또렷이 주장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분 교부들의 입장에 머물고 이런 방향에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드러내 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4. 장로교 정치원리는 성직자 개인에게 (uni) 있는 것 이 아니라 성직자 회자체 (unitati)에 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당시 문서출판을 통해서까지 장외논쟁한 인물중에 개혁주의 장로교 신학적 입장을 변명한 가 장 대표적 인물들로서 샤무엘 러더포드와 스티븐 마샬, 죠 지 길레스등을 들 수 있겠다. 샤무엘 러더포드는 스코틀 란드 교회개혁시에도 아르미니안주의와 싸우는 글을 발표하였지만, 웨스트민스터 회의의 논쟁과정에서도 회중 교회의 입장과 에라스투스주의에 대한 반박의 글들을 발표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총회후에도 러더포드와 뜻을 같 이하여 또한 다니엘 코드레이가 회중교회를 비판하는 중 요한 논쟁의 책을 썼다.
극단의 분리주의자들인 브라운주의들과 달리 상당히 건전한 회중교회의 입장은 화란과 신대륙에 있는 회중교회들이었다. 이미 화란에서 장로교 입장에 강한 John Paget(?-1638)과 회중교회주의자들 사이의 싸움이 잘 알려져 있었지만, 특별히 웨스트민 스터 성직자들에 의해서 독립교회주의를 주장하는 자들 의 주장의 근원으로 돌아가, 좀 더 건전한 회중교회주의자들의 중심인물의 교회관들도 비판받게 되었다.
주 비판의 대상인물들은 Henry Ainsworth (1570-1622), Willam Ames(), Henry Jacob (1563-1624), Francis Johnson(1562-1618), John Robinson(1575-1625).ThomasHooker(1586-1647),
JohnCotton(1584-1652),JohnDavenport(1597-1670).Hugh Peter(1598-1660)등이었다.
이 논쟁의 중심은 교회의 열쇠가 누구에게 있는가, 교회언약(Church-Cov
enant) 으로 연합되어 날을 정하여 공적인 예배와 성례를 위해 모인 조합 (company)으로서 교회 회중 자체가 완전한 교회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장로교 주의자들의 비판은 교회의 열쇠가 믿는 자들을 대표하는 베드로에게도 아니요 교회나 사도를 대표하는 한 개인 베드로에게도 아닌, 사도들을 대표하는 베드로에게 주어졌다는 대답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제정된 공직자들을 가진 지교회들로 구성되되, 한 고위성직자(one Lord prelate)나 한 머리교회 (one head-Church) 혹은 주교회 (the chiefe Church)와 결합된 매어있는 교회들이 아니라, 한 정치 형태아래서 다스리는 직책자들과 다스림을 받는 여러 지교회들로서, 그들이 모여 가시적으로 교통하는 지역교회, 국가교회, 세계교회가 완전한 교회라는 것이 장로교의 근본사상이다.
또한 그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결정에서와 같이 성경에서 증거된 대부분의 교회들은 회중교회나 관구교회가 아 니라, 장로교 정치형태를 가진 교회라고 주장하고 있다. 특별히 사무엘 러더포드에 따르면, 회중교회의 교회관은 G. Voetius의 동의이외에는 전유럽개혁주의들(J.Calvin, Th. Beza, Peter Martyr, H.Zanchius, F.Junius, D.Pareus, W.Whitaker, Tilenus, Professors of Leyden-J.Polyander, A. Walaeus, A. Thysius, A. Rovetus - J.Piscator, W.Bucanus,)로부터 인정이 되지 않는 주장으로서 그 근원에 있어서 아르미니우스주 의자들과 소키니우스주의자들의 주장으로 돌리고 있다.
한편 같은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스코틀란드 총대인 Robert Baillie는 독립교회의 참된 근원을 재세례파에게 돌리고 있다.
에라스투스주의에 대한 비판 서적들 중에서도 죠지 길레스피의 아론의 싹난 지팡이 (Aaron's Rod Blossoming: or The Divine Ordinance of Church Government, London 1646)이란 책이 개혁주의 장로교 입장을 변명한 결정적인 책이었다. 거기에서 뿐만 아니라, 유고작으로 출판된 그의 논문집에서 카톨릭 교회 와 영국 국교회의 정치원리들을 비판하는 장로교의 원리 를 한 마디로 장로회 자체(unitas)에 교회의 열쇠가 주어졌다는 원리로 설명하였다. 이 회 자체(unitas)에 주어진 권리와 회중교회 지도자 토마스 후커의 (그것만이 교회 직원을 선출할 권리를 갖는) 본질적인 교회전체 (Totum essentiale)에게 주어진 권리 사이는 구별되어야 한다.
이런 장로교의 원리는 어떤 형태로든지 한 회안에서 혹은 그 회를 넘어서 어떤 한 개인에게 권리가 이양되는 모든 교 회의 정치활동을 배제하면서도, 교회의 정치활동도 교회의 성격에 포함시킨다. 지교회로서 완전하다고 보지 않는 다. 지교회 밖에 노회나 총회를 두고 있다. 다만 지교회 안에 다스리는 장로가 있고 가르치는 장로가 의장으로 하는 장로회인 당회가 있지만, 지교회의 당회와 같이 다스리는 성격으로 노회가 있는지에 대한 문제는 어려운 문제로 남 아 있다. 그러나 적어도 노회 안에서의 목사들과 장로총대 들 사이에 동등성이 강조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스코틀란드의 교회 전통에서 회를 대표하는 상비적인 인물들(예 를들면, a perpetual moderator)이 있었다라기 보다는. 그 때 회의 중에서 결정되었던 의장들이나 위원회들, 총대들이 있었다는 것은 오래된 바른 가르침이 된 것이다.
5. 세속정치와의 교회의 독립성
칼빈에게 있어서 저항권은 교회안에서의 저항권을 인정 하고 관원에 대한 저항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저항방식이란 오직 성경 이외에 다른 저항방식을 인정하지 않았다. 칼빈의 이런 저항정신에는 전제해야 할 특별한 원리들이 있었다.
첫째로 칼빈이 그리스도의 영적인 왕국(Spirtuale Christi regnurn)과 시민정체 (civilis regimen, civilis ordinario, regnum politicum) 사이 를 왜 구별하였는가가 중요하다. 이 구별은 단순히 질서와 법의 차이가 아니라 거기에 속한 것들은 크게 구별된 것들이다는 것(res esse plurimum sepositas)이다. 전자는 하나님의 왕국, 참된 의, 영생의 축복에 관련된 하나님의 순수한 지식(pura Dei notitia), 참된 의의 본성 (verae iustitiae ratio), 하늘의 왕국의 신비 (regni coelestis mysteria)와 같은 하늘의 것들(res coclestae)이라 부르고 후자는 정치(politia), 경영(aeconomia), 모든 기술들 (artes omnes mechanicae)과 자유학문들(disciplinae liberales) 등과 같은 땅의 것들(res terrenae)이라고 부른다. 문제는 후자의 요소들 안에서 전자의 것을 찾거나 그 안에 포함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왕국에서는 땅의 정치체제가 민주주의이 나 공화정이냐, 왕정이냐가 중요하지 않다. 즉 교회는 "사람들 사이에 너가 어떤 조건에 있든, 어떤 땅이나 종류의 법아래 살든 중요하지 않다(nihil referre, qua sis apud homines conditione, cuius gentis legibus vivas)". 그러나 이런 지식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부패된 인간에 관한 지식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있다. 따라서 윤리적 혹은 정치적 질서의 씨로서의 인간이성(humana ratio) 혹은 이성의 빛(lux rationis)이나 그로 인한 인간 활동들을 결코 무시하지 않고 어떤 영원한 목적에 이바지하는 성격에서 도용적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특별한 이해 가 있다.
셋째로 이것과 함께 저항방식으로서 오직성경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예외가 있었는데, 그것은 사도행전 5장 29절에 근거하여 지배자에 대한 복종이 하나님에 대한 복종보다 앞서지 못한다는 점이다. 주님만이 왕의 왕이시다는 것이다. 칼빈은 그 복종의 질서를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주님은 "모든 것 전에 동시에 모든 것 위에 들어야 할 자이다.
따라서 우리보다 높은 인간들에게 우리가 복종하되, 그분 안에서 외에는 복종해서는 않된다(Dominus ergo rex est regum, qui ubi sacrum os aperuit, unus pro omnibus simul ac supra omnes sit audiendus. lis deinde qui nobis praesunt hominibus subiecti sumus: sed non nisi in ipso)”. 이런 사도행전 5장 29 절에 대한 입장이 후에 개혁주의 안에서 John Poinet. Christopher Goodman(1520-1603)과 John Krioy 의 저항개념으로 발전하게 된다.
동시에 역사적으로 유럽개혁교회(우르시누스이래)와 장로교 전통에서 교회의 주권을 관원에게 허용하는 에라스투스주의를 단호히 거절해 왔다. 특별히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유일한 왕이시오 머리이시라는 고백이 장로교회의 확고한 입장이다. 이런 식으로 정경분리는 가장 기본적이고 확고한 개혁교회의 입장이었고, 그러면 어떻게 분리할 것인가에 대한 그 분리의 정신도 칼빈의 정신을 유지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세속세계에 대한 이해도 적극적이다. 창조계시 혹은 일반 계시에서도 초자연적인 은총으로 이해하는 정도로 하나님의 지식을 발견하고자 하나, 그 계시의 본질적인 성격을 오직 성경에서만 인식한다는 점에 강조를 둔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성경의 창조론으로 돌아가지 않고, 창조의 주체와 창조의 근원과 방식, 목적 및 그 종결로 돌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에 대한 성경계시를 파괴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그 계시는 모든 계시의 기초이다. 여성 문제와 관련하여 바울의 입장을 고집하는 것은 이런 면에서 정당하다.
그리스도인의 의식은 사회윤리나 과학적 의식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오직 성경만 먹고 마시는 삶의 차이일 것이다. 사실 사회나 국가가 우리에게 특별히 요구하는 것은 함께 운동하고 같은 의식을 갖는 것이 아니라 사회나 국가에 궁극적 해답을 주는 것이다. 칼 빈의 욥기 주석에서 나타난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도 차원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알리는 것이 다. 인간들도 일하고 영적인 실체들도 일하고 하나님도 일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하시는 차원과 방식이 다른 것이다. 모든 일에 있어서 그분 안에서만이 시작과 종결이 있다.
다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원수를 어디까지 사랑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범위와 관련하여 칼 바르트(에밀부 르너와 파울 알타우스에 반대하여)처럼 일반은총과 특별 은총이란 이원론을 거절하고 철저히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자유롭고 주권적인 하나의 은혜만을 강조하는 신학에 대해서 현금 심사숙고하는 경향이 있다. 즉 칼빈의 경우처럼 보편은혜 혹은 일반 은총에 대한 개념이나 입장이 성경에 대한 고백에 대한 도입의 성격에서 들어오거나 하나님의 섭리의 영역에서 이해한다는 것이다.
일반은총과 특별은총,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구별이 결코 민족주 의나 이성주의에 대한 근거로서 등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자유롭고 주권적인 은혜 아래 복음만 포함한 것이 아니라, 율법, 심판, 죽음과 지옥까지 포함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마치 바울(고후 3:1~12)과 어거스틴의 정신인 것처럼, 그것은 그가 성경이란 개념보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개념을 더 좋아하는 정신과 비슷한 정신이 되어서는 않된다는 점에서 또한 바르트주의와 거리를 갖는 초심한 기준이 된다. 문화적 다원주의를 인정하는 방식은 이미 과거 미국 북장로교가 1902-3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 백서를 수정할 때부터 시작하였다.
중생되지 못한 자들에 의해서 행한 것들도 하나님이 명령할 것일 수 있고 유익 할 수 있다는 부분을, 1902-3년 이후 그것들은 찬양할 가치가 있고 그런 것들을 무시하는 것은 죄요 하나님께 불쾌 한것이라고 수정하였다. 또한 사랑과 은혜 사이의 구별, 유아로 죽은 모든 택자들이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유 아로 죽은 모든 아이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식으로 수정하였다. 그때 이래 장로교회에서 유아세례를 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런 문제들을 포함하여 현금 보편 은혜안에 일반적 총애 (favor in general)와 일반적인 선물들 (gifts in general) 사이의 구별은 종교적 다원주의와 대화의 방식
에서 나오고 있다.
6. 주일성수와 예배의식
칼빈에게 있어서 약사법을 제외한 모세의 법의 대부분을 도덕법으로 이해하였고 십계명안에 포괄할 수 있었다. 따라서 중생된 이후에 그 법의 사용 (usus legis tertius)을 멀어 놓았다 그와같이 세 4개명 안식일 준수도 도덕법으 로 해석하였고 중생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성취 한 의식적인 성격을 제외한 주일의 개념 아래에서 같은 방식으로 지켜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퓨리탄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은 주일만 지키고 도덕법으로 이 해될 수 없는 의식법에 속한 유대절기들을 지키려고 하지 않았다. 엘리자베드여왕시대에 이미 주일날 백성들의 오락을 위해서 공적으로 스포츠가 허용된 이래 (1583) 퓨리탄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니 인식일 논쟁은 Mr.Bound가 안식일에 관한 논문에서 주일은 유대인의 안식일처럼 지켜져야 하며 그 법은 도덕적이고 영원한 법이라 하여 주일을 세속화하는 스포츠나 오락게임들을 버릴 것을 발표하자, 대주교인 Whitgift가 출판된 그 책들을 회수하고 더 이상 출판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였던 일이 있는 후에도 계속 은밀히 읽혀졌다.
그러나 이런 정신은 역사적으로 카톨릭이나 영국 국교회 에 의해서 핍박의 대상이 되었다.
우선 첫째로 퓨리탄들을 핍박하기 위해서 1618년 8월 25에 처음 법정과 주교들이 결정되어 제임스 1세의 왕명으로 출판된 퍼스의 5개조 항이 결국 목회자들에게 강요되는 사건들이 있었다.
이 5개 조항은 성례를 무릎을 꿇고 받도록 할 것. 사적으로 병자에게 성례를 집행할 의무, 필요에 따라 사적인 세례집례의 허용, 이미 세례받은 어린애들은 주교에게 데리고가 견 신례(Confirmation)와 주교의 축복을 받을 것, 크리스마스, 부활절, 성령강림절, 승천절을 지킬 것 등이다.
둘째로 개혁주의 퓨리탄들의 번성을 막기 위해 소위 오락의 책(A Declaration to encourage Recreations and Sports on the Lord's Day)을 출판하여 목회자들로 하여금 읽도록 강요한 사건들이 제임스 1세 때 (1618)와 찰스 1세 때 (1633)에 있었다.
특별히 퍼스의 5개 조항은 스코틀란드 총회에서 불법 으로 통과되었기 때문에 계속 스코틀랜드 교회의 저항 의 대상이 되어 왔다가 1638년 총회개혁에서 처음 그 총회의 결정을 무효화하였다.
퓨리탄들의 순수성 (non- conformity)이란 이런 주일성수와 예배의식에 대해서 생명을 걸고 그 개혁주의 전통을 지키는데 있었다. 그리 고 이런 오락의 책에 대한 저항정신과 퍼스의 5개 조항에 대한 거절은 모든 퓨리탄들(장로교적인 퓨리탄들과 독립교회적인 퓨리탄들)에게 공통된 정신이었을 뿐만 아니 라. 역시 미국의 프린스톤 신학의 확고한 정신이었다.
유럽대륙에서도 이런 퓨리탄정신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인물들(G.Udeman
us, W. Teellinck, J.Spiljardus)이 1612년이해 강한 주일성수를 강조함으로 논쟁이 되기 시작하여 도르트 회의에서도 논쟁이 되었고, 1620년 이 후G.Udemannus, W. Teelinck와 Jacobs Burs사이 에 논쟁이 있었고, 기기에 꼬리를 이어 1621-1627년 사이에 남홀란드(Zuid-Holland)의 특별대회에 논쟁이 있었고, 계속해서 A. Thysius. A.Walaeus. F.Gomarus, A.Rivetus, G.Amesius등으로 이어지는 Hoornbeek, Heidanus, Coccejus 사이의 논쟁, Utrecht대학, Croningen대학내의 논쟁으로 발전하였다. 즉 기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퓨리탄들의 기본입장은 카톨릭주의와 영국국교회 자들의 주일의 세속화와 재세례파, 퀘커교도, 다른 이단들 이 주님의 날을 버리는 운동, 또한 이런 이단들에 대해서 관대하고 관용함으로 상업도시들이 세속화됨으로 주님의 날이 지켜지지 않는 상황에 반대하여 강한 주일성수에 대 한 입장을 표명하였다고 볼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 성직자 중 William Gouge는 사도행전 20장 7.11 절의 주석에 근거하여 24시간 주일성수를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서 몇 가지로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장로교인들은 예식서의 사용을 불법적이라고 하지 는 않지만, 정해진 예식서에 제한하는 것을 거절한다.
둘째로 장로교인들은 주일이외에 부활절, 성탄절 등의 절 기들을 지키지 않는다. 부활절은 Eostre라는 이방여신을 기념하는 축제를 기독교적으로 대체하였고 성탄절은 로마 의신 Saturn을 기념하여 제정된 것을 축제로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세례시 십자가의 상징을 하지 않는다.
넷째로 견신례(Confirmation)의 의식을 거절한다.
다섯째로 성만찬을 받을 때 무릎을 꿇지 않느다.
여섯째로 성만찬 예식을 사적으로 집례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장로교의 경우 지금까지의 예배의식들의 전 통으로 보아 이런 개혁주의 정신이 역사적으로 확고하게 인식되거나 바르게 가르쳐 왔다고 보기 힘들다.
17세기 개혁신학의 개관(槪觀)
1. 유럽대륙에서의 개혁주의 신학
칼빈의 직접적인 제자들로서 베자(Theodor Beza)와 다네우스(Linbert Danaeus), 비렐리우스(Matthaeus Virell이였다고 알려지고 있으나 16세기의 종교개 그늘에 있던 자들은 그들의 신학사상에 있어서 미리 종교개혁 신학자들로부터 동시에 영향받았다고 보는 것이 당연하다. 종교개혁 2세들은 대개 루터로부터 물론 쯔빙글리, 오클람파디우스, 블링거, 부써, 피터 페어밀리우스 멜랑히톤 등의 개혁자들로부터도 영향을 받았다.
쯔빙글리하거나 불링거는 조직적인 신학체계를 가진 책을 내지 못하였기 때문에, 칼빈의 영향은 당연히 이런 조직화에 크게 영향을 끼친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좀 더 교의적 소재들에 따라 외적으로 더 잘 정리한 개혁주의 학자는 피터 페어필리우스라 할 수 있지만, 내용상 칼빈의 영향권 아래에 있다. 비록 피터 페어밀리우스가 칼빈보다 조금 어리지만, 거의 동시대 인물로서 항상 가까이 있기를 원하였고 그의 총명과 능력을 크게 인정받았던 친한 친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칼빈 자신이 그의 신학에 대한 평가는 불링거선에 있는 것으로 평가하였다. 즉 바젤의 오에클람파디우스는 불링거에 의해서 계승되었고 페어밀리우스에 의해서 꽃이 피었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정론을 포함한 많은 신학적 입장에 있어서 칼빈의 입장에 동의하였다. 페어밀리우스처럼 이런 교의적 소재에 따라 교리를 조직화 한 인물로서 베른학자들인 볼프강 무스쿨루스(Wolfgang Musculus)와 아레티우스(Benedictus Aretius)를 들 수 있다.
무스쿨루스의 교의적인 입장은 절충적이었고 언약론에 있어서 두 언약론을 주장하였어도 아브라함과 영원한 언약과 자연보편적인 노아의 언약 사이를 구별하였다.
후대 스콜라적인 신학체계는 케커만 (B.Keckermann), 폴라누스(Polanus), 알스테드(H. Alsted) 등이지만, 알스테드는 이미 이런 스콜라적인 신학을 샤델, 쨘끼우스, 단니수스, 유니우스등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새로운 스콜라 신학은 성경으로부터 나온 성령자신의 신탁들로 정 의되고 있다. 가르침의 체계에 자신의 독특한 입장을 가 진 자는 안드레아스 휘퍼리우스 (Andreas Hyperius)이 다. 물론 그가 외적으로 교의학소재들에 따라 기술하고 있으나, 그러나 내용상 칼빈의 기독교 강요의 초판에서 얻은 인상처럼 예정론에 근거한 교회론위에 그의 신학체계의 골격을 잡고 인간타락전 교회(Ecclesia ante lapsum) 인간타락후 교회(Ecclesia post lansium) 영광의 교회(Ecclesia glorin) 가 소개되고 있다. 이것은 취리히신학으로부터 독립적이고 역시의 칼빈이 취하였던 취리히 신학적인 요소를 수용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중요한 사상을 이어 체계화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제롬 쨘키우스는 엄밀한 칼빈주의자로서 하이델베르 그에서 가르쳤다. 그러나 그는 10년동안 마르바흐 (Mahach)와의 예정론에 논쟁이고 있다. 물론 루 터주의안에서의 예정론에 대한 논 기혁주의 신학자들 의 영향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할 가 있다. 그러나 개혁 주의 신화의 특징적인 것이 드리는 같은 루터주의자들에 의해서 고백 '협화신조' (Konkurdienformel)에 대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논쟁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특 별히 하이델베르그 문답서를 펴낸 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안 우스의 신학들이 중요한 개혁주의 신학의 독특성을 이루 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첫째는 루터주의적인 그리스도의 보편편재(Ubiquitt)에 반대하는 칼빈주의의 독 특성(Extra-Calvinisticum)이라 부르는 기독론 논쟁이 그것이고 둘째로 이 기독론과 연결된 싱례론 논쟁이며 세째로 우르시누스와 논쟁이 된 에라스트스주의에 대한 문제이다. 처음 두 가지 논쟁점들은 루터주의로부터 구별된 개혁주의 신학의 특성으로서 고정되었다. 세 번째 문제는 개혁주의 신학 다양성안에 논쟁되는 문제로 남아 있게 되 었다.
그 밖에 개혁주의 신학의 특성으로서 루티주의적이고 제 세례파주의적인 반율법주의(Antinomianismus)에 대한 반대입장인 율법의 제 3사용은 이미 종교개혁주의 시대 에 형성되었던 특성이다. 문제는 이 우르시누스의 제자들 (F.Gomarus, Lubbertus Sibrandus, David Pareus) 사이에 예정론에 대한 입장이 도르트회의에서 타락 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 논쟁으로 첨예화하였다는 것이다. 오늘날 개혁주의 신학내에 남아 계속된 논쟁점이다.
우르 시누스는 언론에 있어서 Olevianus나 F.Junius의 자연 의 인약의 개념을 인정하는 것과 달리 칼빈의 언약의 통일성을 확고히 주장하고 있었고 예정론에 있어서도 칼빈위에 서서 그리스도의 구원은 택자를 위한 구원임을 세웠고 유기의 최종원인을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과 하나님의 영광에 찾았다. 이 논쟁점은 아르미니안주의에 대한 논쟁과 언약론에 대한 논쟁과 더불어 개혁주의 신학의 중요한 논 쟁점들 하나로 남아 있다. 어떻든 이들 제자들은 그가 루터 주의자들(루이 6세 때) 때문에 피신하여 프리데릭 3세의 아들인 Johann Casimir의 보호받아, 신학교가 세워졌던 노이스타트(Neudstadt)나 헤르보론(Herborn)에서 가르쳤던 제자들이다. 그러나 도르트 회의에 참석한 성직자 들 중 특별히 브레멘의 Matthias Martinius와 Ludwig Crocius의 제자중에 Johannes Cocceius가 그들의 제 자이였음을 관심할 필요가 있다. Samuel Rutherford는 Crocius를 루터주의 신학자들과 개혁주의 신학자들 사이에 두고 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도르트회의의 결정과 그 과정에서 나타난 예정론논쟁이 개혁주의 신학의 이전과 이후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
그 중요한 도르트회의는 이미 화란 땅에서 예정론논쟁 의 배경에 대해서 조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스트라스부르그와 제네바에까지 칼빈을 따랐다가 1544년 아가서 와 그리스도가 지옥까지 비하하신 문제에 대한 견해차이로 바젤로 떠나게 되었던 세바치안 카스텔리오 (Sebatian Castellio, 1515-1563) 가 칼빈과 베자의 예정론을 비판 하였는데, 사후에 출판된 그의 글(De Presdestinatione, 1578) 이화란에서 개혁주의적 입장을 비난하기 위해서 번역되었다. 1578년 그 번역자(Dirck Volckertszoon Coornhert)와 델프구역의 설교자들 (Donteclock, van der Linden)사이에 생긴 예정론에 대한 논의가 화란에 |서 예정론 논쟁의 발단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논의과정에서 델프지역의 설교자들이 칼빈과 베자의 견해를 포기하고 불링거 입장인 타락후 선택설을 옹호하는 입장을 택하였다는 점이다. 칼빈과 배기의 입장 에 의혹적인 델프의 설교자들은 타핀 (faffin)과 바스 팅기우스(Bastingius), 그 당시 레이든 교수이였던 단 네우스(Danaeus)와 우트레히트 설교자 헬미키우스 (Wernerus Helmichius), 그리고 프리네커 교수 리디 우스(Lydius)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들이 자문한 개혁주의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이 칼빈의 생각에 만족해도, 정확하게 그를 모범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였다고 말하면서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하여 중간입 장이 개혁주의 신학내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 당시 암스테르담에 젊은 설교자 아르미니아누스(Arminius)가 있었다. 그는 제네바의 베자밑에서 공부하였고 그 당시 그의 소문은 좋지 않았으나 신용을 얻고 있었다.
그런데 리디우스로부터 호의를 받은 터라, 자신의 스승인 베자의 개혁주의 입장을 옹호해주기를 기대하여 그에게 그 문제를 맡게 되었던 것이 아르미니우스에 대한 논쟁의 시작이였다. 아르미니우스에게 있어서 문제되었던 점은 예정의 대상이 누구이었느냐에 대한 것이였다. 1604년이 전에는 다만 개혁주의 전통에 있어서 칼빈, 베자, 유니우스의 입장에 대해서 논평하는 선에서 참여하였으나, 1604년에 처음 자신의 정의를 제시하였다. 그때는 대표적인 창조전 선택론자들인 유니우스와 트렐카티우스가 흑사병으로 죽게 되어 그 유니우스를 대신하여 아르미니우스가 되었을 때이다.
그에 의하면 선택의 근거는 예지된 신앙 (fides praevisa) 이요 따라서 예정의 대상은 타락한 인간 (homo lapsus), 창조해야할 인간(hormo condendus), 창조된 인간(homo conditus, home creatus)이 아니 라. 믿을 사람(homo fidelis)이다는 것이다. 믿음을 조건으로 선택설이란 이런 낱말에서 분명히 드러났던 것이 다. 이런 입장에 대해서 진지하게 문제화하였던 사람들이 Helmichius와 Plancius이다. 그들의 비판앞에 아르미니 우스는 자신의 입장을 위해 Sohnius와 Polanus에게 호소하였다. 아르미니우스의 동료이였던 고마루스는 이 당시에 그렇게 비판적이 아니였다. 아르미니우스의 견해는 새로운 것이 아니였다. 그런 견해는 스콜라신학에서도 추적할 수 있고 이미 영국에서 화이테이커(Whitaker), 퍼 킨스(Perkins)와 틴달(Tindall)에 의해서 반박된 바로 (Baro)의 주장과 네델란드에서도 레이든의 노장교수중 한 사람인 홀만(Holman)의 주장에 그 선례가 있었다.
이런 아르미니안주의는 칼빈, 베자, 피스카토르, 마르티르 페어밀리우스, 쨘키우스, 우르시누스의 선에서 이어지는 주장과 벗어난 주장이였고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앙고 백들(Confessdio Gallicana 1559, Art.XII; Confessid fidei et doctrinae per Ecclesiam Reformatam Regn Scotiae professae 1560, Art. XVII; Thirty-Nine Articles 1552,1562, Art. XVII; Lambeth-Articlel 1595, 81; Irish Articles of Religion 1615,812-13 과도 벗어난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르트 의가 열릴 쯤에는 고마루스, 페스투스 홈미우스 (Festu Hommius), 트리글란드(Trigland)가 그런 주장을 하였다.
그 외에 고마루스 제자들이라 할 수 있는 Hieron. Vogelius와 Casp. Sibelius가 그런 옛 타락전 선택설의 입장에서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도르트회의 참석자들은 타락후 선택설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레이든 학파의 대표적 학자들 (Polyander, Walaeus, Thysius, Lubbertus)은 타락 후 선택설 입장이였고 도르트회의에서 그의 글이 거의 채 택된 Bogerman의 경우 항변파들이나 영국과 브레멘 대표들에 대해서 반대하였다고 하여 타락전 선택설 입장에서 있는 것은 아니였다. 브레멘 대표들은 처음부터 신뢰받지 못하였다. 그들은 온화한 멜랑히톤주의자들이라 평하기도 하였다. 그들 중 Martinius가 Gomarus과의 언쟁이 있었고 아르미니안주의에 가까운 입장을 가진 Vortius과 교통을 가졌다. 이 Martinius와 일치하였던 자들이 또한 영국에서 온 joh. Davenant와 Samuel Ward이였다. 주교였던 Balkanqual민이 타락 선택설의 경향을 가졌으나, 다른 원인 때문에 Gomarus의 입장에 반대하였다.
특별히 Gomarus가 과거 개혁주의 신앙고백에 근거하여 타락전 선택설 입장을 표명하였을 때, 영국 대표자들이 감히 다른 나라의 신앙고백에 대해서 판단한다고 하여 불쾌해 하였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물론 진술의 과정에서 영국의 39조항 17조에 있는 'eos quos in Christo elegit ex hominum genere'까지의 귀절에 근거하여 영국교회가 예정의 대상에 대해서 결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 던 것인데, 바로 이어진 'a maledicto et exitio libere' 이란 어귀를 놓쳤던 것이었다. 이 문구에 따르면 영국에서 유일하게 예정의 대상을 타락한 인간(genus hominum lapsum)이었다고 해석할수 있는 고백서가 되었다.
구체적으로 쟁점이 되었던 예정의 대상에 대해서 영국 대표자들, 하이델베르그 대표자들, 제네바, 브레멘, 엠덴, 벨직, 북부 홀란드, 젤란드, 우트레이트, 프리스란드, 흐로링겐에서 온 대표자들이 거의 예정을 대상을 타락한 인간(homol lapsus)으로 제시하였던 것이다. 다만 Gomarus만이 전 인류로부터 (egenere universo humano) 택하였다고 주장하고 남쪽 홀란드 대표자들은 결정하지 못한 입장에 서 있었다. 결국 Gomarus도 다수의 결정을 인정하는 쪽으로 나아갔었던 것이나, 이런 타락후선택설의 입장으로 몰아가게 한 주 인물이 Molinaeus이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문제는 타락전선택설에 대해서 도르트회의가 부정적으로 결정하였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첫째로 영국 대표자들과 Gomarus 사이에 생긴 논의는 결정없이 Gomarus의 침 묵으로 끝났다는 점이다. 후에도 계속 Gomarus가 타락 전 선택설의 입장에서 공적으로 강의하자, 1640년 흐로 링겐의 Joncker Clant가 도르트회의의 결정을 타락전 선택설에 대한 공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펴는 것에 대해서 금지한 것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이점이 중요하다. 이때 고마루스의 대답은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 사이의 의문은 예정론 자체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그에 대해서 항 상 교회 안에서 다양하고 자유로운 질서에 관한 (de ipsa Praedestinationis doctrina sed de ordine, de quo semper varia fuit et libera in ecclesia Dei) 문제로 대답하였으며 그 당시 도르트회의에서 자기만 그 타락후 선택설의 반대한 것도 아니였고 역시 예정에 대상에 대해서 그 회의가 결정한 것은 없다고 하였다. 오늘날까지도 화란 땅에서는 교회가 갈라져 있을 정도로 미묘한 문제이다. 둘째로 Maccovius와 Lubbertus와의 논쟁이다. 물론 그 사건은 Lubbertus가 고소한 것이 아니고 프라네커 노회에서 소원된 것이다.
그러나 그 사건을 도르트회의에서 다룰 문제가 아니라고 보거나 그에 대한 학자들의 차이를 인정하는 식의 발언이 였다. 오히려 Lubbertus의 제자인 Hommius조차도 스승과 반대하여 마코비우스의 입장을 세우는 일이 일어났 고 자문에 참여한 Armesius도 Parker의 입장과 일치하 다하여 그의 주장을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였다. 비록 마코비우스는 예정의 대상이 타락한 인간이라고 한것이 잘못이라 보인다는 진술까지 확인 (quod fatetur se dixisse ad discipilos videri sibi erroneum et falsum docere genus humanum lapsum esse objectum praedestinationis) 하였어도, 그 논쟁은 마코비우스와 루베르투스 사이의 개인적인 문제로 악수하고 끝났다.
결론적으로 도르트회의의 결정은 타락후 선택설 입장의 결 정이지만 타락전 선택설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혼합적 정통주의(syncretismus orthodoxus)라고 결론되고 있다.
후에 1626년 라이덴 대표적 학자들 (Polyander, Rivet, Walaeus, Thysius)은 아르미니안주의자인 Episcopius 에 반대하여 칼빈과 그를 따르는 자들을 옹호하였다.
그런 노선문제는 다시 1645과 1649년 마레시우스 (Maresius)와 보에티우스 사이의 논쟁에서 이어진다.
보에티우스는 고마루스의 입장에 호소하여 우리 교회 안에서 예정에 대해서 분명히 정의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반면 흐로링겐의 고마루스를 계승한 마레시우스는 타 락후 선택설 입장에서 예정의 대상을 창조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라 창조되었고 타락한 인간(homo creatus etlapsus)이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작성에 참여한 퓨리탄들은 아르미니안주의를 완전 히 배제시키고 확고히 타락전선택설에 기초하여 작성하였 다. 다만 1645년 10월에 있었던 그 논의 과정에서 일부 성직자들의 발언 배후에 있는 타락후 선택설을 허용하는 정도에서 머물렀다. 이것은 도르트신조보다 훨씬 엄밀한 칼빈주의 노선을 확인한 셈이다.
한편 개혁주의 신학 안에서 언약론 논쟁은 Johannes Coccejus로부터 시작한다. Johannes Coccejus는 어 릴때부터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배웠고 언어에 능했지만, 그의 독자적인 성향은 다른 종교에 대한 개방성에서 찾아야 될지 모른다. 그는 신학을 배우기 전에 코란에 대한 연구를 하여 글을 쓴 일이 있다(Oratio de religione Turcarum). 브레멘에서 Matthias Martinius와 Ludovicus Crocius로부터 신학을 배운 후에도 1625년 함부르그에 가서 유대 랍비의 글들을 배웠다.
프라 네커에서 Georgius Pasor, Johannes Maccovius, Gulielmus Amesius, Sixtinus Amama (근동 언어학자)와 가까이 접촉한 후에도 쓴 책들은 유대 랍비 문헌들에 대한 연구들이다. 흐로링겐에서 Gomarus와 레이든에서 Polyander, Rivetus. Heinsius 등 다른 유명한 학자들과 접촉하면서 배웠어도 그들과는 다른 독자성이 계속 남아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Johannes Coccejus는 세가지 논쟁점에서 문제의 신학자로 남게 되었다.
첫째로 Johannes Coccejus는 그의 동료인 Abraham Heidanus와 더불어 안식일을 도덕법으로 해석하지 않고 단지 예표로만 생각하였다. 그의 히브리서 주석 (Explicatio Epistolae ad Hebraeos, L.B. 1659)에서 처음 분명하게 나타났지만, 그의 견해는 더 일찍 알려져 그 동료인 Abraham Heidanus가 그의 견해를 옹호하는 글을 발표하였다(de Sabbatho et de Die Dominica).
이런 주장들 때문에 Essenius (de perpetua moralitate Decalogi adeo specialiter) 2 Hoornbeek (Theses de Sabbato)와의 심한 논쟁이 발생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코케이우스(de indagatione naturae Sabbati et quietis Novi Testamenti, Typus concordiae amicorum circa honorem Dominicae, L.B.1659)와 하이다누스(Consideratien)와 호른벡(Nadere bewering van's Heeren dagheiliging) 사이에 논쟁이 계속 되었고 결국 코케이우스와 하이다누스는 소씨니안주의자로 낙인이 찍히기도 하였으나 1659년 관원의 명령에 의해서 레이든에서의 논쟁은 중지되었고 구다 공의회에서 끝나게 되었다.
둘째로 신약시대와 구약시대와 관련하여 PEOL LOOPTL wV(완전한 용서)과 TOPEOL HOPTLWV(불완전한 용서) 사이를 구별하는 Johnnes Coccejus의 주장에 대해서 1665년 Gijsbert Voetius (onderzoek over den warenaard des Sabbaths)가 반박해 나셨다.
코케이우스의 작품(Moreh Nebochim; utilitas distinctionis duorum vocabulorum scripturae naper et pEOL Amsterd. 1666)이 나왔다.
셋째로 Samuel Maresius와 논쟁이 일어났다. 언약론과 관련하여 코케이우스의 신학에 대한 다음과 같은 바빙크의 일반적인 비판을 참조해야 한다:
"언약론 자체는 처음 올레비아누스, 칼빈 혹은 불링거에 게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원리적으로 이미 제세례파와 대 립하여 신구약의 근본적 통일성을 주장하였던 쯔빙글리안에서 만나게 된다. 쯔빙글리로부터 그것은 불링거와 칼빈 에게 계승되고 특별히 올레비안누스, 우르시누스, 손니우스(Sohnius), 에글린(Eglin), 보루비우스(Boquinus), 휘퍼리우스(Hyperius) 등 독일 개혁주의자들안에서 받아 드려졌음을 발견하게 된다. 영국신학에서는 롤록 (Rollock), 하우(Howe), 카아트라이트(Cartwright), 프레스톤(Preston), 토마스 블레이크(Thomas Blake), 퍼킨스(Perkins), 아메시우스(Armesius), 존 볼(John Ball), 제임스 우셔 (James Lisher),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프란시스 로버스(Francis Roberts), 토마스 보스톤(Thomas Boston) 등에 의해서 받아 드려졌다.
네델란드에서는 스네카누스(Snecanus), 유니우스 (Junius), 고마루스(Gomarus), 아버지와 아들 트렐카 티우스(Trelcatius), 네르데누스(Nerdenus), 라벤스페 거(Ravensperger) 등에게서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클 로펜부르그와 코케이우스보다 오래전에 언약론은 개혁주 의 신학안에 고유적이다. 그러나 후자 인물들이 언약론을 전 교의학의 출발점과 지배원리로 삼았고 동시에 원리적인 변화를 야기케하였다.
코케이우스와의 싸움은 직접 모든 이들에게 인정된 언약 론에 대한 것이 전혀 아니라, 에센니우스와 호른벡의 경우 안식일에 대한 것이고(1655-1659), 마레시우스의
경우 두 가지 경영에 있어서 교회의 상태에 대한 것이며 (1662). 보에티우스의 경우 구약에서의 용서 (apel) 에 대한 것이다(1665). 코케이우스에서 논쟁되고 있는 것은 언약개념이 아니라, 그의 성경신학과 그의 역사적 방 법이다. 철학에서 데카르트와 같이 코케이우스는 신학에 있어서 스콜라주의와 전통주의에 반대하여 일어났고 성경 연구를 주장하며 그의 교의학 제목이 가리키고 있는대로 성경으로부터 끌어낸 신학대전(summa theologiae ex Scripturis repetita)을 원하였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그는 그의 책 '언약에 관한 교리대전' (Summa doctrinae de foedere)에서 하나님과 그의 영원한 의논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그의 입장을 역사와 인간과 하나님의 언약속 에서 취하였다. 따라서 그의 교의학은 구원사이고 거기에 서 성경은 원리와 규범이 아니라, 대상과 내용이었던 역사 학적인 형식을 띤 성경신학이 되고 있다.
그는 그 언약 즉 참된 종교를 역사적으로 그의 첫 시작에서부터 현재까지 추적하였다. 그리고 그는 어디에서나 다양하고 계속적인 경륜들안에서 이 언약의 발전과 진보를 가리켰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자들이 말하였던 대로 계시의 명료성, 즉 통찰의 선명과 의식의 판명성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 아니다. 은혜언약의 다양한 경륜들아래에 서 객관적 축복들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즉 구약시대에 있어서 구원은 신약에서보다 객관적으로 더 빈 약하였다. 구약에서 안식일은 행위의 연기안에 (cessatio operis) 있었고 이스라엘은 아직 참되고 영원한 선(vera et permanentia bona)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되, 소망의 백성이었고 땅에서의 긴 생을 열망하였으며 여전히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충만한 죄용서를 갖지 못하고 불완전 용서 가지고 있었다. 동물희생은 전혀 화해를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강의는 불완전하였다. 신자들의 위 로도 약하였고 그들의 양심은 안식하지 못하였다. 마음의 할례는 참으로 없었고 다만 신약에서 선물로 주신 것이 다음은 전사들에 의해서 제공된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구약에는 감으로 모든 것이 현존하였으나 다만 모형 그림자로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사실 자체의 실재성은 간식으로 부정되지 않았어도 그때 대부분이 부정되었다. 주관적으로가 아니라, 객관식으로도, 우연에 있어서 (in accidentia) 뿐만 아니라, 실제에 있어서 (in substantia) 도구약은 신약과 다른 것이었다. 침으로 코케이우스가 혜언약을 다만 부정적으로 점진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이며 계속적으로 발전된 행위언의의 폐지로서 파악하였을 때, 친히 언약론 전체를 근절하였다. 결과적으로 그는 언약에 대에서 아무것도 남긴 것이 없었다. 그것은 다만 일시적이고 인간적이며 계속 스스로 변하는 종교의 형태이었다.
그렇게 코케이우스는 의심할 것도 없이 개혁주의 신학의 출발점과 기본선을 잃었다. 이것이 직접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느껴졌기 때문에 역시 다소 논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원리적인 논쟁이었다기보다는 부속적인 짐들에 대한 공격이었다. 코케이우스주의는 바로 데카르 주의와 결합되어 계속 점점 더 받아 드려지면서 여러가 지교회들에 대한 반대로 인도하였고 역시 구약의 붕괴시키는데 공헌하였다. 어디에서나 무의식적으로 구약은 단 지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고 교의학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파고들어 갔다. 이런 변경된 교의학적인 직관으로부터 저절로 그의 때가 되어 특별히 스피노자 (Spinoza)와 시몬(R.Simon) 이래 구약의 역사적 비판이 태어났다." 이런 바빙크의 판단에 따르면 현대의 역사비판 학적 방법의 근원과 관련하여 코케이우스가 한 역할은 개 혁주의 신학안에서의 정통신학 회복을 불가능하게 만들었 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이미 대학의 학문세계에 깊게 파고 듣 코케이우스주의와 데카르트주의로부터 극복을 위한 노락이란 분파주의를 낳게 되었을 뿐, 정통주의의 완전회복 올 불가능하였던 역사가 유럽개혁주의 신학의 역사이다. 회복된 개혁주의는 온건하고 중용적이었다. 그후 개혁주 의안에서의 보수주의란 정통개혁주의 신학의 재흥이라기보다는 분리하게 된 신학적 노선 위에 머물러 있는 보수주 뭐가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유럽개혁주의에서 가장 충실 되는 노선의 결정은 예정론에 대한 입장과 신구약 동일성에 대한 입장이 결정되고 있다.
2.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에서의 개혁주의신학
이미 위에서 언급한 대로 영국에서의 개혁주의 신학의 문제들은 대륙에서 첨예화되지 않은 문제들이 영국에서는 첨예화되었다. 즉 철저한 종교개혁의 문제들이였다. 그런 개혁들은 유럽의 다른 지역들에서와 같은 종교개혁의 한 입장들일 수 있었으나 계속적인 철저한 종교개혁은 바로 철저한 칼빈주의를 의미하였다.
실제적으로 헨리 8세의 종교개혁은 전체적으로 아직도 루터주의적인 종교개혁에 는 이르지 못하셨고 에드워드 6세의 개혁은 루터주의적인 종교개혁 혹은 부분적 칼빈주의에 가까웠다. 예를 들어 메리여왕 때 순교당한 존 브래드포드의 경우 정확한 칼빈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에 존 낙스의 친구이었던 존 폭스의 칭의론은 루너 주의에 머물렀던 종교개혁자의 모습이었다.
존 브레드포드(John Bradford, 1510-1555)의 기본적인 예정론(1555년 7월 1일 순교하기 약 8개월 전에 쓴 1554년 10월 22일의 한 편지에 따라)에 대한 이해는 칼 빈과 같이 실천적이다. 그의 예정론에 대한 이해는 구원의 확신에 강조를 둔 예정론이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신앙은 행위에 있어서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믿는 것이요 같은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성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만 (얻는) 영원 히 영생의 유산자들임을 믿는 것이라' 하였다. 따라서 이 예정론에 대한 신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것 중에서 원리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총체'라 하였다. 하나님의 선택교리로부터 유익들은 셀 수 없다고 하면 서 간추리기를,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하나님과 인간과 자신에 관심을 갖는 것이고 경건하고 의롭게 살며 신실하게 사는 것이라면, 그 모든 것이 그리스도안에 있는 예정에 근거한다'고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가장 신뢰할 만한 목자이였고 연약한 양과 같아도 이런 예정론에 대한 신앙에 의해서 사자와 이리로부터 지켜주실 것을 믿었고 그가 죽고 태워져도 그리스도안에 있는 영원한 영광을 위한 것임을 확신하였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덕이나 악도 외 적인 행동에 따라, 혹은 인간의 의지와 지혜에 따라 판단될 수 없었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사려되었다.
1. 하나님의 선택의 원인 그 분의 선한 의지로부터 나온 것이다. 우리가 거룩하고 흠이 없는 것은 그 분의 사랑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 그 선택은 세상의 태초전의 일이다.
3. 그 선택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일이다.
4. 그 선택은 아담의 후손 중 어떤 이들에 대한 것이고 모든 이들에 대한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택자가 아닌 것은 모든 사람이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마태복음 20장, 13장, 사도행전 13장, 요일 5장, 살후 3장인용).
5. 하나님은 그리스도안에서 영생을 얻도록 택한 자들을 예정하셨다(롬8장, 눅 10장).
6. 선택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과 은총의 찬양이다. 우리 가 예정받은 것은 그의 은혜의 영광을 위해서 이다.
7. 예정은 하나님의 때안에 소명, 칭의없이는 없다. 즉 예 정이나 선택이 보편적이지 않고 모든 이에게 속한 것이 아 님은 모든 이가 의롭게 되지 않기 때문이다.
8. 선택은 그렇게 확실하고 영생을 위해서 택함을 입고 예정된 자는 최종적으로 결코 파멸하거나 정죄에 이르도록 잘못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찬양을 위해서 예정을 입었다. 그의 의의 찬양도 아니요 그의 지혜의 찬양도 아니며 그의 능력의 찬양도 아니다. 다만 그의 은혜의 찬양을 위해서 예정을 입었다. 머리가 없는 선택, 목적이 없는 선택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최종의 보존이 선택에 속한 것으로 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유다가 제자로 부름을 받았어도 영생을 위해서 택함을 입은 것이 아니라고 보았고 사울도 왕의 직책으로 택함을 입었어도 영생을 위해 택함을 입은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이런 예정론의 성격이 바로 정경인 성경책의 전체내용과 책들안에 세워져 있다고 보았다. 비록 리들리 밑에서 그와 가깝게 지냈고 부쪄와 친했던 그였지만, 이런 예정론에 따 르면 정확하게 칼빈의 사상위에 서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 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교회정치에 대한 그의 판단이다.
메리여왕의 등극이후 유럽으로 피신한 인물중 죤 폭스 (1517-1584)의 신학사상의 일부를 소개하면, 위의 브레드포드와 잘 비교할 수 있고 존 낙스와 친한 신학자로서 알려졌지만 제네바로 가지않고 바젤로 간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물론 교회권징과 영국의식에 대한 존 낙스의 프랑크푸르트 논쟁을 잘 알고 있었고 그논 쟁에 대해서 후회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칭의론은 루 터의 실천적 칭의론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율법에 대한 입장도 존 낙스가 칼빈주의라고 한다면 그는 루터주의를 대표하는 자로서 사려할 수 있다. 언약의 두 방식과 두 가지 의를 강하게 대립시키고 있다. 즉 복음 의의는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율법의 준수로 말미암지 않으며 우리편에서 어떤 의무의 수행으로 말미암지 않는 것 이다. 참된 의를 옹호하지 않으면 그것에 반대하는 것이다 고 생각하였다.
신적인 은총의 모든 문을 닫히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은혜 의적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렇게 믿음의 의와 행위의 의를 같은 것으로 보지 않고 강하게 그 차이를 강조하였다. 물론 그는 우선 인간의 전적 부패를 주장하면서 이성도 가장 맹 아이고 신적 지식의 빛으로 조명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인간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신적인 것들에 대한 참된 이해에 도달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일반적으로 에드워드 6세의 개혁의 산물인 39개 조항에서 개혁주의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특별히 예정론에 있어서 그렇다. 따라서 후에 Lambeth Articles이 인정되었던 것 이다. 이 선언은 Mr. Barret가 케임브리지 대학의 한 설교 에서 칼빈의 예정론의 교리를 반박함으로 생긴 것이다. 그 는 그의 청강자들에게 칼빈의 책을 읽지 말라고 하고 다른 신학자들(P.Martyr, Beza, Zanchius)을 문제를 삼았는데, 그로 인하여 퓨리탄들의 반박을 받아 논쟁이 되었 다. 마지막 카톨릭으로 전환하였던 Mr.Barret는 타협적인 고위성직자들과 카톨릭주의자들에 의해서 지지를 받으면서 Lambeth에 있는 대주교 앞에 소환되었는데, 그때 대학을 대표하는 Dr. Whitaker와 Dr.Tyndale가 도와 작성된 것이다.
이 선언서에서 관찰될 수 있는 것은, 첫째로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과 유기에 대한 확고한 고백이었다는 것, 둘째로 예정의 원인을 인간의 예지된 믿음이나 행위나 기타 어떤 것들에 돌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선한 의지와 기뻐하심에 돌렸다는 것, 셋째로 참되고 의롭게 된 신앙의 영구성, 구원 에 대한 충만한 보증, 죄용서에 대한 확신이 선언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공적인 입장들이 도르트회의에 참여하여 동의할 수 있었던 배경이였다.
특별히 일찍부터 양심의 자유를 따라 퓨리탄들의 피신처가 되었던 아일랜드 지역에서 자체의 신앙고백이 고백되었다.
여기에서 독자적인 장로교파(Presbyterian Persuasion)가 형성되었다. 그 대표적 목사들은 스코틀란드에서 온 Mr. Edward Bryce, Mr.Robert Cunningham, Mr.Robert Blair, Mr.Hamilton, Mr. Levingston, 영국에서 Thomas Cartwright 등에 의해서 훈련받은 Mr.Ridges, Mr, Henry Calvert, Mr.Hubbard 등이었다.
여기에서는 그 관구의 주교와 화 해가 이루어져 공적으로 장로교 성직자들이 임직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대주교 Dr.James Usher때 (1615년)에 체적인 신앙고백서가 고백된 것이다. 이 고백에는 위의 Lambeth Articles가 흡수되었고 주일성수가 고백되었다. 는 점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 고백이 1634년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나, 대주교 Laud 때에 와서 화해가 깨지고 약화되어 버렸다. 결국 이것이 카톨릭의 힘을 성장시켜 주었고 마지막 거의 모든 신교인들이 순교당하는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 아일랜드 고백서에의 일반적인 틀과 내용이 후에 웨스 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도 크게 영향을 끼친다고 볼 수 있 다. 예정론의 경우 첫째로 Lambeth Articles과 달리 영원 한 작정에 대한 고백과 예정과 유기에 대한 고백을 구별하 였다는 점이다. 즉 예정과 유기는 인격계에 제한 하였고 만 물에 대한 영원한 작정은 먼저 고백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 째로 구원의 방식까지 예정에 대한 고백에 포함시켰다는 점이다. 셋째로 그 예정의 목적과 그 효과에 대해서도 고백 하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의 기초들임에 틀림없다.
신구약의 통일성의 경우 첫째로 신구약의 차이는 계시의 판명성의 차이이라는 것, 둘째로 신구약 모두에서 영생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에 의해서 제공된다는 것, 따라서 그들 사이에 모순이 되지 않는다는 것, 셋째로 모세에게 주어진 율법 중에 의식법과 시민법을 제외하고 도덕법에 해당된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연적이라는 고백이었다. 즉 율법의 제3 사용에 대한 확고한 고백이 들어있었다.
제11차 WCC 총회가 지난 8월 31일 독일 칼스루에 센터에서 시작되어 8박 9일간 열린다. 기 의 올림픽으로 불리우는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 보고 있는 기독교회(성공회, 정교회 포함) 전세계 12개 회원 교회의 4,000여 명이 참가한 행사다. 개식은 의장인 아그네스 아봄 (케냐) 여사는 환영사 를 하면서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북미, 남미 등 대 륙별 참가자들을 소개했다. 특히 우크라이나에서 온 참가자 11명을 일어서게 한자 참석자들은 큰 박수로 환영하며 연대를 표현했다.
제11차 WCC 총회 주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세상 을 화해와 일치로 이끄신다(Christ's love moves the world to reconciliation and unity)'로 세계의 기독교회는 코로나19 팬데믹과 전세계의 평화와 경제에 큰 위기를 몰고 온 러시아의 구크라이나 침공 등 세계가 처한 위기의 상황을 극복해 화해와 일치를 이루자는 목표를 갖고 있다. 이번 총회의 발언자들은 하나같이 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대해 언급하며 세계의 화해와 일치가 이번 총회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임을 확인시켰다고 한다.
아붐 의상은 제10회 부산 총회부터 제11회 카들스루에 종회까지의 WCC 여정을 담은 보고서 '정의와 평화의 순례 : 부산에서 카를스루에까지'를 언급하 거, △기후위기 △경제정의 △폭력과 전쟁 △인종 및 여성차별 등 인권 문제의 해결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이분 WCC 의장은 개막식 직전 가진 프레스 컨퍼런스에서도 "2차 세계대전의 잿더미에서 시작된 WCC는 회원 교회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들에게까지 둘 대화의 장을 열고 있고, 이러한 원칙하에서 북수단과 남수단, 대한민국과 북한도 한자리에 모여 대화하는 곳"이라며, '우리가 만든 이 공간을 통해 우리는 슬프고 상처입은 사람들을 돕고, 이들과 동행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WCC 사우카 총무 대행은 이번 총회 전 3개 회원 교단을 포함한 회원들이 WCC에서 러시아정교회의 회원자격을 박담시키라는 요구를 받았으나 마음 기절 줬다고 밝혔다. 사우카 총무는 WOC는 대화와 만남, 일치로 가기 위해 서로에게 도전을 주고 토론하기 위한 열린 랫폼'의 역할을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며, WCC는 누군가가 스스로를 배제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배제시키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고 한국에서는 이번 WCC 11차 세계대회가너무조용하다. 세계적으로 기독교 자체가 쇠퇴하듯이, 한국에 서도 WCC 운동은 쇠퇴하는 것 같다. 향후 소멸될 것으로 전망한다. 그 근거는 카자리안 마피아의 몰락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WCC를 이끄는 교황청이나 예수 화가 카자리안 마피아의 수족들이라서 운명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WCC 제11차 총회 참관 차 독일에 체류 중인 최덕성 박사(브니엘신학교 총장)는 WCC 총회의 실상을 드러내기 위해 이번 총회에서 열리는 워크숍 주제 93가지를 살펴보니, 워크숍 주제 93개 중 4번째 '복음화와 선교를 제외하면 모두 '하나님의 선교', 즉 세상사만 다루고 있다고 크리스찬투데이 기사가 전했다.
WCC의 신학적, 선교회적 문제점들을 학문적으로 가장 날카롭게 비판해왔던 인물 중 하나인 최덕성 총장 (브니엘신학교)은 이번 제11차 WCC 총회를 직접 참관한다. 자비로 독일에 가서 WCC를 참관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크리스찬투데이 기사(독일 카를스루에 총회 직접 찾아가는 최덕성 총장, 9월28일자)에 밝힌 내용을 보면,
첫째로, WCC 에큐메니칼 운동은 21세기 기독교회의 중요한 흐름이기 때문이다. 긍정적으로 보든 부정적으로 보든, 무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둘째로, 이 단체가 말은 '세계기독교회들의 총회'라 고 하지만, 사실은 성경적·역사적 기독교가 말하는 복음과 진리와 관심에서 지나치게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엇이 어느 정도로 얼마나 벗어났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간다고 했다.
최총장은 "그래서 세계교회가 WCC 운동을 따라가 면 죽는다."는 사실을 확고하게 천명할 목적으로 참가해서 살펴보려 한다면서, 영어로는 'WCC kills Church'라고 했다. 그는 “사실 WCC는 매우 배타적인 공동체이다.
복음주의자들의 목소리를 전혀 수용 하지 않는다. 나 같은 복음주의자들이 회의에 참석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 정도로는 열려 있지만, 복음주의자들이 말하는 성경적 진리를 회복하고 그것을 중심에 두는 노력을 하라는 외침에 냉소적이라는 것이다.
▶ 앙꼬없는 찐빵 기독교 WCC
최총장은 "WCC는 복음이 없다. '앙꼬없는 찐빵 기독교'다. WCC는 진리 상대주의적 입장에서 계속 하나님의 선교를 추구한다. 기독교 진리를 상대화하고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고 하는 풍토 속에서, 결국 WCC를 따라가면 교회에 남는 것은 죽음밖에 없다.” 고 했다. 지난 2013 WCC 부산총회에서 확인한 것에 대해서 묻는 기자의 질문에, 최총장은
첫 번째로 WCC가 종교다원주의를 표방하는 것이 명 명백백하다는 점이다. 그들은 구원에 두 가지 길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예수를 통한 길이고, 하나는 예수를 통하지 않는 길이다. 이를 '하나님의 구원에는 제한이 없다'는 말로 표현한다.
두 번째로 WCC의 선교, 복음전도 증언이라는 개념은 오로지 그들이 말하는 세상사, 이른바 '하나님의 선교(미시오 데이)'라는 것에 한정돼 있다.
세 번째로는 그런 구도 속에서 성경이 말하는 복음, 예수 그리스도, 사람들을 예수님에게로 이끌어서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얻게 하는 복음 전도의 노력이 전혀 없다. 그것을 강조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이 이를 믿고 고백하는지도 매우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물론 그 속에 있는 일부 교회들은 할 수도 있겠지만, 전체적으로는 매우 부정적이다. 그래서 부산 총회에서 확인한 것은 WCC를 따라가면, 교회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WCC 에큐메니칼 운동을 따라가고 그들의 강조점에 연연하면, 교회는 쇠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