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09. 14
뼈를 깎아내고 돌아온 '캐넌' 김재현
'고관절'. 지난겨울,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끝내 그의 앞에서 그 단어를 입에 올리지 못했다. 여전히 한 곳의 적들을 노려보며 달려가는 이를, 이미 베고 지나온 길 위의 장애물에 관한 기억으로 질척대게 할 수는 없었다. 혹은, 찻잔을 앞에 놓고 내내 미소를 띠고 있던 순간마저 잠시 비워둔 전장의 거친 한기를 감추지 못하던 그에게, 아직도 깊이 남아있는 싸움의 상처와 독기를 대면하도록 강요할만한 담력이, 내게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2002년, 김재현이 오로지 자신의 방망이 하나로 무너져가던 팀 트윈스를 밀어올리던 중 만난 일생 최강의 적이 바로 '고관절괴사증'이었다. 엉덩이와 다리를 연결하는, 팔로 치자면 어깨에 해당하는 부위의 관절인 고관절이 제대로 혈액공급을 받지 못하면서 썩어들어가는 희귀한 난치병이었다. 치고 달리고 버텨서는 모든 몸짓에 부지런히 그 관절을 혹사해야 하는 운동선수에게는 사망선고와도 다르지 않은 사건이었다.
그리고 6년. 그는 여전히 대한민국 최고의 타자로 군림하고 있다. 1990년대 중반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힘과 기량에 더해 절망과 싸움 속에서 살아나온 근성이, 김재현이라는 이름만이 가지는 서늘한 살기를 내뿜고 있기 때문이다.
1994년, 신바람의 깃발이 되다
▲ 94년 LG트윈스의 '신바람 3인방' 그들이 일구었던 1994년은, LG야구의 역사에 가장 높이 솟아있는 봉우리이자 해마다 'AGAIN'을 외치며 바라보게 하는 깃발이다. ⓒ 한국야구위원회
1994년은 대학과 프로의 질긴 힘겨루기에서 서서히 대학이 밀려나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이전까지 '고졸 신인'이라면 대개 대학의 부름을 받지 못한 무명 연습생의 마지막 도전, 혹은 부모님의 수술비 따위를 마련해야 했던 어느 불우한 영재의 눈물겨운 선택을 의미했다.
1984년 문희수와 1989년 박정현의 대성공을 지켜본 프로팀들이 1990년대 초반부터 고교생들에게 본격적인 추파를 던지기 시작했지만, 프로와 대학 사이에 첫 번째 대격돌이 벌어졌던 1992년에도 '빅4' 임선동·조성민·손경수·박찬호가 모두 대학을 선택했을 정도로 대학의 힘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두 해 뒤인 1994년, 승부는 다르게 흘러갔다. 애초에 프로 쪽에 더 관심을 보이던 배명고의 팔방미인 김동주가 계약 직전 고려대로 방향을 선회하긴 했지만, 부산고 에이스 주형광이 롯데 입단 계약서에 시원스레 사인을 했는가 하면, 해태는 첩보작전을 방불케 하는 노력 끝에 연세대가 감금하다시피 해놓았던 광주일고 에이스 이호준과 접촉해 마감시한 직전에 입단계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김재현의 프로 입단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연초부터 대학진학을 공언해왔고 연세대에 가등록한 상태에서, 오키나와에서 열린 한일 고교야구대회에 출전하고 있던 그마저 마감시한 직전 숙소로 잠입한 LG 스카우터와, 1차 지명자인 유지현보다도 2천만원 이상 많은 9100만원에 계약을 체결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대학 측은 이미 대세가 기울었음을 인정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김재현이 입단 첫해 신인 최초의 20-20을 달성하며 후배들에게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음'을 보여준 성공사례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LG 야구의 역사에 가장 높이 솟아있는 봉우리이자 해마다 '어게인'을 외치며 바라보는 깃발인 1994년. 대졸신인 유지현·서용빈·인현배와 함께 '신인 돌풍'을 일으키며 우승의 주역이 되었던 김재현에게 거칠 것은 없어 보였다. 1995년에는 2년차 징크스를 겪으면서도 2할5푼의 타율과 15개의 홈런으로 하한선을 그었고, 신장염으로 쉬었던 1997년을 제외하면 단 한 번도 2할8푼대 밑으로 떨어지지 않는 꾸준한 타율과, 잠실구장을 홈으로 쓰는 팀 타자로서는 만만치 않은 두자릿수 홈런을 거르지 않고 기록하며 팀의 중심타자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2002년, 10승의 장문석이 팀내 최다승 투수였을 정도로 무너진 마운드에, 단 두 해 만에 팀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던 양준혁마저 다시 삼성에 내주며 흐트러진 팀의 공기가 오히려 그를 자극했다. 그 해 그는 3할3푼4리라는 생애 최고의 타율에 더해 16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분전했고, 팀은 모든 이의 예상을 깨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작은 기적을 연출했다.
그러나 그 해 6월 19일, 그는 슬라이딩하던 도중 심상치 않은 통증을 느꼈고, 다시 얼마 후 '고관절이 썩고 있다'(대퇴골두 무혈성 괴사증)는 진단을 받게 된다. 시즌 막판 30여 경기를 남겨둔 채 그는 발이 묶이고 말았다. 다리를 단단히 박아놓고 때리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혹 안타를 친다 해도 1루까지 달려나갈 힘을 그는 잃어버린 것이었다.
2002년, 또 하나의 전설
▲ LG시절의 김재현 고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프로무대로 들어선 김재현은 입단 첫 해 신인 최초로 20-20을 달성하고 외야수부문 골든글러브를 따내며 후배들에게'‘더이상 거리낄 것이 없음'을 보여준 성공사례가 되었다. / ⓒ LG 트윈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팀은 4강에 턱걸이했고, 준플레이오프에서는 현대를, 플레이오프에서는 기아를 꺾으며, 사상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위해 양준혁·이승엽·마해영으로 클린업을 구성했던 막강 전력의 삼성과 한국시리즈에서 맞서게 된다.
한 경기 한 경기 되새기기 숨가쁠 정도로 악전과 고투가 이어지며 2승 3패로 맞섰던 6차전, 역시 엎어지고 뒤집어지던 경기에서 6회 초 당뇨병을 극복한 대타 심성보가 안타로 나가며 시작해 5대 5 동점에 성공하며 주자 1·2루의 역전 찬스를 잡는 순간, 김성근 감독은 벤치를 지키던 김재현을 불러냈다. 웬만한 안타를 때려낸다 해도 1루 진출이 어려운 타자, 그렇다면 2사 후인지라 어지간한 타구가 아니고는 득점을 기대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바뀐 투수 노장진은 하체가 무너진 김재현의 몸쪽으로 시속 147㎞짜리 직구를 던졌다. 가장 강했던, 그래서 자신은 더욱 인식하지 못한 채 가장 약한 구석이 되어버린 곳을 헤집는 승부구. 그러나 선수로서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타석에서 김재현의 집념이 휘둘러댄 방망이는 정확한 타이밍에서 노장진의 공을 포착했고, 결대로 맞아나간 타구는 투수의 머리 위를 넘어 가운데 쪽으로 쭉 뻗어갔다.
원래 중견수가 지키고 있어야 할 자리. 그러나 중견수 박한이는 우익수 쪽으로 한참 옮겨 선 채 '김재현 시프트'를 하고 있었고, 타구는 그대로 담장까지 굴러가고 말았다. 장타를 때려놓고도 절뚝거리며 간신히 1루에 올라선 채 활짝 웃는 김재현. 역전 2타점 적시타.
물론 알려진 대로 경기는 9회 말 이후에 터져 나온 이승엽의 석 점짜리 동점홈런과 연달아 터져 나온 마해영의 끝내기 홈런으로 맺어졌고, 삼성은 21년만에 비원의 첫 한국시리즈 제패에 성공했다. 그러나 트윈스 팬들에게도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의 6회 초는, 하늘 끝까지 솟구쳤던 1994년의 희열만큼이나 그리움을 깊이 빨아들이는 심연으로, 또 하나의 슬픈 전설이 되었다.
2002년, 그 후
그 해를 마치고 서용빈은 사연 많은 군복을 입고 떠나가야 했고, 김성근 감독도 옷을 벗어야 했다. 그리고 운명처럼, 유지현 역시 전성기를 서둘러 끝내면서 '멘도사 라인(타율 2할대 초 정도로 약한 타자...편집자 주)'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 시즌을 마치고 김재현은 수술대에 올라 썩어들어가던 관절과 뼈의 끝부분을 깎아냈고, 또 길고 독한 재활의 경로를 밟아가야 했다. 그리고 '부상 재발과 관련한 모든 사항에 대해 선수 본인이 책임을 진다'는 각서를 쓰고서야 다시 그라운드에 돌아올 수 있었고, 다시 두 해 뒤 FA 자격을 얻었을 때는 친정팀보다도 적은 액수를 제시한 SK의 유니폼으로 갈아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990년대 중반 최강의 전설을 쌓아올렸던 트윈스는, 2002년을 마지막으로 포스트 시즌과 해마다 조금씩 멀어지며 길고 긴 내리막을 걷고 있다.
최고가 아닌, 최고의 타자
▲ 와이번스, 김재현 김재현은 플래툰시스템 속에서 1할대 타율로 허덕이며 선수생활의 또다른 '끝'을 떠올려야 했던 2007년, 한국시리즈에서 결정적인 두 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다시 한 번 부활했다. / ⓒ SK 와이번스
여전히 김재현은 국내 최고의 타자다. 너무나 잘 알려진대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배트스피드'에서 나오는 호쾌한 스윙은 아무리 빠른 공이라도 총알처럼 잡아당겨 '캐넌'처럼 오른쪽 스탠드를 부수듯 때려낸다. 그리고 아무리 능글맞은 유인구, 혹은 위협구라도 그의 타격폼을 무너뜨리지 못하며 한두 번은 속더라도 결정적인 대목에서 다시 만나는 순간 드디어 수싸움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를 가르쳐주는 노림수로 마운드를 허물어내린다.
올 시즌, SK 타선이 강한 것은 김재현이 있기 때문이다. 시즌 초반 최정과 박재홍에서 중반의 이진영과 후반의 김강민으로 이어지는 '방망이의 돌림노래' 역시, 한 시즌 내내 한결같이 뒷줄에 버텨선 채 승패의 고비를 움켜쥐어준 김재현이 없었다면 이어지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주 단단하게 담금질되어 절망 앞에서 더 든든해지는 예리함. 약한 것과 대조되었을 때가 아니라 강한 것과 맞세워졌을 때 더욱 두드러지는 강인함을 느끼게 해주는 선수. 다른 팀을 응원하면서 보자면, 막다른 골목에서 마주친 순간 굳이 근거를 찾을 것 없이 가장 불길한 예감을 드리우는 타자. 혹은 그의 팀을 응원하면서 보자면, 완벽하게 둘러 막힌 순간에조차 희망을 품게 만드는 선수.
▲ 2007년 한국시리즈 MVP 지난 2007년 한국시리즈 MVP는 그가 또 한 번 절망과 싸워 이겼음을 보여주는 훈장이며, 전리품이었다. / ⓒ SK 와이번스
어느 면으로 보든 김재현은 최고가 아니다. 타율, 홈런, 타점, 장타율. 혹은 주루나 수비. 어느 면에서든 그의 앞에 놓여야 할 이름이 수십 개는 늘어선다. 그러나 아주 오랫동안 야구를 지켜보아 온 어느 고수가 '야구란 숫자놀음이 아니'라고 정색을 하며 '대한민국에 김재현보다 뛰어난 타자가 과연 존재했는가'를 따진다면, 묘하게도 가볍게 떠올릴 수 있는 이름이 많지 않다. 그래서 어떤 이는 양준혁을, 1980년대 야구의 추억이 많은 이라면 한대화를, 혹 부산야구에서 각별한 울림을 느끼는 이라면 박정태 정도를 떠올려 시비를 벌여볼 수 있을 뿐일 그 자리에, 김재현이라는 이름이 놓여 있다.
김은식(punctum)
자료출처 :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