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26.
핵은 없었지만 1960∼70년대 남북 관계는 강 대 강 구도의 총성 없는 전쟁 시기였다. 전쟁의 최일선에 남한의 중앙정보부와 북한의 대남사업총국이 있었다. 중정의 김형욱·이후락과 총국의 이효순·허봉학은 물밑 치열한 기 싸움을 벌였다. 체제 생존과 맞물려 전선이 따로 없었던 남북한의 최고 지도자 박정희와 김일성은 일전을 불사했다. 환갑잔치는 서울에서 하겠다고 공언한 김일성의 무력 도발에 대해 박정희는 반드시 비례성의 응징을 원칙으로 삼았다. 청와대 습격, 울진·삼척 무장 공비 침투에 대해서도 그냥 있지 않았다. 비록 실미도 사건 같은 부작용도 있었지만 미친개에게는 몽둥이가 약이라는 인식과 일방적으로 당하지는 않는다는 기류가 대세였다. 공산주의는 응징하지 않으면 더 큰 도발이 따른다는 판단이었다.
/ 그래픽=백형선
1969년 닉슨 독트린과 미·중, 중·일 접촉 등으로 동북아 국제 정세가 급격하게 변화하자 박정희 정부도 대담한 접근을 모색했다. 6·25전쟁 후 처음으로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에 합의하며 본격 대화에 나섰다. 남북은 대화 목적에서 동상이몽이었다. 북측은 대화를 통해 통일의 주도권을 확보하고자 했다. 대화가 진행되면 닉슨 독트린에 따라 한반도에서 미군이 철수할 것으로 판단했다. 미군 철수만 이뤄지면 통일전선전술로 청와대 권력이 붕괴할 것으로 예상했다. 평양은 위장 평화를 전면에 내세웠지만 1974년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 1976년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등 주기적으로 기습 도발을 감행했다.
남측은 대화를 통해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하고 북측에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확인시켜 대남 적화통일을 차단하려고 했다. ‘대화 없는 대결’에서 ‘대화 있는 대결’로 무게중심을 옮겼다. 북한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면서 급속한 경제개발에 주력하는 실사구시 정책이었다.
박정희 정부의 ‘선 건설, 후 통일’ ‘선 평화, 후 통일’ 방침은 한국 대북 정책의 토대가 되었다. 정책의 핵심은 국격을 지키면서도 탄력적이며 유연한 전략으로 남북관계의 주도권을 상실하지 않는 것이었다. 도발에는 단호하게 대처하지만 1971년 9월 판문점에서 이산가족 상봉 회담 등 대화를 지속하였다. 북한의 ‘잘못된 행동’은 반드시 응징하면서도 ‘대화 있는 대결 정책’을 유지하였다. 화전 양면 전략을 기본으로 안보에는 안보, 대화에는 대화라는 양 축으로 남북관계의 균형을 맞추었다.
대화를 추진하지만 국방력 강화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닉슨 독트린과 카터 정부의 주한 미군 철수 정책으로 안보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자주국방과 핵무기 개발 구상으로 난국 돌파를 시도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소설대로 1975년 핵확산금지조약(NPT) 가입을 기점으로 핵 개발은 좌절되었지만 유비무환 전략은 지속되었다. 비록 핵무장은 실패했으나 카터의 주한 미군 철수를 막았다.
박정희 정부는 외부 의존도가 높은 국방력이 장기적으로 독자 외교에 장애가 되리라고 판단하였다. 자주국방의 기조 아래 국방과학연구소(ADD)를 설립하여 무기 국산화에 나섰다. 덕택에 오늘날 ‘K방산’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한미 동맹은 혈맹이지만 최소한의 자강불식(自强不息)이 원칙이었다. 국제 정치에서 세력 균형은 남북은 물론 한미 간에도 적용되는 불문율이라는 인식이 확고했다.
2000년대 이후 정부는 실사구시와 화전 양면의 이중 트랙을 포기하고 ‘대결 없는 대화’에만 주력함으로써 남북은 갑을 관계로 전락했다. 화전 양면 전략 포기는 남북관계를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만들었다. 전쟁 억지를 위한 무력 대응을 포기하면서 대화에만 주력하는 편향된 대북 정책은 굴종 수준이 되었다. 결국 현금 4억5000만달러의 대가성 정상회담이 성사되었다. ‘대결 있는 대화’에서 ‘현금 지급 대화’로 바뀌었다. ‘안보 없는 대화(talk only no security)’에 올인하는 정책은 북핵 개발을 방조했다. 현금 용처는 핵 개발 부품 구매였다. 1단계 핵 억제 전략에서 2단계 핵 선제 사용으로 진화하고 있으나 여의도 정치에서 북핵은 여전히 정쟁 대상이다.
지난 4월 핵을 방어용에서 공격용으로 전환한다는 김정은의 핵 독트린과 선제 사용 5대 조건을 규정한 핵 무력 법제화는 한반도가 뉴 노멀(new normal)의 안보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의미다. 김정은은 푸틴의 미치광이 이론(mad man theory)에 의한 핵 선제 사용 위협을 벤치마킹할 것이다. 중국의 인민 영수 지도자는 대만 무력 침공을 공론화했고 동북아의 긴장은 고조될 것이다.
‘대결 없는 맹목적 대화’의 종착역은 100년 제재에도 꿈쩍 안 하겠다는 핵무장이다. 3대 세습 지도자의 핵 폭주에 대해서 비핵화 외교만 고집할지 핵 균형을 도모할지 선택할 시간이다. 재래식 무기(conventional arms)와 핵무기(nuclear weapon)의 불균형 속에서 불안한 평화를 감수할지 말지 결정해야 한다. 핵무장 필요성에 대한 국민 여론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에 70%를 상회하였다. 합참은 5년 내에 북 핵무기가 200기에 달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박정희 정부의 핵 개발 계획을 강제로 좌절시켰던 미국의 정책은 불변이겠지만 세상은 변화하고 있다. 미국 다트머스 대학의 린드와 프레스 부부 교수는 작년 10월 한국이 핵무기 보유를 결정할 경우 미국이 정치적 지지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한국이 자국 방어 차원에서 핵무장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일부 전문가는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고 군축 협상을 할 때라고 뉴욕타임스에 글을 실었다. 서울을 방어하기 위하여 시카고가 핵우산으로 위험해지는 한미 확장 억제는 중단해야 한다는 강경 주장도 나온다. 백악관과 주한 미국 대사는 전술핵 한국 재배치에 선을 그었지만 현재 방침일 뿐이다. 중국 인민해방군이 대만에 상륙할 시나리오도 현실화되고 있다. 미래 동북아 안보를 누가 알겠는가?
국제 정치가 어느 국가의 안보를 전적으로 보장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스라엘조차 미국의 감시를 피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자체 방어력을 강화했다. 미국이 호락호락하게 한국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것이나, 안보 불안의 목소리를 내야 대안도 검토될 수 있다. 한국의 핵무장 담론은 북핵 지렛대를 갖고 있는 중국을 움직일 수 있다. 비장의 카드조차 공론화하지 않는 것은 국익 극대화에 역행하는 일이다.
어떤 동맹도 안보를 100% 책임지지 못한다. 1960년 프랑스의 드골 전 대통령이 닥치고 핵무장을 선언한 이유다. 핵과 동거하는 시대(with the nuclear)를 맞이하여 박정희에게 길을 물었다면 어떤 해법을 내놓았을까? 그의 치적에 공과(功過)가 있겠지만 싸우면서 건설하여 안보와 경제 두 토끼를 잡은 식견은 오류가 없다. 평화는 구걸해서 얻을 수 없다. 안보를 토대로 당당한 대화에 나서야만 당당한 평화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 박정희 서거일 즈음에 드는 단상이다.
남성욱 / 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