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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수유리의 4.19 국립 묘지
1) 사월 학생 혁명 기념탑 비문
1960년 4월 19일
이 나라 젊은이들의 혈관 속에 정의를 위해서는 생명을 능히 던질 수 있는 피의 전통이 용솟음치고 있음을 역사는 증언한다. 부정과 불의에 항쟁한 수만명 학생대열은 의기의 힘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바로 세웠고 민주제단에 피를 부린 185 위의 젊은 혼들은 거룩한 수호신이 되었다. 해마다 4월이 오면 접동새 울음 속에 그들의 피묻은 혼의 하소연이 들릴 것이요 해마다 4월이 오면 봄을 선구하는 진달래처럼 민족의 꽃들은 사람들의 가슴마다 되살아 피어날 것이리라.(1963.9.30)
2) 수유리 국립묘지의 추모시비
① 구 상의 진혼곡
- 鎭 魂 曲 -
- 마산 희생자를 위하여 -
손에 잡힐듯한 봄 하늘에
무심히 흘러가는 구름이듯이
피 묻은 사연일랑 아랑곳 말고
형제들 넋이여, 평안히 가오
형제들이 틔워 놓은 그 한 길에
오늘도 자유의 喪列이 뒤를 이었오.
형제들이 뿌리고 간 목숨의 꽃씨야
우리가 기어이 가꾸어 피우고야 말리니
운명보다도 짙은 그 바램마저 버리고
어서,영원한 안식의 나래를 펴오.
② 박목월 시비
- 죽어서 영원히 사는 분들을 위하여 -
학우들이 메고 가는
들 것 위에서
저처럼 윤이 나고 부드러운 머리칼이
어찌 주검이 되었을까?
우람한 정신이여.
자유를 불러올 정의의 폭풍이여.
눈부신 젊은 힘의
해일이여.
하나, 그들의 이름 하나하나가 아무리 청사에 빛나기로소니
그것으로 부모들의 슬픔을 달래지 못하듯,
내 무슨 말로써
그들을 찬양하랴.
죽음은 죽음.
명목(暝目)하라.
진실로 외로운 혼령이여.
거리에는 5월 햇볕이 눈부시고
세종로에서
효자동으로 가는 길에는
새잎을 마련하는 가로수의 꿈 많은 경영이
소란스럽다.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
지나간 것은 조용해지는 것
그것은 너그럽고 엄숙한 역사의 표정
다만 참된 뜻만이
죽은 자에서 산 자로
핏줄에 스며 이어가듯이.
그리고, 4.19의
그 장엄한 업적도
바람에 펄럭이는 태극기의 빛나는 눈짓으로
우리 겨레면 누구나 숨쉴,
숨결의 자유로움으로,
온 몸 구석구석에서 속삭이는
정신의 속삭임으로
진실로 한결 환해질
자라는 어린 것들의 눈동자의 광채로
이어 흘러서 끊어질 날이 없으리라.
➂장만영의 弔歌 - 손 님 - ➃ 송 욱 시비- 소리치는 태양 -⑤ 유안진 시비- 꽃으로 다시 살아 - ⑥ 박화목 시비, - 4 월 - ⑦ 이한직(李漢稷)의 진혼가 - 진혼의 노래 -⑧ 김윤식(金潤植) 시비- 合 掌 - ⑨ 윤후명 헌시 - 역사를 증언하는 자들이여 4.19의 힘을 보아라 - ⑩ 이성부 헌시 - 손 님 - ⑪ 정한모 헌시 - 빈 의 자 -
⑫ 4월혁명 희생학도 위령제 노래
- 진혼가 -
一. 가슴을 치솟는/ 불길을 터뜨리니
사무친 그 외침이/ 江山을 흔들었다
鮮血을 뿌리며/ 우리싸워 이긴 것
아! 民主革命의/ 깃발이 여기 있다
가시밭길 헤쳐서/ 우리 새운 祭壇앞에
울며 바친 희생들아/ 거룩한 이름아!
고이 잠들거라.
祖國의 품에 안겨
歷史를 지켜보는
젊은 魂은 살아 있다.(후렴) -조지훈-
3) 4.19 국립 묘지
국립 4.19묘지는 경내에 들어서면 매우 안정감을 주는 곳이다. 산이 급하여 위압감을 주지도 산이 절경이라 마음을 들뜨게도 하지 않는 곳이다. 이런 말을 하였더니 소장 김영식 씨는 묘지가 풍수지리상 좋은 위치에 놓였다고 말한다. 묘지의 성역화와 상징성 제고를 위하여 공간에 위계적 질서를 부여했으며 따라서 전통적인 공간으로 구성했다는 것이다. 북한산을 배경으로 하여 그 아래로 노정봉, 백운봉이 있고 그 아래로 유영봉안소, 참배로, 성역, 상징물, 연문으로 질서를 주었다고 말한다. 정부에서 묘지를 설립하기로 결의는 한 것은 1961년 2월 1일이나 그간의 여러 우여곡절을 겪은 뒤 1995년 4월 17일에 지금규모의 준공식을 가지게 된 것이라 한다. 현재 조사된 4.19 비문은 전국에 13개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그리고 4.19 도사관이 서울에 있어 당시의 자료들을 보관하고 있다.
4.19 비문을 조사하여 아래에 싣는다.
4) 서울 일원의 4.19 비문
①. 고려대
- 자유! 너 영원한 활화산이여 ! -
사악과 불의에 항거하여 /압제의 사슬을 끊고 /분노의 불길을 터뜨린 /아 ! 1960년 4월 18일 /천지를 뒤흔든 정의의 함성을 새겨 /그 날, 분화구 여기에 돌을 세운다
➁ 서울사대
젊은 학도 /봉화를 들었으니 /사랑하는 겨레여 /4.19의 외침을 /길이 새기라
(1960.7.)
➂ 경기고
민주혁명 학생 위령비
경기 남아의 피여
경기남아의 거룩한 이름이여, 그 가슴속에서 터져나온 피여 ! 위대한 피여 !
겨레의 역사 위에 검은 점을 찍은 전제와 탄압과 착취와 기만과 온갖 악의 권화인 지독한 독재였건만 이 피 앞에선 꺼꾸러졌나니 여지없이 허물어지고 말았나니,
오 ! 피에 젖은 젊은 사자들이여 잠들어 말이 없는 어린 영웅들이여, 우리는 듣노라 그대들의 외침을,
우리는 보노라 이 돌에 어린 그대들의 넋을,
꽃은 졌도다 피기도 전에,
그 봉오리가 뿌린 피는 그러나 방울방울 다시 꽃으로 맺힌다.
민주의 꽃이 자유의 꽃이 피련다,
평화와 번영의 향기가 무르녹으련다,
경기남아의 장엄한 기백이여, 그대들의 부활을 맹세코 믿으련다,
어깨를 겯고저 이 돌에 기대어 보노라.
손을 잡고파 그 뿌다구니를 어루만지노라.
(단기 4293년 10월 3일)
5) 전주시 4.19 기념탑
- 조지훈 헌시비 -
- 다섯 젊은 희생자를 위한 헌시 -
자유여 영원한 소망이여
피흘리지 않곤 거둘 수 없는 고귀한 열매여 !
그 이름 부르기에 목마른 젊음이였기에
맨 가슴을 총탄 앞에 헤치고 달려왔더니라
불의를 무찌르고 자유의 나무의 피거름 되어
우리는 여기 누워 있다.
잊지 말자 사람들아
뜨거운 손을 잡고 맹세하던
아 그날 사월 십구일을
2. 신동엽의 시와 4.19
가. - 山에 언덕에 -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 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속에 살아 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아,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 지네.
바람 비었거든 인정 담을 지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 날지어이
( 詩碑에서는 < >부분 생략)
나. 비음碑陰
우리 강토와 겨레의 쓰라린 역사와 욕된 현실 속에서 민족의 비원을 노래한 시인 신동엽은 1930년 8월 18일 부여고을 동남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전주 사범과 서울 단국대학에서 수학하고 충남 주산농고와 서울 명성여고 등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일생을 시작에 전념하였다.
1959년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한 그는 시집 [아사녀]와 서사시 <금강>을 비롯해 수많은 역작을 발표함으로써 우리 시단의 주목과 기대를 한 몸에 받았으나 신병으로 인하여 1969년 4월 7일 서른 아홉의 푸른 나이로 이승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시와 인간을 사랑하던 문단 동문. 동향의 친지와 그의 훈도를 받던 제자들이 일주기에 추모의 정을 금할 바 없어 돌 하나를 다듬어 그의 시 한편을 새겨 그가 나서 자란 이 백마강 기슭에 세운다
1970년 4월 7일
글씨, 朴秉圭, 설계, 鄭健謨, 조각, 崔鍾龜
다. 그의 시대와 좌절
일제식민지시대를 제외한 현실에서, 1960년대를 기준으로 할 때 민중을 시대의 주인으로 인식하고 외적인 국제관계와 내적인 권력의 탄압으로부터 민중을 해방시켜한다는 저항적인 시인을 흔하게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김수영, 김남주 그리고 신동엽 정도가 아니었던가. 1960년대 혼란기시대 <껍데기는 가라>고 외치며 권력에 저항하고 지성인의 위선을 비판했던 외로운 시인의 목소리가 2004년 오늘에까지도 시대의 목소리로 울리고 있는 것은 무슨 힘에서일까. 2004년 7월 2일 (금) 저녁 10시 모 TV에서는 현대인물사로 <錦江>의 시인 신동엽을 주목하고 한 시인의 힘이 얼마나 연약하고 또 위대할 수 있는가를 조명한 적이 있다. 총칼이 드센 시대에서 시인의 힘이란 약한 것이지만 그가 외치는 민족의 언어와 언어에 담긴 민족의 미래는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는 위선으로서의 민주주의나 시대에 대한 깊은 좌절을 경험하지 않은 가슴 약한 사람에게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던 분노는 아니었다. 신동엽의 친구 이상비, 남정현(작가)이 증언하는 바로는 신동엽은 눈은 크지만 잠자리 같이 가냘픈 몸매와 작은 얼굴, 조용한 성품이었다 한다. 그렇게 왜소하고 가냘픈 몸을 한 신동엽이 39 세라는 짧은 생을 마감할 것을 예감하면서도 그의 아픈 시대를 150여 편의 시로서 저항하고 울었던 것은 한갓 범상한 시인의 범주를 넘어선 것이었다. 물론 아픔의 종점에는 4.19 혁명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소용돌이가 발화되었던 것이고 그 발화의 시점은 동학의 황토현으로부터 곰나루까지 이어져 있다. 1960년 4.19 당시 광주상고에 다니던 김주렬 군의 눈에 최루탄이 박혀 바다 위로 떠오른 사건과 시민, 학생들의 궐기는 권력자에 대한 천둥같은 하늘의 분노였다. 이때 신동엽은 민중이 당한 비극적 지평을 혼자 외쳤다. < 그, 모오든 쉬붙이는 가라>고. 시집 [阿斯女]는 그의 4.19시대의 좌절을 분노하고 절망으로부터 연소되는 열화같은 외침이었다. 4.19가 다시 군사 쿠테타로 둔갑할 때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신동엽은 다시 四月은 올 것이며 四月에는 민중이 일어서야 하는 달이라고 외친다. 장편 서사시 <금강>은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거슬리려는 모든 세력들에 대하여 저항하며 다수의 삶을 짓밟는 소수에 대하여 정의와 자유의 이름으로 징치한 것이다. 서사시 <금강>은 그가 신병에도 불구하고 6년만에 탈고하였던 한국 서사시의 결정체로서 민중의 힘을 민족 역사의 맥락 위에서 진단함으로써 시인의 힘이 약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백제의 고도 부여에서 출생하여 전주사범과 단국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6.25때는 민청에 가입한 사실이 있고 한때 좌익운동을 했으나 적치하에서 당시 부여 초전면 소방대장을 그의 집에서 피신시켰던 일은, 공산당의 허구였던 사상이 아니라 인간의 생명을 중시한 행위였다. 그는 좌우익 간 전개되던 무모한 살상과 죽음을 목격하였고 민족이 이데올로기로 분단된 사실에 깊은 상처를 입었던 것 같다. 그의 이러한 상처는 1960년대 시의 기반이 되었고 민족은 분단되어서는 안 되며 민족의 역사는 하나로 통일되어야한다는 것을 역사적 당위로 받아들였다. 신동엽은 외세지배를 배격하며 민족 스스로의 자강을 외쳤으니 <水雲이 말하기를>가 그러하고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남북 양쪽에서 겨누고 있던 총부리와 탱크들이 ‘한떼는 서귀포 밖, 한 떼는 두만강 밖’으로 총칼을 내던지던 꿈을 꾸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라에서 백두까지 하나의 국토이기를 염원했던 신동엽은 1950년대부터 벌써 민족통일을 시화하며 시대를 앞서 저만치 갔던 것이다. 그는 <압록강 이남>에서 누가 누구를 위해 총을 겨누고 있는가 라고 반문한다. 그는 1950년 12월에 국민방위군에 입대하여 갖은 고생을 다한다. 그리고 1951년 2월 귀향도중의 심한 고통으로 병을 얻게된다.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 서울대 철학과를 나온 인병선과 결혼하면서 새로운 출발을 한다. 살아야한다는 문제 때문에 주산농고 교사로 있었으나 신병으로 한 학기를 넘기지 못했고 이후 2 년 간 병마와 싸우면서도 1959년 1월 300행의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大地>로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다. 그후 그는 3 남매의 아버지가 되고 명성여고 교사를 하면서 시 <진달래 山川>을 발표하는 등 시작활동을 계속했으나 번번이 치안국 특수과 등에서 사상적인 불온을 이유로 보이지 않는 압력을 받고 살게 된다. <진달래 山川>에는 인민군 장총이나 고구려 의형제 진달래 등 어휘가 있으며 미군을 한갓 외세로 보면서 민족에게 ‘총을 쏘지 말라’고 외친 것이다. 민족에게 총을 쏘는 우방을 승인할 수 없었다. 이같이 시대에 앞섰던 시인의 역사의식을 진실된 역사의식으로 수용할 수 없었던 일각에서는 그의 詩에서 인민군 장총이나 진달래꽃 등의 어휘를, 이미 권력자의 허구적 이데올로기였음이 밝혀졌던 반공사상과 결부시키는 피상적인 시각으로 시인을 매도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는 남북통일 같은 하나의 조국,전쟁없는 민족,가난하고 힘 없는 자가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염원한 것이지 결코 좌익 이데올로기에 철저했던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다만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파괴하고 절대다수의 보편적인 인간의 삶과 자유를 저해하려는 어떤 세력에 대한 저항이요 투쟁의식이었던 것이다. 신동엽은 차라리 시대의 아나키스트였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무릇 그 시대의 사상이란 시대적인 요구와 민중의 절박한 삶과의 관계에서 자생적인 것과 외적인 요구간의 합의를 통하여 형성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신동엽의 아나키즘도 이러한 시대적 요구라는 엄숙한 필요성에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의 아나키즘은 오히려 볼셰비키 사회주의를 어떤 면에서 약화시킨 면을 볼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신동엽은 무산계급이라는 계급의식보다 아사달과 아사녀로 대표되는 역사 속의 민중을 옹호하고 황토현으로 대변되는 농민동학군을 승인한 것이다. 그래서 그가 배격한 것은 외세와 독재였다. 독재로부터는 민중을 외세로부터는 민족을 지키자는 것이다. 그는 무산계급을 옹호했으나 계급적 의식은 아니었으며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신사회건설을 이상화한 것이 아니라 우리끼리 살 수 있는 소박한 공간이었다.
젊은 시절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것은 현실에 대한 불만의 표출방법이다. 신동엽 시인이 현실의 불만으로 찾은 이념적 공간이 아나키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의 아나키즘이 한국 땅에서 꽃피우지 못한 것은 아나키즘의 리버럴한 개인주의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시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에서는, 1960년대 민주화운동 이후에도 서민과 민중이 위선적인 자유, 위선적인 평화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라. <껍데기>역사
필자가 신동엽의 생가를 찾은 것은 2004년 8월 20일(금)이었다. 대전에서 논산을 거쳐가는데 능산리 고분표지판을 볼 수 있었다. 거기에 신동엽과 홍사준의 묘가 있는데도 지나쳐야 했다. 신동엽의 생가를 가기 위해서는 부여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군청쪽으로 올라가면 ‘시인 신동엽 생가 60미터’라고 쓴 나무 표지판이 있다. 우측 길을 따라 들어가면 향군회관이 있고 담 하나 옆에 신동엽의 생가가 있다. 대문은 열려 있고 집수리를 하다 태풍관계로 일을 미루어놓은 것 같아 쓰레기봉지 들이 늘려 있다. 웃채 3간 아랫채 3간의 한옥에 기와를 덮었고 담도 기와로 수리했다.
아내 印병선의 시 <生家>가 문위에 걸려 있다.
- 生家 -
우리의 만남을 /헛되이 /흘러버리고 싶지 않다
있었던 일을 /늘 있는 일로 /하고 싶은 마음이 /당신과 내가 처음 맺어진 /이 자리를 / 새삼 꾸미는 뜻이라
우리는 /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살며 있는 것이다.
글씨 신영복
웃채와 아랫채 사이에 화강석 큰 돌 하나가 깊이 박혀 있어 모진 세월 시인이 밟았던 돌이 아닌가 말해주고 있으나 주인 없는 세월에 무엇인들 온전하랴. 마당에 잡초가 자라 을씨년스럽고 공사하다만 뒷자리가 널려 있는데 검은 쓰레기봉지가 하필이면 마루로 굴러 있는가. 큰 방 앞에는 그의 문제작 <껍데기는 가라>가 친필 원고지 형태로 나무판에 새겨져 있다. 내용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퇴색되어 있다.
- 껍데기는 가라 -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만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는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럽게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쉬붙이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는 신동엽을 대표하는 시의 하나다. 시인은 錦江이라는 큰 역사의 도도한 줄기 속에서 황토현의 동학농민운동과 3.1운동, 4.19 등 민족자주운동을 높이 평가하면서 그러한 맥락에서 ‘민족은 하나’라는 시각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외면하려는 어떠한 형태의 명분도 비본질적이라는 인식이었다. 아사달과 아사녀의 초례청은 중립의 초례청이고 따라서 한반도에서 모든 ‘쇠붙이’는 물러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국의 민주주의를 찾기 위해 희생한 선량한 젊은 사람들의 죽음을 딛고 정치적인 이해와 민주투사라는 명예를 얻어 새로운 폭력과 파쇼를 챙기려는 어떠한 형태의 위선도 <껍데기>일 뿐이라는 것이다. 여하한 권력으로부터 창출된 역사도 역사는 아니며, 민족의 애환을 면면히 이어온 민초 아사달과 아사녀의 삶과 자유를 찬탈하려는 어떠한 형태의 그것은 제국적 파쇼거나 ‘오욕된 권세요 저주받을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의 시 <阿斯女>는 4.19가 단순한 민주화 운동이 아니라 우리 조상이 한반도에 이주해오던 그날의 역사로부터 이어져온 것이며 역사적 줄기로서 3.1 운동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월 십구일, 그것은 우리들의 조상이 우랄고원에서 풀을 뜯으며 양달진 동남아 하늘 고흔 반도에.....백제로 고려로 흐르던 강물, 아름다운 치맛자락 매듭 고흔 흰 허리들의 줄기가 3.1의 하늘로 솟았다가 또 다시 오늘 우리들의 눈앞에 솟구쳐오른 아사달 아사녀의 몸부림,......’이었다. 시인 신동엽은 우리의 역사가 이데올로기에 의해 분단되어야할 역사도 아니요 권력을 앞세워 힘없는 자를 뭉개고 짓밟는 파쇼의 역사도 아니며 ‘태백줄기 고을마다 봄이 오면 피어나는 진달래,개나리,복사’ 같이 이름 없는 백성으로 살고 싶을 뿐인 것이다. 어쨌든 신동엽은 김주렬의 죽음에 대하여, <阿斯女>에서 ‘너의 아들의 학교 가는 눈동자 속에 총알을 박아보았나 ?’ 라고 반문한다. 시인에게 4.19는 역사적인 승리의 한 매듭이면서 ‘소리치다 쓰러져간 어린 전사’에 대해 무한한 부끄러움의 의식이었으며 그들의 희생을 가슴으로 담고자 하였다. 백마강변의 신동엽의 시비에 새겨져 있는 <山에 언덕에>라는 시도 4.19와 연관하여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고,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고,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다’ 는 ‘그’는 분명 민주화운동으로 생을 달리한 젊은이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들은 화사한 꽃으로, 맑은 숨결로, 울고간 영혼으로 남아 있다.4월의 어느 산에 언덕에 또는 들에 숲속에 꽃으로 피어날 것을 기대하는 그의 마음은 처절한 것이다. 1960년대 말기에도 4.19의 정신은 정착되지 못하였고 힘없고 가난한 자들에게 빛이 되지 못하고 있음을 불만으로 여겼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는 위장된 민주주의가 행세하고 진정한 민주화가 도래하지 않았음을 슬퍼한 것이다. 누가 이 땅의 백성들이 평화를 얻었다 하는가, 누가 이 땅의 민중들이 자유를 얻었다고 말하는가, 아직은 아니다라는 생각이다. 신동엽은 한반도가 좌우에 휩쓸려 ‘공화국기와 태극기가 번갈아 올라가는 죄없는 나의 고향’을 슬퍼한 것이며 그러나 머지않아 자유의 땅이 도래할 것을 기대한 시인은 자기의 생명이 한계에 이르렀음을 인지하고 ‘산월달이 된 자유의 여신’을 남은 벗에게 부탁한 것이다. 시 <만약 내가 죽게 된다면>에서 독재정치의 희생자였던 시인은 뒷사람들에게 부탁한다. ‘나 대신 그대들의 정열은 갓난 아들 조국에 바치라!’ 라고. 신동엽 시인은 외세 없는 조국, 좌우 이데올로기 없는 조국, 독재 없는 조국, 진정한 자유와 평화가 있는 조국을 소망한 것이다. 시인은 詩 <내 가슴 속에서 핏덩이가 미치는 것은 >에서 ‘내가 울은 것은 너 따문인 줄 아는냐’ 라고, 그가 슬퍼한 것은 완전한 자유를 얻지 못한 ‘민중’을 위하여 울었던 것이다.
마. <錦江>의 서사의식
서사시 <錦江>을 다시 읽고자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민중시인으로서의 신동엽의 시세계를 파악하고자함이며 둘째는 시인의 역사의식을 규명해보자는 것이다. 신동엽의 서사시 <금강>은 장장 6년여에 걸쳐 창작된 2백여(182) 쪽의 시로써 서시 2장, 본시 26장, 후화 2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등장인물의 성격
<금강>에 등장하는 인물은 동학농민운동의 주인공들이다.
크게는 역사적 실체로서 등장하는 인물과 서사적 인물로 등장하는 인물군으로 대별된다. 역사적 인물로는 동학의 주동자인 전봉준,해월,김개남, 수운,손화중,최경선,이필 등이 다수순으로 등장하고 손병희,김진사,노인,홍계훈 등이 그리고 동학군과 적대되는 인물군으로 조병갑,김문현,이두황 등 관리와 관군, 왜군과 청군의 실제인물들이다. 서사적 인물로는 불우한 청년 申하늬와 印진아가 나온다.
역사상 조선조 500년은 약탈의 시대였다. 조선조의 지배계급이었던 왕족,정승,대감,양반과 지방의 관찰사,현감,병사,목사 등은 약탈자라로, 그들로부터 희생된 백성들, 농민, 노동자, 천민들 그리고 고구려인과 백제인으로 만난 진아와 하늬가 그들의 대상이다.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생아 하늬는 머슴으로 있는 돌쇠가 키웠는데, 어느 날 金 進士가 마당에 집어던져 불구가 된다. 이후 부소산 너머 사는 趙 할머니가 받아 키웠지만 조할머니 남편 역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은 것이다. 조할머니는 하늬에게 한서와 불경 수십권을 읽혔다. 조할머니가 죽고 배필로 만난 여인이 궁녀였던 진아다. 하늬와 진아와 1년은 꿈같이 흘러갔는데 결국 진아는 김 진사에게 당하자 강에 몸을 던지게된다. 하늬는 전봉준을 만나 그의 심복이 되고 동학군으로서 여러 전투에 참가한다. 나중에 다시 만난 진아는 하늬의 아이를 갖게 된다. 한편,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군은 관군과 왜 등 연합군에 크게 패하게되고 동학군의 주동인물인 전봉준을 비롯하여 김개남,손화중,최경선 장군 등 모두가 잡혀 효수를 당하고, 이듬해 서정리역 광장에서는 왕병,왜군,토반,유림들이 합세하여 마지막으로 농민 27명을 능지처참시킨다. 역사의 물결은 다시 흐린 금강처럼 황톳물이 되어 흐르는데, 계룡산 산마루에서 활약이 빛났던 하늬는 서정리역 광장에서 스스로 농민들과 함께 죽음을 택한다.
<금강>에서는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라고 반문한다. 동학농민이 관군에 저항한 것이 50만 명, 죽거나 실종된 사람이 10만여 명이라 한다. 하늬가 양반에 의해 불구자로 살게 된 것은 이 시대 농민 전체가 양반계층에 의해 불구자가 된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아내 진아가 상전에게 당하고 삶이 파탄나는 과정, 하늬는 죽었지만 어내 진아는 하늬의 2세를 가지게된 것은 다가올 미래를 다시 기대한다는 의미였다. 농민이 자유로운 세상을 얻기 위해서 저항을 하였으나 왕권과 외세에 의해 실패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민중의 시대가 요원하다는 현실을 증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금강>의 서사적 인물인 하늬와 진아는 동학의 역사적 인물에 합류함으로써 도래할 민중의 시대가 가능한 것임을 보여주었다.
둘째, ‘하늘’의 의미
<금강>을 비롯한 신동엽의 시에서 ‘하늘’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있다.
우리들은 하늘을 봤다. /1960년 4월 /歷史를 짓눌던 ,검은 구름장을 찟고 /永遠의 얼굴을 보았다.
하늘 물 한아름 떠다,/1919년 우리는 /우리 얼굴 닦아 놓았다.
1894년쯤엔, /돌에도 나무 등걸에도 /당신의 얼굴은 전체가 하늘이었다.
민족의 자유 그것은 하루아침에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역사적인 고난과 투쟁을 이끈 후에야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1894년의 농민동학운동, 1919년의 3.1 민족독립운동 그리고 1960년의 4.19 민주학생운동을 겪은 후에야 이 나라에 민족이 살아 있음을 볼 수 있었고 자유와 평등한 세상이 도래할 수 있음을 본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영원히 생명을 바쳐 쟁취하여야할 진리요 목표였던 것이다. 그러한 시대를 본 것은 4.19를 겪은 뒤에야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백성’을 받들어야하는 것은 ‘하늘’의 뜻인데 소수인 지배층이 백성의 생명을 경시하는 것은 역천이며 하늘의 뜻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권력의 힘은 강했기에 자유의 얼굴을 사람들 가슴속에 묻어두어야 했으며, 자유의 희생자는 다시 산천의 꽃으로 피어 해마다 강산을 덮어간 것이다. 자유와 권력은 언제나 길항의 작용처럼 상반되게 작용한다. 수운과 해월의 희생이 그러했고 전봉준과 김개남 최경선 손화중의 죽음이 그러했던 것이다. 신동엽은 민족의 하늘에 도래할 또 다른 하늘이 있음을 확인하고자 한다. 또다른 하늘이란 수운 최재우가 주장하는 後天開闢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인식된다. <금강>의 주제는 민족의 자유이고 모든 억압으로부터 백성을 해방시키는 일이다. 민족의 자유와 평화를 획득하려는 그 시대상이 피압박농민들이 그리는 영원한 얼굴 즉, 다음시대에 도래할 후천개벽의 세상인 것이다.
바. 신동엽과 아나키즘 :
➀ 아나키즘은 바쿠닌,크로포트킨,톨스토이 등 러시아인에 의해 확립되었지만 식민지시대 우리 나라에서는 국내보다 국외에서 조직적인 활동을 한 것으로 밝혀진다. 즉, 재만무정부주의자로 신채호,이회영, 유자명,이을규,이정규,정화암,백정기,김종진,김좌진 등을 들 수 있다. 이중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은 재만 조선무정부주의 내용과 정신을 가장 투명하게 선언한 것이다. 일제시대 국내의 아나키즘 활동은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에 기반을 두고 활동하였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조선인 무정부주의자 박 열을 들 수 있다. 朴 烈은 일본천황의 암살미수사건이란 이른바 ‘大逆事件’으로 알려져 있지만 박 열 외에도 정태성,김중한,홍진우,최규종,서동성 등이 있고 일본인으로 오가와 시게루(小川茂),가네고 후미꼬(金子文子)등이 있다. 특히 신채호는 만주 여순감옥에서 10년형을 받고 복역 중 옥사했다. 그는 독립운동의 한 방법으로 아나키즘을 택하였고 세계의 역사를 我와 彼我의 투쟁과정으로 규정하여 민족독립의 방법을 강화하였다. 어쨌든 19세기 자본주의의 모순을 대신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로 사회주의가 대신하는 시대에서, 사회주의는 국가권력의 장악을 통해 자본주의 체제의 전복과 평등을 꾀했다면, 아나키즘은 국가자체를 부정함으로써 인간에게 ‘자유’를 선사하려고 했던 것이다. 따라서 아나키즘에서 주목되어야할 것은 평등보다 자유인 것이다. 아나키즘이 종래의 인식처럼 무정부,무법,무질서, 파괴,폭력 등으로 특징지워졌던 것은 식민지시대 민족독립운동과정에서 선언하였던 과격성을 말하는데, 또는 자유, 자치 그리고 자연의 삼자(三自)로서 창조적이며 건설적인 사상이라고 지적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아나키즘은 사회주의의 일파로서 부르조아 국가를 혁명에 의해 타도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하나 극단의 개인주의가 아나키스트다라고 하듯이 아나키즘은 볼세비즘에 비해 리버럴한 자유주의적 무정부주의라고 정의하고 있다. 1927년 프로문학 방향전환기에 아나키스트 김화산, 강허봉, 이향 등이 카프의 목적의식론을 비판한 것이나 무산계급을 외재의 강권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가장 자연적인 내부법칙에 의한 자유연합을 주장함으로써 프로계급독재도 부정하였던 것이다.
② 신동엽의 현실인식 : 신동엽은 우선 평등한 두레와 평등한 분배를 필요로 하는 무정부마을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아나키스트로 볼 수 있다. 이조 시대를 약탈자의 시대로 정의하는가 하면 민중 이상의 왕족과 관리, 양반 계층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왕을 한갓 백성들 가슴에 단 꽃이요 군대는 백성들이 고용한 문지기 정도로 보면서 지배계층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지주, 은행주 같은 경제적 특권층도 없는 시대를 이상화하고 하고 있다. 역사의 알맹이는 ‘도시와 농촌 깊숙한 그늘에서 우리의 노래 우리끼리 부르며 누워 있었노라’고 밝힘으로써 역사의 주체는 농민이요 도시 상인과 근로자를 그 주변인으로 하고 있다.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로서 국가 없는 분산적 소생산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신동엽의 주장과 부합한다. 신동엽이 <금강>에서 민족에게 미래 이상사회가 ‘이제 오리라’고 기대하였던 것도 이상적인 사회란 이민족의 지배와 권력자의 착취가 없는 민중중심의 사회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오리라,
갈고 다듬은 우리들의
푸담한 슬기와 慈悲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우리 세상 쟁취해서
半島 하늘 높이 나부낄 평화,
따라서 신동엽은 한반도에 평화의 깃발이 나부낄 날을 기대한 것이지 과격한 볼세비키즘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혁명도 조국의 가슴에 ‘혁명, 噴水 뿜을 날은 오리라’고 기대한 것이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민중의 희생을 가져왔던 1894년 3월, 1919년 3월 그리고 1960년 4월에 흘린 피로써 자유를 쟁취하였던 기쁨이며 또 그 기쁨이 지속되지 못하고 단절되었던 사실을 안타까워한 것이다.
사.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그러나 이러한 신동엽의 역사의식도 자유에 대한 절규도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진 것인가. 이제는 메아리 없는 외침에 불과한 그의 냉정했던 이성과 뜨거웠던 조국애. 다만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우리는 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살며 있는 것이다>라는 아내 印병선의 짧은 시가 낡은 벽에 걸려 있으니, 육신은 떠났어도 시인의 영혼은 생가에 머물러 있는가. 대리석 생가 표지판에는
이 집은 신동엽 시인이 소년시절과 청년 시절을 보낸 집으로서 그의 문학정신의 요람이다. 신동엽 시인의 시 <껍데기는 가라> 장편 서사시 <금강>에 도도히 흐르는 민족애의 시혼을 우러르며, 우리 문학사에 뜻 깊은 유적이 되는 이 집을 길이 보존하기로 합니다.
1985년 5월 26일
신동엽 시인 유적보존위원회
시인 통신사
신동엽의 시비가 모 안내서에는 동남리 또는 백제교 못미쳐 등 두 곳에 있는 것처럼 표시하고 있으나 정확히 말하여, 부여읍 백제교 가기 전에 부여중앙병원이 있는그 옆 숲속에 있다. 군청 앞에서는 버스가 없고 보건소가 있는 노타리에서 타면 백제교 못미쳐서 내릴 수 있다. 병원건물을 지나 숲쪽으로 가든지 백제교까지 가서 왼편으로 나성(羅城) 표지판을 지나가든지 도로에서 10여 미터 들어가면 시비를 만날 수 있다. 시비는 유적보존회와 시인통신사가 공동으로 세운 것으로 문협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문협에서 세운 한국문학표징도 없는 것이다. 시비 뒤쪽에 일본불교전래사은비가 서 있다. 백제에서 일본으로 불교가 전래된 데 감사하다는 의미로 부여에 세운 것이다. 일본불교는 일본국 흠명기(欽明期,서기 552)에 백제 26대 聖王이 전한 것인데 그후부터 발전을 거듭하여 일본문화의 정화를 이룩하였다는 것이다. 일본불교는 오늘날 일본문화의 중심에 서 있다면 백제불교는 오늘날 한국문화의 무엇으로 남아 있는가. 그것에 대답이나 하듯 백마강변에서는 시원한 바람의 끝자락이 몰려오고 있었다. 이날 금강은 며칠간의 태풍과 폭우로 흙탕물만 흐르고 있다. 지도상에는 백마강으로 써놓았다. 백마강은 금강의 다른 이름이다. 전북 장수에서 발원하여 공주를 거쳐 부여로 흘러드는 금강은 특히 부여군 규암면에서 세도면까지의 16 킬로미터를 백마강이라 부른다 한다. 백마강, 어쨌든 누런 금강물이 느릿느릿 흐르는 수면을 보며 백제의 흘러간 자취를 못 잊어 하는 것은 떠도는 나그네의 부질없는 감상일까. 부여의 읍내는 극히 평온하다. 사람들도 친절하고 안내도 성의껏 해준다. 버스선로 단축에 대하여 십여 명의 중노인들이 군청옆에 모여 조용히 확성기를 대고 부당함을 항의하고 있다. 항의의 목소리라기보다 힘빠진 확성기의 소리가 도리어 위태로워 보이는 이곳에는 옛날 계백 장군의 동상이 서 있는 곳이다. 부여의 시인 신동엽, 그는 39 세라는 너무 젊은 나이에 이승을 떠나 때로는 맑고 때로는 흐린 백마강을 상기도 지켜보고 있을 이 곳, 부여 일대는 지금은 조용하고 평온한 읍시가지에 불과하다. 그렇게 활발한 것도 저항의 목소리도 별로 들을 수 없는 지역임을 느끼게 한다. 이웃 공주에서는 노무현 정권의 신행정수도 이전 확정지로 발표되어 땅값이 오르고 새로운 서울에 대한 희망으로 부풀어 있는데, 조용한 하루를 보내고 있는 부여를 떠나려니 문득 그간 길 위에서 만난 친절했던 사람들, 터미널 택시기사,숭늉을 뜨겁게하여 주던 부여박물관 앞 어느 식당 할머니,궁남지를 자세히 안내해준 대학생,외산면가는 버스기사,무량사 앞에 사는 만수리 이장의 시국비판,부산서 왔다는 부산 무슨 식당 아줌마,어깨를 잡으며 백제교를 손으로 가리켜준 또래노인 등 그들의 얼굴이 금강의 물처럼 천천히 흐르고 있는 것이다.
신동엽의 역사의식도 자유에 대한 절규도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진 것인가. 이제는 메아리 없는 외침에 불과한 그의 냉정했던 이성과 뜨거웠던 조국애. 다만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우리는 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살며 있는 것이다>라는 아내 印병선의 짧은 시가 낡은 벽에 걸려 있으니, 육신은 떠났어도 시인의 영혼은 생가에 머물러 있는가. 대리석 생가 표지판에는
이 집은 신동엽 시인이 소년시절과 청년 시절을 보낸 집으로서 그의 문학정신의 요람이다. 신동엽 시인의 시 <껍데기는 가라> 장편 서사시 <금강>에 도도히 흐르는 민족애의 시혼을 우러르며, 우리 문학사에 뜻 깊은 유적이 되는 이 집을 길이 보존하기로 합니다.
1985년 5월 26일
신동엽 시인 유적보존위원회
시인 통신사
신동엽의 시비가 모 안내서에는 동남리 또는 백제교 못미쳐 등 두 곳에 있는 것처럼 표시하고 있으나 정확히 말하여, 부여읍 백제교 가기 전에 부여중앙병원이 있는 그 옆 숲속에 있다. 군청 앞에서는 버스가 없고 보건소가 있는 노타리에서 타면 백제교 못미쳐서 내릴 수 있다. 병원건물을 지나 숲쪽으로 가든지 백제교까지 가서 왼편으로 나성(羅城) 표지판을 지나가든지 도로에서 10여 미터 들어가면 시비를 만날 수 있다. 시비는 유적보존회와 시인통신사가 공동으로 세운 것으로 문협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문협에서 세운 한국문학표징도 없는 것이다. 시비 뒤쪽에 일본불교전래사은비가 서 있다. 백제에서 일본으로 불교가 전래된 데 감사하다는 의미로 부여에 세운 것이다. 일본불교는 일본국 흠명기(欽明期,서기 552)에 백제 26대 聖王이 전한 것인데 그후부터 발전을 거듭하여 일본문화의 정화를 이룩하였다는 것이다. 일본불교는 오늘날 일본문화의 중심에 서 있다면 백제불교는 오늘날 한국문화의 무엇으로 남아 있는가. 그것에 대답이나 하듯 백마강변에서는 시원한 바람의 끝자락이 몰려오고 있었다. 이날 금강은 며칠간의 태풍과 폭우로 흙탕물만 흐르고 있다. 지도상에는 백마강으로 써놓았다. 백마강은 금강의 다른 이름이다. 전북 장수에서 발원하여 공주를 거쳐 부여로 흘러드는 금강은 특히 부여군 규암면에서 세도면까지의 16 킬로미터를 백마강이라 부른다 한다. 백마강, 어쨌든 누런 금강물이 느릿느릿 흐르는 수면을 보며 백제의 흘러간 자취를 못 잊어 하는 것은 떠도는 나그네의 부질없는 감상일까. 부여의 읍내는 극히 평온하다. 사람들도 친절하고 안내도 성의껏 해준다. 버스선로 단축에 대하여 십여 명의 중노인들이 군청옆에 모여 조용히 확성기를 대고 부당함을 항의하고 있다. 항의의 목소리라기보다 힘빠진 확성기의 소리가 도리어 위태로워 보이는 이곳에는 옛날 계백 장군의 동상이 서 있는 곳이다. 부여의 시인 신동엽, 그는 39 세라는 너무 젊은 나이에 이승을 떠나 때로는 맑고 때로는 흐린 백마강을 상기도 지켜보고 있을 이 곳, 부여 일대는 지금은 조용하고 평온한 읍시가지에 불과하다. 그렇게 활발한 것도 저항의 목소리도 별로 들을 수 없는 지역임을 느끼게 한다. 이웃 공주에서는 노무현 정권의 신행정수도 이전 확정지로 발표되어 땅값이 오르고 새로운 서울에 대한 희망으로 부풀어 있는데, 조용한 하루를 보내고 있는 부여를 떠나려니 문득 그간 길 위에서 만난 친절했던 사람들, 터미널 택시기사,숭늉을 뜨겁게하여 주던 부여박물관 앞 어느 식당 할머니,궁남지를 자세히 안내해준 대학생,외산면가는 버스기사,무량사 앞에 사는 만수리 이장의 시국비판,부산서 왔다는 부산 무슨 식당 아줌마, 어깨를 잡으며 백제교를 손으로 가리켜준 또래노인 등 그들의 얼굴이 금강의 물처럼 천천히 흐르고 있는 것이다.
제 2 장, 식민지 시대의 민족시
- 민족정신의 요람, 진주와 장수를 찾아서
『금석문으로 읽는 한국문학사』는 지난 20여 년 간 강화도에서 제주도, 중국까지 문학비를 답사한 기록이다. 답사기록을 근거로 한국문학을 시대별, 장르별, 지역별로 정리한 바 있다. 본고는 민족정신의 요람인 진주와 장수를 찾았던 기록 중 논개와 촉석루, 삼장사비, 산홍, 설창수 시인 등 진주성 일대를 둘러 본 기록이다.
1. 진주 3.1독립운동기념 시비
눈감고 가슴에 손 얹으면
땅을 흔들던 고함소리 귓전에 다시 새로워라
반만 해를 맥맥히 이어
슬기로 다듬고
죽음으로 지켜온 내 조국,
왜구 너희 간계에 잠시 더렵혔나니
어찌 그 밤에 태양을 오래 등지고
어찌 그 치욕이 체념으로만 잠잠했으랴
기미년 삼월 초하루
겨레의 분노는 마침내 꺼질 줄 모르는 불길로
타오르고
독립만세 소리는 차라리 겸허했어라.
같은 해 삼월 열여드레 장날
스물 두 어른 앞장서 횃불 밝혀 높이 들었으니
임진왜첩의 민족혼은 진양성루에 또다시 메아리쳤고
순국선열의 충절은 다시 강물을 노하게 했도다
원수 흉검 앞에 맨주먹으로 맞서
7만 영령 죽음을 표효했노니
장하여라
죽은 자 오히려 되살아 났고
정의를 고함친 자 영원히 승리했도다
임들 가신지 쉰 두해
갸륵한 애국충혼을 가슴 모아 우러르며
여기 돌 다듬어 비를 세우노니
길이길이 겨레의 앞길에
찬란한 빛이 되리라
1971년 3월 일/ 진주시민 세움/
2. 장수군의 논개 시비
가. 장수군의 생가‘望鄕동산’
‘白頭大幹의 묵바위도 그 바위고 앞 뒤 동산도 늘 푸른데, 터서리마다 말없이 빨갛게 주렁주렁하던 감나무밭이 푸른 물결이 되어 말없이 출렁이다. 五百여년 子子孫孫 조상들의 핏줄이 이어내려온 원 朱村 마을이 1998년 12월 31일 대곡호의 물가뭄으로 호국의 聖女 朱論介娘의 생가터와 함께 물속에 잠기고 말았다.’고 그 안타까움을 시인 高斗永(한국문인협회장수지부장)은 말한다. 70가구 300여 명은 고향을 두고 사방으로 산산이 흩어져버린 서러움을 망향동산의 비 하나로 남겨두고 있다.
눈감으면 떠오르는 동구 밖 오솔길
귀세우면 들려오는 담넘어 아지메 목소리
못잊어 그리워라 정두고 떠나버린 그 사람 사람아!
그 시절 그 추억 어찌할거나 그리워 보고파 어찌할거나!
(2001년 11월)
나. 논개論介 시비
1) 논개의 시
높이 핀 꽃은 사람들이 함부로 꺾지 못할 것이요
풀섶이 무성하니 너희들은 헤아리기 어려우리다
위의 시는 논개가 10세 때 지은 시라 한다. 훈장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글재주가 뛰어났다.서당의 학동들이 시기하매 이 시를 지어 그들을 따돌렸다 한다.
주논개의 생가지는 장수군 계내면 대곡리 주촌이었다. 선조 7년 (1573) 9월 3일 부친 주달문과 모친 밀양 박씨의 외동딸로 태어나 13세까지 살았던 곳이다. 의암은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숙부 朱달무에게 의탁하였으나 이 지방의 토호인 김풍헌에게 민며느리로 팔리자 그 사실을 안 모녀는 경상도 안의면 외가로 도망쳤으나 김풍헌의 고발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된다. 다행히 장수 현감 縣監 최경회崔慶會에 의해 무죄 방면은 되었으나 의지할 곳이 없게되자 최 현감 부인의 권고로 후사가 없던 최 현감의 후실로 들어앉게 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현감은 의병을 모집 크게 전공을 세워 이듬해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승진 진주에 부임하게 되고 이어 진주성이 함락되자 최경회 장군은 진주 남강에 투신 순절하게 된다.이에 의암은 원수를 갚기 위해 왜군의 승전잔치에 기생으로 가장하고 참석, 왜장 게야무라 로꾸스께(毛谷村 六助)를 안고 죽으니 꽃다운 나이 19세로 순절한 것이다.
최경회 선정추모비에는, 일차 진주성 공격에 실패한 왜군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진주성을 겹겹이 에워싸고 이차 진주성 공격을 시작하였다. 최 병사는 창의사 김천일과 더불어 군관민 6만 여명이 아흐레 동안 밤낮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조총이란 무기와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당하자 최병사는 김천일,고종후와 같이 남장대에 올라 성을 지키지 못한 자격지심에 절명시 한수를 남기고 남강에 투신한다.
‘촉석루 위 삼장사는
술 한잔을 들고 웃으며 남강을 가리키노라
남강물 도도히 흘러가노니
저 물이 마르지 않는 한 이 혼도 죽지 않으리’
2) 한용운의 <論介의 愛人이 되야서 그의 廟에>
날과 밤으로 흐르고 흐르는 南江은 자지 안습니다
바람과 비에 우두커니섯는 矗石樓는 살가튼
光陰을 라서 다름질침니다
論介여 나에게 우름과 우슴을 同時에 주는
사랑하는 論介여
그대는 朝鮮의 무덤가온대 피엿든 조흔의 하나이다
그레서 그향긔는 썩지안는다
千秋에 죽지안는 論介여
하루도 삸수 업는 論介여
그대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이 얼마나 질거우며
얼마나 슯흐것는가
나는 오금이 제워서 눈물이 되고 눈믈이 제워서
우슴이 됨니다
容恕 하여요 사랑하는 오오 論介여 .
(만해 한용운 선생 시에서, 山民 이 용이 쓰다)
3) 樹洲 변영로의 <논 개>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논개를 노래한 위의 수주의 시는 전북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의암로 義巖路에 세워진 것이다.이외 장수읍 두산리에 있는 의암사 못 건너에 역시 수주의 시 <논개>(글씨는 근제 양기봉)가 있고 진주 촉성루 앞에도 수주의 <논개> 시비가 있다. 장수읍 두산리에 있는 의암사義巖祠는 1955년 남산공원에 있던 것을 1974년 현재 위치로 옮긴 것으로 현판 <義巖祠>는 함태영 전 부통령의 친필이다.논개의 영정은 김은호의 화백이 그린 것이다.
4)여담 - 장수 향교와 丁忠僕비
장수 향교는 장수읍 장수리에 있는데 보물 제272호로 지정되어 있다. 장수향교 대성전건물은 조선 태종7년 (1407)에 지은 것으로 우리나라 향교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이 건물은 선조 30년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 일군이 향교를 불태우려하자 정경손 鄭敬孫이 필사적으로 막아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정경손을 기리기 위하여 경내에 정충복비를 세워놓았다.헌종 12년 (1846)장수 현감 정주석이 세운 것이다.정경손은 향교에 침입하려는 왜적을 향해 “내 목을 먼저 베고 들어가라”고 하였다. 정경손의 당당한 기개에 감복한 왜적은 성전을 침범하지 말라는 쪽지를 대문에 붙이고 물러 갔다고 한다. 비각 안에는 희미하게 <진실로 떳떳함만 있다면 누가 차마 훼상할 것인가(苟有秉彛豈忍毁傷) 라는 당시 정경손의 의기를 말한 글귀가 하나 있다.
3. 진주 촉석루의 논개
가. 찾아가기
진주 촉석루를 찾은 것은 1999년 1월 19일이다. 진주 촉석루공원 앞에서 흘러가는 남강의 말없는 침묵을 생각하면서 공원 앞에 세워진 변영로의 시비 <論介>를 읽는다. 변영로의 시 <논개>는 이미 일반화된 시이기 때문에 생략하거니와 다만 아쉬운 마음에 그 끝구절만 인용한다.
나. 시비(시의 일부)
흐르는 江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꽃보다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다. 비음
살아서는 진주관기여도 죽어서는 의열여인이 된 논개의 갸륵한 행동을 진주시민들은 바위에 위암이라 새기고 위암사적비를 세워서 백 삼십 년 동안 조정에 포상을 건의하니 나라에서 의기라 하고 의기사를 세웠다.여기 온 겨레의 연인이 된 논개의 시비를 세움은 나그네가 남도천리 충절의 고장에서 의암에 올려 나라와 겨레와 내 고향을 사랑하고 죽어서도 살아 있는 뜻을 생각케함이다.
1991년 3월 14일/ 이명길 글짓고/천갑녕 글 쓰다/건립진주문화원/
라. 시인 설창수의 ‘의랑 논개의 비’문
하나인 것이 동시에 둘일 수 없는 것이면서 민족의 가슴팍에 살아 있는 논개의 이름은 백도 천도 만도 남는다 마즈막 그 시간까지 원수와 더부러 노래하며 춤추었고 그를 껴안고 죽어간 입술이 앵도보담 붉고 서리맺힌 눈섭이 반달보다 고왔던 것은 한갓 기생으로서가 아니라 민족의 가슴에 영원토록 남을 처녀의 자태였으며 만 사람의 노래와 춤으로 보답받을 위대한 여왕으로서다. 민족 역사의 산과 들에 높고 낮은 권세의 왕들 무덤이 오늘날 우리와 상관이 없으면서 한 줄기 푸른 물과 한 덩이 하얀 바위가 삼백 예순 해를 지날수록 민족의 가슴깊이 한결 푸르고 고운 까닭이다. 그를 사랑하고 숭모하는 뜻이라.
썩은 벼슬아치들이 외람되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여 민족을 고달피고 나라를 망친 허물과 포독한 오랑캐의 무리가 어진 민족을 노략하므로 식어진 어미의 젖곡지에 매달려 애기들을 울린 저주를 넘어 죽어서 오히려 사는 이치와 하나를 바쳐 모두를 얻는 도리를 증명한 그를 보면 그만이다.
피란 매양 물보다 진한 것이 아니어 무고히 흘러진 그 옛날 민족의 피는 어즈버 진주성 터의 물거품이 되고 말아도 불로 한 처녀 논개의 푸른 머리카락을 빗겨 남가람이 천추로 푸르러 구비치며 흐름을 보라. 애오라지 민족의 처녀에게 드리곺은 민족의 사랑만은 강물따라 흐르는 것이 아니기에 아아 어느 날 조국의 다사로운 금잔디 밭으로 물옷 벗어들고 거닐어 오실 당신을 위하여 여기에 돌 하나 세운다.
글 지은이 薛昌洙/글쓴이 오제봉/일의 주장 김진숙,임한산.박봉래/
마. <시와 대중성> – 설창수
설창수 시인은 6.25가 한창이던 시기에 시에서의 혁명을 주장한 적이 있다. 그것은 시의 sein으로서의 혁명이 아니라 시의 sollen으로서의 혁명을 말하는 것이다. 싸인과 졸렌은 한국의 교육이 독일어를 제2외국어로 택했던 1950년-60년대와 무관하지 않다. 시인은 임진란과 병자호란을 경험체로 할 때 역사의 주체는 이미 대중시대로 변하고 있음을 읽고 있었다. ‘시와 대중성’은 그의 선견적인 의미의 시론이다. 이 자리에서는 상론은 피하거니와 설창수 시인의 이른바 ‘대중과 시정신’은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대중에 대한 치열한 시정신을 말하는 것이다. 시인은 미를 위한 탄식에서 벗어나 대중을 위한 자기혁명이 있어야한다고 주장한다. 탕아이면서 탕아가 아닌 金銀師이면서 금은사가 아닌 대중혁명 즉,시인의 邪敎的 信仰으로부터 破門하라고 주문한다. 진주가 낳은 설창수 시인의 <시와 혁명>은 논개의 비문을 썼다는 사실과도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다. 민족이 임진왜란 같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양반관료들은 자기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 도주하기 겨를이 없을 때 진주 기녀 논개의 의협심은 당대 상황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결단이었던 것이다. ‘죽어서 사는 하나의 이치’를 설 시인은 논개를 통하여 깨달은 것일까. 여기 그의 시 <古墳>을 소개한다. 古墳의 임자를 구차한 사람들의 어깨와 땀을 부려서 쌓은 땅 속의 대궐로 인식한 시정신은 분명 그의 대중적인 의식에 맥이 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古 墳>
-水晶峰에서 -
이끼 푸르게 수놓은 /돌팍 이불 아래 /千年을 눈감고 편히 쉬던
白骨의 임자여 /그대 집 비워 이렇듯 /오가는 바람이 쥐파람 불게 해두고
어디메 더한 쉬임곳으로 가고 없는가
아마 그때인들 /갈ㅅ대 지붕 울막살이가 어려웁던 /수많은 백성들이 살았을 것인데 너는 잠들었어도 /여기 높은 멧 꼭두머리에 /구차한 사람들의 어깨와 땀을 부려
이토록 어마어마히 땅 속의 대궐과 /돌팍 천정을 이룩하였음이니 /분명 영웅의 뼈를 받음이리라. /다못 /드디어 이와 같이 빈 墳血의 /虛虛한 어둠속에 /봄바람 가을비 /이제는 뼈도 살도 이름도 할 수 없는 /무엇 하나 머무는 마음으로 의하여 /그대와 내가 함께 살며 있고나.
바. 논개의 사연
의랑 논개(論介)가 나신 곳은 전라북도 장수군 내게면 대곡 주촌리이니 성은 주(朱)씨다. 장수군 장수면 북쪽 노변의 논개비각은 장수현 장수현감 정주석이 세운 비석을 미일전쟁때에 일본경찰이 땅에 묻었던 것인데 을유년 팔월 해방뒤에 장수군민의 힘으로 파서 모신 거이다. 임진왜란 당년 오월초 사흣날 서울을 빼앗기고 유월 열 사흣 날에는 평양이 떠러졌으나 진주동판 김시민 등의 사수분전 아래 진주성만이 홀연한 호남의 뚝이 되었다. 다음해 선조 이십육년 게사 유월에 육만 왜병이 아연 진주성을 세겹으로 둘러싸니 창의사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 진 등 삼장사를 비롯한 결사 의거의 장병 육천이 밤낮 여드레 동안을 꼼박 혈투하였으나 유월 스무 아흐렛 날 드디어 진주성은 무너지다 순국자의 피에 물들어 흐르는 남강은 붉으레하고 한 마리의 개와 닭 소 말이 성할 리 없이 학살당한 성민의 주검으로 고랑과 샘들이 모조리 메뀌었다. 날이 새매 적들의 만흥은 더욱 도도하여 촉석루 위에 버러진 잔치가 한창 난만할 뿐이다. 이때 다락밑 강언덕의 외딴 넙적바위 위에서는 한 사람의 꽃다운 여인이 홀로 춤추며 노래하고 있다. 만취한 적장 모곡촌(毛谷村) - 일설 석종노(石宗老)- 이 달려 내려가더니 여인과 더불어 얼사안고 환장처럼 즐기는 것이었다. 마츰내 여인은 적장을 껴안고 떠러지고 만다
그의 열손꾸락은 매디마다 뽀듯이 반지를 끼고 있었으니 이 분이 곧 의기 논개다.
이 비를 세울 뜻은 안 해인 게사년 논개의랑 순국하신 육갑을 기념하여 비롯된 것이다
단기 四千二百八十七年 甲午 十月 二十九日 /義妓 창열회 세움/
사. 다시 찾은 촉석루(矗石樓)
진주 촉석루에서는 오늘도 말없이 흐르는 남강, 진주와 외지를 연결해주는 진주교가 눈 안에 들어 있다. 촉석루는 여느 누정과 다를 바 없으나 임란시 진주성을 지키려 했던 많은 희생자의 넋과 논개의 혼이 아직도 촉석루를 맴돌고 있는지 볼 때마다 무거운 발걸음을 느끼지 않을 사람 있겠는가. 矗石樓라 쓴 행서체의 큰 글씨는 언제보아도 중후하고 안정된 느낌을 준다. 다만 촉석루에 올라 남강쪽을 바라본 경치는 지금도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으니 그래서 촉석루를 ‘영남제일의 형승 形勝’이라 했던가.
경남 문화재자료 제8호,진주시 본성동 500의 8이 그 위치다.
‘촉석루는 진주시의 상징으로 영남 제일의 명승이다.전쟁때는 주장主將이 병졸을 지휘하던 지휘소로 쓰였고 평상시에는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 고려조 고종28년(1241) 진주 목사 김지대 金之岱(1190-1266)가 창건한 이후 지금까지 7차에 걸쳐 중건 중수하였다. 촉석루는 강가에 돌이 쫑긋쫑긋 솟아 있어 그 이름이 유래되었으며 일명 남장대南將臺 또는 장원루壯元樓라 부르기도 하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10년(1618) 병사 남이흥南以興(?-1627)이 전보다 웅장한 건물로 중건하여 1948년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1950년 6.25 동란으로 불탔다.지금의 건물은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가 시민의 성금으로 중건하였으며 건물구조는 정면5칸,측면 4칸 팔작 지붕 형태로 되어 있다. 옛부터 북은 평양 부벽루,남은 진주 촉성루라 할 만큼 경치가 아름다워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기문과 시가 전해져오고 있으며 현재 촉석루에는 하륜(1347-1416)의 <촉석루기>를 비롯하여 교은 郊隱 정이오鄭以吾의 시와 만송 晩松 강렴 姜 濂의 시가 보인다.
촉석루 아래로 ‘義妓論介之門’의 논개비가 서 있다. 경신년 가을 兵使 南德夏가 장계를 올려 정표하라는 특명을 듣고 신유년 봄에 비문을 새겨 세운다 하였다.
4. 논개 의기사당義妓祠堂과 산홍山紅의 시
문화재자료 제7호인 ‘의기사당’은 ‘제2차 진주성 싸움 뒤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논개는 전라북도 장수군 계내면 출생으로 성은 주 씨이다.(중략)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적에게 더럽힘을 당하는 것을 피하여 자결한 여인들은 많았지만, 논개는 제 한 목숨을 던져 온 성민의 원수를 갚았으니 그 의로운 기개를 어지 장하다 아니 하리요! 의기 논개의 사당은 순조 24년 (1824) 관찰사 李止淵이 건립했는데 6.25때 불탄 것을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에서 재건하고 金殷鎬 화백이 그린 초상화를 봉안했다.‘ 하였다.
‘義妓祠’ 글씨는 ‘萬曆癸巳後232년 甲申年 觀察使 李止淵 書’라 주서하였다. 의기사 뒤에 부채꽃 한 그루가 있는데 임란 당시부터 있었던 나무인 듯 기운차게 자라지 못하고 꼬여 있다. 그런데 의기사 벽에 몇 사람의 시가 걸려 있으니 정약용, 황 현, 山紅의 시다. 그중 산홍의 시가 가장 선명하여 시선을 끌고 있다.
가. 의기사 감음(義妓祠感吟) -
역사에 길이 남을 진주의 의로움
두 사당에 또 높은 다락 있네
일없는 세상에 태어남이 부끄러워
피리와 북소리에 따라 질펀히 놀고 있네
내륙지방에는 학자와 정치가가 많이 나오고 물과 농지가 많은 곳에는 시인과 풍류가 발달한다고 했다. 기녀라 하면 一江界, 二平壤, 三晋州라 했는데 그래서인지 진주에는 기녀문화가 한 특징을 이룬다. 옛부터 晉陽三絶이라 하여 풍부한 물산 (豐産), 연기(娟妓, 아름다운 죽승 (竹蠅)을 들고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의기의 문화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논개는 임란시의 의기였는데 산홍 山紅은 시대를 훨씬 뒤로하여 근대 식민지시대 말기의 진주의기다. 1906년 당시 을사오적으로 악명 높았던 이지용 李止鎔은 진주를 방문하고 재색으로 팔도에 소문난 산홍을 천금을 주고 애첩으로 들였다. 그러나 이지용이 나라를 팔아먹은 오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 비록 천인이지만 역적첩노릇은 하기 싫다”하고 가출해 버렸다 한다.혹은 말하기를, 산홍이 매국노와의 잠자리를 거절하며 스스로 죽었다는 말도 있다. 황현 黃 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광무 10 년,丙午(1906)]에는 진주기녀 山紅은 미모와 글씨가 뛰어났는데 이를 안 이지용이 천금을 가지고 와서 첩되기를 원했다. 산홍은 사양하며 말하기를 ‘세상에서는 대감을 오적의 수괴라고 하는데 내 비록 천한 기녀이나 스스로 사람노릇하고 있습니다. 어찌 역적의 첩 노릇을 하겠습니까? 이에 지용은 크게 노하여 산홍을 때렸다’ 한다. 또는 어떤 사람이 시를 지어 이지용에게 주었는데 그 시에서 말하기를, ‘온 세상 사람들이 다투어 매국노에게 접근하여 날로 아첨하고 굽실거리고 있고, 그대 집의 금과 옥은 집채보다 높은데도 홍일점 山紅을 사지 못하는구나.’라고 비꼬았다 한다.당시 이지용은 1905년 내무대신, 1907년 중추원고문으로 을사오적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다.
그러한 당대 세도가 이지용을 진주기녀 산홍이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것은 조선인의 가슴에 후련한 승리감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산홍의 시에서 ‘일없는 세상에 태어남을 부끄러워한다’는 말은 논개의 의기를 높이 평가하면서 산홍 자신의 무력함을 보여준 대목이라고 kf 것이다. 논개를 추모한 한시는 유몽인,김창흡, 정약용,황현,김택영, 이승만,정인보 등이 있다하나 필자가 의기사에서 본 것은 황 현, 의기사기義妓祠記를 쓴 정약용의 시, 산홍의 시 정도였다. 다산의 의기사기 내용 중 앞부분만 말하면, ‘옛날 일추(日酋)가 진주를 함락했다. 한 의기 낭자가 있어 일추를 유인하여 강중 바위에서 춤울 추다가 그를 껴안고 깊은 곳에 빠져 죽었다. 이곳은 그 사당이라. 아아, 슬프다 어찌 열렬한 현부가 아니겠는가 대저 하나의 일추를 죽여 三士의 치욕을 설분하는데 족하지 않을 것이나 성이 바야흐로 함락되었음에랴.(생략)’ 라고 통분하였다. 순조 2 년 임술 다산 정약용 기.
나. 의암(義巖)에 대하여
의암은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바위다.조선 선조 26년(1593) 6월 29일 임진왜란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민.관.군이 순절하자 논개는 나라의 원수를 갚기 왜장을 의암으로 유인하여 이 바위에서 순국하였다. 이에 논개의 순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영남사람들은 이 바위를 ‘의암’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인조 7년 (1629)진주의 선비 정대륭(1599-1661)은 바위의 서쪽 벽면에는 전서체로 의암이라는 글을 새겼고 남쪽 벽면에는 한몽삼(1598-1662)이 쓴 것으로 전하는 해서체로 된 ‘의암’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의암의 바닥 넓이는 3.5미터*3.3미터이다. 의암에 ‘의기논개의문’이 비석과 함께 있고 밑으로 깊은 남강물이 도도히 흐르고 있다. 그런데, 일본 후쿠오카의 히코산 숲속에 있는 보수원(寶壽院)에 있는 한 승려가 주동이 되어 이곳 의기사의 것과 똑 같은 논개의 영정을 모시고 행사에 한국 인사들도 대거 참석했다는 기사가 있었다. 일본인들의 속보이는 농간이다.
다. 임진란 관련 비명(碑銘)
1) 촉석정충단비(矗石旌忠壇碑)(지방유형문화재제2호)에는 조선선조 26년 (1593) 6월 19일-29일 사이 잇었던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장렬하게 순국한 三將士 김천일, 황진 ,최경회 및 군관민의 영령을 제사하기 위하여 세운 비석이다.
2) 촉석루중 삼장사기실비(矗石樓中三壯士記實碑): 삼장사는 영남초유사 김성일 金誠一, 대소헌 大笑軒 조종도 趙宗道,송암 松巖 이노 李魯 등 세 사람을 말하는데, 이들은 선조 임진년 5월 세 사람이 촉석루에 오르니 때는 임란이 사방으로 극심하여 지켜야할 관리들은 모두 도망가고 군민들은 모이지 않아 성안은 비어 요요하고 강물은 망망하였다. 산하를 보니 슬픔과 애닯음을 어찌하지 못했다. 조.이 두공이 투강하고자 하니 학봉 鶴峰이 말리면서 ...(중략) 시 읊기를
촉석루의 세 장사는
잔들고 웃으며 남강을 가리키노라
남강의 물은 도도히 흐르는데
물결 그치지 않으매 혼도 죽지 않으리.
임진후 369년/ 김 황 찬/
권흑석의 『한양가』는 조선 근대사 중에서 임진왜란을 비중있게 다룬 가사문학이다. 『한양가』에 의하면, 일본의 도요도미 히데요시(1536-1598)가 군대를 이끌고 동래부,부산진,안양,양산,진주로 침범해 왔을 때 관군은 미리 도주하고 일부 관군과 의병들만 싸운다. 끝까지 진주성을 지킨 김천일, 최경회, 황진 세 장사는 적이 포위하자 술잔을 나누며 시를 지으니 삼장사三壯士 시다.
루가운데 세 장사가 /한잔 술을 셋이 들고 /장강물을 가라친다 /장강만리 흐른 물결
물결도 다 하잖고 /삼장사 죽은 후에 /혼은 죽지 안하리라
현재 진주에 있는 ‘촉석루중 삼장사기실비’(矗石樓中三壯士記實碑)의 삼장사와 이노(李魯)가 지은 『龍蛇日記』(1763)의 삼장사가 다른 인물인 것을 주목한다.
이 중 황진은 도순성장 김천일은 우도절제사 최경회는 좌도절제사로 싸운다. 비문의 조종도(안음현감)와 이노(비안현감)는 학봉의 막료로서 임란으로 전사한 인물은 아니다. 어쨌든 이러한 비극적 상황에서 원군으로 도착한 명나라 이여송은 오성 대감과의 일화를 통해 조선의 군주와 신하를 시험하고 조롱한 일화가 전해진다.
라. 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단(晉州城壬辰大捷癸巳殉義壇)
임진왜란은 우리가 패한 전쟁이 아니다.
우리의 후퇴는 선조 이십 오년(서기1592)_의 임진란과 동왕 삼십년의 정유재란에서 각각 초전 이개월 정도에 불과하였다.평화와 문명을 숭상하던 우리 선민들이 광란에 가까운 적의 기습에 처음 후퇴를 거듭하였음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침공 두달 뒤 적이 평양에 도달한 유월 중순에는 이미 우리가 대오를 정비하여 그들의 후방을 색제함으로써 더 이상 전진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국가 회복의 기틀을 마련하였는데 이는 남해상에서의 수군과 금산 웅치일대에서의 관의병 그리고 진주를 중심으로 한 영우에서의 선민들의 끊임없는 항전으로 호남지방을 확보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적은 보급로가 차단된 반면 우리는 호남을 병참기지로 활용하면서 경기 황해도의 해안선과 이어져 의주의 행재소 및 이천 등지로 옮겨 다니던 세자의 분조와 맥락을 통할 수 있었다. 당시 호남은 나라의 부고였고 영우는 호남의 문호였다. 적의 전라도 침공은 남해상 또는 금산 진안 통로로도 감행되었지만 부산에서 진주에 이르는 첩경이 낙동강을 건너 영우를 거쳐 육십령 혹은 팔량치를 넘어가는 길이었으므로 이 일대에서 가장 치열하게 전투가 되풀이 되었다. 이처럼 영우와 호남은 순치의 관계이어서 영우가 없으면 호남이 없고 호남이 없으면 나라의 전도는 가망이 없었다. 실로 이때 영우는 적에게는 반드시 쟁취해야하고 우리에게는 꼭 사수해야 할 요충이었다. 그러므로 그 중심지인 진주성에서 일대공방전이 벌어졌으니 이 격전에서의 승리가 바로 임진년 시월의 진주성 대첩이다. 이 무렵 영우일대에서는 내경외의를 몸소 실천하던 남명 조식의 교화가 깊어 의병이 곳곳에서 봉기하였다. 의령의 곽재우, 거창의 김 면, 성주의 정인홍 등이 의기를 높이 들고 초유사 김성일의 주획아래 각 전선을 방어하였다. 6일간에 걸친 진주성 싸움은 이같은 충의와 선전의 총결산이었다. 진주목사 김시민은 판관 성우경 곤양군수 이광악 등 불과 수천의 군사로 온갖 기기 및 기계로써 악착같이 밀어부치는 기만의 적군을 끝까지 싸워 물리쳤다. 이리하여 이 전승은 전의 해상승첩 및 이치 우이에서의 혈투와 더불어 삼위일체가 되어 호남 방수를 이룩하였으니 임진삼대첩의 하나로 칭송된다. 평양에서 이미 전진을 견제당한 적은 구월에는 휴전을 제의하였다. 이러한 대세하에서 우리는 그간의 외교성과로 제독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의 내원하에 다음해 계사년 초에는 평양성을 일거에 탈환하여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켰다.
적은 황급히 이십 일만에 서울로 퇴각하였으며 이월 십이일 행주산성에서 다시 대패하게 되자 사월 중순부터 전군이 일로 남퇴하여 울산 거제도 간의 해안에 집결하였다.
여기서 오래 유둔하기로 한 적은 전년 시월의 대패를 설욕하고 사기를 진작시키고자 유월에 다시 진주성을 향해 총공격해 왔다.전세가 매우 급박하였으나 당시 대구 남원 등지에 남진해 있던 명군은 물론 가까이 있던 도원수 김명원 이하 우리의 관의군도 진주성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이미 피아의 강화교섭사가 명과 일본에 들어가 있었고 적의 군세가 30만이라 호언하리만큼 강성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의사 김일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 진 등은 인솔 병이 기천에 불과하였는데도 성패 이둔을 따지지 않고 오직 살신성인의 순국 의열로써 진주성 입성을 감행하여 수성의 제일 책임자인 목사 서례원과 김해부사 이종인 거제현령 김준민 등으로 더불어 혈전사수를 결행하였다. 그러나 장마철로 대우가 계속되고 외원군이 전무하며 절대우세한 적의 공성이 집요 기교하여 혈투 구주야만에 끝내 성이 함락되어 수성전원이 장열하게 순국하였다. 사수의 의열과 함성의 처참은 임란 중에서 이보다 더한 바 없었으니 군민사자가 육만이었다고 한다. 우리의 항전에 적도 기세가 꺾이어 다만 한동안 남원 구례 등지로 흩어져 노략질 하다가 유둔지로 돌아갔다. 함성 때의 처절한 항전상은 관기 논개의 순국 사실에서 더욱 그 심도와 진가를 짐작케 한다. 함성 후 적이 들끓었는데도 논개는 촉석루아래 남강 바위에 나가 고운 단장과 미소로써 적장을 유인해 깊은 물속에 뛰어들어 함께 죽었다. 의기 논개의 이 순국 희생이야말로 계사순의 당시 상하귀천을 가릴 것 없이 성내에 가득찼던 충열과 의절의 한 표상일 것이다. 난후 이곳 주민들과 나라에서의 양 혈전에 대한 숭모와 보답이 끊이지 않았다. 곧 촉석루 근방에 단을 모아 순국한 모든 장수 및 무명의 군병에게 해마다 함성일에 제사를 올렸다. 역대 조정에서는 유공한 장졸들에게 관직 및 시호를 추증하고 조선을 높이며 자손을 서용하였다.
선조 40년(1607)에는 대첩의 주장으로 전사한 김시민을 모시는 충민사와 김천일 등 함성시의 열사를 모시는 창열사가 세워져 사액되었다.
광해군 11년(1619)에는 대첩을 기리는 전성극적비가 숙종 12년(1686)에는 순의열사를 기리는 촉석정충단비가 세워졌으며 경종 2년 (1722)에는 충민 창열 양사를 한 층 확충 정비하였다. 이보다 앞서 인조연간에는 논개가 순국한 바위에 ‘의암’ 이자가 전각되었고 영조 16년(1740)에는 논개를 모시는 의기사가 세워졌다. 순조31년(1831)에는 충열실록이 간행되었고 고종 5년 (18678)에는 서원철폐로 충민사를 폐하여 창열사에 합쳤다. 이같은 숭앙은 일제하에서도 면면히 이어졌다.(중략)
이제 우리는 임진대첩에 대해 뿌듯한 긍지외 자신감을 갖는 동시에 당시의 일사분란한 통솔체제 각종 화기까지 마련한 주도한 대비주악과 호궤로써 사기를 고무하여 적의 공성을 좌절시킨 전술과 용병 그리고 적시의 원군내도 등을 되새겨야 한다.
또 계사순의에 대하여 신명을 흔연히 국가민족에 바친 의열과 적의 기세는 기필코 꺾겠다는 감투정신에 깊이 머리 숙이며 한편, 그때의 너무나도 현격했던 피아의 군세, 불일치한 지휘계통, 입성을 거부한 외원에의 기대 그리고 휴전강화의 진행이란 대세 등에서 거울삼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다.
부덕 불문하여 이 비문을 감당할 수 없으나 구비와 실로 기사의 교열에 관여한 바 있어 끝내 이를 사양하지 못하고 송구한 마음으로 위와 같이 적는다.
1987년 12월 일 /문화재위원 허선도 비문 짓고/ 김충헌 제자 쓰고/ 정문장 비문 쓰다/
위의 진주성 임진계사충의단 비문에서 주목할 내용은 ‘임진란은 우리가 패한 전쟁이 아니다’라는 당시 문화재위원 허선도 위원의 말이다. 임진란에서 조선이 일본에 패했다는 역사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의 사람으로서 비문의 내용을 보는 순간 우리의 역사가 잘못된 것인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역사논지를 본 것도 사실이지만 해방 후 우리의 사학자들은 왜 임란을 조선이 패한 것으로 논문을 썼고 역사를 후세들에게 가르쳐왔던지 의문스럽다. 제주도의 삼별초 무인들이 항몽 저항한 사실도 삼별초란이라 하지 않았던가. 아울러 임란당시 지휘계통의 문란과 진주성이 위급한데도 겁을 내어 외원을 하지 않거나 입성을 거부했던 관의병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를 솔직하게 언급한 점이 돋보인다는 생각이다. 이런 내용은 <진주촉석정충단비명>을 지은 李敏敍의 비명에서도 나타나 있다.
아 진주성의 일은 어찌 슬프지 않으랴
왜적이 이 성을 두 번 쳐서 기세 더욱 사나워 나라 형세가 곧 쓰러져 가는 데도 구원병은 이르지 않네.
牧使와 倡義使는 서로 시샘하여 주검만 늘고 사람숫자는 많건마는 오합지졸일세
허겁지겁 부르짖다가 마침내 떼죽음 하였네
오직 저 志士와 仁人들이 맨주먹으로 우뚝한 충절을 세웠으니
이 어찌 사람의 계책이 좋지 않고 하늘의 뜻이 악인을 도움이겠는가
촉석루 놓다랗게 우뚝 서 있고 남강물 넘실넘실 만고토록 흐르네
시름겨운 노을엔 부슬비 울고 혼백은 의연하게 노기를 띄었네
맑은 술 잔 드려 살진 고기 올리니 봄가을 제향하여 남쪽땅 빛내리
崇禎 뒤 59년 (숙종12년(1686)
마. 고 목사 김후 시민 전성극적비명(故牧使金侯時敏全城郤敵碑銘)
진주 고을 사람 성균진사 성여신 成汝信은 김시민의 비명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새겼다..
기품은 날카롭고도 강하며
자질은 굳세면서도 온화하였네
義로써 줄기를 삼고
忠으로써 뿌리를 삼았네
성을 보존하고 적을 물리쳤음은 그의 공이고
나라 일에 목숨을 바쳤음은 그의 忠이네
晉州의 산은 높디높고
晉州의 물은 길고 길어라
한 빗돌 세워 천추에 전하니
공의 공덕 산처럼 높고 물처럼 길어라.
(황조만력 47년 기미(광해군11년 ,1619)
(大尾)
5. 이수강 시비
갖난 첫 울음이 겨레의 목소리면
가덕 앞바다 물결은 숨쉬는 자장가였다.
원수들 땅 하늘 아래서 겪은
설움과 눈물은 곧 조국 사랑의 불꽃 돼
가슴 안에 타올랐다.
비록 반백 일생이 잛다하나 맥맥한
핏줄 속에 혼으로 산다.
(비음) 1912년 8월 26일 경남의창군 천가면 성북리 461번지 출생, 1936년 재 대판 가덕인 청년부회 회장 1942년 9월 30일 대판지방 재판소 공판, 동년 실형선고 4년,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동시 출감,1962년 12월 27일 17년 간 투병 끝에 사망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992년 8월 건립/부산 강서구 제방 위에 있음)
6. 윤동주 詩碑
가. 위치 중국 길림성 용정시 용정중학 구내, 답사일자 : 2003년 11월 (2차)
나. - 序 詩 -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 11. 20
7.이육사 시비(1)
가. 안동시 성곡동 시비
1) 위치 및 답사일: 안동댐 다리건너(안동시 성곡동) 안동민속박물관 경내에 육사시비가 있다.1996년 8월 9일
2) - 曠 野 -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山脈들이 /바다를 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犯하던 못하였으니라.
끊임없는 光陰을 /부지런한 季節이 피어선 지고 /큰 江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千古의 뒤에 /白馬타고 오는 超人이 있어 /이 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3) 비음(碑陰) :
曠野를 달리는 駿馬의 意志에는 槽櫪의 歎息이 없고 한 마음 지키기에 生涯를 다 바치는 의지의 千古一轍에는 성패와 영욕이 아랑곳 없는 법이다. 천부의 錦心繡腸을 滿腔의 열혈로 꿰뚫은 이가 있으니 지절시인 이육사님이 그 분이다.임의 이름은 원록이요 일명은 活이니 陸史는 그 아호이다.
1904년 갑진 4월초 4일에 안동군 도산면 遠村鄕第에서 퇴계 선생의 후예 아은공 家鎬의 둘째 아드님으로 나시니 어머니 허 씨는 凡山公 蘅의 따님이시다. 임은 학문과 기절의 오랜 연원을 이러한 혈통으로 이어 받은지라 어려서부터 재기가 환발하여 향당의 촉망을 지녔으나 때는 이미 국운이 다한 때였다. 조부 치헌공 중직께 한학을 수업하다가 스무살에 표연히 도일하여 일여를 방랑하고 스무세살 되던 해에 다시 발길을 대륙으로 돌려 북경사관학교에 입학하였으니 이로부터 임의 일생은 조국광복운동에 바친 바 되었다.
1927년 가을에 잠시 귀국하였다가 장진홍 의사의 조선은행 대구지점폭탄사건에 연죄되어 백형 원기와 숙제 원일로 더불어 삼형제가 함께 체포되어 일년 여의 참혹한 형벌을 받았다. 때에 임의 수인 번호가 二六四인지라 인하여 그 음을 취하여 육사로 아호를 삼았으니 자조와 自許가 얽힌 이 이름은 임의 생애를 상징하는 바 되었다.
육사는 그 뒤 북경대학 사회학과를 마치고 北華南滿을 驅馳하며 때의 독립운동집단이던 정의부와 군정서와 의열단의 활동에 연계하는 사이 국내에 들어와서 중외일보와 조광사 인문사 등 언론기관에 발길을 멈춘 적이 있었으나 그의 걸음에는 항상 定處의 안일이 없었다. 국내외의 대소사건이 있을 때마다 검속투옥되기 무릇 17회 대구.서울 북경의 왜옥을 드나들다가 마침내 조국광복을 한 해 앞둔 1944년 1월 16일에 북경감옥에서 41세를 일기로 殉義하여 파란많은 생애를 마쳤다. 육사의 시가 시단에 회자된 것은 1930년대말의 일이다. 가열하던 저항의 의지가 점철된 임의 시는 서늘한 凝結嶄新한 비유를 얻어 장엄한 율격을 상징하였던 것이다. 詩筆을 늦게 들었고 남긴 시편이 얼마되지 않으나 스스로 겸양한 바 이 가난한 노래의 씨들은 임의 생애가 선비의 매운 절개를 위하여 萬丈의 光芒이 됨으로써 불멸의 생명을 꽃피워갈 것이다.
육사는 부인 안 씨와의 사이에서 일점 혈육으로 따님 沃非를 끼쳤고 끝의 아우 원창의 아들 동박으로 뒤를 이었다. 유고육사시집은 계제 원조가 엮어 상재하였으며 遺협은 장질 동영의 손으로 고향의 선영에 안장되었다.
1964년은 육사 還曆의 해이다. 생전의 지기시우와 동도의 후배가 성력으로 모아 한 조각 돌에 유시를 새기고 겸하여 일대의 자취를 간추리는 것은 임의 높은 듯을 길이 기념하고자 함이다. 曠野를 달리던 뜨거운 意志여 돌아와 祖國의 江山에 안기라.
/趙東卓 撰/김충현 篆/배길기 書/ 1964년 4월 일 세움/
4) 李活의 부고장
대구 망우공원 조양회관 애국선열기념관에는 육사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장이 있다. 그가 독립운동을 할 때는 李 活이라는 이름으로 항일운동을 한 것이다. 갑신년은 1945년이다.
訃告, 陸士 李活氏 今月十六日 別世於北京客舍玆以訃告
弟 源一 源朝 源昌
甲申 一月 十九日 護喪 崔興峰
京城府 城北町 122의 11
나. 안동군 도산면 육사 시비(2)
1) 찾아가기
안동시의 육사시비를 찾은 것은 1995년 2월 27일이다. 이 날은 아내가 운전을 하고 11시에 집을 출발 귀가한 시간은 오후 8시 지나서다. 안동시에서 26킬로 미터의 역사로에 이르면 도산서원 입구가 있고 거기서 다시 2.5킬로 미터를 가면 도산면사무소가 있다.계속 직진을 하면 영주 청량산 국립공원으로 가는 길이고 면사무소에서 오른 쪽으로 5.3킬로 미터를 가면 윤동주 시비를 만나게 된다. 도중에 퇴계 선생의 종택을 볼 수 있다. 종택은 경북기념물 42호로 소재지는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동이다. 1929년 13대 사손 하정공 사림 및 종중의 협조로 옛 종택 규모를 참작하여 재건한 것으로 우측에 秋月寒水亭 정자(정면 5칸 측면 3칸 팔각지붕)가 있다. 전면에 솟을 대문이 있고 석축 위에 둥근 기둥과 네모기둥을 함께 사용한 조선시대 건물이다. 문패는 종손 이동은 씨로 되어 있으나 손님이 있어 면회를 청하지 않았다. 원촌리에 도착하니 15시 23분이다. 어쨌든 면사무소 앞에 이르면 퇴계묘소, 퇴계종택, 육사시비, 육사묘소 등의 여정을 알 수 있다. 이 날 가져간 줄자로 비를 재어본 결과 가로 2.3미터,세로 0.7미터,폭 0.3미터다.이 육사의 대표시 <청포도>는 찾는 이들의 마음조차 싱그럽게 해준다.
- 靑葡萄 -
내 고장 七月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靑袍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 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어떤 이는 육사의 고향을 찾아보고 원촌리에는 청포도가 없는데 주저리주저리 열린다고 했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시인의 가슴에는 청포도가 열리는 계절이고 그것은 고달픈 몸으로 찾아올 靑袍입은 손님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청포도가 없는 계절이라면 청포 입은 손님을 기다릴 수 없는 것이다. 혹은 청포 입은 손님은 시인 자신일 수도 있다. 식탁 위에 마련한 ‘하이얀 모시 수건’을 푸르게 적실 인물이 나와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린 청포도를 먹으며 새로운 민족의 인물이 도래할 것을 고대하는 것은 아닐까.
2) 비음
비록 육신은 스스로 불살랐건만 그 얼과 뜻은 저 江山과 다불어 千秋에 푸르른 志士 詩人이 있으니 그 분이 陸史 李源祿 선생이다.선생은 1904년 4월 4일 이 곳 遠村里에서 퇴계 선생의 14대손으로 출생하여 소년시절 조부 痴軒公에게 한학을 배우고 예안의 보문의숙에서 신학문에 입문하였으며 1923년부터 일년 남짓 일본 동경에 유학하였다. 1925년 백형 源祺 숙제 源一과 함께 正義府 軍政署 및 義烈團에 입단하여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백형 숙제와 함께 2년 7개월의 옥고를 치른 것을 비롯하여 선생은 전후 십 수회의 검속과 고문을 받았으며 1933년 중국에서 조선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북경대학 사회학과에서도 수학하였다.
1933년 [신조선]에 <黃昏>을 발표함으로써 시단에 나온 선생은 그 뒤 십년 간 시와 평론과 수필을 발표하고 국내언론기관에 몸담기도 하였으나 1943년 가을 서울에서 被檢되어 이듬 해 1월 16일 새벽 북경에서 옥사하였으니 遺灰는 이 곳 향리에 잠들어 있따.조국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40평생을 투쟁과 영어와 고난으로 일관하였으면서도 珠玉같은 시편을 남겨 한국시단에 길이 빛날 선생을 기려 그분의 출생지인 이 곳에 이 시비를 세운다.
서기1992년 7월 일 / 기획 안동군수 조건영/제작 송기석/ 글 김종길/ 글씨 김태균
시인 김종길 씨가 비문을 쓰고 서예가 김태균 씨가 썼다는 기록을 보고 김종길 시인의 산문을 읽는다는 재미와 석계 선생의 글씨를 가지고 있는 나로서 지인을 만난 듯 기쁘다.
시비 앞으로 <六友堂遺墟碑>가 있다. 진성인 이완재 박사가 쓴 비문에 의하면, 六友堂은 순국의사 一荷 李源祺, 민족시인 육사 이원록 서예가 斗人 李源一, 문학평롱가 黎泉 李 源朝, 언론인 白雷 李源昌, 화가 花水 李源洪 육형제가 태어나신 집터이다.
퇴계 선생의 14대손이요 아은공 가호와 어머니 허 씨에게서 태어나니 허씨부인은 선산군 林隱의 범산공 許 衡의 따님이다. 육형제가 모두 조부 장릉참봉 치헌공 중직에게 한학을 배웠다.위로 삼현제분은 1925년에 독립운동단체였던 의열단과 군정서와 정의부에 입단하여 국내외에서 활동 중 1927년 정묘 조선은행대구지점 폭탄사건에 연루되어 2년 7개월의 옥고를 치루었으며 계속해서 조국광복을 위하여 활동하셨다.여천공은 독립조국과 민족문학건설을 위하여 애슷;다가 북녘 땅에서 옥사하셨고 백뇌공은 조선중앙일보 정경부장 편집국장을 역임하셨고 홧공은 19세 때 선전에 입선하였는데 그해 서거하시니 미성이었다.이 마을이 안동 댐으로 수몰지역이 되어 육형제분의 생가가 안동시내 태화동에 이건되었다.맏형 일하공께서 일찍이 육형제의 우애를 기려서 당호를 육우당이라 하셨다.
記文은 봉화군 春陽 寒水亭 一軒公 權魯燮이 지었다.삼가 한 조각 돌을 세워 기념하고자 한다. /1992년 임신 7월 상한 /
다. 이육사 . 이원조 형제 문학비 (대구)
1) 답사:2005년 3월, 대구 동구 대륜고 교정
2) - 曠 野 - (생략)
3) 이육사 이원조 형제 문학 비문
陸史 李源祿(1904 - 1944)과 黎泉 李源朝(1909 - ?) 선생은 낙동강 상류가 마을 3면을 감싸 흐르는, 경북 안동군 도산면 원촌에서 퇴계 이황의 13세 손인 이가호와 한말 의병의 거두 허 형의 여식 허 길 사이에서 6형제 중 둘째와 넷째로 태어났다. 10여 명의 문과급제자를 배출한 眞城 李氏 집성촌인 원촌은 유교적 전통과 규범이 엄격한 鄒魯之鄕의 고장이었고, 외가는 외조부 형제와 외숙 등이 모두 의병장으로 활동한 氣槪높은 가문으로,부계의 유학과 모계의 기개는 두 형제분의 성격 형성의 모태가 되었다. 또한 신학문을 접하기 전에 고향에서 조부로부터 한학을 배우고 대구로 나와 석재 서병오에게 형제들이 함께 글씨와 그림을 익혔다. 유가는 1922년 교남학원에서 수학하였으니 이때는 3.1 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애국선각자들이 개화기 지사 양성소였던 友弦書樓를 가교사로 고곡의 성을 울리며 창건한 교남학원 개교 다음 해였다.
한편 여천은 교남학원이 교남학교로 바뀐 2년 뒤인 1926년 대륜 5회(교남 제1회)로 졸업하였다. 그후 암울한 시대의 격랑 속에서 도 육사는 북경에서 대학을 다니다 조선군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여천은 동경 법정대학 불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육사가 1926년 독립운동 단체인 義烈團에 입단하고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의거로 위로 4형제가 함께 옥고를 치른 것을 필두로 형 육사는 초인적 의지로 항일구국의 길을 걸었고, 아우 여천은 핍박받는 민중에 눈을 돌려 불굴의 신념으로 격동기를 헤쳐나갔으니 성장환경상 이 어찌 필연적이라 하지 않을 수 있으랴.
문학적 발자취로는 육사는 항일독립운동으로 일관된 행적속에서도 1933년 [신조선]에 시 <황혼>을 발표하며 등단하여 ‘자오선’동인 등 문단활동을 펼쳤다. 그의 시는 밀도 높은 예술미와 웅혼한 남성적 시풍으로 강렬한 민족주의 이념을 승화시켜, 문단의 어느 유파에도 소속되지 않은 독보적인 경지를 이루었다. <광야>,<절정>,<청포도> 같은 絶唱은 현대시의 고전이 된 지 오래고, 나아가 육사 자체가 이미 한국시의 한 상징이 되었다. 아호 ‘육사’가 첫 번째 투옥된 대구 감옥의 수인 번호였듯이, 매서운 기개로 그는 시에서도 한 점 흔들림 없는 눈부신 성취를 이룬, 가장 영광스러운 민족시인으로 겨레의 가슴 속에 굳게 자리 잡았다.
여천은 일찍이 위당 정인보로부터 ‘長安三才’로 불릴 만큼 총명하였다. 192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다음해 소설이 입선되어 등단하여 수필,평론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문명을 떨쳤고, 언론인과 교수 그리고 민족문학운동의 기수로도 활약하였다. 특히 평론가로서 현대평론의 새 지평을 연 선구자라는 높은 평가를 받으며 解禁 이후 서서히 재평가되고 있다. 소용돌이치는 민족수난기에 짧고도 굵직한 삶을 두 형제분은 문학과 행동으로써 불의에 저항한 문인이라는 같은 길을 걸었다. 그리고 육사는 헤아릴 수 없는 투옥을 당하면서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독립을 1 년여 앞두고 41세로 북경감옥에서 순국하였고 여천은 월북하였다가 1955년 47세로 옥사하였다고 전한다. 육사의 유고시집 [육사시집]은 여천이 1946년 간행하였고, 여천의 평론집 [오늘의 문학과 문학의 오늘]은 종질 이동영이 1990년에 발간하여 비로소 햇빛을 보았다.
志節 푸른 선비 가문에서 태어나, 눈빛 매운 선각자들이 구국의 일념으로 문을 연 이곳에서 雄志를 키운 그리하여 마침내 겨레의 샛별로 높이 든 아 ! 육사 이원록과 여천 이원조 형제 분이시여
마음 더운 이 찾아와 스스로 길을 묻거든 ,머리들어 샛별을 가리키게 하소서
2003년 10월 12일 / 대륜문학회 삼가 撰하다
4) 평론가 이원조의 글 - ‘회향(懷鄕)’
낙동강 七百里 어구 많은 구비에서도 깎어세운 듯한 왕모성(王母城) 뿌리를 씨처 쌍봉(雙峰) 그림자를 감도는 사이에 폐어진 적은 한 칼피가, 아직도 내 어린 기억을 자어내는 나의 고향이다. 말이 고향이지 열다섯에 떠나와서 十年이 넘도록 한번도 다시 찾어가지 못하였으니 정이 들었기론 얼마나 들었으며 못 잊어기로서니 무엇이 그다지 애틋하리요마는 그래도 고향말이 나오면 문득 그긔가 생각나는 것을 보면 한치도 못되는 짧은 기억이나마 그것을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또한 나의 슬픈 행복이기도 하다. - 수필 <회향> 중에서 -
라. 이육사 문학관과 시 이야기
문학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품만으로는 부족한 면이 많다. 시와 소설을 완성하기까지의 과정과 작가의 ‘고민’이라는 ‘현장’을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현장이란 작품을 둘러싼 자연적 역사적인 시공, 이를테면, 시인 작가의 생애와 살아온 역사적,사회적인 경험과 아픔까지를 포함한다. 문학의 현장은 그래서 복합적이고 종합적이다. 예술로서의 문학작품이 시대초극을 추구 한다 해도 정신적 근거인 육신의 소멸을 극복할 수는 없다. 기억의 ‘소멸’이라는 한계를 극복하려는 문단의 초기적 노력이 시,문학비 건립일 것이고 그 완성단계가 문학관건립일 것이다.
안동군 도산면 원천리에 있는 육사시비와 육사문학관을 답사한 일이 있다. 김종길 시인의 육사시비문과 문학관 기록을 본 소견을 말한다.
1) 이육사 문학관
육사문학관은 2004년 10월에 개관했다.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에 2300평 부지에 세운 육사문학관은 종래 육사의 <청포도>시비가 있는 건너 쪽이다. 아담한 규모에 내용은 알차게 자료를 전시하여 부화한 자랑을 내세우는 세간의 문학관과는 달라 보인다. 이육사의 가계도와 친족들, 육사문학 활동기의 시대배경, 육사와 시대를 함께 했던 문학인들,육사의 시세계,육사시의 서정성,작품의 시기별 동향 그리고 육사의 대표작을 해설과 함께 소개한다. 눈에 띄는 것은 육사는 1930년대 초에는 사회비평문을 1937-41년간에는 문예비평문과 수필문을 많이 쓴 것으로 나타난다. 육사는 1937년에 소설<황엽전(黃葉箋)>을 조선일보(10.31-11.5)에 발표하고 번역소설 <고향>(1936),<골목안>(1941)을 [조광]에 각각 발표함으로써 시인으로서의 육사와 문장가로서의 육사를 아울러 알게 한다. 육사시의 언어가 다소 추상적이거나 연약하지 않은 이유가 된다. 육사탄생 100주기를 맞아 생존 시인들 김춘수(당시 생존),김광림,김종길,문덕수,황금찬,성찬경,김남조,홍윤숙,범대순 등이 시인 육사를 추모한다.
육사문학관의 장점은 육사 시 해설의 객관적인 시각과 그 문장에 있다. 여느 문학관도 같을 것이나 육사문학관의 기록물에서 그런 느낌을 받는다.
육사문학관의 해설을 바탕으로 육사시를 개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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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문학관은 육사의 시세계를 크게 3기로 분류한다. 등단 초기작품에서는 침울한 정신세계를 추상적인 말로 노래한 <황혼(黃昏)>, <교목(喬木)>, <호수(湖水)>가 있다. 이들 작품에서는 수묵색의 내면세계를 독특한 말씨에 담아 제시했다고 평한다.
그의 시는 중기에 접어들면서 인간과 세계의 여러 현상에 관심의 손길이 뻗쳐지는 것으로 변모하는데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 <해조사(海潮詞)> 등이다. 그의 중기 작품에 대해서 평자들이 침묵을 지키는 이유를 굳이 든다면 민족적인 시각이 명시적으로 나타나지 않은 때문이다. 일제 암흑기의 막바지에 이르러 그의 시는 반제.저항의 의지를 담는다. 그에 속하는 작품이 <절정(絶頂)>, <광야(曠野)>, <꽃> 이다. 그의 시는 이 단계에서 역사의식과 예술이 상승작용을 하는 노래가 된다.
육사의 시세계는 크게 서정시와 저항시 계열로 이원화하고 있다. 육사시의 출발은 <황혼>(1933)에서다.
내 골방의 커텐을 걷고
정성된 맘으로 황혼을 맞아들이노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 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황혼아 네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보련다
그리고 네 품안에 안긴 모든 것에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다오.
저 十二星座의 반작이는 별들에게도
종소리 저문 삼림속 그윽한 修女들에게도
시멘트 장판 우 그 많은 囚人들에게도
의지할 가치없는 그들의 심장이 얼마나 덜고 있을까 <황 혼(黃昏)> 부분
<황혼>은 ‘골방에서 커텐을 걷고... 황혼을’ 맞는 식민지 청년의 고독을 황혼에 빗대어 노래한다. 황혼은 시적 자아에게 어디로 갈 것인가 길은 어디인가를 묻는 고뇌가 담겨 있다. 황혼이 시인의 고독한 외경이라면 ‘골방’은 시인의 내면을 풀어놓은 닫힌 공간이다. 그는 외로운 갈매기, 외롭게 반짝이는 십이성좌, 수녀 그리고 시멘트 장판 위의 수인(囚人) 등 특별한 결단을 내려야할 존재를 향해 접근한다. 그는 가끔 황혼을 보며 자신을 확인하기 위하여 ‘푸른 커텐’을 걷는다. 고독이라는 주관적인 망을 통해서 객관적인 세계의 인식, 객관물에 대한 개념을 정리한다. 커텐 너머 광장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골방의 공간이 오히려 ‘아늑도 하오니’이다. 육사가 생각하는 푸른세계란 무엇인가. 아직은 기다려야 할 시기인데 청년시인 육사는 골방에서 커텐을 제치고 마침내 푸른 칠월의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로 나온다. 그런 의미에서 <청포도>는 육사의 마음을 외부로 여는 단계가 된다.
<청포도>에서 두드러진 빛깔은 청백이다. 청백의 이미지 속에서 황혼의 시인은 마침내 ‘마음의 빗장’을 푼다.
육사문학관에 게시된 작품해설문에서 돋보이는 것이 하나 있다면, <청포도>의 ‘청포를 입고 오는 손님’을 항용 조국광복 또는 해방의 상징으로 해석하던 종래의 해석을 부인하고 ‘마음의 빗장’을 여는 객관적 상관물로 본 것이다. 이것은 <황혼>에서 보여주었던 닫힌 골방에서 뛰쳐나와 고향,칠월의 하늘,푸른 바다,푸른 두루마기(청포)입고 오는 손님과 연결되고 흰 돛단배, 하이얀 모시 수건의 색채이미지로써 마음의 빗장을 열게 된다. 이 시는 사실상 서정시로 볼 때 시로서의 생명력이 강하게 울려오는 면이 있다.
육사의 마을은 3면이 낙동강으로 둘러 있다. ‘낙동강 칠백리(洛東江七百里) 어구 많은 구비에서도 깎아 세운 듯한 왕모성(王母城) 뿌리를 씨처 쌍봉(雙峰) 그림자를 감도는 사이에 폐어진 적은 한 칼피’(이원조)가육사의 고향이다. 교통이 불편했던 당시에는 손님이 오려면 배를 타고 강을 건너와야 한다. 장마가 날 경우 교통이 두절되는 것이어서 귀한 손님의 왕래에 불편을 주었으므로 기다림은 더욱 간절한 것이다. 수필가 한흑구는 육사의 청포도 배경은 경북 영일만이라고 한 적이 있다. 또는 1938년 경주 남산 삼불암에서 요양을 한 일이 있는데 그 때 동해면 도구리의 삼륜포도원에 온 적이 있다는 말도 있다. 포항 영일만 해돋이곶에 육사의 청포도시비를 세운 연유가 된다. 육사의 서정시가 <청포도>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다면 그것은 색채이미지에 내포된 청포입고 오는 손님을 기다림에 있다. 결단의 뜻을 같이할 동지거나 또다른 자아를 의미한다.
2) 시 이야기
(가) 저항시
육사의 후기시 <절정>과 <광야>에서 저항성을 언급하는 것은 통설이다. 문제를 여기서부터 찾아보자.
시 <절정>이 보여주는 전체적인 의미는 시적 자아가 극한상황(겨울)에 처해 있으면서도 그의 이상(무지개)과 신념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1연의 ‘매운 계절’과 2연의 ‘고원, 서릿발 칼날’은 해석상 이견이 없으나 4연의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개’의 해석은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다. 문학관의 해석은 반제 .역사의식이 담긴 작품이라는 통설을 따르고 있으나 어딘지 허전하다. 그런데, 이 시가 ‘시인의 극한상황에 처한 자의식을 드러낸’시란 점은 인정하나 위기의식을 표출한 시인의 내면의 절정은 저항성에 있다기보다 ‘주자학의 호출에 의한 자기내부의 투시’라는 의견‘이 있어 주목된다. 이 말의 의도는 저항시라는 말 대신에 주자학적 이상추구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 이유는 육사가 조선혁명간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투쟁적이었을 가능성과 특히 ’그의 의열단 활동을 통하여 우리민족 운동을 조감하고 있었음에도 민족운동의 구체적인 현실을 형상화한 시가 없다‘ 는 데 있다.
이러매 눈깜아 생각해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겨울과 무지개‘, 이 대목을 어떻게 해석하든 현실과 이상의 대응적 심리를 표상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시인의 신념이 자리하고 있는 심층에 누가 무엇이 놓여 있는냐가 문제된다. 시인의 사상적 면모란 통합된 자아의 표출이므로 당대 사회적 현실과 개인적인 관계에 놓인 내면의 복합성을 무시하고 이야기할 수 없다.
육사시의 자아는 인내하며 모색하는 의지의 모습이다. 마음의 결단을 예비하는 모색이다. 그가 식민지현실에 쫓겨 ‘마침내 北方으로 휩쓸려온’ 것이 그 이유다. <절정>에서 ‘겨울’의 내포적 의미는 절박한 상황을 말하지만 마음의 결단이 서지 않는 상황도 내포한다.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를 자문도 (3연) 하지만 결단을 실행할 현실적인 기회를 찾지 못한다. 아직도 육사내면은 끝나지 않은 여정과 같다. 시의 겉이야 저항시고 주자학적 참을성이고 혁명가를 고대하지만 아직도 결단의 시기를 맞지 못한 머뭇거림이 보인다. <광야>를 역사의식이 현실과 만나는 추상적인 조우라 한다면 <절정>은 어두운 시절 북방으로 떠날 수밖에 없는 숨막히는 현실을 말한다. 그것이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高原‘이다. 닫힌 공간을 여는 것은 마음의 무지개다. 기식된 현실을 여는 것은 시인자신의 내공에 의한 참을성이고 의지를 무지개란 이상에서 속내를 보인다. 겨울의 겉이야 강철같이 단단하고 차갑지만 차가움의 내면은 무지개처럼 선명하고 희망적이다. 육사시의 겉과 속은 이렇게 온도차가 심하다. 모든 것을 결단한 상태다.
(나) ‘자야곡’ - 무덤같은 조국
민족애란 고독한 자의 가슴에서 나온다. <자야곡(子夜曲)>(1941)은 만물이 잠든 밤에 홀로 고향을 생각하는데 고향은 ‘빛이래야할 고향이언만’ 나비도 오지 않는 ‘무덤우에 이끼만 푸르리라’ 는 고향이다. 검은 꿈을 삼키며 숨막힐 마음에 답배 한 대를 피운다. 1940년대의 고향 아니 조국을 무덤,자야(함밤중),검은 꿈으로 진단한 그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모색한다. 그의 마음속에 흐르는 강물 그것은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강물이다. 그는 강 건너 쪽에서 죽음의 피안을 가상한다. ‘노랑나비도 오쟎는 무덤’은 빛이 없는 죽음의 공간이다. 시인의 현실인식이 절망의 것일 때 결단의 의지를 예비할 것이다.
수만호 빛이래야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쟎는 무덤우에 이끼만 푸르리라.
슬픔도 자랑도 집어삼키는 검은 꿈
파이프엔조용히 타오르는 꽃불도 향기론데
연기는 돛대처럼 날려 항구에 들고
옛날의 들창마다 눈동자엔 짜운 소금이 저려
바람불고 눈보래 치쟎으면 못살리라
매운 술을마셔 그림자 발자최 소리
숨막힐 마음속에 어데 강물이 흐르뇨
달은 강을 따르고 나는 차듸찬 강맘에 드리라
수만호 빛이래야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븨도 오쟎는 무덤우에 이끼만 푸르리라. <자야곡> 전문
(다) <광야>와 지원극통
육사의 시 <광야>는 <꽃>과 함께 육사의 유작으로 전한다.<광야>는 ‘1945년 12월 7일 <자유신문>을 통해서 활자화된 시인데 해설은 ’<절정>과 함께 이육사의 항일저항적인 정신을 바닥에 깐 작품‘이며 ’백마타고 오는 초인은 민족해방의 상징‘이거나 ’역사를 의식한 시인의 목소리가 고조된 가락으로 나타난다.’ 고 한 반면 평론가 이원조는 그것을 지원극통(至寃極痛)이라는 말로 요약한다.
중국의 사상가 호적(胡適)은 19세기 중국의 대표적 시인인 상원(上元)의 김화(金和)의 풍자시를 지한통한(至恨極痛)이라 한 적이 있다. 지원극통과 지한극통은 ‘한‘과 ’원‘의 차이일 뿐 같은 말이다. 그렇다면 육사의 <광야>와 김화(1818-1885)의 <통정편(痛定篇)>(卷二,20-21頁,일기체 시)을 동열로 볼 것인가. <통정편>의 시는 ‘1853년 남경성이 함락당할 때 김 화는 성중의 장발적의 군중과 내통하여 성밖의 향영(向榮)의 대본영과 합세 성을 치기로 했다. 그러나 약속했던 관군이 오지 않자 성내의 동조자들만 희생을 당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김 화는 성이 포위된 당시의 상황과 관군의 부패무능함을 통한하는 기사시(紀事詩)를 써서 감동시켰으므로 역사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至恨의 시로 알려져 있다. <광야>에서 풍자적 의도를 찾을 수는 없지만 4연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와 5연의 ‘초인을 이 광장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는 민족적 아픔이 지극하다. 후술하는 바와 같이 백마타고 오는 초인은 역사의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우리에게 빛을 줄 인물’이다. 그런 점에서 육사의 정신적인 편력은 초기의 주자학적인 모색에서 후기의 민족적 혁명을 결단한다. 그의 유학자적 참을성과 의열단원으로서의 결기가 절제된 시적 정서로 용해된다.
김화의 아픔이 부패하고 무능한 관군에 대한 통한이라면 육사의 통한은 일제에 대한 민족적 아픔이다. 평론가 이원조가 호적의 글을 의식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광야>를 깊이 읽은 독자는 평론가 이원조라 할 것이다. 여천 이원조는 육사보다 5년 아래 계씨지만 정인보가 ‘장안삼재’로 불렀던 인물로 월북하여 옥사하였다 한다.
(라) 후경(侯景)과 초인
육사 시에서 주목할 대목은 <청포도>에서 ‘청포’입고 오는 나그네와 <광야>에서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다. ‘청포입고 오는 나그네’는 앞에서 ‘마음의 빗장을 여는 객관적 상관물’로 자아가 ‘독방’으로부터 벗어 난다. ‘광야’의 ‘백마타고 오는 초인’을 맞이하는 데 하등의 어색함이 없다. 혁명군으로서 초인을 맞이하겠다는 의지가 보인다. 육사의 내면은 참을성과 모색의 단계에서 행동하는 단계로 변한다. 민족의 현실이 비극적 상황에 몰려 있을 때 만날 수 있는 광인이다. (가)[남사 후경편(南史,侯景傳)] (나)[주(注)] 또는 두보의 <세병마시(洗兵馬詩)>에서 그 단초를 물을 수 있다.
“대동년 초 동요에서 노래하기를 ‘청사를 드리운 백마 탄 사람이 수양에 올 것이다.’ 후에 후경은 와양에 가서 비단무늬 천을 구하는데 실패하자 조정에서는 청포를 주었다. 후경의 반란군이 반란을 일으킬 때 모두 두루마기를 입었는데 청색이었다. 후경은 백마를 타고 청사 말고삐를 하고 나타나니 동요대로 한 것이다.”
청사백마의 주인공 후경(侯景)이 거사를 하기 전에 이미 동요나 도참설에 ‘청사로 치장한 백마 탄 사람이 수양에 올 것’이라는 노래가 있었다. 후경은 양무제를 칠 때 백마를 타고 청사로써 말고삐를 만들어 출전하니 이는 백마타고 오는 사람이 새로운 제왕이 될 것이라는 동요에 근거한다. 백마를 탄 후경의 혁명군이 모두 청포를 입고 와양의 적을 패퇴시키니 세상을 해방시킨 것이다.
후경은 남북조시대 양나라 삭방인으로 자는 만경(萬景)이다. 힘이 세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하였다. 처음엔 위술병이었으나 후위시에 이주영에 종사하였고 주영은 후경을 정주자사로 삼는다. 후에 만경은 스스로 한제의 자리에 오른다는 것이 후경에 대한 대강이다.육사의 청포입은 나그네나 백마타고 오는 초인의 기다림은 이 같은 후경의 고사에서 암시받았을 것이며, 두보의 <세병마시>에서도 ‘청포입고 백마를 탄 사람이 다시 나오겠는가 그런데도 후한에서는 지금도 백마타고 오는 초인을 노래하기를 좋아한다.’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중국 역사에서 온 혁명가적 이미지이고 중국문학사에 관심을 가졌던 육사가 시적 상상을 한제(漢帝) 후경의 고사 또는 두보의 시에서 인용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마) 기다림과 마음열기
육사시는 초기의 서정적인 인내와 모색의 단계에서 저항성과 결단의 의지를 담고 있는 후기시로 전개되는 양상이다. 육사시가 단순한 서정시거나 저항시로 규명될 수 없는 애매성은 서정성과 저항성을 양면화한 그의 시적 장치(사실은 고난의시기 반영)에 있다.
<황혼>에서는 황혼을 맞아 푸른 커텐을 열었으며 <청포도>에서는 마음의 빗장을, <광야>에서는 백마타고 오는 초인 그리고 <절정>에서는 닫힌 공간에서 무지개를 설정함으로써 마음의 희열을 얻는다. <자야곡>에서 고향(조국)을 무덤으로 인식하고 숨막히는 마음을 흐르는 강물에 띄워 열린 의식을 보인다.
루쉰이 좌익작가이지 사회주의 작가가 아닌 것처럼 육사의 사회주의에는 일견 계급문제와 민중문제가 제기되지 않는다. 식민지시대 사회주의는 민족적 저항의 한 방편이었다. 육사시의 청백(靑白) 이미지에는 색채적 이미지를 넘어 도래할 국민의 시대를 예비한다. ‘민족운동의 구체적인 현실을 형상화한 시가 없다는 것’은 육사의 시가 모색과 결단을 내리는 단계에서 방랑과 투옥을 반복한 식민지상황 때문이다. 조지훈이 쓴 안동시 성곡동 비문(1964)에 의하면 육사는 ‘국내외의 대소 사건이 있을 때마다 검속 투옥되기 무릇 17회,대구 서울 북경의 왜옥을 드나들다가 1944년 1월 16일에 북경 감옥에서 41세를 일기로 순의(殉義)하여 파란 많은 생애를 마쳤다.’ 한다. 이육사 문학관을 둘러보고 시를 이야기한 것임을 밝힌다.
5. 육사와 친했던 시인 이병각(李秉珏)
육사의 지인으로는 이름이 그리 알려지지 않은 이병각(1910-1940) 시인이 있다. 이병각 시인은 시 41편, 평론20편, 꽁트 3편, 수필 17편을 남겼지만 31세에 요절한 시인이다. 경북 영양군 석보 출신으로 1910년에 태어나 1940년 31세의 일기를 마친 시인이다. 생전에 육사와 절친했던 것이 몇 편의 서신을 통해 증명된다 하였다. 육사는 후두결핵을 앓았던 이병각과 조석으로 내왕하면서 그의 병을 극진히 간호했고 그의 장례까지 치렸다고 전해진다. 이병각은 1933년<조선일보>에 시 <시대와 총아>로 본격적인 작품활동에 나섰으며 1935년 <조선중앙일보>에 소설 <눈물의 열차>를 발표한다. [조선문단],[시학],[문장]을 통해 작품을 발표했는데 창작집은 남기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오일도,조지훈 등 민족시인들과 함께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며 항일운동에 나섰다가 투옥되기도 하였다. 대표작으로는 <옥에게 보내는 편지>,<고향>,<사당(祠堂)> 등이 있다.
[조선문단]에 발표했던 <봄의 편지>는 이 편지가 육사를 생각하는 편지인가 추정한다. 벗을 멀리 두고 홀로 장터개울 두던에 앉아 벗을 생각한다는 것은 육사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석보는 원래 목재와 담배생산지다. 동네 앞을 흐르는 석보천 냇물은 맑고 여름에도 발이 시리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대처로 나가려면 영양읍에서 나오는 길과 석보에서 나가는 삼거리까지 가야한다. 석보는 경북에서도 오지다. 필자는 석보중 초임 때 어느 날인가 기억은 없지만 동네로 통하는 길가에 있던 이병각 시인의 집을 방문하고 미망인과 부친으로 짐작되는 어른과 담소를 나눈 바 있는데 아쉽게도 당시에는 시인의 집인 줄 알 지 못했다. 그만큼 우둔했던 시절이다.
지터가는봄
그리움을 자아내나니
벗이여 ! 입술을 물고 힘껏잠든 손과손
우리는 期約없이 갈러지면서도
오히려 씩씩하게 作別치않었나.
感傷이란 우리는 글字쫓아 否認하고
다만빛나게 만날 것만 기다렸지 !
이마의 땀을 씻고 몸을 쉬이면
간곳좇아모르는 그대가
나의꺼치른 記憶속에 고요히 기여드도다.
(중략)
벗이여 !
우리가 지계를 벗어놓고 쉬이든
장터개울두너엔 지금내홀로 쉬이나니
아득한, 地平線 ! 아즈랑이 만이......
벗이여 !
이봄의 克服을 나는머리숙이고 궁理한다. <봄의 편지>부분
이병각은 김기림의 시집 [태양의 풍속]에 대하여, ‘옛이나 지금이나 곱다란 감정의 흐름가운데 언제던지 바눌 끝처럼 날카로운 풍자(諷刺)가 있고 그 풍자의 배후에는 소박한 무엇이 숨어 있어서 풍양한 사상(豊穰思想)의 웅덩이를 엿보게하는 것이다.’고 평한다. 모더니즘의 시인 김기림의 시에 풍자와 소박함이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시인으로서 산 해가 7 년 남직한데 시 40여 편에 평론 20여 편이 있다. [문장]지에 <가을밤>,<기약>등을 발표했던 이병각 시인은 <가을 밤>이란 시에서는 자신의 죽음을 눈치챘던지 ‘뉘우침이여/벼개를 적신다/...뱃쟁이 울음에 맞추어/가을 밤이 발버둥친다’고 슬퍼하거나 차라리 ’나달아 빨리 늘어라//‘라고 자신을 자학으로까지 몰고 간다.
8. 한용운 시비
가. 시비
- 알 수 없어요 -
바람도 없는 공중에 垂直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
언뜻 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 옛 塔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 알 수 없는 향기는 /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도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뿌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
작은 시내는 / 구비구비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같은 발굼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
밟고 옥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 저녁 노을은 누구의 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혜산 박두진 서 /1982년 6월 전국국어국문학시가비 건립동호회 일동 세우다/
나. 비음 : 한용운(1879.7.12.-1944.5.9)
선생의 초명은 裕天, 法名은 龍雲, 法號는 卍海, 청주 한 씨 응준의 차남으로 홍성이 낳은 위대한 애국자 시인이시다. 선생은 약년에 부친이 동학 봉기군으로 토벌하자 설악산에 숨어 불문에 귀의하다 1913년 불교 유신론을 부르짖고 14년에 대장경을 열람하여 불교대전을 엮으시다.19년 3.1 만세 시위를 33인과 같이 주도하시며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을 쓰시다. 26년 현대시사상 기념비적인 시집 [님의 침묵]을 펴내시다. 그 뒤에도 지조를 굽히지 않고 굳굳히 서시다 일제의 패망을 앞두고 44년 숙환으로 세상을 뜨시니 향년이 66세이시다. 언제나 선각자는 외로운 것이나 끝내 선생의 메아리는 천추에 빛나리로다.
이 비의 건립은 선생을 경모하는 전국 동호자의 협찬을 얻어 연세대학교 신동욱 교수가 주관하고 비음기는 학술원 회원 김동욱이 짓고 쓰다./
다. 卍海 韓龍雲 禪師像
위치: 충북 홍성읍 남장리 ,1985년 건립
1) - 讀者에게 -
(上略)
밤은 얼마나 되얏는지
모르 것슴니다
雪嶽山의 무거운 그림자는
엷어 감니다
새벽종을 기다리면서
붓을 던짐니다 / 乙丑 8월 29일밤
2) - 님의 침묵 -
님은 갓슴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갓슴니다
푸른 산을 치고/ 단풍나무숩을 향하야 난/ 적온 길을 거러서
참아 치고 갓슴니다
(下略)
라. 建立文
無等等呪의 禪에는 平等의 참 근원이 있었고 유국의 정열에는 나라위한 큰 사라이 담겼어라. 청정한 선의 광명이 나라 위한 큰 사랑으로 만나 민적사상의 위대한 불꽃으로 타오르니 그 활성은 곧 저 三一運動의 높은 光芒이었다.
만해 한용운 선생 이 고장 홍주가 낳았고 역사를 바르고 도 힘차게 살아주신 우리들의 영원한 님이다. 불성을 그대로 현실 속에 꽃피우니 고결한 선사요 그 禪을 웅혼한 민족의 기백으로 노래하니 극명한 겨레의 문사며 다시 민족 대표 三十三人으로 역사를 부등켜 안으니 민국의 의연한 지사요 조국위한 그 끝없는 사랑을 불굴의 혼으로 혼신일생하니 곧 민족사 위의 우뚝한 스승이라.
님은 가슴마다에 있고 우리들의 가장 큰 님은 바로 이 조국이다.을사 이후 최초의 의병이 터졌던 충절의 이 洪州城山 마루턱 바로 님이 출생하신 結城 고향 땅에 가가운 곳, 이제 이 고장의 만해님은 온 조국 앞에 우뚝하게 올라서니 굳게 움켜쥔 獨立宣言書에는 오늘도 沈黙을 깨고 들리는 警世永遠의 民族魂이 우렁차기만 하다.
이는 바로 광복 四十週年에 솟아오른 이곳 홍주성 義兵의 또다른 民族喊聲이니 곧 배달겨례가 살아 있다는 생의 한 표상이라 . 그래서 여기 받든 님의 이 민족사의 명운은 온 겨레 앞에 偉歟靑靑 하기만 하다.
/단기 4318년 광복 44주년 12월 2일 / 만해 한용운선생동상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 최창규 근찬/정환섭 근서/강태성 조각
또 그 좌측에는 공의 약전이 있다. 내용은 생략하거니와 끝에 보면, 단기 4277년 66세 6월 29일 성북동 심우장에서 별세하셨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 만해 선생 생가지
한용운 선생 생가지는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에 있다. 기념물 제75호로
생가지 안내문에는 만해 선생이 어릴 때부터 의협심과 용감한 성격이었으며 18세 때 동학 혁명에 가담하였다고 한다. 1926년 [님의 침묵]으로 저항문학에 앞장 섰고 유해는 망우리에 안장되었다는 요지의 내용이다. 생가지에는 표석과 안내판을 설치하였다.
바.남한산성 한용운 시비
1) 위치 : 남한산성 내 만해기념관 마당. 답사, 2002년 11월 12일
2) - 나룻배와 行人 -
나는 나룻배
당신은 行人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고 물을 건너 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깁흐나 엿흐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 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마지며 밤에서 낫가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슴니다
당신은 물만 건느면 나를 도러보지도 안코
가십니다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아러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마다 낡어감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行人
3) 오세암에서 불문에 귀의
이 시에서 나와 ‘당신’은 무슨 관계일까, 이렇게 관계를 따지는 자체가 비시적인 물음인 것을 알면서도 궁금해 하는 것이 한용운의 시다. 그는 시에서 많은 궁금증을 뿌리면서 신비적인 존재로 존재한다. 님과 당신은 무한자이거나 손에 밥히지 않는 존재로 보는 것이다. 만해는 논개를 두고 ‘그대’라 불렀던 기억을 하고 있다. 논개를 그대라 불렀던 만해가 당신이라 한 것은 그대보다 친근감을 주는 것이지만 그대는 존경해마지 않을 위대한 사람이지만 당신은 가까우면서도 인간의 영역에 드는 것이 아니라 님의 영역에 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기다리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은 신비적이고 지고지순의 존재입니다라고 스스로 답을 하고 있는 듯하다. 한용운은 한말 일제시대 초기인 병자수호조약(1876)으로 세계 열강들이 각축을 벌이던 시대인 1879년 충남 홍성군 서부면 용호리에서 한응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다. 유천, 용운이 호, 그는 1882년 (4세)에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1892년(14세) 초취의 예식을 1894년 (16세) 동학란, 청일전쟁, 갑오경장, 1896년 (18세) 동학당 참가 이후 설악산 오세암에서 불문에 귀의 1905년 (27세) 1월 강원도 인제군의 백담사에서 김련곡 화상에 의해 득도 승려가 된다.1908년 도쿄와 교또를 방문 최린과 알게되고 1810년 만주로 망명 이시영, 김동삼과 의병활동을 한다.1918년에 월간 [유심]을 발간하며 다시 시를 쓰게 된다.3월 1일 명월관현장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투옥되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하면서 47세 때 불후의 시집 [님의 침묵](匯東書館, 1926)을 발간하니 88편의 시가 실려 있다.
9. 심 훈의 시비
가. 위치 : 천안시 독립기념관, 답사: 2005년 4월 21일 (목)
나. <그 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어지기 잔에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드리받아 우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딩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듯 하거든
드는 칼로 이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둘처메고는
여러분의 대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다. 비음 - 심 훈의 약력
10. 마돈나의 꿈, 이상화 시비
가. 한국최초의 시비
이 상화의 시비는 달성공원 내의 것이 한국 최초의 시비로 인정되고 있다. 戊子年 正月은 1948년이다. 대구시 중구 달성동 달성공원 서남쪽에 위치한다.
나.
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엮는 꿈 사람이 안고
궁그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느니
아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 모르는 나의 침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게로
다. 비음 - 백조동인
시인 이상화는 서기 1901년 신축 4월 5일 우남 이시우 공의 제2자로 태어나 서기 1943년 계미 4월 21일 43세로 세상을 떠나니 대구는 그의 출생지요 종언지이다.
그의 시력은 [白潮] 同人時代에 시작되었으나 香氣롭고 奔放한 그 시풍은 초기의 朝鮮文壇에 있어서 淸新한 一魅力이었다. 대표작으로는 <나의 寢室로>를 비롯하여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逆天> <離別> 등이 있으니 碑面에 새긴 시구는 <나의 寢室로> 중의 一節이다.
흘러간 물의 자취를 굳이 찾을 것이 아니로되 詩人의 조찰한 生涯를 追念하는 뜻과 아울러 뒤에 남은 者의 허술하고 아쉬운 마음을 스스로 달래자는 생각으로 적은 돌을 새겨 여기 세우기로 한다. 戊子 正月
題簽 葦滄 吳世昌八十四歲書
詩句 遺胤 三子 太熙 十一歲書
背酩 竹農 徐東均 書
라. 상화의 삶과 문학 -대구 두류공원의 시비
시비의 안내문에는, 이상화는 호를 尙火라 하며 1901년 4월 5일 이시우 선생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1943년 3월 21일 43세로 세상을 떠난 대구가 낳은 애국시인이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의 침실로> 등이 있으며 이 비는 우리 나라 문단 최초로 세워진 시비라는 점에서 한국문학상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라고 하였다.
두류공원 인물동산에는 1990 연대 중반 이후 중요문인과 애국지사들의 인물상과 시비를 계속 세우고 있다. 시에서 인물동산으로 계획을 세워서 하는 것 같은데 그 이전만 하더라도 타 시도에 비해 시비를 세우는 일에 무관심하다는 지적을 할 수 있는 정도였다.
백기만 시인을 이어 199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아 두류공원에 상화의 시비가 동상과 함께 섰으니 그의 애국정신과 근대한국문학에 끼친 공로를 종합한 배려일 것이다. 필자가 찾은 것은 이 해 10월 6일 오전이었다. 그의 동상은 두류야구장 건너 제일매점 맞은 편에 위치한다. 앉은 좌상에서 시인의 지적인 풍모와 날카로움을 동시에 지닌 듯 그의 눈길은 따스한 듯 하여 보는 이의 폐부를 뚫어 보는 것 같다. 얼마나 점잖은 모습이냐를 묻고 있는 것인가. 두류공원의 시비는 상화 시인의 삶을 비교적 자세하게 소개하면서 전자에서 빠뜨렸던 민족독립활동 부문을 추가하고 있다. 그 부분만 소개하면,
‘尙火의 철저한 항일.배일 사상은 백부 이일우와 모친의 가르침이 컸다. 1919년 3월 중학생이던 상화는 백기만과 함께 기미독립운동에 가담했으며 1927년에는 義烈團 李鍾巖 사건과 張鎭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투척에 관련돼 투옥 모진 고문을 당했다. -생략-1928 . 9년 純宗 임금 내구기념은사관인 민단소내 노동야학원에서 한글을 가르쳤으며 당시 거듭되는 가택수색으로 談交莊 천장에 숨겨둔 古月 李章熙의 유고와 상화의 많은 원고가 압수 소각된 것은 우리 문단의 큰 손실이요 통탄함이 아닐 수 없다. 嶠南學校에서 1940년까지 3년 간 교편을 잡았던 그는 피압박민족은 주먹이라도 굵어야 한다며 권투부를 창설 지도하기도 했다. 1943년 음력 3월 21일 조국광복을 못본 채 모진 고난의 후유증으로 독립의 한을 안고 애통하게 영민했다. 1948년 竹筍詩人會가 주축이 되어 문단 최초의 상화시비가 달성공원에 세워졌고 한국방송공사 대구방송국과 한국예총 대구지회의 공동주최로 향토문화예술인들이 합심하여 그의 동상이 이 자리에 서게 되었다. 석우 이윤수 짓고/ 이상일 조각하고/화촌 문영렬 쓰다.
당시 이상화 시인이 의열단 단원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가 대구일보 문화란에 제기되었던 기억이 있다. 어쨌든 일제치하 민족저항 시인으로 우리에게 널리 오래도록 기억되고 있는 상화의 시비 전면에는 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새겨져 있다. 이 시는 식민지를 살았던 사람은 물론 식민지 경험이 없는 젊은 이에게도 가슴 뭉클한 울림을 주던 시로 오늘날까지 기억되고 있다. 시에서 ‘빼앗긴 들’은 대구 현 수성구 들판을 ‘<나의 침실로>에서 ’나의 침실‘ 은 카토릭 성지인 남산동 성모당을 소재로 한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상화시의 절정은 가까운 삶의 반경에서 민족 전체의 비극적인 현실을 절창한 시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 尙火 李相和 詩人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지금은 남의 땅 ㅡ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바. 대구 화원읍 묘지비문
1) 위치: 대구 딜성군 화원읍 본리리 산 9번지
2) - 民族詩人 李尙火先生碑文 -
천년의 비바람 소리 만학(萬壑)을 굽이쳐 여기 흘러라. 유리 고장 대구가 낳은 민족시인 이상화(李尙火) 선생은 비록 43세의 짧은 생애를 살다 갔지만 온 몸으로 불태운 빛나는 애국얼과 높은 시혼(詩魂)은 이 겨레의 영원한 귀감이 아닐 수 없다. 1922년 <백조(白潮)>를 통해 시단에 나온 이상화 시인이 일제의 억압이 절정에 달해 있던 1926년 피로서 쓴 절명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민족정신사를 밝혀주는 커다란 횃불로 길이 우리 가슴에 살아 있는 것이다.
1943년 시인이 작고하자 향우(鄕友)들이 애달픈 마음 달랠길 없어 묘전에 비 하나를 세웠으나 오랜 세월의 풍상 속에서 비신(碑身)이 심하게 휘손된 지라 이번 다시 유족과 고인을 기리는 사람들이 뜻을 모아 이 빗돌을 세운다
2003년 5월 22일
죽순문학회 윤장근 짓고
하오명 쓰다
대구서부도서관 향토문학관에는 한국계 일본인 시인 미나미(南邦和)가 상화 시인의 시와 행적에 감동한 내용이 있어 주목된다.
미나미는 현재 구주 미야자키(官埼)에 거주하고 있는데 그는 1933년에 강원도 평강에서 태어나 15 세까지 북한에서 관리를 하던 아버지를 따라 살다가 일본이 패전하자 일본으로 간 것이다. 그가 다시 한국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88년 국제 서울 펜대회 때 일본문인 대표로 한국에 와서 이윤수 시인과 만나 인연이 된 것이라 한다. 1989년 竹筍誌에 시 <동토의 묘지>를 게재하여 지척에 있는 한국이 어려울 때 밟지 못한 회한을 토로하였다. 미나미는 2002년 12월 26일 대구서부도서관 개관식에 초청되어 ‘ 일본에 알려진 한국의 시인 이상화.구상에 대하여’로 강연회를 가진 바도 있다. 그는 생전에 상화 시인을 만난 적은 없으나 상화의 시를 읽었다고 한다. ‘尙火의 山河, 환상의 시인에게’ 는 외국인으로서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으로 상화를 본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사. 상화 시인이 산 시대
한반도가 식민지지배의 굴욕과 고통과 몸을 뒤틀고 있던 1930년대 나는 콜론(식민지)의 아들로 가원도 평강 땅에서 태어났다.
상화가 <금강송가>에 담은 비탄과 분노도 모르는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민들레를 사랑하고 아카시아와 포플라와 흔들리는 저녁 하늘에 동요를 중얼거리는 철없는 내 유년기와 농부의 비애, 민중의 한을 걸머지고 몸부림치며 피어린 소리를 어둠을 향해 토해내고 잇던 상화와의 비극적인 落差, 학생모를 깊숙이 쓴 단정한 상화의 초상과 만난 것은 1993년 여름의 제주도에서 생긴 일,나와 아내를 안내해준 외국어대 출신의 지적인 여성 김은숙씨, 그 녀가 헤어지던 날 선물로 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한글을 읽지 못하는 나의 당혹감을 상화는 그 시원한 눈매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 때까지 내가 읽은 상화의 시는 김소운 편 문고판 조선시집의 <나의 침실로> 단 한 편 뿐, 상화 시인은 나에게 있어 말라르메 같은 심벌이스트였다. 제주도의 그 여름날부터 상화는 점차 내 켠으로 다가왔다. 학생모를 쓴 사춘기의 상화는 마침내 민족혼의 저항시인이 되어 한편의 시 그것으로 새로운 세계 하나를 낳게 함을 깨쳐주는 <시인에게>, 그것을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상화 시인은 내 안에서 等身大로 크기 시작하였다. <말세의 희탄>의 절망하는 상화, 그리고 <빼앗긴 들에도...>로 상화는 내 마음 속에서 완결된다. 한반도의 빛, 바람, 불꽃, 어둠, 노래, 상화가 내게 건내준 그 이미지의 모든 것은 내 유소년기의 山河에 포개어지는 풍요한 젖가슴 같은 부드러운 흙, <빼앗긴 들에도...>도 그 럽게 여긴다.
11. 최초의 [조선시인선집] 낸 牧牛 白基萬 시비
가. 대구 두류공원 시비
목우 백기만의 시비는 대구시 달서구 두류 3동 두류공원 내에 있다. 두류공원에는 대구 출신 작고 문인들의 시비가 여러 기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세운 시비가 백기만의 시비다. 시멘트로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네모난 오석을 얹어놓았다.
차차 이 집 저 집 처마에
原始的 초롱이 내어 걸린다
그리고 울도 없는 집마당
에는 늙은이들이
끝없는 談笑에 즐거워 한다.
아아 平和롭다 오직 太古靜이
흐를 뿐이다.
욕심도 없고 미움도 없고
어제도 없고 내일도 없는
山村은 山과 함께 어둠에
잠기려하도다.
나. 백곰 아닌 小黑熊
백기만의 시비 전면에 새겨진 위의 시는 읽는 이로 하여금 산촌의 해지는 풍경을 이같이 묘사할 수 있을까 하는 데까지 이르게 하고 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시 <山村慕景>은 독자의 마음을 헤집고 들어 눈물을 보이지 않을 수 없다. 산촌의 풍경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