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9년 조령산성(鳥嶺山城) 축성 ( 築城)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안주安州에 파천하여 있을 때, 조령로에 방비 없음을 한탄하고 후회한다. 명나라 경략経略 유원외劉員外가 백상루百祥楼에서 선조에게 조령 관방설비의 필요성을 역설했다(貴国欲守王京則不可不先守鳥嶺賊 中如有傑出者知其為要害而先據足嶺防遇天兵則制之極難須速遭幹能宰臣相 波険要設関以防) 그렇지만 전란(戦乱)으로 물자가 결핍해 중국 산해관山海関처럼 하자, 조령만 천험한 게 아닌데 다른 곳 설관은 어쩌나는 등 논의만 거듭하였다.
평안감사 이원익(李元翼) 병사(兵使) 신집(申磼) 우승지 유몽정(柳夢鼎) 주서注書 김상설(金尚窩) 검열(検閲) 조유한(趙維韓) 등의 논의로 죽령과 조령에 설관하기 위한 자료 수집을 위해 화공畫工 12인을 중국에 파견토록 선조의 지시가 있었으나 파견되지 않았다
설관해도 적은 병력으로 지키기 어렵다느니 설관하자느니 의견이 맞지 않다가 12월에 영상(領相) 유성룡(柳成龍)이 이번 전쟁에서 성에 의지하여 승전(勝戦)한 경험을 들어 조령 설관을 다시 주장하여 선조도 조령설관의 필요성을 절실히 생각했다.
유성룡은 충주에 살고 있던 수문장守門將 신충원申忠元의 조령 지세(地勢)와 설관 및 설관 후 파수계책을 듣고, 1594(선조 27)년 2월에 상주上奏하였다. 조령에서 막아야 충주를 지킬 수 있고 충주가 함락되면 송강수백리 (松江数百里)를 잃게 된다. 신충원은 조령지세를 잘 알고 조령의 영상(嶺上)에는 잡로(雑路)가 많아 막기가 힘들고 조령에서 동쪽으로 10리 쯤 내려가면 절벽이 양쪽으로 솟고 그 가운데 물이 흘러 행인들이 나무를 걸치고 건너는 데가 무려 24 곳이나 되는 응암鷹巖에 설관해야 한다. 적이 이곳에 이를 때 다리를 철거하고 물을 막았다 트면 발붙이기 어렵고 궁노(弓弩)와 능철화포菱鐵火砲를 쏘면 백여명이 지킬 수 있다. 조령 동쪽에는 구로(旧路)가 백년간 사용치 않아 산림이 울창하고 하늘이 보이지 않아 다니기 어렵고 조령 서편의 소로는 연풍현의 동쪽에 닿으나 워낙 험준하여 여기도[伊火峴] 수십 인이면 지킬 수 있다. 연풍읍과 수회촌(水回村)의 땅이 기름지니 승군(僧軍)과 산척(山尺) 백여 인을 얻어 둔전경종(屯田耕種)하여 군량에 충당 하고 화약총포(火薬銃砲)로 주야로 조련하면 정군(精軍)을 얻을 수 있으니 농자(農資)를 주어 파견 하자고 건의하여 선조의 윤허允許를 받았다.
신충원은 곧 사람을 모아 축성을 하였는데 1594년 10월 충청순찰사(忠清巡察使) 윤승훈(尹承勲)은 축성의 진첩 사항과 용장에게 수백 명을 주어 지킨다면 대병大兵이 쳐들어 와도 유린당하지 않을 것이다. 신충원이 축성을 끝내면 죽령에도 축성하자고 상계上啓했으나 물력이 부족하여 시작하지 못했다.
비변사(備辺司 에서는 징천인(微賤人)이 축성의 거역(巨役)을 마쳤다고 포상하자고 건의하여 선조의 윤허를 받았다. 논의뿐이던 설관이 수문장에 의해 완공되자 요새방어를 위해 용장 배치건의가 있고 비변사는 경상좌도에서 방어를 맡으라는 등의 논의가 계속됐다
1596년(선조 29) 1월 24일 비변사에서 조령과 죽령은 충주 목사 김명윤(金命胤)과 단양 군수 서희신(徐希信)이 있지만 우려되니 특별히 방어사(防禦使)를 한 사람 보내 김명윤·서희신·신충원(申忠元 ; 충주의 향리(鄕吏)인데 군공(軍功)으로 조령파수장(鳥嶺把守將)이 되었다.) 등을 지휘하며, 죽령은 단양·청풍·영춘·제천 및 경상도 풍기의 군사가 지키고, 조령은 연풍·충주)·괴산·음성 등 처의 군사가 지키며, 병사(兵使)는 적암(赤巖)과 추풍(秋風) 사이에 머물러서 황간과 보은의 길을 수비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는 내용을 도체찰사에게 하유(下諭)하되, 선전관(宣傳官) 한 사람을 급히 내려 보내자고 하여 윤허 받았다
이듬해 1597년 2월 신충원은 파수관把守官으로 응암의 일자성(一字城)에서 차단 파수하고 있었으며 영상(嶺上)에는 찬획사 (賛劃使) 이시발(李時發)이 맡아 충주목사 김명윤의 감독하에 성기(城基) 를 놓기 시작하여 한 달 이 채 못된 3월 15일에 매우 우람하고 굳은 2중성 二重城을 쌓고 가운데 문을 세워 고개 밑을 내려다보게 하는 축성이 끝났다(趙靖 先生文集 丁酉再亂日記 西行日記 宜祖 三十年二月二十二日~三月十五日條)
신충원은 훈련원(訓練院) 주부(主簿)로 승진하고 조령은 중요 관방(関防)으로 방어책임이 분담되나 임란이 끝나자 조령 수어守禦도 큰 관심이 없었다
1638년(인조16) 왜구의 동향이 심상치 않아 비국당상備局堂上에서 조령 등 남관요충南関要衝의 수호계책이 논의 된 적이 있다. 현종(顯宗)때 북벌론北伐論이 대두 되면서 관방(関防)에 관심을 둔 수어사(守類使) 이완(李浣)에 의해 조령에 진鎮을 두고 산성을 쌓자는 건의를 하고 1673년(현종 14) 6월에도 건의 하나 소극적인 태도로 후일로 미루게 된다.
1684년(숙종 10) 고부(古阜)의 무인 김남두(金南斗)가 조령과 팔양치八良峙에 산성을 쌓자고 진언하고, 이듬해는 호군(護軍) 김신중(金信重)이 조령, 죽령, 철령, 청석동(青石洞)에 관방설치를 상소하고 1694년(숙종 20)에는 전 선전관(前宣傅官) 성초연(成楚珩)도 그와 같은 진언이 있었다. 1707년(숙종 33) 12월에 지중추(知中枢) 이인엽(李寅燁)은 이조판서 재직시 불랑기佛狼機) 제조를 건의하는 등 국방에 주의하는 인물로 병조판서를 지낸 중신(重臣)인데 조령 죽령의 방어책을 건의하니 일부에서는 강화도 축성이 더 시급하다는 논의가 있으나 1708년(숙종 34) 11월 이인엽은 이듬 해 봄에 조령 추풍령 팔양시 운봉(雲峰)에 차례로 축성하겠다고 보고하여 숙종의 윤허를 받았다. 그러나 정작 축성의 연대가 왕조실록에는 없다
다른 기록에는 문경현지(城池 山城條 ···南朝戊子因申忠元旧城改築而設関…)에 숙종 무자년(1708) 이고 국역신증동국여지승람(문경현 성지조령산성 숙종 34년에 쌓았는데 남북이 8리 이 고 둘레가 18,509보)에서도 역시 숙종 34년(1708)이나 주흘관중수기主屹関重修記(烏嶺有國來関防咽喉之衝而城楼建設自康熙四十八年乙丑創之」 -庚辰(1940)년 11월 이채욱(李采郁) 문경군수가 단 현판)에는 강희康熙 48년 을축乙丑(1709)으로 기록되어 있다.
실록에 숙종 34년 11월에 이인엽이 이듬해 봄 축성토록 윤허된 것으로 보아(粛宗実録巻 46 34 年戊子 11月壬辰 「 …李寅燁以鳥嶺等処越明春如 築 秋風嶺八良峙宾峰等次第設築之意陳達上可之」) 숙종 34 년 축성했다면 11월에 윤허 받고 준비 기간 없이 12월에 쌓았다는 결론이 되며 이듬해 봄에 축성하기로 했으니 1709년(숙종 35)에 쌓은 것이 타당하다.
축성공사는 문경현감 이중창(李重昌)과 영비(営裨) 손명대孫命大에 의하여 수마석水磨石과 잡석소편雑石小片으로 쌓아 가자(加資) 됐으나 1712년 5 월에는 축성 상태가 부실하여 과반이 무너졌다는 서종태(徐宗泰)의 보고에 의하여 현감과 영비의 가자는 삭탈 당하고 논죄(論罪) 됐었다.
그 규모는 기록에 따라 다르니 남북 18리에 주위 18,509보(聞慶縣誌 城池 山城条 “南北十八里周圍一萬八千五百九歩餘···”)인가하면 남북 8리에 둘레가 18,509보(국역신증동국여지승람 문경현 성지 조령산성조 “...남북이 8 리이고 둘레가 1만8천5백9 보이다”) 이기도 하고 남북 2 리 주위 18,500보(主屹関重修記 ‘…周圍一萬八千五百歩 南北二里···“)로 기록되어 있다
성이 3곳에 골자기를 막고 있으며 고개위에 충청·경상 두도의 경계가 되는 것은 조령관(鳥嶺関)이고 응암(鷹巖)에는 신충원이 쌓은 옛 성에 조동문(鳥東門)을 고쳐 쌓았다. 초곡(草谷)에 는 주흘관으로 문경 함창 예천 용궁 상주 5읍의 군량창(軍餉倉)이 있다.
위의 세 곳은 모두 홍예문(虹霓門)이 대로를 통하고 제 1, 2, 3 관문이 산골짜기를 막고 관문 좌우의 성벽은 능선을 따라 축조하여 6부 능선쯤에서 끝났다 다음 골짜기로 이어져 초곡, 중성, 조령성벽은 계속되고 있으며 길이 18,509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