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09. 27
- KB 회장 첫 연임, '落下傘' 탈피… SK 노사는 협력업체와 相生 노력
- 정부는 '官 주도' 욕심 버리고 自律·創意 발휘하는 민간 도와야
정권이 바뀔 때마다 금융권도 홍역을 치른다. 전 정권 출신 낙하산 인사는 쫓겨나고, 새 낙하산들이 속속 내리꽂힌다. 국책은행은 말할 것도 없고, 정부 지분이 없는 시중은행장 자리도 새 권력의 전리품으로 취급된다.
문재인 정부의 금융권 물갈이 인사가 시작됐다. 그런데 시즌 초기에 나온 KB금융 윤종규 회장의 연임 소식은 금융권의 '탈(脫)정치'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2000년 국민·주택 통합은행을 모태(母胎)로 하는 KB금융은 출범 이후 줄곧 낙하산 인사들이 수장 자리를 차지해 왔다. 2008년 지주회사 형태로 바뀐 뒤엔 각각 다른 줄을 타고 내려온 지주 회장과 은행장 간 헤게모니 다툼으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윤 회장의 연임은 KB지주 출범 이래 수장의 첫 연임 사례다. KB금융은 윤 회장 재임 3년간 순익이 2배로 늘고, 시가총액 1위 은행으로 리딩뱅크 위상을 되찾았다. 정치권과 금융 당국 간섭 없이 능력과 경영 성과만으로 CEO를 뽑았다고 볼 수 있다. 윤 회장 연임엔 흑역사에 대한 반성과 이사진 개편이 효력을 발휘했다. 소액주주, 시민단체가 추천한 사외이사를 기용하고, 관치로부터 자유로운 외국인 이사를 발탁한 것이 관치 외풍을 차단하는 데 도움이 됐다는 후문이다.
KB금융의 탈정치 행보는 미완성이다. 윤 회장이 겸임해온 회장-은행장직이 분리되면, 국민은행장을 새로 뽑아야 한다. 이런 구도를 보고 벌써부터 뛰는 대선 캠프 출신 인사가 많다는 소문이다. 은행장까지 독립적으로 뽑고, 이렇게 발탁된 은행장이 다른 계열사 사장들과 차기 회장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구도를 만들어야 KB금융의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 KB의 분투를 기대해 본다.
▲ 윤종규 KB금융지주 회장이 15일 오전 서울 국민은행 여의도본점으로 출근하고 있다.
KB금융이 기업 지배구조 선진화 가능성을 보여주는 케이스라면 SK이노베이션 사례는 노사 간,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상생 모델의 단초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희망을 품게 한다.
SK이노베이션 노사는 최근 임금인상률을 물가상승률에 연동하며, 전 직원이 기본급의 1%를 사회적 상생을 위해 기부하고, 회사도 직원 기부액만큼 사회적 상생기금을 보태는 내용의 임단협에 합의했다. 연간 40억원 정도의 상생기금은 협력업체 직원의 급여 인상, 복지 향상 등에 사용된다. SK이노베이션 노사는 또 결혼·출산·교육 등 자금 수요가 많은 30~40대에는 호봉 인상률을 높이고, 자금 수요가 줄어드는 50대 이후에는 상승률을 낮추는 식으로 임금체계를 개선했다. 한국 기업의 약점인 기계적인 호봉제를 탈피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높이 살 만하다.
또 다른 SK 계열사 SK하이닉스에선 노사가 3년 전부터 임금 상승분의 10%를 상생기금(연간 66억원 규모)으로 갹출해 협력업체 직원 4600여명의 급여 인상과 복지 개선을 지원하고 있다. 첫술에 배부를 순 없다. 이런 사례가 확산되고, 진화(進化)하는 과정을 거치면 한국형 상생 모델을 찾게 될 것이다.
KB·SK 사례처럼 민간 영역에선 자율과 창의를 발휘해 상생 해법을 찾고 있는 반면, 정부는 여전히 구습(舊習)에 사로잡혀 있다. 문재인 정부는 국가주도형 경제개발 모델은 박정희 시대 유물이라면서 경제 패러다임 전환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정책 행보는 정반대다. 강압적인 통신료 인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강요 등 관(官) 주도 모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최근 고용노동부는 파리바게뜨에 가맹점에서 일하는 제빵기사 5378명을 25일 내에 정규직으로 채용하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정부 명령으로 정규직 일자리를 늘릴 수 있다면, 과거 정부는 왜 못했을까. 시민사회의 자율과 창의를 존중하자는 것이 이 정부의 모토 아닌가. 정부 역할은 스스로 상생 해법을 찾는 기업에 대해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선에서 그쳐야 한다. 예컨대 기업 노사가 상생기금을 만들면 세금을 깎아주거나 보조금을 지원하는 것이 시장친화적인 정책이다. 조급증에 사로잡혀 기업을 죽이는,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우를 범하지 말았으면 한다.
김홍수 기자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