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민낯 - 포크 사악한 쇳덩이라는 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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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09.16. 03:43조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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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민낯
포크
사악한 쇳덩이라는 오명
요약 양식에서 고기·생선·과일 따위를 찍어 먹거나 얹어 먹는 식탁 용구
포크 : 식기가 아니라 조리기구로 시작
포크(fork)라는 말의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서양 문화사 대부분의 단어가 그렇듯 라틴어가 나온다. 포크는 갈퀴란 뜻의 라틴어 furca에서 나왔다. 이렇게 보면 식기로 사용된 포크의 역사가 꽤 오래된 듯 보이지만 요즘 우리가 사용하는 식기로서의 포크의 역사는 채 400여 년이 되지 않는다. 그 이전의 포크는 사냥에서 잡은 짐승을 불 위에서 굽던 끝이 두 갈래인 쇠꼬챙이일 뿐이었다(식기가 아니라 조리 기구로서의 위치였다).
8~9세기에 이란에서 쓰던 동으로 만든 포크
물론 예외적으로 식기로서 사용된 경우도 있기는 있었다. 고대 이집트, 그리스, 로마에서 단편적으로(극히 예외적으로) 포크가 사용된 경우가 확인됐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예외’였다. 포크는 10세기가 될 때까지 유럽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고대 로마에서는 손가락으로 음식을 먹어
기원전 4세기경 중국에서는 젓가락이 일반화되었고 이 신개념 식기의 유용성을 확인한 이웃 나라들은 앞다투어 젓가락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 유럽에서는 손가락으로 밥을 먹었다.
고대 로마에서는 손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먹었다(고급 레스토랑에 가보면 손을 씻은 핑거 볼(finger bowl)이 나오는 것도 이런 수식(手食) 문화의 흔적 때문이다). 귀족 계층이나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약지와 새끼손가락을 제외한 손가락으로만 밥을 먹는 식사법을 고수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손으로 밥을 먹은 것은 사실이었다.
수식 문화: 젓가락 문화: 포크와 나이프 문화, 4:3:3
전 세계 식문화를 보면 동아시아의 젓가락 문화, 유럽의 나이프ㆍ포크ㆍ스푼 문화 그리고 나머지 수식 문화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 굳이 어느 문화가 올바르고 훌륭하다는 가치 평가를 내릴 수 없는 것이, 각각의 식문화는 주변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바가 크기 때문에 절대적 평가가 어렵다(만약 다수결로 뭐가 옳은지 결정한다면 손으로 먹는 것이 가장 올바른 방식일 것이다. 음식 문화권 전체를 10으로 봤을 때 수식 문화, 젓가락 문화, 포크와 나이프 문화가 각각 4:3:3의 비율로 나눠져 있기 때문이다).
10세기까지 포크는 필요없었다. 돌칼, 나이프, 스푼이면 그뿐
태초에 인간은 사냥감을 잡은 뒤 불로 굽고, 그 구운 고기를 돌도끼나 돌칼로 잘라 먹었다. 이때는 전부 나이프를 가지고 식사를 했던 것이다. 국이나 스프가 식탁에 올라오면서부터는 스푼이 등장하게 된다(주변에 널려 있는 조개껍데기 같은 것에서 착안했을 것이다).
전라남도 화순군 대곡리에서 출토된 국보인 청동기 돌칼들
문제는 포크다. 포크의 필요성을 느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왜? 손가락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포크는 10세기까지 그 존재 이유를 부정당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포크로 먹을 음식 자체가 없었다는 것이 맞다.
죽과 빵만 먹던 시절, 포크가 필요 없었다
중세 시대 유럽의 경제성장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그도 그럴 것이 각 영지에서 자급자족 형태로 경제생활을 영위했고 외부와의 교역이나 상거래 활동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각 영지마다 사용 화폐가 달랐고 도로의 정비 상태도 제각각이었기에 이동이 힘들었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중세의 기층민들(대부분 농노들)에게 미식(美食)은 사치였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 먹을 음식이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했다. 당시 이들이 먹던 음식은 묽은 죽과 빵이 전부였다.
죽과 빵을 먹기 위해 포크를 사용하겠는가? 포크가 등장할 자리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11세기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에서 포크가 등장하다
베네치아
그러나 11세기가 되면서 조그마한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지방에서 끝이 두 갈래로 나뉜 소형 포크가 등장한 것이다(이탈리아에서 포크가 등장하게 된 것은 동방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라는 입장 때문이다. 당시 베네치아 총독의 후계자인 도메니코 셀보가 비잔틴의 공주였던 테오도라와 결혼을 했는데, 이때 테오도라 공주가 포크를 전했다).
포크, 악마의 무기라는 비판을 받다
포세이돈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바다·지진·돌풍의 신으로 주로 삼지창(트리아나)을 들고 물고기나 돌고래 떼와 함께 긴 머리카락과 수염을 휘날리며 파도를 타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포크는 포세이돈이 든 삼지창과 모습이 흡사하다는 이유로 식탁 위로 올라오기까지 시련을 겪었다.
[출처 : Lemon-s]
그러나 이 포크는 곧 악마의 무기라는 비판을 받게 된다.
“신의 은총인 음식을 만질 수 있도록 허락된 것은 신이 만들어주신 인간의 손뿐이다.”
기독교 교리에 충실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극렬한 반대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포크는 마녀가 만들어낸 도구이며, 이교도 신(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들고 있는 삼지창)의 무기이자 로마 시대 검투사들의 무기(삼지창, 양갈래창)가 축소된 형태로 여겨졌다. 이런 반신앙적인 도구가 신성한 식탁에 올라온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기독교 사제들과 독실한 신자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포크는 서서히 이탈리아 반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카데나' 수저통을 들고 방문하는 이탈리아 귀족들
당시 이탈리아 귀족들은 손에 음식을 묻히지 않고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포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는 위생 차원으로 발전하게 된다. 14세기가 되어 카데나 라는 수저통이 상층 계급 사이에서 유행한다. 이들은 다른 집을 방문할 때 카데나를 들고 갔는데 이 안에는 개인용 스푼과 포크가 들어 있었다.
카트린느와 앙리의 결혼을 그린 그림
이런 유행은 카트린 드 메디치가 앙리 2세와 결혼하면서 프랑스로 전파되었다(오늘날의 프랑스 요리는 카트린 드 메디치와 앙리 2세의 결혼에서 시작됐다. 이전까지 프랑스 요리는 영국이나 독일 요리처럼 배만 채우면 된다는 기준이었으나, 이 결혼 이후 이탈리아의 화려한 요리와 식사 예절이 프랑스로 넘어가 오늘날의 프랑스 요리로 발전하게 된다).
14세기 포크를 싫어한 종교인들
이런 도도한 ‘포크의 흐름’ 앞에서도 종교는 애초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연의 포크’인 손가락을 이미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사악한 쇳덩어리를 신성한 식탁에 올려놓는 건 신에 대한 모독이다!”
아직까지도 종교인들은 포크에 대한 알레르기적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우스워 보이지만 당시 종교인들의 이런 반응 덕분에 포크는 등장하고 나서도 수백 년 간 제대로 기를 펴지 못했다.
르네상스 시대 포크, 문화로 자리 잡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은 어쩔 수 없었다.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이탈리아에서는 포크가 하나의 유행을 넘어 문화로 자리잡게 된다. 외국의 여행자들도 처음에는 낯선 거부감에 몸을 움츠렸지만(포크는 기독교 국가에서 사용할 수 없는 악마의 도구란 관념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었다) 곧 포크를 사용한 식습관에 호감을 표하게 된다(많은 여행자들이 이탈리아 여행 도중 개인 포크를 구입해 본국으로 돌아갔다).
다양한 포크들
그러나 이때까지도 포크는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식기였다. 아직까지도 많은 유럽인들은 태초 이래로 계속 써왔던 식기인 나이프와 손가락에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귀족들은 포크를 악세사리로 자랑하다
포크가 식사 도구로 인류 역사의 전면에 당당하게 등장한 것은 프랑스 대혁명 때부터다. 이미 그 이전부터 프랑스의 귀부인들은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이 앙증맞은 삼지창에 대해 호감을 보였고, 이탈리아에서 그랬듯이 과일을 먹는 데 포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뒤이어 케이크 포크까지 사용하면서 귀족 사회에서 어느 정도 안착하게 된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사치의 일종이었다. 당시 포크는 신분의 상징이었다.
11세기에 이탈리아에서 조각된 상아
귀족들은 상아로 포크를 만들어 썼다.
그때의 귀족들은 상아나 금, 은으로 포크를 만들고 여기에 각종 보석과 진주 등으로 치장을 해 자랑하듯 서로의 포크를 비교했다. 이쯤대면 식사 도구가 아니라 액세서리라 해도 될 정도였다.
포크의 갈래 수가 두 개에서 세 개로 된 이유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대혁명이 터지게 된다. 이제 프랑스의 신분 구조 자체가 흔들리게 된 상황. 귀족들은 외국으로 망명을 떠나거나 프랑스 국내에 남아 단두대의 공포와 싸워야 했다. 귀족이란 신분 자체를 잃어버리게 된 그들은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 악착같이 포크를 사용했다.
이때까지 포크는 사치품이었기에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재미있는 사실은 프랑스 혁명 와중에 포크의 갈래 수가 두 개에서 세 개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는 프랑스 대혁명의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귀족들은 이에 반발해 부득불 네 갈래 포크를 만들어 사용했다).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포크 사용 대중화
일반 대중이 쉽게 포크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은 19세기 산업혁명 시절이 되면서부터다. 모차르트 시절의 음악과 베토벤 시절의 음악 사조가 변한 것과 같은 이유에서였다(철 생산이 비약적으로 늘어나면서 피아노 생산원가가 떨어지자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는 좀 더 대중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스파게티용 포크
산업혁명으로 철의 생산이 증가하면서 일반 대중들도 쉽게 포크를 접할 수 있게 됐다. 물론 이때까지도 귀족 출신들은 온갖 사치를 다 부린 포크를 사용했지만 어쨌든 포크는 당당하게 식탁의 한쪽을 차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반대와 핍박, 인류사의 질곡을 넘어선 포크
레스토랑이나 경양식집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포크(굳이 음식점을 안 가도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지만 이 포크가 우리의 식탁까지 올라오기 위해서는 무수한 반대와 핍박, 인류사의 질곡을 넘어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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