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린 날의 서정
한 번쯤 이런 날을 기다렸다. 대지에도 나뭇가지에도 묵직한 눈이 쌓이고 저 나무 꼭대기 가지마다 눈송이가 방울방울 맺혀있다. 온 천지가 순백의 세계다. 오늘 눈길을 나선 보람이 있다. 이 길이 이토록 아름다운 길이였든가. 익숙한 곳인데 낯설기만 하다. 설산을 지나 눈꽃 터널 계곡 길로 들어서니 추위 속에서 쌓인 눈과 얼음 사이로 계곡물은 졸졸 흐르고 있었다. 모처럼 몇 년 만의 추위와 눈 폭탄이라고 한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담청색으로 맑고 깨끗하다. 하마터면 눈을 의심할 뻔했다. 담청색 하늘가에 동그랗고 빨간 탁구공 같은 것들이 흩뿌려 있었다. 나풀나풀 눈을 뒤집어쓰고 의아한 듯 나를 바라본다. 나 또한 그것들을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봤다.
하얀 공간에 빨간색 점들. “저게 뭐지?” 빨간색 물감을 흩뿌려 놓은 듯, 눈 속에 핀 꽃은, 가을꽃 만발한 감나무의 빨강 감들이 공중에 떠다니고 있었다. 눈이 부시다. 지금 이 순간 자연의 의미는 백색의 공간에 감청색 하늘과 빨간색의 공들이 전부다. “아! 겨울왕국이었구나.” 나는 겨울왕국을 무척 동경했다. 북해도의 설국을 그리워했다. 한계령의 설국도 겨울만 되면 늘 꿈꾸었다.
언젠가 한계령 꼭대기서 눈 속에 파묻혀 한 일 주일쯤 갇혀 지내봤으면 내 한이 풀어질까 싶었다. 한계령 사람들은 눈과의 사투를 벌이지만 남쪽 지방에서는 눈이 귀한 손님이 되기도 한다. 언젠가 눈 많이 온 날 내장사에 가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설레고 좋았는데 그 설경이 기억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정말 다르다. 눈은 쌓이고 추위는 강했지만 바람이 불지 않아 포근한 겨울 날씨다. 혹한의 추위가 사나흘 지나면 새해가 올 것이다.
북해도는 못가도 무주의 향적봉이 얼마나 그리웠던가. 상상 속에서 곤돌라를 타고 끝없이 설원을 바라볼 수 있기를 무척 고대했다. 내 의지로는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그랬는데 이 순간 눈 내린 날의 오후에 내가 자주 찾는 연리지 계곡 길이, 저 멀리 모악산 정상까지 온통 하얗게 눈 덮인 설산이라니. 연리지 길을 푹푹 눈을 밟으며 오른다. 예전 같으면 연리지도 만날 수 있겠지만 어느 해 태풍에 한쪽 날개가 처참하게 부러져 이젠 연리지라 할 수도 없다. 오늘처럼 폭설이 내린 날은 부러져 버린 가지가 더 처참하게 내려앉지나 않았는지. 사십 년 옆 지기와 소나무 연리지 보러 손잡고 가노라면 마음이 좀 야릇하기도 했다. 이제는 다만 이 길을 연리지 길이라 부른다. 석양빛의 긴 꼬리가 드리우니 서러운 저녁을 마주해야지 싶다.
눈이 쌓이니 세상은 더욱 적요하다. 짹짹 어디선가 새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발자국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그 많은 참새떼는 어디서 이 추위를 견뎌내고 모이를 쪼고 있을까. 눈 덮인 측백나무 아래에 웅크리고 있지나 않은지. 사방을 둘러보아도 흔적이 없다. 그저 백색의 대지다. 까~악 소리도 지척에서 들리는데 까치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늘 푸르던 송백은 티끌도 보이지 않으며, 푸른빛 한줄기 내비치지 아니한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낙엽이 수북이 덮여 있을 때 꼬물거리던 것들은 땅속 깊이 파고들었겠지. 눈 쌓인 숲속의 풍경은 고요~하기만 하다.
내 소싯적에 눈 내린 날의 아픈 기억이 있었다. 초등학교 몇 학년 때였던가. 그때 우리 마을은 학교가 참 멀었다. 지름길이 있었는데 그 길은 비가 오면 널따란 하천에 물이 흐르고, 종아리를 걷어 올리고 징검다리를 지나면 높다란 둑이 있었다. 겨울이면 높다란 눈 덮인 둑길을 책보를 허리에 둘러매고 미끄럼을 타며 오르내렸다.
하루는 눈이 많이 내려 신나게 미끄럼을 탈 요량으로 친구들과 누가 더 잘 내려가나 시합을 걸었다. 그런데, 어떻게 내려왔는지 엎드려 일어서지를 못하고 있었다. 친구가 붙잡아 일어났는데 코피가 터져 선혈이 낭자했다. 너무 놀라고 아팠지만 울지도 못했다. 그 후엔 눈이 쌓이거나, 장마 때 거대한 물이 강처럼 흐르면 집으로 오는 먼 길을 돌아서 다녔다.
눈만 오면 그때 그 일이 그리움 되어 강물처럼 흐른다. 아쉬움만 커지고 꼭 한번 다시 도전해보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해마다 겨울이면 눈은 매양 내리고 눈길을 푹푹 빠지며 걷는 것을 좋아한다. 기억 저 너머에 친구들이 오종종 모여 손짓한다. 길옆에 나무들은 서로 종이 다른 나무였는데 온통 눈으로 덮여 있으니 모두가 동질의 하양 나무다. 석양이 내리비친 토담 옆에 서성이며 사르락 사르락 노을빛으로 저무는 눈길을 걷는다.
첫댓글
잠자리에 들기 전 창문을 열고 밖을 보니 아파트가 온통 하얀 눈밭이네요. 오늘 밤 읽기에 딱 좋은 글입니다.
어릴 적엔 아팠던 코피도,
지금 눈 속에 있는 감도 하얀 설국을 배경으로 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