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향 나주(御鄕 羅州)"
조선왕조의 고향인 전주의 수식어는 "풍패지향(豊沛之鄕)"이라고 한다. 이는 한고조 유방의 고향이 '풍읍 패현(豊邑 沛縣)'이라서 이후에 건국군주의 고향을 일컫는 관용어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 동네에서만 개국 군주가 3명이나 나왔다. 바로 한고조 유방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창업군주 조조, 그리고 명태조 주원장이며 특히 유방이 세운 한나라를 조조가 멸망시킨 것은 유명하다.
그런데 고려 2대 임금인 혜종대왕의 탄향지인 나주는 '임금님이 나신 고을'이라는 의미로 "어향나주(御鄕羅州)" 라고 부른다. 즉, 조선에는 '전주'가 있으면 고려에는 '나주'가 있었다. 특히 나주를 중요시한 고려는 도성인 개성 다음으로 나주에 많은 군사력을 배치했었다.
고려 건국 시에 나주를 누가 점령했는가에 대해서 논란이 있다. 사서의 기록에는 태조 왕건이 점령하였다고 하나 전남 강진 무위사에 세워진 '선각대사비'(先覺大師碑)는 '912년 대왕(궁예)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금성(나주)을 공격해 점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비석은 고려의 건국을 예언한 인물인 선각대사 형미의 행적을 기록해 둔 비석으로 궁예와 왕건이 죽은 후인 946년(정종 1년)에 건립됐다. 즉, 고려 초에 세워진 것으로 기록의 신뢰도가 놓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오월동주(吳越同舟)와 혜종대왕의 모후 나주 오씨
월오동주 (吳越同舟)를 한자대로 해석하면 '오(吳)나라 사람과 월(越)나라 사람이 같은 배를 타다'인데 이는 서로 원수지간이라도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서로 협력한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이는 오나라와 월나라 사람은 본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을 담고 있는 사자성어이다.
춘추 말기에 연이어 패자로서 춘추 오패의 반열에 올라 춘추시대의 대미를 장식한 오(吳)나라와 월(越)나라는 이웃하고 있으면서도 원수처럼 서로 으르렁대며 싸우는 사이였다. 오나라의 왕 합려(闔閭)는 《손자병법(孫子兵法)》의 저자인 손무(孫武)와 충신 오자서(伍子胥)의 보필을 받아 당시의 제후국들을 굴복시키고 춘추 오패의 반열에 올랐다. 합려 19년(BC496), 합려는 월나라를 쳤다가 월왕 구천(勾踐)에게 패하고, 손가락에 입은 상처가 원인이 되어 그만 죽고 말았다. 합려는 태자 부차(夫差)에게 “월나라를 절대로 잊지 말라.(必毋忘越)”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2년 후 월왕 구천은 부차가 밤낮으로 병사들을 훈련시킨다는 말을 듣고 대부 범려(范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부차를 선제공격했다가 도리어 대패하고 말았다. 부차는 승세를 몰아 월나라의 수도 회계(會稽)를 포위했다. 구천은 패잔병 5,000여 명을 데리고 회계산(會稽山) 꼭대기에 피신하여, 백비(伯嚭)에게 후한 예물을 바치고 강화를 요청했다. 나라를 바치고 오나라의 신하가 되겠다는 것이 강화의 조건이었다. 부차는 오자서의 반대를 묵살하고 백비의 계책에 따라 월나라와 강화한 후, 구천을 오나라에 불러 자기의 노예가 되도록 했다. 이를 ‘회계지치(會稽之恥)’, 즉 회계의 치욕이라 한다. 구천은 나라의 정치를 대신들에게 맡기고 범려와 함께 오나라에 가서 3년 동안 부차의 마구간에서 말을 먹이는 일을 했으며, 부차가 병이 들자 부차의 변까지 맛보아 가면서 몸소 간호하기도 했다.
부차는 충신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구천을 석방했다. 월나라로 돌아온 구천은 몸을 수고롭게 하고 속을 태우면서, 자리 옆에 쓸개를 놓아두고 앉거나 누우면 쓸개를 바라보았으며 먹거나 마실 때 또한 쓸개를 맛보며 ‘너는 회계의 치욕을 잊었느냐?’고 스스로에게 말하면서 설욕의 강한 의지를 불태웠다. 구천은 손수 밭 갈고 부인은 길쌈을 하였으며, 고기를 먹지 않고 현인을 찾고 빈객을 우대하면서 백성들과 고락을 같이했다. 문종(文種)에게는 나라 살림을 다스리게 하고, 범려에게는 군대 양성을 맡겼다. 구천은 10년 계획을 세워 생산을 장려하고 물자를 모으며 전쟁 준비를 했다. 오왕 부차가 제(齊)나라를 공격하면서 월나라에 참전을 요청하자, 군사를 파견하여 오왕을 도와 그의 환심을 사 두기도 했다. 그런 후에 구천은 오나라의 내부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먼저 뇌물을 좋아하는 오나라의 대부 백비를 매수했으며, 부차에게 미인 서시(西施)를 바쳤다.오나라에는 간신배가 득세하였으며, 자주 충간을 하던 오자서는 왕의 역린(逆鱗)을 건드린 결과로 왕의 의심을 사게 된 데다, 백비의 모함까지 받아 왕이 내린 칼을 받고 자결했다. 오자서가 죽은 다음 해, 부차는 제나라를 공격했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그 후 2년 뒤에 오왕 부차가 정예부대를 이끌고 북정을 하고, 황지(黃池)에서 제후들과 회맹하여 한창 그의 위엄을 보이고 있는 동안, 구천은 오나라가 비어 있는 틈을 타 오나라에 침입하여 태자를 잡아 죽였다. 제후들과 회맹하는 자리에서 급보를 전해 들은 오왕은 모든 사항을 극비에 부치고, 서둘러 회맹을 마친 다음 즉시 월나라에 사자를 보내 강화를 요청했다. 구천은 범려와 의논 끝에 강화를 수락하기로 했다. 북정을 하러 갔던 오나라의 정예부대가 돌아와 일전을 벌일 경우 승패를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강화를 맺은 후, 월나라는 계속 군비를 확충했다. 하지만 오나라는 잦은 북정으로 군사들이 피로했기 때문에 휴식이 필요했으며, 그동안 많은 전쟁을 겪느라 병력의 손실도 적지 않았다. 4년 후, 월나라는 다시 군대를 일으켜 오나라를 공격하여 도처에서 오나라의 군대를 격파하고, 3년에 걸쳐 오나라의 수도를 포위했다. 부차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 구천에게 항복했다. 월왕 구천은 오왕 부차를 가엾게 여겨 항복을 받아들이려 했다. “회계의 일은 하늘이 오나라에게 월나라를 준 것인데 오나라가 받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오나라를 월나라에게 주는 것이니 하늘의 뜻을 거역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범려가 반대하고 나섰다. 부차는 자살했다. 구천은 백비를 잡아 죽였다. 백비가 그 임금에게 충성하지 못하고 다른 나라로부터 많은 뇌물을 받으며 내통하였기 때문이었다. 월나라는 오나라를 평정하고 그 여세를 몰아 북진하여 회하(淮河)를 건너 서주(徐州)에서 제후들과 회맹하고, 춘추시대 최후의 패자가 되었다.
이로써 오나라는 나라가 없어졌고 나라 잃은 오나라의 백성들은 보트피풀이 되어서 동아세아의 해안가나 섬 등지로 흩어졌다.
전국시대에 초나라가 오나라를 남쪽으로 밀어냄으로써 이 때는 월나라 백성들이 보트피플이 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런 역사적 전개에서 오나라, 월나라 사람들이 한 배를 타는 일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었는지 '오월동주'라는 말의 근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동아세아 각지로 흩어진 오나라 사람들은 해상을 통하여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해상무역을 장악하여 해상왕국을 건설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여 동아세아의 대표적 해상정치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고려를 건국한 해상세력도 바로 이와 같은 역사와 닿아 있는 것이다.
고려의 건국군주인 혜종대왕의 어머니는 '오씨'였고 중국 삼국시대 강남의 오나라 건국군주 손권의 어머니도 오씨였다. 고대사서를 보면 일본사람들은 오나라의 시조인 '오태백'의 후손이라고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춘추시대에 많은 오나라 사람들이 일본열도로 건너갔음을 시사하는 기록인 것이다. - 오태백 참조 ( 오 태백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 우리나라의 오씨의 대표적 가문인 나주오씨와 해주오씨도 연안을 끼고 있는 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다. 오씨는 세계에 1억이 넘는데 오씨의 세거지는 연안에 위치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3. 혜종대왕 사당 1,000 여 년 간 나주벌을 지키다.
고려시대까지는 중앙집권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호족들은 저마다 사병을 두어 반독립적 지방정치 세력을 형성했다. 한국이 실질적인 중앙집권국가가 된 것은 조선 태종대왕이 '사병혁파'를 관철시킨 이후인 것이다.
참고글을 옮긴다.
우리역사넷 교과서 용어 해설 : 5도
고려 시기 민사적인 광역 지방 행정 구역으로, 북쪽 변경의 양계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을 양광도(楊廣道), 경상도(慶尙道), 전라도(全羅道), 서해도(西海道), 교주도(交州道)의 5도로 나누었다. 북쪽의 양계가 군사적 성격이 강화된 특수 행정 구역이라면, 남쪽의 5도는 일반적인 성격의 행정 구역이었다.
그러나 5도는 현재 광역 행정 구역으로서의 도(道)와 달리 상시적으로 지방관이 거주하며 관리하는 지역이 아니었다. 지방관을 통한 상시적인 통치는 전국 주요 지역에 주목(州牧)⋅도호부(都護府) 등의 계수관(界首官)과 주현(主縣)을 두고, 이들을 통해 주위의 속군현을 통할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그에 비해 5도에는 중앙에서 안찰사(按察使)를 파견하여, 이들이 도 내 여러 주군을 순회하며 감찰하는 방식으로 지방을 통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도제(道制)는 성종(成宗, 재위 981~997)이 전국을 10개 도로 나눈 것에서 시작되었으나, 이후 몇 차례 변화를 거쳐 전국을 경기(수도 개경(開京)과 그 주변 지역)와 5도 양계로 나누는 체제로 정착되었다. 도의 명칭과 수, 해당 지역 등은 이후에도 약간의 변동이 있었다. 12세기 초 예종(睿宗, 재위 1105∼1122) 무렵에는 전에 일부 지역에만 보냈던 안찰사를 모든 도에 파견하여 5도를 관장하는 안찰사 제도가 정립되었다. 그러나 안찰사는 상시 전담 행정 기구도 갖추지 못한 채 각 주현의 수령을 감찰하는 제한된 역할을 담당하였다.
고려 말에 이르면 도에서 관할하는 지역이 고정되고, 안찰사의 성격도 감찰보다는 행정적 요소가 강화되었다. 도제는 이후 조선 태종(太宗, 재위 1400∼1418) 대에 8도 관찰사제가 성립되면서 최고 행정 구역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고려의 중앙집권이 불완전하여 현종대왕의 나주 몽진 때에도 지방세력과 지방관의 괴롭힘을 당하는 고초를 겪는 일이 있었다.
간단하게 잘 정리된 글이 있어 옮긴다.
황해도 개경에서 왕비, 환관, 궁녀들을 데리고 호위군 50며명과 나주로 출발 (나주는 2대왕 혜종의 외가인 고려왕실에 우호적인 지역이었음. 어려운 시기 받아줄 안전한 장소로 판단
1. 경기도 연천에 도착하자 군졸 무리들에게 습격당함 (그만큼 아직 중앙집권이나 왕권이 확립되지 않은 시기)
2. 간신히 도망쳐 다시 경기도 양주에 도착하자 양주 호족들이 현종을 습격, 환관과 궁녀들 다 흩어짐
3. 왕비 포함 호종하던 무리들이 몇십명 안남은 상황 경기도 광주에 도착했을때 수도인 개경 함락 소식 들려옴
4. 수원쯤 도착했을때는 호위무관이 불과 6명 정도 밖에 안남았다고 함
5. 간신히 충남 공주에 도착. 공주 절도사 김은부가 현종을 맞이해 극진히 대접함. 훗날 김은부의 딸들이 현종의 왕비가 됨
6. 공주에서 익산에 도착했을때 현종을 호위하던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지채문이 이를 진압
7. 전주에 도착했을때 전주 절도사 조용겸이 현종을 포위함. 지채문이 포위를 뚫고 간신히 나주에 도착함
8. 나주는 앞서 말한 것처럼 왕건의 둘째부인이자 왕건의 맏아들 2대왕 혜종의 외가. 현종은 나주에서 후히 대접 받으며 전쟁이 끝날때까지 안전하게 머무름
나주는 혜종대왕 이후 1.000 여 년 간 혜종대왕 어진( 御眞)을 모신 사당이 있어서 지역의 백성들은 고려왕실에 우호적이었으며 조선시대에도 고려에 대한 향수가 강한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고려말 원나라가 쳐들어왔을 때 삼별초가 나주 인근의 진도에 용장성을 쌓고 승화후 온 폐하를 세워서 황제국을 선포하여 세계제국 건설의 꿈을 펼친 것도 이러한 역사적 연유가 작용한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전라도(全羅道)"로 정명(定名)한 임금은 현종대왕으로 전해지는데 '라주(羅州)'를 넣어서 정명한 것은 현종대왕이 나주로 몽진하여 그곳 백성들의 보호로 다시 나라를 재건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양계(兩界)의 행정구역의 설치로 5도 양계(5道 兩界)가 완성된 것은 현종대왕 3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5도(道)의 설치에 대해서는 현존 사서의 기록이 부재하여 어느 임금에 의해서 획정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다고 한다.
나주 벌을 1,000 여 년간 지켜왔던 혜종대왕 사당은 일제가 훼철했는데 아직 복원의 소식이 없다. 민족정기를 바로하는 의미에서도 혜종대왕 사당이 본래의 자리에 다시 복원되기를 희망해 본다...
나주 4대문, 완사천 답사 - YouT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