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모님이 돌아가셨다.
어제 처남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약 두 주 전에 뵜을 때만 해도 비교적 건강하셨는데 며칠 전 두번째 넘어지셨고 고통을 덜기 위해 맞은 진통제 등의 영향으로 호흡 곤란과 저혈압으로 혼수 상태이다가 돌아가셨단다.
장모님을 처음 만난 날은 내가 아내를 따라 이민을 왔던 83년 12월 30일 JFK 공항에서 였다. 그날은 유난히 추웠고 그날도 일요일이었는지 아주 썰렁하고 지저분했던 길가에 영어로 써있는 간판들과 길게 늘어져있던 덩치가 남산만한 차들이 떠오른다.
이민초기에 간신히 구한 야채가게에서 육일을 새벽부터 저녁까지 일하고 일요일이면 늦잠을 자고 일어나 갈 곳을 생각하다가 종종 약 두 블락 떨어진 곳에 있던 장모님 아파트로 놀러가곤 했다. 우리가 살던 아파트보다 훨씬 고급스럽고 깨끗한 편이던 그 아파트의 따뜻하던 온기와 냄새가 지금도 느껴진다. 장모님의 대표음식은 비빔국수였다. 약간 불어진 면, 고명으로 올라가 있던 김치와 멸치 그리고 적당한 고추장이 잘 어우러져 아주 맛있게 먹곤 하였다.
90년 대 초에 아이들을 키울 때는 우리는 North Carolina로 이사를 해서 밤일을 할 때 항상 밤에 두 딸 아이를 봐줄 사람을 구하는 것이 몹시 어려웠다. 한동안 교회 여자 청년이 집으로 와서 아이들을 재우고 돌보곤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작은아이가 가위로 혼자 장난을 하다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른 일이 있고나서 그 청년은 갑자기 아이들 돌보는 일을 그만 두었다.
당시에 나는 삼기통이고 에어컨도 없으며 수동식이었던 대하쑤라는 차를 운전했는데 그 차를 몰고 뉴욕까지 약 열 한 시간을 운전해서 장모님을 모시러 올라간 기억이 있다. 밤에 도착하여 다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던 나에게 장모님은 정성껏 밥을 차려주었다. 밥만 먹고 장모님의 짐을 싣고 하이웨이를 눈을 부릅뜨고 내려오던 생각이 어제 같다.
장모님은 나중에 우리가 사는 집에서 약 두 시간 거리로 이사를 하셔서 아내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로 방문을 했다. 천성이 쾌활하고 낙천적이어서 어디를 가던지 장모님의 주위에는 그를 좋아하고 돕는 사람들이 항상 있었다. 그리고 장모는 자신의 건강을 지나칠만큼 신경을 써서 몸에 좋다는 것은 돈을 아끼지 않고 구해서 사용을 했다.
우리 아이들은 장모님의 사랑을 잘 기억한다. 그리고 무슨 일인지 나중에 기억이 쇠퇴하고 나서도 내 이름은 꼭 기억을 했다가 아무개 내 막내 사위, 최고야 최고 하셨다. 심지어는 아내의 사촌의 남편이 방문을 와도 내 이름을 대며 착각을 할 정도였다.
두 주 전에 큰아이 집에서 만났을 때 아내는 장모님의 머리를 단정하게 손질해드렸다. 집에서 가져간 목 받침대를 두르고 얌전하게 이발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리고 이발을 하고 나서 한층 예뻐진 모습에 나와 아내는 아주 기분이 좋았다.
장모님을 모시고 다시며 나누었던 그 이야기들 그 따뜻하고 재미있던 차 안의 온도가 느껴진다. 언젠가 버지니아 비치를 지나 해저터널을 지나고 델라웨어주에 반도를 올라갈 때 장모님이 지금 우리가 말을 보러 가냐고 물었다. 갑자기 말은 왜냐고 물었더니 내가 아내에게 말보로를 어디서 살까하는 이야기를 듣고 그렇게 생각하셨다고 해서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난다.
전주 북문에 이진사의 막내딸이 그녀의 어머니셨고 아버지가 평양신학을 다녔던 것을 아주 자랑스러워 하셨다.
아 옛날 분들의 그 선하고 따뜻함이 못내 그립다.
장모님은 젊은 시절에는 피아노를 동네 아이들에게 가르치셨고 뉴욕에서는 아이들을 돌보면서 항상 용돈을 벌었다. 돌아가실 때에도 본인의 장례비용은 미리 준비를 해서 아들에게 맡기셨다.
장모님의 피아노 소리와 노래 소리가 내 영혼의 우물같이 은은히 울린다.
장모님과 함께 했던 나의 삶이 즐겁고 행복했다.
그와 함께 살았던 약 사 년의 세월은 어쩌면 내 인생의 황금기였는지도 모른다.
장모님을 생각하면 아주 작은 체구에 인자한 눈 그리고 비교적 크고 높은 목소리에 자신의 삶을 바람같이 무게감이 전혀 없이 산 듯 느껴진다.
마지막 만남을 예상을 하셨는지 장모님의 마지막 모습은 내 옆에 앉아 무언가 골똘히 생각을 하시는 모습이다.
장모님에게도 우리와 함께 살았던 그 몇 년이 가장 안정되고 행복하지 않았을까.
나의 한구석이 허물어지는 느낌이다.
사랑하는 사람 또 하나가 그리움의 영역으로 자리를 옮긴다.
장모님의 자주 치던 곡이 ‘사랑의 기쁨’이다.
사랑의 기쁨은 어느덧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만 영원히 남았네
011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