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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젖은 몸에서 김이 난다 】해설
무너져 내린 농촌 들녘에 서서
신은립 시인의 원고를 받고 가장 먼저 눈에 띈 글은 맨 앞장 약력 부분에 ‘밀양시 청도면에서 흑돼지를 키움’이라고 쓴 글이었다. ‘흑돼지 키우는 것을 아주 당당하게 드러내는 시인의 마음은 어떨까?’ 나는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그렇구나, 삶이 곧 시구나’ 싶었다.
“시인은 종이 위에 시를 쓰지 않는다. 풀잎과 강물, 벽과 거리,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 내면의 미궁 등 삶의 수많은 지면 위에 쓴다. 이 구체적이면서 추상적인 삶의 지면에 시인은 자신의 기억과 운명과 깨달음을 정성스레 쓴다. 마치 경전에 글자 하나를 새길 때마다 부처님께 절을 올렸다는 옛 목공의 마음과 다를 것이 없다.”
며칠 전, 김수이 문학평론가가 쓴 글을 읽으면서 신은립 시인을 떠올렸다. 남자도 아닌 여자의 몸으로 이른 새벽부터 밤늦도록, 때론 며칠 밤을 새워가며 흑돼지를 키우면서 쓴 시는 옛 목공의 마음과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이 서예학원 데려다 주고
시를 읽는다
시립 도서관 창문 너머
남천강 쉼없이 흐르고
-<금싸라기 같은 시간>전문
죽은 새끼 돼지들
땅 파고 묻었더니
저 하늘에서
또록또록
어미 젖 빠는 눈방울
-<별>전문
일은 갈수록 무거워
허리가 휘는 촌살림
돼지를 팔아도
고생만 남아
허리 팔 다리 안 아픈 곳이 없다
날개가 부러진 채 잠든 남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불을 끈다
거름 같은 어둠에 푹 빠지며
나는 아프다
-<몸살> 부분
신은립 시인의 첫 시집 『늦게 핀 꽃』에 실린 시를 다시 읽어보니 ‘삶이 곧 시였구나’ 싶은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시와 삶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일하는 사람이 알아듣지도 못하도록 억지 말장난이나 늘어놓은 엉터리 시가 아니라, 삶이 곧 시가 되어 땀 냄새가 철 철 솟아나는 살아있는 시를 읽으며 가슴이 뜨거워졌다.
시인은 첫 시집 후기에 이렇게 썼다. “첫 시집을 엮으며 하고픈 말이 너무 많습니다. 농업 경영인의 아내로 세 아이의 어머니로 농촌에 살면서 차마 눈감을 수 없었던 순간 순간들...... 소값 파동, 돼지값 파동, IMF, 구제역......” 시인의 시를 읽은 사람은 줄임표 뒤에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쌓여있는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책은 그것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맑아지고 힘이 솟아난다고 한다. 신은립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원고를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힘이 솟아났다. 왜냐하면 일하는 사람이 시를 썼기 때문이다. 여태 일하지 않는 사람이 억지로 일하는 사람 흉내를 내어가며 쓴 시를 읽으면서, 구역질이 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흑돼지를 키우며 시를 쓴 여성 시인은 신은립 시인뿐일 것이다. 이런 시인이이 땅에 살아있다는 것은 자랑스런 일이다. 시가 조금 서툴고 매끄럽지 않아도 좋다. 시 속에 사랑과 노동이 살아 꿈틀거리면 진짜 시가 되는 것이다. 시를 쓴 사람과 시를 읽는 사람이 마음을 나누면서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뻐하면서, 세상을 이끌어 가면 되지 않겠는가.
몸 무거워진 나뭇가지 휘청 휘어
사람의 지붕 위로 내려왔다
철 이른 불볕더위 피해
낮게 엎드려 책을 읽다가
낮게 엎드린 나뭇가지에
이마를 부딪친다
부딪친 이마에서 연초록 잎새 돋아나
찰찰 흐르는 개울물 소리 읽는다
-<소만 지나 비 그친 뒤> 전문
이 시는 한 줄 한 줄 읽는 사람에 따라 느낌을 달리 주는 시다. 시인의 눈으로 보면 더욱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시를 쓸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고, 독자의 눈으로 보면 사람과 자연이 함께 그린 아름다운 그림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냥 손으로 쉽게 쓴 시가 아닐 것이다. 자연 속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이라야 “낮게 엎드려 책을 읽다가 / 낮게 엎드린 나뭇가지에 / 이마를 부딪”칠수 있기 때문이다.
“흰 눈발 사이로 한없이 걸으면 / 눈싸움하던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까 / 반찬거리 손에 쥔 중년의 아낙이 / 괜스레 멍해지던 날”(<눈은 내리고>) 사람은 누구나 지난 것을 그리워하는가 보다. 가끔 사람들과 서러운 세상 이야기 나누다 보면 남의 서러움에 자기 서러움까지 몇 배로 쌓여 “알싸한 소주 한 잔에 담배 한 개비 배우고 싶”(<포장마차에서>)은 날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에게는 보통 사람보다 그런 유혹이 수백 배 수천배 많을 것이다. 남의 아픔이 곧 내 아픔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늘 마음이 아프고 외롭고 쓸쓸한 것이다. 시인은 메마른 세상과 부대끼며 속이 곪아터진 사람이다. 그래서 시를 쓰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사람이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 밝아도
어두운 안방
귀가 어두워졌는지
웅웅 울리도록 텔레비전 틀어놓고 잠든
남편 넓은 등에 번진
희고 푸른곰팡이
-<아이들 자라 집 떠나고> 전문
“웅웅 울리도록 텔레비전 틀어놓고 잠든 / 남편 넓은 등에 번진 / 희고 푸른곰팡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시인의 고된 노동이 남편 등에 나타난 것일까? 아니면 “아이들 자라 집 떠나고” 없는데 “어두운 안방”에서 홀로 잠든 남편이 애처로워 보였을까? 짧은 시인데, 읽으면 읽을수록 가슴이 아프다. 이 시를 읽는 동안에 어느새 내 등에 “희고 푸른곰팡이” 냄새가 난다.
시외버스터미널 앞 골목
큰길에 가득 찬 차들의 빵빵거림 사이로
무명 바지저고리 입은 엿장수
이박사 메들리 틀어놓고
겨울하늘 쨍강쨍강 잘라
좌판에 얹어놓았다
무릎 깁고 어깨 기운 옷
엉덩이 흔드는 서툰 몸놀림
입술을 빨갛게 칠한 촌스러움 모두 정겹다
오일장 꽉 메운 사람들
물건을 사거나 거스름돈 주고받으며
반짝이는 눈망울
나도 눈망울 반짝이며
허리와 엉덩이 흔든다 신난다
-<밀양 장> 전문
우리는 이렇게 천천히 늙어 가는 것이다. 함께 늙어 가면서 이웃들이 눈에 들어오고 조금씩여유도 생기는 것이다. 늙는다는 것은 때론 아름답기도 하지만 “포크레인 삽날이 움직일 때마다 / 풀썩 풀썩 주저앉”(<옛 집 헐며>)는 옛 집 같이 허무할 때도 있다. 그렇다고 늙는다는 것을 두려워해야할 필요는 없다. 사람은 누구나 늙고 병들어 흙으로 돌아갈 테니까.
“돼지막 일에 지쳐 몽땅 엎어버리고 싶은 날이면” 아버지 일찍 여의고 공단 삼교대 근무를 서른 해 넘도록 하고 있는 복이 언니 생각하면서 참아내는 신은립 시인을 만나면 내가 부끄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밀양문학회 모임 끝나 깊은 밤
옷 갈아입기 바쁘게
일터에 간다
어미돼지 사료 챙겨 주고
아픈 곳은 없나 바라보다
개밥 챙긴다
어미 밥그릇에 붙어
꼬리 살랑살랑 흔드는 이쁜 것
몸은 고달파도
초롱초롱 맑은 별빛이
집 떠나 공부하는
두 딸아이 눈망울 같은 밤
-<모임 끝나면> 전문
길고 고된 노동에 지쳐 등만 닿으면 쓰러질 것 같은데 “초롱초롱 맑은 별빛”을 쳐다보면서 “집 떠나 공부하는 / 두 딸아이 눈망울 같”다는 생각을 하는 신은립 시인은 시인이기 전에 성모 마리아 같은 자상한 어머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 밥상 앞에 앉은 아들을 보며 교복을 다리”는 부지런한 어머니다. “이 뜨거운 옷 입고 / 어서 학교 가 시험 잘 치고 오”라고 꿈을 심어주는 어머니다.
두 딸의 어머니이면서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시인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아침밥 안치는데전화가 온다 / 어디 아픈 데 없나 / 어젯밤에 니가 아파 걱정하는 꿈 꿨다”(<어머니>)는 천사 같은 어머니가 시인의 가슴에 살아 있어 시를 쓰는지 모른다. 사랑을 받아보지 않았거나, 사람을 사랑하고 싶어 미치지 않는 사람은 이런 시를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갑자기 전기가 끊어졌다
마루에 아이들과 이불 펴고 누웠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 멈춘 마루를
아이들 숨소리가 채우고
전깃불 나간 천장엔
창문 틈으로 들어온 달빛이 밝다
-<사이> 전문
누구나 그렇듯이 신은립 시인도 나이가 들수록 ‘삶의 깊이’가 깊어간다. 고된 노동 속에서도 자연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성숙해진 것이다. 나이 쉰 살이면 많은 나이도 아니지만 적은 나이도 아니기 때문이다.
돼지막에 모닥불 피우고
새끼 돼지 받는다
(...)
갓 낳은 새끼들, 어미젖 물려놓고
마당에 쌓인 눈 뽀드득 밟으며
문 열고 들어가면 아이들 웃음이 있고
따뜻한 아랫목이 있고
-<설날 밤> 부분
근 일주일 잠 제대로 못 자고
새끼 받으랴 갓난 새끼 돌보랴
이리 뛰고 저리 뛰니
속 쓰리고 어지럽고 허리 아파
어미야, 제발 오늘은 잠 좀 자자 하면
밤 한 시에 떡하니 양수 터져요
-<어느 변강쇠가> 부분
놀라면 구석으로 우당탕 몰리는 돼지들
살금살금 한 바퀴 돌아보고
이슬이 발목에 감기는 잔디밭을 지나
분만실에 가면
뿌리들이 땅 속 깊은 물을 끌어 올려
가지를 키우듯
어미돼지들, 새끼 불러 젖먹이는 소리
꿀꿀꿀꿀
-<고법농장 아침> 부분
땀 흘리며 일하는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쓸 수 없는 시들이다. 그리고 신은립 시인이 아니면 어느 누구도 쓸 수 없는 시들이다. 남의 흉내나 내는 시인은 죽었다가 수천 번을 태어나도 이런 시를 쓸 수가 없다. 그래서 신은립 시인은 시를 써야 하는 것이다.
세상은 일하는 사람의 것이다. 그래서 일하는 사람이 세상을 이끌어가야 한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밥도 먹어서는 안 되며 시를 써서도 안 된다. 사람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 죄를 적게 지을 수 있으며, 일을 하면서 시를 써야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시를 쓸 수 있다. 신은립 시인의 시집이 세상에 나올 수밖에 없는 까닭은 일하는 사람이 시를 썼기 때문이다. 일하는 사람은 가슴 속에 얼마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겠는가.
첫 번째 시집이나 다름없이 두 번째 시집에도 식구와 이웃들 이야기가 많다. 그리고 나무 한 그루, 벌레 한 마리, 바람 한 줄기, 흙 한 줌, 강아지 한 마리도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귀한 목숨이라는 걸 스스로 깨달으며 쓴 시들이 많다.
어미, 젖 주물러 눕히고
어린 생명 젖 먹는 모습 보며
죽은 새끼들에게 미안하다
누구 덕에
따스한 밥 먹고
누구 덕에 시를 쓸까?
-<누구 덕에> 부분
어미들에게 깔려 죽은 돼지새끼를 바라보며 “누구 덕에 / 따스한 밥 먹고 / 누구 덕에 시를 쓸까” 생각하는 시인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또 얼마나 슬프고 아름다우냐.
얼마 전 혼자 살던 할머니 먼 길 떠나고
한 집 건너 빈 집
또 빈 집
새벽 안개 걷지 못한 고샅길 한참 걷다
집에 들어오면
나무 한 그루 키우고 싶다
목련나무나 동백나무 한 그루
창문에 걸어두고 말벗 삼고 싶다
나무라도 한 그루 이웃으로 맞아
니 오늘은 뭐했노
난 오늘 이런 일 했다
봄비가 왔으니
곧 감자 심어도 되겠제
어깨 토닥이며 살아야겠다
-<이웃> 전문
사람이 하는 일 가운데 가장 소중한 일은 자연과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사람은 태어나서 다시 돌아가는 날까지 자연과 사람한테 죄를 적게 짓고 살기 위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 인생은 단 한 번 왔다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농부는 자연과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다. 다른 직업보다 더 소중한 까닭은 농부가 없으면 어느 누구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농업과 농촌을 살리는 일은 농촌 사람들만 해야 할 일이 아니다. 나라와 종교와 모든 단체와 백성이 함께 나서야 하는 것이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10억 남짓 인구가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다. 그래서 강대국들은 식량을 무기로 삼기 위해 오래 전부터 준비했다고 한다. 21세기는 핵전쟁보다 더 무서운 게 식량전쟁이다. 식량전쟁을 미리 막고 아름다운 우리 땅과 겨레를 살리기 위해서는 가족농(소농) 중심으로 소박한 삶을 살려는 사람이 늘어나야 한다. 다음 세대에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그것이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들만 남아 있는 농촌, 젊은이들이 없는 우리 농촌은 이제 희망이 없다. 국가의 정원인 농촌이 사라지면 우리 모두의 미래가 사라지는 것인데도....... 절망뿐인 우리 농촌에 신은립 시인이 우뚝 서 있다. 땅을 버리지 못하고 한해 내내 비바람 견디며 나무처럼 서 있다.
신은립 시인은 책에서보다 숲에서 더 많은 것을 발견할 줄 알고 나무들과 돌들을 스승으로모시고 사는 슬기로운 사람이다.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지위에 있든, 또는 삶에서 무엇을 이루었든, 마음이 평화로운 시인이다. 나도 신은립 시인처럼 “나무 한 그루 키우고 싶다 / 목련나무나 동백나무 한 그루 / 창문에 걸어두고 말벗 삼고 싶다” 봄날, 무너져 내린 농촌 들녘에 서서.......
목차
제1부
소만 지나 비 그친 뒤
홍수
다시 해운대
눈은 내리고
포장마차에서
아이들 자라 집 떠나고
암탉
어미가 된다는 것
눈에 밟히는
부고가 와도 놀라지 않을
미안해
여행용 티슈
한겨울 빨간 꽃이
제2부
영남루 다리 위에서
나무가 있는 풍경
내일동 뒷골목에서
밀양 장날
은행나무 아래서
옛 집 헐며
오뉴월 고무장화
병아리를 옮기고
복이 언니
안내원
남명댁
남명댁 휴가
가을 편지
묵언정진
넌 밤에 뭐하니
우포늪
제3부
경대 산수유꽃
딸
밥상에 앉아
모임 끝나면
아들 녀석 끌어안고
가난한 밥상
잔소리를 랩음악으로
아들아
누굴 닮았나
아버지
어머니
후사포리 61번지
말싸움
부부는
사이
제4부
새끼 돼지 받는 밤
설날 밤
어느 변강쇠가
고법농장 아침
저물 녘
누구 덕에
강아지 젖떼기
개밥그릇
누구에게 물어볼까
잃어버린 시
밥맛
아무도 모르리
젖뗀 돼지
돼지막에 톱밥 까는 날
제5부
기가 차서
원추리
만나는 사람마다
청도 아이들
흔들고 싶다
어떤 광고
파업이 부럽다
입춘
설날
이웃
편하다
오월 아침
밭에서
무너져 내린 농촌 들녘에 서서 / 해설 서정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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