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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할렐루야. 오늘도 거룩한 주의 날, 주의 성전에 나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의 삶, 가정, 일터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
어느만큼 사랑하시는가? 독생자 아들을 이 땅에 보내주시어서 모든 희생과 헌신을 우리에게 보여주실 만큼 사랑하셨다. 여러분 그 사랑을 충분히 받으시고 그 사랑이 우리의 삶 가운데 그대로 흘러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우리 이 시간 그 사랑을 담아서 양 옆에 계신 앞뒤 예에 계신 분들하고 인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애굽 땅에 9번째 재앙을 보내기로 결정하시고 모세에게 하늘을 향해서 손을 내밀라 명령하심으로 인하여 애굽 온 땅에 흑암 재앙을 보내셨습니다. 흑암 재앙으로 인해서 애굽 사람들은 3일이라는 기간 동안 한 사람도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죠.
얼마나 어두웠는지 대낮에도 서로가 서로를 분별할 수 없을, 그러니까 전혀 알아볼 수 없을 만큼의 호감이었다는 거예요. 마치 죽음을 암시하는 듯한 이 어둠은 바로와 애굽 백성들에게 극한 공포심을 가져다 주었을 것입니다.
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주하고 있던 고센 땅에는 어둠을 능히 밝힐 수 있는 생명과 같은 찬란한 빛이 그곳에 비치고 있었다라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흑암이 깊던 세상에 ‘빛이 있으라’ 하나님께서 선포하심으로 세상이 창조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또한 어두운 이 땅 가운데 생명의 빛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심으로 인하여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빛으로 오신 주님이 있으심을 믿으십니까?
저와 여러분들이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우리 안에 이 어둠이 가져다 주는 불안, 염려, 근심, 걱정은 다 떠나보내고 참 위로와 평안과 안식이 있는 어두운 세상 가운데서도 빛으로 살아갈 수 있는 거룩한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결국 두려움에 떨던 바로는 이 어둠에서 벗어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있었기에 모세를 불러 마지막 협상을 진행하게 되죠.
하지만 바로는 극심한 공포 속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협상을 제시하는데 그 협상의 첫마디는요 ‘가라’는 것입니다. ‘가서 하나님을 섬겨라 하지만 양과 소는 두고 가라’ 그렇게 말을 하면서 또 한 번의 제안을 두게 된 것이죠.
바로가 왜 그 제안을 했을까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어요. 왜 그렇게 마지막까지 제안을 해야 했을까?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기 싫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왜 보내기 싫었다고요? 그들의 노동력을 보낸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엄청난 손해를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루라도 쉬게 할 수 없는 것 그것이 원래 목적이었겠죠
그것도 있었지만 이제는 재앙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9번에 걸쳐서 임했던 재앙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남겨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는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더라도 그들이 가지고 있던 가축이라도 잡아놔야 이 나라를 다시 한 번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그러한 요소가 되지 않을까? 어쩌면 이 바로 왕에게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가축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이러한 상황을 모세도 알았겠죠 왜요? 여러 가지 전염병으로 가축도 다 죽었잖아요. 우박도 내리고 또 메뚜기떼도 긁고 지나가서 먹을 것마저 다 사라졌잖아요. 이러한 상황 가운데 모두 다 떠나보낸다는 것은 바로의 입장에서는 게 쉬운 것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제 여러분이 모세의 자리에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사실 완강했던 바로가 많은 것을 포기한 채 마지막 제안으로 가축만 두고 가라 그렇게 제안을 한 거예요. 그리고 지금까지의 마음이 수시로 변했던 것을 보았잖아요.
보내겠다 아니 가지 마라 보내겠다 아니 가지 마라.
이러한 상황들을 계속해서 목격한 상황 9번이라는 재앙을 통해서 아마 바로의 마음 가운데는 굉장한 독이 올랐을 거예요.
그러한 모습들이 보여지는 그러한 상황에서 양과 소를 두고 떠나라는 제안을 했을 때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모든 정황과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제가 생각해 본 결과로는 내가 가지고 있는 양대 소대 중에 일부를 좀 주고 타협을 하기 위해서 제안을 했잖아요. 다 두고 가라 했으니까 협상이라는 거는 나도 카드를 내야 될 거 아니에요 ‘그럼 요만큼만 줄 테니 이거 가지고 만족하시고 보내주십시오.’라고 타협해도 충분히 괜찮지 않았을까? 왜 이러다가 또 이 바로가 돌변을 해서 아예 못 가게 하면 어떡하지라는 그런 마음이 들 수 있을 것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적당히 달래서 그의 마음도 조금 흡족하게 하고 그러고 떠나면 되겠다 그러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모세는 10장 26절을 통해서 보면 우리에게 있는 가축 중에 여호와께 드릴 재물이 있다 그리고 그 재물 중에 어떤 것을 여호와께 드려야 할지 우리는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가지고 다 데리고 가야 한다는 그러한 이유를 제시하면서 단 한 마리의 가축도 남겨둘 수 없습니다는 말로 그 제안을 철저하게 거절했다는 거예요.
오히려 모세는요 바로에게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러 가는데 당신들이 가지고 있던 남아 있는 양이나 소를 함께 보내서 제사 드리라고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제시할 정도였습니다.
어쩌면 너무나도 당당하고 정당한 모세의 주장 앞에 바로는 더 이상 반론을 펼칠 수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는 결코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보낼 수가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이제는 그의 마음을 굳게 잠그기로 결심을 하고 결국 바로는 모세에게 절교를 선언하면서 최종 협상 결렬을 선언합니다.
우리 10장 28절 말씀인데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바로가 모세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떠나가고 스스로 삼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말라. 내가 내 얼굴을 보는 날에는 죽이리라.
흑암 중에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있던 바로는 이제 광명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모세를 보지 않겠다고 함으로써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는 선택을 하고 만 것입니다. 이제 모세는 그가 원하는 대로 될 것이다라고 확신에 선언을 해주게 됩니다. 29절 말씀인데요. 같이 읽어보실까요?
모세가 이르되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내가 다시는 당신의 얼굴을 보지 아니하리다.
여러분 이 구절을 통해서 다시는 당신의 얼굴을 보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 앞에 좀 집중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 속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죠 그것은 이제 더 이상 기회는 없다. 이제 더 이상 기회는 없다는 여러분 2014년도에 한국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다큐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그 영화를 기억하십니까? 저도 그 영화를 본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 89세 소녀 감성 강계열 할머니와 98세 로맨스 조병만 할아버지의 이별을 아름답게 묘사해 준 그런 영화였죠.
‘그 강을 건너지 마오’라는 말 속에 강을 건너면 돌아오지 못한다는 그러한 의미가 담겨져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다는 말이 있잖아요. 이는 이전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음을 비유적으로 하는 말이죠. 쉽게 좀 표현하자면 이런 것 ‘내가 살을 빼기로 결심을 했어.’ 결단을 하면 진짜 진짜 살을 빼리라. 그리고 그날 저녁에 스스로 야식을 주문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과 같은데 습관적으로 내가 저녁에 야식 먹던 걸 끊어내지 못하면 내가 아무리 결단하고 결심해도 여러분 그것은 할 수가 없는 것이죠.
이처럼 바로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바로의 이 선택에 좀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바로의 이 선택은 갑작스러운 선택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죠. 갈수록 악해진 결과 그 끝에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바로에게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으로 모세를 통해 바로에게 말씀하셨고 재앙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깨닫기를 소망하는 기회를 주셨다는 거예요.
하지만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기회라는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기회라는 것은 끝이 있기 마련이죠. 또한 끝이 있어야 그것이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회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끝이 있기 때문에 말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기회 있잖아요. 3 세 번이야. 3 세 번 기회에요. 세 번으로 끝난다는 것이죠. 오늘 본문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도 그것을 표현해 주는 말이 있는데 이제 한 가지 재앙이라는 것을 통해서 이야기합니다. 더 이상 기회가 없다라는 거예요. 1절 말씀 같이 읽어보실까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제 한 가지 재앙을 바로와 애굽에 내린 후에야 그가 너희를 여기서 내보내리라. 그가 너희를 내보낼 때에는 여기서 반드시 다 쫓아내리니.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의 기회입니다. 모두에게 그 기회를 주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누구나 다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원하셨기 때문이죠. 그래서 베드로후서 3장 9절은 말씀합니다. 우리 같이 읽어보실까요?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지만 오늘 말씀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들이 꼭 기억해야 합니다. 기회를 주시지만 그 기회의 끝은 반드시 온다. 그래서 이어지는 베드로후서 3장 10절 말씀 앞선 그 말씀을 주신 후에 바로 이어서 하는 말이 뭔지 아십니까?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온다.
주의 날은 무엇입니까? 심판의 날임과 동시에 구원의 날이죠. 그런데 문제는 도둑같이 온다는 것입니다.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시간 방심하고 있을 그때 깨어 있지 못한 시간 아직 멀었다고 할 그때에 별안간 찾아오는 것이 바로 마지막 주님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머뭇거리고 있다가 주님 다시 오시는 그때에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지금이라는 사실 지금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이죠. 지금 결단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을 보장해 주는 거 고린도후서 6장 2절은 말씀합니다. 우리 같이 신앙의 고백으로 같이 읽어보십니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할렐루야 지금이에 은혜받을 때가 지금이고 구원의 날이 지금이라는 사실입니다. 호세야 10장 12절도 말씀합니다. 이것도 같이 읽어보십니다.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내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은혜라는 것은 내 일에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지금 오늘 이 시간 은혜받는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도요 내일 드리면 되지 하나님 내가 이거 다 마치고 나서 그다음에 예배드리겠습니다. 내일이 보장돼 있지 않다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예배드리는 것이 지극히 옳은 것이다. 용서도 사랑도 복음을 전하는 것도 지금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지 지금 결단한다고 해서 그것을 다 시행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단이 있어야 우리의 삶의 조그마한 변화라는 것이 일어나게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지난주에 말씀을 들으면서 다니엘이 뜻을 정해서 생활을 했잖아요. 10일짜리 뜻이라고 했어요. 그것을 듣고 여러분들은 어떤 결단을 하셨습니까? 나름대로 자그마한 결단이라도 해야겠다 그래 이걸 해봐야지 이거 해서 이만큼 늘려봐야지 이거 하고 또 이만큼 늘려봐야지 저는 그런 결단을 했어요.
여러분 그리고 그 결단 속에서 한 주 동안 어떠한 삶을 사셨나요? 바라고 소망하는 것은 저와 여러분들이 들은 말씀으로 인해서 작은 결단으로 시작해 그것이 확장되고 넓어지는 그러한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혹시 말씀을 듣고 그 어떤 결단도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면 여러분 나의 신앙에 대해서 반드시 점검하셔야 돼요. 왜냐하면 말씀은 그저 듣고 깨닫기 위함이 아니라 순종하기 위한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순종은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이라는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결단적 선택이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서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택적 삶을 살아가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1절에 기록된 이제 한 가지 재앙이라는 이 표현 속에는 이중적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바로와 애굽인들에게는 마지막을 알리는 표현이죠.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어떤 의미일까요? 새로운 시작의 표현입니다. 즉 하나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진정한 삶의 시작이 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새로운 출발을 하기 위해서 무엇 무엇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주면서 소망을 갖게 하고 희망 가운데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 오늘 본문 가운데 기록되어져 있는데 첫 번째는요 한 가지 재앙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하겠다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낼 것임을 예고해 줍니다. 1절 말씀 같이 읽어보십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제 한 가지 재앙을 바로와 애굽에 내린 후에야 그가 너희를 여기서 내보내리라. 그가 너희를 내보낼 때에는 여기서 반드시 다 쫓아내리니
여기에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있죠. 그들을 내보낼 것이다. 반드시 다 쫓아내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 9번의 재앙이 있었지만 바로의 계속되는 겨절 속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이 어땠을까요? 여러분들이 그 현장에 있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뭔가 이루어질 것 같은데 안 돼 될 것 같은데 안 되고 자꾸 문제가 생기고 협상이 결렬되고 떠나야 되는데 떠날 수 없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바로는 계속해서 말을 바꿉니다. 보내지 않는 그 바로의 모습 점점 더 강팍해지는 그의 모습 그 모습을 볼 때 어떻겠어요? 불안해질 수밖에 없죠. 점점 더 불안해지는 거죠. 왜냐하면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요. 처음 모세가 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주시오라고 했을 때 바로가 뭐라고 이야기했습니까? 게을러서 그런다 이들이 게을러서 하나님께 제사드리러 간다고 한다. 그러니 저들에게 벽돌을 봤는데 집을 주지 말고 똑같은 양을 찍어내도록 그렇게 명령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더 힘들고 고된 노역이 모세가 옴으로 시작이 되었던 것이죠.
그러니 계속되는 변화 속에서 나가지 못하는 이들의 모습의 삶의 현장 속에는 도대체 언제라는 그 마음과 함께 불안한 마음이 여전히 있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런 말이 있잖아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갈 때까지 가는 게 아니에요. 가야만 가는 거죠. 가기 전에 바로가 또다시 어떤 일을 어떻게 벌일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실제 바로는요 9번째 재앙 이후에 모세를 향해서 어떻게 이야기합니까? 내 눈앞에서 사라져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라 나타나면 죽어 그렇게 협박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그들의 상황 가운데는 아마도 불안함이 있었을 거예요. 그런 불안함만 있었을까요?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여전히 떠나지 못하는 그들의 상황을 즉시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의심은 하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이 약속의 말씀을 주셨는데 왜 아직까지 아니 한 세네 번 하고 보내주시면 되지 왜 아직까지 보내지 않습니까? 하나님 역사하는 거 맞습니까? 약간의 의심이 들 수도 있는 것이죠.
그러한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한 가지 재앙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반드시 보낼 것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강조해서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죠. 그들의 마음 가운데 확신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이 더뎌진다고 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나하고 시간이 안 맞을 뿐이죠. 내가 원하는 것은 조금 빠를 뿐이지 하나님의 약속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 때로는 힘들고 고단해도 낙심과 절망의 길을 걷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약속하신 구원은 때가 찬 시가 반드시 이루어진다. 할렐루야.
여러분 이 사실을 확신하며 사는 것이 신앙의 여정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하나님을 기대하시고 또한 약속을 이루어 가신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며 사시는 우리 거룩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번째, 세 번째 말씀이 이어지는데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작업 같아요. 저는 그렇게 말씀을 보면서 느꼈습니다. 두 번째는 애굽인들에게서 은근 패물을 구하라 명령하십니다. 2절 말씀 같이 읽어보실까요?
백성에게 말하여 사람들에게 각기 이웃에게 은근 패물을 구하게 하라 하시더니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애굽 사람들에게 은금회물을 구하라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셨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서 출애굽기 3장 말씀을 통해서 약속해 주셨죠 3장 21절, 22절 말씀 읽어보실까요?
내가 애굽 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할지라. 너희가 나갈 때에 빈손으로 가지 아니하리니 여인들은 모두 그 이웃 사람과 및 자기 집에 거주하는 여인에게 은패물과 은패물과 의복을 구하여 너희의 자녀를 꾸미라. 너희는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리라.
이렇게 하나님은 앞서 약속해 주셨다. 그러니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는 거예요. 너희 반드시 나갈 건데 내가 앞서 이야기했던 은근 패물 그거 달라고 해요. 그럼 그들이 자연스럽게 너에게 줄 거야.
뿐만 아니라 때가 찬 시간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졌다는 거예요. 그 결과를 한번 보실까요? 12장 35절, 36절 출애굽의 현장입니다. 우리 같이 읽어보십시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근 패물과 의복을 구함에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심으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주하였더라.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으로부터 왜 이러한 은혜를 받게 하셨을까요? 몇 가지 이유가 있겠죠 가장 먼저 승리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고대 전쟁에서 승리하면 전리품을 취하게 되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과 바로와 싸워 승리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 전리품, 은근, 패물을 가짐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승리에 동참하고 기뻐하라라는 것을 그들이 느끼고 맛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요 그들이요 여러분 부당한 노동 착취를 당했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상해 주시는 거예요. 여러분 시편 기자는 128편 2절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내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내가 복되고 형통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수고의 대가를 누리며 사는 것 즉 수고한 대로 먹는 기쁨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부어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수고를 다 갚아주셨다는 거 이처럼 승리와 보상의 의미도 있지만 또 다른 목적이 있다라는 거예요. 그것은 훗날에 성막을 만드는 데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죠.
35장 5절에 보면 이제 성막을 만드는 시점이 다가옵니다. 거기에 말씀을 한번 보실까요? 같이 읽습니다.
너희의 소유 중에서 너희는 여호와께 드릴 것을 택하되 마음에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릴지니
고통과 은과 놋과 여기에서 너희의 소유는 이들이 어디에서 얻은 겁니까? 출애굽에서 광야 여정 속에서 얻은 겁니까? 아니죠. 출애굽할 당시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연스럽게 얻게 하신 것 그것이 바로 그들이 갖고 있는 은폐물이었다라는 거예요. 즉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애굽 사람에게 은혜를 입게 하셨다. 즉 세상 사람들로 인해서 은혜를 입게 하신 것이죠. 그 소유 중에 여호와께 드릴 것을 선택하고 마음이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여호와께 드려라 그렇게 말씀합니다.
이 구절 속에 성경적 물질관에 대한 두 가지 원칙을 분명하게 제시해 줍니다. 먼저 우리로 하여금 얻게 하신 소유에는 반드시 여호와께 드릴 것이 있다라는 거예요. 그리고 여호와께 드릴 때에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에는 정말 열심히 노동하고 노동의 대가를 못 받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노동의 대가를 받았다는 것은 그 대가 속에 여호와께 드릴 것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은혜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라고 인정한다면 인색함으로 드리지 마시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이라는 그래서 고린도후서 9장 7절은 말씀합니다.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오.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억지로 해서 내는 건 하나님이 별로 기뻐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께 하나님께 드릴 게 있다면 기쁨으로 준비해서 드려야 된다는 거예요. 저는 개인적으로 지난주에 다른 달보다 십일조를 많이 할 수 있는 환경을 하나님께서 열어주셨어요. 작년에 비행기 보상금 그거 신청을 제가 못했어요. 그래서 작년 이맘때에 여기저기서 보상금 받았다는 얘기를 들을 때 나는 못 받았는데 왜 못 받았지? 신청을 안 했으니까 못 받은 거예요. 그래서 마음이 좀 상하더라고요. 남들 다 봤는데 내가 못 받으니까 왜 그걸 신청을 안 해서 받을 수 있는 것도 못 받았을까 제 자신이 밉더라고요.
그런데 알아보니까 신청이 지났는데 신청을 못한 사람 1년의 유예기간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내년에 2월달에 신청하면 그걸 받을 수 있대요. 그래서 올해 2월이 되자마자 신청을 해서 작년 거하고 같이 신청을 한 거예요. 결국 올해 여러분 갑자기 통장에 금액이 들어왔는데 두 배로 들어온 거예요. 얼마나 기쁘던지
마음 한켠에 여러분 십일조를 이렇게 떼면서 야 보상금 더 많이 주면 더 할 텐데 그런 마음이 들더라니까요. 사실 피해 보상을 받는 것 하나님의 은혜죠. 왜냐하면 내가 이곳에 잘 살다가 갑자기 소음이 시작된 게 아니거든요. 제가 이사 오기 전부터 이미 소음은 여기에 있었고 저는 이곳에 이사 온 사람 중에 하나예요. 내가 마땅히 감수하며 살아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소음으로 피해를 입어 보상을 해주겠다고 하니 저한텐 감사한 일이죠. 세상 사람들은 그것이 마땅하다 여길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렇지 않아요. 왜? 이미 있던 자리에 제가 왔기 때문에 제가 대학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를 하고서 수고하고 그 대가를 못 받은 적이 있어요. 제가 너무 선했는데 제가 좀 바보 같았나 그 생각도 들기도 하지만 그냥 그렇게 인정해 주었어요.
그래서 그때 생각했던 것 중에 하나가 수고했다고 다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받을 수 있구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사건이 있음으로는 하나님의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상황이 참 감사한 것이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죠.
수고의 대가도요 여러분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다 하나님의 것인데 수고의 대가로 너 아홉 써라라고 주시면 그거 얼마나 감사한 일이겠어요
그런데 반대로 내가 수고해서 버려드린 내 것인데 그중에 하나를 하나님께 드린다고 생각하면 너무나 어려운 거예요. 제가 과거 다른 교회에 있을 때 어떤 성도님께서 하신 이야기가 있어요. 로또를 하는데 이 로또가 잘 되면 목사님 제가 교회한테 세워드릴게 저한테 아주 자신 있게 해야 됩니다.
왜 그런 줄 알아요? 그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되는 거잖아요. 내가 또 써서 하면 당첨이 됩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거 아니에요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면 여러분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 당첨돼 보십시오. 어떻게 할 것 같아요? 이제 그게 내 것이 되는 거예요. 그때부터는 하나님과 상관이 없어집니다. 나에게 들어온 것은 내 것이 되어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운다고 못합니다. 그게 현실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절대로 로또를 당첨되지 않도록 여러분들에게 일하실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왜? 내 시장 다 까먹는 게 되거든요. 여러분 십일조를 들을 때 내 것 중 하나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면 정말 어렵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아홉을 선물받아 살아간다라고 생각하면 하나를 남겨두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거 여러분 그래서 선물을 많이 받으면 많이 받을수록 십일조를 구별하는 즐거움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거 나한테 이렇게 선물을 많이 주셨네 그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죠. 오히려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여 즐겁게 드릴 수 있는 그러한 성숙한 신앙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이러한 물질관이 좀 반듯하여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물질로 인해서 시험 들지도 마시고 내 신앙을 점점 잘 세워갈 수 있는 그러한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높여주셨다는 거예요. 3절 말씀 보실까요? 3절 읽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으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고 또 그 사람 모세는 애굽 땅에 있는 바로의 신하와 백성의 눈에 아주 위대하게 보였더라.
여러분 모세 자신이 바로의 신하와 백성의 눈에 보이기 위해서, 높아지기 위해서 그렇게 보여주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한 것이 없습니다. 물론 과거 왕자의 자리에 있을 때는 자신의 높은 지위를 이용해서 살았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는 거죠.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을 뿐인데 그 어떤 욕망이 작동한 것도 아닌데 하나님은 모세를 높여주셨다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모세를 높여주셨을까요? 이 또한 약속의 성취라는 거예요. 출애굽기 7장 1절 말씀 같이 읽어보십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같이 되게 하셨은 즉 내 형 아로는 내 대언자가 되려
여러분 애굽 사람들에게는 바로가 신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바로에게 하나님처럼 되게 해주겠다 그렇게 약속해 주셨다는 겁 그리고 신실하신 하나님은 그 약속을 이루심으로 바로의 신하들과 백성들의 눈에 아주 위대한 인물로 여겨졌다라고. 오늘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스스로 아무리 높아지려고 해도 그 높아짐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면 하나님께서 높여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원래 하나님의 본체이셨죠 하나님과 동등된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포기하고 자기를 위한 종의 형체를 가져서 사람과 같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를 낮추시는데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순종에 더 깊은 복종의 자리까지 가신 거예요.
그 결과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빌립보서 2장 9절에서 11절 같이 읽어보십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신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할렐루야. 예수님은 지극히 낮아지셨지만 하나님은 가장 높은 곳에 세우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시편 기자가 고백합니다. 시편 18편 33절
나의 발을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이 은혜가 저와 여러분 가운데 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면 하나님께서 자연스럽게 세상 사람들로부터 높아지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시다. 오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겠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세요.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신 약속은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 저에게 개인적으로 목회하면서 주신 약속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교회하고 맞물려 있는 것일 거예요. 저는 그 약속을 신뢰하고 아직도 기도. 기도합니다.
여러분은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 말씀을 붙잡고 신뢰함으로 나아가십시오. 하나님께서 때가 찬 시간 반드시 이루시고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 가운데 선포되어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