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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
우리 땅 우리 길
한국땅이름학회 배우리 명예회장
(국토교통부 국가지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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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201 KBS1 통일로 가는 길 타박타박 북녘 기행 두만강1
두만강의 이름과 역사
국토교통부 국가지명위원
한국땅이름학회 명예회장 배우리
yurim.chang@gmail.com
1. 이제부턴 두만강 이야기를 해 볼 텐데요. 두만강, 얼마나 긴 강인가요?
중국과 러시아와의 국경을 따라 흐른다. 길이 610㎞로,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긴 강이다.
양강도 삼지연군 2,088m 지점 북동 계곡에서 발원하여 양강도 대홍단군, 함경북도 연사군, 무산군, 회령시, 온성군, 새별군, 은덕군을 지나 선봉군 우암리 동남쪽에서 동해로 흘러든다.
두만강의 물은 유역 일대의 기온이 낮은 관계로 겨울에 두텁게 언다. 얼어붙는 기간은 중류에서 130일 정도로서 북한 다른 하천들에 비하여 길다.
두만강 유역은 산림이 울창하며 서두수, 연면수, 성천수를 비롯한 일부 지류들의 상류부에 저수지가 건설됨으로써 다른 하천들에 비하여 유량의 변화가 심하지 않으며 큰 수량도 적다.
2. 이 두만강에는 어떤 지류들이 있나요?
상류로부터 석을수(石乙水), 연면수(延面水), 성천수(城川水), 보을천(甫乙川), 회령천(會寧川), 오룡천(五龍川), 아오지천(阿吾地川)과 하이란강[海蘭江], 훈춘강[琿春江] 등의 지류가 곳곳에서 합류된다. 두만강 지류 중 그 길이가 5㎞ 이상 되는 것은 약 150여 개, 그 가운데 50~100㎞ 되는 하천은 6개이다.
3. 전부터 두만강이라고만 불러 왔나요? 중국측이나 러시아측에서 부르는 이름은 좀 다를 것 같기도 한데...
두만강은 우리가 부르는 이름과 중국이나 러시아에서 부르는 이름이 약간 다르다.
우리는 두만강(豆滿江)이라 하지만 중국에서 도문강(圖們江)(투먼장), 러시아어에선 투만나야(Туманная0, 만주어: 로는 투먼울라)(Tumenula)라 한다.
두만강이라는 명칭의 유래를 《한청문감 漢淸文鑑》 만주지명고(滿洲地名考)에서 언급하고는 있으나 명확하지 않다. 고려강(高麗江), 도문강(圖們江), 토문강(土們江), 통문강(統們江), 도문강(徒門江)으로 표기된 바도 있으나, 있으나 이들은 대부분 중국측의 문헌이고, 한국의 문헌에는 거의 두만강으로 기록되어 있다.
도문수, 토문강, 통문수, 토문색감, 토목강에서의 도문, 토문, 통문, 토목은 즈믄(千)을 한자로 적을 때 생긴 표기변종으로 보기도 한다.
만주지명고에 의하면 두만강이 새가 많이 모여드는 골짜기라는 뜻의 도문색금(圖們色禽)에서 색금을 뗀 도문이라는 여진어(女眞語) 자구(字句)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도문, 토문, 동문의 호칭에서 '문'(們)자 표기는 백두산 정계비 부근에 '문(門) 모양의 토벽'의 유무와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한청문감》의 동문유해(同文類解)에서는 원나라 때 지방 관제에 만호(萬戶), 천호(千戶)라는 관직명이 있었는데, 여진어로 만호를 두맨이라 발음하며 이를 한자어로 표기한 것이 두만강이라고 한다.
뒤에 백두산 정계비에 쓰여 있는 동위토문(東爲土門)이라는 자구 속의 토문이 두만강이라고 청나라측이 강변함으로써 오늘날의 간도 지역을 중국의 영역으로 하고 있다.
상류에서는 서두수(西頭水)라고 불리며 대홍단군과 무산군의 경계에서 지류인 석을수와 합류한 뒤에는 두만강이라 불린다.
만주인들이 두만강을 고려강이라 부르는 것은 고려와 만주의 국경을 이루는 강이기에 붙여진 명칭이다.
『대동수경』에는 만수, 분계하, 어윤하, 보려천, 수빈강, 아야고강, 애호강, 도문수, 토문강, 통문수, 토문색감, 토목강 등으로 불리어 왔다고 하였다..
만수는 여러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강, 분계하는 조선과 중국과의 국경을 이루는 강, 어윤하는 물고기가 많고 물이 맑은 강이라는 뜻이다.
4. 두만강이나 함경도 일대는 주로 여진족들의 무대가 아니었나요?
두만강은 중국, 소련과 국경을 이루고 있어 역사상 매우 중요한 강이었다.
고려시대까지는 여진족이 주로 살던 곳이어서 그들의 영향이 문화와 취락 경관에서 아직도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들을 몰아내고 개척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병영취락(兵營聚落)이나 개척취락들이 형성되었다.
함경도 지방에 기근이 들 때마다 수많은 우리 선조들은 이 강을 넘어 간도 지방으로 이주하였고 이들로 인하여 청나라와 국경 문제가 야기되기도 하였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일제의 학정을 피하여 수많은 우리 민족들이 이 강을 건넜다.
이러한 민족의 역사를 안고 있는 두만강 유역은 비록 자연적 조건은 불리하지만 거의 무진장으로 펼쳐진 미개척의 삼림자원과 지하자원이 있어 무한한 개발 가능의 잠재력을 가진 미래의 땅이다.
5. 두만강 유역은 산지도 많고 기후도 그리 좋지 않았을 텐데, 우리 겨레는 언제부터 여기서 살아 왔을까요?
-선사시대
두만강은 선사시대 이래로 한반도 문화 형성의 통로 역할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구석기인의 생활 흔적이 조사, 보고된 곳은 두만강 연안의 동관진(潼關鎭)이었다.
그 뒤 1963년에 함경북도 화대 장덕리의 홍적세유적, 웅기 굴포리 서포항 조개더미유적 등이 보고된 사실로 미루어, 구석기 문화의 한 흐름은 두만강을 건너 최초로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두만강은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에도 역시 문화 유입 경로 구실을 하였다. 만주 및 연해주 지역의 신석기, 청동기 문화가 두만강의 지류 및 내륙으로 확산되어 갔다. 신석기 유적으로 웅기 송평동(松坪洞), 청호리(淸湖里), 농포동(農圃洞) 등의 빗살무늬토기유적을 들 수 있다.
또 회령의 오동(五洞)을 비롯하여 나진 초도(草島), 무산 호곡동(虎谷洞) 등에서 청동기시대 유물 및 주거지가 조사되었다. 이처럼 두만강 연안을 중심으로 신석기, 청동기 문화는 흔히 동북 지역의 문화로 분류되며 종종 기타 지역의 문화와 그 특성을 달리한다.
-삼국시대 전후
역사 시대에 들어오면서 두만강은 부여, 옥저, 고구려, 발해의 영역이 되었다. 발해 시대에는 동경용원부(東京龍源府)와 남해부(南海府)의 경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6. 고려나 조산시대에 들어와서도 이 지역은 국경의 변화가 심했겠죠?
-고려시대
발해 멸망 후에는 고려의 영향 아래 있던 여진인들이 이 강 언저리에 살았다. 그러나 대체로 조선 초기까지는 야인들의 할거지였다. 금나라 초기에는 영가(盈歌)가 여진인들을 규합하는 과정에서 두만강의 하류 지역을 경략(經略: 공격하여 점령한 지방을 다스리는 것)하였다.
금나라 말기에는 포선만노(浦鮮萬奴)가 하류 지역을 지배하였다. 원나라 때에는 합란부(哈蘭府) 수달로(水達路)의 땅이었다. 고려 말기 및 조선 초기의 적극적인 북방 경략으로 두만강 주변의 야인들이 통제를 받게 되었다.
-조선시대
세종대인 15세기 전반에 회령, 종성, 경흥, 온성, 경원 등의 진을 새로이 설치하였으며, 특히 이 지역은 조선 왕가의 발상지로서 중시되었다.
이에 대하여 명나라는 1403년(태종 5) 혼춘과 송화강의 지류인 토문강(土門江)에 건주위(建州衛)를 설치하여 여진을 통제하고자 하였다. 1412년에는 건주좌위를 토문강 지역에 설치하였는데, 이러한 건주위, 건주좌위, 건주우위는 건주여진의 핵심이었다. 그 밖에도 두만강 바깥에는 우량하(兀良哈), 오도리(斡都里) 등의 야인들이 있어, 빈번하게 국경을 넘나들며 문제를 일으켰다.
16세기말에는 강 입구에 있는 녹둔도(鹿屯島)에 국경 수비를 위한 주둔군의 식량을 마련하기 위하여 둔전을 설치하였으며, 이순신(李舜臣)이 조산만호(造山萬戶)로 있을 때 그의 부대가 이 둔전을 관할하면서 침입하여 온 여진을 격퇴하였다. 17세기 중기 이후 강 북쪽 100∼200리에 이르는 지대는 조선과 청나라의 완충지대로 설정되었다.
1644년(인조 22) 청나라가 산해관(山海關)을 넘은 뒤, 자기 조상의 발상지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흥경 이동, 이통주 이남, 도문강(圖門江) 이북 지역을 봉금지구(封禁地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의 농민들이 경작지를 찾아 이곳으로 다수 이주하게 되면서, 양국의 국경 분쟁을 불러 일으켰다. 1712년(숙종 38)에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고 토문강을 국경으로 삼았다.
19세기 말에 이 토문강을 어느 강으로 해석해야 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조선과 청나라가 다투게 되었다. 한편, 1860년(철종 11) 러시아는 북경조약(北京條約)을 체결, 우수리강 이동의 연해주 700리의 땅을 청나라로부터 할양받았다.
150208 KBS1 통일로 가는 길 타박타박 북녘 기행 두만강2
두만강의 섬들과 영토 문제
국토교통부 국가지명위원
한국땅이름학회 명예회장 배우리
yurim.chang@gmail.com
1. 압록강에는 많은 섬들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두만강에는 어떤 섬들이 있을까요?
-딴섬
함경북도 나선시 조산리의 동쪽 두만강 가운데에 외따로 있는 섬. 두만강의 충적작용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현재 바람막이숲이 조성되어 있다.
-후리풍섬
나선시 우암리의 북동쪽 두만강 하류에 있는 섬. 지난날 섬에서 후리로 물고기를 많이 잡았다 하여 후리풍섬이라 하였다.
-너에막섬
나선시 우암리의 동쪽 두만강 하류에 있는 섬. 넝에(바다표범)잡이를 많이 하고 있다. 넝에막섬이라고도 하는데, 현재 물개번식자연보호구로 지정되어 있다.
-숙근도
나선시 우암리의 남서쪽 두만강 하구에 있는 섬. 물가에 뿌리박은 섬이라 하여 숙근도라 하였는데, 동숙근도와 서숙근도로 나뉘어져 있다. 새똥이 많아 똥섬이라고도 한다.
2. 두만강 허구에 녹둔도라는 섬이 있었다고 하지 않았나요?
북경조약에 따라 우리나라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두만강 하류의 16.5㎞에 달하는 지역에서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이 조약으로 인해 우리나라는 중, 소와의 북방 전략 요새지인 녹둔도를 상실하게 되었다.
녹둔도는 조선시대에 있어 북면의 야인 침입과 왜구의 침입을 막는 전초지로서 매우 중요한 지역.
여기에는 토성이 있었고, 목책과 병선(兵船)을 설치하여 조산만호가 관할하였는데, 이 유서 깊은 녹둔도를 우리나라와는 사전 협의나 사후 통고도 없이 러시아가 영토화함으로써 우리나라는 두만강 하구의 녹둔도를 상실한 것이다.
후에 우리 조정에서는 뒤늦게 청나라를 통하여 섬의 반환 협조를 요청하였으나 청나라는 성의를 보이지 않았으며 러시아의 반응도 없었다.
녹둔도의 옛 이름은 사차마도(沙次麻島)였다.
녹둔도는 두만강 하류의 흐름이 변하여 섬 모습을 잃어버리고 육지화되었다.
3. 영토 문제가 야기됐을 수밖에 없었겠는데, 이것 말고 떠 큰 것은 바로 두만강 불쪽의 간도 문제가 아니었을까요?
1869년(고종 6)에서 1870년 두 해 동안에 관북 지방의 대흉작으로 인하여 월강(越江) 이주민이 급격히 늘어났다.
이에 조정에서는 월강 단속을 강화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단속을 완화하여 월강경작(越江耕作)을 공인하고, 두만강의 섬과 대안지방(對岸地方)에 대해서는 함경북도 지방관이 지권(地券)을 발급하고 토지대장을 만들어 수세(收稅)까지 하였다.
이로부터 약 10년 후인 1881년에 청나라가 길림성 지역을 개방하고 혼춘에 소간국(招墾局)을 설치하여 개간 가능 지대를 조사하게 되었다.
이 지역에 이미 한인(韓人)이 정착, 영농하고 있음을 보고, 청나라의 관할지이므로 여기에서 생업하고 있는 자는 청국민으로 다스리겠다고 우리 조정에 통보하여 오자, 조정에서는 주민쇄환(住民刷還)을 고시하게 되었다.
강 연안의 주민들은 청나라가 두만강을 토문강으로 오인하여 두만강을 국경으로 알고 있음에 놀랐으며, 조정은 백두산 정계비와 토문강을 실제로 답사하였다. 또 종성부사로 하여금 돈화현(敦化縣)에 조회하여 한-청 양국이 상호 파원(派員)하고 국경을 조사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리하여 1885년에 감계담판(勘界談判)이 시작되었는데 우리 조정에서는 백두산 정계비를 기초로 하여, 비를 세운 직후에 경계를 표시한 석퇴(石堆), 토돈(土敦), 목책(木柵) 등을 살펴 토문강을 국경으로 할 것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나 청나라는 토문, 도문, 두만강이 동일한 강임을 주장하고 도문강의 원류를 탐사하여 한계로 하자고 맞서 감계는 결렬되었다.
2년 후에 다시 정해감계(丁亥勘界)도 였으나 이마저도 결렬되고 말았다.
한말에는 의병운동을 전개하던 애국지사들이 두만강을 건너 청나라와 러시아에서 투쟁을 계속하였다.
1910년 이후에는 일본 식민지 통치를 반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만주와 연해주로 들어가 조직적인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는가 하면, 학교 등을 설립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와 연길(延吉) 등이 그 중심지이었다.
4. 국경 지대이다 보니까 국방면에 신경을 많이 썼을 것 같은데, 그 일환으로 성 같은 것도 많이 쌓았겠죠?
-성터
두만강 유역 일대는 예로부터 우리나라 동북방면의 군사적 요충지여서 수많은 성터가 있다.
두만강 유역 일대의 옛 성곽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말간고성터(末干古城-)
무산군 삼봉평(三峯坪에 있는 성터. 무산진(茂山鎭)이 옮겨 오기 이전부터 오랫동안 여진족의 노토반호말간(老土蕃胡末干)의 할거지로 추정된다.
-임강대고지(臨江臺古址)
무산군 서하면 임강동(臨江洞). 우측 둘레가 600여m로 흔적만이 겨우 남아 있으며 부근에는 폐지(廢址)가 있고 기왓장이 산재되어 있다. 그러나 정확한 축성 연대는 알 수 없으며 여진 시대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소조곡고성터(小鳥曲古城-)
서하면 흥암강구(興巖江口)에서 하류. 만주쪽에 가 있고, 흥암동 뒷구릉에는 1,500여 개의 석루(石壘)가 있다. 이는 한말의 국경수비대가 주둔해 있던 병영지이다.
-양영진지(梁永鎭址)
무산군 영북면 양영동. 한때 여진족의 선가(先加) 마을이는데 1674년(현종 15)에 회령군의 양영만동보(梁永萬洞堡)를 이곳에 옮겨 양영보라고 하고 권관(權管) 1인, 사병 14인, 봉군(烽軍) 2인, 보인 50인을 두고 있다가, 숙종 때 무산부에 귀속하게 한 진(鎭)이다.
-풍산진지(?山鎭址)
풍계면 명신동. 여진의 도곤(都昆) 마을이었던 것을 1674년에 회령군 구진전동 폐보(廢堡)를 이곳에 옮기고 만호 1인, 사병 59인, 봉군 20인, 보인 110인을 두었다.
이곳은 1684년에 무산부에 소속되었고, 1729년(영조 5)에 만호 김우서(金禹瑞)가 처음 석성(石城)을 축조하였다. 남문 밖에 축성비가 일제 강점 때까지 남아 있었는데, 비면의 작은 글씨는 마멸되어 판독할 수 없으나 '?山堡築城碑(풍산보축성비)'라는 글자는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유선덕(柳先德)
회령군 회령읍 오산(鰲山)의 북팔을천(北八乙川) 건너 높은 구릉. 유선덕 서북쪽 기슭에는 석성터가 있다. 이는 월강을 막기 위한 파수막으로 번병(番兵)의 소창(小倉)을 두었던 곳이다.
1441년(세종 23) 김종서(金宗瑞)가 축성한 행성터는 연대(煙臺)로부터 두만강 우안에 뻗어 있는 성터로 이곳을 경계로 하여 성 밖에 반호(蕃胡)의 거주를 허락하였다고 한다.
-오국성터(五國城-)
보을하천 근처. 유선동에서 약 10리 서북쪽에 위치하며 축조 연대는 미상이나 성 둘레는 약 4㎞에 달하고 높이는 3∼4m 정도. 여진 완안부(完顔部)의 축성물이라고도 하며 금나라의 오국성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성안에는 건물을 세웠던 자리가 남아 있다.
이곳 중앙부에는 연못이 하나 있는데 옆에 운연(雲淵)이라고 새긴 비가 서 있으며, 송나라 휘종(徽宗)의 글씨라 전하여지고 있다. 성 가운데에는 기와, 석기, 토기류의 파편이 출토된다.
-포항폐진지(浦項廢鎭址)
오국성터의 북방 강안. 오국성터 남쪽. 북쪽에는 애친각라씨(愛親覺羅氏)의 발상지라고 하는 한성현(漢城峴)이 있다. 한성현은 한성치(汗城峙) 또는 한왕습사대(汗王習射臺)라고 칭한다.
이곳은 유선동포항(浦項)의 대안 간도 땅에 있는 애친각라씨의 발상지이며 한왕의 병마를 기르던 곳이라고 전한다. 산상에는 옛 성터가 남아 있다.
-볼하포진성터(乶下浦鎭城-)
봉의면 파전에는 있는 폐진지. 팔을면(八乙面) 기덕산(基德山) 위에는 둘레가 130여m나 되는 옛 성터가 있는데 여진시대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건산성터(童巾山城-)
종성군 동관면. 축조 시기는 알 수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석축 둘레 190m, 높이 1m, 절벽 340m가 되는데, 동건이 이 돌에 '태정5년방구7년운운(泰定五年防寇七年云云)'이라 함으로써 산성 이름을 동건산성이라 하였다고 한다.
여진어로 종(鍾)을 홀독한(忽禿罕)이라 하는데 동건이라는 음은 홀독한의 와전어가 아닌가 보고 있다.
-수항루(受降樓)
종성 읍내. 누각 서쪽에는 두만강이 흐르고 동쪽으로는 종성의 금산(金山)이 높이 솟아 있다. 수항루는 두만강을 건너 침입하여 오는 여진족을 방어하기 위하여 세운 건물로 알려지고 있는데, 처음에는 뇌천각(雷天閣)이라고 부르다가 1608년(선조 41) 침입한 여진족을 격멸하고 이곳에서 항복을 받았다고 하여 수항루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이 건물은 보기 드문 현존 목조 3층 다락 건물이다.
-방탄진지(防坦鎭址)
종성 남산면. 선조 때에 만호 이맹(李孟)이 축조. 둘레 700여m, 높이 3m에 병사 196인이 있었다고 한다.
-영북진지(寧北鎭址)
고읍면의 고읍성터. 구여진(舊女眞) 백안(伯顔)이 옛 성을 수축한 것. 본래 토성이던 것을 1634년(인조 12)에 도병마사 신여철(申汝哲)이 개축하고 성안에 연못 둘을 파고 앞면의 토축을 석축으로 개축하였다, 성의 주위는 25㎞, 높이 8m에 우물이 다섯 개 있다.
-주원폐보(周原廢堡)
온성군 온성면 주원동의 토축. 주위가 150여m이다. 남양면 풍서동(?西洞)에는 1484년(성종 15)에 축성한 유원진지(柔原鎭址)가 있는데 석성 둘레는 약 10여㎞에 높이는 3m이다.
-영달진지
영충면 영달동. 1442년에 설치. 1662년의 구보(舊堡)로서 이곳에 옮겨 영건보(永建堡)로 고쳤다가 그 뒤에 다시 옛 이름으로 환원하였다고 한다.
석성 주위는 12㎞, 높이 2.5m로 병마만호(兵馬萬戶)를 두었던 곳으로 폐성되었으며 문터만 남아 있다.
-황파진지(黃坡鎭址)
미포면. 석성 둘레는 5㎞, 높이 3m로 1523년(중종 18)에 축성하였는데 한말에는 국경 수비대의 진영이었다.
-훈융진지
훈융면. 1464년(세조 10)에 김종서가 축성한 토성으로 숙종 때에 돌로써 성을 다시 쌓았다. 또한 여기에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를 두고 병사 258인을 주둔시켰다고 하는데 성의 둘레는 10여㎞라고 한다.
-야랑성터(也?城-)
경원군 경원면 봉운동에 있는 진과 보의 흔적. 토축으로 둘레는 약 2㎞, 높이는 1.2m이었다고 한다. 또한, 봉운동에는 후훈봉수대지(厚訓烽燧臺址)가 있다.
-고현성터(古縣城-)
경원면. 강 가운데 동도(東島)의 대안인 혼춘에 있는 고려 토성이 그 옛날 실관성터(實關城-)로 추정된다.
-안원보터
안농면 안원동. 석성으로 둘레 약 9㎞, 높이 약 2.5m였다. 병사가 212인으로 용당(龍黨)과 유다도(柳多島)에 파견하여 대안을 경계하도록 하다가 1864년에 폐지하였다.
-고아산진지(古阿山鎭址)
아산면 백안동. 석축의 둘레가 약 10㎞, 높이 2m이던 것을 1480년(성종 11)에 혁파하여 아산보에 옮겼다. 고아오지보지(古阿吾地堡址)는 아산면 백안동 강안에 있던 토성인데 1488년에 경흥군 아오지로 옮겼다.
-판성동고산성(板城洞古山城)
경흥군 아오지읍 용성동. 석축성터가 남아 있다.
-봉수
조산 인근에는 두리산 봉수대터와 조산남봉 봉수터 등이 있었다. 1519년 관찰사 고형산(高荊山)이 주청하여 고무산성(古茂山城)을 폐하고 무산으로 보를 옮겨 놓았다. 이 밖에도 적지 않은 보, 진지, 봉수대지가 분포되어 있다.
-두만강행성
온성군 영강리의 옛 성터. 영강리의 서쪽 소재지에서 0.2km 상거한 두만강 연안에 위치해 있다.
-공주성
나선시 사회리의 옛 성터. 리 소재지마을에서 북동쪽으로 4km 떨어진 두만강가에 위치해 있다. 고려 말기인 14세기 초에 축성한 성이다.
-유원성
온성군 풍서리의 조선시대의 옛 성터. 1441년에 여진족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두만강 행성과 함께 쌓았다. 돌과 흙을 섞어 쌓았는데 현재 흔적만 알릴 뿐이다.
-소호리성
무산군 서호리의 두만강의 서쪽의 조선시대의 옛 성터. 15세기에 북방을 개척할 때 쌓은 성으로 추정되는데 내성과 외성으로 되어 있다. 성의 둘레길이는 700m 되는데, 돌로 쌓은 석성이다.
-월파성
온성군 두루봉리의 조선시대의 옛 성터. 리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3.5km 상거한 두만강기슭을 따라 축성되었다. 1441년에 여진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성으로서 성벽은 자연석으로 쌓았는데 현재 산기슭에 200m 정도 남아 있고 서문터가 있다.
-임강대옛성
무산군 임강리의 옛 성터. 두만강 변두리를 따라 축성되어 있다. 도리고성 또는 임강대고성이라고도 한다. 성의 축조년대는 잘 알 수 없다. 성은 외성과 내성으로 되었는데 외성의 둘레는 약 700m이고 내성은 170m 가량 된다. 성벽은 자연석으로 양면쌓기하고 성심은 자갈과 진흙을 다져 넣었다.
-회령행성
회령시 덕흥리의 두만강 기슭의 옛성터. 조선시대의 장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회령 서쪽 독산연대봉기슭에서 시작하여 두만강기슭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서 종성, 온성, 경원을 지나 경흥까지 뻗어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벽은 돌, 흙, 나무 등으로 축조되었으며 강안이 높은 벼랑으로 된 곳은 그대로 이용하였고 벼랑이 낮거나 없는 지대에서는 흙 또는 돌로 구축하였다.
조선시대 북쪽으로부터 침입해오는 여진 세력을 막기 위하여 축조한 것으로서 국내 성 방어체계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이용된다.
-운두산성
회령시 성북리의 고구려 시기의 옛 성터. 운두산성은 두만강변에 높이 솟은 운두산의 험한 산세를 이용하여 축조한 석성으로서 둘레 약 6km. 운두산은 두만강에 면한 서쪽과 북쪽이 절벽으로 되고 동쪽과 남쪽이 산등성이로 둘러막혀 골짜기를 이루고 있어 산성구축에 유리하다. 성벽은 동쪽과 남쪽의 산등성이에 잔재해 있으며 외면축조법을 기본으로 양면 축조법을 배합하여 쌓았다.
운두산성은 북한 동북지방에 위치한 성으로서 고구려의 역사와 함께 고구려성의 배치, 국토방위체계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된다.
-삼수읍성
삼수군 삼수읍의 옛 성터. 15세기 중엽의 유적. 삼수읍의 삼수천과 관흥천이 합수되는 삼각지점의 언덕 위에 축성되어 있다. 본래 갑산군의 성보로 시작된 삼수는 1441년 만호가 설치되고 그 후 군, 도호부 등으로 승격되었다가 1464년 과거의 신파에서 현 위치로 옮겨오면서 다시 군으로 되었다. 삼수읍성은 이 무렵에 쌓아졌다. 이때에는 압록강행성과 두만강행성이 쌓아지고 평안도의 추파구자(장강)와 구성, 함경도의 북청, 고원 그리고 그 이북지역에 성들을 많이 쌓아 북방방위를 강화하던 시기였다.
삼수읍성은 삼수천과 관홍천이 합수되는 삼각지점의 언덕받이에 쌓은 석성으로서 그 평면은 남북으로 긴 타원형인데 동쪽 성벽의 대부분은 거의 직선으로 되었다. 성의 둘레는 약 1,150m.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191개의 성가퀴와 8개의 포루, 3개의 우물이 있었다.
이 가까운 곳에 나난보를 비롯한 여러 성보들이 있어 서로 연결된 방위진을 펼치고 있었다. 선열들의 반침략 항쟁사실이 깃들어 있다. 1907년 말에만 하여도 홍범도 의병부대가 이 성에서 왜적들과 치열한 격전을 벌여 심대한 타격을 안겼다. 삼수읍성은 당시의 성제와 건축술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5. 두만강 유역에서 우리가 주목해서 볼 만한 지명들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우선 마을 이름부터...
-지타리마을
함경북도 나선시 홍의리 남동쪽에 있던 마을. 험한 진펄이 있었다. 두만강 철길공사를 하면서 마을 전체가 두만강동의 남증산마을로 집단 이주되었다.
-새태골
함경북도 나선시 홍의리의 동남쪽의 골짜기. 골 앞으로 두만강이 흐르고 있다. 옛날 어느 해 겨울에 두만강 모래가 날려와 쌓였다가 이듬해 봄눈석이 때 큰 사태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엎어지기소
양강도 삼지연군 무봉노동자구의 북쪽 두만강 연안의 소. 주변이 가파르게 생겨 오가는 사람들이 거의 다 엎어진다 하여 엎어지기소라 하였다.
-여불
함경북도 나선시 하여평리지역의 옛이름. 조선시대에 불렸던 이름으로서 두만강의 여울목지대라 하여 여불 또는 여울이라 하였다. 이 지역은 후에 아래여불과 웃여불로 구분되어 불렸다.
-임강리
함경북도 무산군 1읍 6구 15리의 하나. 무산군의 서쪽 두만강 연안에 위치. 북쪽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 동북지방과 마주한다.
농경지는 1,000여 정보 되는데 주로 옥수수, 감자 등이 재배된다. 축산업에서는 주로 양과 염소를 사육하고 있다.
6. 들판의 이름이나 산이름 중에도 특이한 것이 있을까요?
-두만강어구벌
함경북도 나선시 동북쪽 두만강과 동해가 잇닿은 지역에 펼쳐진 벌. 오랫동안 저산지형으로 있었던 이 지역은 제3기에 평탄화 작용을 받았으며 제3기 마이오세로부터 제4기 중세까지는 신기구조 운동에 의하여 들려 깎였다.
벌의 대부분 지역은 주로 두만강의 퇴적작용에 의하여 형성된 해발 4m 미만의 퇴적단구와 침수지로 되어 있으며 그 주변은 해발 10~200m의 구릉지대로 되어 있다.
구릉 사이에는 홍의벌, 사회벌, 굴포벌, 구룡평벌, 우암벌 등 습지대로 알려진 작은 벌들과 두만강 물길이 서부에서 동쪽으로 이동하는 과정에 퇴적물이 만 어귀를 막음으로써 이루어진 만포, 서번포, 동번포 등의 호수가 있다. 북한의 북부지방에서 벼와 옥수수를 비롯한 곡물과 축산물, 물고기 생산지로 알려져 있다.
-백두삼천리벌
양강도 대홍단군의 벌. 김일성 주석이 1979년에 원래 오호대지 또는 오호지구라고 불리는 이 고장을 평안남도의 열두삼천리벌에 비기며 백두삼천리벌이라고 명명하였다.
-홍수평
나선시 홍의리의 북동쪽 두만강 유역의 벌. 옛날 강물이 범람하면서 그 충적작용에 의해 형성되었다.
-샘물벌(창평)
양강도 대홍단군 홍암노동자구 소재지의 동북쪽 두만강 기슭의 벌. 샘물이 나는 벌이라 하여 샘물벌이라고도 한다.
-모래산
나선시 두만강동의 남쪽의 산. 센 바람에 날려온 모래가 쌓여 형성되었다. 광복 후 자연개조방침에 따라 아까시나무와 황철나무로 방풍림을 조성하였다.
-망덕산(안뒤산)
함경북도 나선시 사회리의 북동쪽 옛 공주성터 안쪽으로 뒤의 산. 북쪽은 절벽으로 되어 있고 두만강에 접해 있다. 옛날 성안에서 망을 보던 산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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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작품
-왕조실록
함경도는 일찍이 조선 초기에 육진(六鎭)을 쌓고 우리의 영토로 만들기 위한 의지를 보인 적이 있기도 하였으나, 숙종 때에 이르러서야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우고 두만강과 압록강을 국경선으로 확정지음으로써 우리 땅으로 병합되기까지는 대체로 여진족들의 거주지이자 그들의 활동 무대였다.
조선왕조실록 등의 사료 속에는 두만강에 대한 기사가 있다. 우리의 고전문학 속에서는 조선조의 창업을 기린 <용비어천가>에서 이성계의 성장지인 영흥, 함흥, 경흥 등이 그와 그 선조들이 행한 이적의 배경이나 활동 무대로 등장하면서 두만강이 문학 속에 표출되기 시작한다.
“우리 시조(始祖)가 경흥에 사 샤 왕업(王業)을 여르시니”(제3장), “적도(赤島)안해 움흘 지금(至今)에 보 니 왕업간난(王業艱難)이 이러?시니”(제5장) 등의 내용이 <용비어천가>에 보이는데, 여기서 경흥과 적도는 두만강 중하류의 사적지로 조선조 발흥의 성역으로서의 의미를 지니며 노래 불려진다.
두만강을 배경으로 한 대표적인 민요로는 <애원성 哀怨聲>을 들 수 있다. 함경도의 북청을 비롯하여 혜산, 갑산, 무산, 삼수 등에 이르기까지 널리 불렸던 이 민요는 남편을 두만강 건너로 떠나 보낸 여자가 이별의 슬픔을 노래한 내용이며 모두 42편이 전하고 있다.
-개항 이후
이후 두만강이 문학적 배경으로 등장하는 것은 개항 이후 근대문학에 와서 본격화된다. 그것은 최서해(崔曙海), 김동환(金東煥), 김기림(金起林), 한설야(韓雪野), 이용악(李庸岳) 그리고 한국 영화사에 불후의 업적을 남긴 나운규(羅雲奎) 등 동북 지방 출신의 시인, 작가들의 왕성한 작품 활동 속에서 식민지의 시대적 의미와 더불어 표상된다.
일찍이 그들이 태를 묻었던 어두운 시대 동토(凍土)의 북원(北原)을 노래하며 한 시대를 살았던 이들 문인들의 눈에는 두만강이 오히려 근대의 민족적 수난기에 서사시의 처연한 무대로 혹은 고국 땅의 마지막 문턱의 의미로 상징화된다.
“눈이 몹시 퍼붓는 어느 해 겨울이었다/눈보라에 우는 당나귀를 이끌고 두만강(豆滿江) 녘까지 오니/강(江)물은 얼고 그 위에 흰눈이 석자나 쌓여 있었다/인적(人跡)은 없고 해는 지고/나는 몇 번이고 돌아서려 망설이다가/대담하게 어름장 깔린 강물 위를 건넜다/올 때 보니/북새(北塞)로 가는 이사꾼들 손에/넓다란 신작로(新作路)가 만들어 놓였다/지난날 건너던 내외곡 길 위에다”(김동환의 先驅者).
-일제 강점기
1920∼1930년대 일제 식민지의 앞잡이인 동양척식주식회사와 그 주구들에게 농토를 빼앗기고 고향과 조국을 등진 유랑의 무리들은 북극에 장치된 거대한 자석에나 끌리듯 두만강을 넘어 물 설고 낯선 오랑캐 땅 북간도(北間島)로 흩어져 들어갔다.
하루에도 수십 차례 남부여대(男負女戴)한 가련한 군상들은 앞서 간 무리들이 남기고 간 설원의 발자취 따라 끝 모르는 이역의 하늘 저 너머로 무작정 사라져가곤 하였다.
“북국(北國)에는 날마다 밤마다 눈이 내리느니, 회색 하늘 속으로 흰 눈이 퍼부을 때마다, 눈 속에 파묻힌 하얀 북조선(北朝鮮)이 보이느니……춥길래 멀리서 오신 손님을, 부득이 만류(挽留)도 못하느니……오호 흰 눈이 내리느니, 북새(北塞)로 가는 이사꾼 짐짝 위에, 말없이 함박눈이 잘도 내리느니”(김동환의 눈이 내리느니),
“전선(電線)이 운다 잉잉하고, 국교(國交)하라가는 전신 줄이 몹시도 운다, 집도 백양(白楊)도 산곡(山谷)도 오양간 당나귀도 따라서 운다, 이렇게 춥길래 오늘 따라 간도이사꾼도 별로 없지, 어름짱 깔린 강(江)바닥을, 바가지 달아매고 건너는, 함경도 이사꾼도 별로 안 보이지, 회령서는 벌써 마지막 차(車)고동이 텄는데”(김동환의 國境의 밤).
눈, 눈보라, 설원, 추위, 당나귀의 울음, 간도이사꾼 등은 두만강이라는 공간과 밀착된 20세기 전반의 비극적 정황을 이루어 특정한 시대의 상징적 의미마저 내포한다. 이제 두만강은 임 찾아 헤매이는 애상적이고도 개인적인 감상에서가 아니라 민족적 수난이라는 보다 대아적 차원에서 인식하게 된다.
“동해의 마지막 항구를 떠나 북으로! 밤을 새우고 날을 지나니 바다는 더욱 푸르다. 하늘은 차고 수평선은 멀고, 뱃전을 물어 뜯는 파도의 흰 이빨을 차면서 배는 비장한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마스트 위에 깃발이 높이 날리고 연기가 찬 바람에 갈기갈기 찢겨 날린다. 두만강 넓은 하구를 건너 국경선을 넘어서니 노령(露領) 연해의 연봉이 바라보인다. ……하얗게 눈을 쓰고 북극 석양에 우뚝우뚝 빛나는 금자색 연봉이 저물어 가는 갑판 위는 고요하다.”(李孝石의 露領近海).
이 소설에서 여객선의 항로는 우리나라의 최북단 항구인 웅기에서 서수라를 거쳐 두만강 어귀를 지나 노령 블라디보스토크까지이며, 그곳에 이르는 긴장되고도 급박한 상황 속에서 이야기는 펼쳐진다.
두만강은 의지가지없는 실향민들의 피눈물로 얼룩진 한 많은 강이다. 또한 두만강은 때로는 항일 투사들이 선혈을 뿌린 활동 무대로 그것이 역사적 현장으로서 뿐만 아니라 문학적으로 형상화된 배경으로 승화됨으로써 복합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나는 죄인처럼 숙으리고/나는 코끼리처럼 말이 없다/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너의 언덕을 달리는 찻간에/조그마한 자랑도 자유도 없이 앉았다./아무것도 바라볼 수 없다만/너의 가슴은 얼었으리라/그러나/나는 안다/다른 한줄 너의 흐름이 쉬지 않고/바다로 가야할 곳으로 흘러 내리고 있음을.……잠들지 말라 우리의 강아/오늘밤도/너의 가슴을 밟는 듯 슬픔이 목마르고/얼음길은 거칠다 길은 멀다/기리 마음의 눈을 덮어 줄/검은 날개는 없나냐/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북간도로 간다는 강원도치와 마조 앉은/나는 울 줄을 몰라 외롭다.”(이용악의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풀폭을 수목(樹木)을 땅을/바윗덩이를 물으녹이는 열기가 쏘다저도/오즉 네만 냉정한 듯 차게 흘으는/강(江)아/천치(天痴)의 강아……너를 건너/키 넘는 풀속을 들쥐처럼 기여/다른 국경을 넘고저 숨어 다니는 무리/맥풀린 백성의 사투리의 향려(鄕閭)를 아는가/더욱 돌아오는 실망을 묘표(墓標)를 걸머진듯한 이 실망을 아느냐/강안(江岸)에 무수한 해골이 딩굴러도/해마다 계절마다 더해도/오즉 너의 꿈만 아름다운 듯 고집하는/강아/천치(天痴)의 강아”(이용악의 天痴의 江아).
두만강은 조국을 잃은 젊은이들의 달랠 길 없는 회한과 분노와 절망과 굴욕과 원망으로 표상된다. 민족의 설음과 처절한 역사적 비극이 펼쳐져도 말없이 흐르는 두만강은 그 모두를 낱낱이 지켜본 역사의 증인이 되어주기를 간청받기도 한다.
너무나 억울하면서도 하소연할 길 없는 민족의 비원은 무력한 자아의식과 더불어 자탄과 자기 학대의 울부짖음으로 변하여 비극적 정황은 극대화된다.
이 같은 상황은 일제강점 이후 광복까지 한반도 전역을 짓눌렀던 역사적 현실일 뿐더러 그 기간에 형상화된 문학작품의 보편적이고도 일반화된 문학적 현실이기도 하였다.
이 밖에 두만강이 민족 문학의 장으로 한국 문학사에서 거론되는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국경의 밤>은 김동환이 지은 한국 최초의 현대 장편 서사시로 1925년에 출간되었다.
작품의 무대는 두만강 유역인 국경 지방이며 때는 눈이 내리고 모든 것이 얼어붙는 추운 겨울이다. 이 시의 정서적 배경은 밀수꾼과 간도로 이민 가는 이사꾼들이 느끼는 참담함과 불안과 깊이 관계된다.
주인공인 청년은 타향에서의 오랜 유랑 끝에, 여진족의 후예이며 이미 밀수꾼의 아내가 된 순이를 찾아 옛 고장에 돌아온다. 두 사람은 어렸을 때 소꼽친구였고 그리고 철이 든 다음 서로가 좋아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재가승(在家僧)인 여진족의 후예는 동족 이외에는 시집갈 수 없다는 엄한 계율과 인습에 따라 두 사람의 사랑은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고향에 돌아온 청년은 남의 아내가 된 지난날의 애인을 찾아 그녀의 집 문을 두드리고 문 열기를 간청한다.
그러나 사랑이나 정보다 사회를 지배하는 엄한 계율에 매여 그녀는 청년의 간청을 거절한다. 청년은 지난날의 사랑에 의지하여 하소조로 노래 부르고 그녀는 이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대사가 중심이 되어 극적 구성을 이룬다. 서사시의 종막은 두 사람 앞에 밀수를 간 남편이 시체로 나타나는 것으로 그 절정을 이룬다.
서간도를 무대로 때로는 독립 단원으로 혹은 사설 교원으로 유랑하지만 제대로 뜻 하나 이루지 못하고 5년만에 두만강을 넘어 향리인 회령땅으로 돌아온다.
거지 신세가 된 그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뿐더러 의지할 데조차 없어 호구지책으로 귀향한 다음날 도배장이 간판을 내건다는, 다소 자조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삼인칭 소설이다.
궁지에 달한 그는 할 수 없이 새 일터를 찾아 두만강을 건너 만주 땅을 유랑하나 자기 입 풀칠하기조차 바빠 고향집에는 한푼도 보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지긋지긋한 5년간의 이역 생활을 청산하고 고국에 다시 돌아오나 차마 향리로는 되돌아 갈 수가 없어 고향에서 멀지 않은 두만강 어귀의 웅기에 정착한다. 끝내 가족이 유행 독감으로 몰살하였다는 소식을 전하여 듣고 그는 다시 조국을 떠난다.
작품으로서 미흡한 점이 많으나 그의 문제작 <탈출기 脫出記>, <홍염 紅焰>, <박돌(朴乭)의 죽엄>, <기아(饑餓)와 살육(殺戮)> 등과의 연관 속에서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이는 한민족의 이민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측면 이외에 20세기 전반기까지 북간도를 우리 민족의 생활 터전으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면에서도 그 의미는 크다.
두만강을 소재로 한 영화로 대표적인 것은 <두만강을 건너서>이다. 이는 1928년 나운규 프로덕션이 제작한 나운규의 초기 문제작 중 하나이다. 나운규, 이금룡, 윤봉춘, 주삼손, 전옥, 이경선 등이 출연하였다. 두만강 유역의 회령과 간도, 용정(龍井)에까지 직접 로케를 한 무성영화시대의 대표적 작품 중의 하나이다.
풍운이 휘몰아치는 한말, 구한국군의 나팔수로 근무하던 주인공(이금룡분)은 일제에 의하여 군대가 강제로 해산된 뒤 가족을 이끌고 북간도로 유랑의 길을 떠난다. 두만강을 건너 만주 땅에서 마적단의 습격을 받아 식구를 잃고 다시 잃어버린 조국을 찾으려고 피어린 투쟁을 전개하는 독립군의 나팔수가 된다.
이 늙은 나팔수는 자신의 임종을 앞두고 나팔을 입에 댄다. 옛날 화려하였던 시절에 한국군의 사기를 고무하던 일, 만주 땅에서 독립군의 일원으로 나팔을 불던 일을 회상하면서, 나팔 소리가 비장하게 만주의 하늘에 퍼지고, 자기의 유해를 고국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며 나팔수는 눈을 감는다.
나운규는 이 작품에서 민족적 수난을 영상화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왜인들의 가혹한 검열로 상당한 부분이 삭제되고 제목조차 <사랑을 찾아서>로 개명된 후에야 상영이 허락되었다. 대중가요로는 <눈물젖은 두만강>을 들 수 있다. 원산 출신인 김정구(金貞九)가 불러 선풍적인 인기를 모은 곡이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젖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이 가요는 임의 의미에 따라 다소 애상적이기도 하나 일제의 강압에 의한 대민족적 엑소더스라는 시대적 정황과 합치되어, 서민의 애환을 노래 불렀기에 그 인기는 폭발적이었고 그 여파는 오늘날까지도 맥맥히 흘러오고 있다.
`수운
두만강은 유역 면적이 넓으나 유량이 많지 않고 급류가 많아서 수운이 발달하지 못하였다. 가항 구간은 85㎞로서 압록강의 698㎞, 한강의 330㎞, 낙동강의 344㎞에 비하면 아주 짧다.
100t 정도의 선박은 겨우 경택(慶澤)까지 소항할 수 있다. 전체 유역을 통해서 지세가 험하고 기후가 한랭하기 때문에 개발이 뒤떨어졌던 것도 수운이 발달하지 못한 이유의 하나이다.
`산업 `탄광
두만강 유역은 우리나라에서 주요한 철과 갈탄 매장 지역이다. 철은 무산이 중심지인데, 비록 철 함유량이 37%인 빈광이지만 매장량은 약 11억t에 이르러 우리나라 최대의 철산지를 이룬다.
중류의 회령에서 하류의 아오지에 이르는 지역은 함경북도 북부탄전지대로서 전국 총 유연탄(갈탄) 매장량의 약 60%를 차지한다. 주요 탄전으로는 아오지, 고건원(古乾源)의 2대 특급 탄전과 하면(下面), 훈융, 학보(鶴甫), 궁심, 신유선(新遊仙) 등의 대탄전들이 있다.
이들 자원을 이용하여 무산에는 제철, 제지 공업, 아오지에는 석탄액화, 질소비료, 기초화학공업 등이 각각 발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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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
이곳에 신석기 주민들이 남겨놓은 유물들이 적지 않게 분포되어 있다. 특히, 강 연안의 두루봉 바로 밑의 서남쪽 경사면 일대는 신석기시대 말부터 철기시대 초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태의 유물이 발견된다.
회령지대의 계곡은 보을천, 회령천, 팔을천(八乙川) 등의 지류가 두만강과 합류되는 곳으로, 두만강 유역 일대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이다.
회령벌 동쪽 기슭을 흐르는 회령천은 대륙쪽에서 동해로 향하는 두 번째 통로로, 여기에도 일찍부터 청동기인들이 모여 산 곳으로 보인다.
이들 청동기인들의 주거지는 회령벌 동쪽 기슭의 오동과 회령벌 서쪽 기슭에 놓인 유선동 검은개봉에서 발견된다. 검은개봉은 강변의 높은 언덕 위에 우뚝 솟은 봉우리로 3면이 매우 가파른 경사를 이루고 있다.
다만 동남쪽만이 연대봉(煙臺峯)에 접하여 말안장 모양의 고개마루를 이루고 있는데 검은개봉 밑의 구릉지대에서 청동기시대의 토기조각들이 단편적으로 발견된다.
두만강 하구의 서번개와 동번개로 불리는 늪의 서남쪽에 서포강(西浦江)이 있는데, 두만강과 늪 사이는 높이 300m 미만의 야산들이 가로막혀 있다. 이 야산 서남쪽 끝에서도 원시유적 등이 발견된다.
또한, 하구에서 서남쪽 약 25㎞ 지점에는 웅기읍의 용수호(龍水湖) 동서안에 평평한 모래언덕과 그 경사면 일대에서 유적이 발견되며, 나진동(羅津洞) 동쪽에 돌출한 반도의 남쪽 해변가 모래언덕, 청진벌 서남쪽 농포리, 수성천(輸城川) 하구의 원수대(元帥臺) 등에서도 유물 유적이 발견된다.
강 유역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원시시대 유물 유적은 회령을 중심으로 한 반경 5㎞내의 지역이다. 회령 시내에도 원시 유적이 남아 있으며, 오동유적을 비롯하여 회령읍성 동문 안과 오산 기슭에도 유물포함층이 있고 성내 중심 언덕에도 있다.
오동유적은 그 중 가장 중심을 이루는 중요 유적으로서 그 범위도 수 만㎡에 달한다고 한다. 또한 이 유적은 포함층도 두껍고 원시층 상부에는 고대 및 중세기의 문화층이 있다.
이 유적은 일찍이 회령천에 의하여 이루어진 충적단구인데, 현재는 하상(河床)이 낮아져서 강이 바로 이 단구의 기슭을 흐르고 있다고 한다.
강의 잦은 범람으로 유적의 적지 않은 부분이 일찍이 유실 당하였으며 문화층이 잘린 단층이 보일 정도라고 한다. 북한측은 1949년 나진 초도의 원시 유적 발굴과 1954년 오동유적 발굴에 착수하는 등 많은 발굴 작업을 벌인 바 있다고 한다.
`유적 김종서사적비
경북도 회령시 행영리의 비. 1434년에 함길도 절제사로 부임된 김종서가 두만강 연안에 6진을 개척하고 행성을 쌓는 등 북방개척에서 세운 공적을 기념하여 1875년에 세운 비. 사각받침돌 위에 비몸을 올려놓았다. 높이는 1.2m이다.
`봉수 회령학포북봉봉수
함경북도 회령시 학포리의 옛 봉수터. 15~16세기의 봉수터로서 국내에 잔재해 있는 봉수 중에서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 당시 봉수의 기본형태를 정확히 반영해주고 있다. 봉수는 당시 압록강과 두만강 연안의 방어를 강화하면서 행성들을 구축하고 성보들을 설치하며 새로운 무기들을 만들어 배치하고 남쪽의 주민들을 이주시키는 등 국가적인 방어대책이 세워지는 시기에 축조되었다.
조선시대 전국의 국경 또는 해안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서울의 중앙정부에 전달하기 위하여 수립한 5개의 직봉 봉수 체계 중의 하나
주위에는 봉수대성곽이 구축되어 있으며 그 평면은 타원형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