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도론1/임종찬
'손 한번 흔들지 못한 채 돌아선 하늘과 땅'
한낮 때가 되면 몰려드는 조무래기
걸친 넝마 헤어진 신발 때에 절은 모습들이
다투어 식탁을 찾아 눈방울만 굴린다
이내 부엌에선 왁자한 잔치같고
아이들은 밥을 받아 함박같은 웃음인데
내 가슴 젖는 창밖엔 희멀건한 봄하늘
이것은 당시 어린이 집을 책임맡았을 때 지은 작품이다. 여기서도 분명하듯이 정운은 연민의 정과 애정의 눈길로 사물을 대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분이고 보니 이성간의 사랑은 오죽했으랴.
정운은 함부로 정을 주는 그런 사람도 아니었다. 차갑고 매서운 데도 있는 그리고 단호한 면도 가진 그런 사람이엇다. 한 번은 모 간부가 「어린이집」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하다가 혼이 나는 것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삼시 그러한 국면에서만이 단호할 뿐 늘 마음이 따뜻하여 그를 대하면 푸근해지기도 한느 것이다.
오면 민망하고 아니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가 귀 기우려 기다리며
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
서로 야윈 가슴 먼 창만 바라다가
그대로 일어서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
이것은 '무제'라는 작품이다. 청마와의 애정이 처음 싹트던 무렵에 쓴 작품이 아닌가 한다. 이 작품이 말하듯이 그는 감정의 발설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일단 뱉어지는 순간은 석류알처럼 붉엇다.
그대 그리움에 고요히 젖은 이밤
한결 외로움도 보배냥 오붓하고
실실히 푸는 그 사연 장지 밖에 듣는다.
'비'라는 작품이다. 그리움을 고요히 적시기만 하고 살았던 고독한 가인(佳人).그의 당호(堂號)는 애일당(愛日堂)이라 부르면서 태양을 사랑했고 태양을 따라 자리를 얾겨 살려고 했던 해바라기의 여인.
그의 단심(丹心)은 '바위'에 잘 나타나 있다.
나의그리움은 오직 푸르고 깊은 것
귀먹고 눈 먼 너는 있는 줄도 모르는다
파도는 뜯고 깎아도 한 번 놓인 그대로......
이 작품을 읽다가 보면 문득 황진이의 시조가 연상된다.
정운(丁芸)에게도 참기 어려운 괴로움의 시간이 있었다. 하루는 댁을 찾았더니 몸이 아프다고 누워 계셨다. 그때 정운은 자연은 애정을 쏟을수록 정직해지고 보답이 분명한데 인간은 그렇지 않을 때가 괴롭다는 것이다. 그 당시의 괴로운 심정이 다음의 작품 속에 나타나 있다.
너는 저만치 가고 나는 여기 서쓴ㄴ데......
손 한 번 흔들지 못한 채 돌아선 하늘과 땅
애모는 사리로 맺혀 푸른 돌로 굳어라
'탑(塔)'이라 제(題)한 작품이다. 이 작품이 모 문학지에 실렸었는데 공교롭게도 청마(靑馬)가 타계하고 곧 발표되었기 때문에 정운이 청마의 타계에 대한 슬픔을 읊은 양으로 해석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청마 그도 사람이었으므로 잠시 한눈 팔 때가 있었을 것이다. 왜 그때 이십년이나 깊이 사랑하였던 두 사람 사이가 서먹하게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짐작가는 바가 있기는 하지만 입을 다무는 것만이 내가 할 일이라 샐각한다.
청마가 타계하고 며칠 뒤에 나는 정운을 찾아뵈엇다. 그때 정운은 병풍을 쳐놓고 침대에 누어 있었다. 얼굴이 몹시 축이 나 있었다. 청마가 정운을 애모하여 썼던 시편들을 모아 수를 놓은 병풍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가 중 사랑의 시 속에서 잠들기를 원했던 정운.
청운은 청마가 서거하고 얼마 안 있어 구설수에 오르긴 하였지만 정운의 심정으로는 너무나 당당한 일이었다. 그때 청마의 편지를 더러 받았던 젊은 여성들이 청마의 편지를 지면에 공개하자 정운은 모독 같은 것을 느꼈던 모양이었다.( 이 책에서 얻은 돈으로 문학상을 만들기도 아였었다.)
당시 부산은 청마.정운의 거리였다. 그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만나서는 인생을. 시를. 철학을 논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청마가 타계하자 정들었던 거리는 갑자기 안타까움만을 터해주는 가혹한 거리가 되고 말아 차라리 떠나기로 작정하여 그 길로 정운은 서울 사람이 되었다.
더불어 거닐던 이 길 한 점 티도 가셔지고
밝히는 그리움 투명한 언저리를
山마을 그 주막 등불이 너를 겹쳐 어린다.
그 분은 서울에 살면서도 청마와의 추억 때문에 괴로워 하였다. 그 분은 늘 작품을 발표하기 전에 후배들에게 작품을 보여서는 고쳐받는 겸손하면서도 진지한 면이 있었다. 나를 가끔(정운이 살아계실 때엔 한 달에 한 번 꼴은 뵙고 살았다) 서푼 되지 않는 나의 시안(詩眼)에도 힘을 입으려 하시는 것이었다. 어떤 땐 힘들여 쓴 작품(내가 보기엔 좋은 작품인데도)을 마음에 들지 않아 구겨버리는가 하면 어떤 때 애절한 과거의 추억을 모티브로 한 연시(戀時)가 있었으나 끝내 발표하지 않고 다만 자기 감정을 달래기에만 이용하고 만 작품들도 있었다.
눈이 오시네. 당신 가고 점점이 자욱마다
덮어도 덮어도 번지는 장밋빛 호고의 월훈
쟁쟁히 아픔을 밝히며 이 한밤을 쌓이네
이 작품은 정운이 타계하고 난 뒤에 나온 『언약(言約)』이라는 시조집에 실린 작품이다. 이 작품만으로는 이해하는 데에 조금 어려움이 있으므로 청마가 정운에게 준 시 하나를 기억해야 한다.
뉘가 눈이 소리없이 내린다더뇨
이렇게 쟁쟁쟁
무수한 종소리 울림아여 내리는 낙화
이 길이었나
손 하나 마주잡지 못한 채
어쩌지 못한 젊음의 안타까운 입김같은
퍼어펄 내리는 하얀 속을
오직 말없이 나란히 걷기만 걷기만 하던
아아 진홍 장미였던가
그리고 너는 가고
무수한 종소리 울림하는육체 없는 낙화
속은
나만 남아 가노니
뉘가 눈이 소리 없이 내린다더뇨.
이것은 천마의 낙화다. 이 시에서 종소리의 쟁쟁 울림과 장미의 열정이 말하여져 있듯이 정운은 앞의 작품에서 청마가 준 시. 그리고 청마의 뜨거운 연심(戀心)을 담았던 것이다. 청마가 가고 한참 뒤, 정운은 청마가 준 시를 연상하였고 그 애정을 떠올리어 이렇게 읊은 것이다. 이처럼 정운은 늘 청마와 살고 있었다. 비록 생사가 갈리어져 있었긴 하지만 빚지지 않는 삶.
정운은 참으로 알뜰한 분이었다. 정운이 서울로 이사를 가던 날. 내가 얘일당에 들렀더니 어지간한 짐은 화물로 부쳤고 짐을 쌀 것이라고는 손에 들고 갈 정도만 남아 있었다. 나는 이삿짐을 싸는 데에는 노끈이 많이 필요할 것 같아 노끈을 준비하였었는데 그것이 필요 없게 되었다.
정운은 종이 한 장, 실 한 바람을 함부로 버리지 않는 성미다. 그렇기 때문에 노끈 같은 것은 언제나 잘 전돈되어 있는 것이다. 이 점을 이사 갈 때에 다시 확인한 것이다. 편지나 원고를 쓸 때도 틀린 곳이 있으면 다른 종이로 오료붙여서 거기다가 다시 글을 쓰는 알뜰한 사람이었다. 이사가는 바로 그날도 정운은 뜰에서 호미질을 하고 있었다. "선생님 이제 떠나실 참인데 애 이리하십니까?" "내가 가고나면 이 풀이 나무가 이대로 있을 것 같지가 않아 마지막으로 애정을주는 참이다." 아닌게 아니라 일전에 애일당을 찾은 적이 있었는데, 옛날의 아름답던 정원은 간 곳이 없어져 버려서 정운의 살뜰함이 더해져 있던 당시의 정원을 다시 보고 싶어지기도 하였다. 정운은 남에게 베푸는 일에는 인색하지 않았다.
전국 각처에 있는 문이들 중에 하룻밤을 애일당에서 묵고 간 분들이 많다. 그와 더불어 이야기하면 도심에서 얻었던 더러운 먼지가 일순에 사라지기도 하기 때문에 문인들이 자주 찾아 들었다. 정운은 남에게 베푸는 일은 잘하면서도 남에게 신세지는 일을 참으로 피하였다. 이 점은 드으 죽을을 통해 봐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저운은 평소 건강에 신경을 많이 쓰고 사는 편이었다. 그 분은 고혈합기가 있었다. 그렇다고 심각한 정도가 아닌 걸로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버선을 배다가 그 길로 바로 돌아가셨다. 그가 타계하고 난 뒤, 그 분의 합지 속에서는 미리 준비하여 두었던 유서와 장례비와 글고 당신의 죽음 알릴 명단이 들어 있었다. 죽음에 재치한 예비가 이렇게 철저한 분이었으니 그 삶을 영위하는데 대처한 일들은 얼마나 철저했겠는다. 글의 타계가 1976년 3월 6일이었으니까 청마보다 9년을 더 살다가 떠난 셈이다. 내년이면 정운이 타계한 지 심주년이 된다. 어떤 이들은 생전에 문학비 세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정운은 아직 문학비 하나 없으니 제자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움을 금하지 못하겠다.
시조집으로 『청저집』『석류』『언약』이 있고 수필집으로 『춘근집』『비둘기 내리는 뜨락』『머나먼 사념의 길목』이 있다. 시조든 수필이든 그의 문학은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삶을 보이는 데에 충실한 편이다. 또한 자연에서 귀한 의미를 얻어 자기화하려는 취미를 가지고 잇었다. "산을 바라보며 산처럼 목메이고, 바다를 굽어보면 바다처럼 슬프로, 하늘을 우러르면 하늘 같이 아득한 것. 이것은 마침내 안의 땅위의 생명이 다하는 그 날, 육신에서 놓여 난 나의 영혼이 하늘하늘 가장 푸르고 가장 높고 크고 영롱한 나의 별을 향아여 나래펴고 올라갈, 그 날에 반려할 꽃등인 것이며, 내 인생에 있어 호젓한 그림자인 것이다. 그것 때문에 나는 노래와 눈물을 지녀야 했고, 인생과 문학을 생각해야 했고, 그것 때문에 일찍 마음 속으로 팽개쳤던 고향도 조국도 때로 이렇게 곱게 슬플 수 있는 것이다" '나의 그리움'에서 뽑아본 글이다. 여기서 보았듯이 그의 시심은 자연은 통한 이냇ㅇ의 의미를 재음미 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의 문학은 얘써 기교를 부리려하지도 않고 조탁을 부리려 하지도 않는 덤덤한 말의 놓임이라 할 수 있다.
사흘 안 끓여도 솥이 하마 녹슬었나
보리 누름철은 해도 어이 이리긴고
감ㄲㅊ만 줍던 아이가 몰래 솥을 열어보네
'보리고개'라는 작품이다. 한자말이 한 마디도 없는 순 우리말로 된 작품이며 말을 억지로 꾸미지 않았고 또 억지고 말을 줄이거나 늘어뜨리지 않은 자연스러운 말놀림 속에다 시상(詩想)의 함축을 놓치는 경우가 많은 때에 정운 시조가 나타나서는 그러한 경우를 나무람하였다고 할 수 있다.
또 하나 그의 시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사물에 대한 시적 해석이 육신적이라는 데 있다.
우러르면 내 어머님 눈물 고이신 눈매
얼굴로 묻고 아 우주인던 가슴
그자락 학같이 여시고, 이 밤 너울너울 아지랑이
ㅇ; 질품은 '달무리'라는 작품이다. 달무리를 보고 모정(母情)의 한정없음을 비유하여 놓았다. 눈물 고이신 모사(母像)의 공간을 우주에 비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정운 시조에는 육신적인 내용이 많다. 여하튼 정이 많고 걱정이 많고 그리하여 남달이 눈물이 많은, 문학에 대해서는 언제나 진지하고 배움에 대해서는 노소를 가리지 않던 겸허한 정운. 그는 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언제까지나 살아 있을 것이다.
* 출처 : '부산문화' 1985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