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작품1 | 그물 |
대표작품2 | |
수상년도 | 2020년 |
수상횟수 | 11회 |
출생지 | |
서리(霜)
이순금
올봄에 지인으로부터 목화씨를 서너 알 받았다. 솜털에 싸여있는 흑갈색의 팥알 크기다. 두말할 것 없이 옥상의 화분에 고이 심었다. 봄볕에 그중 한 개가 넓적한 떡잎을 내밀더니 무성하게 쑥쑥 자랐다. 여름날 더위 속에서 희고 발그레한 꽃들을 피워내더니 연초록색 열매를 매달기 시작한다. 제법 통통해질 무렵 하나를 따서 입속에 넣고 깨물어 본다. 목화의 소박한 향기를 품은 담백한 즙이 입안에 고인다. 한 개를 더 따려다 손을 멈추고 송이 수를 세어본다.
가을의 초입에서 먼저 매달린 송이가 사방으로 입을 쩍쩍 벌리며 하얀 솜털을 부풀리기 시작한다.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보니 아픈 추억 한 자락이 재빨리 달려와 내 손을 잡는다. 그때는 과년한 딸이 있는 집들은 거의 밭에다 목화를 심었고, 가을이면 앞치마에 목화솜을 따느라 바쁘게 보냈다. 그해도 가을이 깊어지자 끝물 목화라도 더 따려고 공을 들였다. 목화 대를 뽑아 양지바른 언덕에 널어놓고 마른 봉오리에 솜이 하얗게 피어오르길 기다렸다.
열 명이 가꾼 곡식을 혼자서 거둔다는 말처럼, 농촌의 늦가을은 일이 넘쳐났다. 어른들은 들로 나가고 큰아이들은 학교로 가니 집에는 다섯 살 난 막내 조카와 큰올케만 남았다. 올케는 널어놓은 목화를 얼른 따오려고 언덕으로 갔다. 찬 서리를 맞고 볕에 부풀어 오른 솜을 거두고 있는데 집에서 놀던 아이가 자지러지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화급히 집으로 달려온 올케는 아이의 얼굴에 흐르는 피를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정신없이 들에 나간 오빠를 불러댔고, 아이를 자전거에 태워 병원으로 달렸다. 사태를 살펴본 안과의사는 빨리 큰 병원으로 가라고 재촉했다. 마당에서 심심하던 아이는 살이 부러진 우산을 폈다 오므렸다 하며 놀다가 눈을 다친 것이다.
끝내 어린 조카는 한쪽 눈의 시력을 잃고 말았다. 유난히 얼굴이 희고 예뻤던 사내아이에게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어서 가족들은 마음 아파했다. 큰오빠와 올케의 심정이야 어찌 말로 표현하겠는가. 나는 조카의 사고 전 사진을 볼 때마다 눈물이 흘렀다. 시누이를 위해 목화 따러 나가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하는 자책이 소용돌이치곤 했다. 그때 나라도 집에 있었으면, 누구라도 위험한 우산만 빼앗아 놓았더라면 하는 후회는 두고두고 나를 괴롭게 했다.
나와 스무 살 차이가 나는 조카는 천성이 밝고 명석하여 학교 공부는 늘 상위권을 유지했다. 중학교 삼 학년 때 특수 고교에 진학하고 싶어했지만 면접에서 탈락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린 마음이 얼마나 아팠으랴만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속으로 혼자 삭일 정도로 속이 깊었다.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을 마치고 전산 1급 자격을 얻었다. 취업하려 했지만 그 역시 쉽게 이루지 못했다. 늘 마지막 면접에서 걸렸다. 심성 곱고 예의 바른 청년을 면접관은 알아보질 못하고, 겉으로 보이는 장애만 채점하였다. 그렇게 힘든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조카는 직장을 얻었고, 따듯한 가슴을 지닌 아가씨를 느직이 만나게 되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내가 결혼을 하여 친정을 떠나와 시가의 맏며느리가 되니, 역할은 늘 분주히 돌아가고 아이를 둘 낳아 키우는 동안 친정 조카의 일은 차츰 잊혀 갔다. 친정 나들이도 꼭 필요할 때만 했고, 명절에도 제때 인사 가기가 어려웠다. 출가외인이란 말을 자주 하던 어머니는 그런 나를 되레 응원했다. 이제 뒤돌아 생각해 보면 인정도 수완도 없는 딸이요, 시누이였고 고모였다.
언제인가 큰오빠 생신에 집안들이 모두 모였을 때였다. 좀 늦게 도착한 그 조카가 커다란 박스를 들고 들어섰다. 그러더니 이내 박스를 열어 귀한 음식을 꺼내 어른들에게 일일이 대접을 했다. 그렇게 착하고 밝은 모습 옆에 같이 미소 짓는 질부와 어린 손녀의 모습이 따스하기만 했다.
세월은 많은 것들을 걸러주고 치유해 준다. 거의 반세기의 세월은 여러 다른 일을 만들기에 분주했다. 목화는 이렇게 피고 또 송이를 터트리는데 그때 함께 가슴을 조였던 부모님과 큰오빠는 이 세상을 떠나셨다.
이 계절이 몇 번을 돌고 돌아 또 왔는가, 어쩌면 계절은 둥글둥글 어김없이 순환하는데 사람만이 급하여 일직선으로 달리고 있는 것 아닐까. 목화송이에 부풀어 오른 솜을 당겨보니, 쏙 빠져나오질 않는다. 몇 번을 잡아 빼 손안에 모으니 포근함이 어머니 품 같다.
늦가을에 내리는 서리는 농작물들이 성장을 멈추니 갈무리를 준비하라는 자연의 신호다.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하늘은 일관성 있게 만물을 키운다. 그러나 봄날에 뜻하지 않게 간혹 서리가 내릴 경우, 어린싹은 깊은 상처를 입는다. 그래도 다시 볕을 주고 비를 뿌려 그 싹이 땅을 딛고 일어서 열매를 맺게 하니, 사람이 가을 하늘을 칭송하며 올려다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약력
2009년 『문학산책』 수필 등단. 2014년 『아동문예』 동화부문 당선
저서: 수필집 『그물』 외 공저 다수
한국문인협회, 한국수필가협회, 군포문인협회 회원
군포문학 지송문학회 회원.
심사평
본심에 오른 작품은 10 편이었다. 그 중 5 편이 다시 압축되었다. <덤> <미끼> <서리> <우화> <꽃병> 으로 모두 고른 문장력에 다양한 소재로 주제를 다루는 인식이 세련되었다.
수상작품 <서리>는 옥상 화분에 심었던 목화가 열매를 맺었는데 그에 딸려오는 안타까운 기억을 말하고 있다. 서리(霜)는 이 작품의 주제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이다. 자연의 섭리를 말하면서 형상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오래 전 서리 내린 어느 가을 올케는 목화를 거두러 잠깐 집을 비웠다. 하지만 혼자 놀던 조카가 우산살에 눈을 다쳐 한 쪽 눈을 실명하고 그 시고는 가족들에게 서리맞은 어린 싹처럼 내상을 입게 만든다. 그러나 자연은 늘 긍정의 땅에서 딛고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는 법이다. 스스로 치유의 능력을 얻어가는 시간의 힘도 위대하다.
<덤>은 50년 넘는 서울살이에서 맺었던 오래된 인연들이 문득 덤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10년 넘도록 다녔던 병원의 의사, 동네 단골 슈퍼, 은행 등 얼마나 든든했던 이웃들이었던가. 하나씩 잃어가면서 정신의 허기를 깨닫고 위로를 주고받았던 마을살이에서의 행복을 돌아보고 있다. 잔잔한 서술로 수채화를 보는듯하다.
<미끼>는 서점 하나 없던 섬에서 책을 마음껏 읽고 싶은 아가씨의 결혼과 그 이후 여정 이야기다. 매달 책과 커피를 사들고 나타나는 남자와 평생 인연을 맺게 더ㅣ는데 ‘책’은 미끼였다고 말한다. 좋아보여서 물었던 미끼가 때로 삶을 힘들게 하는 요인으로 둔갑하지만 ‘산다는 것은 서로 속아주는 일’이라고 하는 작가의 마무리가 돋보인다. 발랄함이 스며있는 글에서 작가의 긍정심을 엿보게 한다.
<우화羽化> 는 텃밭에서 발견하고 내쳤던 애벌레를 자신의 신혼시절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쳤던 모습으로 뒤 돌아보는 글이다. 지병을 가진 남편과 아기를 위해 주변사람들의 반대에도 빚을 내 집을 장만하고 생의 날개를 얻은 것이다. 인간승리의 전형이다. 스토리가 뛰어난데 상황설명이 길고 굳이 대화체를 넣은 점이 안타까웠다.
<꽂병>은 노년의 삶이 요양원에서 이어지는 것을 금가고 깨지기 직전의 낡은 꽃병으로 은유하고 있다. 시적 감성으로 깊이 사유하는 흔적을 보이는 글이다. 다만 반복되는 비슷한 내용이 생동감을 가리게 하여 아쉬웠는데 오랜 시간 글을 써온 작가의 내공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들은 어디나 비슷하다. 또한 그 정경을 풀어내는 작가의 정서도 비슷하기 때문에 늘 ‘낯설게 하기’란 콤플렉스에 넘어진 채 헤맬 수밖에 없다. 평면적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열하기보다 구성을 새롭게 하고 주제를 어떻게 어떤 색깔로 잡느냐에 따라 작품은 크게 달라진다고 본다. 5 분의 작품에 모험심과 호기심을 보탠다면 화룡점정이라 하겠다.
올해의 작가상 수상자와 후보 작가들께 축하인사
드립니다.
심사위원 권남희(글) 최원현 김선화
첫댓글 수상작은 '서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