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06월 서울구치소 최고수 상담 및 교리 진행 ★
★지나친 정상인이 되지 말라 ★
“붓다는 단순히 성자가 아니다. ”
▷ 일 시 : 불기2568 (2024)년6월17일 (월) 오후1:00~4:00
▷ 장 소 : 서울구치소 소법당
지도법사: 보광-조철주
동 참: 여진향
2024년6월17일(월) 서울구치소
최고수 정기 자매 상담 및 교리를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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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귀의와
한글 반야심경 봉독을 하고,
상담 후 생활법문 및 교리를 전하였으며,
사홍서원을 끝으로 회향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 석가모니불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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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내용: < 라즈니쉬 오쇼의 반야심경 The Heart Sutra> 216~221p
▶첫 번째 질문
에고가 형성되기 전에 아이들이 갖는 순수함과 붓다의 순수성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유사성이 있는 동시에 다른 점이 있다.
▶본질적으로 어린아이는 붓다다.
그러나 그의 불성, 그의 순수함(incence)은 자연적인 것이지 획득한 것이 아니다.
그의 순수함은 깨우침에 의해 체현된 것이 아니라 일종의 무지이다.
그의 순수함은 무의식적이다.
그는 자신의 순수함을 전혀 인식하지 못 할 뿐더러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는다.
분명히 순수함이 있긴 하지만 그는 이 순수함을 자각하지 못한다.
그는 순수함을 잃어버릴 것이다. 당연히 그렇게 될 것이다.
얼마 안 가서 파라다이스가 사라질 것이다.
지금 어린아이는 그런 과정을 거치고 있다.
모든 어린아이는 세상 속에서 타락하고 불순해지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어린아이의 순수함은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기 전의 순수함이다.
아담이 지식의 열매를 따 먹고 의식적으로 되기 전에 지녔던 순수함이다. 217
이것은 동물적인 순수함이다. 소나 개 등 동물의 눈을 들여다보라.
거기엔 순수함이 있다.
붓다의 눈과 똑같은 순수함이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 이것은 실로 엄청난 차이점이다.
붓다는 집으로 돌아왔지만 동물들은 아직 집을 떠나지도 않았다.
어린아이는 아직 에덴동산에 있다. 그는 여전히 낙원에 살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이 낙원을 잃어버릴 것이다. 얻기 위해서는 잃어야 하기 때문이다.
붓다는 집으로 돌아온 자다. 원(圓)이 완성되었다.
그는 집을 떠나 길을 잃고 헤매었다.
그는 어둠과 죄악의 세계로 들어갔다. 불행과 지옥을 맛보았다.
이런 경험들은 성장의 일부이다. 이런 경험이 없으면 중심 기등을 가질 수 없다.
이것은 척추가 없는 것과 같다. 이런 경험이 없으면 그대의 순수함은 매우 부서지기 쉽다. 이 순수함은 바람에 맞서 지탱되지 못한다. 폭풍을 견디어 내지 못한다.
이런 순수함은 아주 허약하기 때문에 살아남기 힘들다.
삶이라는 불길 속을 통과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수많은 실수와 실패를 거듭하면서 다시 일어서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런 경험들이 그대를 성장시켜 어른으로 만든다.
붓다의 순수함은 완전히 어른이 된 사람, 최고로 성숙한 사람의 순수함이다.
유아성(childhood)이 무의식적 본성이라면
불성 (buddhahood불교의 깨달음의 경지, 보리(菩提).)은 의식적으로 개화된 본성이다.
유아성은 중심을 모르는 원주(圓周)이다.
붓다 또한 원주(圓周)지만 중심에 뿌리를 내린 원주(圓周)이다.
유아성은 무의식적인 무명(無名, anonymity) 이지만 불성은 의식적인 무명(無名)이다.
둘다 이름과 형상이 없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형상을 모른다. 형상의 불행함을 모른다.
이것은 감옥에 갇혀보지 못한 사람이 자유를 모르는 것과 같다.
그대가 몇 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다고 하자. 그러다가 석방되는 날,
그대는 벅찬 감격을 느끼면서 감옥 문을 나온다.
그리고 이미 밖에서 218
자유롭게 활보하는 사람들이 자유를 전혀 즐기지 못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랄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자유롭다는 사실을 모른다.
어떻게 알겠는가? 그들은 감옥에 갇힌 적이 없다.
자유와 대조되는 상황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자유를 인식할 수 없다.
칠판과 같이 배경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하얀색 벽에 하얀색 글씨를 써 놓은 것과 같다.
아무도 그 글씨를 읽을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글씨를 쓴 장본인조차 읽을 수 없을 것이다.
물라나스루딘(Mulla nasruddin : 원래는 수퍼 신비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오쇼의 강의 중에는 조크(Joke)의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한다) 에 얽힌 유명한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글씨를 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편지나 문서를 써야 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그를 찾아가곤 했다.
어느 날, 한 남자가 나스루딘을 찾아와 편지를 써 달라고 부탁했다.
나스루딘은 그가 부르는 대로 받아 적었다. 그것은 장문의 편지였다.
편지를 다 쓰고 나자 남자가 말했다.
"자, 이제 그 편지를 읽어 주시겠습니까? 잊어버린 것 없이 제대로 썼는지,
혹시 당신이 잘못 받아 적은 것은 없는지 확인을 해야겠습니다."
나스루딘이 말했다.
"그건 어려운 일이오. 나는 쓸 줄은 알지만 읽을 줄은 모르오.
게다가 이 편지는 내게 보내는 것도 아니잖소?
남의 편지를 읽는 것은 불법이오. 남자는 나스루딘의 말에 동의했다.
나스루딘의 말은 절대적으로 옳았다.
그래서 남자가 말했다.
"당신 말이 맞습니다. 이 편지는 당신에게 보내는 게 아니지요."
하얀색 벽에 흰색 분필로 글씨를 쓴다면 그대 자신도 읽을 수 없을 것이다. 219
그러나 검은색 칠판에 흰색 글씨를 쓰면 분명하게 드러나 보인다.
대조가 필요하다. 그런데 어린아이는 대조되는 배경이 없다.
그는 하얀색 벽에 쓴 흰색 글씨와 같다.
그리고 붓다는 검은색 칠판에 쓴 흰색 글씨이다.
낮에도 하늘에는 별들이 떠 있다.
별들은 아무 데로도 가지 않는다.
그렇게 빨리 사라지지 않는다. 별들은 하루 종일 그 자리에 있다.
하지만
밤이 되어야 비로소 눈에 띈다. 어둠이 배경을 이루기 때문이다.
석양이 지면서 별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내려갈수록 더 많은 별들이 떠오른다.
별들은 하루종일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어둠이 없었기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어린아이에게는 순수함이 있지만 배경이 없다.
그래서 그 순수함을 보거나 읽을 수 없다.
붓다는 인생을 살면서 필요한 모든 일을 해 보았다.
선한 일, 악한 일 등 이런저런 일들을 다 해 보았다.
어떤 때는 죄인이었고 어떤 때는 성자였다.
붓다는 단순히 성자가 아니다.
이것을 명심하라.
그는 죄인인 적도 있고 성자인 적도 있다.
불성은 둘 다를 초월한다.
이제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이런 까닭에 어제 강의한 경문에서 붓다는 이렇게 말했다.
"나즈하남, 나 프라프티르 나 아프리프터 (Na jhanam, na praptir na-apraptih)
- 고통도 없고, 고통의 원인도 없으며,
고통의 멈춤도 없고, 고통을 없애는 길도 없다.
아무런 인식도 없으며,
얻음도 없고, 얻지 못함도 없다."
누군가 붓다에게 '당신은 무엇을 얻었습니까?' 하고 묻자 붓다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다. 다만 항상 있던 것을 발견했을 뿐이다. 219
나는 단지 집으로 돌아왔을 뿐이다.
나는 항상 내 것이었고 나와 함께 있던 것을 되찾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얻은 것은 없다. 다만 그것을 인식했을 뿐이다.
이것은 발견이 아니라 재 발견이다." 220
붓다가 되었을 때 그대는 알게 될 것이다.
붓다가 됨으로써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돌연 그대는 '이것이 나의 본성이다' 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 본성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길을 잃고 헤매야 한다.
혼란스러운 세상 속으로 깊이 들어 가야 한다. 진흙탕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오로지 그대의 절대적인 깨끗함과 순수성을 알기 위해서.
어제 나는 일곱 개의 문에 대해 말했다.
에고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에고라는 환상이 어떻게 강화되는지 말한 바 있다.
그에 대해 몇 가지 더f 깊이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에고의 일곱 개의 문은 서로 분명하게 나누어져 있지 않다.
그 문들은 서로 겹쳐진다.
일곱 개의 문 모두를 통해 에고를 얻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완벽한 에고를 얻은 것이다.
오직 완벽한 에고만이 사라질 능력을 갖는다.
불완전한 에고는 그럴 능력이 없다. 이것은 과일이 무르익어야 땅에 떨어지는 것과 같다.
익지 않은 과일은 나무에 매달려 있다. 만일 그대가 여전히 에고에 매달려 있다면 명심하라. 그대는 아직 무르익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매달려 있는 것이다.
무르익은 과일은 땅에 떨어져 사라진다. 에고의 경우도 이와 같다.
자, 이 역설을 보라. 진화된 에고만이 귀의(sumender)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에고이스트(egoist)는 귀의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관찰한 바로는 그렇지 않다. 유사 이래 붓다들이 관찰한 바도 마찬가지다.
오직 완벽한 에고이스트만이 귀의할 수 있다.
에고의 불행을 아는 자만이 귀의할 힘을 갖는다.
그는 에고의 모든 것을 알았으며, 엄청난 절망을 맛보았다.
그는 상당한 고통을 겪었으며 이제 에고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고 있다 221.
그래서 그는 에고를 항복시키고 귀의할 수 있는 구실을 찾는다.
이 구실은 신(神)이 될 수도 있고 스승이 될 수도 있다.
어쨌든
그는 귀의하기를 원한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너무 무거운 짐을 지고 에고를 발전시키지 않은 사람들 역시 귀의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귀의 완벽하고 전체적이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내면 깊은 곳에는 여전히 집착과 기대가 살아있다.
'에고 안에 무엇인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귀의하겠는가?' 하는
희망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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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출처: 오쇼라즈니쉬 강의(손민규 옮김 ) 『반야심경 』 초판 2쇄; 서울:태일출판사,2001